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연재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쫓겨난 목사의 10년>이라는 전체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2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4년에 일어난 대광고 사건부터 시작하여 지금 쓰는 글이 2010년의 시점을 지나고 있으므로 시간의 양으로 따지자면 꼭 절반이 지났다.
하여 흐른 세월에 비례하여 글을 쓴다면 지금까지 쓴 분량만큼 앞으로 더 써야하겠지만 이건 단지 시간의 양으로 따질 문제는 아니다. 앞의 6년에 비해 뒤의 6년은 독자들과 나눌만한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 예수동아리교회 문을 닫다
“2009년 봄부터 2010년 봄까지 약 1년여 기간은 대광고를 떠난 이후 모처럼 내 인생에 여유와 행복이 찾아든 시기였다. 예수동아리교회는 순항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지난 호 첫머리에서 쓴 글이다. 그런데 2010년 봄이 지나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벌어진 일은 내 나머지 인생에 대한 의욕을 거의 잃게 만들었다.
내가 예수동아리교회를 떠난 날은 2010년 9월 14일이다. 그해가 시작되면서부터 교우들 사이에 조금씩 생겨난 틈은 여름을 지나면서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교회를 떠난 분들과 남아있는 분들 사이에 격한 말들이 오갔다. 내용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분들에게 결례가 될 수 있으니까.
어쨌든 교회는 급격히 붕괴되고 있었다. 아, 내 꿈이 이렇게 부서지는구나! 슬프고 안타깝고 서러웠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독교배타교리문제에 대한 내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확고하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나는 늘 우유부단한 편이다. 갈등을 수습하기는커녕 이리저리 휘둘리며 이런 일에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지 처절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얼마간 고통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억지로 붙들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도 나도 더 망가질 뿐이다! 다 잃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기 전에 정리하자! 나는 교우들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예수동아리교회를 떠났다.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잇따랐다. 사실이었으므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떠나자 교회의 갈등도 얼마 안가 잦아들었다. 갈등의 씨앗이 결국 나한테 있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이후로 나는 사람 만나는 일을 가급적 피했다. 사회활동을 거의 끊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래도 예수동아리교회를 떠나기 전까지는 분노를 에너지로 삼아 글을 쓰며 열심히 살았고 2005~2008년까지 4년 동안 다섯 권의 책을 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단 한 권의 책을 겨우 냈을 뿐이다. 늘 달고 살았던 비사회적인 성격, 약간의 우울증, 대인기피증도 교회를 떠난 후부터 부쩍 심해졌다.
2.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다
예수동아리교회를 떠난 후의 사회활동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수단에 한정했다. 가끔 강연을 나갔고 책을 내기 위해 출판사를 찾은 것 빼고는 집에 틀어박혀 기독교에 관한 진실을 알리는 글을 쓰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건 내가 죽을 때까지 하겠다고 사회와 약속한 일이다. 하지만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
대리기사 일은 교회를 떠나고 한 달 쯤 지나 그만두었다. 그 한 달 동안 두 번 접촉사고를 냈다. 그 해에 있었던 접촉사고를 합하면 나는 모두 세 번의 접촉사고를 낸 후에 결국 일을 접고 말았다. 다행히 배상문제는 가입해둔 대리기사보험으로 해결되었다. 교회를 떠난 상심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 년 넘게 그 일을 하면서 야맹증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대리기사 일은 한밤중에 어두운 길거리에서 작은 PDA(스마트폰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때로는 한 두 시간씩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눈을 혹사시키면서 빛이 없는 곳에서는 차를 움직이는 것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시력회복을 위해 백내장수술을 했지만 밤 운전이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약 일 년이 지난 2011년 10월 말경, 다마스라는 경화물차를 사서 퀵서비스 일을 시작했다. 미리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대리운전처럼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는 완전한 프리랜서 일이면서도 대체로 수익성은 대리운전보다 나은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다마스는 0.5톤의 경화물차라 아주 크고 무거운 짐은 없었지만 일일이 짐을 손으로 올리고 내려야했고 때로 무거운 짐을 혼자 옮겨야 하는 일이라 만만치는 않았다. 게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운전을 하기 힘들어 2013년 1월에 일을 접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글쓰기와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2014년 11월에 나는 다마스퀵서비스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보다 더 수익을 내지 못했다. 경제 불황으로 경쟁이 전보다 훨씬 심해진 느낌이었다. 평일에는 거의 빠짐없이 일했고 주말에도 가끔 일을 했지만 한 달 수익 백만원을 넘긴 달은 없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쳐다보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고객의 주문을 받는 일이었다) 도시락만 먹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2015년 7월, 다마스퀵서비스 일을 다시 접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보험회사 사무실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설계사들이 모두 일을 마치는 저녁 10시 이후에 사무실에 가서 1시간 정도 청소하고 보안을 걸어놓은 상태에서 퇴근한 후, 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서 오전 7시 경에 보안을 해제하고 사무실에 이상이 없는지 둘러보고 오는 일이다. 150명이 동시에 근무할 수 있는 꽤 넓은 사무실인데, 아내는 쓸고 닦는 일을, 나는 쓰레기를 분리하고 치우는 일을 한다.
