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음반박물관 '신중현 사단' 자료<499> 김정미 NOW(2011년 미국 음반회사 복각 음반 2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신중현 사단 12인치 장시간음반(LP) 관리번호 MI12LP-2492 (이 음반들은 2012년 2월 7일 노재명이 알라딘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것) 김정미 NOW / 신중현 작곡집 햇님 / 바람 미국 Liom Productions, LLC 제작 LION-LP122(1LP), 2011년 제작 발매. 이는 1973년 11월 성음제작소에서 제작된 김정미 NOW 음반(SEL-100023, 1LP)을 복각하여 재발매한 것이다. 총 4쪽짜리 칼라 영문 해설지 별첨 내장. 해설 집필ㆍ사진 제공:노재명, 제작 진행 협조:이광천. 김정미 노래. 신중현 작곡 편곡 기타연주. <불어라 봄바람>만 김자림 작사, <당신의 꿈>은 강동일 작사, 나머지 곡은 모두 신중현이 작사하였다. 본 음반의 앞표지에 실린 김정미 인물사진은 신중현이 촬영한 것이라 한다.(신중현 증언) 앞면) 1.햇님 (UL 3522) 2.바람 (UL 3611) 3.봄 (UL 3523) 4.나도 몰래 (UL 3550) 5.불어라 봄바람(UL 3612) 뒷면) 1.당신의 꿈 (UL 3613) 2.아름다운 강산(UL 3553) 3.고독한 마음 (SH 1120) 4.비가 오네 (UL 364) 5.가나다라마바 (SEL 4229)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신중현 사단 컴팩트디스크(CD) 관리번호 MICD-5525 (이 음반들은 2012년 2월 7일 노재명이 알라딘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것) 김정미 NOW / 신중현 작곡집 햇님 / 바람 미국 Liom Productions, LLC 제작 LION663(1CD), 2011년 제작 발매. 이는 1973년 11월 성음제작소에서 제작된 김정미 NOW 음반(SEL-100023, 1LP)을 복각하여 재발매한 것이다. 총 20쪽짜리 칼라 영문 해설지 별첨 내장. 해설 집필ㆍ사진 제공:노재명, 제작 진행 협조:이광천. 김정미 노래. 신중현 작곡 편곡 기타연주. <불어라 봄바람>만 김자림 작사, <당신의 꿈>은 강동일 작사, 나머지 곡은 모두 신중현이 작사하였다. 본 음반의 앞표지에 실린 김정미 인물사진은 신중현이 촬영한 것이라 한다.(신중현 증언) 1.햇님 (UL 3522) 2.바람 (UL 3611) 3.봄 (UL 3523) 4.나도 몰래 (UL 3550) 5.불어라 봄바람(UL 3612) 6.당신의 꿈 (UL 3613) 7.아름다운 강산(UL 3553) 8.고독한 마음 (SH 1120) 9.비가 오네 (UL 364) 10.가나다라마바(SEL 4229) * '신중현 사단' 자료 수집, 목록 정리, 인터넷 DB구축 정보화: 2012년 2월 7일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 이 음반 해설서에 노재명과 Kevin Sipreano Howes이 집필한 글, 신중현ㆍ김정미 사진(제공:노재명), 수록곡 가사 등이 실려있다. 이 음반의 미국 제작회사로부터 음반 해설 원고 청탁을 받고 노재명이 2010년 12월 31일에 음반회사 측에 이메일로 보낸 글 초고는 다음과 같다. --------------------------------------------------------------------------------------------------------------------------------------------- 국악이 가미된 사이키델릭 ‘김정미 NOW’ 글·자료 제공/노재명([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 저자, 국악음반박물관 관장) 1968년 신중현이 작사·작곡·편곡, 기타를 연주하고 펄 시스터즈가 노래한 <님아>가 크게 힛트하였다. 이 한국적 정서가 녹아있는 서구식 가요는 한국 대중음악계가 일본식 트로트 위주였던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직전까지 국내 음악 활동시 많은 어려움을 겪던 신중현은 펄 시스터즈에게 <님아> 등 노래 몇 곡을 주고 외국으로 가서 음악 생활을 하려 했었다. 그런데 <님아>가 뜻밖에 대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신중현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인기를 기반으로 신중현은 당시 한국의 여타 대중음악인들에 비해서 월등히 좋은 음악 환경을 확보하며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신중현이 한국에서 마음껏 음악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된 <님아>, 그리고 그 곡을 부른 자매 가수의 폭발적인 인기! 이후 신중현은 그 유행 흐름에 맞춰 여자 가수들을 대거 양성하게 된다. 최영희, 이정화, 김상희, 김추자, 임희숙, 임아영, 김정미, 바니걸스, 민아, 주현, 지연, 양희은, 차현아, 김명희, 이성애 등의 여가수들이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신중현 사단에 발탁되었다고 하겠다. 본 음반에서 노래를 한 김정미는 그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가수이다. <님아> 성공 직후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서울 명동에 신중현 사무실이 있었는데 당시 사무실 분위기에 대해 신중현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 때 명동 사무실에는 전국에서 20~30명씩 가수 지망생이 몰려 왔어요. 그 때는 진짜 노래 잘하는 사람만 왔었죠. 감히 여기(신중현 사무실) 와서 노래 부르겠다는 건 노래에 자신 있고 스타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 거였죠.” 신중현의 수많은 문하생 가운데 유명한 대표 가수로는 펄 시스터즈, 김추자, 박인수, 장현, 김정미를 꼽을 수 있다. 신중현은 가수들마다 가지고 있는 음악성, 음색, 외모 등을 고려해서 각각의 개성에 맞게 곡을 지었고 편곡을 달리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후배 가수들을 스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김정미는 1971년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신중현 사무실을 찾았다가 가수로 픽업되었다. 신중현의 기억에 의하면 자신의 노래 지도를 변조하지 않고 그대로 흡수한 것은 김정미 뿐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김정미에 대한 신중현의 회고담이다.(노재명, “신중현 관련자료 발굴 시리즈① 신중현 관련 대담” [핫뮤직 1993.4. 통권 30호] 서울:마인기획, 189쪽) “내가 발표한 사이키델릭 음악 중에서 대표되는 작품은 <바람>, <선녀>, <햇님>, <봄>과 같은 곡들입니다. 