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사의 풍흉을 점쳐보는 놀이판 -
영산 쇠머리대기
경남 창녕 영산면에는 영산 지방에서 생겨나 영산 지방에서만 전승되는 독특한 놀이가 있는데 그것이 영산 쇠머리대기이다.
원래 음력 정월 대보름에 행해진 고유의 세시 민속놀이였으나 일제강점기 동안 단절되었다가 1968년 근 30여년 만에 3·1문화제를 통해 소멸 직전에 되살아났다.
이 놀이는 목우전(木牛戰), 나무쇠싸움, 목우붙인다, 쇠머리댄다 등으로 불리었다.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읍을 사이에 두고 영취산과 함박산이 두 마리 소가 마주보고 겨루는 형상이어서 이 두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 고을의 불행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무쇠의 구조는 몸체와 머리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매우 간단하고 소박한데, 머리 부분은 길이 약 10ⅿ 남짓한 통나무 세 개를 세워 위를 하나로 묶고 아래 발은 넓게 펴 큰 통나무에 엮어 맨다.
세 나무를 한데 묵어 놓은 부분에 쇠머리모형을 깎아 세우거나 가면을 만들어 세워 쇠머리대기 또는 나무쇠싸움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 나무쇠를 만들 통나무를 목도로 운반하는 모습 -
몸체 부분은 머리 부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통나무로 떠받치고 세운 나무 중간 두 곳에 나무를 가로 대고 엮어 튼튼하게 하고 또 사람이 잡고 사다리처럼 오르내릴 수 있게 한다.
나무쇠 밑바닥에는 통나무를 가로, 세로 6개씩 대고 새끼줄로 엮어 땅에 놓아도 안정되고 싸울 때에는 메기 좋도록 한다.
전면의 새끼줄을 감은 큰 통나무 부분은 자동차 전면의 범퍼 같은 역할을 해서, 나무쇠끼리 정면으로 부딪힐 때 충격을 줄여준다.
- 나무쇠 만들기 -
영산 쇠머리대기는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중학생들로 구성된 작은 쇠머리대기를 먼저 벌이는데 이는 청소년들에게 자연스레 문화를 전승시켜 주고 지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큰역
할을 하고 있다.
- 작은 쇠머리대기 -
쇠머리대기는 두 패로 갈라지는데 거주지별로 동서로 나누게 된다. 양군에는 저마다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하는데 이 장군들은 읍민들의 의견에 따라 신망 있는 사람들이 선출되었으며 복장은 조선시대 군복 차림을 하고 칼을 사용해 지휘한다.
나무쇠 앞에는 양군을 상징하는 서낭대와 총사령기, 대장기, 중장기, 소장기, 오방장군기, 농기, 영기 등 수십 개의 깃발이 하늘을 뒤덮는다. 이 깃발들을 농악대의 가락에 맞추어 흔들어 대고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양군이 서낭대와 기들을 대면서 기운을 북돋우고 상대편의 기를 꺾으려 함성을 지른다.
- 양군의 서낭대 및 기대기 -
쇠머리대기의 전법 자체는 단조롭다고 할 만큼 간단하고 소박하다.
청‧장년들이 어깨에 멘 나무쇠를 어르고 다니다가 세차게 맞부딪쳐서 상대방의 나무쇠를 조금이라도 자기편 아래쪽에 깔거나, 밖으로 밀어내어 상대편 쇠머리를 덮쳐 짓눌러 땅에 닿게 하면 이기는 것이다.
- 본격적인 쇠머리대기 -
따라서 승리를 위하여 몇 번이고 전진, 후퇴, 회전을 하다가 틈을 엿보아 비호같이 달려들어 승부를 내기도 한다.
이 놀이는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쳐 보는 농경 의례놀이로 이긴 마을에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에 격렬한 놀이판이 된다.
- 치열한 공방 끝에 나무쇠가 기울고 있는 모습 -
승부가 결판이 나며 이긴 팀의 장군들은 소를 타고 칼춤을 추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영산 쇠머리대기는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받았으며 매년 3월 1일 3·1문화제의 일환으로 벌이는 영산 고을의 큰 향토 축제이다.
영산면의 주민들은 일찍이 민족자주정신이 강했던 사람들로 서울에서 시작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지방으로 번진 3·1만세운동 때 경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벌인 곳이 바로 영산면이다.
또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영산 쇠머리대기와 함께 영산 줄다리기(제25호)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렇게 한 면(面)에 두 종목의 무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이다.
영산 줄다리기도 3·1문화제의 일환으로 당일 오후에 벌이고 있어 쇠머리대기를 보고 잠시 쉬었다 볼 수 있다. 영산에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홍예교로 보물 제564호로 지정된 영산만년교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창녕은 가야시대 고분군이 많이 산재해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늪인 우포늪이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멀리 그곳까지 갔다면 창녕읍 옥천리에 위치한 관룡사와 용선대를 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관룡사는 진달래와 억새밭으로 유명한 화왕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절 가까이에 이르면 먼저 해학적인 모습의 돌장승 한 쌍을 만날 수 있다.
얼굴의 특징이 다른 남, 여 두 장승은 관룡사 소유 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지(標識)이자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위상에 걸맞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민간 예술이 갖는 소박함과 친밀함도 잘 나타나 있다.
- 돌장승 한 쌍 -
산사를 드나드는 문은 화려한 단청을 두른 큰 일주문이 아니라 시골 동네의 돌담같이 아기자기 쌓아올린 돌들 위에 기와를 얹은 소담한 산문으로 두 사람 정도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다.
- 관룡사의 입구 석문 -
고찰 관룡사는 대웅전과 약사전,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 약사전의 삼층탑, 그리고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이렇게 다섯 점의 보물을 지니고 있다.
그 중 용선대는 관룡사에서 500여m 올라가면 툭 튀어나온 벼랑을 일컫는다. 그 배 모양의 암반위에 좌불을 놓은 것이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이며 용선이란 중생을 구제하는 배로 불교용어로 반야용선을 말한다.
돌부처를 산 중턱에 안치한 것은 아마도 구원을 간절히 원한 민초들의 심정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진다.
-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
첫댓글 맨위의 사진은 구계목도놀이라 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