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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 Letter(224) 2020. 7. 27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기세가 꺾이지 않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19로 인하여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고 너무나 오래 시간이 지났습니다. 금년 1월 20일에 첫 번째 코로나 감염자가 발생한 이후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코로나19를 인하여 새로운 문화 경향이 형성되어 갑니다. 소위 언택트 트렌드(Untact Trend)현상입니다. 접촉을 의미하는 ‘Contact’와 반대어의 접두어 ‘Un’이 결합된 신조어입니다. 이 말은 비대면 기술이 생활 속으로 확산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소유’보다는 ‘경험’에 집중하며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에 끌리고 사회 문제에 인터넷을 통해 적극성을 보이는 ‘MZ세대’가 <언택트 트렌드>의 중심입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이 연결되는 ‘초연결시대’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고로 <MZ세대>란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세대를가리키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세대인 Z세대를통칭하는 말입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는 모바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최신 트렌드와 남과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들 MZ세대는 SNS를 기반으로 유통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비 주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MZ세대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소유보다는 공유를, 상품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 특징을 보이며,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가치나 특별한 메세지를 담은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미닝아웃'(Meaning Out)소비를 하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성공이나 부를 과시하는 '플렉스'(Flex, 자랑, 과시)문화를 즐기며 고가 명품에 주저 없이 지갑을 여는 경향도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가기 쉽지 않는 사회 현상에 부딪힐 때 당황스럽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자로서는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역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대상12:32)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급변하는 사회 현상과 문화적 흐름을 이해하여 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이후에 닥치게 될 시대적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사역 형태를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흐름에 대해서는 민감하에 대처하여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성경공부 형태가 여러 번 변경되었습니다.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 금지되어서 예배형태로 몇 주간을 보냈습니다. 3주 동안 일요일마다 2부로 나누어서 메시지를 하였습니다. 피곤하기도 하였지만 정부시책을 따르면서 성경공부 모임은 지속하였습니다. 어제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가지고 강해식의 메시지로 나누었습니다. 첨부합니다. 사랑하는 삶에 은혜와 발전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보호하심과 평강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박 남규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이다.(고전13장)
천민 중의 천민, 조선시대 무수리 출신(고려, 조선시대 궁중에서 청소 일을 맡은 여종)의 동이가 숙종(19대)의 사랑을 입고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사극. 영조(21대, 52년간 재위)의 어머니이다. 숙종의 사랑과 총애를 입고 종2품 숙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나중에 중전까지 제안을 받았지만 스스로 거절하고, 궁궐 밖의 천민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들어주며, 해결하여 주는 역할을 하여 천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전하의 사랑만으로 충만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숙종의 사랑을 힘입어 무수리 출신, 가장 천민출신에서 최고의 자리에게까지 오를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은혜를 입음으로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왕 같은 대제사장으로 택함을 받았다. 할렐루야!!
◾말세의 특징 두 가지는 불법이 만연하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마24: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메시지 준비하면서 불편하였습니다. 말씀을 비추어 볼 때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침묵이 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두 가지가 너무 불편했습니다. 정치적인 비평이나 비판, 비난을 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박성중 통합당 의원, 정부와 여권 인사들이 불공정한 행위에 앞장서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항간에 기회는 문재인처럼, 과정은 조국처럼, 결과는 윤미향처럼, 대출은 이상직처럼, 지시는 추미애처럼, 대답은 김현미처럼, 뻔뻔하려면 최강욱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운전할 때 끼어들기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것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내가 좀 더 빨리 가지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라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때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순종해야 우리가 성숙할 수 있습니다. 혹시 불편하더라고 잘 경청하여 주기를 소망합니다.