이런 사이키델릭 곡들은 거의 김정미가 불렀고 대부분 금지됐었습니다. 김정미는 내가 데뷔시킨 사이키델릭 가수로서 내가 요구하는 사이키델릭 창법을 만족스럽게 불러냈습니다. 지금은 그런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신중현이 길러낸 후배 가수들 중에서 신중현은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소화해낸 가수로 펄 시스터즈, 박인수와 함께 김정미를 꼽고 있다. 김정미! 1953년 서울에서 사업가 김순성의 1남 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1971년 서울 명동 로얄호텔 등에서 신중현 사단 가수로 공연을 하였고 영화음악 <대합실의 여인>, <늑대와 고양이들> 등을 노래했다. 1971년 12월 부상을 당해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가수 김추자를 대신해 신중현의 소개로 김정미가 공연을 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정미는 제2의 김추자라고 불릴 만큼 김추자의 창법을 닮았다. 김추자와 김정미, 모두 신중현에게 창법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미는 신중현의 창법 지도를 가장 제대로 받았던 가수였다. 김정미는 김추자에 비해 성량은 풍부하지 못하지만 신중현 음악 스타일에 걸맞는 창법, 특히 사이키델릭 창법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가수다. 김정미의 노래가 지니는 매력은 우선은 섹시하다는 데 있다. 김정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편의 에로 영화를 보는 느낌과 같다. 1960년대 말부터 사이키델릭에 심취했던 신중현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1971년에 가수로 데뷔시킨 김정미에게 집중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부르게 했다. 신중현의 실질적인 사이키델릭은 1971년 그룹 ‘골든 그레입스’(Golden Grapes) 시절부터 시도되었고 그 첫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음반이 바로 ‘김정미 / 신중현 SOUND VOL.2(아니야 / 만나고 헤어진다면)’ 녹음집이다.(프린스레코드사, 1LP, 1971년 봄 제작) 이 음반이 김정미의 공식적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녹음집은 모두 신중현이 작곡·편곡하고 신중현(기타)과 ‘골든 그레입스’가 반주하였다. 이 음반에 김정미가 노래한 신중현 작품 <아니야>, <만나고 헤어진다면>, <오솔길을 따라서>, <고독한 마음>, <대합실의 여인>이 담겨있다. 이 중에서 <오솔길을 따라서>, <고독한 마음>이 대중적으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1970년대 대중의 인기가 잘 반영되었던 음악 잡지인 [대중가요](서울:세광음악출판사)를 살펴보면 김정미의 인기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2년 봄이다. 1972년에는 ‘김정미 최신가요집’ 음반(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 1LP)이 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김정미가 노래한 신중현 작품 <잊어야 한다면>, <간다고 하지 마오>, <언제나>, <나 생각나네>, <기다리는 마음>, <가나다라마바>, <잊었던 사랑>, <못잊어>가 담겨있다. 이 음반에서 반주는 그룹 ‘더 멘’(The Men)이 맡았다. 이 가운데 <잊어야 한다면>은 신중현 사단의 수많은 녹음 중에서 돋보이는 명작이고 이 음반에서 <간다고 하지 마오>가 대중적으로 힛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김정미 - 간다고 하지 마오 / 아니야’ 음반(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 1LP, 1972년)이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김정미 노래, 신중현 작사·작곡·편곡·기타 연주, 그룹 ‘더 멘’ 반주의 <아니야>, <오솔길을 따라서>, <고독한 마음>, <만나고 헤어진다면>, <잊었던 사람>, <잊어야 한다면>, <간다고 하지 마오>, <기다리는 마음>, <가나다라마바>, <언제나>가 담겨있다. 이 음반 표지에 실린 김정미 사진은 연예인 전문 사진작가 허종태가 촬영한 것이다. 허종태는 김정미 등 신중현 사단 사진 필름을 많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 별세 이후 그 사진들의 원본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본 작품집 ‘김정미 NOW’ 음반(성음제작소, 1LP)은 초판이 1973년 11월에 제작되었다. 이 녹음집에는 <봄>, <햇님>, <바람>, <불어라 봄바람>(김자림 작사), <당신의 꿈>, <아름다운 강산>, <고독한 마음>, <비가 오네>, <가나다라마바>, <나도 몰래>가 담겨있다. 이는 김정미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일 때 취입한 것이다. 이 중에서 <바람>, <불어라 봄바람>, <당신의 꿈>, <아름다운 강산>, <고독한 마음>, <비가 오네>, <가나다라마바>, <나도 몰래>는 1972년 녹음이고 <봄>, <햇님>은 1973년 녹음인 것으로 보인다. 1972년 녹음은 그 전에 제작된 김정미 노래의 신중현 작품집 음반들에서 발췌하여 재편집한 것이고 <봄>, <햇님>은 1973년 신녹음으로 ‘김정미 NOW’ 음반에 수록된 것이라 하겠다. <가나다라마바>는 ‘김정미 최신 가요집’ 음반(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 1LP, 1972년)에서 발췌한 것이고 ‘김정미 NOW’의 나머지 1972년 녹음들은 ‘김정미 최신 앨범’ 음반(유니버살레코오드사, 1LP, 1972년)에서 발췌하여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김정미 NOW’ 음반의 제목 그대로 당시의 최신 김정미를 나타내 주는 대표곡은 1973년에 녹음된 <봄>과 <햇님>인 것이다. 그래서 그 대표작 <봄>, <햇님> 녹음은 같은 시기에 'KIM JUNGMI - 봄 / 햇님' 싱글 음반(성음제작소, 7인치 1LP)으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표지에 사이키델릭을 상징하는 꽃 그림 옷을 입은 김정미 칼라사진이 실려있다. 이는 글씨체, 사진 등 신중현의 생각이 많이 반영된 표지 디자인이다. 