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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St. Margarita-Maria Alacoque)
양혜정(데레사) - 한국교회사 연구소 연구원
프랑스 파라이-르-모니알(Paray-le-Monial)에 있는 성모 방문 수녀회(Institut de la Visitation Sainte-Marie)1)의 수녀로서 예수성심 신심을 전파하는데 크게 공헌한 성녀. 예수성심의 사랑을 전하고 공경하도록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알라코크는, 예수성심의 발현과 환시를 체험하고 예수성심의 메시지를 계시 받아 전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생애와 발현 이야기는 예수성심 신심의 역사에 있어 커다란 의의를 차지한다. 알라코크 성녀에 관한 전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회의 롤링(lgnace-Francois Rolin)지도신부의 지시로 1685년 이후부터 작성한 자서전이다.2) 이 자서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1673년부터 1675년까지 2년 반 동안 여러 차례 성녀에게 발현하여 냉담, 불신, 합리주의, 유물론, 죄악 등이 만연된 시대에 예수성심의 신심을 전파하여 당신의 성심이 세상 어디서나 신뢰와 사랑, 봉헌과 흠숭, 보상과 희생을 받게 되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알라코크는 1864년 9월 18일 시복 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년)에 의해 시성 되었다. 축일은 10월 16일.3)
1. 생애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오툉 교구의 샤롤레(Charolais)지방 베로브로(Verosvre)에 있는 작은 마을 로투쿠르(Lauthecourt)에서 아버지 클로드 알라코크(Claude Alacoque)와 어머니 필리베르트 라멩(Philiberte Lamyn)사이의 7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토지를 많이 소유한 귀족 가문이었는데, 알라코크는 아주 어려서부터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신앙심이 깊어 집 근처의 작은 참나무 숲에서 혼자 오랫동안 기도하곤 하였다고 한다. 4세 때 이미 성체 앞에서 기도하면서 일생 동정을 지킬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지만, 그해 아버지가 4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알라코크는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대모 마르게리트(Marguerite de Sainte Amour)의 집인 코레슈발(Corechval)성으로 보내졌고, 성주이자 대모의 남편인 포트리에르(Claude de Fautriéres)경이 사망할 때인 여덟 살 되던 해까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상류 가정의 예의범절과 교양을 배울 수 있었다. 그 후 알라코크는 우르바노 회칙을 준수하는 글라라회(Ordo Sanctae Clarae)4)에서 운영하는 샤롤레의 기숙학교에서 2년여 동안 생활하였다.
이 기숙학교에 들어간 이듬해 첫영성체를 받은 그녀는 글라라회 수녀들의 생활에서 좋은 인상을 받아 완전히 세속을 떠난 생활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지만, 이내 극심한 신경 계통의 병을 얻어 결국 2년 만에 기숙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후 약 15년 동안 친척들의 학대를 참아 가며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생활하였는데, 집에 와서도 약 2년간은 병상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주면 일생 동안 성모 마리아의 딸로서 자신을 바치겠노라고 성모 마리아께 도움을 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도를 바친 뒤부터는 병이 나아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건강이 회복된 후에도 그녀는 알라코크 집안의 재산을 공동 소유하고 있던 친척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학대를 받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와 같은 모진 대우를 자신을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도구라고 생각하며 인내롭게 받아들였다. 알라코크가 이렇게 한 것은 멸시와 고통을 받는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어머니가 병에 걸려 음식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을 때의 그녀의 심적 고통은 이로 말할 수 없었으나, 밤낮으로 기도하며 열심히 간호하여 결국 그녀의 어머니는 병이 나을 수 있었다.
