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學 碩 士 學 位 論 文
탈춤 연행공간의 역사적 변화과정과
현대화 문제
1 9 9 8 년 12 월
安 東 大 學 校 大 學 院
民 俗 學 科 民 俗 文 藝 專 攻
李 惠 英
탈춤 연행공간의 역사적 변화과정과
현대화 문제
指 導 敎 授 : 林 在 海
이 論文을 文學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安東大學校 大學院 民俗學科 民俗文藝專攻
李 惠 英
李惠英의 文學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1998 年 12 月
學 位 論 文 審 査 委 員 會
委 員 長 : (印)
委 員 : (印)
委 員 : (印)
安 東 大 學 校 大 學 院 委 員 會
目 次
Ⅰ. 서 론 1
1. 문제 제기 및 선행연구 검토 1
2. 연구의 목적 및 방법 4
Ⅱ. 탈춤의 연행공간에 대한 사적 검토 6
1. 국가 단위의 축제적 연행공간 7
2. 궁중과 민간연희의 분리와 탈춤 공연장의 등장 10
3. 궁중연희의 쇠퇴와 민간연희 연행공간의 다양화 19
4. 흥행의 본격화에 따른 극장의 등장과 전승중단 22
Ⅲ. 탈춤 연행공간의 성격과 특징 26
1. 탈춤 연행공간의 형식적 특징 26
2. 탈춤 속에 나타난 연행공간 28
3. 연행공간이 탈춤에서 차지하는 위치 31
Ⅳ. 오늘의 탈춤과 마당극의 연행공간 35
1. 전수된 탈춤의 연행공간 35
2. 마당극의 연행공간 38
3. 과거와 현재의 연행공간 44
Ⅴ. 탈춤 연행공간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 모색 46
1. 탈춤의 현대적 계승에 대한 필요성 46
2. 연행공간의 현대화에 관한 대안 모색 48
Ⅵ. 결 론 53
參考文獻 58
英文抄錄 62
Ⅰ. 서 론
1. 문제 제기 및 선행연구 검토
우리 민속연행예술 중에 탈춤만큼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여 연구한 갈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으나 가장 크게는 탈춤이 민중들의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탈춤은 민중들이 지닌 사회의식을 비판적 풍자를 통해 표현한 연극이다. 그런데 탈춤의 내용은 고정적이지 않고 구비전승되어 오면서 그때 그때의 민중의식을 역동적으로 받아들여 변화한다. 탈춤은 연행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민중들의 의식을 담아낸 것이 축적되어 전승을 통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탈춤의 연행공간은 개방적이라고 말한다. 탈춤이 연행되는 동안 관중들이 극내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견하여 극의 내용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탈춤의 개방적 연행공간은 관객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탈춤 외부의 공간과 탈춤내용이 관객의 손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는 내부의 공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외부적 개방성은 탈춤이 연행되는 장소에 의한 것이고, 내부적 개방성은 탈춤이 축제나 제의라는 연행상황에 놓여져 있다는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춤의 연행이 개방적인 공간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려면 산대같이 탈춤의 구획지어진 무대로 알려진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탈춤을 둘러싼 상황적 맥락을 고려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탈춤의 연행공간은 탈춤의 전승이 중단되고 복원되는 실천적인 작업과정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못했다. 공동체에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의 예술적 표현과 풍자를 통한 해소, 그리고 거기에 담긴 민중의식에서 근대극을 뛰어넘는 탈춤의 가치를 찾기보다는 정형화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탈춤의 내용과 표현형식을 규정하는 탈춤의 연행공간 자체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탈춤연구가 전통연희의 현대화라는 실천적인 작업의 밑바탕이 되기 위해서 탈춤 연행공간의 본디 모습을 역사적 검토를 통해 이끌어내어 오늘의 문제를 담는 문화적 그릇으로 적용시켜내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 많은 연구자들이 탈춤의 연행공간에 주목하여 현대화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고 있다. 조동일이 탈춤의 공연공간과 극중장소가 일치하는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서구의 극과는 다른 우리만의 연극미학을 밝힌 후, 채희완, 임진택 등이 연행공간인 마당에 주목하여 마당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양식의 틀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탈춤의 연행공간에 주목한 구체적인 연구는 접근하는 관점에 따라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공연무대의 현대화에 주목한 연구인데, 김우택, 허술, 심우성, 서연호 등의 연구가 여기에 속한다. 김우택의 연구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 가면극들의 무대를 조사하고 공통점을 분석하여 고유의 무대를 만들기 위한 시론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연행상황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기능적인 무대복원을 위한 정리작업을 하는데 그친 아쉬움이 남는다. 허술은 탈춤 무대의 형태 및 기능의 특수성을 밝혀 그것이 요구하는 공연형식의 특성을 검토하는 연구를 하였다. 그는 탈춤의 종합예술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탈춤의 본질에 근접한 연구를 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장소가 나타나게 된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탈춤의 역사적인 변화과정 속에서 이를 다루지 않아, 탈춤 무대의 단편적인 특징을 열거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서연호는 {한국 전승연희의 현장연구}라는 단행본차원의 연구를 하였는데, 연행현장에 대한 연구라기 보다는 전승연희의 현장답사를 통한 연구서로서, 연극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창조라는 측면에서 놀이마당의 과거, 현재, 미래를 논하면서, 놀이마당의 개념을 정리하고 현대화의 구체적인 대안을 세우는 실질적인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다음으로 사적인 연구 성과를 들 수 있다. 조원경과 양재연에 의해 산대의 형태가 추정되면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역사 문헌적인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사진실의 연구는 궁중연희와 본산대탈춤의 배우, 재정기반, 공연공간 등의 공연상황 전반을 역사 문헌을 통해 재구해 내고 조선시대에 한정해서 그 변천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서울을 한정하여 연구하였기 때문에 공연예술로서 탈춤에 대한 서술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유민영은 국립극장 30년을 정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근대화 시기에 나타난 전통연희의 연행공간을 그 당시 발행된 신문기사와 각종 저서들을 통해 서술하였다. 그러나 근대라는 시기를 한정하여 재구성하는데 그친 작업이었기 때문에 전통연행공간의 근대적 변화를 엿볼 수는 있어도 그 변화의 원인과 구체적인 상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밖에도 국립극장과 성균관대학교 부설 인문과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놀이마당 개념 정립을 위한 심포지엄>, <현대의 놀이마당과 마당놀이에 관한 연구>, <놀이마당과 축제-그 극화는 가능한가>라는 세 가지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연구들에서는 탈춤 연행공간의 현대화 가능성에 대한 가늠으로 탈춤이 놓여지는 맥락인 축제라는 개념을 강조하였으나 마당이라는 연행장소와 축제라는 연행상황을 적절하게 결부시킨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탈춤의 연행공간에 대한 연구를 전통연희의 현대화라는 목적 아래 할 때, 전통변화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사적인 변화과정을 먼저 살펴야 한다. 또한 연행공간의 개방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연행장소뿐만이 아니라 탈춤을 둘러싼 상황 즉, 축제라는 맥락속에 탈춤이 연행되었음을 고려하고 연행의 시기, 주체, 목적, 지역 등에 대한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2. 연구의 목적 및 방법
앞의 선행연구에서 검토된 문제점들을 모두 포괄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아직은 매우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역사적 연구를 한다고 했을 때 민속연희의 옛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매우 적을 뿐 아니라 빈곤한 자료속에서도 연행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춤의 연행공간을 현대화하는 연구들이 구체적인 현대화의 상을 그려내는 것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탈춤 연행공간에 대한 역사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의 전통이 단절되었을 때, 그 전통이 현대에 다시 복원되고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전통변화의 연속선상에서 현대화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가 전통이라는 것 속에 잠재되고 축적된 그간의 예술적 역량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우리 것을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전통예술의 현대화라는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전통변화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는 것이다. 또한 연행공간의 변화는 정태적인 무대공간만을 보아선 알 수 없다. 동태적인 연행상황을 함께 고려하고 그 형식적인 기능과 특성들을 밝혀 내었을 때 비로소 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탈춤의 연행공간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탈춤이 직접 연행되고 전승되는 현장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탈춤이 공동체 강화의 기능을 하던 전승현장은 엄밀한 의미에선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헌에 의존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하여 탈춤을 연구할 때 정태적인 무대공간에 대한 자료만을 중심으로 했을 때는 연행예술인 탈춤의 본질에서 벗어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연행 그 자체를 보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둘러싼 사회 역사적 배경과 변화에 주목하겠다. 이를 위해 각종 문헌들에 나타난 연행공간의 단편들을 재구성하여 역사적 추이를 살피고 이 과정에서 연행공간에 대해 연구된 내용들을 재검토하고 연구자 나름대로 재해석을 시도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전통연행공간의 특징과 기능을 정리하고 현대화에 대한 점검으로 현재 연행되는 탈춤 공간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도록 하겠다.
이 연구는 전통의 현대화라고 하는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전통의 변화과정에서 보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탈춤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최근의 노력들이 간과하고 있는 연행공간에 주목하여 놀이적 요소가 강한 극으로서 탈춤의 축제적 연행의 모습을 되찾아 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전통연희의 바람직한 현대화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탈춤의 개방성이라는 근대극을 뛰어넘은 가치를 실현시키는 중요한 요소인 연행공간의 역동성을 주목하여 보고자 하는 것이다.
