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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2014년 어느 날이었다. 격월간지 <공동선>에서 편집 일을 보는 지인이 “목사님이 지내온 10년 세월을 글로 써보시지 않겠는가?”고 제안을 해왔다. 망설임 끝에 수락했다. 15회에 걸쳐 글을 썼고 그 글들은 모두 이 방에 올려져있다.
연재는 끝났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서 이 연재물의 맨 앞에 채워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 못지않게 형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질 것 같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 글은 나보다 먼저 기독교와 인연을 맺었고 지금까지 나에게 아쉬움과 아픔으로 또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남아있는 ‘형과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이 글은 지인들보다 내 가족과 먼저 나누고 싶다. 특히 조카아이들, 그러니까 형의 두 딸에게 남겨주고 싶은 기록이기도 하다. 너무 어린 시절에 몰아닥친 거친 세파에 만신창이가 된 한 가여운 소년의 이야기이고, 그로인해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50년 인생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11년 전인 지난 2005년 가을에 생을 마감한 나의 형 류상우님을 추모하는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 써야 할 지 망설여진다. 인생의 실패자가 되어 알콜중독자로 생을 마감한 형의 명예를 일부나마 회복시켜주고 싶어 쓴 글이 자칫 부모님의 명예를 실추시킬 뿐 아니라 우리 가문의 추태를 드러내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있는 그대로 쓰자’였다. 이런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사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형과 나
나는 1957년 2월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서울 토박이는 아니다. 아버지는 전라남도 고흥이, 어머니는 인천이 고향이었으니까. 두 분 모두 기독교와의 인연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갓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르신 할아버지께서 전통 한복 차림으로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는 아이 셋을 데리고 큰 절을 올리셨다. 절을 받으신 할아버지께서 험험 헛기침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읊기도 하시고 훈시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전형적인 유교가문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한국전쟁 중에 만나 결혼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공군 부사관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부대에서 전화 교환수로 일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제대한 아버지는 한동안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셨다. 생활은 어머니께서 편물(기계로 털옷을 짜는 일)을 배워 해결하셨지만 넉넉하지는 않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근처에 당시 박정희 장군 생가가 있던 신당동이었지만 그때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 삶의 첫 기억은 삼선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삼선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몇 번 전학을 했지만 중학교도 삼선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니까 나는 주로 서울 북동쪽 지역에 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대광고등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형은 나보다 세 살 위였다. 세 살 아래인 동생도 있다. 삼형제 중의 가운데인 나는 솔직히 부모님의 애틋한 정과 사랑을 받은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을 때면 아버지는 종종 동생을 무릎에 앉혀놓고 식사를 하셨다. 된장찌개에서 두부조각을 꺼내 동생 밥 위에 올려주고는 젓가락으로 네 조각을 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왜 나에게는 그렇게 안 해 주실까 하는 생각을 했을 법한데 그런 기억은 없다. 몹시 부럽기는 했지만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형은 수재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다 떼었다. 형과 내가 함께 국민학교에 다닐 때 우리 방 한 쪽 벽에는 형이 타온 상장이 가득 붙어있었다. 대부분 학교장 이름으로 수여된 상장이었지만 ‘전국어린이글짓기대회’에서 수상한 상장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형이 그다지 부럽지는 않았다. 열등감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공부라는 재미없는 놀이에 몰두하는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은 집에서도 늘 책상에 붙어있었지만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총싸움도 하고 딱지치기며 구슬치기 등을 하면서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고 삼선동 뿐 아니라 경동고등학교 뒷산을 넘어 이웃동네까지 신나게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부모님도 형에게 쏟았던 관심과는 달리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셨다.