그리고 그 <봄>과 <햇님> 녹음은 1974년에 ‘BEST HIT OF POPULAR MUSIC VOL.1 - HIT POPS 10’이라는 옴니버스 음반(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 1LP)에 재수록되었다. ‘김정미 NOW’ 음반에 수록된 1972년 녹음과 1973년 녹음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1973년에 녹음된 <봄>, <햇님>이 좀 더 사이키델릭 성향이 강하다. 뛰어난 시인은 대부분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서 독자를 감동시키지 않고 흔하고 쉬운 단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표현을 하며 감동을 준다. 신중현도 마찬가지이다. 작곡가이지만 작사 부문의 능력 또한 문학가 이상이다. 봄, 해, 꽃, 비, 바람 등 쉬운 소재로 수월하게 작사를 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고 곡조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김정미 NOW’ 음반에 들어있는 곡들이 바로 그러하다. 봄의 나른한 기분을 신중현이 개발한 독특한 창법과 사이키델릭 곡조로 표현한 <봄>, 김정미의 매력적인 음성과 신중현의 치밀한 곡조가 잘 어우러지는 <햇님>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신중현의 재치있는 기타 반주가 김정미의 노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신중현은 김정미의 음색에서 자신의 사이키델릭 작품과 맞아 떨어지는 장점을 미리 잘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미가 노래한 <봄>의 리듬은 1968년 작품 <님아> 등에서 보여지는 신중현 특유의 스타일이 역력한 곡인데 그러한 <님아> 풍에다가 환각적인 창법이 가미되어 마치 <님아>에 사이키델릭이라는 전위적인 날개가 달린 듯하다. <봄>의 “꽃밭을 헤치며 양떼가 뛰노네” 부분에는 바이올린 스타카토(Staccato) 주법이 사용되어 상큼한 느낌을 준다. 신중현은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스타카토를 <봄> 외에도 여러 곡에 사용했는데 1972년에 김정미가 녹음한 <언제나>의 전주 등에도 사용했다. 이 ‘김정미 NOW’의 <봄>은 봄의 나른한 기분을 신중현의 통기타 연주와 김정미의 혼빠진(?) 목소리가 잘 그려내고 있다. “봄봄봄봄봄봄이여어-----어” 부분의 창법은 신중현이 개발한 사이키델릭 창법으로서 세계 어느 나라의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이런 창법은 ‘김정미 NOW’ 음반의 <바람>, <아름다운 강산>에서도 사용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사이키델릭 창법으로 회오리치고 날아가는 이미지를 표현한 참신한 창작은 ‘역시 신중현’이라는 찬사가 나오게 한다. 그리고 여러 가수들이 부른 다양한 <아름다운 강산>이 존재하는데 이 곡을 사이키델릭으로 완전히 다르게 편곡한 신중현의 역량이 매우 놀랍다.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작품이 담긴 김정미의 음반은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너무 앞서 가는 음악을 내놓은 탓이었다. <햇님>, 그리고 <선녀> 또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다른 사이키델릭 작품들이 그렇듯 이 곡들도 신비감을 주는 곡조, 기분을 나른하게 하는 창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햇님> 후반부에 끝나는 듯하다가 한 박자 쉬고 다시 잔잔하게 이어지다 끝을 맺는 편곡은 돋보이는데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 시작될 때는 마치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느낌을 준다. <고독한 마음>은 나이트클럽에서 접속곡 사이에 연주될 정도로 유명했던 곡으로서 말 그대로 고독한 마음을 깊게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이 곡은 화려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 다소 단순하게 이루어진 곡조라 잘못 부르면 참으로 초라한데 여자 가수로는 김정미, 남자 가수로는 장현이 누구도 능가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도 잘 불렀다. 이는 철저히 신중현의 완벽에 가까운 지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세월(歲月)이라는 낱말을 제외하고는 순한글로 되어 있는 <가나다라마바> 또한 신중현, 김정미 콤비가 1972년에 녹음한 사이키델릭 음악 가운데 명작으로 평가된다. 이는 받침 없는 곡명의 멜로디 작곡을 한번 시도해 보자 하며 신중현이 특별히 만든 작품이고 최대한 우리말과 국악을 기반으로 한국적인 록을 추구한 대표작이다. 이 ‘김정미 NOW’ 음반에 담겨있는 1972년 신중현의 기타 반주에 맞춰 김정미가 노래한 <나도 몰래>에서는 판소리에 쓰이는 ‘추천목’과 유사한 선율이 나타난다. ‘추천목’은 그네가 올라가고 내려오는 형상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경쾌하고 흥겨운 느낌을 주는데 춘향가 중 <그른 내력>, 수궁가 중 <앞내 버들>과 같은 대목에서 쓰인다. 신중현은 <나도 몰래>에서 마치 그네가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선율을 사용해서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했다. 사랑으로 인한 벅찬 기쁨을 경쾌한 추천목 형태의 선율로 잘 표현했다. “어쩌다가 나는 이럴까” 이하 후렴에서는 잔잔하게 몰고 가다가 끝부분은 목을 꺾어서 살짝 치켜 올리는데 이것은 동편제 판소리에서 나타나는 음악 특징이다. “이럴까”와 “않나봐”, “있나봐”에서의 꺾는목 또한 판소리 조다. 이 ‘김정미 NOW’ 음반에 들어있는 김정미가 노래한 <비가 오네>는 잘 안알려졌지만 신중현 작품 가운데 명작으로 꼽힌다. 이 곡 또한 곡조, 창법 면에서 국악 특성이 많이 나타난다. ‘김정미 NOW’ 음반에 담겨있는 곡 중에서 1972년에 녹음된 <불어라 봄바람>과 <당신의 꿈>은 다른 수록곡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사이키델릭이 약하다. 