1. 명칭은 신학연구원, 실제로는 목회자
내가 새길공동체에서 일한 기간은 2005년 8월부터 2007년 4월까지 21개월이었다. 2005년에는 일요일에만 출근하여 새길교회의 예배 진행을 도왔다. 주중에는 출근하지 않았지만 구역예배가 있을 때, 또는 병원에 입원하거나 상을 당한 교우들이 있을 때는 현지로 직접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해주었다. 그러니까 명칭은 신학연구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시간제 목회자로 일한 것이다.
2006년 1월부터 사무국장을 겸해 주중에도 출근하였다. 이제 내 직함은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신학연구원 겸 사무국장’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주요 업무는 여전히 ‘연구’나 ‘사무’가 아니라 ‘목회’였다. 교회의 필요와, 목회자로 일하다 쫓겨난 내 처지에 대한 배려의 결과였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새길 교우들은 내가 목회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지만, 새길교회 교우 중에는 정말로 순박한, 전형적인 한국 교회 교인들이 꽤 있었다. 목사의 기도는 평신도의 기도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계신 분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뿐 아니라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지만 내가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을 다시 해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목회에 대한 회의, 기도에 대한 거부감, 이런 것들에 대해 내가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했다면 새길 교우들과 몇 개월도 함께 지내기 어렵지 않았을까? 하지만 처음 몇 달 동안은 교우들과 큰 갈등 없이 지냈다. 설교에 대한 반응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내 고민을 교우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 채 그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자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단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교우들을 속이고 있다!
2. 위기를 자초하다
나는 교우들에게 직접 하기 어려운 속내를 글로 써서 인터넷에 올렸다. 다음은 그때 ‘예수님, 그만 은퇴하십시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주십시오.)’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의 일부다. (이글의 전문은 2007년 도서출판 삼인에서 발간된 <당신들의 예수>에 수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은 언제나 현재적인 것이었다구요? 천국도, 구원도, 모두 현재적인 것이었다구요? 미래로 도망간 적이 없다구요?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미래적 구원론은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라구요? 천국도 지옥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선택하는 거라구요?
에이~!! 아무리 주님이시라지만 2천년 동안 고백되어온 정통교리를 무시하시기는 힘들 텐데요. 사도신경에도 분명히 나오잖아요.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에서(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왜 말이 없으시죠? 부정을 못하시는군요. 그 고백이 맞다구요? 정말로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구요? 그럼 죽었던 시체가 다시 일어난 건가요? 아니라구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듯 주님의 삶과 가르침이 죽음을 넘어 제자들의 가슴에 살아 펄펄 끓는 생명수가 되어 세상을 뒤집은 것이라구요? 그 생명 사건을 못된 무리들이 박제된 교리로 만들었다구요?
(중략)
지금 저들 가운데 부활한 예수는, 2천 년 전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신 또한 몸소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갈등을 심고 기독교 조직을 위해 사람을 가두고 죽이는 괴물로 부활한 예수이니 주님께서 죽는 길 밖에 없네요. 주님께서 죽지 않으면 교리로 부활한 허깨비 예수도 죽지 않으니 주님, 죄송하지만 죽어주십시오. 온갖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그 무자비한 괴물과 함께 차라리 죽어주십시오.
3. 교회지도자들의 한계일까? 나의 편견일까?
당시 내 글을 읽은 지인들 중에는 글에 분노가 묻어난다며 자제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몹시 거칠기는 하지만 그때 나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했다. 아니 자제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 분노가 글을 쓰는 에너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팎에서 ‘너무 지나치다’는 말이 들려왔다. 새길 교우들 중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내 원래 성격은 겁이 많고 우유부단하다. 누구와도 싸우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배타적 교리기독교의 탄생과 인류사회에 대한 오랜 이념적 지배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는 생각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갖고 있다. 기독교인 모두와 등을 진다하더라도 물러서기 싫었다.
그때 내가 분노를 참지 못한 이유가 한국 주류 개신교회들의 독선과 배타적 행태 때문만은 아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깨어있다는 교회지도자들 가운데 교회의 내부문제, 특히 교리문제는 건드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언급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돌려서 말하기에 순진한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진보 교회 지도자들과 거리를 둔, 또한 지금도 두고 있는 이유다.