거친 일만 골라서 하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 분도 있었다. 내가 일을 선택하는 기준은 언제나 ‘글쓰기에 방해받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50대 후반의 중년 남자가 글쓰기를 방해받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친 일 외에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시간 대비 수익성도 괜찮고 내 체력으로 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대리운전 뿐이었던 것 같다.
내가 줄곧 돈벌이에 변변치 못한 능력을 보이면서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우선 아이들이 다 컸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나이로 서른둘, 스물아홉이 된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2009년 봄에 시작된 후원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연말 아내와 의논하여 후원자를 만났다. 후원금을 받은 지 3년 반이 지나 처음으로 직접 대면한 것이다. 후원을 받을 명분이 없어졌으니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어떤 일을 해 달라고 후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류상태라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니 계속 받아달라고 했다.
나보다 더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제는 그분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의 부담이 늘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후원을 중지해달라는 요청을 다시 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분이 되찾아준 아내의 웃음을 유지시켜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3. <신의 눈물>을 출간하다
2013년 5월, 마침내 내 여섯 번째 단행본 <신의 눈물>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09년에 내기로 계획했던 것인데 계속 미루어졌다. 그 해에는 예수동아리교회에 푹 빠져 글을 쓰지 못했지만 교회를 그만둔 후에도 나는 좀처럼 글을 이어가지 못했다.
<신의 눈물>은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려고 쓴 책이다. 종교 갈등이 지속될 경우 한국에서도 종교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도 하고 싶었고 기독교인으로서 이웃종교에 사과하는 의미도 담고 싶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인들의 무례한 언행을 자비심으로 인내해주신 불자님들에게 깊은 사죄와 함께 존경심을 담아 헌정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책은 천도교 계통의 출판사인 <모시는 사람들>에서 내주었다. 하지만 책이 잘 팔리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나는 현재 이 책 외에도 두 권의 책을 더 낼 수 있는 원고를 탈고해서 갖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출판사에 내가 먼저 찾아가 출간을 부탁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 글방에 모두 올려놓아 누구든지 자유롭게 들어와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책을 출간하기까지 출판사와 줄다리기하는 일도 피곤하고, 책이 안 팔리면 미안하기도 하거니와, 한번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다음에는 내 글이라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종이책으로 만드는 것보다 (베스트셀러가 못될 바에는) 그냥 내 인터넷 글방에 올려놓는 게 소통을 위해서는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 내 인생, 이제 부끄럽지는 않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유쾌한 경험을 하나 나누고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러니까 2015년 9월 초순이었던 것 같다. 캐나다 한인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 한 분이 메신저로 연락을 해왔다. 신앙강좌 강사로 모시고 싶다는 것이다. 이 양반이 나를 제대로 알고나 초청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망설임 끝에 수락한 이유는,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내 손에 강사비를 쥐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약속된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의 부담은 더욱 커져갔다. 섣불리 가겠다고 답한 것이 후회됐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쏟아놓으면 그분들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괜히 서로 얼굴만 붉히고 돌아오는 건 아닐까?
그런데 막상 캐나다에 도착해 만나보니 두 교회 목사는 생각보다 더 화통한 분들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다 해도 좋다고 했다. 4일간 이어진 <신앙토크콘서트>에서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다 토해냈다. 나중에 유투브로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영상 속의 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감정 조절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집회를 모두 마치고 나서 교회에 대한 거부감과 분노가 많이 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캐나다 임마누엘한인연합교회와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님들, 그리고 정성민 정해빈 두 분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그동안 변변찮은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 인사와 함께 지금의 내 심정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다.
대광을 떠나기 전까지, 내 인생에 대해 떳떳하지 못했다.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나는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다. 적어도 대광을 떠나기 전 십년 동안은 사람들 눈치 보느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먹고 살 것이 걱정되어 마음으로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학교와 교회조직이 원하는 일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하느님 앞에 크게 부끄럽지는 않다. 감히 윤동주 시인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크게 부끄럽지는 않다”라고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 있을 때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학교에 있을 때보다는 지금이 더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해 우정으로, 때로는 동정심으로, 같이 걱정해주시던 지인들께서는 이제 아무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 이 글은 <공동선> 2016년 07+0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