하지만 이 곡들은 당시 대중적으로는 좀 더 알려졌다. ‘김정미 NOW’ 음반에 들어있는 곡 외에도 당시 분위기상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녹음이 더 많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상당수는 녹음만 되고 음반화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비공개 릴테입은 대부분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이 보관했는데 지금은 그 녹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1973년 ‘김정미 NOW’ 음반에 담겨있는 <봄>, <햇님>을 비롯해서 1972년 신중현 작곡·편곡·기타 연주와 ‘골든 그레입스’ 합주의 <즐거운 Go Go> 음반(프린스레코드사, 1LP), 1972년 신중현 작사·작곡·노래와 그룹 ‘더 멘’ 반주의 대곡 <안개 속의 여인> 음반(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 1LP), 1972년 신중현·박광수·장현 노래와 그룹 ‘더 멘’ 반주의 대곡 <아름다운 강산> 음반(유니버살레코드사, 1LP), 1973년 신중현 작사·작곡·노래와 그룹 ‘더 멘’ 반주의 대곡 <거짓말이야> 음반(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 1LP)과 같은 실험적인 작품집은 당시로서는 무척 파격적으로 제작된 희귀한 사례이다. 당시 킹레코드는 흥행 보증수표였던 신중현에게 녹음실을 365일 개방, 배려하고 어떤 녹음이든 좋으니 마음껏 녹음하라 하였고 그래서 그런 대곡, 실험적인 녹음들이 음반으로까지는 전부 안나왔지만 취입은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김정미 NOW’ 음반은 발매 당시에는 대중적으로 크게 힛트하지 못하고 대표곡이 금지되면서 소량 제작된 초판은 사장되었다. 그러다가 20년 후 1993년 11월 [스테레오 음악 제22호](서울:중앙일보사) 252~253쪽에 실린 “노재명, 나의 레코드 컬렉션 - 신중현의 음악”에 ‘김정미 NOW’가 명반으로 처음 소개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 음반은 신중현 사단 명반 10선 중 하나로 선정되어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지금까지 20여년간 컴팩트디스크(CD), 장시간음반(LP)으로 여러 차례 합법, 혹은 불법으로 복각 제작되었다. 이 ‘김정미 NOW’ 음반의 앞표지에는 꽃밭을 배경으로 한 김정미의 인물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 사진은 신중현이 촬영한 것이며 꽃은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 신중현은 당시 조잡한 공연 무대 디자인, 그리고 열악하게 만들어지는 한국 음반 제품 질이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공연 무대 조명 등을 직접 만들어 장착하기도 했으며 녹음실 장비를 직접 조절하다가 녹음기사와 다투기도 했고 음악 성격에 맞게 직접 표지 디자인을 하기도 했으며 자신과 본인의 작품을 노래하는 가수 의상 디자인까지 관여하였다. 시대를 초월한 진보적인 록 음반인데 너무 평범한 가요처럼 표지가 인쇄되는 게 늘 불만이었던 신중현은 1960대 후반부터 때때로 음반 표지의 서체도 스스로 디자인하여 음반 제작사에 견본을 제시하기도 했다. 신중현 사단의 김상희·김정미·박광수·윤용균·차현아·박인수 음반, 그룹 ‘덩키스’, ‘퀘스천스’, ‘더 멘’, ‘엽전들’ 음반 일부가 바로 그러한 사례이다. 이 ‘김정미 NOW’ 음반 표지 사진을 신중현이 직접 촬영하고 디자인한 정황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다. 무대 제작자, 녹음 기술자, 음반 제조 전문가, 녹음집 표지 디자이너, 음악 패션 전문가 등이 드물었던 당시 앞서 가는 음악을 했던 신중현으로서는 그러한 부분까지 스스로 감당해 가며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당대 최고의 대우를 받은 대중음악가가 그러했으니 당시 음악계 현실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외국의 당대 유명 사이키델릭 음악들에 전혀 뒤지지 않으면서 신중현만의 특색있는 ‘김정미 NOW’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정미 NOW’ 음반은 김정미 독집이기도 하지만 신중현이 주도하여 녹음한 그룹 ‘더 멘’의 작품집이기도 하다. 신중현이 작사·작곡·편곡, 기타를 연주하고 신중현 자신이 이끌던 그룹 ‘더 멘’을 합주 훈련시키고 김정미에게 창법과 음악 사상을 지도하고 만들어낸 녹음집이 바로 ‘김정미 NOW’ 음반인 것이다. 초판 발매 당시 제품명과 근래 불리는 속칭이 ‘김정미 NOW’인 것이지 실은 신중현 사운드 작품집이고 ‘더 멘’의 대표적인 정규 음반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룹 ‘더 멘’의 주된 악사는 신중현(리드기타), 이태현(베이스), 김기표(오르간), 손학래(오보에·색소폰), 문영배(드럼)였고 리드보컬은 때에 따라 박광수, 김정미, 윤용균, 지연, 장현, 임아영 등이 번갈아 담당하였다. 신중현의 곡만 받으면 인기 스타가 됐던 1968~1975년 사람들은 그를 ‘스타 제조기’라 했다. 가수를 키우는 일은 신중현에게 있어선 대중에게 자신과 작품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한 방법이었고 그가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더 주력한 것은 작곡과 기타 연주, 록 그룹 활동이었다. 신중현은 여러 그룹 활동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그룹 ‘더 멘’ 시절부터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많이 발표하였고 ‘엽전들’ 때 절정에 이르렀다. 군사 정부에 대한 반항적인 양복 차림과 표정, 혹은 양복을 다소 불량하면서도 매우 감각적으로 변조해 각설이처럼 입었던 신중현은 당시 음악적으로나 대외적인 언행 면에서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김정미 NOW’ 음반은 바로 그 신중현의 전성기 중에서도 탄력이 많이 붙은 시절에 취입되어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나온 신중현 사단 음반은 대부분 ‘킹박’으로 불리던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이 제작한 것이다. 각 음반에 제조사는 신향, 프린스, 유니버살, 성음 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음반번호는 KLS 등 거의가 킹레코드 제작 관리 체계로 명시되어 있다. ‘김정미 NOW’ 음반 역시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이 제작한 것이다. 펄 시스터즈가 노래한 신중현 작품 <님아>의 음반 제작과 성공, 그리고 ‘김정미 NOW’ 음반 발매에 이르기까지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은 당시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투자를 신중현 재능에 감탄하고 과감하게 한 것이다. 그 예측대로 신중현의 뛰어난 음악 역량으로 실패하지 않고 경이로운 음악 성과와 흥행을 한 것이라 하겠다.