전통연희의 연행공간에는 크게 궁중연희 혹은 관희(官戱)이냐 민간 연희이냐에 따라 공간구성이나 고정적 구조물의 존재여부가 결정된다. 따라서 먼저 Ⅱ장에서는 연행공간의 구성과 고정적 구조물의 존재여부에 따라 시대구분을 하여 연행공간의 사적변화 추이를 살피도록 하겠다. 이를 통해 Ⅲ장에서 우리의 연극미학인 신명풀이를 가능케 하는 탈춤 연행공간의 성격과 특징을 정리하겠다. Ⅳ장에서는 앞 장에서 도출된 특징을 오늘의 모습과 비교 검토하고, Ⅴ장에서는 지적된 문제점과 한계를 정리하여 대안 설정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Ⅱ. 탈춤의 연행공간에 대한 사적 검토
탈춤공간이 가진 개방적 구조는 오늘의 공연문화와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강조된다. 탈춤의 공간적 개방성이 관객과의 교감을 중요시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예술이 독특한 공연문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산대놀이에서 산대나 봉산탈춤의 다락같이 탈춤의 무대공간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정말 탈춤의 구획지어진 무대였는지, 그렇다면 관객과 구분된 탈춤의 연행이 과연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탈춤이 가진 전통적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전통연행예술이 가진 열린 공간구조의 기능과 의미를 보다 잘 설명해 내고, 그 전통을 오늘날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치를 지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옛것에 대한 객관적인 점검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탈춤의 연행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민간에서 전승되어온 탈춤 등의 민속연희에 대한 기록은 지배계층 중심의 기록문화 속에서 소외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행현장에 대한 통사적인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각종 문헌에 서술된 전통연희에 대한 기록에서 탈춤과 연결지을 수 있는 편린들을 찾아 탈춤 연행공간의 시대적 변화를 찾아내는 것도 현재를 엮어 내기 위한 나름의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각종 문헌과 선행연구 자료들을 통해 탈춤을 비롯한 전통연행예술의 연행공간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보고 그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국가 단위의 축제적 연행공간
탈춤이 지금처럼 뚜렷한 연극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때의 고대 제천행사에 대한 기록에는 남녀노소가 상하층의 구분 없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함께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제장(祭場)이자 각종 연희들이 벌어진 연행 공간인 웅산신당(熊山神堂)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방 사람들이 매년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산에 내려와서 반드시 종과 북을 치며 여러 놀이를 벌이는데 원근 사람이 다투어 와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三國史記}에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 대하여 낙랑언덕(樂浪之丘)이라는 지명이 나와 있고, {東國歲時記}에는 신라에서 길쌈과 더불어 행해진 행사가 대전 뜰(大部之庭)에서 벌어진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뜰을 뜻하는 庭은 대궐안, 집안에 있는 마당, 뜰, 집안, 조정(朝廷) 등을 뜻하는 것으로 따로 만든 가설무대가 아닌 평범한 뜰에서 연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연행된 劍(劒)舞, 處容舞, 無楌舞는 연극사를 서술할 때 탈춤의 고대적 형태로 흔히 언급되는 것들이다. 이 세 가지의 연행공간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먼저 검무는 황창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官昌(혹은 황창)의 무용담을 배경설화로 갖고 연행되었다고 하는 것이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관창은 신라의 화랑으로 어린나이에 백제로 들어가 검무를 추며 백제왕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적장인 계백에게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관창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만들어 쓰고 춤을 추어 죽은이를 기리는데서부터 검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東京雜記}에 관창이 춤을 춘 장소는 百濟市中으로 표현되어 있다. 검무는 고려시대까지 전승이 계속되어 식자들이 이를 보고 지은 연희시에 그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때 沈光世의 黃昌舞에 대한 연희시에서는 관창이 춤을 출 때 구경꾼들이 온 저자를 뒤덮고 구경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어 황창무가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연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처용무는 {三國遺事}에 그 배경설화가 전한다. 헌강왕이 개운포에 나가 놀 때 동해용이 나타나 왕의 덕행을 찬미하며 노래와 춤을 추었는데, 그의 아들인 처용이 왕을 따라와 보좌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장면을 처용이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이에 역신이 처용의 행동에 감동하여 그의 얼굴이 붙여진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물러났고 이후에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두고 귀신을 쫓는 춤을 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동일은 처용무(혹은 처용극)가 개운포에서 민간전승되다가 서라벌로 옮겨가면서 나라굿으로 변화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견해를 따랐을 때 처용무는 민간전승되는 연극이었다가 헌강왕대에 이르러 나라굿에 포함되었으며, 이후 고려, 조선시대에도 나라굿에서 연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처용무도 검무와 마찬가지로 특별하게 지정된 연행공간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거리에서 연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용무의 연행공간에 대해 고려말 李詹이 경주에 갔을 때 거기에서 연행되고 있는 처용무를 보고 묘사한 시에서는 동쪽바다 神人이 시정(市)에 내려와서 넓은 길(路闊)에서 처용무를 추었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無楌舞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三國遺事}에 전하는데, 원효가 優人들이 가지고 노는 박을 우연히 얻어 이것을 들고 마을을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 백성들을 교화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팔관회에 포함된 것이고, 일부가 궁중으로 들어가 呈才舞로 변화하기도 하였다. {三國遺事}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원효가 민간에서 광대들이 놀던 것을 본따서 불교 교화용 무애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행해진 무애무의 연행공간은 마을 각지라고만 표현되어 있어 이 역시 특별한 연행공간이 지정되어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팔관회에서 다른 잡희와 더불어 행해진 무애무의 연행공간은 다음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외에도 삼국시대 탈춤의 모습은 신라오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鄕藥雜詠五首]중에 속독이라는 대목에서 뜰(庭)에 나와 춤을 춘다라는 대목이 있다. 속독은 쑥대머리에 가면을 쓴 모습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춤을 추는 군무로서 일종의 탈춤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헌강왕때 왕이 포석정에 나갔을 때 남산의 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왕이 이 모양을 본떠 춤을 추고 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조각하는 사람을 시켜 이것을 새겼는데 이것이 象審, 혹은 형상에 따라 霜髥舞라고 이름 지어진 것이다. 앞서 처용무를 이야기 할 때 동해용이 개운포에 나와 왕의 덕행을 칭송하며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이때의 탈춤이 연행된 공간은 인공적인 구조물을 필요로 하거나 특정하게 지정된 장소가 아니라 신이 내린 곳, 즉 포석정이나 개운포와 같이 임의로 설정될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팔관회나 연등회같이 국가적 규모의 행사에서 벌어진 연희에서는 채붕이라는 구조물이 나타난다. 진흥왕 12년(551)에 처음 열린 팔관회에서는 綵棚 둘을 매어 놓고 百戱歌舞를 하면서 복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고대국가에서 왕권이 강화되고 계급이 점차 확연히 구별되어 지면서 국가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희에서 채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볼 때 국가 단위의 축제적 연행들이 이루어진 이 시기의 탈춤은 국가의 제천행사나 연등회, 팔관회 혹은 민간에서의 세시 등과 같이 일정하게 정해진 시기에 벌어진 연희와 함께 연행되었고, 그 목적은 주로 하늘에 대한 제사 속에서 하늘과 사람을 더불어 즐겁게 하고, 귀신을 쫓아 나라의 안녕을 꽤하려고 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연희의 연행 주체가 대부분 국가이기는 하지만 계층이 구분된 연행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며, 보는 이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또한 민간에서 행해지던 연희가 궁중으로 흡수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는 것으로 문화적 왕래가 빈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연행의 공간은 뜰, 저자, 전각 등 비교적 개방된 열린 공간이었으나 낙랑언덕이나 웅산신당과 같이 제의적 의미를 강하게 띄고 있는 특정하게 지정된 곳이 있었다는 것이 특이할 만한 것이다. 이는 제의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고정된 제장에서 연행되었던 고대 연희의 특성상 필연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탈춤의 고대적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후대에 이르러서 탈춤의 연행공간은 임의적인 자연공간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적 제의와는 별도로 민간에서 연행된 탈춤은 따로 지정된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 궁중과 민간연희의 분리와 탈춤 공연장의 등장
고려시대의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 행사에 대한 기록에서, 백희가무를 벌일 때 채붕과 같은 구조물에 대한 언급이 빈번히 보이는 것은 삼국시대나 통일 신라시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 {高麗史}에 나타난 연행공간에 대한 기록들은 궁중에서 벌어진 연희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행사와 더불어 이루어진 잡희와 가무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왕이 봉은사로 가서 연등회를 특별히 열고 새로 만든 불상을 찬송하였다. 이때에 가로에는 이틀 밤에 걸쳐서 각각 3만개의 등불을 밝혔으며 중광전과 각 관아에는 모두 채단으로 장식한 다락(綵棚)과 등불산을 장치하고 풍악을 잡혔다.
왕이 본 궁궐로 가서 팔관회를 베풀었으며 이튿날 대회를 열었는데, 공주는 의봉루 옆에 막을 치고 구경하였다.
충렬왕 3년에 왕이 원나라를 방문하게 되어 연등회를 앞당겨 하였는데 공주가 먼저 나가서 채붕 앞에서 음악을 감상하였다.
우가 의비와 같이 화원으로 가서 관등놀이를 하는데 채단으로 사다리를 매고 잡종 놀음을 아주 호화스럽게 꾸미었으며 노래와 풍악 소리가 새벽녘까지 들렸다.
연등회는 불교의식의 일종이나 고대의 풍년기원제가 불교 전래 후 불교의 등공양인 연등과 습합되어서 팔관회와 아울러 국가적인 행사로 거행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연등회의 시기가 {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하면 매년 정월 보름이었으나 고려시대에 2월 보름으로 변화하고 이것이 의종대에 들어서는 사월 초파일로 연행시기가 고정되었다는 것을 보아 더욱 명확해진다.
한편 아래 자료들을 통해 행사에 참여한 이들의 태도를 보면 이러한 행사가 제의적 성격 외에도 유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시가(市街)의 다락에서 왕이 연행을 관람한 것으로 보아 궁중 내의 폐쇄된 행사가 아니라 일반민중에게도 개방된 행사임을 알 수 있다.
32년 4월 8일에 회이가 연등회를 하면서 채붕을 가설하고, 기악과 온갖 잡희를 연출시켜 밤새도록 즐겁게 놀게 하니 도읍 안에 남녀노소 구경꾼이 담을 이루었다.
우가 단오날 시가의 다락에 올라 격구, 화포 등 잡희를 구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는 이전 시기와는 달리 궁중만의 행사였으며, 연행의 주체도 광대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충렬왕 5년에 왕은 원나라에 체재하였는데 공주는 내부에 두었던 악기를 꺼내서 伶官(악사)들로 하여금 종일토록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웅방, 홀적, 삼번이 연일 연회를 베풀었다. 또 궁중에 층대 채붕을 가설하고 등불을 켰으며 伶人(광대)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또 그가 추밀승선으로 있을 때에 연등행사 하던 날 밤에 왕이 연회를 배설하였는데 술이 흥겨웠을 때 위계정에게 춤을 추라고 왕이 명령하였다. 이때 그는 왕의 명령을 사절하여 말하기를 '광대가 있는데 어찌 제가 춤을 추겠습니까?'라고 하니 왕도 못하고 그만 둔 일도 있었다.
우가 대동강으로 가서 배를 띄우고 호악을 연주시켰으며 우는 스스로 호적을 불고 또 몽고 춤을 추었다.
그러나 위의 자료들 중 두번째와 세번째 것을 보았을 때 광대가 공연을 하고 참여자들은 일방적으로 관람하는 수준의 연행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高麗史}에 나타난 연행의 기록들은 위의 자료들의 밑줄친 부분처럼 백희가무를 연행하는 공간에 채붕 혹은 붕이라는 구조물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유교적인 이념이 자리잡고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체제가 형성되면서 무교와 불교 중심의 국중대회는 폐지되고 궁중에서 채붕을 설치하여 잡희를 벌였고, 조선시대에는 광대들로 하여금 산대잡극 또는 세말 나례 행사를 하게 함으로써 산대도감에서 관장하는 궁중 중심의 산대놀이가 계속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종래의 국중대회는 지역 단위의 공동체놀이로 분리된 것이다. 궁중풍속과 민속이 불일치하는 이러한 시대는 조선 인조때 산대놀이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어졌다.
민간에서 전승된 잡희와 가무에 대한 기록은 상류계층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전하고 있는 탈춤의 모습에서 예전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의 서낭신을 위한 제의에서 정월 보름에 마을사람들에 의해 연행된 탈춤인데, 연행에 사용되던 가면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연행순서를 보면, 먼저 섣달 그믐날 산주와 광대들이 풍물을 치며 서낭당에 올라가 대내림을 받는다. 이 당맞이 행렬은 하당을 거쳐 삼신당에 들러 參禮를 하고 동사 앞마당으로 가서 서낭대를 마당에 세우고 길놀이를 하며 마을곳곳의 집을 돌게 된다. 그리고 洞舍 앞 마당에서 이르러 별다른 포장이나 가설무대 없이 본격적인 탈춤을 벌인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연행공간은 마을 곳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연행장소가 동사 앞마당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탈춤의 무대로 이야기하는 산대에 대한 기록 또한 이때 처음 나타나는데, 조선중기까지 벌어진 궁중연희의 모습은 {朝鮮王朝實錄}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 문헌 자체가 방대하여 꼼꼼하게 살피기는 어렵지만 크게 궁중 내에서 벌어진 관나에 대한 기록과 중국사신을 영접하거나 부묘할 때 산대를 설치하고 잡희를 행한 기록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衁. 사정전(思政殿) 동쪽 모퉁이에 나아가 {나례}(儺禮)를 보았다. 왕세자(王世子)와 효령 대군 이보(李補)·영응 대군 이염(李琰)·제장(諸將)·종친·재추가 입시하였다.
遁. 삼대비(三大妃)가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발을 드리우고, 임금은 처마에 나아가 {나례}(儺禮)를 관람하였는데, 모든 종재(宗宰)가 입시(入侍)하였다. 탕물(帑物)을 내어 종재로 하여금 내기를 걸게 하였으며, 영우(伶優)와 기녀(妓女)에게 물건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위의 衁과 遁의 자료는 관나에 대한 기록으로 궁전 뜰에서 이루어지며 전각의 처마 밑에 임금의 자리가 고정되고 왕비 등 부녀자들은 전각에서 조금 비껴난 장소나 협실에 발을 치고 나례를 관람하게 되는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임금이 관람하는 자리는 궁전 안쪽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곳만을 관람석으로 하는 일면적인 무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면이 트인 연희장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보여 진다.