형이 그저 나와 같은 꼬마 아이가 아니라 내 형이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처음 느꼈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리 가족이 사는 방 옆에 콩과자를 만들어 파는 분들이 살고 계셨는데 방과 방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 그 집에 여러 가정이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아무도 없는 방 이쪽 구석과 저쪽 구석에 앉아 어린 형과 내가 징징거리며 울고 있었다. 한참 동안 서로 마주보며 울고 있는데 갑자기 쪽문으로 아주머니인지 아저씨인지 들어와서는 형과 내 손에 콩과자를 한 웅큼씩 쥐어주고 가셨다. 우리는 말없이 과자를 먹었다. 내가 먼저 과자를 다 먹고 다시 울자 형이 내게로 오더니 몇 알 남지 않은 과자를 내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기가 먹는 걸 나에게 주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전까지 형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열심히 대들고 싸운 기억 밖에 없다. 내 주변에 내가 맞설 수 있는 어린 아이라고는 형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에게 형이 있고 형은 내 맞수가 아니라 날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인식했던 것이.
내 기억으로 형은 늘 주변의 칭찬을 듣고 자랐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예의바르고... 무엇보다 형은 글을 잘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스스로 문학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누나들이 나를 보고 말했다. “쟤가 류상우 동생이래!” 누나들이 부러움 담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가슴이 형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채워졌었다.
형과는 달리 나는 어른들에게 좀 모자라는 아이로 보였던 것 같다. 개구쟁이고 산만했던 나는 여기저기 다치기도 잘하고 자주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국민학교 입학식 때 바로 앞에 서 있는 아이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부잣집 아들로 보이는 아이의 등에 색연필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얼굴이 하얗고 깨끗하게 생긴 아이는 자주 돌아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그림을 그리는데 아이 어머니와 선생님이 와서 크게 야단을 치셨다. 하지만 나는 왜 야단을 맞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도 야단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엄마가 좋으냐, 아버지가 좋으냐?”고 묻는 어른들에게 언제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좋아요!” 어머니가 옆에 계실 때도 내 대답은 똑같았다.
어린 내가 무척 궁금해 한 것이 있었다. 얼굴이며 손이고 발에 모두 피를 흘린 적이 있어 내 몸 곳곳에 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혀에도 피가 있는지 없는지 몹시 궁금했다. 급기야 아버지께서 쓰시다 버린 면도칼로 혀를 긋고 말았다. 피가 났다. 아프다는 생각보다 혀에도 피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어, 혀에도 피가 있다, 혀에도 피가 있어!” 그 일로 어른들이 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나중에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큰고모님께서 깜짝 놀라 말씀하셨다. “상태가 어떻게 대학을 가?”
어린 시절에 한 짓들이 이런 것이었으니 부모님의 관심이 똑똑하고 착한 형과 귀염둥이 막내에게 향한 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국민학교에 막 들어가 첫 시험을 치렀을 때였던 것 같다.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단어를 우리말로 받아쓰는 시험이었는데 하나도 쓸 수 없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단어는 내 이름과 ‘어머니, 아버지, 우리나라’ 등 몇 가지 외에는 거의 없었으니까.
다음날인가 받은 시험지에 붉은 색연필로 커다랗게 동그라미가 쳐졌다. 0점이었다. 0자 아래에는 밑줄이 좍 그어졌다. 나는 그 시험지를 아버지께 보여주며 말했다. “아버지, 시험 봐서 0점 받았는데 옆으로 돌리면 10점이 돼요.” 부끄럽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0점인데 옆으로 돌리니까 10점이 되는구나. 우리 상태 잘 했다. 10점을 받았으니 아버지가 10환을 주마!” 당시 10환이면 먹고 싶은 과자를 실컷 사먹고도 남는 돈이었다.
숭의여중 교목으로 부임해서 일하던 첫 해, 그러니까 1985년 봄이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공부 못한다고 기죽지 마라. 나도 초등학교 때 꼴찌를 했던 적이 있다”고 예배시간에 설교한 적이 있다. 성적이 낮은 아이들을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다.
