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들의 예수>를 출간하다
새길교회를 나온 후 두세 달 정도 지나 새 책이 출간됐다. 도서출판 삼인에서 발간된 <당신들의 예수>인데, 새길교회에서 일하던 2년 동안 쓴 칼럼을 모아놓은 책이다. 내가 제안했던 책 제목은 ‘예수님, 은퇴하십시오’ ‘당신의 예수를 죽여라’ 등이었는데 출판사 회의에서 <당신들의 예수>로 정해졌다.
책 안에 ‘한국 교회여, 차라리 선교활동을 포기하라’는 제목의 칼럼이 있었다. ‘한국 개신교의 아프가니스탄 평화 축제 유감’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공교롭게도 책이 발행된 바로 그날(2007년 7월 19일), 한국인 선교여행팀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반군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책이 주목을 받았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이 책 내용을 소개했다. 앞의 칼럼과 함께 ‘한국 교회, 공격적인 선교정책을 바꿔야 산다’는 칼럼이 주로 인용되었다. 전 국민이 가슴을 조아리며 지켜보았던 불행한 사건이 오히려 책을 홍보해준 셈이다.
초판 이천 부가 한 달 만에 모두 팔렸다. 재판 이천 부를 찍었다. 하지만 책은 더 이상 팔리지 않은 채 창고에서 조금씩 폐기되었다. 출판사에 미안한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2. <소설 콘스탄티누스> 집필을 시작하다
이후로 다음해 2월까지는 다른 일자리를 갖지 않고 백수로 지냈다. 만사 제쳐놓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써내는 일이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새길문화원 신학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갖게 되었다. 틈틈이 자료도 준비해두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대제’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로 기독교권에서는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크리스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장인과 처남, 아내, 심지어 친아들까지 잔인하게 죽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행적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일찌감치 기독교에 귀의한 인물이라는 걸 믿기 어렵게 된다. 나 말고도 그의 기독교 귀의에 대해 의심하는 학자들은 적지 않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그를 전형적인 정치적 인간(HOMO POLITICUS)으로 보았다. “콘스탄티누스에게 기독교는 종교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였다”고 시오노는 말한다. 그에 대해 알아갈수록 동의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적어도 니케아 회의를 개최했을 때까지는 그가 기독교에 귀화한 것이 아니라 이용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당신들의 예수>가 발행되었을 때는 이미 <소설 콘스탄티누스> 집필을 위한 자료가 거의 준비되어 있었다. 전체 구도도 잡아놓았다. 하지만 바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나는 학부에서 철학, 대학원에서는 신학을 공부했다.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다. 이성보다는 풍부한 감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설을 내가 과연 쓸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독자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글이 아니라면 소통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놓아도 읽는 사람이 없으면 휴지뭉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여 당분간 집필을 보류하고 당시에 유행하던 베스트셀러 소설들을 읽어보기로 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와 김훈의 <남한산성>을 두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글을 참 맛갈나게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이렇게 쓰면 되겠다”고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소설의 감각을 습득하기 위해 그동안 읽었던 소설 중에 재미와 감동을 함께 느꼈던 책들을 다시 읽기로 했다. 덴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시리즈를 모두 다시 읽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당시 TV에서 방영되던 역사드라마들도 거의 빠짐없이 찾아보았다. 그 시절 막 나오기 시작한 IPTV가 큰 도움이 되었다.
집필을 시작한 건 그해 찬바람이 불 때쯤이었던 것 같다.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고 싶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리차드 루벤슈타인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를 자료의 두 축으로 삼았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제임스 칼라스의 <요한계시록>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J. B. 노스의 <세계종교사>와 윌리스턴 워커의 <기독교회사>도 참고했다. 논문이었다면 참고도서 목록에 꼭 넣어야 했을 책들이다. 하지만 소설이므로 후기에 담아 저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3. 아내의 눈물, 시행착오
“한 우물만 파고 싶다. 내가 멀티가 잘 안 되는 사람이란 건 당신이 잘 알지 않는가?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탈고할 때까지는 글에 집중할 수 있게 해 달라.” 새길교회를 나온 후 아내에게 했던 말이다.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의무를 당분간 포기하겠다는 파렴치한 부탁이었다. 마지못해 허락은 했지만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아내는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내의 지쳐가는 표정을 보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말수가 적어졌고 자주 눈물을 보였다. 집필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성공한 사업가의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기 작가들이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인터넷을 통해 그 일을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히고 집필계획서도 올렸다. 응답은 없었다.