다음으로 사신영접이나 부묘할 때에 대한 자료를 통해 산대의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鑁. 병조에서 계하기를, '산대(山臺)의 높이는 상세한 규정이 없어서, 산대를 맺을 적마다 좌우편쪽만 높게 하려 하였다가, 바람이 심하면 혹 기울어져 쓰러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산대의 기둥이 땅에서부터 60척 이상을 더 올리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鱁. 신들이, 호조가 간직하고 있는 채붕 의식을 상고해 보고 임오년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산대 도감(山臺都監) 하인(下人)을 찾아 물어 보았더니 …중략… 좌우 양쪽에다 각기 춘산(春山), 하산(夏山), 추산(秋山), 설산(雪山)을 만드는데, 산마다 상죽(上竹) 세개, 차죽(次竹) 여섯 개가 필요하고, 상죽은 길이가 각기 90척(尺), 차죽은 각각 80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쪽 산대에 필요한 것을 계산해 보았더니 꼭 써야 할 상죽이 24개, 차죽이 48개이고, 그밖에 꼭 써야 할 주목(柱木)도 부지기수인데 제일 짧은 것이라도 20여 척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궁궐을 짓느라 다 벌채해 버린 뒤여서 비록 짧은 목재라도 구하기가 어려운 판인데 더구나 90척이나 되는 긴 목재 24주를 구한다는 것은 찾아내기가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목재 생산지인 영서(嶺西) 지방에 혹 쓸 만한 목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얼음이 얼기 전에는 벌채할 수도 없으려니와 벌채를 한다 해도 그를 운반할 민력이 없습니다.…중략…기둥 하나도 그러했는데 더구나 상죽24개, 차죽 48개, 그리고 기타 무수한 목재들이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산대에 소요되는 역군(役軍)들도 그 전에는 그것을 수군(水軍)으로 정하여 의금부가 1천 4백 명, 군기시가 1천 3백 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있는 수군은 얼마 안되고 그나마 온갖 노역에 시달리다 못해 거의 다 도망가고 없는 실정이어서, 초봄 친경(親耕) 때 나례청(儺禮廳)이 수군 30명을 정해 주고 열흘 동안만 부역을 하도록 했는데도 그때 부역한 자가 겨우 10여 명에 불과했었으니, 앞으로 있을 (일도 그것을 보면 알 만합니다.) 한달 동안 부역할 2천 7백 명에 달하는 수군을 동원할 길은 만무한 일입니다. 대체로 사용해야 할 갖가지 종이라든지 기타 휴지(休紙), 판자(板子), 잡목(雜木), 생갈(生葛), 마삭(麻索), 교말(膠末), 단청(丹靑) 등등 이루 셀 수도 없는 것들이 다 필요한데 …중략…
보통 때는 경복궁 문밖이 널찍하여 양쪽에다 산대를 배치하고도 여유가 있었으나, 지금은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 두쪽이 다 좁아서 오른쪽은 비변사를 헐어 내야 비로소 틀을 설치할 수가 있을 것이고, 왼쪽은 그나마 금천교(金川橋) 수문 아래가 되어서 설치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이도 염려스럽습니다.
고려말 李穡의 [山臺雜劇]이라는 시를 보면, 봉래산과 같은 산대를 맺고(山臺結綴以蓬萊) 처용무를 추었다고 표현되고 있는데, 위의 鑁과 鱁의 자료를 보면 동원되는 인원이 2천 7백명에 달하고 상죽 24개, 차죽 48개, 기타 잡목과 치장에 필요한 도구들이 필요하고, 높이가 약 18∼27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볼 때 규모가 가히 산과 같다고 할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산대 설치는 앞서 말했듯이 궁중 연희가 본래의 제의나 유희의 목적에서 벗어나 왕실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를 더욱 강하게 띠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과도하게 대규모화된 궁중 연희의 규모를 줄이자는 건의도 많이 들어왔으나 왕실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한다는 목적 때문에 이러한 대규모 행사는 임진왜란 이후 실질적인 재료준비와 인력동원이 힘들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산대의 구조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산대 자체를 가설무대로 보는 것인데, 산대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 왔다. 다른 하나는 산대를 무대배경으로 보고 그 앞에 탈춤의 놀이판이 벌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북한의 연구자 김일출은 아무런 설명 없이 산대 앞에서 놀이를 벌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글쓴이는 후자의 견해가 더욱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상의 자료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산대는 실질적 기능을 가진 무대였다기 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식물이면서 잡희가 이루어지는 중심적 장소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산대나 채붕, 산붕, 오산 등에 대한 기록에서 設이나 結하고 연행한다고만 표현되어 있고, 산대를 무대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곡예나 재담, 연극 등이 어가가 지나가거나 사신이 행차하는 짧은 시간 안에 한 무대에서 함께 연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ꁁ. '무대에서 공연하는 등의 일은 만일 천사가 환관일 때는 혹 머물러 구경하기도 하지만 학사 대부나 유식한 사람이라면 모두 장난하는 도구로 여기고 즐거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사가 만일 한가롭게 앉아서 관나(觀儺)같이 관람한다면 당연히 잘 갖추어야 하지만 서둘러 오는 즈음에야 어찌 즐거이 이것을 눈여겨보겠는가. 산대(山臺)는 그대로 보수만 하고 잘 갖추지 아니하여도 괜찮겠다.'하였는데, 소세양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천사가 나오는 것을 역력히 보았는데, 당고(唐皐)는 평양에 도착하여 산대 놀이를 공연하니 비록 주의하여 보지는 않았으나 묻기를 '이것은 천자의 조명을 위함인가, 나를 위함인가?'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천자의 조명을 위하고 역시 대인(大人)도 위함이다.'하였더니 그제야 배우들에게 뜰에서 공연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공·오(吳)는 평양에 도착하여 산대의 위에 걸어 올라가서 관람하여 마지 않았으며 또 광화문 밖에서도 멈추어 관람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모든 연회에 모두 연극을 공연하므로 천사가 싫어하지 않습니다. 전부터 전하여 오던 것을 너무 초라하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위의 자료 ꁁ은 중국의 사신이 이례적으로 잡희를 구경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배우는 뜰에서 공연을 하고 사신은 산대 위에서 구경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어 산대가 공연 무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대의 종류는 다양하여 山車나 曳山臺처럼 끌고 다니는 것이 있고, 그 규모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높은 것이어서 이 위에서 곡예나 연극, 혹은 춤을 추기엔 부적절했다고 여겨진다. 최근 발견된 奉使圖는 영조 1년(1725) 중국 사신 阿克敦이 조선에 다녀가면서 각종 행사 절차 및 풍속, 풍경을 담아 그린 20장 짜리 화첩이다. 이 가운데 雜戱를 그린 장면에서 끌고 다니는 바퀴가 달린 무대 위에 기암괴석의 모양을 한 산 같은 장식이 되어 있고 그 위에 사람인 듯 보이는 인물 셋이 올라가 있고, 그 앞에서 광대들이 땅재주와 줄타기, 탈춤으로 보이는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바퀴가 달린 무대가 예산대로 보이는 것인데 {성종실록} 권174 경자년 1월 17일의 기사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진실은 기존의 대규모 산대가 임진왜란 이후 산대를 만드는 데 쓰이는 林木을 조달하기 어렵고, 산대를 만드는 인력의 동원이 어려우며, 임진왜란때 비변사 등을 세우는 바람에 경복궁 문 앞이 좁아져서 거대한 산대를 세울 공간이 없는 등의 이유로 예산대로 대체되었다고 보고 있다. 아무튼 이 예산대 위에서 보이는 인물이 실제 인물인가 하는 점은 탈춤의 연행 공간을 따지는 이 글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실제 사람이라면 앞의 ꁁ의 기록에서처럼 중국의 사신이 친히 광대들의 연행공간인 무대 위에서 잡희를 관람하였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이 위의 인물들의 모습이 다홍치마를 입은 여자, 회색 삿갓을 쓰고 회색 옷을 입고 막대기를 든 남자, 바위 사이로 얼굴만 보이는 남자인 것으로 보아 인형극을 묘사한 장면이거나 雜像이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산대는 탈춤이 연행되는 무대를 일컫는 말이라기 보다는 잡희를 할 때 설치한 산 모양을 한 장식물이라는 편이 훨씬 타당성 있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탈춤은 그 앞에서 구경꾼들과 더불어 연행되어진 것이다. 이처럼 궁중의 산대희나 나례희가 구조물을 가설하고 연행되었으나 구경하는 사람들과 명확히 구분된 무대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 당시 행해지던 민속연희의 연행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래와 같은 인용문을 통해 이 당시 민간에서 이루어진 탈춤의 연행공간을 볼 수 있다.
연극에는 산희(山戱)와 야희(野戱)의 두 부가 있으며 이것은 나례도감에 소속되어 있었다. 산희는 결채를 하고 장막으로 이것을 가리우고 사호(獅虎), 만석승의 춤(曼碩僧舞) 등을 상연하고 야희는 당녀(唐女)와 소매(小梅)로 분장을 하고 가무를 한다. 만석은 고려말에 있었던 중의 이름이요 당녀는 고려때 예성강변에 살던 중국인 창녀(倡女)의 이름이다. 소매는 옛날 미인이었다.
나례도감에 소속된 광대들은 유사시에만 상경하여 출연한 다음 평상시는 떼를 지어 경향 각지를 다니며 각종 연희로 걸립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연행물중 위에 표현된 산희는 지금의 꼭두각시 놀음 같은 인형극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결채와 장막같은 구조물을 필요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야희는 말 그대로 들판에서 펼쳐진 오늘날의 탈춤의 모습을 한 가면극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탈춤은 궁중에서 산대라는 구조물을 배경으로 연행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는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연행의 주체는 전문적인 광대나 재인으로 굳어지고 그 목적도 국가의 광영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으로 굳어진다. 이러한 상황 하에 이전 시기 국가의 행사에 함께 어우러졌던 민중들의 연희는 분리되어 지방색을 강하게 띠면서 공동체의 목적을 위해 연행되었던 것이다.
3. 궁중연희의 쇠퇴와 민간연희 연행공간의 다양화
이전 시기의 여러 가지 궁중연희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쇠퇴해지고 국력에 의해 차츰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하여, 산대도감이 폐지되고 궁중의 산대, 나례는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광대들이 방황하게 되었고, 사사 혁파 이후 절에서 행해지던 기악이나 각종 연희가 폐지되면서 환속한 잡역승이나 승광대들과 결합하여 유랑예인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가 소급하여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탈춤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고, 각종 상업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흥행의 성격을 띤 탈춤이 기록상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산대도감의 폐지가 바로 탈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 2장에서 언급한 기록들이 분명히 탈춤의 흔적을 가진 연희들이 민간에서 연행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대도감이 폐지되면서 궁중의 산대놀이는 폐지되었으나, 민간에서 이루어진 민속연희는 더욱 다채롭게 나타난다.
衁. 고성 풍속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군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비단으로 신 모양의 가면을 만들어 사당 안에 안치해 두면 12월 20일 이후에 그 신은 고을 사람에게 내린다. 그 신에게 접한 사람은 그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그 고을 관아의 안이며 또 고을(衙內及邑村)을 두루 돌며 논다. 이때에 가가호호에서는 그 신을 맞이하여 즐긴다.
遁. 지방의 관아에서는 우인들이 허수아비의 탈을 쓰고 바라를 울리며 막대기를 휘두르고 소리를 치며 또 무엇인가를 쫓는 시늉을 하며 몇 마당 두루 돌다가 밖으로 나간다.
