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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Fr. Arrupe's writing on the Heart of Jesus_mod.hwp
그리스도교 신비의 중심이자 우주의 열쇠이신 예수성심
1980년 1월에 쓰인 이 글은 미국 ‘성심의 선교회’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영어로 출간된 것이다. 이 글은 예수성심에 대한 베드로 아루페 신부(Fr. Pedro Arrupe, SJ)의 신학적이고 실존적인 사상을 가장 잘 집약해 놓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heart)’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인 의미로 보든 성서언어적인 의미로 보든, 이 단어는 칼 라너가 이야기하는 ‘우어보르트(Urwort)’, 즉 다른 어휘의 근원을 이루고 새로운 어휘를 형성해주는 어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종류의 어휘들은 충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간단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조그마한 바다조개 하나가 대양(大洋)의 거친 풍랑을 떠올리게 하듯이, 그런 종류의 어휘들은 다채로운 관념과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그 누가 ‘어머니’에 담긴 모든 의미를 감히 다 나열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어머니’를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겠는가? 누군가 ‘어머니’라는 단어의 개념을 무엇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그 설명을 듣고 난 이는 ‘그래, 그 말도 모두 맞아. 하지만 다른 뜻도 더 담겨 있지’라고 응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어머니’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의 심연에 다다를 수 없을뿐더러 그나마 자신이 알게 된 의미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단어가 지닌 가치는 더 깊고 복잡다단한 현실 안에서 서로가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데에 있다. 언어심리학적으로도 그런 종류의 어휘는 더 깊은 탐구를 요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풍부함과 깊이는 어떤 점에서는 그런 종류의 단어가 지닌 약점이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너무도 자주 쓰이다 보면 종종 남용되다 못해 오염된 싸구려 어휘로 전락해 버리거나, 본래 지닌 향기를 잃은 채 밋밋한 단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의미가 과장된 채 지나가는 유행에 따라 마구 쓰이다가는 갑자기 폐기처분되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단어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고 그 풍부한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가 다시금 생명을 되찾고 활짝 피어나게 마련이다.
‘예수성심’이라는 어휘도 그러한 변천을 겪어왔다. 상징으로 점철되고, 흘러가게 마련인 문학적 스타일과 시대적 이미지에 둘러싸이면서, 이 단어는 쇄신의 물결 아래에 그냥 파묻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예수성심’은 의미심장하고 성서적인 맥락에 뿌리를 깊이 박은 말이기에 다른 단어로 쉬이 대체할 수 없다. 이 단어가 지닌 본래의 풍부하고 신비로운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피상적으로 덧칠된 의미들만 걷어내면 되었다. 예수성심이란, 성부께로부터 파견 받으셨으며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모든 사랑이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셨으며 우리들 각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이루고 계신다.
“… 인간의 내면적인 신비는, 성서적 언어에서든 비성서적 언어에서든, ‘마음’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반복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인간의 신비를 꿰뚫어 그의 ‘마음’으로 들어오신 분이시다.”(Redemptor Hominis, 8) “그분은 인간의 본성을 단순히 흡수하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당신 것으로 삼으셨기에 우리에게도 인성이라는 것이 상대화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육화를 통해 당신 자신을 우리들 각자와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시키셨다. 그분은 인간의 손으로 일을 하셨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셨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Gaudium et Spes, 22)
그리스도 성심의 사랑 - 구원사를 이해하는 열쇠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인류의 구원이다. 육화하신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관계에 개입하시어 이를 통째로 변화시키신다.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이 새로운 계약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힘은 그분 성심의 사랑,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불러일으키시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바쳐졌으며 동시에 매번 성체성사를 통해 갱신되는, 화해의 희생으로써 이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그 희생은 성부께서 즐겨 받으셨으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광스럽게 승화된 희생이다.
본래의 가르침과 거기서 파생된 복음서들은 바로 이 사랑을 담은 이야기들이다. 네 개의 복음서들은 이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특히 요한복음의 후반부와 요한의 첫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일종의 권고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 성심께서 느끼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그 사랑에 우리들도 보답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입장에서 온 세상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는 우리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바로 그 ‘새로운 상황’에 대한 소식이었다. 이제 낡은 법은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파기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네 번째 복음과 바오로 계열의 작품들은 서로를 훌륭하게 보완하면서 밝히 드러내 주었다.