나중에 그 일을 거론하며 정말이냐고 물은 선생님이 계셨다. 그냥 학생들을 위로하려고 한 거짓말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때 일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말했다. “0점을 받았으니 틀림없이 꼴찌였지요.” 내가 당시 “꼴찌를 했다”고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덕분이다. 그때 아버지께서 야단을 치셨다면 내 인생은 매우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초등학교에 다녔던 내내 내 학교성적은 거의 바닥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공부에 대한 흥미도 없었고 성적에 대해서도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형이 받아온 성적표에는 언제나 ‘수’가 가득 적혀 있었다. 어쩌다 ‘우’가 하나라도 들어가면 형은 몹시 아쉬워했다. 내 성적표에는 ‘수’나 ‘우’는 별로 없었다. ‘미’와 ‘양’이 많았고 ‘가’도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쉽지도 않았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늘 성적표를 받는 즉시 부모님께 보여드렸고 당당하게 도장을 받았다.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가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6학년 때인 1968년 어느 날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서 “초중고 전교생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날은 다른 수업은 하지 않고 아이들이 하루 종일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일에 매달렸다. 나는 1교시에 헌장을 다 외웠다. 내 주위에 나보다 빨리 국민교육헌장을 외운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었구나!
소년이 지기엔 너무 힘겨웠던 인생의 짐
놀이공원에 가면 이름은 다르지만 대부분 궤도열차가 있다. 기계의 힘으로 착착 올라가던 열차는 어느 순간 아래로 내리달린다. 형의 인생을 생각하면 그 장면이 떠오른다. 승승장구하던 형의 인생이 갑자기 하향곡선으로 접어들게 된다. 부모님이 이혼한 것이다. 1965년, 그러니까 형이 5학년 내가 3학년 때였다. (나이 차이는 3년이었지만 5월생인 형과 2월생인 나의 학년 차는 2년이었다).
요즘엔 흔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혼하는 가정이 별로 없었다.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일은 이후 내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철모르는 개구쟁이였지만 그때까지는 내 성격이 그리 그늘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부는 못해도 무언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고 수다쟁이였으며 큰 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었다. 코미디언이나 배우 흉내를 잘 내 어른들을 자주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열등감도 생기고 자존감도 많이 잃었다. 말도 별로 없어졌다. 하지만 그 일로 형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의 이혼과 관련된 내막을 조금이나마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군에서 제대한 아버지가 직장을 얻지 못해 쉬고 계실 때 가족을 먹여살린 분은 어머니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중앙제약이라는 외국계 제약회사(비아그라를 개발한 지금의 한국화이자)에 입사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당시 소위 상류층에서 유행하던 사교춤(지금의 스포츠댄스와 같은 것이지만 당시에는 퇴폐문화의 전형이었다)에 매료되어 어머니와 함께 거의 매일 저녁 사교클럽을 찾아다니셨다.
아들 셋을 두고 저녁마다 집을 비우는 것에 부담을 느낀 어머니가 점차 거리를 두자 아버지는 다른 파트너를 찾았고 급기야 따로 살림까지 차리셨다.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이혼까지 가게 되었지만 어머니를 원망할 수는 없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을 지키고 꾸려내느라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최선을 다해 어린 삼형제를 길러내셨다.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간 책임의 근본은 명백히 아버지에게 있었다.
어쨌든 부모님의 이혼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형의 인생에 떨어진 직격탄이 되었다.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형은 눈물로 매달렸다. 아버지는 후회하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이도 어렸지만 생각도 한창 어린 나는 (당시에는) 아무 영문도 몰랐으니 아플 것도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차라리 형도 나처럼 철이 없었다면 그리 인생이 굴곡지지는 않았을 텐데...
고비 때마다 특히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어김없이 찾아온 가정불화는 형의 자부심과 기개, 총기와 의지까지 서서히 잠식했고 급기야 그의 어린 삶 전체를 철저히 무너뜨렸다. 아버지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올 것과 결별할 것을 두고 너무 오래 저울질을 했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단호히 아버지를 내치셨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신의 방황을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채 이중살림을 하는 행위를 어머니는 경멸하셨다.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도 없지는 않다. 어머니는 너그러운 분은 아니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었다.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차갑고 도도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잦은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로 인한 어머니의 상처, 자살 시도 등의 극한 행동들은 사춘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그 미모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첫 눈에 보고 반했듯이 당시 홀로된 어머니 주변에는 많은 사내들이 다가와 있었다. 형은 그들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형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우연히 형의 일기장을 발견해 읽은 적이 있다. 미성년자였지만 예리한 눈과 판단력을 가졌던 형은 어머니 주변에서 서성이던 사내들의 말과 행동을, 그리고 그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젊고 연약한 여인으로서의 어머니의 흔들림까지 자신의 일기장에 상세히 옮겨놓았다.