위의 衁은 지금의 고성오광대놀음으로 추정되는 탈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사월 초파일기록에는 가(街)에서 사람들이 논다고 하여 고을이나 마을에서 행해지는 연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문적인 優人들에 의한 연희라기 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직접 연희자로 나서서 마을이나 고을을 돌면서 행한 연희의 모습으로 보인다. 또한 遁의 자료를 통해 각지방에서 이러한 연행들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江陵官奴假面劇은 16, 7세기 조선조의 소설가이자 학자인 許筠의 [惺所覆捺藁] 大嶺山神 贊拄序에 처음 기록이 나타난다. 강릉관노가면극은 강릉고을을 수호해주는 大關嶺 城隍神을 맞이하는 端午祭에서 행해지던 것인데, 음력 4월 초하루와 8일 두 차례에 걸쳐 준비를 위해 大城隍堂에 모여 행사를 맡은 이들이 협의를 하고, 4월 15일 본격적인 端午祭가 시작된다. 그 절차를 보면, 단오날 이른 아침 성황신 맞이 일행이 대관령 성황신당으로 가서 대내림을 받는다. 저녁 때 읍내로 돌아온 당맞이 행렬은 읍내 입구에 있는 소성황당에서 잠시 쉬었다가 郡守官舍 등 官衙를 한바퀴 돌고 나서, 읍내의 대성황당에 이르러 당안에 신대를 安置시킨다. 그 후 5월 초하루부터 실제의 祭에 들어가는데, 대성황당 앞에서 무당이 굿을 하게 된다. 5월 5일의 神遊祭는 神竿이 읍내의 각 성황당을 방문하고, 그 뒤에 읍내 각처를 巡遊하는 것인데, 이날 대성황당 앞 광장에는 가장 성대한 놀이판이 벌어진다. 이 기간중 5월 1일, 5월 4일, 5월 5일에는 대성황당 앞 광장에서 관노 가면극이 행해지는 것이다. 官이 주관하고 강릉의 고을 사람들이 연희의 주체로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공간은 제의의 공간이자 각종 잡희들이 연행되는 공간으로 별다른 구조물이나 무대장치 따위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843년에 쓰여진 송만재의 [觀優戱五十首]는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산대놀이 등을 보고 연희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시속에 묘사된 연행의 공간은 정자에 높게 횃불을 밝힌 곳 아래에서 관중(衆)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다. 또한 서문격인 병서(竝序)에서는 고관대작의 문 앞에 산 같은 붕(棚)을 차리고, 극(劇)은 마당(場)에서 벌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18세기 중엽에 쓰여진 강이천의 [南城觀戱子]는 아현산대를 보고 지은 시이다. 이 글에서는 산대놀이가 남문 밖에서 펼쳐진다고 하고 있는데, 탈춤의 연희자는 서울 시정과 근교를 중심으로 활동한 본산대패와 같은 전문 놀이패로 보여진다. [南城觀戱子]에 묘사된 연행공간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소나무 사이에 푸른 장막을 치고 채붕을 설치한 곳이며, 다른 하나는 평평한 언덕이다. 앞의 것은 이후 시의 내용에서 사람형상을 가는 손가락 만큼 나무로 새겨 채색을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산희 즉 인형극으로 볼 수 있으며, 뒤의 것은 상좌, 노장스님, 할미, 무당 등의 등장인물로 보아 야희 즉 지금의 탈춤으로 보인다. [觀優戱五十首]와 [南城觀戱子]는 17, 18세기 경에 나타난 전문예인 집단의 탈춤 연행모습을 그리고 있으나, {동국세시기}나 {열양세시기}에서 지방의 민중들이 탈춤을 연행한 장소와 크게 다르지 않고, 연행이 야외의 마당에서 개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전경욱은 탈춤의 기원을 설명하는데는 두가지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하나는 삼국시대에 유입된 산악(散樂)이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해 형성된 본산대놀이 계통이며, 다른 하나는 마을이나 고을의 제의에서 벌어진 풍물굿에서 기원한 자생적인 마을굿 계통이다. 이에 따라 탈춤 연행공간을 구분하여 살펴보면 앞의 계통의 탈춤은 주로 궁중이나 관아에서 채붕이나 산대를 설치하고 대규모로 벌어진 전문광대에 의한 것이고 뒤의 것은 별다른 구조물없이 마을사람들에 의해 마을 곳곳을 돌며 연행되던 탈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악에서 기원한 전문광대에 의한 연희에서 산대나 채붕이라는 구조물이 보이는 것은 탈춤을 연행하는데 관객들과 분리된 공간의 무대가 필요해서였다기 보다는 다른 연희종목 즉, 줄타기 등의 곡예나 인형극 등을 상연하는데 필요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구조물을 설치하는 편이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데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 흥행의 본격화에 따른 극장의 등장과 전승중단
19세기 말 우리 민족은 개항을 통한 근대화와 외세의 침탈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두 가지의 변화는 전통연희의 공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전통연행예술과 창극 등의 근대극을 상영하는 옥내극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기록상에서 살필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옥내극장은 協律社인데 최남선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戱臺라 함은 支那流로 닐컷는 劇場이라는 말입니다. 조선의 古演戱에는 바른 의미의 舞臺를 요하지 않는 동시에 특정한 극장의 施設도 생기지 안고 마랏섯습니다. 한말 高宗皇帝光武 6年 秋에 御極 四十年稱慶禮式이란 것을 경성에서 거행하기로 하고 東西洋締約各國의 君主에 招請狀을 보내엿는데 이러한 貴賓의 接待를 위하야 여러 가지 新式設備를 급작이 진행할 새 그 중으 하나로 奉常寺의 일부를 터서 시방 새문안 禮拜堂있는 자리에 벽돌로 둥그러케-말하자면 羅馬의 콜로세움을 縮板한 型制의 小劇場을 건설하고 女伶, 才人을 아서 藝戱를 연습케 하얏습니다. 규모는 隘陋하지마는 舞臺, 層階式三方觀覽席, 引幕, 準備室을 설비한 조선 최초의 극장이오 … 이에 관한 사무를 處辨하기 위하야 協律社라는 기관이 宮內部管轄下에 설치되야서 처음에는 稱慶禮式을 위한 기생, 재인 등의 預習을 行하더니 不幸히 그해 가을에 虎列剌의 流行을 因하여 稱慶禮式이 明年으로 延期되고 協律社는 一般娛樂機關으로 妓生, 倡優, 舞童 등의 演藝를 구경식히면서 명년을 기다렷습니다. … 이에 協律社는 슬그머니 營業的 劇場으로 化하야서 이것 저것을 연행하고 일변 기생, 창우의 관리기관노릇을 兼아야서 덥지 안흔 世評을 거듭하더니 光武 十年 四月에 이르러 奉常司(본대 寺더니 이 때는 司로 되얏다) 副提調 李某의 曤論이 있어서 勅令으로 이를 혁파하야 버렷습니다.
이 글은 협률사가 궁중행사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으나, 차츰 일반인에게 이용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만들어진 협률사의 구조가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원형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 연행공간의 구조가 서구식의 극장에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1908년을 전후하여 기존 건물을 개조한 옥내극장들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원각사, 연흥사, 단성사, 광무대, 장안사 등이 있었다. 이중 앞의 세 곳은 판소리, 창극을 주로 공연하였고 뒤의 두 곳은 재래의 가무를 공연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옥내극장을 설립하고 전통연희를 공연하는 기관들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의 대중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를 찾아 극장으로 몰렸으나 곧 식상하게 여기게 되었고 이에 극장들은 구경거리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면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등의 레파토리를 새롭게 개발하고, 지방순회를 다니면서 부자집 사랑채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해주는 등 자구의 노력들을 하게 되었다. 1908년 신문에 당시의 관객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원각사가 공연한 창작창극 '은세계'의 내용에 대한 집단적 항의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인직의 '은세계'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서 탐관오리가 죄없는 농민으로부터 재산을 빼앗기 위해 박해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패와 학정으로 양민을 수탈하는 양반관료에 대한 평민 최병도의 현실고발과 항거가 주제이다. 그런데 관객 윤계환 등이 분노해서 연극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관객이 연극을 하나의 허구로 보지 않고 곧 현실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관객들은 공연도중에라도 작품내용이나 형태에 대해 불만이 있을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항의를 하고 나섰으며, 공연자체를 방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식자층에서는 예술의 오락적 기능을 외면하고 국가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있는 마당에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음담패설로 사람들이나 웃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보고, 이를 퇴폐현상이라 치부하였다. 전통연희를 폄하하는 이들의 의식 한켠에는 근대문물에 대한 열등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각종 서구의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지방에는 여전히 자생적인 민속연희들이 연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농촌계몽운동 등으로 민속문화가 서구문화에 대해 미개한 것으로 오도되고 일제의 통치가 문화에까지 그 영향을 미쳐 각종 민속놀이를 금지시키면서 민속연희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농촌문화를 근간으로 발전했던 민속문화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현실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기인한 것이다. 1930년대까지 복원과 단절을 계속하던 탈춤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겪으면서 전승이 중단되었고, 우리가 보고자 하는 탈춤 연행공간의 모습도 이때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Ⅲ. 탈춤 연행공간의 성격과 특징
1. 탈춤 연행공간의 형식적 특징
Ⅱ장에서 서술한 연행공간의 시대적 변화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연행을 위한 특수한 구조물, 즉 무대와 관람석의 존재 여부이다. 이 구조물은 연행의 목적에 따라 다음의 세 층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먼저 궁중연희와 같이 권위를 과시하는 행사가 있을 때 산대나 채붕같은 특수 구조물을 설치하는 경우이다. 산대나 채붕을 설치한 궁중연희는 삼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한 시기에 왕권이 강화되고 제정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계층의 구분없이 신에게 제사지내고 함께 어울리는 유희적 성격을 띠고 있던 고대 국중대회와는 달리 주변세력과 피지배계층에게 제의를 통해 화려함과 힘을 과장되게 과시하고자 했던 지배계층의 권위를 상징하여 보여주는 역할을 이러한 장식물들이 했던 것이다.
두번째로 흥행을 목적으로한 공연에서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한 구획을 설치한 경우이다. 조선후기 상업도시가 발달한 곳에서 상인과 이속들이 탈춤의 연행에 관여하면서 타지의 연희패나 떠돌이 광대들을 불러 공연했기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봉산탈춤의 연행장소로 알려져 있는 경암루에는 2층의 관람석이 있었는데 공연비를 내는 상인들의 지정석이었다고 한다. 이 또한 따로 마련된 관람석에서 흥행의 주재자로서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고 보여진다.
마지막은 마을이나 고을의 축제(제의)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함께 어울려 놀기에 편한 장소를 지정하여 특별한 구조물을 세우지 않는 경우이다. 권위를 자랑할 필요도, 수입을 관리할 필요도 없는 민간연희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 탈춤을 연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이같이 연행의 목적과 상황은 연행공간을 규정하고 있다. 궁중연희의 영향을 받은 산대놀이에서는 장식물인 산대를 사용하는 연행이 이루어졌고, 큰 장시와 더불어 이루어진 봉산, 은율 등의 탈춤에서도 조작적인 무대를 만들어 흥행을 위한 연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후기 탈춤들이 흥행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탈춤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각 지역사회에서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규정된 연행공간은 보는 연극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함께 하는 축제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축제적 기능은 탈춤의 내용자체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적 전개의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탈춤의 연행공간은 공연의 성격을 띤 궁중에서의 연행과 흥행의 성격을 띤 도시 장터의 상업적 연행, 그리고 마을이나 고을 축제 속의 유희이자 제의인 탈춤연행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이 탈춤의 개방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세번째의 것을 주목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가지의 연행이 모두다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앞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탈춤연행에 대해 표현되어 있는 구체적인 장소는 街, 庭, 場 등과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개방적 공간이었으며, 연행자와 관객과의 거리가 짧고, 집중해서 관람을 했다기 보다는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젖어 연행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는 왕이 신하들과 함께 춤을 출 정도로 개방적이었다는 연행 분위기가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흥행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 후기 탈춤에서도 각 과장 중간중간에 의도적으로 춤대목을 첨가하여 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장치로 작용하도록 했다는 점도 주목하여 볼 만한 것이다.
2. 탈춤 속에 나타난 연행공간
초기 민속학자들과 국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전승단절 이전의 탈춤에 대한 현지조사 자료들을 보면, 탈춤의 연행 장소는 탈판을 관중들이 둘러싸고 앉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나같이 서술하고 있다. 궁중산대의 영향을 받은 극들이 채붕이라는 구조물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장식적 역할을 하거나, 곡예나 인형극에 필요한 구조물이며, 악사석 뒤로도 관중들이 앉을 수 있어 이 역시 삼면으로 둘러싸인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의 연희장은 관중과의 거리가 매우 좁으며 둘 사이의 구분을 위해 깃발 하나를 꽂는 것이 고작이다. 이러한 점은 양주별산대놀이(衁, 遁, 鑁)와 수영야류(鱁, ꁁ), 봉산탈춤(ꑁ)에 대한 다음의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衁. 산대극을 연출할 때는 붕을 설하고 백포를 쳐서 만든 가설극장에서도 하고 혹은 완전한 야외극으로 別로 극장을 만들지 않고 그대로 광장에서 연출하기도 한다.…관중석은 도시한 바와 같이 무대의 전면, 악대의 후면, 개복청의 좌변에 있다.
遁. 양주구읍에서는 약 백 이삼십여년 전부터 산중에서 막, 무대의 장치도 없이 대중을 원형으로 집중케 하고 산대놀이를 하여 왔던 것입니다.