구약이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벌어진 인간 역사의 긴장을 담고 있으며 ‘돌로 된 심장’ 대 ‘새로운 심장’의 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다면, 신약은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바로 Cor Christi 대 Cor hominis, 즉 그리스도의 심장 대 사람의 심장이 그것이다. 이로써 셈족 언어에서 전형적으로 쓰이던 한 단어는 신약의 메시지 안에서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아드님이 느끼고 행하신 것, 그리고 상호 관계 안에 놓인 각 개인이 느끼고 행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그 성심에 따라 정의를 내리면…
신약에서, ‘성심’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깊고 따뜻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표현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표현을 로고스(logos)라는 말로 자주 표현하고 있지만, 많은 구절들이 로고스 개념만으로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도 로고스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로고스만으로 이곳저곳에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개성을 드러내는 인간적 특질들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로고스라는 단어는 정신적인 측면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그려내기’에는 부족하다. 이와는 달리, 복음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특질들을 그의 성심으로 포착하기는 어렵지 않다. 더욱이 외적인 표징들, 비유나 담화들, 그리고 복음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케리그마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등을 예수성심의 관점에서 읽지 않으면 그 심오한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심의 관점에서 읽으면, 예수의 삶이 그 각 순간순간들이 온전하게 이어진 전체의 삶으로 다가온다. 그분이 하신 말과 행위에서 그분 존재의 가늠할 수 없는 내적 깊이와 무한한 인성-신성의 결합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성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에 전적으로 투신한 한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과 행위를 통해 알아듣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삶과 존재가 지닌 이러한 내적 깊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성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낡은 관습에 입각한 경건주의 때문은 아닌 것이다. 이 단어보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페 3,18)를 더 잘 전달하는 것은 없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물론이거니와 지혜,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표현도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신 길, 진리, 생명, 빛, 착한 목자, 빵 등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저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셨을 때, 은유법은 접어두고 단순한 일상적 언어를 쓰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각자의 마음을 존중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각각의 개인을 그 마음에 따라 판단하신다. 예언자들의 가르침에도 내적인 자세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4,1-4 그리고 기타 곳곳에)와 에제키엘, 또 시편 51장에 나타난 회심의 언어인 ‘Miserere’를 보면 그러하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같은 주제를 핵심으로 삼고 있을뿐더러 예언자들이 강조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셨을 터이지만, 만약 예전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회한의 슬픔이라는 표현에 함축(마음의 ‘부서짐’)되어 있었다면 이제 그분의 가르침은 반대로 회한이 사랑 안에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한결같고 성실한 모습을 가장 중요하게 보신다. 그분께서 거룩한 분노를 숨기지 않으시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위한 의로움 때문이다. 그분께서 반복하여 강조하시는 것은 인간의 선함과 악함이 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인 자아를 강조하면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그때까지 예언자들이 거의 강조하지 않았던 것 즉, 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그의 내적 자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구약 성서의 하느님 왕국 이미지는 이제 크게 변화된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인간과 하느님의 일치가 성취될 것임을 마음으로 안다. 하느님 왕국은 종말론적인 완성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ekklesia(교회), 즉 일종의 공동체일 뿐이다. 이 공동체는 신앙을 통해 내적인 회심을 얻고(2고린 1,2 참고) 형제적인 일치 안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해가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성심과 인간의 마음 사이의 관계에서 핵심은 사랑이다. 신앙이나 여타 다른 어떠한 감정보다도, 사랑만이 인간을 초월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고, 사랑만이 하느님을 가장 근사치로 묘사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무한한 사랑에 절대적 사랑으로 순명하셨고, 동시에 그분은 인간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말씀이자 사람으로서 당신이 지닌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인류를 향한 사랑이 녹아드는 용광로이시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은 인간의 마음은 이 사랑에 맞갖게 응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께서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다”(갈라 2,20)라고 하실 때 말하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의 신적인 위격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개의 본성이 사랑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
구약에 나타난 야훼께 대한 사랑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실 때 당신이 주도하셨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느님의 주도하신 활동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거나 그에 맞갖게 응답하였다고 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성서의 인물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었는데, 셈족에게 ‘무엇을 안다는 것’은 곧 그것에 대한 어떤 경험을 갖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기에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이해하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신비롭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는 그분이 인간들 안에서 당신의 친구들, 다시 말해 예언자들과 성조들을 손수 선택하시는 모습이다. 이 사람들은 야훼의 사랑과 분노를 가까이에서 직접 지켜보는 이들이다. 백성들은 찬미와 순명으로 응답한다. 유배를 전후로 한 많은 시편들은 집단으로서만이 아니라 개인들도, 특히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의로운’ 개개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노래한다.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질문들은 많이 남아 있다. 야훼의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그 사랑에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야훼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가? 야훼께서는 한 분 뿐인 하느님, 창조주, 보호자이시며 의로운 이들에게 신비로운 방식으로 보상해 주시는 분으로 받들어진다. 그분의 사랑은 당신께서 친히 선택하신 백성과 스스로 혼약을 맺으시는 계약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이에 이스라엘은 법에 대한 복종 그리고 충실함과 순명으로 응답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십계명의 첫째 가르침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명 6,5)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담긴 뜻이다.
아가서도 사실 야훼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 서로를 찾고 서로를 소유하는 과정에 대한 시적인 찬양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야훼와의 계약을 사랑의 관계로 묘사하는 예언적 전통이 있는가 하면, 법적인 전통도 존재한다. 야훼와의 계약을 법을 수용하고 그에 따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러한 법적인 전통은 이후 점차 더 우세해진다. 그 법이란 것은 사랑을 질식시킬 만큼 강력했다. 이로써 야훼께 대한 사랑은 야훼께 대한 두려움으로 변화한다. 무게중심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에서 ‘노예적인 복종’으로 옮겨간다.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사이인들에 대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신다.
어쩌면 삼위일체의 신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그런 상황이 당연하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한다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면, 사랑은 완전할 수 없다. 그리고 어찌 야훼 하느님께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오심으로써 인류 역사에 개입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메시아 상은 이렇게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제왕, 사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시아와 성부의 관계는 당시에 아직 제대로 정의 내려지지 못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메시아와 인류의 관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터였다. 약속의 시대에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렸던 베일은 하느님 사랑의 충만함마저도 뒤덮고 있었다. 위격의 다수성은 희미한 은유와도 같은 것이었고 ‘보내진 분’이 그 위격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것도 인식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선택된 분’이 고통과 죽음을 겪는다는 일은 유대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숨 막히는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리라. 성심으로 바라 본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기대들을 훨씬 뛰어 넘으시며 인류의 구원사에 핵심적인 열쇠로 오신다.