(노재명 저서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 서울:도서출판 새길, 1994년) ‘김정미 NOW’ 음반은 제품번호가 SEL-100023, ‘김추자 NOW’ 음반은 제품번호가 SEL-100024로서 이는 모두 킹레코드 제작, 성음제작사 제조로 연달아 만들어진 시리즈 녹음집들이다. 제2의 김추자로 불리던 김정미와 김추자 음반을 나란히 동일하게 ‘NOW’라는 제목으로 출시한 것은 당시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의 야심찬 기획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는 당시 김추자 음반과 쌍벽으로 음반이 제작될 만큼 김정미가 인지도가 있고 기대되고 떠오르는 가수였다는 면모를 잘 보여주는 점이다. 신중현 또한 김정미에게 매우 기대를 걸고 그간 선보이지 않았던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주고 열심히 지도하며 의욕적으로 ‘김정미 NOW’ 음반을 녹음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미 NOW’ 녹음 후 1973년에 신중현은 그룹 ‘엽전들’을 결성하여 직접 노래까지 담당하며 본격적인 밴드 활동에 주력한다. 그 동안은 신중현 자신이 더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지만 주로 가수를 발굴하고 노래를 지도하여 발표하였다. 그런데 좀 재능있는 사람은 지도하는 대로 부르지 않고 스스로 멋을 내서 부르고 의도대로 작품이 되지 않고 가수 다루기도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엽전들’에선 직접 노래까지 주력하게 된 것이다. 신중현이 작사·작곡·편곡, 기타 연주, 노래까지 주력하기 시작한 그룹 ‘엽전들’ 탄생 직전 신중현이 거의 마지막으로 가장 공들여 길러낸 가수가 바로 김정미였다. 즉, 김정미는 신중현 최고 전성기 정점에서 가장 의욕적으로 기용된 가수라고 하겠다. 신중현은 그룹 ‘엽전들’ 출범 후에도 김정미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는지 1974년 9월경 ‘김정미 - 이건 너무하잖아요 / 갈대’ 음반(지구레코드공사, 1LP)을 ‘엽전들’ 반주로 발표하였다. 이 음반에는 김정미가 노래한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작품 <이건 너무하잖아요>, <생각해>, <담배꽁초>, <갈대>(남지연 작사), <당신이>, <너와 나>가 담겨있는데 이 가운데 <이건 너무하잖아요>가 대중적으로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 음반 취입 당시만 해도 신중현은 ‘엽전들’에서 자신이 노래하기도 하고 김정미 등에게 노래를 주기도 하고 고뇌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다가 신중현이 직접 노래한 ‘엽전들’의 <미인>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김정미는 ‘엽전들’에서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고 ‘김정미 - 이건 너무하잖아요 / 갈대’ 음반이 신중현과 김정미 콤비가 이루어낸 마지막 작품집이 되었다.(노재명, “사이키델릭 싱어 김정미” ‘김정미 - 이건 너무하잖아요 / 갈대’ 음반, 지구레코드, 1CD, 2000년, 해설지 글) 1974~1975년 당시 제품으로 나온 ‘엽전들’ 음반에는 사이키델릭이 다소 약한 음악들이 수록되었지만 1994년 지구레코드 창고에서 발견된 ‘엽전들’ 비공개 릴테입을 들어보면 신중현이 1974~1975년에 ‘김정미 NOW’보다 더 강력하고 실험적인 사이키델릭 음악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신중현 사단 카세트테입 관리번호 MIMC-0344~0345, 1994년 지구레코드→노재명 기증 복사본) 1975년 그룹 ‘엽전들’ 비공개 릴테입 녹음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중현의 녹음 가운데 가장 사이키델릭한 음악인데 아마도 너무 상업성이 없는, 당시로선 무척 파격적인 음악이었기에 음반회사 측의 반대에 따라 음반화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엽전들’은 사이키델릭 음악을 했던 그룹이자 가장 한국적인 록을 추구했던 그룹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정미는 그 그룹 초기에 중요한 가수였다. 그리고 ‘김정미 NOW’ 음반은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초판 음반(지구레코드공사, 1LP, 1974년)과 함께 신중현 사단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된다. ‘김정미 NOW’ 음반은 최근 서구 관점에 의해 희귀한 한국 사이키델릭 음반 수집 대상으로 부각된 경향이 많다. 하지만 그룹 더 멘의 ‘김정미 NOW’ 음반, 그리고 그 맥을 같이 하는 그룹 ‘엽전들’ 음반 등은 사이키델릭 측면 못지 않게 한국적인 록, 국악이 가미된 음악이라는 부분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사이키델릭은 신중현이 지금까지 수 십년간 시도한 다양한 음악 영역 중 일부이고 가장 근간이 되고 중요하게 다룬 큰 물줄기는 바로 국악이 가미된 록 음악이라는 점이다.(노재명, “신중현의 삶과 예술” ‘신중현 무위자연’ 음반, 노재명 기획/삼성나이세스 제작, 2CD 박스물, 1994년, 해설서 글) 이는 1959년 신중현의 첫 녹음집 <아리랑>부터 1968년 <님아>, 1971년 <마부타령>, 1972년 <아름다운 강산>과 <나도 몰래>, 1973년 <봄>, 1974년 <미인>·<나는 너를 사랑해>·<산아 강아>, 1975년 <너만 보면>, 1980년대 초반 <도라지타령>, 1983년 <광복동거리>와 <내>, 1993년 <전기기타산조>, 1997년 <봉우리>, 미발표곡 <너와 나의 노래> 등에 이르기까지 신중현 음악 전반에 작용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사이키델릭 등 이렇게 다양한 음악과 광범위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특히 1970년대 당시로선 시도하기 어려웠던 국악을 기반으로 한 대중음악은 어쩌면 신중현만이 가능했던 작업인지 모른다. 1970년대 그는 가장 비싼 전속 몸값을 받는 작곡가였다. 요술 부리듯 신인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내고 연이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그의 재주 앞에서 그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더이상 누굴 눈치볼 필요없이 이런 음악, 저런 음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시로선 촌스럽게만 생각했던 한국적인 대중음악을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다음은 1970년대 전반기에 국악을 가미하여 한국적인 록을 왕성하게 추구했던 신중현의 회고담이다. “내가 가장 의욕을 갖고 있었던 게 '록'이라는 세계 공통적인 음악에다 우리나라만의 특성을 얹어서 전세계와 교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래에 우리 선조들이 갖고 있던 음계를 사용했어요. 