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에 이런 글이 있다.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맛있는 과일에 벌레가 더 많이 꼬이듯,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근심도 많고,
여자가 많으면 또한 투정도 많다.
하녀가 많으면 풍기 또한 문란해지고,
하인이 많으면 집안의 물건도 많이 없어진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만큼 돈 많은 부자들도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하지 않다.
전무후무하게 부귀와 영화와 쾌락을 누리고 산 솔로몬도 진정한 삶의 만족을 얻지 못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하였다.
대체로 사람은 돈, 출세, 건강 그 삼박자를 추구하지만
그 삼박자가 맞으면 이상하게도 타락한다.
돈 많고, 건강하고, 시간 많은 사람이 진실하게 사는 것을 본 일이 별로 없다.
재산이든 명예든 외모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라도 100% 만족할 수 없지만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전의 좋은 상태가 그대로 반복되면 벌써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고, 조금 못해지면 곧 불행해지듯이 불안해 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라는 양반은
“인간은 항상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에 오는 불만과 그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에 엄습해 오는 권태 사이에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생활과 삶의 차이, 괴리에서 나타난다.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은 생활의 단면이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면, 돈이 많으면 생활은 편리해질 수 있지만,
그에 비례하여 삶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즉, 행복은 반드시 소유와 소비를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네팔의 행복지수가 높은가 봅니다.
물질 등 외부적인 것이 행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15%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생활에 대한 관심이 많다.
산업 정보화 시대에 편리는 행복, 불편은 불행이라는 유물사관,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인간주의와 과학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학습에 기인한다.
즉, 예수주의Jesusism의 경멸 현상때문이다.
인생이 가장 불행한 것은 자기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잡으려는 욕망이다.
가치로운 '복'에 대한 진리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옛적에 플라톤은 "행복하기 위한 인간의 조건이 만족이 아니라 약간 좀 부족에 있다"라 하셨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남과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보내는 말솜씨
좀 모자란 듯 부족한 것이야말로 우리를 편하게 하고 결국은 행복하게 한다.
요즘 노페옷 70~80만원짜리 사 주는 부모, 명품으로 치장해주는 부모는 인간인 자식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애완견 개XX 짐승으로 사육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내가 극단적인가?
아니 아니되오 그렇게 키우면 아니되오!
"좀 모자람"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는 것이다.
약간의 모자람에도 항상 기뻐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늘 감사하는 마음의 여유가 행복이고 축복이다.
에릭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에서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Having)이 행복인 것으로 그릇 생각하고, 진정한 행복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임(Being)을 모르는 것이다."라 했다.
행복의 비결은 마음의 평정심, 여유있는 생활태도이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삶을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흘려가도록 걸어가는 것이다.
불편의 훈련을 하라.
차를 타지말고 걷기도 해라.
길거리표 옷도 입어라.
Jesusism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겸손하고 비방하지마라.
<옮긴글>
[출처]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