1669년에 견진성사를 받은 후 그녀는 다시 수녀회에 입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족들은 그녀가 외사촌 자매가 살고 있는 우르술라회(Congregation des Ursulines)5)에 입회하기를 바랐으나, 그녀는 하느님만을 위해 수도원을 택한 만큼 친척이나 친구들이 없는 곳으로 가길 원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택한 수녀회가 바로 파라이-르-모니알에 있는 성모 방문 수녀회였다. 1671년 6월 20일에 입회하여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 서원을 한 그녀는, 엄격한 금욕 생활에다가 기도와 본분에 매우 충실하였다. 그렇지만 자기가 아무리 심하게 아프더라도 사람들에게 인내와 친절로 대하는 생활 태도로 말미암아 동료 수녀들의 시기심을 샀고, 더군다나 평범하지 않은 신비 체험들 특히 1673-1675년에 이루어진 예수성심의 환시 체험으로 인해 본래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을 중시하던 성모방문 수녀회 수녀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구박을 받기도 하였다. 알라코크가 예수성심의 환시를 체험할 당시의 수녀원 원장이었던 소메즈(Marie-Francoise de Saumaise, 제임 1672-1678년)수녀는, 이해심이 깊고 동정심 많은 현명한 지도자였으나 다른 수녀들보다 수도 생활에 있어서 돋보이는 알라코크 수녀를, 그녀가 체험하는 환시의 참됨을 시험하기 위하여, 일부러 더 엄격하게 대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수도 생활에서 알라코크가 참아 받아야 할 커다란 시련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안배한 십자가였다.
마침내 알라코크는 1675년에 파라이-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 콜롱비에르(Claude La Colombiére, 1641-1682년)6)신부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온 참다운 계시를 받았음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직접 지도를 받은 지 겨우 1년밖에 안되어 콜롱비에르 신부는 영국의 공비(公妃)의 지도신부로 임명을 받아 떠났고, 1678년에는 안시의 성모 방문 수녀회의 그레피에(Peronne Rosalie Greyfié)수녀가 파라이-르-모니알 성모 방문 수녀회 원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레피에 원장 수녀는 알라코크에게 매우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하였다. 왜냐하면 새 원장 수녀가 부임할 당시 수녀원 내에서는 알라코크 환시 체험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으므로, 탁월한 지도력을 겸비한 새 원장 수녀는 이를 감지하고 더욱더 알라코크를 엄격하게 대하여 시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다시 알라코크는 몰이해와 부당한 질책을 받는 시련을 견뎌야 했고, 이와 아울러 외적으로는 육신의 병과 싸우고 내적으로는 악마의 유혹과 공격을 받는 영적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시련을 예수성심께 사랑으로써 봉헌할 고통과 희생으로 참아 받으며,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장상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장상의 명을 거스르지 않았다.
1684년에 새 원장으로 선출된 멜린(Marie Christine Melin)수녀는 덕과 재능이 출중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알라코크를 딸처럼 사랑하여 돌보아 주었다. 더욱이 그녀를 신뢰하고 진가를 인정하여 부원장직과 수련장직을 알라코크에게 맡길 정도였고, 이러한 이해와 호의적인 관계 속에서 마침내 수녀원 안에서 예수성심 공경이 실행될 수 있게 되었다. 1687년에 다시 부원장으로 재임된 알라코크는 1690년 10원 17일 사망할 때까지 예수성심 공경의 신심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활동하였다.
2. 예수성심의 환시와 전파
알라코크 성녀의 자서전이나 동료 수도자들의 증언들을 통해 볼 때, 기이한 현상이나 기적 또는 환시 체험 등이 그녀의 생애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12세 때 이미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병이 치유되었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질책이나 격려의 말을 전하였으며, 환시나 묵시 혹은 미래에 대한 계시 같은 초자연적인 체험을 하고 이를 전하는 역할을 많이 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그녀가 수녀가 된 후 2년 동안 체험한 예수성심의 환시이다.
