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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기사로 일하다
2009년 봄부터 2010년 봄까지 약 1년여 기간은 대광고를 떠난 이후 모처럼 내 인생에 여유와 행복이 찾아든 시기였다. 예수동아리교회는 순항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이번 호에는 그 기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1. 택시기사 일을 시작하다
2009년 5월 초순,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예수동아리교회 교우들과 함께 드린 108배 이야기로 지난 호 글을 끝맺었다. 나와 교회를 향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비난이 더욱 거세졌고 “이단” “사탄”이라는 말을 수시로 듣게 되었지만 이 일로 인해 예수동아리교회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때까지 300여 명이었던 인터넷카페의 회원 수가 800여 명으로 늘었고 모임도 활기를 띠었지만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일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내가 택시기사로 일을 시작한 날은 그해 5월 하순이었다. 일한 기간은 약 한 달 반에 그쳤다. 화물차운전자격(정확한 명칭은 화물운송종사자격)을 얻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택시일 적응에 실패한 직접적 원인은 사납금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일에 대한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나는 고도근시와 야맹증을 동시에 갖고 있다. 밤 운전을 하기 어렵기에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낮에만 일하기로 했다. 밤일은 일이 거칠지만 수익이 높고 낮일은 비교적 수월하지만 수익이 낮다. 2인1조로 일하는 내 파트너는 흔쾌히 내 제안에 동의해주었을 뿐 아니라 고맙게도 월 10만원을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는 낮일 전담 기사가 되었다. 초보기사로서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사납금을 채우는 일이었다.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면 70여만 원인 월급에서 제하게 된다. 대부분의 기사는 하루 사납금을 채우고 3~4만원 정도의 여유돈을 더 벌어 월 150~200만원 정도의 수익을 낸다. 하지만 나는 사납금을 채우는 날보다 채우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2. 갑자기 나타난 후원자
108배 관련 기사가 한겨레신문과 한국일보 등의 언론매체에 보도된 후, 당시 신입교우들을 상담하고 안내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운영위원을 통해 누군가 연락을 해왔다. 아내와 연락이 닿은 그는 화계사에서 드린 108배 기사를 보고 연락을 했노라고 말했다. 내가 생활비 문제로 아내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택시 일을 시작하기 전후의 시기였다.
그는 교회 인건비가 전체 예산의 10%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과 내 월급이 10여만 원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생활비의 절반 정도를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후원의 조건은 없었다. 단지 “목사님이 지금 하시는 일에 의미를 느껴 참여하고 싶은데 생활에 쫓겨 그 일을 포기하게 될까 염려되어 돕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예수동아리교회 회원으로 가입한 그는 일년치 회비 120만원을 먼저 보냈다.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매월 150만원을 후원하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두 아이를 포함하여 다섯 식구 생활비로 월 300만원은 필요하다는 것이 그가 후원금을 책정한 기준이었다.
어떤 분인지 너무나 궁금했지만 그는 아내와만 연락을 주고받을 뿐 나에게는 전화 한 번 주지 않았다. 나 역시 먼저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고마운 마음은 말할 수도 없었지만 거북한 마음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통화하는 그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나마 듣게 되기까지 몇 개월, 직접 만나기까지는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아내를 통해 듣게 된 그는 당시 40대 초반의 젊은 사업가로 감리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진보적 의식을 가진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자주 이사를 다녔고 주로 시골에서 살았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 아버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목회자인 아버지께서 두 아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일을 잊지 마라. 너희가 커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너희도 이렇게 해라.”
아내는 웃음을 되찾았다. 나 역시 초조감이 사라지고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생활비의 남은 절반은 내가 벌어야 한다. 두 아이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화물차 일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이후 화물차운전자격증을 예정대로 따기는 했지만 막상 활용한 건 몇 년 뒤부터였다.
사실 내가 하려고 했던 화물차 ‘지입’이라는 일은 내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글쓰기나 강연 등은 물론이고 막 시작한 교회 일도 겸해서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후원의 조건은 아니었지만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둔다는 후원자의 언급도 잊을 수 없었다.
3. 대리운전으로 바꾸다
낮에만 하는 택시 일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길을 몰라 헤매는 일도 차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사납금을 맞추기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기사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 택시요금이 올랐다. 당연히 사납금도 올랐다. 그때까지는 사납금에 미달하는 날과 초과하는 날이 반반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택시요금이 오른 이후로 나는 오른 사납금을 거의 맞추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다섯 시쯤, 구로동 네거리에서 바삐 뛰는 젊은이가 내 택시를 잡았다. 목적지는 불과 1킬로 남짓한 곳. 대리기사였다. 하루에 얼마나 버는지 궁금했다. “십만 원 정도 가져가죠.” 젊은이의 말에 귀가 번쩍 틔는 느낌이었다.
대리기사로 바꿔보자! 아무 미련 없이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택시는 화물차 일을 하기 전까지만 한시적으로 경험해보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대리기사는 별도의 자격증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혹 적응에 실패한다 해도 잃을 것이 별로 없었다.
대리기사들의 인터넷카페 모임에 참석했다. 취객을 상대하는 일의 어려움, 저녁 7시 전후부터 새벽 2시경까지 일하고 나면 귀가할 차가 없어 길거리에서 밤을 꼬박 새울 수도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모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야맹증이 있다는 것도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다, 아니 하고 싶다는 의욕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나는 2009년 여름부터 2010년 가을까지 약 14개월 동안 대리기사로 일했다. 길거리에서 밤을 새운 날은 부지기수였고 길이 잘 보이지 않아 고생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일 년 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택시와는 달리 아무리 일을 못해도 돈을 못 버는 날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입이 적을 때는 하루 2~3만원, 많을 때는 6~7만원의 수익을 꾸준히 냈다.