구약에서의 이웃 사랑
구약에서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고는 있으나 애매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레위기에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계명을 ‘두 번째 계명’, 즉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와 “이방인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레위 19,34)로 연결 짓고 있다. 그러나 소위 여기서 ‘이웃’이라 함은 실제로는 ‘형제’와 동의어로서, 선택된 민족에 속한 이를 가리키고 있다. 특히 유배 이후, ‘형제애’의 개념은 뚜렷한 제한선을 상정하고 있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이방인은 우연히 지나가는 외국인, 또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너희들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신명 10,18)이다. 그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 가운데 이교도는 제외되었다. 이들은 하느님의 원수이고,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선의를 지닌 이스라엘 사람도 ‘누가 나의 이웃인가?’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선의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갖가지 잘못된 이웃 개념을 두고 스스로 정당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루카 10,25-37)를 통해 명확한 답변을 주고 계시다.
가장 끔찍한 증오심은 종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되는 증오심이다. 열정적이고 경건한 분노를 가장한 증오심은 쉽게 정당화되곤 한다. 야훼께서도 불충한 백성의 원수가 되시어 그들을 처벌하시고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다면, 한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 갈라져 나간 이, 공공연한 죄인을 증오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증오심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포장되어, 마치 누가 더 열렬하게 증오심을 표출할 수 있는가에 대해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형국이었다. 이는 ‘부정(不淨)’한 이들과 거리를 두거나 사마리아인들처럼 갈라져 나간 이들과 일절 관계 맺지 않으려는 태도, 또는 신성모독을 하는 이를 두고 거룩한 분노에 차서 자기 옷을 찢는 행위 등에서부터 돌로 쳐 죽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상징
구약의 하느님은 특정 민족에 대한 편애(偏愛)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다. 그분은 그 민족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 민족에게 땅을 약속하시며, 유배 후에 그 민족을 다시 그곳으로 이끄신다. 고통 속의 사랑의 모습이 담긴 이야기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인류에 대한 성부의 사랑은 반복될 수 없는 모습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된다. 그분의 아드님이 땅 위에서 펼쳐지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파견 되신다.’ 아드님이 파견되심으로써 약속의 시간이 완성된다.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되고”(2코린 1,20),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드러났다.”(로마 8,39) 이 새로운 질서에 있어서 주도권은 오직 하느님께서 행사하시는 것이고 이는 단지 사랑을 통해서만 해석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으로 보내셨을 때 드러났다… 이 사랑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즉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실 때 보여주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다.”(1요한 4,9-10)
이런 방식으로 이제 하느님의 사랑은 더 이상 행동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인격을 통해서도 드러나게 되었다. 성자가 인간으로 육화하심은 이 사랑의 정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며,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고 계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전지전능하심과 표징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공표하시고 모범을 보이고자 하신 혁명적인 사랑을 통해서, 당신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심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신 까닭이다. 구약에서 명하는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서 구현된 사랑으로의 질적인 도약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도 영향을 준다. 당신의 신적인 본성을 계시하심으로써,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받아들이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순수하신 사랑의 진실을 향해 인간의 눈을 열어주셨는데, 이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본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마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로마 8,32)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대신 당신 스스로를 바치셨다.”(에페 5,2) 이 사랑은 단지 약속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만 구약의 계약에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애와 보편적 애덕에 대해 질적으로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위대한 도약을 이루셨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이웃의 범위를 한정짓지 않고 넓히셨다는 점과 사랑의 동기를 고양시키고 승화시키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이 외적인 행위로 표출될 때에 무한한 관대함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을 분석하기에 앞서 두 가지 근본적인 점들을 고찰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사랑을 지니고 오신 분이다
첫 번째 고찰해 볼 점은 예수께서 당신이 본래 선포하신 사랑을 어떻게 인식하고 계시는가이다. 그분께서는 이 선포를 통해 율법과 예언서를 초월하고 계시며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선언하고 계심을 잘 알고 계시다. 마태오 복음 5장에서 7장에 나타나는 교의적인 가르침 안에서, 예수께서는 최소한 여섯 번 이상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강조하고 계시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에게 어떻게 말해졌는지를 배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12.27.31.33.38.43) 이렇게 강조되는 반복 어법이 셈족의 취향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당신의 가르침이 지니는 새로운 측면을 강조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담고 있으며, 또한 이로써 율법을 넘어서고 계시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엄숙하게 선포되는 가르침들 가운데 세 가지는 애덕에 관한 것이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태도는 오직 이혼을 폐지하시는 데에서 보여주신 단호함에 비견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 마지막에 사랑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온전히 드러내실 때에, 그분은 이것이 “새로운” 계약임(요한 13,14)을 명확하게 선언하실 것이다. 이는 그분 사랑의 궁극적인 보증으로서 흘리신 피로 “새롭게” 맺어진 계약(루카 22,20)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움이 너무도 낯설었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라고 하였다. 사랑이야말로 복음에서 가장 새롭게 빛난다. 이는 주님께서 “내 것”(요한 15,12)이라고 부르시는 가장 두드러진 계명이다.