한편으론 겁이 나기도 했다. 이러다 내가 폐인이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도 각오하기로 했다. 내 분노와 발악이 한국 교회가 배타교리에서 벗어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오늘 죽어도 좋다! 2006년 봄부터 2007년 봄 새길교회를 떠나기까지 약 1년간 한국 개신교회에 대한 내 비판은 더욱 거세졌고 나는 기독교와 완전히 등을 지게 되었다.
내가 열린 기독교인들과도 화합하지 못하고 분노를 다스리는데 실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얘기를 하자면 다시 안티기독교인들에 대해 조금 언급해야 한다. 안티기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깊은 종교적 영성을 가진 사람도, 진정한 휴머니스트라 부를만한 사람도 있다.
그들이 진보를 자처하는 교계 지도자들에게 했던 애절한 호소는 지금도 내 가슴을 찌른다. “동네 깨끗이 하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악취 나는 너희 집 앞마당이나 청소해 달라.”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앞으로도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독교에 관한 진실’을 증언하는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4.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새길공동체에서 일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한 출판사에서 청소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종교개론서를 써달라고 요청해왔다. 종교의 각 분야에 대해 깊은 통찰을 담아 쓸 능력은 없지만 청소년을 위한 개론서라면 내가 지난 20년 동안 해 오던 일이 아닌가!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자료를 준비하면서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종교교과서를 집필한 경험도 있다. 당시 발행된 개신교계 종교교과서 두 종 가운데 하나는 내가 편집장을 맡아 출간된 책이었다. 종교교과서로 채택되더라도 즉시 사용될 수 있는 편제로 글을 썼다.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라는 제목(‘청소년을 위한 종교 이야기’라는 부제도 달렸다)으로 인물과사상사에서 출간된 책은 2006년 가을 문화관광부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종교교과서로 사용될 수는 없었다. 종단 배경이 없이 종교과목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르치는 학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논술학원에서 교재로 채택하여 활용하는 곳이 더러 있을 뿐이다.
교회 일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면서 학교로 돌아가 내가 직접 쓴 책으로 종교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아울러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개신교 계통의 학교를 제외한 전국의 500여 중고등학교 교장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교로 돌아가 종교과목을 가르치고 싶다, 논술지도도 할 수 있다, 기회를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서너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당신이 겪은 사건을 잘 알고 있으며 동의하고 지지한다, 하지만 지금은 자리가 없다”는 내용의 답변들이 돌아왔다. 답신을 보내온 교장 중에는 대학 동기도 한 명 있었다. 대학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찾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박사학위도 없고 인맥도 짧다. 나이도 오십이 넘었다. 채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괜히 지인들에게 부담주지 말자! 대학도 깨끗이 포기했다.
5. 새길교회를 떠나다
2007년 봄이었다. 새길교회 교우들도 공동체 지도자들도 여전히 잘 대해 주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해야 하는 설교가 너무 힘들었다. 병문안이나 심방을 가서 개인적으로는 결코 하지 않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교우들에게 폐를 덜 끼치려면, 아니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빨리 교회를 떠나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교우 중 한 분이 상담을 요청해왔다. 암에 걸린 형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이 함께 가서 위로하고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그분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신 교회에 사직서를 냈다.
떠나는 이유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었다. 막무가내로 사직하겠다는 내 고집에 대해 교회는 잘 납득하지 못했지만 결국 받아주었다. 큰 결례였음에도 너그럽게 받아주신 새길 교우들과 교회 지도자들께 이제라도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 돌아보면 새길공동체를 일찍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매우 크다. 그곳의 열린 교우들과 연대하여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이어갔다면 지금쯤 꽤 의미 있는 결실을 맺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도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 이상 버티었다가는 내 자신이 비참한 꼴로 무너졌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에 극도의 거부감을 갖게 된 이유는 지난 호에 충분히 설명했지만 조금 더 말하고 싶다. 하느님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과도 자유롭게 대화하고 노래한 프란치스코 성인을 나 역시 존경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영성도 정서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신을 인격자로 설정하고 대화하는 기도행위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신교 목회자들 중에는 기도자의 청원에 따라 신이 자연의 흐름에 개입하거나 바꿀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신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선한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도자의 이기적인 청원에 의해 그런 일을 행한다면 나는 그 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며 내가 반드시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맞는 옷을 입고 싶을 뿐이다.
* 이 글은 <공동선> 2015년 09+10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