서양음악은 화음 위주로, 멜로디를 쌓아서 펼쳐내는 평면적인 음악입니다. 반면 우리 음악은 하나의 선율로 깊이를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음악이지요. 음의 깊이를 통해 우주를 넘나드는 공간까지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정신'을 이어 가고 싶었습니다.” 당시 우리 것을 우리 스스로 낮춰서 흔히 ‘엽전’이라고들 했는데 신중현은 많은 사람들이 보잘 것 없게 생각했던 바로 이 말, 이 우리네 문화를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대중 앞에 나섰던 것이다. 전국민의 우상이나 다름 없던 그의 그런 위풍당당한 행동은 식민사관에 물든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을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신중현의 작품에 쓰인 장단을 보면 기존의 국악에 없는 것들도 스스로 창안하여 작곡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한국적인 가락을 만들어냈으며 드럼을 북처럼 연주하게끔 편곡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시도들을 이미 그 시절에 해냈다. 그 후 신중현은 의상도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개량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나오기도 했고 손가락이 짧은 동양 사람의 체질에 맞게 3/3 기타 주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그리고 기타 연주시 거문고나 가야금의 농현과 같은 효과음을 내기 위해 그 나름의 독특한 벤딩 주법을 구사했으며 그 농현 효과음을 극대화 하기 위해 나중엔 아예 전기기타의 지판 부분 나무를 깎아 가야금처럼 개조해서 연주하기도 했다. 신중현은 이 가운데 3/3 기타 주법에 대한 이론과 실제 연주 방법을 정리하여 1995년 단행본 저서로도 발표한 바 있다. 신중현의 한국적인 록 음악에 대해 김추자와 최구희가 언급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중현 선생님의 음악에는 한국적인 맛이 나는 아름다운 리듬이 특히 많습니다.”(김추자: 가수, 신중현 제자) “가야금과 같은 효과음을 내는 신중현 선생님의 기타 테크닉은 독보적입니다.”(최구희: 가수, 기타리스트) 요즘 국내 음악계에서 국악과 양악의 접목이 많이 시도되고 있는데 국악의 현대화라고 하면서 국악기로 외국곡을 연주한다든지, 국악과 양악의 만남이라는 이름 아래 단지 양쪽 악기만 섞어서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이런 근래 분위기에 비한다면 신중현은 이미 수 십년 전부터 서양 악기만 가지고도 무리없이 한국적인 음악을 해냈다는 점은 보기 드문 독특한 표현 방법으로서 그의 탁월한 음악성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성취해 냈다는 점에서 그의 이러한 시도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는 국악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전혀 없다. 단적인 예로 1974년에 그가 발표한 <산아 강아>는 중모리 장단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이 장단의 이름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렇게 국악 맛을 낼 수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어려서 자연스럽게 국악을 체득했다. 지금은 국악이 특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하고 어려운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신중현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40년대만 하더라도 이 땅의 사람이면 누구나 <아리랑>을 부를 수 있었고 지천에 널린 게 국악이었다. 논에 나가면 농부들이 부르는 농요와 풍물굿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고 집앞 골목에서 뛰어놀 때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전래동요를 불렀다. 또한 온국민이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한 시절이었기에 수많은 걸인들이 마을을 누비며 <각설이타령>을 부르고 다녔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신중현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음악 모국어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글은 마음먹고 배워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은 특별하게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음악언어 또한 그러하다. 1974년에 발표돼 ‘삼천만의 주제가’라 했을 만큼 엄청나게 힛트한 곡 <미인>의 경우 어려서 신중현이 듣고 체득한 각설이들의 장타령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음악은 말과 같아서 각 나라마다 고유의 언어와 사투리가 있듯이 저마다 독특한 음악토리가 있게 마련이고 태어난 곳 나름의 언어와 음악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지 않으면 체득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미국에서 어릴 때부터 말을 익히지 않으면 그 본토 사람들처럼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일지라도 뒤늦게 우리 음악을 공부하려면 그게 쉽게 되지 않는 것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신중현은 어려서 습득된 국악이 자기의 음악언어로 확고하기 때문에 억지로 할려고 하지 않아도 무위자연으로 우리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닌 음악언어가 확실하면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 주는 도구는 가야금이든, 기타든 모두 가능한 것이다. 