단지 하나의 사랑
두 번째 고찰해 볼 점은 이것이다. 자신의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하느님 사랑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신학적인 차원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들 두 사랑은 서로 평행하는 두 개의 사랑도 아니요,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종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실은 한 가지 사랑의 양 측면이다. 하나는 성삼위 안의 사랑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인류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에 대해 지니는 밀접한 관련성은 (추후에, 이것이 잘 드러나는 사도 바오로와 사도 요한의 서술에서 살펴보겠지만) 다음의 인과율에 잘 들어맞는다. 즉 누구든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느님을 위해 형제들을 사랑하는 이는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cf. 마르 5,45와 루카 6,35)
세 공관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에 견주어 말씀하시는 장면들을 보도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22,34-40)과 마르코 복음(12,28-3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사이인의 도발적인 질문에 대해 약간의 도전을 주시면서 이들 두 개의 계명을 하나로 모으고 계시다. 루카 복음(10,25ff)에서는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던 율법교사가 그리스도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신명기(6,5)에 나타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레위기(19,18)에 나타난 이웃 사랑과 연결 짓는다. 물론 여기서의 ‘이웃’은 율법교사 본인이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이웃’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율법교사가 생각하는 ‘이웃’의 의미를 교정해 주시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게 되신다.
당신 사랑을 명백히 드러내시는 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말씀을 제외하고서, ‘사랑’만큼 그리스도께서 자주 언급하셨던 말은 없었다. ‘왕국’은 조화로운 사랑 안에 놓여 있다. 우정, 연민, 관용, 박애, 자비, 슬픔, 희망, 기쁨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사랑만으로도 그리스도의 내면, 또는 그분의 마음을 충분히 담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선행과 사랑을 하도록 부르신다. 산상수훈에서 최후의 만찬 때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어떤 때는 보다 직접적으로 부르시는가 하면, 어떤 때는 탕자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 길 잃은 양, 착한 목자의 비유 등과같이 탁월한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부르시기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사도행전 10,38) 당신의 기적과도 같은 능력을 표징으로써 보여 주신다. 그러나 이 표징은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분의 친절한 따스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계가 없는 사랑: 보편성
위에서 제시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실천하고 가르치신 사랑이 복음의 획기적인 새로움을 담고 있다면,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사랑이 기존 사랑의 개념이 가지고 있던 제한성과 한계성을 허물어뜨리기 때문이다. 옛 법에서도 이미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레위 19,18)라는 말씀이 두 번째 계명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첫 번째 계명이 나오는 본문과 비교해 보면(신명 6,4-9) 두 계명 사이에서 어디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다. 구약성서에서 ‘다른 사람’, ‘형제’ 등의 단어가 확정되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그 모호함을 예증한다. 다른 본문에서 선포되는 십계명(탈출 20,2-17; 신명 5,6-12)이 하나의 문장으로 집약(신명 6,5)될 때에, 이웃 사랑에 대한 언급은 사라진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이웃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제한적인 형제애의 담을 허물고 계시며 이것이 바로 거대한 혁명과도 같은 그분 사랑이라 하겠다. 구원, 어버이-자식관계, 형제애, 그리고 사랑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고 이 말들은 논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 연관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오직 ‘가장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도입하신 보편적 사랑의 개념에서 두 가지 혁명적인 변화요소를 명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새로운 사랑의 비전에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데, 심지어 율법이 배제시키고 종교적으로 분리시키고 있는 두 범주에 속한 이들, 즉 원수와 죄인들마저도 제외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전(全) 역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종교적 감성으로까지 취급되었고 그 자체로 성문서(시편 137, 139장 등)에도 나타나 있었다. 개인적 원수, 도둑, 의로운 이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적법한 것이었다. 따라서 보복할 때에는 원래 입은 피해의 정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라는 완화된 보복 규정이 세워진 것만으로도 이미 진일보한 것으로 보아야 할 정도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38; 루카 6,27)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들어 말씀하신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잘해 주며, 너희를 저주하는 이들에게 축복해 주고, 너희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라.”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숭고한 정신 가운데 하나이니, 우리가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정수, 다시 말해 조건 없는 형제적 사랑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셈족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표현하셨다. 이를 테면 다른 쪽 뺨을 돌리라든지, 속옷만이 아니라 겉옷마저도 주라든지, 함께 더 걸어가 주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시험의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이 가르침을 주시는 까닭을 “그리하여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 될 터인데, 그분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사악한 이들에게마저도 친절하시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시는 이미지는 더 이상 복수를 도모하시는 분이 아닌, 당신 자비 안에서 그 완전함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다음의 고결한 권고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것보다도 더 혁명적인 가치의 전환은 상상할 수 없다. 이제는 원수도 사랑받을 대상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에 대한 사랑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원수인 죄인도 사랑해야 한다. 성서에는 우상 숭배, 약탈품에 대한 거짓 증언, 여러 죄악들(예를 들어, 신명 12,31; 예레 44,4; 즈카 8,17; 잠언 5,16 등)과 더불어 자기가 지은 죄에 동화된 죄인에 대해 역겨워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죄인이 더러운 질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인을 증오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경건함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여기 예수께서 오시어 의로운 자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왔다고 선포하신다.(마르 2,17)
선구자로서 스승과 예언자의 계열을 잇는 요한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예수께서는 죄에 대한 엄중한 경고 못지않게 죄인을 향한 한없는 연민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네셨을 때, 중풍 병자와 마귀 들린 이를 치유하고 용서해 주셨을 때, 그리고 유대인들이 더럽게 여기는 율법적 관습을 어기고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을 때, 그분은 엄청난 비방을 들으셔야 했다. 탕자의 비유와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묘사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당신 마음을 알려 주신다.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분은 그동안 가르치셨던 것을 확인해 주신다. 배반자마저도 ‘친구’라 부르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를 빌어 주신다.