1673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축일에 병실에서 일하던 알라코크 수녀는 짬을 내어 감실 앞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영성체 난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에 몰입해 있던 그녀는 온전히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단지 하느님의 사랑만을 느끼는 상태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환시를 체험하였다. 그 말씀은 “내 마음은 모든 사람들, 특별히 너를 깊이 사랑한 나머지 더 이상 그 열애의 불길을 내 심중에 품고 있을 수가 없어, 너로 하여금 그것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이 성심을 드러내게 하고 내가 네게 보여 주려고 하는 이 귀중한 보배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도록 하려 한다. 나는 이 큰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지(無智)하고 극히 무가치한 너를 선택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비로운 “마음의 교환”이 이어졌는데 “네 마음을 달라”고 요구하는 예수의 말씀에 알라코크가 승낙하자, 예수는 그녀의 가슴에서 마음을 상징하는 심장을 꺼내어 성심 속에 넣으셨다. 그녀의 심장은 타오르는 도가니 속에서 소진되는 미분자같이 보였다. 그런 다음 예수는 당신의 가슴에서 심장 모양을 한 불길 같은 것을 꺼내어 그녀의 가슴속에 넣어 주었다. 최초로 체험한 이와 같은 환시가 있은 후 그녀는 언제나 가슴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두 번째 환시 체험은 1674년 봄 어느 금요일에 이루어졌는데, 이때에는 성심에 대한 신심의 근원이 밝혀졌다. 즉 성심은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셔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유형화한 상징인데 사람들의 배은망덕으로 상처를 받으셨다. 성심에 대한 신심은 곧 응답받지 못하는 예수성심의 사랑의 상처를 갚아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필연적으로 보상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같은 해 6월경에 이루어진 세 번째 환시 체험에서는 성심의 신비가 한층 더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날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 앞에서 기도하고 있던 알라코크는 점차 모든 감각을 잃은 듯 황홀경에 빠져들었는데, 이때 오상이 태양처럼 빛나며 영광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나타났다. 온몸에서는 불꽃이 반사되는 것 같았고, 가슴은 타오르는 도가니 같아 보였다. 예수는 불꽃 가운데 있는 성심을 열어 보이며 상처받은 성심을 위로해 주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지시하였다. 그것은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 할 것과 매월 첫 목요일 밤중에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며 예수와 괴로움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성심의 고독을 위로하고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구속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7)
마지막으로 네 번째 체험은 1675년 성체 축일(Corpus Christi)8) 다음 주간인 6월 16-20일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때 예수가 알라코크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유명하다. “보라! 사람들을 이렇듯 사랑하였고, 그들에게 이렇듯 많은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해 오직 배은망덕만 당하는 이 성심을! 내 성심은 망각, 무관심, 무례를 견디고 때로는 특별한 사랑의 유대로써 내 성심과 밀접히 결합된 이들로부터 이 모든 능욕을 당한다.” 그리고 예수는 성체 축일 일주일 후 금요일을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정하고, 그날 영성체하는 것은 물론 제대 위에 성체를 현시함으로써 성심이 받은 불경을 배상하기 위하여 엄숙히 보상 행위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또 예수의 성심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경하도록 권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성심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줄 것을 약속한다고 말씀하였다. 알라코크가 이 마지막 성심의 발현을 체험한 것은 콜롱비에르 신부를 지도신부로 만난 지 3개월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편 알라코크 성녀가 특별히 선택되어 예수성심의 발현을 체험할 17세기 당시의 프랑스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Louis XIV le Grand. 1638-1715년)는 섭정을 폐지하고 친정을 실시함으로써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였지만 사회적, 도덕적으로는 암흑 시대였다. 백성들은 부당하고 무거운 세금 때문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왕과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등 말할 수 없이 타락한 상태였다. 또한 종교계에서는 이단인 얀센주의(Jansenismus)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부정하고 있었다. 