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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 Letter(225) 2020. 8. 31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세계적으로 지속되는 코로나의 확산 가운데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건강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종식될 것 같은 코로나의 재확산으로 한국사회는 다시금 비상조치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잠정적으로 성경공부를 비대면 On-line으로 전환하였습니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울 성북구의 사랑제일교회에서 시작된 감염자가 1000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곳곳의 작은 교회의 소규모 모임에서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재확산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빛과 소금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교회가 도리어 사회의 지탄거리로 전락하여, 개신교의 명성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몇 명의 사역자가 온통 한국교회를 위기로 내몰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자기 교회 앞에 붙인 공지의 문구가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덕이 되어야 합니다. 덕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이웃의 덕이 되는지 우리는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5-7)
최근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영적인 서적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가운데, <나는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한 가지 예화가 너무나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윌리 데이비스(Willy Davis)라는 미국의 미식축구에 있어서 유명한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데, 경기를 앞두고 아주 바쁜 시간에 잠깐 없어졌다가 돌아왔습니다. 어디에 갔다가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자신을 이렇게 선수로 만들어준 코치 <롬바르디>라고 하는 분이 지금 임종이 가까웠다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가서 2분 동안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이 바쁜 시간에 거긴 왜 갔다 왔느냐는 물음에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 코치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내가 그의 곁에 있으면 그는 언제나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분이기에 한 번 더 만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대화입니까? <자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분이기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는 그의 감동적인 대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느끼며 감격하도록 살아가는 삶에 복의 통로가 되는 지도자가 된다면 참으로 행복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롬바르디의 생전에 명언들이 있습니다.
“Perfection is not attainable. But if we chase perfection, we can catch excellence.”
(완벽은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벽한 연습을 한다면, 우린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이 단 하나도 없어야 한다. 우리에게 승리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론적이고 원리적인 지도자상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 경험되어진, 그리고 앞으로 소망하는 지도자상을 한번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속히 코로나가 종식되어 마음껏 교제하며, 선교여행을 하면서 기쁨으로 대면하는 그날을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은혜와 소망 안에서 박남규
하나님과의 동행(다윗)
1. 동행이란 무엇인가?
동행(同行)이란 같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Walk with God(같이 걸어간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Walk with God)과 하나님과 동역(Work with God)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같이 일하려면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잘 알려고 하면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관계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정보적인 단계입니다. 정보적인 단계란 대부분 신문을 보고 이야기하는 단계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일에 대하여 단순한 정보만을 소유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관계의 단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정보적인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만나보지도 않고, 대부분 신문이나 뉴스를 보고 평가하는 관계입니다. 그건 올바르게 아는 관계가 아닙니다.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관계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지식적인 단계입니다. 조금 더 아는 사람은 그 분에 대한 책을 읽습니다. 대통령 문재인에 대한 자서전이나 그 분이 쓴 책, <운명>을 통하여 훨씬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이건 지식적인 단계입니다. 정보적인 단계는 누구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였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식적인 관계는 자기가 직접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친밀한 단계는 인격적인 단계의 관계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인격적인 사귐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관계입니다. 그 분을 만나서 함께 식사하고 운동하고 이야기하면서 직접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단순하게 하나님에 대해 누구를 통해 들었다고 하는 정보적인 관계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하더라,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고 하더라고 하는 정보적인 관계입니까? 아니면 내가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고, 책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잘 알게 된 지식적인 관계입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박사들은 논문을 발표하여 학위를 받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지식적인 관계는 훌륭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을 통한 인격적인 관계는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교제, 동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경험하여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향하여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일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동행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의향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품은 비전과 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의 뜻을 함께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2. 다윗의 우선순위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이 시편은 압살롬의 난 때에 기록된 학설이 유력합니다. 전쟁 중의 급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승리를 위해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는 상황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먼저 목숨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먼저 구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많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전투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전과 지시대로 행하였을 때 그는 승리의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63:1-3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주님의 사랑(인자)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에 전쟁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모하며 교제하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구한 유일한 소원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시23:6, 26:6)주께 즐거운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6절) 다윗의 “최대의 즐거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J. Wesley)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외적인 성소의 아름다움 보다는 내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생명)보다 더 우선적이었습니다. 최고의 우선순위, 그야말로 Top Priority이었습니다.
(1) 최고의 우선순위(Top priority)란 자신의 삶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과 교제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빌3:8-9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고상하게 여긴다는 것은 <가장 위쪽으로 유지하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삶 가운데 최고의 위치, 가장 위쪽에 두는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 가운데 가장 위쪽에 둠으로, 그 분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제자도에서 요구하셨습니다.
◾눅14:25-27,33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자기보다도>, <자신의 소유보다도> 주님 자신을 가장 사랑하며 존귀하게 여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제자로 따라 갈 수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헨리 스카우걸은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성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을 보고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탁월하고 가치 있는 분입니다. 최고로 가치 있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모든 정당한 행동이 뒤따르는 것이 의로움의 극치입니다. 반면에 전혀 가치 없는 것에 최고의 애정을 쏟아 부음으로 모든 부당한 행동이 뒤따르는 것은 불의함의 극치가 됩니다. 자신은 의로움의 극치에 가치를 두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의함의 극치를 위해 생애를 허비하고 있습니까?