비유 이야기들을 넘어서, 바로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이러한 사랑의 혁명을 낳고 계시다. 그분의 마음은 사마리아인, 가나의 이방인, 티로와 시돈 사람, 로마 제국의 관리, 세리, 창녀, 나병 환자도 모두 품고 계시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정결 관습, 안식일 규정, 종교적 차별, 성전 제물의 신성함마저도 타파하신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데서 그분은 증오의 마지막 허위의식인 ‘종교적 열정’까지도 벗겨 내고야 마셨다.
예수 성심의 지고하신 사랑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서두에 선포하셨고 삶을 통해 확고하게 담보해 주신 보편적 사랑에 대해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자신과 형제에 대한 사랑의 모든 측면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순간을 위해 남겨놓으신 것이 있었고, 그것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심오하고 중대한 가르침이었다. 이를 요한 복음사가가 말하는 방식대로 풀어내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주님 수난 전날, 저녁이 되고,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당신 성심의 넘치는 사랑을 감추실 필요가 없었다. 이제 제자들이 당신 삶과 사도직의 증거자가 되었고 곧이어 당신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증거 하게 될 터이니,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 사랑의 밑바탕을 이룰 뿐만 아니라 제자들 서로 간의 사랑을 고취시키게 될 숭고한 뜻을 드러내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그리스도께서 이 계명을 ‘새로운’ 계명이라 일컬으시는 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이 사랑이 실로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8) 그리스도교 이전에 ‘이상적’으로 여겼던 사랑이 지닌 범위는 새로운 사랑에 견줄 바가 못 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이 시간 이후로 더 이상의 유예나 망설임 없이 이웃을 사랑하도록 독려하는 박차이자 채찍이다. 이 사랑이 지향하는 목표는 비록 우리 힘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언정 항상 도달코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6-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은 육화의 거대한 신비를 담고 있다. 파스카 신비를 예비하는 자기 비움(Kenosis), 성체 성사를 통해 당신을 내어 주심, 그리고 희생 제사의 완성과 성부께 드리는 탄원…. 인간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미약한 이들의 집단에 이를 전하고 계시지만, 그 말씀은 하느님 사랑의 반향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그분 사랑의 궁극적 실마리는 다음의 두 가지 기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비교 기준을 새로이 선포하시고 몸소 그 기준을 완성하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이 말씀은 숭고한 사랑의 증거이니, 제자들에 대한 그분 사랑의 척도이며, 따라서 제자들 서로가 가져야 할 사랑의 척도이기도 하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 줌에 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직면하고 이를 받아들이셨다. 당신의 죽음으로써 인류를 향한 사랑을 선포하고 계심을 의식하시면서… 제자들은 점차 죽음까지 불사하며 선포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예수께서는 두 번째 기준에서 신비에 호소하고 계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그리스도께서는 얼마 후 사제로서 기도를 바치시며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셨듯이 저도 이들을 사랑하였습니다”라고 하시는데 이는 같은 말을 반복하신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존경을 담아 받아들여야 할 말씀이다. 성삼위 안에서의 무한한 사랑 즉, 성부와 성자께서 보여 주시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고 있다는 데서 이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예수성심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고 계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사랑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한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여라. 성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복음이 전하는 혁명적인 사랑이 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좀 과장된 것은 아닌가? 아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는 요한 복음사가가,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긴 담화 마지막이자 수난 시작 때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한 것인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인류와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을 숭고하게 드러내시는 절정의 순간에 ‘성부’를 언급하시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그 무엇보다도 성부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부성(父性)이 사랑 안에, 즉 성자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직접적인 사랑 안에 활동하고 계심을 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겟세마니와 십자가 상에서,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시험을 치르는 고통의 순간 부르짖었던 그 아버지를 향해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애를 선포하시며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바로 그 아버지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형제적 사랑은 바로 성삼위를 향해 가는 길이다.
형제들 안의 그리스도
사랑을 이와 같이 이해할 때, 고대로부터 내려온 두 가지 계명의 결합은 최고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이제 단 하나의 사랑만이 있게 되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바로 그 애덕이 우리를 형제들에게 가까이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특히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 가난한 이들, 작은이들 안에 계시다.(마태 25,40) 당신 삶 속에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보여주신 만큼 우리도 그 모범을 본받아 이들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즉 그리스도의 수난 직전에 사랑에 대한 담화가 실려 있는 것이나, 마태오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과의 일치를 선포하신 것은 같은 맥락이다. 이는 상궤(常軌)를 벗어나서라도 우리 마음에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겨 주시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즉 “너희가 이 작은 이들, 곧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집 없고, 병들고, 억압받는 나의 형제들 하나에게 한 것은 바로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40-45)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항상 의심스러운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1요한 4,20) 요한은 이웃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영지주의적인 고상함을 지닌 요한의 언어이지만 그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이고 예리해진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1요한 3,17) ‘닫힌 마음’은 사랑은 물론 그 사랑의 표현인 나눔마저도 없게 됨을 의미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말 중에 ‘마음’보다 더 직접적인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회개 후에 이 가르침은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가장 아름다운 찬미가를 짓기도 했고(로마 8,31ff), 감동적인 애덕의 찬가를 짓기도 하였다.(1고린 13) 그는 교회들 사이의 상호 원조를 촉진시키는 일도 맡았다.