대리기사로 일한 동안의 추억거리는 꽤 많다. 취객을 상대하는 일이므로 험한 꼴도 여러 번 겪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중에 내 적성과 여건에 가장 맞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맥 빠지게 만드는 일도 가끔 있었다. 자기 편리만 생각하는 무책임한 손님을 만났을 때다.
나는 콜을 잡으면(PDA로 손님과 접촉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손님이 기다리는 곳까지 무조건 뛰어갔다. (콜을 잡은 후 20분 이내에 도착하게 되어있다).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손님이 무시한다며 시간여유가 있으면 걸어가라는 말을 다른 기사에게서 듣기도 했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운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뿐 아니라 밤거리를 뛰는 것 자체가 상쾌했다. 손님 입장에서도 시간을 단축하게 되니 이래저래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택시를 탈 때도 있었다. 2~3만 원 이상을 받을 수 있는 먼 거리일 경우 3~4천원의 택시비는 충분히 경비로 쓸 만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밤 12시경 부천역 앞에서 콜을 잡았다. 뛰어가기는 먼 거리라 택시를 타고 가면서 손님에게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근처에 다른 기사가 있기에 그냥 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콜을 잡고 정상적으로 일하고 있는데 손님의 휴대전화에서 다른 대리기사의 전화소리가 울린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대리기사를 불러 놓고 무조건 먼저 온 기사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일을 겪으면 그날은 더 이상 일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좋은 추억도 많았다. 용산역에서 목동까지 가는 가까운 거리인데 요금 2만원이 책정된 괜찮은 콜이 있었다.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내 이력을 대충 말하게 되었다. 천주교인인 손님이 자꾸 물어 답하다보니 생긴 일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가 지갑 속에 있는 만원권 지폐를 모두 꺼내주었다. 20~30장 정도 되어 보였다.
만일 그가 취객이 아니었고 내 뜻을 존중한다며 후원금으로 건냈다면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술에 취한 상태다. 다음날 아침 돈이 없어진 걸 알고 당황해할 수도 있다. 나는 대리비 2만원에 만원을 더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그 정도면 후한 팁이었다.
한번은 손님을 태우고 영등포 집창촌으로 가게 되었다. 차가 손님 차니까 집창촌 한가운데에서 걸어 나와야 했다. 어느 아가씨가 말했다. “아저씨, 쉬었다 가세요. 잘 해 드릴게요.” “제가 일을 해야 돼서요.” 나는 대리기사임을 알리기 위해 PDA에 눈을 고정시킨 채 걸었다. “네, 많이 버세요.” 아가씨의 말이 상냥하게 들렸다. 나도 아가씨에게 말했다. “네, 많이 버세요.” 나는 진심으로 아가씨가 돈을 많이 벌기를 바랬다.
가장 잊을 수 없고 가슴 아픈 추억은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난 일이었다. 당시 수염을 길게 기른 내 모습을 보고 “무얼 하는 분인지 궁금하다”는 손님들이 많았다. 말을 하다 보니 대광고 이야기까지 나왔다. 손님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목사님으로서 바른 선택을 하신 것 같다”고 그가 말했으니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 분은 아닌 것 같다.
그는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자기에게 두 시간만 할애해 달라고 했다. 그 시간에 벌 수 있는 돈은 자기가 지불하겠다고 했다. 교회 장로인 그는 일 년 전에 금술이 좋았던 아내와 사별했다. 아내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으로 살아간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 천국에서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장로님의 소망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사모님은 지금 하느님 품에서 안식하고 계시며, 장로님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갖고 계시므로 두 분은 하느님 품에서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집을 나서서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스스로를 달래었다. 뭐가 문제냐? 이럴 때 필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다. 세상 모든 곳이 하느님 품이니 그분들이 어디에 가셨건 또한 어디로 가시건 하느님 품 안에 있는 것이 맞지 아니한가?
대리기사 일은 언제든 내가 쉬고 싶을 때는 쉬어도 되는 일이었다. 어쩌다 강의가 있는 날이나 글을 집중해서 써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며칠씩 쉬어도 되는 완전한 프리랜서 일이었다. 나에게는 최적의 일이었던 셈이다. 매달 어김없이 입금되는 후원금에, 대리기사 수입, 약간의 인세와 강연료로 나와 가족은 오랜 만에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지내게 되었다.
4. 예수동아리교회의 순항
예수동아리교회 교우들은 대부분 기존 교회에 다녔던 분들이고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던 분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회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교리적 배타성과 목회자들의 전횡, 과도한 금전적 강요 등에 환멸을 느껴 교회를 뛰쳐나온 분들이었다.
교우들 대부분은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요약되는 철옹성 같은 배타교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면 성서를 알아야 했다. ‘사복음서 대조 성서연구’를 통해 교우들은 서서히 자신의 신앙을 정립했다. 이렇게 말하는 교우들이 늘어갔다. “전에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자유롭다.”
매주 모이는 주일모임에는 10~20명의 교우들이 꾸준히 참석했다. 교우들이 전국 곳곳에 있었으므로 두세 달에 한번 정도 서울 근교에 사는 교우들과 함께 지방교우 탐방을 겸해 여행을 떠났다. 자연스런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이나 직책 대신 모두 인터넷 닉네임으로 불렀다. 나는 산들님, 아내는 후니님으로 불렸다. 내가 진짜 목사라며 계속 목사님이라고 부른 분도 계셨지만 나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나도 아내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2010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두 번째 108배 행사를 봉은사에서 가졌다. 이번에는 자매교회와 연합으로 20여 명의 교우들이 참석했다.
* 이 글은 <공동선> 2016년 05+06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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