악기는 같은 것을 사용했으면서도 프랑스 록을 들으면 샹송(Chanson) 맛이 나고 이탈리아 록을 들으면 칸초네(Canzone) 향기가 나는 것처럼 신중현은 그들과 달리 국악 냄새를 풍기고 있다. 한복을 입고 국악기로 연주한다고 해서 다 국악이 아니다. 표현할 수 있는 음악언어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외국 음악 식민지 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땅의 상당수 젊은 국악인들이 우리 음악을 전공했으면서도, 해금을 연주해도 마치 바이올린처럼 표현하는 이유는 어려서부터 국악을 자연스레 몸에 익히지 못하고 학교에서 칠판을 보고 인위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기타를 연주해도 가야금이나 거문고와 같이 표현하는 신중현, 이제 그같은 대중음악인이 또다시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성장할 때와 같은 우리 나름의 음악 환경은 이미 황폐해진지 오래고 서구 음악이 그 자리를 거의 모두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노동요, 전래동요와 같은 토속민요는 대부분 사라져 가고 있으며 판소리, 무속 등 몇몇 종목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정부의 보호 관리 아래 간신히 명맥만 이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동네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부르는 최신 랩송이 들려오고 방송이나 음식점, 찻집 등 이 땅 어디를 가도 우리의 귀는 외국 음악에 노출돼 있다. 또한 학교에서도 국악 교육이 변변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현실이 이러하니 어려서부터 우리 음악 모국어를 자연히 익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이제는 외국 것을 우리 정서에 맞게 바꿔 수용하는 것은 과욕이다 싶을 정도고 도리어 국악이 팝송화 되는 경향 마저 보이고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신중현을 가리켜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의 천재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가 만일 외국 어디에서 태어났더라면 하고 아쉬워들 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살이에 관한한 그는 분명 시대를 잘못 만났다. 하지만 음악가로서는 아주 좋은 시기와 절묘한 곳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옛부터 온국민이 가무를 좋아했고 그래서 어느 나라보다도 민요의 수가 특히 많아 <아리랑> 하나로도 수 십권의 백과사전이 될 만큼 풍족한 음악토양을 지닌 이 땅에서 태어난 것, 그것도 아주 그 토양이 비옥할 때 수 천년 역사가 농축되어 있는 이 땅의 음악언어를 체득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서구의 문화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올 때 그 자리에 있어 또 다른 음악세계를 접하고 비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것, 이런 점들은 음악가로서의 신중현에게는 큰 행운이었다.(노재명, “특집 대중음악을 이야기한다 -신중현論” [금호문화 1995.2. 통권 116호] 광주:금호문화재단, 40~43쪽) 신중현의 음악은 최근 유행하는 퓨전국악, 국악이 가미된 월드뮤직, 요즘 국악보다 오히려 더 국악적인 면이 있다. 언젠가 신중현이 전자해금을 개발하고 싶다고 해서 서울 국립국악원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국악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런 건물도 있느냐며 엄청나게 놀라고 부러워한 적이 있다. 일평생 정글에서 맨주먹으로 살아 남아야 했던 원로 대중음악가가 입을 다물지 못했던 그 표정, 수많은 힛트곡에도 불구하고 넉넉하지 못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형편을 대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미국에서 발매되는 본 음반과 곧 추진될 신중현의 미국 순회 공연이 모쪼록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면 한다. 다음은 신중현 사단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고 이남이와 장현의 신중현에 대한 회고담이다. “신중현 선생님은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고 얌전하다가도 무대에만 서면 기타 연주에 신들린 듯 무대를 자기 방처럼 누볐습니다. 옛날에는 기타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신 선생님은 연주에 한참 몰두하면 무대 위를 뒹굴고 그 비싼 기타를 물어 뜯고 부수기가 일쑤였습니다. 나중에 공연이 끝나면 부서진 기타를 어루만지며 ‘이런 기타 다시 어디서 구하냐?’고 하며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 선생님은 음악을 아주 열정적으로 했고 음악에 폭 빠져서 생활하는 분입니다. 무대에서 모든 걸 잊고 몸과 마음을 모두 집중시켜서 연주했던 신 선생님의 음악가 정신은 후배들 모두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이남이: 가수, 베이스기타 연주자, 신중현과 함께 그룹 활동) “신중현 선생님의 음악에는 혼이 담겨있습니다. 신 선생님은 몇 십년 앞서 가는 음악을 합니다. 고독하고 슬픈 노래를 작곡하더라도 표현 방법에 있어서 그 경지가 매우 높습니다. 슬픔이 극에 이르렀을 때의 격한 심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슬픔이 극에 이르고 난 후에 눈물도 안나올 정도로 허탈해질 때 생기는 탈속의 심정을 음악에 담습니다.”(장현: 가수, 신중현 제자) 1920년대 거문고산조, 대금산조가 40여년이 지나 1960년대, 1970년대 국가의 중요한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처럼 1960년대, 1970년대 신중현의 주요 음악은 반세기 가까이 된 오늘날 한국 무형문화재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들이다. 이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대중음악이 된 동시에 더불어서 미래를 선도할 만한 음악이기도 하다. 