(2) 다윗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최우선적으로 교제하는 우선순위에는 절박함이 깔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아무런 소망이나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절박함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볼 때, 하나님 없이 제 스스로 무엇을 이룬 것은 없었습니다. 나는 양치기 소년, 목동이었으며 8형제 중에 말째가 되는 막내둥이로서 부모님이나 형들에게 전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목동에서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에의 왕까지 삼으셨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면 저는 끝장입니다. 제발 얼굴을 구하오니 거절치 마옵시고, 도와주셔서 다시금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세요 하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인자(저를 향한 주님의 사랑)가 생명보다도 낫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하여 사랑을 베풀어주시면 저는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의 목숨은 이제 경각간에 달려 있습니다. 저의 목숨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제발 얼굴을 돌리지 마옵시고, 저를 향하여 그 얼굴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하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27:8)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외면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면의 고통을 경험하여 보셨습니까? 그분만이 나의 고통을 아시고 필요들을 들어주시면 모든 것이 형통할 수 있는데, 그분마저 내 간구에 얼굴을 돌이키고 외면하셨다고 할 때 이제 남은 것은 절망뿐입니다.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희망과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절박함입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것입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앙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절박한 기도를 들으시고,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은 폐하시고, 후세의 좋지 못한 모략을 선택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모하며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생명을 연장하여 주셨습니다.
나의 삶의 최고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주님과의 동행과 교제가 내 삶의 최고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과 동행의 태도
(1) 주님과의 교제를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시63: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나의 삶 가운데 즐거움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나의 즐거움을 삼고 있습니까? Game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까? TV 연속극을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까?
다윗은 지금 왕의 자리에 있습니다. 다윗 당시의 이스라엘은 강대국입니다. 얼마나 즐거워하며 자랑할 것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즐거움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자랑의 대상은 하나님의 맹세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메시야에 대한 예언)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전날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 들린 많은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굉장히 피곤하셨을 턴데, 새벽 그것도 아직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의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즐거움으로 행할 때 인간적인 노력이나 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종종 언급을 하였습니다. 인생이 성공하는 데에는 3 단계가 있습니다. 지, 호, 락의 단계입니다. 성공하기 위한 최고의 경지는 즐기는 것입니다. 낙(樂)의 단계입니다. 논어 옹야 편에, “지지자는 불여 호지자요, 호지자는 불여 낙지자라”(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최고의 경지는 즐거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우리의 삶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브레난 매닝(Brennan Manning)이 프란시스코회에 입회하던 날, 나이 든 한 수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세상 어느 것도 멋있어 보이거나 탐나지 않게 된다오.”
시119: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시119: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119: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에이든 토저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다. 하나님은 쉽게 구원받은 자들과 교제하시며, 영혼에 평안과 회복을 주는 제약받지 않는 교제를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2) 주님과의 교제를 사모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구원의 풍성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사모란 욕구가 충족될 때까지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입니다. 갈급해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젖을 요구할 때 어떻게 하는지 보셨습니까? 먹어도 그만이요, 먹지 않아도 문제가 안 된다 하는 무덤덤한 표정입니까? 언제나 설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가 충분히 채워질 때 까지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사모하였다. 꿀과 송이꿀 보다 더 달았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119: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시119:123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시119:131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헐떡이면서 젖을 빠는 아이)
(3)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헌신이란 시간과 에너지와 정열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나의 삶에 최우선이 되기 위해서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시간의 헌신의 요구됩니다. 에너지의 헌신이 요구됩니다.
시119:147-148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상적을 하루에 세 번 기도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입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55:17)
시인은 아침 기도시간의 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며 주님의 율법에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시119;62) 또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밤중에 일어났습니다. 우리 개념으로 하면 경건의 시간(Quiet Time)을 가지려고 밤중에, 아마 새벽 2-3시경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교제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사모하며, 그것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때의 심정이 아닙니까? 만나는 것이 즐겁고, 만나는 것이 사모가 되고, 그래서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헌신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과의 연애하는 심정으로 교제하였습니다. (코로나 기간에 얻은 개인적인 간증)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시18;1-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찬양과 경배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대상29:11-13
◾사랑하며 존경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 앞에 나왔습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카드를 받았을 때, 가장 듣고 싶은 인사는 사랑하며 존경하는 ooo께 적힌 말이 격려가 됩니다.
4. 다윗의 삶의 축복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토미 테니는 “왕과의 친밀함이 당신의 미래를 위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스더서를 읽어보면 그 당시에는 왕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왕 앞에 나아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의 위급한 상황을 듣고, 왕의 부름을 입지 않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각오로 왕을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에스더의 모습을 본 왕이 그녀를 사랑스럽게 여겨서 금홀(지팡이)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살 수 있었고,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받았습니다. 평소의 아하수에로 왕과 에스더의 친밀한 관계가 에스더와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정도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삼상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삼상18: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삼하5:10, 대상1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삼하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임마누엘(마1:23)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with), 마누(us), 엘(God)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God is with us”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든 상황과 게임은 끝입니다. 그 어떤 것도 당할 수 없습니다.