鑁. 양주에서는 물론 竹木의 산대를 만드는 것도 없고, 오로지 산기슭의 광장을 자연적인 무대로 삼아 공연하였다. 양지바른 잔디밭이나 모래밭에 원형 또는 方形의 무대를 정하고, 한편에 六角을 연주하는 천막을 치고 좌우에는 꽃받침을 세우고, 다른 편에는 솔잎으로 만든 綠門을 세우고 그 문 밖에는 改服廳(樂屋)으로 쓰는 천막을 쳤다. 연희자는 개복청으로 들어가 있다가 무대로 나아갔으며 관중은 연희자를 둘러싼 채 관극하였다.
鱁. 무대는 시장터 노천으로 한가운데 長竿을 세우고 큰 등 4개를 달고 거기서부터 사방으로 새끼줄을 거미줄처럼 많이 치는 일인데 문제는 거기에 매달아야 할 등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까 무대는 노천에 懸燈器具를 장치한 원형무대이며 원을 따라 금줄을 쳤으니 안은 연회장이요. 밖은 관객석이다.
ꁁ. 넓은 마당 가운데서 탈놀이를 하게되면 모두 주위의 초가집 지붕위에 올라가 구경을 했다.
ꑁ. 탈놀이를 공연하는 장소는 대개 그 지방 인민들이 즐겨서 모일 수 있는 장소였다.…다만 봉산군이 사리원으로 옮겨온 후 탈놀이가 한 번 흥행의 성격을 띠게된 일제 시대에는 경암루 앞 광장에 28개의 구획을 가진 반원형 다락을 만들고 그 안에 멍석을 깔고 탈놀이를 공연 하였다. 이 경우에는 탈판 이른바 제 3의 구획이 탈군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하는데 쓰는 탈막이였다. 사리원의 이와 같은 극장은 산대놀이의 다락처럼 흰 포장을 치는 것도 아니고 멍석을 둘러싼 지극히 소박한 것이었다. 다른 지방에서는 관중(및 장사꾼)을 위한 설비는 거의 없었다.
이상은 1950년대 이전까지 연행되던 탈춤의 현장에 대한 연구자들의 현지조사에 의한 자료이다. 이 중 마지막의 자료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봉산탈춤의 다락설치와 본격적인 구획이 정리된 무대는 봉산군의 행정기관이 길양리에서 사리원으로 이전된 이후 연행이 상업화된 모습이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봉산탈춤의 무대가 발생 초기에서부터 고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의 지방에서도 탈춤이 상업화되기 이전에는 앞선시기와 마찬가지로 따로 마련된 무대와 관람석이 없는 연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연 희 자 |
연행 장소 |
구 조 물 |
관 람 석 |
|
양주별산대 |
관아의 하층민→사직골 딱딱이패 등의 전문예인 |
사직골 당집앞→ 마을뒷산 잔디밭 혹은 장터 |
전문예인 등장이 후 채붕과 백포를 친 개복청 설치 |
산기슭 비탈진곳 |
봉산탈춤 |
관아의 하층 관속, 상인, 마을주민 |
길양리 경수대 아 래마당→사리원 경암루 등 장터 |
봉산군의 사리원 이전후 구획을 긋 고 다락설치 |
경수대의 돌축대 주변→다락 |
수영야류 |
야류계원 |
시장터 |
깃발을 단 장대, 각종 燈 |
놀이판 주변 |
하회별신굿 탈놀이 |
마을 주민 |
洞舍앞 마당 |
없 음 |
놀이판 주변 |
덧 뵈 기 |
유랑예인집단 |
마을의 마당이나 장터 |
줄타기나 꼭두각 시놀음에 필요한 구조물 |
놀이판 주변 |
앞의 논의는 연구자들에게 보여진 탈춤의 연행공간이다. 그렇다면 탈춤내부에서는 연행공간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고 인식하면서 연행을 진행해 나갔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衁. 원양반 : 쉬-(음악과 춤은 그친다)
少年堂上 애기도령 전후 좌우 벌여 서서 말 잡아 장구 매고, 소잡아 북 매고, 安城맞침(춤) 광쇠(꽹과리) 치고, 雲峰내기 징 치고, 술 거르고, 떠 빚고 遮日 치고, 덕석(멍석)깔고 鴻門宴 높은 잔채(치) 項莊이 칼춤 출 제 이몸이 한가하야 草堂에 비껴앉아 … 후략
遁. 옴 : (들고 있던 홰기로 墨僧의 얼굴을 치며) 네밀할 놈 大方 노름판에 나와서 무얼 어이어이 하니?
… 중략 …
묵승 : 니 어짼 말이냐? 나오기는 한 60년 되었지만 노름판에를 인제 나왔단 말이야 … 후략
鑁. 신장사 : (원숭이를 업고 등장) 야- 장이 잘섰다. 장자미(場滋味)가 좋다기에 불원천리하고 왔드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구나. 인물병풍을 둘러쳤이니 이것이 태평장이로구나
위에 열거된 대사들은 각각 동래야류, 양주산대, 봉산탈춤의 놀이판을 설명하고 있다. 연행공간의 모습은 주로 등장인물들이 놀이판에 나오게 된 내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묘사되는데, 위의 세 가지 모두 장이 선 가운데 마련된 놀이판에서 연행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흥행성이 가미된 연행의 모습인 것이다. 반면에 흥행의 목적 보다는 마을굿에서 제의와 놀이의 목적으로 연행된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는 등장인물의 대사 가운데 별다른 장소 설명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위에 인용된 흥행의 형태를 가진 탈춤은 연행을 둘러싸고 모인 사람들에게 이곳은 놀이판이라고 하는 비일상적인 공간인식을 재차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면, 마을굿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탈춤 대사 속에 나타난 공간은 놀이판으로 규정되어 있다. 흥청거리는 장의 분위기, 공동체의 긴장이 풀어지는 마을굿과 같이 일상을 떠난 시공간에서 놀기 위해 마련된 판이라는 것이다. 물론 도시장터의 탈춤 놀이판에서 나타나는 비일상성은 마을이나 고을축제에서의 탈춤 놀이판에 비해 뚜렷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춤대목과 관객을 향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마을굿에서의 연행에 비해 의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3. 연행공간이 탈춤에서 차지하는 위치
탈춤의 민중성은 문제를 제기하고 관중들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기 보다는 관중(혹은 향유자들)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문제를 내놓을 수 있는 판을 마련하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적 신명의 경험을 축적시키는 역할을 했다는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사건이나 사실을 제3자 혹은 해설자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인식의 통일 즉, 봉건적 억압에 대한 비판 혹은 민중들 사이에 쌓여 있는 갈등을 바탕으로 연행될 수 있었으며, 그랬을 때 관중들은 의식의 결합을 통해 한데 어우러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탈춤의 연행장소는 개방적이며 필요에 따라 즉흥적으로 연행이 벌어질 수 있는 마당판이다. 모든 연극적 장소는 연기마당을 점유하고 있는 배우들과 관객에게 주어진 공간을 차지하는 관중사이에 어떠한 관계를 세울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전통사회에서 생업공간이 넓게 확보되어 있는데 비하여, 놀이공간은 별도로 확보되어 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놀이가 일상적으로 지속하는 활동이 아님을 뜻하는 동시에 모든 공간이 놀이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일터가 곧 놀이터이며 일노래와 두레풍물 등을 통해 일을 놀이화 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필요에 따라 산과 들, 강 등 자연환경이 모두 놀이터로 이용될 뿐 아니라, 주거공간이나 이동공간이 평소의 놀이터로 이용되며, 심지어는 당집 앞 같은 제의의 공간도 필요에 따라 놀이터로 바뀐다. 이렇듯 탈춤의 공간은 구경꾼들에겐 결코 낯선 공간일 수 없는 일상의 공간이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관중들은 연희자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볼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극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고 연희자와의 거리감이 좁혀져서 참견이 가능하다. 그리고 일면에서 관람하는 현대연극의 무대공간과는 달리 마당이라는 넓은 탈춤의 연행공간은 연희자들이 사방을 돌며 춤을 추고 대사를 하게 한다. 이러한 공간의 사용은 연행자들이 고정된 시점을 가질 수 없게 하며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관중은 자신을 향한 연희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탈춤의 놀이마당은 원형이어서 중심을 향해서 시각을 모으기 위운 장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주위가 모두 개방되어 있어 분위기를 자유분방하게 유지시키는 이점도 지닌다. 이러한 조건은 극과 관중의 심리적 거리를 쉽게 좁히고 필요한 경우 쉽게 넓히는 작용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연극의 전체적인 효과에 기여하게 된다. 무대장치가 없기 때문에 극중 장소를 나타내려면 대사나 몸짓, 노래 등을 이용한다. 따라서 장면은 자유로이 전환될 수 있다. 탈춤에서 두장면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이러한 공간의 활용성 때문이다. 아울러 관객의 참여가 적극성을 띠게 되는 것도 이러한 공간적 개방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원형공간의 중요한 점 하나는 관중과 관중사이의 관계이다. 원형의 개방된 공간에서 관중은 자신 이외에 다른 관중을 연희자의 연희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연희에 따라 반응하는 반대쪽의 관중이 연희의 한 부분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상대방은 제3자로 인식되지 않고 또다른 자신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어 상대방의 반응은 주체의 적극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다. 또한 관중과 연희자 그리고 다른 관중, 이 셋이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음으로 해서 극과 현실의 넘나듬이 자유로와지고 현실을 떠난 극의 세계로의 몰입을 애초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탈춤연행의 공간이 마당이라는 점은 관중의 개입이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여건을 조성시켜 준다. 좁은 의미에서의 연행장소로서의 마당이 아닌 일상성을 떠난 축제라는 넓은 의미의 공간을 보았을때, 탈춤의 연행상황은 한마디로 놀이판이라는 말로 설명 될 수 있다. 놀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장소라는 것이다. 탈춤의 연행과는 상관없이 이미 관중들은 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 판 안에서 연행자들이 분위기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그 판에 동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탈춤연행은 정월 대보름이나 단오, 초파일, 백중 등 세시행사와 더불어 이루어진다. 조선후기 흥행성을 띠고 있는 도시탈춤의 경우 일정한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장터나 잔치 등과 함께 연행이 이루어졌다. 라흐만의 말을 빌어보자. '축제에서 독단, 헤게모니 그리고 권위는 조롱과 웃음을 통해서 해체된다. 축제적 의식에 의해 무대화되는 장관은 단지 일시적인 기간 동안만 그 기능과 형식이 찬탈되는 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독단과 권위에 의해 초래된 이상향적 잠재력의 상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 생산이 아니라 자신의 생산만을 목표로 하는 축제는 또한 이러한 이상향적 잠재력을 해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잠재의식의 해방이 관중의 개입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 요소가 일상을 떠난 시공간이라는 것이다. '촌놈생일은 장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날은 특별한 날이며, 세시는 묵은 시간을 보내고 새로운 시간을 맞는 일상과는 구별되는 때이다. 이러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시간에는 기존의 질서와 규범에 대한 구속력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탈춤은 이러한 일상을 벗어난 시간 속에서 그들의 일상을 역으로 풍자함으로써 가시적으로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안에서 탈춤의 관중들은 객관화되어서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고 바라는 바에 대해 참견하고 나름의 이상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Ⅳ. 오늘의 탈춤과 마당극의 연행공간
1. 전수된 탈춤의 연행공간
일제시대 전승중단된 탈춤의 현재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하여 볼 수 있다. 복원되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전수회관 등에서 공연되는 탈춤과 탈춤의 현대적 계승을 내건 마당극의 공연이 바로 그것이다. 1장에서는 먼저 우리가 흔히 탈춤공연을 본다고 이야기 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전수된 탈춤의 연행공간에 대해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다.