이렇게 사랑의 이름으로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사도 바오로는 유대 전통에 따르는 교회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제 막 피어나는 교회들 사이에 분열의 위험이 있을 때마다 일치를 도구로 삼았다(갈라 1,10; 로마 15,26; 1고린 16,1-4). 그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장(章)에 걸쳐 자발적 봉헌 행위와 모금에 관한 조직, 촉구, 의미 부여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2고린 8.9) 어찌나 열정적인지, 그는 과장을 섞어서 모든 율법이 다음과 같은 형제애로 귀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4) 이것은 랍비 전통을 반영하는 간결하고도 예리한 레위기의 신앙 고백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디아스포라의 교회들에게 상호 사랑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바탕을 이룬다.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십시오.”(로마 13,9-10에서도 같은 말이 있다.)
성 야고보도 그의 독특한 셈어적인 어법을 통해, 편지라기보다는 설교에 가까운 문체로, 가난한 이들을 높이고 부유한 이들을 심하게 꾸짖고 있다. 믿음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랑이 행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애덕과 충만함
충만함(pleroma)은 분명 바오로 신학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이다. ‘때가 차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충만함이 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다. 이 거대한 개념은 바오로 서간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시적이고 정교한 문장들에서 더 잘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특정 교회나 공동체에 대한 열정이 바오로의 천부적 재능을 건드려 자신의 생각을 유려한 문장으로 표현하게 될 때에 나타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바오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교회의 충만함에 대한 생각 안에서 사랑은 기본적인 요소이다. 단순히 사랑이 하느님 구원의 지배적인 주제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 이 구원은 모든 상이한 것들을 조화롭게 엮는다 - 성부께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안배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충만함이 하나라는 것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분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거룩하고 흠 없으며 그분의 현존 안에서 사랑하도록 하셨다.(에페 1,4) 우리를 선택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이 사랑에 상응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에 따라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에 대한 사랑”(로마 5,5)이다. 신학적으로, 인간학적으로 보아, 사도 바오로의 서정적으로 탁월한 사랑의 찬가(1고린 13)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시키는 예수성심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의 새로움을 놀랍도록 고양시킨다.
요한은 같은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이를 전하고 있는데,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선포하시면서, 당신 사랑이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보여주는 형제애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사명이 완수되기 전에 주어진 책임감을 다 수행하시는 모습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하느님의 아드님의 메시아적인 기쁨을 말한다)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의 충만한 기쁨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요한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이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4) 요한은 형제들 사이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심을 기쁨으로 채울 것이며 이 기쁨에 동참하고 이 기쁨을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서 배가시키는 것이 충만한 성취를 예비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성취는 성부의 영광 안에 들어 올려진 이들이 하늘나라 왕국에서 누릴 것이며 그들의 인간적인 사랑은 성삼위의 무한한 사랑 안에 닻을 내릴 것이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8) 하느님께로부터 나고 하느님을 안다는 요한의 표현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하느님을 소유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사랑은 성삼위의 사랑 안에 그 기원과 운명을 지닌다.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이제 단 하나 사랑의 계명, 계속해서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그 계명이 선포된 지 20여 세기가 넘었다. 형제애는 언제 어느 때나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지구촌’이 되고 인적인 교류가 참으로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는 더욱 필요한 것이 되었다. 보편적 형제애는 더 이상 질적인 차원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며,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혁명과 물자 교류의 가능성으로 인해 양적인 측면도 내포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무지를 빌미로 지구촌 다른 곳의 형제들이 겪는 아픔에서 눈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고통이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의 모든 비극은 결국 사랑이 상처를 받은 것이며 우리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도전하고 있다. 카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인 비극적인 증오심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1요한 11-12)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16)
과거식 구분의 위험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사이에 경계를 긋는 유대전통의 이분법을 경계한다. 이는 예수성심께서 늘 치유코자 하셨던, 본성에 어긋나는 구분이다. 이는 복음을 거슬러 가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이웃에게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하고 완전하신 하느님 사랑을 가지지 못한 것이 된다. 역으로 우리가 이웃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 사랑을 그저 초월성을 상실한 자선행위로 격하시킬 때에 우리는 진실하고 완전한 이웃 사랑을 가지지 못한 것이 된다. 이 둘 모두는 “인간 완성의 근본적인 법이자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사랑의 계명”(Gaudium et Spes 38항; 또한 24항 참조)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환원주의적인 수평주의나 육화가 배제된 수직주의 모두 “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계명”과 “첫째에 버금가는 둘째” 가운데서 선택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구분은 이미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 이후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사랑의 모델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대 사상의 조류와 그리스도적인 행위의 이론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우리는 인간 예수에 너무 초점을 맞추지 않아야 한다. 인간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소박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고, 세속적인 것에서 초연할 것을 설파하셨으며, 종교와 사회 지도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런 ‘인간’ 예수를 지나치게 높인 결과로 성부의 아드님이신 예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하시고, 우리 마음에 성부의 사랑을 심으시며, 내세에 대한 확신을 주시려 이 세상에 오셨다. 한편 우리의 관심을 믿음의 우월성, 은총, 그리고 하늘나라 왕국의 영적인 측면에만 둔 나머지 인간 현실의 고통들이 형제애를 해치는 실존적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아니 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해로운 환원주의의 전형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람”이셨기에 당신을 따르던 군중이 3일 동안이나 굶어야 했을 때 무척 마음이 아파하셨다. (오늘날 만연된 기아의 현실을 보신다면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신”(묵시 1,5)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지식
이러한 이분법, 혹은 좀 더 실용적인 용어로 풀어보자면, 복음의 그리스도를 이처럼 의미 없이 조각조각 내는 입장은 그분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로마 5,5)이 지닌 다양한 측면에 대한 체험과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계약 아래 서 있던 이스라엘인들처럼 ‘완고’해질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마음에 받는 할례”(로마 2,29)가 필요하다. 이 할례는 우리를 종속적인 옛 계약에서 자유롭게 하여 사랑의 새로운 계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이에 대한 인식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체험만이 조각조각 절단나지 않은 온전한 그리스도를 우리 형제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오직 “우리들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그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알도록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에페 1,17-18)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이론이나 이 세상의 어떤 다른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생명이 거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만 생명을 받을 수 있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충만함, 즉 교회로 우리 형제들을 이끌 수 있다.