1.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1-3)
“나 비록 지금까지 배운 일 없는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또 하늘과 땅의 모든 언어를 다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 나는 시끄러운 꽹과리, 울리는 징일 뿐 나 비록 예언하는 은사를 받아서 장래에 일어난 일을 모두 다 알고 모든 일에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 나 비록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 나 비록 가진 것 모두 다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현대어 성경)
◾우리의 믿음 생활과 실제 생활에서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이토록 위대하게 여겨지는 능력이나 지식이나 은사나 믿음도 모두 헛된 것(Nothing)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3장은 고전12:31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이 말씀을 원어적으로 풀어보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고 있구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더욱 좋은 길을 말하리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땅의 말(방언)이나 하늘의 말(천사의 말)이라도, 즉 모든 신비로운 말, 아름다운 말이라도 사랑이 없다면 괴롭게 들리는 시끄러운 꽹과리나 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막을 상하게 하는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잔소리를 듣는 자식들이 가끔 귀를 막으면서 그만, 그만 이제 좀 그만해, 시끄러워!>하고 고함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뒷받침이 없는 능력도, 지식도, 신앙(믿음)도 전혀 무가치한 것입니다.
3vs에서는 자선가의 예를 들어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 남을 구제하고, 순교자의 경우를 들어 자신의 몸까지 불사르는 순교를 한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1) I am nothing입니다.
13:1-3절 사이에 <내>, <내게>라는 단어가 무려 7회에 걸쳐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 자신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함으로 나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나는 무엇인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2)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meaningless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가치한 것입니다. 가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너무나 비참하며 불쌍한 것입니다.
(3)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저주스러운 말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이 말씀 같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사랑은 은사가 아닙니다. 성품입니다.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성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은 사랑보다는 힘을 중요시 하였습니다. 은사는 힘을 말합니다. 병 고치는 힘, 더 신비한 능력을 가진 힘을 사모하였습니다.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을 통하여 남을 지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Application Questions?>
나와 가족 간의 사랑은?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태도는? 공동체 안에서 나의 사랑의 역할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떠한가? 우리가 생활하는 범위 내에서 사랑을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특성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하는 것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런 것들은 <사랑입니다>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
(1)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들입니다.
◾시기(투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시기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시기란 무엇인가? 시샘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타인이 가진 그 무엇을 자신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끝내는 타인이 가진 것을 빼앗거나 망가뜨리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남의 성공을 싫어하고 낮추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특징가운데 하나가 시기심(투기심)이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투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3) “사촌이 땅 사면 열흘 동안 입원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시기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가장 큰 죄악 중에 한 가지가 시기심이었습니다. 당시의 기득권자들(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시샘하여 십자가에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시기심은 이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27:17-18)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27:4)하였습니다.
요셉도 형제들의 시기심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가인도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울왕도 시기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다 자신이 먼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시기심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투기(시기)앞에는 누구도 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기의 대명사인 장희빈-숙종의 후궁으로 중전까지 올랐다가 폐위되었다. 독점욕과 시기심으로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자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를 말합니다. 자기 나팔을 부는 것이 자랑입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란 자신의 나팔을 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
해양 구조대 교육을 받고 있는 교육생이 교관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교관님은 몇 명을 구조했습니까? 교관의 대답은 “나는 22명입니다.” 그것 밖에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내가 구조하지 못하여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22명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몇 명을 구조한 것인지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교관은 자기 자랑 대신에 자기가 구조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교만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교만과 자랑은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을 때 스스로 자랑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교만에 빠집니다. 요즈음의 Noise Marke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시끄럽게 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허튼 소리,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 이상한 행동을 함으로 남의 이목을 끌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잊혀져가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이 세상을 시끄럽게 합니다. 