원형적으로 복원되어 전수되는 탈춤은 오늘에 전해진 상태 그대로를 원형으로 규정, 이를 보존하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더 이상의 변질이나 소멸을 방지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각지방의 전수회관을 통해 일반인에게 교육되어지고 공연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속을 박제화하여 자생적 발전을 막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또한 오늘에 전해진 상태가 완전한 原型인가 하는 점도 문제점으로 나타난다. 대사를 채록하고 연행 현장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의 사견이 많이 개입되어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 복원 자체가 이미 산업화된 오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행 현장은 고려되지 않은 채 원래 우리 것이었던 것을 오히려 낯선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고려되지 않은 연행 현장 중에 특히 연행 공간의 문제는 그 성격을 유희적이고 축제적인 연행에서 흥행내지는 공연 중심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탈춤이 발굴되고 복원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 민속예술경연대회의 연행공간은 대부분 실내 체육관이거나 지방의 공설운동장이었다. 이러한 연행의 상황은 참여자들이 함께 즐기고 놀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예를 겨루어 상을 타기 위한 것으로 연행의 성격을 변모시켰고 더욱 화려하고 기교적인 연행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연행에 소요되는 시간도 밤새 어울려 놀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30분 내지 한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어 많은 연행 내용에 첨삭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실내 체육관이나 공설 운동장 등의 연행공간은 구경하는 사람이 연행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차단되어 있어 연행자들은 대부분 심사위원을 향한 일면적 연행을 행하게 되어 있다. 우리 축제의 본질이 함께 어울려 놀고 적극적으로 연행에 참여함으로써 집단적인 신명이 발휘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체육관의 스탠드에 앉은 구경꾼들이 참여할 수 없는 연행이 원형적인 전수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드나듬이 자유로운 탈춤연행의 개방성에 대해서도 민속예술 경연대회의 경연장은 행사진행요원들에 의해 출입이 제한되고 통제된다. 민속예술경연대회가 지향하는, 민속을 발굴 보존하고 전승 또는 계승하여 민족적 동질성 확보와 향토문화의 전통을 되살린 향토축제의 장을 만든다라고 하는 본래의 목적이 오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정한 세시에 연행되던 전통탈춤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상설공연장이 설치되어 어느때고 탈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탈춤의 상설공연장으로는 국립극장 놀이마당, 서울놀이마당, 하회별신굿 전수관 등을 들 수 있다.
국립극장 놀이마당은 야외극장을 만들어 사용자나 관람자들에게 무료 공개 공연을 함으로써 폐쇄적 인상, 권위주의적 인상을 바꾸어 친근감을 주는 국립극장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1982년 5월 개장하였다. 원래 탈춤이나 민속예술의 공연장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나 예산상의 문제, 위치선정의 문제 때문에 규모가 축소되면서 야외극장이 '마당'으로 성격지어 지면서 전통예술 전문 공연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개장 초반에는 한해 평균 50회 정도의 공연이 이루어졌고 정기적인 공연은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매주 수요일 정기공연을 하고 있고, 주로 각 전통 예술단의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86년 놀이마당 운영에 대한 국립극장 자체 평가에 의하면 관객들은 우리나라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웃 나라 것을 처음 보는 듯 서먹한 분위기에서 예술로 보지도 않고 놀이 속에 참여하지도 않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놀이마당에서는 매주 토요일 정기적인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근 롯데월드에 온 관광객들과 석촌호수 주변의 주민들이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도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앞의 국립극장 놀이마당보다는 고정적인 관람객이 많으며 정기적 공연이 상당히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많은 편이다. 서울 놀이마당과 국립극장 놀이마당은 중앙에 무대가 있고 주변에 반원형의 객석이 자리잡고 있는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민속예술경연대회와는 달리 무대와 객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구획이 지어 있지 않아 언제라도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이곳들 또한 경연형식의 공연이 이루어질 때는 본부석을 향해 일면적인 연행이 이루어지고 관객개입의 여지는 거의 없다. 다만 경연이 끝난 후 참여한 사람이 어우러지는 뒤풀이가 이루어지는 것이 민속예술경연대회와는 다른 점이라 하겠다.
무형문화재인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은 보기 드물게 일반에게 공개된 정기적인 탈춤의 연행공간이다. 주요 대상 관객은 하회마을로 관광을 온 타지역의 주민들이나 인근지역에서 탈춤관람을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되어 있다. 이 곳은 구조적으로는 위의 두 곳과 크게 변별되지 않지만 연행 분위기는 위 두 가지 사례와는 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관객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적극적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위에 두 곳과 차별화되는 특성을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프로그램이 하회별신굿탈놀이로 고정되어 있고 매주 토요일 정기적인 공연을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회에 오는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오더라도 일단은 하회가 어떤 곳인지를 대강은 파악하고 온다. 더불어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벌어지는 토요일의 관객들은 주 관람목적이 탈놀이 관람일 경우도 많다. 관객들은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어떤 것이며 어떤 분위기가 벌어질지를 이미 상상하고 놀 준비를 하고 이곳에 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놀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이 연행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며 이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의 운용에서 그 예를 들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각지방의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의 정기공연을 통하거나 각종 향토축제에서 전수된 탈춤은 공연되고 있다.
2. 마당극의 연행공간
1960년대초 4·19 이후 한·일 수교를 전후하여 1963년 11월에 서울대 '향토개척단'의 [향토의식초혼굿]과 같은 민족적인 굿판이 반외세 민족주의 의식의 발현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65년 서울대 문리대에 조직된 '민속극 연구회-말뚝이'라는 모임은 이후 70년대의 탈춤 부흥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마당극의 이념적 뿌리는 4·19 이후의 민족주의적 각성과 그후의 전통탈춤복원운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당극의 본격적인 첫 시작은 1973년 김지하 작, 연출의 [진오귀굿]으로부터이다. 서구 근대연극에 기반한 신극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과 민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한 맥과, 전통민속연희 부흥운동의 맥이 이 작품을 계기로 결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직접적인 마당극의 모태는 70년대초 유행처럼 번진 대학탈춤과 그후의 창작탈춤에서 찾을 수 있다. 창작탈춤은 전통연희인 탈춤의 정서와 형식을 빌어 현실문제를 극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문제란 바로 70년대의 학생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주요 관심사인 반외세문제, 농촌문제, 노동문제, 도시빈민문제, 언론문제, 공해문제 등이었다. 이밖에도 각종 민란이나 동학을 비롯한 의병활동 등 역사적 사건도 70년대 창작탈춤이나 마당극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였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적극적으로 알려 가는 활동을 통해 단순한 연희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운동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면서 부분운동으로서의 특징을 살려나가기 시작하였고 문화운동으로서의 대중화에 대한 필요성으로 대학의 캠퍼스를 벗어나 공장, 교회 등 민중의 생활현장으로 파고들어 현장에 당면한 쟁점을 중심으로 극적인 효과를 높여갔다. 또한 이 시기는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마당극이 정착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민예극장'에서 마당극 역량을 지닌 손진책의 연출하에 1981년부터 MBC의 기획으로 시작하여 해마다 계속됨으로써 대형 규모의 상업 마당극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시기에 채희완과 임진택에 의해 기존의 마당극을 함께 포괄하면서 '일상적인 생활과 놀이를 공유화하여 삶을 집합화하는 총체적인 예술, 문화, 사회운동으로서의 마당굿'이 제기되었다. 80년대 후반, 보다 활발해진 문화운동은 마당극이 가진 연극으로서의 구조적 폐쇄성을 탈피하여, 자체의 표현구조를 스스로 개방하고 각종의 다른 매체들과 연계를 가질 것을 요구하였고, 단순한 예술적 행위로서의 마당극이 아닌 예술의 생활화를 추구하면서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을 일체화시키고 예술이나 정치가 궁극적인 이념으로 하는 인간다운 삶, 즉 이상향의 정신을 내재한 마당굿으로의 발전을 제기하게 된 것은 정치적인 문화운동으로서 마당극의 계층적 기반이 한정되어온 것에 대한 비판을 수용한 것이다.
또한 마당극을 연극으로서 평가하고 논의하면서 서구의 극개념을 도입하여 보다 다양한 내용과 전문적인 기량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의도 이루어졌는데, 공연형식면에서 탈춤의 인물전형이나 표현양식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목표와 의미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전통연희는 물론이고 서구적인 각종 연극양식과 기법까지도 구사하는 유연성을 발휘하여 민족극이라는 보다 성숙한 연극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듯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당극은 이념의 생산 기제로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따라서 그 부문에의 활동은 단순히 전통문화의 재현이나 발굴에 관심있는 학생과 학자들의 영역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 및 정치적 이념을 생산해 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극적인 효과를 가능케 해주는 생산 및 교육의 기제로서 활용된 것이다. 본격적인 마당극의 이론화 작업이 시작된 것이 이때의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 6월 항쟁 이후 보다 넓어진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노동자, 농민연극이 시작되었고 마당극 창작집단이 전국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1989년부터 대규모의 총체공연물인 [꽃다지]라는 이름의 '노래판굿'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고조되었던 민족극계열의 마당극은 1992년 대선을 기점으로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말과 1980년대초까지 대중의 정치적인 적극성과 집단성을 바탕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민족극 계열의 마당극이 대증의 관심사가 집단적으로 응집되지 않는 상황에서 약화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마당극에서 표방하고 있는 마당이라는 무대공간은 애초에 전통연희 특히 탈춤에서 가져온 주요한 연행원리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간 이용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당판에서는 유난히 둥글게 도는 식의 동작선이 많으며, 태극이나 달팽이 등 원을 변형한 곡선들이 자주 쓰인다. 또한 대사 전달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강조하는 표현은 반복하여 말하거나 사방을 돌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는 사설이 반복성을 지니고 있고, 대화가 짧은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나열하는 식의 탈춤의 특성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함평고구마](1978) 연희본 중의 대사 내용이다.
농부 1 : 좀 있응께 뭐… 뭐 농협 고구마 수매자금 80억원 유용 사취?
농부 2 : 그래놓고 뭐, 농협에 뭔 돈이 있것냐?
농부 3 : 그래놓고 뭐, 좀 봐주라?
농부 4 : 그래놓고 뭐, 책임없다. 상관없다?
농부 1, 2, 3, 4의 대사 내용은 농협의 부당함에 대한 내용으로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대사는 이미 등장인물인 고구마를 통해 바로 전에 나왔던 대사의 반복이다. [돼지풀이](1980) 연희본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원장 : 돼지 포고령 제 1 호
위원들 : 돼지 포고령 제 1 호
위원장 : 당국의 사전허가 없이(위원들 복창) 불법교미 중에 있는 돼지는 (복창) 적발 즉시 사형에 처한다.(복창) 무찌르자 수퇘지(양손을 치켜들며 복창) 때려잡자 암퇘지(같은 동작, 복창), 이룩하자 돼지사업(같은 동작, 복창)
(이때 농부들, 관중 속에서 뛰어나온다.)
또한 공간 사용에 있어서 인물, 공간, 사물의 일치가 필요하지 않고, 등퇴장이 자유로우며, 두 사건의 동시적 진행이 가능하다는 탈춤의 공연장소와 극중장소의 관계와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탈춤과 마당극의 연행공간이 이처럼 동일한 측면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마당극에서는 배우의 연기 공간이 객석 안쪽의 원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간혹 객석과 객석 뒤편까지도 배우의 연기 공간으로 삼는다. [믑녀풀이](1982)와 [다찌풀이](1984)의 다음 장면은 그 좋은 예이다.
어부 : (긴급한 소식을 알리듯 마당을 한바퀴 돌며) 도사가 왐젠 햄시난 몬딱덜(모두들)오십서(오세요)
믑녀2 : 성산리 믑수들이우다!
(한바퀴 돌면서 어부 옆에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원형을 만든다.)
믑녀3 : 연평리 믑수들이우다!
(믑녀2와 같은 방법으로 선다.)
믑녀4 : 하도리 믑수들이우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선다.)
믑녀5 : 세화리 믑수들이우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서면 원형이 된다. 이때 북소리에 맞춰 표면장력처럼 객석으로 들어가고 관객들과 어울려 노래를 한다.)
(일본여성들, 시위대를 이루며 객석 사이를 휘저으며 등장.)
일본여성들 : 여러명의 일본여성들이 다음 대사를 적당히 나누어서 한다. 대사는 반복되거나 겹치기도 한다.) 죠센징이노 더러운 자식들! 돈을 벌려면 깨끗하게 벌지, 여자를 팔아서 돈을 벌어? 더러운 쌔끼들! 우리가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참고 있을 수는 없지! 죠센징이노 돈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미개한 놈들이다. 죠센징이노 더러운 놈으 새끼들…
(객석을 모두 돈 후, 판에 내려와 시위 대형으로 줄지어 선다.)
또한 [비오면 비투사 눈오면 눈투사](1990)에서는 노동자 투쟁의 절정 부분에서 노동자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객석 사이로 난 통로를 빠르게 뛰어 가로질러 객석 뒷편의 높은 지대(건물 옥상위나 베란다 등)로 뛰어올라가 그 곳까지 연기의 공간으로 삼는다.