그때까지 발간된 내 책들을 몇 차례 차에 싣고 나가 길거리에 펼쳐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비현실적인 행동이고 방황이었다. 글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책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책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내 곤궁한 처지가 안타까웠는지 전혀 모르는 분이 돈을 보내오기도 했다. 새길교회를 통해 내 계좌번호를 알아낸 것 같다. 너무 고마웠지만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 때려치우고 막노동판으로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탈고하기까지는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니까...
4. 먼저 나온 책 <손에 잡히는 사회교과서(종교)>
이런 저런 방황과 시행착오 끝에 겨우 방향을 잡고 집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와 비슷한 내용과 편제로 어린이용 종교개론서를 써달라는 것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종교교과서가 되기를 바라고 썼던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는 교과서로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문화관광부 교양도서로 선정되고 몇몇 학원에서 논술교재로 활용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 책과 비슷한 편제로 초등학교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써달라는 것이 출판사의 요청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한 눈을 팔기 싫었다. 이제 겨우 방향을 잡았는데... 거절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을 때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기독교에 대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 아닌가? 어린이들에게 종교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도 소설 못지않게 중요할 수 있다. 시일이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니 소설을 잠시 접어두고 어린이 종교책을 먼저 쓰는 게 좋겠다...
아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인가? 하지만 시간을 많이 뺏길 수는 없었다. 약 넉 달 정도 출판사와 원고를 주고받은 끝에 2008년 5월 초에 책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길벗스쿨에서 발간된 <손에 잡히는 사회 교과서(종교)>는 내 단행본 중에 유일하게 일만 부가 넘게 팔린 책이 되었다.
5. “요양원으로 오시오.”
콘스탄티누스와 한창 씨름하던 2008년 2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멤버이며 당시 수원교구 사제로 경기도 일대에 몇 군데의 노인요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시던 방상복 신부님이 메일을 보내주셨다. 그분을 알게 된 건 강의석 사건 때문이다. 사건 초기부터 내 행보를 눈여겨보셨던 신부님은 간간이 인터넷을 통해 위로의 글을 남겨주곤 하셨다.
방신부님이 보내주신 메일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사모님과 함께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작은 안나의 집’ 상담사로 일하면 좋을 것 같다... 사모님은 요양보호사로, 목사님은 상담사로 일하면서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쓰시라...”
아내는 적극 찬성이었다. 나는 또 다시 고민에 빠져야 했다. 상담사라... 그건 다시 목사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신부님은 그저 어르신들과 고스톱 치면서 놀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상담사가 하는 일이 거기서 끝날 수는 없었다. 신앙과 삶의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요양보호사들을 위로하고, 때로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시는 어르신들의 손을 잡고 기도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거의 일 년 동안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한 채 생활비만 축내고 있었으니까. 간간이 주변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대광고를 떠날 때 받았던 퇴직금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내가 아이들 대학등록금이라며 손대지 말라고 못박아놓았던 돈이다.
결국 아내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목사로 산 지 근 20년 만에 얻은 자유였는데, 결국 또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인가! 이 바닥에서 벗어나기가 이토록 힘든 것인가! 한숨과 한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달랬다. 어쨌든 신부님이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지 않았는가! 얼마나 잘 된 일인가!
6. 드디어 소원을 이루다
집필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건 노인요양원 ‘작은 안나의 집’으로 들어간 2008년 3월부터였다. 외부와의 소통이 거의 단절된 외진 산골이 집중해서 글을 쓰는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 되었다. 신부님은 요양원 내에 아내와 함께 쓸 방을 마련해주셨고 필요하면 근무 중이라도 상담실에서 글을 쓰라고 하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글을 썼다. 숙식은 그곳에서 무료로 제공되었다.
집필을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지난 2008년 10월 10일, 드디어 나는 소원을 이루었다. <소설 콘스탄티누스>가 발간된 것이다. 이 책은 내 평생의 역작이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책을 더 써내게 될 지는 나도 모르지만, 내 대표작은 여전히 <소설 콘스탄티누스>로 남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기필코 써내야만 했던 이유는 이 책의 후기에 담겨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기독교는 세계 3대 종교이지만, 독선적 교리와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 때문에 인류 역사에 수많은 갈등과 상처를 안겼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원형은 매우 따뜻하고 포용적인 인류애에 기초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언제, 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배타적인 종교가 되었는지를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에 증언하고 싶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팩션(fact+fiction)’이라는 장르를 선택했습니다.”
* 이 글은 <공동선> 2015년 11+12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