모두가 교만과 자랑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잘못을 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에서 멀어질 때 빠져드는 잘못이 바로 교만과 자기 자랑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니 교만하려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만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많이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무례히 행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무례란 <예의가 없음>, <배려가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아름다움을 깨뜨리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禮)의 근본은 仁(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무례히 행함으로 모든 관계의 아름다움을 깨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무례한 행위들은 성만찬식에서 잘 드러납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굶주리고, 어떤 사람은 먹고 취하였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고전11:20) (그러나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나누는 식사는 성만찬이 아니라 그냥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앞을 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지요? 그래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니-현대어 성경)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사랑을 드러내는 용어 가운데 에로스(Eros)란 말이 있습니다. Eros(이성적인 사랑, 성적인 사랑)는 무엇인가를 자기 수중에 넣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취감과 연결이 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정복욕구가 밑바탕에 있습니다. 권력을 취하고, 명예를 탐하고, 예쁜 여자를 보면 자기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 에로스이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남을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선물인데, 이들은 은사를 이용하여 교회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것인데, 고린도 교회들은 움켜쥐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세상의 욕심과 열망, 더러운 것, 허접스러운 것들로 채우고자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다른 것은 비우게 됩니다. (빌2:5-11)
<참고 :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대한 네 가지 단어가 있었습니다. 모두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에로스는 성적인 사랑(sexual love)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정욕적이고 육적인 충동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에라오(erao)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라오는 요구하고, 구하고, 수요한다(ask, beg, demand)는 뜻입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주는 형태의 사랑이 아니라,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주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려는 육적인 요구의 사랑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 에로스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는 우정이나 형제애나 남녀 사랑에 있어서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집중하는 아가페 사랑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테르고(sterego)의 사랑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혹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헌신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말세의 징조로 한국 성경에서는 “무정하며”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딤후3:3) “가족의 사랑이 없으며”입니다. 말세에는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의 사랑이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필레오는 남자와 친구와 여자 친구 사이에 느껴지는 애정이나 우정을 나타냅니다. 흔히들 친구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필레오가 우정을 표현하지만 아가페와 같은 최고의 사랑은 아닙니다. 필레오는 여러 합성어가 있습니다. 필라델피아(형제애), 필로소피아(지혜를 사랑하는 철학)등이 있습니다. 아가페(Agape)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약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것보다 더 높고 더 훌륭한 사랑은 없기 때문에 최고의 사랑입니다.>
지금 전하는 고린도전서13장에서 말하는 사랑도 아가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성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성내는 것, 화가 날 때 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터뜨리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치게 됩니다. 먼저 상대방의 충분한 사연을 들어보고 필요한 경우에는 성을 낼 수 도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순서가 중요합니다. 성을 내는 것은 맨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1:19)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공상 가운데 무엇인가 나쁜 생각을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원어적 의미는 <나에게 행한 누구가의 잘못을 세심하게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 즉 타인이 자신에게 행한 악한 행위들을 세심에게 기억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입힌 상처, 모욕, 무시, 핍박, 저주스러운 말 등의 악한 것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내 마음의 장부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잊어버리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칠면조 시대라고 합니다. 칠면조의 나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같은 우리 안에 있는 한 마리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 다른 칠면조들이 달려들어 그 상처 난 곳을 계속 쪼아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칠면조가 쓰러질 때까지 쪼아대는 것입니다. 흠집 내기를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군자가 된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에게 친절을 베푼 사랑들을 결코 잊을 수 없지만, 자신에게 나쁘게 군(행한) 사람들을 기억할 만큼 남겨진 마음의 공간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 목사들이 테니스를 좋아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테니스 할 때, 공을 칠 때 마다 <이 장로 한번 죽어봐라>, <이 공은 김 장로 것이니, 너 한 번 맞아봐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우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온전히 용서하면 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함이란 타인의 잘못된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것 봐! 주님께서 마침내 그의 죄 값을 물으셨어, 그렇지, 그렇게 되어야지 하고 고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의 아픔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는 타인의 잘못을 기억하거나, 타인의 잘못됨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인이 바른 길로 돌아오고 또한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원수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누구의 아픔을 고소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인의 아픔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원수라도,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길로 돌아오는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4-25)
• 유명한 조각가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너무나 조각을 잘하여서 살아있는 말(馬)처럼 조각한 조각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있는 말과 같이 조각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말을 닮지 않은 모습을 모두 잘라내고 나니 말을 닮은 것만 온전히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에 사랑이 아닌 것들을 모두 제거하면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만 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랑을 닮은 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면 좋겠습니다.
