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포와 청사포 최 건 차
바닷가 온천지대로 신라 때부터 알려진 곳 해운대 동쪽 끝자락에는 미포가 있고 그 옆은 청사포다. 안방 격이며 요람 같은 우동, 좌동과 중동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장산의 상당한 폭포수가 흘러 닿는 곳은 백사장 시작점인 동백섬이다. 마치 거대한 해양물체의 머리 모양으로 천연한 송림과 빌딩 앞 해변으로 길게 뻗어있는 끝자락 미포尾浦에는 블루라인파크라는 게 생겨 호황이다. 한때는 동해남부선 열차가 기적만 울리고 그냥 지나 가버리는 바람단지였다. 요즘엔 거기서 청사포를 거쳐 송정까지 운행하는 해변열차와 스카이캡슐을 타보려고 국내외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2022년 가을 나는 해운대 죽마고우들과 미포에서 해변열차를 타고 송정으로 향했다. 횡으로 된 좌석이 모두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어 눈이 시원하고 즐거웠다. 1960-70년대 여름 나는 가끔 해운대를 벗어나 더 한적한 송정에 가서 회를 사 먹으며 해수욕을 즐겼다. 그때는 해운대도 어설플 때였는데 더욱이 미포와 송정 사이에 있는 청사포는 돌출된 암석들이 많고 바람이 심하고 후미져 냉랭한 어촌이었다. 인근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나 찾아들고 있었던 이 작은 포구를 청사포라고 했다. 청사포라고 부르는 데에는 한 여인의 애절한 사연이 숨겨진 듯 전해지고 있었다.
1950년대 초반 나는 부산 영도에 사는 중학생이었다. 우리 음악 선생님은 평양에서 월남하신 유명하고 좀 특별하셨던 분이었다. 급장인 나를 다독이며 독일 민요 ‘로렐라이’를 부르게 하고서는 그 배경을 구슬프게 곁들어주어 모두가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해운대에 살면서 청사포에도 로렐라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기잡이를 나간 어부가 풍랑으로 돌아 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고기잡이를 떠났던 바닷가를 찾아 살아서 돌아오기를 매일같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용왕이 이 사연을 전해 듣고 그곳 바다에 사는 푸른 뱀을 시켜 그 여인을 용궁으로 데려오게 하여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의 설화로 그곳을 청사포靑蛇浦, 곧 ‘푸른 뱀의 포구’라는 뜻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후일 뱀 사蛇자가 마을 이름으로 좋지 않다고 하여 고치기로 했다. 푸른 청靑자는 괜찮으니 그대로 두고 뱀 사蛇만 모래 사砂자로 고치자고 하여 ‘푸른 모래의 포구’ 지금의 청사포靑沙浦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해운대에서 군대생활을 하던 1960년대에는 단선인 동해남부선에 증기기관차가 한적하게 기적을 울리며 달리고 있었다. 상행선 열차가 미포를 거쳐 청사포를 돌아 꼬리를 감추고, 하행선 열차는 미포를 향해 머리를 내밀며 긴 몸체를 달고 달리는 것을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특히 저녁 무렵 장난감처럼 기다란 열차가 하얀 연기를 흩날리며 해안 모퉁이로 사라지고 나타나는 광경이 동화 속의 정경 같아 보여 이내 달려가 붙잡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1969년 여름 베트남 전선으로 가는 항해 중에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전쟁터로 가는 상황이라 영화 속 ‘지바고’가 빨치산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나와 모스크바로 갔을 때의 과정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라라’를 발견하고서 애타게 부르며 달려가다가 숨을 거두는 장면은 애상哀傷의 극치여서 가슴이 저렸다. 나 역시 기구한 운명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7일 만에 유행성 독감에 걸려 5개월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죽을 뻔했고, 해방 후에는 빨치산 해방구에서 6·25를 겪으면서 역병으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가 겨우 살아났다. 더욱이 베트남전에서는 베트콩의 기습을 받으며 용케 살아서 돌아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내가 20대를 잘 꾸릴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은 해운대교회와 교회친구들이었다. 가끔 동백섬을 둘러보면서 미포와 청사포를 바라다볼 때면 장편 다큐멘터리의 영상이 펼쳐진다. 지난 시절의 추억들과 생각되는 것들이 계속 떠올려지고 있다. 언제쯤 끝이 날지 계산이 서지 않는데 언젠가 죽마고우 청일이가 ‘니 해운대 이야기 한번 써봐라, 신문에 실쿠로’라고 했던 말이 귓전을 울린다. 그렇게 하자고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어떤 글 한 편을 쓰려고 컴퓨터 워드에 손을 얹으려 하니 청일이가 했던 말이 생각 킨다. 이에 한 번 써 봐야지.라고 마음을 다져야 했다. 작정하고 6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니 만사가 아스라이 펼쳐지면서 사연들이 꼬리를 문다.
해운대에서의 내 로정路程은 20대의 시작을 믿음과 도전으로 불태웠던 황금기였다. 1960년부터 지금까지 연계되는 것들로 만나봤으면 하는 분들과 보고 싶은 친지들 중에 떠난 이들이 있어 가슴이 저린다. 자랑스러운 해운대의 이전과 지금을 이야기하고 싶다. 얼마나 대단하냐는 것을 논하려 하는데 아쉬움이 크다. 천혜의 자연조건에 해안 도시의 구성과 인프라가 잘 되어 있다. 장산과 동백섬 그리고 달맞이 고개 아래 미포와 청산포가 떡 받치고 있어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내 청춘의 고향이다. 202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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