이러한 공간의 활용은 공연공간의 스케일을 확장시켜 관중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부분에서 주로 사용된다. 이러한 점은 마당극이 주로 사회현실을 다루면서 선동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되는 기법이다. 그러나 극 전체의 흐름과 잘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배우의 튀는 연기로 어색하게 되버리기 쉽다.
아예 마당극을 표방하면서 무대위에서 공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글쓴이가 1997년 7월에 관람한 극단 아리랑의 [점아 점아 콩점아]가 그 좋은 예가 되는데, 이 작품은 광주항쟁과 통일이라는 주제를 통일굿으로 엮어내는데 노래, 춤, 음악, 풍물을 극구성의 기본요소로 삼고 굿이라는 전통적 연행양식을 이용하고 있는 마당극을 표방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극에서 굿은 하나의 표현 소재이지 중심이 되지는 않는다. 전반적인 극의 진행은 무대를 벗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무대 장치의 효과가 극의 진행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연희자들은 가끔 객석에 불이 켜지고 관객과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관객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이러한 장면에서조차 관객은 자유롭게 극의 진행에 개입할 수 없고 오히려 어색해 한다. 탈춤의 기본동작을 활용한 춤도 더러 엿보이지만 좁은 소극장의 공간에서는 탈춤 특유의 시원스러움이 돋보이진 않는다. 다만 신장거리에서 활용된 탈춤의 전형적인 인물성만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이렇듯 전통연희를 소재로 이용한 마당극이 전문연극의 한갈래로 자리잡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마당에 집착하지 않는 다양한 형식의 실험적 형태의 연극으로서 적절한 변화의 흐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탈춤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본질에서 이미 이탈한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3. 과거와 현재의 연행공간
윗 글들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과거와 현재 연행공간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차이는 연행의 분위기 즉 연행 상황이다. 이 장에서는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내걸고 있는 마당극의 연행공간과 탈춤의 연행공간을 중심으로 비교하여 이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탈춤의 연행 상황은 일상에서 벗어난 축제나 마을 장터같이 개방된 공간이다. 마당극과 탈춤의 연행공간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당극은 독립된 공연으로서 관중에게 보여지기 보다는 특정 행사나 집회, 축제의 한 부분으로 놓여지는 경우가 많다. 마당극 공연 앞뒤에 다른 프로그램이 놓여지거나, 아니면 그 마당극 공연이 행사 자체가 되기도 한다. [진동아굿](1975)은 '동아일보 자유언론 수호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첨예한 사회적 사건이었으나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실제 실상을 관중에게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즉석 모금운동과 사건보고대회로 이어졌다. 위에서 인용한 [함평고구마]는 농민대회장과 함평 마을에서 투쟁의 승리를 보고하는 자축적인 분위기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또한 1980년대의 창작탈춤식 마당극은 일종의 대리집회로서 대학 캠퍼스 내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의 마당극도 순회공연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농촌이나 공장 등지를 돌며 공연이 이루어졌다.
인식적 공유가 이미 되어 있는 사실이 연행을 통해 합일을 이루는 탈춤과는 달리 마당극은 사건의 전달이나 선동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관중과의 교감도 어색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보여진다. 사회적 모순에 대해 함께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교감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사설중에 빠진 대목이 있거나 공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관중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춤대목에서는 함께 춤을 추는 탈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마당극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은 일상의 연장선이다. 이러한 판은 탈춤이 축제라는 비일상의 시공간에서 공동체적 신명의 어우러짐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상 속의 치열한 삶의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일상 속에서 치열하게 사회의 모순과 대결할 것을 추동해내는 일종의 교육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탈춤이 민중들의 이상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모순에 대항하는 힘을 축적시켰다면 마당극은 즉자적인 힘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차이를 이 둘의 연행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나타나는 과거와 현재 연행공간의 차이에 따른 문제점과 이에 따른 대안 모색은 다음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다.
Ⅴ. 탈춤 연행공간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 모색
1. 탈춤의 현대적 계승에 대한 필요성
전통문화와 민속예술의 계승이라는 명제는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소위 먹고사는 문제가 삶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 때부터 이미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따지고 들어갔을 때, 전통문화를 왜 계승해야 하며 무엇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으로 희박하다. 단지 옛것이기 때문에, 혹은 예전에 더욱 인간적인 삶을 살았다고 여겨지고 그 속에서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던 것이 민속예술이기 때문이라는 다분히 향수적인 관념들이 전통문화 계승과 수용이라는 사회문화적 조류에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구조는 변화하였고 민속예술은 그것이 기능하던 사회적 틀을 벗어나 있다. 그 속에서 무비판적인 전통회귀는 자칫 감상적인 향수의 장식물적 역할에 그치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 즉, 전통문화와 민속예술을 계승하고자 하는 논의에 앞서 전통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어야 하며 어떤 전통을, 왜, 어떻게 계승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전통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날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상·관습·행동 행위의 양식, 또는 그것의 핵심을 이루는 정신'으로 정의된다. 전통이 관습과 구별되는 점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기능하며 필요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글은 전통이 새롭게 창조되는 시기를 정의하고 있다.
역사가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는 아마도 전통의 '창조'가 없었던 시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되어 '낡은' 전통이 걸맞추어 사회적 유형이 약화되거나 소멸되고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때, 또는 그러한 낡은 전통과 그 전통을 이끌고 나갔던 촉진제들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고 융통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 않을 때 또는 낡은 전통과 제도가 소멸되어 갈 때 새로운 전통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법이다. 즉 간단히 말하면 수요쪽이나 공급쪽에서 충분히 크고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이다.
전통은 이처럼 필요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되는 효용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민속예술은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식민지 하에서 정책적으로 그 전승의 맥이 단절되었거나 본질이 왜곡되었다. 또한 식민통치 이후에도 국토 양단과 전쟁 등 현대사의 굴곡을 거치면서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은 계속되었다. 현시점의 우리 문화는 민족적 전통에 기반하여 창조되었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이식된 문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면서, 문화의 향유자들이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하기 보다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매스미디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의 민족적 자각은 위의 인용문처럼 우리 문화에서 새로운 전통의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전통의 창조는 지난날 단절되었던 전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채희완은 전통계승의 효용과 가치를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번째, 민족 주체성이나 민족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며, 두번째, 민중의 문화 역량을 활성화하기 위해 민속예술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두번째와 같은 맥락에서 민속이 자주적인 인간상을 그려내는 인본주의적 개념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전통을 통한 공동체의식 공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문화 창조의 역사적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통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한마디로 정리해 보자면 전통은 우리 민족의 사회적 삶의 체험들을 저장하고 있는 역사적인 것이며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화적 혼란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열쇠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탈춤이라는 민속예술의 마을공동체 강화라고 하는 사회적 기능은 사회구조가 변화하면서 그 의미를 이미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사회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놀이성 등은 현대 사회에서도 충분히 적용가능하고 필요한 것이다. 탈춤 전통의 창조적 계승은 1970년대 탈춤부흥운동과 그 이후의 마당극운동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마당극운동은 다분히 전문적인 연극운동으로 자리매김하여 문제를 그 직접적인 체험자가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기능하는 탈춤의 민중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것은 탈춤 전통의 계승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탈춤을 현대 예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별 공연물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는 민속예술의 특징인 민중의 창조적 전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문화적 상황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탈춤의 창조적 계승의 한계가 될 수는 없다고 보여지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움직임들이 필요하다. 탈춤 연행공간의 현대화에 따르는 무대, 객석, 주변공간 구성에 대한 논의는 각종 상설공연장 건립과 안동 국제 탈춤페스티벌 등의 전문적인 탈춤 공연 행사와 더불어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구체적인 현대적 모습을 그려내기에 앞서 대안 모색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나름의 모델을 세워 보도록 하겠다.
2. 연행공간의 현대화에 관한 대안 모색
탈춤 연행공간의 현대적 대안 모색은 대략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첫번째는 복원된 전통탈춤이 공연될 때 연행 상황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전통에 근접하게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앞의 장들에서 보듯이 복원된 탈춤을 관람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낯선 것으로 관객들이 이를 대하여 극진행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을 세우고자 할 때 핵심이 되는 것은 익숙함 속에서 놀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전수관이 가장 전통 탈춤의 유희적 분위기에 근접한 공연을 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정기적인 공연과 고정된 연행공간 즉 반복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찾을 때 놀 준비를 할 수 있다. 탈춤이 그 전승현장에서 복원되어 공연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판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고정된 무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놀이판을 둘러싼 주변상황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대규모의 인원이 한꺼번에 집중하여 관람하는 무대를 만드는 것 보다는 소규모의 판들이 축제의 장으로 열려진 공간 여기저기에 벌어지는 것이 보다 비일상화된 놀이판을 만드는데 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 방향은 전문연극으로서의 마당극에 전통적인 탈춤의 연극원리를 도입하고자 했을 때 찾아지는 방향성이다. 이 또한 앞서 말한 복원되어 전수되는 탈춤과 마찬가지로 고정적이고 반복된 공연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하게 탈춤전통의 계승에 있어 무대극으로의 변모가 과연 필연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탈춤과 마당극을 구분해 보면, 탈춤은 연행되는 것이고 마당극은 공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무대라는 공간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탈춤은 연행자와 구경꾼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함께 어우러짐을 최선으로 삼는 놀이의 형식속에 의식적인 내용을 담은 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당극은 극으로서 관객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창작되고 공연된다. 이러한 차이가 마당극에서 기존의 연극보다 덜 나타나는 이유는 마당이라는 공간을 연행 장소로 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야외나 그밖의 체육관 등의 장소를 연행장소로 택하더라도 놀이판과 관중석이 완전히 분리되어진 모습이 아니라는 것과 아예 연기자를 무대 위로 올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원형 혹은 관중이 놀이판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는 관중과 연행자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지만 무대로 놀이판이 옮겨졌을 때는 명확하게 구분이 되고 관중은 그저 연행을 구경 하는 제3자로 멀어지게 된다. 원형판에서는 관중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극에 완전히 몰입되어 객관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 어렵다. 관중들은 배우의 모습과 아울러 자신의 모습과 닮은 반대쪽의 관중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자기 감정에만 빠져들게 되지 않고 전체의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마당이라는 연행원리를 계승한 마당극이 무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관중과의 교감이라는 핵심을 놓치고 동떨어져 있는 극으로서 관중을 대하는 공연예술로 변모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회가 변하고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마당극이 연행될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명확한 현실이다. 그러나 탈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마당극이 연행예술로서의 성격을 버리고 공연예술로 변모하여 놀이판을 무대 위로 올리는 것만이 마당극의 대중화를 위한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연행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 그 본질을 살리는 것이 더욱 전통계승의 의미를 살리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독창적인 연극양식의 발전에 더욱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연극의 기법중 하나로서의 마당이 아닌 생활공간으로서 일상에서 벗어난 비일상의 시간이 펼쳐지는 놀이판이라는 측면을 주목하여 탈춤의 연행공간을 축제로 규정하고 그 안에서 대안을 찾아보자. 탈춤은 지역단위의 명절놀이로서 이어져 왔다. 일년 가운데 날잡은 날, 사회적으로 약속된 날인 명절의 세시풍속은 생활상의 반성과 전망, 곧 되돌아봄과 내다봄을 조망하여 맺고 풀어 어르는 계기가 된다. 그러한 통로를 통해 밋밋한 삶은 출렁이게 되고 살맛이 나면서 자연적, 개인적, 사회적 맺힘을 풀고 유희적 안정성을 회복한다. 마을단위로 집단적 신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세시풍속이 마을단위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예를 현대 사회에서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세시행사가 가지는 축제성은 일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공간적 의미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이러한 일상을 벗어나 한마디로 '놀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자리는 현재 은산별신제나 강릉의 단오제와 같은 향토축제에서도 볼 수 있다. 향토축제에서는 흔히 전통의 복원으로서 민속연희가 행해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자리에서 새로운 전통의 창출과 축제를 향유하는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현대적인 개념으로 계승하면서, 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의 마당극(혹은 마당굿)이 연행된다면 민속예술이 보다 실제적인 기능을 담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이렇듯 삶과 놀이를 현대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공간의 마련이 필요하다 하겠다.
