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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의 영성과 기도의 사도직
Fr. James Kubicki, S.J.
1.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난 수도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수도자와 성직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활동을 통해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찾는 길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를 잘 표현하는 핵심적인 두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음(Finding God in All Things)”과 “활동 중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이다. 기도의 사도직은 우리들을 “기도의 사도”가 되게 하여, 이 같은 길을 따르게 하고 매일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게 한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이상은 기도의 사도직이 시작할 때부터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1844년 프랑스 발(Vals)에서 학업 중이던 예수회 신학생들은 해외에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그들을 선교와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게 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선교사가 되어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일상의 평범한 일들과 지루한 학업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것은 그들에게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러자 영적 지도신부였던 프랑소아 하비에르 고트를레(François Xavier Gautrelet)는 그의 영명 축일에 신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는 학업에 몰두하여야 하는 자신들의 현실을 잊고 있는 젊은 신학생들에게, 빨리 선교사가 되려는 마음으로 조급해하지 말고 바로 지금 이곳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사도와 선교사가 되라고 말하였다. 선교 현장에서의 어떠한 열매와 성공도 영적인 수단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미사의 희생제사와 일치하는 그들의 기도와 희생으로부터 오는 은총임을 믿으며, 그들의 모든 기도와 학업에서 오는 좌절 그리고 그들의 조급함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제안하였던 것이다.
고트렐레 신부의 이러한 제안은 신학생들에게 큰 영감을 주어, 그들이 일상의 평범한 일들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영감은 곧 평신도들에게 퍼져나갔고, 그들은 그 가르침을 통해 일상의 평범한 삶 속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도 같은 제안을 하고 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5:17).” 17세기 가르멜회 수사인 “부활의 라우렌시오(Lawrence of the Resurrection)”는 “하느님 현존의 실천”을 설교하였는데, 그의 가르침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적인 삶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일반적이며, 가장 필요한 실천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매 순간, 특별히 유혹, 영적 메마름, 환멸, 심지어는 주님께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순간과 죄악의 순간조차도 그분과 함께하며, 어떤 특별한 형식 없이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분과 대화함으로써, 그분의 신성함이 나와 함께 하심에서 오는 기쁨을 발견하고 그에 익숙해 지는 것이다.”
19세기말 또 다른 가르멜회 수도자이자, 최근 두 번째 기도의 사도직 수호성인이 된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스스로 “작은 길”이라고 언급한 방법을 통해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을 대중들에게 전파하였다. 데레사 성녀는 12세 나이에 회원으로 공식적으로 등록한 기도의 사도직 영성을 통해 이러한 방법에 대해 배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최근에는, 매 순간을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살아감으로 해서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캘커타의 복자 마더 데레사 수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마더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우리가 한 행동에 쏟아 부었는가 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냐시오의 영성과 기도의 사도직에서 핵심이 되고 있는 이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찾고,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2. 기도의 사도직에서 찾을 수 있는 성 이냐시오 영성의 두 번째 요소는 현실성(실용성)이다. 영신수련은 매우 방법론적인 프로그램으로, 피정자들은 이를 통해 성령의 말씀에 자신들의 마음을 여는 훈련을 한다. 기도의 사도직은, 단순한 기도를 통해,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 이상과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성을 통합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침 봉헌기도 또는 매일 봉헌기도이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의 사도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마음에 새기며, 모든 “기도와 일 그리고 기쁨과 고통”을 포함한 자신의 하루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한다. 즉, 그날의 모든 순간들이 봉헌되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 티모테오 2:4)”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되도록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자신과 동료들이 어떻게 구 소련에서의 투옥과 추방을 견디어낼 수 있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회의 월터 취제크(Walter Ciszek, S.J.) 신부는, 그것은 바로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였다고 답했다. 그의 저서 “나를 이끄시는 분(He Leadeth Me)”에서 취제크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생각에, 사람들이 구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침봉헌은 여전히 가장 좋은 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날 하루의 모든 기도와 일 그리고 기쁨과 고통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그것을 다시 그분께 봉헌함으로 해서, 우리 자신에게 다시 한번 그분의 섭리와 왕국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현존 안에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단지 기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차이가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 보여질 것인가! 우리는 자신의 모든 삶을 기도와 통회에 바친 관상가들처럼 계속해서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넋 잃은 사람처럼 하루 종일 하느님만 생각하며, 우리 주변사람들, 즉 가족과 친구 그리고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며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봉헌되고 또 그것이 약속된 것인 한, 그날의 모든 행동과 일 그리고 기쁨과 고통을 기도로 만듦으로써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매일 봉헌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며 단순히 암송하고 잊어버리는 기도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봉헌이 하루 전체를 통해 새롭게 되도록 하여야 한다. 봉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고,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 영적 인식을 발전시키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저녁 양심성찰이다. 따라서 기도의 사도직에서는 저녁 양심성찰을 매일 봉헌의 마지막 단계로 권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의 매 순간과 하루 중의 모든 일을 하느님께 봉헌할 뿐만 아니라,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했는지를 성찰한다. 이러한 두 가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기도방법이 “활동 중 관상”으로 가는 확실한 길이다.