칼 바르트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내게 당신의 그리스도론을 말해 주면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겠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는 생각, 어떤 문제를 제기하려거나 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분의 현존을 느끼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추구하고 찾으려는 데서 나오는 생각이, 우리가 하느님과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결정한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고자 한 이들에게 던지신 질문, 즉 “사람의 아들이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하는 질문에 대해 우리들 각자가 내면에서 드리는 대답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교회의 전체 역사, 교회의 현재, 그리고 하늘나라 왕국의 모든 미래는 우리가 공동체로서, 개인으로서 드리는 이 답변에 달려 있다. 수많은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이 답변들은 형제적 대화, 상호 충만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내적 자아이신 예수성심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들 사이에 계신 하느님이시고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모든 갈라진 틈을 이어주는 다리이시기에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성사이시기에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다. 성부로부터 오신 말씀이자 성부께로 돌아가시기에 모든 창조의 열쇠이시다. 그분의 육화와 계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신 질문에 우리가 답변할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분 자신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내어야 하며 이로써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성삼위의 사랑을 재현할 수 있다. 이 성삼위의 사랑은 유대인에게는 수치요, 이방인에게는 미친 짓이며, 우리 시대의 비신자들에게는 무가치한 일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들은 사랑의 예수보다는 고난 받으시는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하는데, 우리 형제들 안에서 이기주의와, 그리고 사랑을 거부한 것에 대한 결과로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이신 예수를 유보한 채로 인간이신 예수에 치중하고자 하는 미묘한 유혹이 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바로 이 분을 세상에 드러내면서도 그 신비를 희석시키지 않는 것이 절실하다. 각각의 개인과 인간 모두, 즉 모든 인류가 그 수혜자인 이 사랑의 충만함을 선포하는 것은 세상에 이 충만함을,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충만함(에페 1,10)을 실현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신성(神性)을 떼어놓고서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그분에 대한 우리 신앙의 정수이다. 당신 자신을 자유로이 내어 놓으신 그분에 대해 우리도 이에 상응하여 그분을 자유로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내어놓으심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고귀한 응답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나는 바로 이것이 현대의 관례적인 이해 방식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현대의 이해 방식은 “아래로부터의 (상승하는) 그리스도론”, 그리고 “위로부터의 (하강하는) 그리스도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만남의 지점이시며 특히 하느님과 인간 상호간의 사랑이 정점에 다다른 그 지점이시다. 아래로부터의, 혹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은 이 시대의 풍성하고 다양한 그리스도론‘들’ 안에 나타나는 구분이며, 방법론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는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신 후에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시다. 그분의 인격에 대한 이해와 체험은, 출발점으로 상정하는 ‘말씀’만으로도, 나자렛의 역사적인 예수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예수로부터만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거나 그리스도로부터만 예수에 대해 알려고 하는 신학적 시도는 위험하다.
