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에두아르드와 함께 음악가 왕조를 건설한 사람이다. 그는 책 제본사 견습생으로 일하는 동안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개인교습 받았다. 그리고 곧 음악은 그에게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하다가 1825년에 자신의 악단을 결성해 자신의 곡을 연주했다. 슈트라우스 1세와 그의 음악은 어느새 빈의 꽃이 되었고 세계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동시에 경쟁했다. 슈트라우스 1세는 페르디난드 1세 황제에 의해 ‘왕실 궁정 무도회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아들의 명성은 아버지를 뛰어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왈츠로, 《로렐라이 강의 메아리》와 《라데츠키 행진곡》은 모두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를 위해 쓰여졌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행진식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는데, 장교들은 곡을 듣자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쳤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함께 박수를 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리는 신년 음악회의 연주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라데츠키 장군은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을 진압한 장군. 1848년 3월 부패한 메테르니히 전제 정치에 대한 시민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보수파로 정부측에 가담한 요한스트라우스는 정부군의 사기 앙양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영웅 이름을 빌린 이 곡을 쓴 것이다.
요한스트라우스는 이 행진곡으로 인하여 반혁명적인 작곡가라 해서 빈에서 살 수 없게 되어 한 때 런던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1848년 8월 31일에 초연되었는데 3번이나 앙코르를 받았으며 지금은 마치 오스트리아의 애국 행진곡처럼 여기게 되었다. 또한 경쾌하고 힘찬 느낌 때문에 세계각국의 여러 행사에서 축하음악 많이 연주되며 지난 2002년 5월30일 월드컵 전야제에서 조수미가 이 행진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했다.
■ 참고의견
요제프 라데츠키(Joseph Radetzky, 1766년 11월 2일 - 1858년 1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군인이다.
1784년 입대하여 나폴레옹 전쟁 초기에는 저지대 국가에서 싸웠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 이탈리아 전역에서 프랑스군에 맞섰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05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주둔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809년에는 육군 부원수가 되어 카를 대공과 함께 바그람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이 전투의 결과 쇤브룬 조약이 체결되어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굴욕을 맛봐야 했으며, 카를 대공은 은퇴를 강요당했다.
이후 라데츠키는 1813년의 제4차 대프랑스 동맹군 회의에 참가해 라이프치히 전투를 입안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그 자신과 상관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빈 회의에 메테르니히와 베센베르크 남작을 수행하여 군사 관련 자문을 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의 군제 개혁을 꾀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1831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주둔군 총사령관을 다시 맡았으며, 사르데냐 왕국의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자, 1848년 쿠스토차 전투에서 사르데냐군을 격멸했다. 이 공적으로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의 총독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이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던 시기에 노바라 전투에서 다시 10만의 사르데냐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사르데냐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책임을 지고 퇴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당분간 오스트리아령 북부 이탈리아의 안전은 보장받게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철권으로 억압한 보수적 인물로 비판받기도 하며, 역시 보수주의자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라데츠키 행진곡를 작곡하여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인 「왈츠의 왕」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에게 비판적이었다
첫댓글 아 그렇군요
라데츠키가 오스트리아 전쟁영웅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왕정주의자 였군요
곡이 별로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