신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습니다. 하는 행사마다 형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민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여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의 얼굴을 네게 비취사,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나에게 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나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로부터 돌리시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와 평강과 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얼굴을 향하시고 비취심은 축복을 뜻하지만, 얼굴을 돌이키심은 저주를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비추시도록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십니까?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8: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의 삶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삶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삶이라면 이 세상에 있어서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만사형통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가장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가장 권능이 있으신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스러움에 위엄에 가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며 우리와 비길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면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송사할 수 있습니까? 누가(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지난 카톡 메시지를 다시 상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보석처럼 간직해야 할 다섯 가지 확신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에서의 5대 확신을 기억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롬8:31),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32), 송사 하거나 정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33-34),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34),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35-39)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축복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존 파이퍼는 이 문장에서 영어 단어 두 개를 수정함으로써 그 의미를 놀랍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by enjoying Him forever)
우리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동행과 교제가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동행 없이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에녹의 기사를 보면,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고 하였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왜 하나님께서 에녹을 칭찬하셨을까요? 교제 자체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과의 동행을 통하여 에녹으로부터 참 기쁨을 누렸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에녹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행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행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랄 때 이루어집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147:10-11)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극심한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비난과 조롱과 박해에도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시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힘의 원천(근원)은 하나님이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가 하는 생각은 자신의 삶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면 결코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항상 함께 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고독할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쓸쓸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위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중요한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28:19-20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시니라”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I will be with you>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삭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야곱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요셉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모세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바울에게, 그리고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2) 하나님과의 동행은 형통한 삶과 사역의 비결입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성공적이라는 말입니다. Be Successful 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는 잘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모두 성공하며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과의 동행과 교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친밀하면 우리의 만사는 형통합니다. 창39:2,3,23절을 통하여 요셉의 삶의 형통한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17세에 어린 소년으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으려고 거룩함을 지킨 결과는 감옥이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었다고 세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까? 많은 고통과 고난과 억울함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고 하였습니다. 만 30세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바로 왕 다음의 총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많은 애굽인들을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새번역에는 보면 ‘형통께 하셨다’는 것은 ‘다 잘 되게 하여 주셨다‘ 또는 ’성공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창39:23) 성공의 주체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셉이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게 만드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성공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높이는 일과 낮추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다니엘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생활하였지만, 바벨론의 총리가 되어 7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왕의 시대와 바사왕 고레스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6:28)고 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포로의 신분으로서 네 명의 왕을 모시고 총리로서 약 70 년 동안의 형통한 자가 되어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의인이었습니다. 그 형통한 삶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는 위험을 알면서도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우리의 삶의 원동력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웃시야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는 무서운 경고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26:5) 웃시야는 유다 왕이었습니다. 웃시야는 왕이 되었을 때 부친 아마샤의 교훈을 좇아 하나님을 열심히 구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웃시야 왕은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군대가 많아지면서 교만에 빠졌습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26:16) 그는 교만하여 제사장의 하는 일을 스스로 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그의 열조가 묻힌 땅에도 묻히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할 때는 형통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떠나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범했습니다. 교만하면 악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은 떠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내리막이었습니다. 형통한 삶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경건 생활에 대한 열망이 중요함입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형통한 삶의 주체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시1:1-6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Fruitful(과실을 맺으며), Powerful(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Successful(형통하며), Rightful(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하신다)되게 하시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3) 능력 있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힘과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전선이 끊어진 파워 없는 배터리처럼,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영어 성경에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를 My strength is in HIM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나의 힘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힘과 능력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까? 다윗이 맨주먹으로 사자와 곰을 물리쳤고, 전쟁에서 많은 대적을 물리친 것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또한 일생동안 아주 훌륭한 왕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시야에 모든 왕의 표준(수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또한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성전에 예배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앉은뱅이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했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큰 문제꺼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었다간 큰일 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심문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6) 쉬운 성경에 보면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앞에 세워놓고 “도대체 너희가 무슨 능력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였느냐”고 심문하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했을 때 일어나는 것을 본 그들은 놀랐습니다. 종교지도자로서 지금까지 권세를 부렸던 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내 버려두면 큰일 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심문을 했는데,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8-10)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비밀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은 예수그리스도 이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의 보화입니다. 나의 모든 보화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고후4:7) 행4:13절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았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의 비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비로소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현대어로 말하면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런 능력이 나왔습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통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나왔던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했을 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의 동행이 우리의 삶을 능력을 보장하여 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것이요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격려하여 주십니다.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받아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11명의 제자를 삼았지만, 지금은 수천, 수만 명의 제자와 일꾼을 삼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하여 능력 있는 주님의 제자와 일꾼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끝>
<참고-형통한 삶과 형통하지 못한 삶의 원인>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신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수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왕상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왕하18:7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대상22:13 네가 만일 여호와께서 모세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든 율례와 규례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
◾대하20:20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대하24: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대하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대하31:21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욥36:11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시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단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형통하지 못한 결과>
민14:41, 대상13:12, 대하24:20, 렘10:21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렘 10:21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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