이런 맥락 하에서 떼이야르 드 샤르댕을 언급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주의 단일한 시작점이라고 보았다. 물론 그가 자신의 견해로 제시하는 논리적인 전개 과정 모두에 다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를 언급한 까닭은 그가 이례적인 영적 감수성으로써 진솔한 과학적 성찰을 제시한 학자로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떼이야르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성심에 대한 애착을 고백하였다. 하나는, 예수성심에 대한 순수하고 소박한 신심인데, 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이런 부류의 신심이 지닌 전형적인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이를 공개적으로, 유보함 없이, 고백하였다. 예수성심은 그가 과학자로서 활동하면서 겪어야 했던 극심한 어려움 앞에서 영적인 의지처가 되어 주셨다. 그의 일기와 편지와 영적 지도(靈的 指導)에는 예수성심이 드러난다. 또 다른 차원-어쩌면 떼이야르는 이러한 구분을 싫어했을 수도 있겠지만-은 우주의 오메가 포인트이신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알고 사랑의 행위 안에서만 잠정적으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분이다. 우주는 진화하고 있고 각 단계는 오직 그 전 단계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확신을 가졌던 그는 전체 과정이 근거와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근거와 목적이 하나의 오메가 포인트인데, 여기에는 이미 그 과정 자체가 실제적으로 내재되어 있고 그 자신 안에서 나와서 자신의 역동성과 의미를 제공한다. 1951년에 사망하기 몇 달 전에 그가 일기에 쓴 내용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이해한 사상을 담고 있다. “가장 위대한 비밀, 가장 위대한 신비: 세상에는 하나의 마음이 있다.(성찰에 의거한 사실) 그리고 이 마음은 그리스도의 성심이시다.(계시에 의거한 사실) 이 신비는 두 개의 단계를 지니고 있다. 수렴의 중심(우주는 하나의 중심점으로 응축된다)과 그리스도적 중심(이 중심점은 그리스도의 성심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 혼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각각의 인간과,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것을 표현한다고 확신한다.”(Journal, Cahier Ⅵ, p.106)
그리스도의 성심, 성삼위께로 다가섬
어떤 사람들은 ‘사랑(love)’이라는 말을 성삼위 내에서의 관계에만 사용해야 하고 ‘애덕(charity)’이라는 단어는 형제애에 더 적합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애덕’이라는 단어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사랑은 더 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단어가 더 나은 표현이라는 것과 전문 용어 및 성서적 개념어로서 더 적합하다는 것 외에도 성삼위 안의 사랑의 관계나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를 언급할 때에 두 단어 사이에 유사성은 다소 줄어든다. 우리가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초대받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친밀감으로 초대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성삼위에 부여하는 철학적 용어(자연, 인격, 관계)는 신비를 온전히 담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그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이 신비 속에 우리가 사랑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그 신비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부와 성자께서는 우리를 성령 안에 받아들이셔서 당신들 사랑에 온전히 참여하게 하신다. 성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받아들인 사람은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1요한 2,24-25)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이 부어주신”(로마 5,5) 사랑 덕분에 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이 그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인 태도에 의해서 정의 내려질 때에는 단지 하나의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이웃,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랑하고자 하는 그 이웃을 향한 초월적인 사랑이 성삼위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서는 길이 되는지의 이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도 신학적인 미덕이 된다. 이는 특히 사랑에만 토대를 두는 복음적 권고에 따라 다른 이를 위한 봉사에 자신들의 삶을 봉헌한 이들에게 더욱더 해당되는 것이다. 바로 성삼위의 친밀감으로 직접 이어지는 길인 것이다.
이것이 활동 중의 관상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의미는 단순히 지적으로 접근하거나 우리의 행위들을 의도적으로 주님께 연관 지으려고 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이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모든 것들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표현은 이냐시오에 의한 것이지만 그 정신은 사도 바오로에 기원을 둔다), 특히 우리 형제들 안에서 사랑하는 것인데, 활동과 관상 모두 그 원인과 목적을 하나이신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명하시는 그분께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에게서 얼마만큼 하느님을 보고 그분을 얼마만큼 사랑할 수 있는가는 영적인 결합성의 척도이다. 이는 “마음의 눈의 조명”(에페 1,8)이고,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머무시고 살고 계심”(1요한 3,19)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씨앗’은 다름이 아니라 삶의 원칙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인격화와 결실을 나타내는 성령이시다. 우리는 인간에게 눈을 돌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이것이 형제적인 관계를 숭고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갈라지지 않은 이 사랑의 빛 안에서 사는 이는 누구나 세상 안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터인데, 그 사람에게는 타인이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대화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하느님과의 만남에 더 큰 기회를 얻을 것이다. 더욱이 믿음을 상실한 이 시대에, 그리고 자신이 성삼위의 사랑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이들이 가득한 이 시대에, 이와 같은 무지와 거부가 낳은 거대한 공허함 때문에라도 하느님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우리를 성삼위께로 데려가는 사랑은 공동체적 결속의 토대이자 힘이 된다. 공동체는 오직 사랑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들을 한데 모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가지셨던,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계신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각자를 사랑하시기도 하지만 공동체로서의 우리들도 함께 사랑하신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공동체로 묶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개별적인 응답과 더불어 이러한 응답들이 합쳐진 것에 의해서이다. 우리들이 그분에 의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결합되어 있는 한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다. 우리의 다수성은 자신을 봉헌하는 참여와 통교이신 성삼위의 사랑의 다수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형제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물론 그 점도 사실이지만-인 것을 넘어서 ‘사랑의 공동체’, 혹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비롯된 ‘사랑의 공동체’이다. 이것이 바로 시편 133장이 노래하는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에 나타난 함께함의 기쁨이 전하는 깊은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의 오랜 경험이 우리 안에 되살아나는 것, 즉 “한마음 한뜻”(사도 4,32)으로 있는 것이다. 베푸는 사람은 자신 안에 성부의 관대함을 재현하는 것이고, 받는 사람은 성자의 겸손한 순명을 반영하는데, 우리를 결합하는 신학적인 사랑의 고리는 곧 성령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성삼위와 사랑에 대해서 한 모든 말들은 인간학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하긴 우리 자신을 달리 표현할 방도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이 신비에 마주한 우리의 지성은 멈추어 서고 만다. 그 신비에 들어갈 길은 오직 마음을 통한 길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성심께로 더욱 다가설수록 그 안에 좀 더 깊고 강렬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는 역대기 저자가 다윗의 입술에 올려놓은 오래된 기도에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저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 백성이 마음에 품은 이 같은 생각을 그들이 언제까지나 지니게 해 주시고, 당신을 향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해 주십시오.”(1역대 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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