3. 이냐시오 성인은 하느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인간성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신수련”에서 그는 피정자들이 스스로 복음의 장면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상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의 의도는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주님께 대한 내적 인식을 가져, 그분을 더 사랑하고 더 잘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영신수련 104번)” 특히, 이냐시오 성인은 오감을 활용하는 기도를 권장하며, 지성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행하는 기도를 강조했다. 이는 기도의 목적이 단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그 분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성적인 면에 호소하는 기도방법을 찾고 활용하도록 권고하였는데,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신심과 열정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회헌에서도, 이냐시오 성인은, 양성 중인 예수회원들에게, 두 번의 규정된 양심성찰과 더불어,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에 “성모소일과, 묵상, 기타 영적 행위” 그리고 “각자의 신심에 따른 여러 기도”를 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그들을 영적으로 진보시킬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참된 신심과 열정”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기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주는 것이다.(영신수련 342-343번 참조)
우리는 이냐시오 영성의 이러한 세 번째 요소를 기도의 사도직이란 이름 자체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도의 사도들”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천상왕국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하기를 갈망하며, 그분과 함께 머무르고(요한 1:35-39), 그분을 따르며, 그분과 함께 일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벗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의” 사도들이다.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암송만으로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마르타와 같은” 우리의 모든 활동에서, “필요한 바로 그 한 가지(루카 10:42)”를 위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 드린 우리의 봉헌을 지속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냐시오의 깊고 개인적인 사랑에 영감을 받아, 기도의 사도직이 19세기 중반 시작한 직후부터,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을 바탕으로 기도의 사도들을 형성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신심은 예수성심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인식하는 것과, 반대로 그 사랑에 대한 각 개인의 응답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신심을 통해 우리는 개인적이고도 애정 가득한 기도 안에서 성장하게 된다. 우리는 단지 기도문들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이냐시오 성인이 피정자들을 영신수련의 각 수련 끝에서 초대했듯이, 주님과 담화를 나누며 그분과 함께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자 한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8년에 발표한 회칙 “예수성심께 드리는 보상에 관하여(Miserentissimus Redemptor)”에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매우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되돌려 그분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게 하고, 더욱 온전히 그분을 닮도록 한다.(#3)”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영신수련”에서 추구하는 은총이 이 신심에서 구체화되고 있으며, 이 신심은 기도의 사도직 영성과 활동에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이냐시오 성인의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그가 미사를 집전할 때 놀라운 방법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그의 영적 일기에서 1544년부터 1545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짧은 부분은 미사를 집전할 때 그가 종종 체험했던 눈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체성사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께서는 육체를 취하시고 온전한 희생을 통해 자신을 성부께 봉헌하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경이로운 신비를 기념하면서 종종 엄청난 감정에 압도되곤 하였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육체를 취하시고 모든 인류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고 계시다는 사실은 ‘성체성사의 경이’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체험하였던 것이다(“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5-6 참조).