(2) 이런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해답은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에게 최선을 다해 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를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의 가장 최고(최상의 Best)를 기대해 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지켜 주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감사해요! 믿어요! 이것이 천국의 방언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보여주었습니까? 우리들의 부모님이십니다.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거의 어머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망나니 취급을 하였지만, 저의 어머니만큼은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나만은 너를 믿는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제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3. 사랑은 영원하며 온전합니다.(8-12)
(1) 사랑의 영원성을 말합니다.(8)
<떨어지지 아니함>과 <폐하여 짐>,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예언도, 지식도, 방언도 언젠가는 폐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고린도교회가 적극적으로 추구하던 은사였습니다. 이들은 은사를 통하여 서로가 높아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영원한 것에, 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 외에 추구하는 다른 것들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 비추어 교훈을 생각하면, 이 세상의 인기도 명성도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음을 인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그치게 됩니다. 방언도 사라집니다. 지식도 없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어떤 것도 지극히 적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언도 부분적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온전해질 때 온전치 못한 이 모든 것도 없어집니다.”(8-10) 사랑은 온전합니다. 온전한 사랑의 사람으로 성숙할 때 우리가 온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과 <어린 아이의 일>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장성해 나가는 사람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됨을 말합니다. 정말로 성숙한 사람은 이기적이지 않으며, 혼자서 모든 것을 취하고 주관하지 않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남을 위하여 사랑과 헌신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은 마치 부모의 사랑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는 사랑할 줄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이기적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움켜잡는 것입니다. 주는 것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우리가 사랑의 장성한 사람이 되면, 사랑이 없을 때의 어린아이의 행동이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왜 내가 그때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는가 자책하면서 지난날의 삶을 후회하게 됩니다. 사랑의 인격에서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의 원인은 사랑의 부족이었습니다. 사랑이 없을 때 분쟁이 생기며, 당파가 생깁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아무 파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사랑이 없을 때 고소사건이 생깁니다. 음행의 문제가 생기며, 어떤 은사가 좋고 더 훌륭한지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갈등이 일어납니다. 사랑이 처방책입니다.
또한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구리로 만들었습니다. 청동구리의 거울을 통해서 보게 되면 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통하여 바울은 우리의 모습이 온전한 이해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의 모습이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랑을 향하여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여도 7절에서 묘사된 사랑의 특징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는 사랑의 특성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4. 사랑은 위대합니다.(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현대어 성경)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쉬운 성경)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Love is the Greatest)
위대하기 위해서는 영원하여야 합니다. 일시적인 것은 위대하지 못합니다. 위대하기 위해서는 가장 고상해야 합니다. 저급한 것, 저열한 것은 위대하지 못합니다.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은혜로운 성품, 즉 사랑 없이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며 위대한 것임을 강조합니다.(1-3vs)
(2) 사랑은 모든 지식을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예언의 은사보다도 위대합니다.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혜안을 가진 교수나 설교자라도 개인적인 깊은 관심(사랑)을 가져주지 않으면 감동이나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믿음을 가졌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능력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4) 4-7vs의 사랑의 특성은 예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성품의 복사판입니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말을 넣어서 읽어보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은 우리가 영원히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꿈입니다.
(5) 은사는 일시적이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언의 은사도, 방언의 은사도 그칠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며,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가마꾼 이야기>
옛날에 신랑 신부 혼인 잔치 때에는 어김없이 가마꾼이 등장하였습니다. 신부를 가마에 태워서 신랑 집으로 데려다 주는 가마꾼들이 있었습니다. 가마꾼들은 가면서 생각합니다. 오늘 잔치 집에 도착하면 맛있게 차린 푸짐한 잔치 상을 받아먹을 것을 기대합니다. 앞쪽에서 가마를 들고 가는 가마꾼은 소망을 가지고 갑니다. 뒤에 따라가는 가마꾼은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앞선 가마꾼이 가는 대로 믿음으로 따라갑니다. 이제 잔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마꾼 모두가 잘 먹고 나니 기대하던 소망은 끝났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행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남은 건 신랑, 신부가 서로 사랑하며 주인공이 되어 혼인잔치의 즐거움은 계속 이어집니다.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속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올바르게 사랑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35)
우리가 먼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우리 성도들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합니다. 또한 고난이 와도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1-5)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롬5:8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 전시하여 두셨습니다. 확증하셨다(demonstrate)는 말은 전시하여 두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 전시하여 두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때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래 참았습니다. 아주 온유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원수들을 향하여 복수나 보복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셨습니다. 대적들의 잘못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였습니다. 우리의 행복과 최선의 삶을 바라보시며 기대하시고 묵묵히 참으시고 견디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깨닫고,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주님의 사랑의 향기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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