즉 사람들은 하느님을 냉혹한 고용주나 감독처럼 여겨 냉담과 무관심에 빠지거나 불경을 무서워한 나머지 성체성사를 멀리하게 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알라코크 성녀는 예수성심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도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알라코크는 예수의 명대로 콜롱비에르 신부에게 자신이 받은 성심의 메시지를 낱낱이 전하였고, 이를 참다운 예수의 게시로 받아들인 콜롱비에르 신부는 1675년 6월 21일 금요일에 자신과 자신의 모든 일을 엄숙하게 성심께 봉헌하였다. 이후부터 콜롱비에르 신부와 알라코크는 성심을 전파하는 최초의 사도가 되었고, 성모 방문 수녀회에서도 점차 알라코크의 예수성심의 환시를 예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신심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685년 7월 20일에 예수성심을 기념하는 공경 예절이 수련소에서 거행된데 이어 이듬해에는 예수성심신심이 이 수도 공동체의 주요 신심으로 채택되었다. 또 1688년에는 수녀원 뜰에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경당이 설립되었는데, 경당 축성식이 거행되던 9월 7일 알라코크는 약 2시간 동안 탈혼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심은 곧 전 세계의 성모 수녀회에 전파되었다. 또한 1689년에 알라코크는 루이 14세 왕궁에 예수성심께 봉헌된 경당을 설립하고 군기와 무기 등에 예수성심 성화를 새기도록 청하여 왕의 수락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한편 콜롱비에르 신부는 예수성심에 관한 영성서인<영적인 은둔>(Retrait Spiritulle)을 저술하는 등 예수성심 신심을 널리 전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에 못지않게 이 신심을 널리 전파하는데 기여한 사람은 예수회의 크루아제 신부였다. 특히 그는 리용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 사이에 예수성심 공경이 전파되도록 노력하였다.
3. 예수성심 신심의 역사와 축일 제정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 신심의 근거는 신구약성서에 뿐만 아니라 교부들과 영성가들의 가르침 및 역대 교황들의 말씀에서 풍부히 찾을 수 있다.9) 교부들은 예수의 마음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내리므로, 성령과 함께 예수성심을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아담의 늑방에서 하와가 탄생하였듯이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사상이 생겨났다.
이후 중세기(1100-1350년)에는 예수의 심장을 은총의 샘으로 보는 교부들의 신학에서 차츰 예수성심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공경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커 갔다.10) 13세기에는 특히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이 신심을 대중적으로 전파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1601-1680년)가 렌(Rennes)의 주교로부터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을 지내도록 허락 받은 뒤 1672년 10월 20일에 최초로 성심 축일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에 예수성심의 공경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알라코크 성녀가 성심의 메시지를 받은 후부터였다. 또한 성녀가 예수성심의 환시를 체험한 이래 이에 감화를 받아 예수성심 신심을 전파하기 시작한 콜롱비에르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예수회 회원들이 이 신심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예수성심 공경을 전파하는 이 같은 열의는 하느님을 징벌의 심판자로 보는 얀센주의자들의 저항으로 방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이 신심은 1700년까지 주로 수도자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고, 차츰 평신도들 가운데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후 1765년에 교황 글레멘스 13세(1758-1769년)에 의해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이 공식적으로 인가 되었으며, 1856년에는 교황 비오 9세(1846-1878년)에 의해 로마 전례력에 삽입되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1939-1958년)는 1956년 3월 15일 예수성심 대축일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회칙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를 통하여 예수성심 공경의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다. 또 예수성심을 지극히 공경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1월30일에 발표한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에서 예수성심 대축일을 사제들의 날로 정하고 가능한 한 이날에 사제 서품식을 하도록 권하였다.
1) 1610년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567~1622년)와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 1572~1641년)이 프랑스 안시(Annecy)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방문하는 사도직 수행을 목적으로 창설한 관상적 활동 수도회이다.