이냐시오 영성의 네 번째 주요한 요소는 성체성사의 신심이다. 기도의 사도로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자 벗인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미사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온전한 봉헌에 일상의 삶을 통한 우리 자신의 봉헌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매일 봉헌기도를 통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삶 전부(기도와 활동, 생각과 느낌, 기쁨과 슬픔)를 “온 세상에서 봉헌되는 거룩한 미사성제”에 일치시킨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세상 구원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그분의 은총을 통해, 몸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성체성사의 삶”을 살고자 열망한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새 1:24).”라는 도전을 받아들인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극심한 수난에서, 그 분의 온전한 희생에서 모자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참여이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하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놀라워라, 기뻐할지어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네! 그분께서 머리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이니, 그분과 우리가 함께 온전한 한 인간이 되었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머리와 지체에 가득하네! 그렇다면 ‘머리와 지체’는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라네!” 우리들 각자는 세례와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는데,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 성사를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의 찢겨진 가슴”(요한 19:34)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성사와 하나되어 매일 우리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그분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5. 영신수련은 자신을 봉헌하는 심오한 기도 “받아주소서(Suscipe)”로 끝을 맺는데,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그분의 은총과 사랑을 청하며,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이 기도는 영신수련의 정점이다. 영신수련 각 수련에서 예수님을 관상한 후,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그분을 닮고자 한다. “받아주소서”는 매일 봉헌기도와 같이 우리가 매 순간을 사도적 삶으로 살아가는 “사도직”으로 이끈다. 이냐시오의 영성은 예수님처럼 타인을 위한 사람이 되려는 열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온 삶이 – 그 순간이 기도이든, 바쁜 활동 중이든, 고통이든, 기쁨이든 – 사도적이 되는 것이다. 매 순간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복음화의 열매를 키워가는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기도의 사도직에서 볼 수 있는 이냐시오 영성의 마지막 요소는 평신도로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에게 특히 부합된다. 평신도 사도직을 미사 중에 독서를 읽는다거나, 병자들에게 성체를 모셔간다거나,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과 같은 교회직무의 측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평신도 사도직은 세상 안에서 누룩이 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노드 후 발표한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평신도의 실존에 두 가지 병립된 생활은 있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 가치와 요구를 지닌 이른바 ‘영신’ 생활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 생활과 노동, 사회적 관계, 정치, 문화 생활 등 이른바 ‘세속’ 생활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그 모든 실존과 활동 영역에서 열매를 맺는다(#59).” 기도의 사도직 영성은 우리가 매일 일상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사도로 인식하도록하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심지어 우리가 잠을 자는 순간마저도 매일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피정자들에게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기를 권고한다. 각 수련의 시작에서 두 번째 준비단계는 피정자들이 이 기도시간에 구하고자 하는 은총을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청하도록 언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매일 봉헌기도도 매우 구체적이다. 우리는 “기도의 사도직”이란 이름처럼 어떠한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있다. 매일 봉헌기도를 통해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재일치와 죄로 초래된 온갖 악들의 치유를 위해, 그리고 각 교구장의 지향과 교황님의 두 가지 월례 지향을 하느님께 함께 기도 드린다.
이냐시오 성인과 초기 동료들은 교황님의 지도를 받기 위해 찾아갔다. 그들이 교황님께 간 것은, 그분은 교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며, 그래서 그들을 가장 긴급히 필요로 하는 곳으로 파견하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사도직 또한 교황님을 찾아가, 우리가 이 시대에 가장 긴급히 필요로 하는 것을 여쭙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달 교황님께서 주시는 두 가지 구체적인 지향을 위해 매일 일상의 삶을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사도적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교황님과 일치하여 사도적 삶을 사는 것은 기도의 사도직에 드러난 이냐시오 영성의 다섯 번 째이자 마지막 요소이다.
6. 기도의 사도직은 한 예수회원에 의해 창설되었고, 예수회는 160여 년 동안 이 사도직에 투신하여왔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인데, 기도의 사도직 영성이 매우 이냐시오적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5년에 있었던 “기도의 사도직 국가별 책임자 세계대회”에서 강론을 통해 이러한 관계를 새롭게 하였다. “기도의 사도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을 예수성심께 봉헌함으로써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하나될 수 있다는 위대하고도 위로 가득한 사실을 광범위하게 전파하는데 있어 중요하고도 확실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회가 자신들의 힘과 재능과 조직 그리고 순명을 이 고귀한 영적 목표를 위한 봉사에 계속 투신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오늘 다시 한번 이 사명을 총장님의 열정에 위임하는 바입니다.”
예수회 또한 이러한 관계를 새롭게 하였는데, 1995년에 있었던 예수회 총회는 교령 13 “평신도와의 협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도의 사도직은 성체성사를 실현하고, 교회의 지향을 위한 매일 봉헌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예수성심께 봉헌하고, 사도적 봉사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수회는 교황 성하께서 위임하신 이 사도적 봉사와 ‘청소년 성체 운동(Eucharistic Youth Movement)’ 또한 지원하고 장려한다.” 우리는 앞으로 이냐시오 영성에 뿌리를 둔 기도의 사도직이 예수회 안에서 지속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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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도의 사도직 파이팅!!! 매순간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기를 희망하며,...
이냐시오성인의 기도의 사도직을 따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매일 한다고 하면서 한번 기회를 놓치고 나니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