지금은 인터넷 등이 발달되어 김정미 음반 등의 정보가 쉽게 유통되지만 필자가 신중현과 1990년대 초반에 만나 신중현 사단 역사 기록, 신중현 옛 작품들을 되살리는 작업을 시도할 때 신중현은 자신의 옛 음반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옛 활동에 대한 기억도 희미했고 필자는 신중현 역대 음반의 95% 가량만 구입한 상태라 부족한 정보도 일부 있었다.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 서적 출판 이후 20여년간 김정미를 비롯한 신중현 사단에 관한 자료가 발굴 보완되고 전세계적인 관심이 일어나고 이 복각 음반과 같이 출판물이 계속 제작되고 있는 상황을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특히 신중현 사단의 수많은 작품집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본 음반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필자가 신중현을 처음 만났을 때 신중현이 가장 먼저 찾고 다시 듣고 싶다며 복사해 달라고 필자에게 청한 음반이 바로 이 ‘김정미 NOW’였다. 늘 새 작품에 몰두하는 신중현은 1972~1973년 당시 녹음만 했지 이 음반이 나온 후로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20여만에 신중현은 ‘김정미 NOW’ 녹음을 듣게 되었고 이후 <봄>, <바람>, <햇님> 등의 명곡이 새롭게 편곡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 직전까지 그 곡들의 악보 조차 찾지 못해 애를 태웠던 신중현. 그 만큼 ‘김정미 NOW’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신중현이 특별히 애착을 가졌던 대표작이라 하겠다. 김정미는 1977년 9월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된 '김정미 - 나는 바본가봐 / 난 정말 몰라요' 음반(1LP)에 김성욱 작사와 김영광 작곡의 <나는 바본가봐>, 하중희 작사와 김용선 작곡의 <셋방살이>, 김태완 작사와 김영광 작곡의 <너를 보내고>,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작곡과 지명길 역사의 <난 정말 몰라요>(Move Over), 김성욱 작사와 김영광 작곡의 <너를 갖고파>를 녹음했다. 그리고 김정미는 1978년 6월 오아시스레코오드사에서 제작된 '김정미 독집' 음반(1LP)에 정주희 작사 작곡 <처음 만나>, <나는 정말>, <지난날>, <너와 둘이>, <산까치야>(이광섭 작사), <꽃길>, <저녁 목장>, <추억>, <먼 산에는>, <다시 말해요>, <방울새>, <왜 이렇게>를 녹음했다. 1977~1978년 김정미가 노래한 음반에는 신중현의 작품이 없으며 이 음반들의 수록곡은 신중현의 창법 지도없이 취입되었다. 이 음반들을 들어보면 신중현 음악 스타일의 창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시절 김정미 사진에 보이는 옷차림, 표정에서도 사이키델릭 음악 스타일은 발견되지 않는다. ‘김정미 NOW’ 음반이 알려지면서 광신도가 생길 정도로 김정미 팬들이 많이 생겼으나 신중현이 관여하지 않은 1977~1978년 김정미 노래 녹음을 접하고 많은 팬들이 당황하고 실망하였다. 마치 번지점프 타듯이 극과 극의 음악 수준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근래 팬들 사이에선 김정미가 1977년 이후 왜 그렇게 망가졌는가 하는 탄식까지 나왔는데 김정미나 그 어느 누구도 그녀를 낮춘 것이 아니다. 1971~1974년에 신중현이 각고의 노력으로 김정미를 최고 수준의 가수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1977~1978년 김정미 노래 음반은 ‘김정미 NOW’ 음반이 전적으로 신중현의 초인적인 노력과 지도력, 뛰어난 창작력에 의해서 탄생한 명반이라는 사실을 상대적으로 잘 말해 주는 자료라 하겠다. 신중현은 김정미를 통해 무척 획기적인 음악들을 발표했지만 시대를 앞서 간 그 상당수 작품이 발표 당대에는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정부로부터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75년 8월 4일에 '김정미 NOW' 음반 수록곡 <바람>(곡·창법 퇴폐 저속 금지), <가나다라마바>(창법 저속 금지), 김정미 1974년 음반 수록곡 <너와 나>(곡 퇴폐 금지), <담배꽁초>(가사 퇴폐·치졸 금지), <이건 너무 하잖아요>(가사·곡 퇴폐 금지) 등이 금지됐었다. 신중현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기 정부의 각종 금지 조치 때문에 창작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김정미 NOW’ 같은 음반을 이루어낸 점, 대곡과 실험적인 작품들 대부분이 음반회사 기록용 릴테입에만 남고 상당수 사장된 상황에서도 ‘김정미 NOW’ 같은 걸작을 발표한 점은 두고두고 높게 평가될 것이다. 40여년 전 작품인데 지금 들어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진보적인 음악이다. 김정미 자료로는 음반과 문헌 기록들, 1975년 3월 22일 ‘윤복희 리사이틀’ 공연에 찬조 출연한 김정미가 노래한 신중현 작품 <간다고 하지 마오> 동영상(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신중현 사단 비디오테입 관리번호 MIVHS-0106, 1994년 MBC-TV 박용찬 기자→노재명 기증 복사본), 김정미 사진 몇 종과 1977년 김정미 친필 사인 1종(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등이 현재 남아있다. 신중현이 일부 디자인하고 김정미가 사이키델릭한 의상을 입은 사진이 더러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그리고 당시 나팔바지를 입은 김정미가 서울 시민회관 무대를 통해 대중에게 나팔바지를 유행시키도 했다. 김정미는 1978년 ‘토요일 밤 토요일 밤에’ 방송 출연 후 얼마 안돼 은퇴하였고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현재 그 곳에서 살고 있다. 곧 있을 신중현의 미국 순회 공연시 신중현이 그토록 아끼고 정성껏 길러낸 가수 김정미와의 역사적인 재회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더불어서 캐나다에 거주 중인 권승권(신중현 그룹 ‘에드 훠’ 드러머 권순권의 본명)도 함께 상봉이 되면 좋겠다. 40여년만에 머나먼 타국에서 이 신중현 사단이 사이키델릭 풍으로 <봄>, <햇님>, <바람>, <아름다운 강산>을 무대에 올리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만난 이 음악가들, 얼마나 큰 인연인가! 이들과 한 시대를 한 땅을 밟으며 살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꿈만 같다. |
2012-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