2) 이 자서전은 1726년에 로마에서 갈리페(Joseph de Galliffet)에 의해 발행되었으며, 1733년에 리용(Lyon)에서, 1745년에는 낭시(Nancy)에서 각각 개정 출판되었다. 연대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알라코크 성녀가 사망한 후에 예수회의 크루아세(Jean Croiset, 1656~1738년) 신부가《마르가리타-마리아 알라코크 수녀 약전》(Abrége de la Vie de la Soeur Marguerite-Marie Alacoque)을 펴냈으며 오쾽(Autun) 대목구장을 역임하고 수아송(Soissons)의 주교였던 랑구에(Languet de Villeneuve de Gergy, 1677~1753년) 몬시뇰이 1729년에 알라코크 성녀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존경할 어머니 마르가리카-마리아의 생애》(Vie de la Vénérable Mère Marquerite-Marie)를 저술하였다.
3) 성녀의 축일은 처음에 10월 17일로 축일표에 수록되었고,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어 기념된 것은 1929년 6월 이후이다. 이 전례력에는 성녀의 축일을 10월 16일로 정하였다.
4) 1212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 1181/1182~1226년)와 성녀 글라라(Clara Assisiensis, 1194~1253년)가 창설한 관상 봉쇄 수도회로, 1215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에 의해 인가되었다. 알라코크가 다녔던 기숙학교를 운영하던 글라라회는 초창기 성녀 글라라의 회칙을 따른 수녀회가 아니라 13세기 중엽부터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년)의 회칙을 따르던 수녀회였다.
5) 1535년에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470/1474~1540년) 성녀에 의해 창설되어 1544년에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년)에 의해 인가된 교육 수도회.
6) 알라코크 성녀에게서 감화를 받아 훗날 예수성심의 신심을 전파하였는데, 특히 영국 요크 지방에서 이 신심을 전파하였다. 1929년에 시복되었다.
7) 예수가 명하신 이러한 실제적인 보상 행위는 훗날 ‘성시간’ 신심으로 발전되었다. 알라코크 성녀는 성시간 신심을 콜롱비에르 신부와 함께 활성화시켰으며, 예수회의 드브로스(Robert Debrosse)에 의해 보다 조직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1829년에 성시간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알라코크 성녀가 살던 곳이자 이 신심의 발상지인 파라이-르-모니알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그 본부를 두고 신심 전파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교황 비오 8세(1829~1830년)가 성시간 신심 실천을 전대사와 함께 인준한 데 이어 여러 교황들이 전대사를 확인하며 이 신심을 장려하였다.
8) 그해 성체 축일은 6월 13일이었다. 성체 축일은 5세기 초부터 성체성사의 제정과 신약의 새 파스카를 기념해 오던 관례에 따라, 그리고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년)가 1264년에 교서를 통해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새 대축일’을 제정하도록 한 의도에 따라 1317년에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년)에 의해 제정된 축일이다. 이 축일은 1970년 이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Festum Corporis et Sanquinis Christi)이라고 불리고 있다.
9) 요한복음 7장 37-39절과 19장 33-37절에서는 예수의 늑방에서 구원의 생명수가 첫 성령 강림절부터 끝 날까지 계속하여 온 세상으로 흘러내릴 것을 약속한다.(이사 12,3; 에제 47,1-12; 즈가 13,1; 요엘 2,28; 사도 2, 17 참조)
10)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034~1109년),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년).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년), 마틸다(Mathilda, 895~968년). 제르트루다(Gertrudis, 1256~1302년). 대 알베르코(Magnus Albertur, 1200~1280년), 시에나의 가타리나(Catharina Senensis, 1347?~1380년) 등은 중세 예수성심 공경의 대표적인 성인들이다. 특히 제르트루다 성녀는 성 요한의 발현을 체험하였는데, 성 요한은 성녀에게 나타나 자신이 주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성심의 비밀을 듣고서도 그것을 누설하지 않은 것은 다음 세대에 가서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을 때, 그것을 밝혀 하느님을 떠나가는 자들이 참된 신심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첫댓글 감사히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