마치 한 권의 완성된 소설처럼 너무나 상세히 수려한 문체로 써내려간 형의 일기장에는 사춘기 소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뇌와 아픔이, 그리고 절망감과 그로 인한 방황이 담겨있었다. 그 일기를 쓸 때, 형은 고작 중학생이었다.
교회와의 인연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 연재물 앞부분에 써넣고 싶어 하면서도 망설인 이유는, 내 평생의 동반자인 기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내 어린 시절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와의 인연이 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형에 의해 그 인연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때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모님의 이혼이, 그리고 그 아픔을 견뎌내지 못한 소년의 쓸쓸한 마음이 결국 형으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에 매달리게 했던 것이 아닐까.
잠시 스쳐간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교회와 관련한 인연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내가 교회라는 곳을 처음으로 가본 건 네댓 살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삼선동 한성대 부근 언덕에 있었는데 조그만 구세군교회가 하나 있었다. 아마 먹을 것도 주고 신기한 걸 보여준다는 말에 혹해서 갔던 것 같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아저씨가 망원경처럼 생긴 종이상자 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신기한 장면이 펼쳐졌다. 당시에는 그림이라면 거의 흑백이었는데 그 상자 안의 그림은 총천연색일 뿐 아니라 공간감도 느껴졌다. 지금의 3차원 그래픽 같은 것이었으니 당시로선 매우 신기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림이 너무 생소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었던 것 같다.
이후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교회를 의식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에 들어간 후였다. 형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은 교회를 다니는 내내 중고등부 부장이나 총무, 회장 등의 일을 맡아 봉사했다. 형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학대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금식하며 기도하던 형이 마침내 하느님의 종이 되어 평생 목회자로 살겠다고 서원했다.
하지만 형은 신학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눈에 띄게 방황하기 시작한 형은 신앙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졸업도 하기 전에 술과 담배를 입에 댔고 외박도 하는 등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신학대 입학을 포기한 형은 일반대 경영학과에 진학했으나 방황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힘겹게 마련해주신 등록금을 모두 술 마시고 탕진해버리기까지 했다. 내가 형과 주먹질을 하고 싸운 것도 그때였다. 당시 내가 형에게 “이렇게 살려면 나가 죽어버려라”고 소리치며 같이 치고 박고 싸웠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내가 형이 다니던 교회를 처음으로 가봤을 때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당시 형의 권유로 그 교회에 두어번 가보기는 했지만 그것도 곧 그만두었다.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나는 기독교는 물론 종교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 어쩌면 처절하게 망가져버린 형에 대해 전에 갖고 있던 존경심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도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이 어렸을 때 나는 평범했지만 그늘지지는 않은 아이였다. 형보다 공부는 못했지만 그리 기죽지 않았고 내 인생을 신나게 즐길 줄 아는 당찬 면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염세적인 성격의 우울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매사에 자신이 없었고 무슨 일에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글쎄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무슨 말이건 내 생각을 당당히 말하기보다 “글쎄요”라는 대답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형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우리 가정에 스며들어온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써놓은 글 <쫓겨난 목사의 10년 세월>로 연결된다. 아무튼 나는 형보다 몇 년 늦게 기독교와 인연을 맺고 목사가 되었다. 형이 자신의 하느님과 서원했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 그것은 하느님의 종이 되어 아픔에 겨워 힘들어하는 이웃들을 위로하며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이 그 길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기독교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내가 대학 중반기에 마치 사냥꾼이 던진 밧줄에 목이 감긴 들짐승처럼 기독교와 갑자기 인연을 맺게 되었다. 종교의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내가, 게다가 기독교를 조금은 경멸했던 스물 두 살의 내가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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