위의 세가지 현대화 방향성 중에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복원되어 전수되는 탈춤 연행공간의 변화이다. 왜냐하면 전통문화가 현대에 다시 그 맥을 잇고자 할 때 기반이 되는 것이 복원된 문화를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을 탈춤 내부에서 찾아보자. 봉산탈춤의 신장수가 '장 잘섰다. 인물병풍을 둘러쳤구나'라고 말할 때 연극무대 위에서라면 뭔가 어색하다. 시장이나 향토축제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거나 하다못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라면 연행공간과 극중공간이 일치할 수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백정이 우랑을 팔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탈춤만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관객들은 탈춤의 참재미를 느낄 수 없다. 탈춤의 연행공간이 관람석을 향해 열려있을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외에 주변 상황을 향해서도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 관객들이 연희자의 행동이나 대사 하나하나를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개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좀처럼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현대에도 지방의 향토축제나 서울 등의 대도시에서 열리는 거리축제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장소를 전제로 하고 공간의 넘나듬이 자유로운 극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관람석과 놀이판은 굳이 따로 구분된 구획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필요하다면 노끈 등으로 간단히 구분하는 것이 좋다. 흥행의 성격을 띤 조선후기의 탈춤이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일종의 극장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상인들에게 선금을 받고 장의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탈춤판을 벌였다고 했을 때 어느쪽이 보다 관객에게 열린 연행이 이루어졌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탈춤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당대 민중들의 의식을 형상화한 놀이적 성격이 강한 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원된 탈춤이 현대인들의 의식을 어떻게 형상화 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복원된 탈춤이 연행될 때 극 내부에 관객을 향해 열린 구조를 갖게 하는 것이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
서울의 거리축제에서 봉산탈춤 할미과장이 연행된다고 가정해 보자, 연희자가 주변에 있는 부부나 연인들을 끌어들여 즉석에서 그들이 가진 갈등을 할미와 영감의 갈등에 대입하여 즉흥극 형태로 풀어낸다면 어떨까? 탈춤이 심각할 수도 있는 갈등을 희화시켜 해결해 내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데에는 연기자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판이 자유로운 놀이판이라면 보다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사무실에서는 얌전하기만한 사람이 야구장에서는 고함을 치고 흥분하여 흡사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연행의 공간과 극의 내용이 적절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렇듯 현대인의 의식을 표현해 내는 장으로 탈춤이 기능할 수 있다면, 전통탈춤이 당대 민중들의 의식을 반영해내면서 그들의 손에 의해 재창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았을 때, 오늘날 축제에서의 탈춤 연행도 그런 과정을 통해 재창작되어 나름의 기능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Ⅵ. 결 론
이 연구는 탈춤의 현대화라고 하는 문제를 전통변화의 연장선상에 놓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성을 역사적 검토를 통해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탈춤을 현대화하는데 있어서 계숭해야 할 중요한 연행원리로 탈춤의 개방성을 문제삼고 연행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탈춤 연행공간의 과거 모습을 소급하여 추론하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모습과 비교하였고, 바람직한 대안을 세우기 위해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나온 결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사적검토를 통해 탈춤 연행공간의 변화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국가가 주체가되어 열린 축제속에서 연행된 삼국시대 이전까지의 탈춤은 상하계급의 구분없이 문화가 공유되는 상황속에서 하늘과 사람을 함께 즐겁게 하고, 귀신을 붸아 나라의 안녕을 꽤하려는 목적 하에 개방적인 야외공간에서 연행되었다. 구체적으로 탈춤이 연행된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 혹은 신이 내린 곳이었으며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임의적인 자연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수입된 중국의 산악이 통일신라대에 들어 궁중악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체제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면서 궁중의 연희와 민간의 연희가 구분되어 궁중의 연희는 백희가무로 규격화되었고 이 안에서 궁중 탈춤은 연행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유교가 정착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조선초기와 중기에 궁중에서 연행된 탈춤의 공간에는 채붕이나 산대같은 구조물이 등장하여 연행 장소가 지정되었는데, 이는 주변세력과 피지배계층에게 화려하게 꾸민 대규모의 연희를 보여주어 국가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민간의 연희는 각 지방별로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마을을 돌면서 혹은 마을안의 제의장소에서 연행되었다. 민간에서 전승되는 탈춤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개방적인 야외공간에서 그들이 가진 사회적 문제를 내어놓고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마을사람들에 의해 연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흔히 탈춤의 무대라고 일컬어지는 산대의 모습이 문헌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 형태나 쓰임새를 보았을 때 산대는 탈춤이 그 위에서 연행되는 공연무대가 아니라 놀이판을 화려하게 보여주기 위해 꾸민 장식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중기를 거치면서 궁중연희와 민간연희의 분리는 더욱 뚜렷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사회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상업적인 도시가 발달하게된 조선후기의 탈춤은 궁중연희의 쇠퇴와 민간연희의 다양화라고 하는 두가지 상황 속에서 발달하였다. 궁중의 연희는 대부분 폐지되거나 축소되었고 이에 따라 전업유랑예인집단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상업 도시에서 탈춤의 흥행적 연행이 이루어졌고 탈춤 연행공간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흥행의 성격을 띠고 상업적으로 탈춤이 연행될 때에는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탈춤 연행장소에 구획을 지어 관람석과 놀이판을 구분하였고, 줄타기나 인형극을 연행하기 위해 놀이판에 구조물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반면 마을굿이나 고을굿과 더불어 연행된 탈춤의 연행공간은 이전 시기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19세기말 개항을 통한 근대화와 외세의 침탈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변화는 탈춤의 연행형태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도시에 근대극을 상연하는 옥내극장이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흥행물로 탈춤이 연행되는 형태가 생겨나게된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 생겨난 유랑예인집단들은 전국을 떠돌며 양반집 잔치나 상업도시의 장터에 불려다니면서 지방적인 특징이 약화된 화려한 탈춤을 선보이게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탈춤이 존재하는 가운데 20세기 초에 들어 지식인들에 의해 민속문화가 미개한 것으로 오도되고 일제가 각종 민속놀이를 금지시키는 상황속에서 탈춤 전승은 단절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에 들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학자들에 의해 탈춤이 복원될 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탈춤 연행공간의 사적 변화과정을 지켜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있다. 연행의 목적과 상황은 탈춤이 연행되는 장소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이렇게 결정된 연행공간은 다시 연행의 성격과 내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말해 탈춤의 연행 목적이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녔을 때, 전문적인 유랑예인집단에 의해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연행되었을 때, 마을이나 고을에서 제의적이고 유희적으로 연행되었을 때에 따라 탈춤의 연행공간에는 구조물의 등장여부나 관객의 참여정도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탈춤의 개방적 연행이라는 기본적인 성격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크게 변화하지 않았고, 각각의 연행 형태에서 여전히 주요한 연행원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탈춤은 관중들이 연희자를 둘러싸고 관람하는 야외공간에서 극중장소와 공연장소가 일치하는 내용을 가지고, 일상적 공간이 비일상적 축제의 공간으로 변이되는 상황하에 연행되었다. 탈춤의 놀이판은 주위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적 장소이며, 탈춤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상의 마당이라는 공간에서 연행된다. 관중들이 연희자를 둘러싸고 관람하는 형태의 탈춤 놀이판은 관중과 연행자, 관중과 관중 사이의 관계를 보다 가깝게 유지시켜 주며, 이 안에서 관중은 극세계로 몰입하지 않고 현실적인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축제라는 연행의 상황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비일상의 시간을 만들어내어 기존의 사회적 계급질서와 규범에 대한 구속적인 인식을 약화시켜 자유로운 비판의 분위기를 조성시켜 주는 것이다. 이처럼 주위를 향해 열려진 일상의 마당이라는 외형적 조건이 축제라는 상황을 만나 탈춤의 연행공간을 이루었을 때, 민중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그들의 일상이 역으로 풍자된 모습을 봄으로써 객관화된 자신의 처지를 보고, 바라는 바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상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탈춤 연행공간 현대화는 복원된 전통탈춤의 공연될 때, 전문연극으로서의 마당극에 탈춤의 연극원리를 도입할 때, 그리고 축제가 열리는 현장에서 새로운 현대의 탈춤을 만들 때라는 세 가지 방향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이 중 우선되야 하는 것은 복원되어 전수되는 탈춤 연행공간의 변화이다. 탈춤이 현대적으로 재창조되어 오늘의 문제를 담기 위해서는 개방적인 민중성을 표출시킬 수 있는 연행의 장소가 필요하며, 연행 상황을 창조하는 주체로 탈춤을 즐기는 사람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능동적으로 탈춤의 신명이라는 비일상적인 감상을 체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의 탈춤은 현대의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중들이 탈춤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연행공간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탈춤은 독립된 공연물이 아니었다. 축제에서 다양한 연희들이 펼쳐지는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 연행된 것이다. 현대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지방의 향토축제나 대도시의 거리축제에서 탈춤이 연행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며, 그 형태는 관람석과 놀이판 사이를 구분하는 구획을 긋지 않고 사람들이 놀이판을 둘러싸고 관람할 수 있는 것으로 야외에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또한 극 내부에 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극의 내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가지고 어떤 축제에서 봉산탈춤이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공연된다고 가정해보자. 그 탈춤은 이미 봉산탈춤이 아니라 서울의 종로면 종로탈춤, 대구면 대구의 탈춤으로 그들의 내용을 가진 새로운 현대적 탈춤이 될 것이다.
오늘의 탈춤은 보존과 현대적 재창조의 과제를 안고 있다. 연희나 제의가 생활의 한부분이었던 전통생활과는 달리 현대는 일과 놀이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일상공간의 놀이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개인화되었고, 문화가 그 향유자로부터 괴리되고 상품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 민속문화가 현대의 소비적인 문화의 대안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그 본질을 좀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으며, 외형적인 형태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탈춤의 개방적인 민중성이 어떤 연행원리에 의해 표출되는 것인가를 따져보아 오늘의 문제를 이 원리에 적용시켰을 때 보다 창조적인 계승이 이루어지게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 탈춤의 중요한 연행원리라고 할 수 있는 개방성을 구체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우리의 고유한 놀이문화 원리로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여타 전통연희와의 비교분석 그리고 다른나라 전통연극의 모습과 비교가 있어야 하겠다. 이 글은 이러한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또한 현대화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보다 구체적인 실천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 남아 있는 문제점이라 하겠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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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歲時記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冽陽歲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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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istorical Change of the Acting Place of Mask Mrama
and Modernization
Lee, Hye Young
Department of Folklore
Graduate School
Andong National University
(Supervised by Prof. Lim, Jae Hae)
In this paper I adapt traditional mask dramas as the subject of study, and will discuss the problems related to the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mask dramas. I will go back to the past mask dramas and point out the present problems so that I can prepare the alternatives of the future. I will emphasize the significance of an acting place, and take the performance situation into account within the concept of the acting place.
While I have studied the historical change of traditional mask dramas, I find that these dramas are presented such three forms as festival, performing, and commercial forms. Traditional mask dramas, so to speak, must be closely connected with both the existence of stage setting indispensible for mask dramas and the participation of audience in mask dramas. They can take various forms according to the variety of two factors as mentioned above. Because each acting place has common in character, three forms of performance have been mixed in relation to the subject and purpose of performance rather than have been gradually changed. Also, Sandae which is called a stage of mask drama, is not a stage of performance in which a mask drama is played, but a kind of an appliance of performance that a puppet show is played, or a kind of ornament that decorates its stage splendidly.
The purpose and situation of performing of mask dramas serve as important factors to determine the acting place in which these dramas are presented, and again this acting place creates the characters and contents of the acting of mask dramas. As stages of traditional mask dramas are open to their surroundings, their stages tend to be prepared in the place where audience are familiar with. Especially, as a round-shaped stage makes close the relationship between audience and performers, or the relationship among audience, so audience do not get themselves absorbed in the mask drama, but take a critical attitude against a given reality of life. Festival mask dramas free participants from everyday life, give them, and mitigate the constraint of the existing orders and rules in order to constitute the atmosphere of freedom and criticism.
Modernization of the acting place of mask dramas must be considered in the three direction, namely when some restored mask dramas are performed, when the principle of traditional mask dramas is introduced into that of the professional dramas, and when a new modern mask drama is adapted the very spot where some festivals are held. In order to solve the present problems through the recreation of traditional mask drama, we need to furnish an acting place that makes open the nature of folk, and as a subject of creating the performance situation of mask dramas, all lovers of mask dramas have to participate in all stages that mask dramas are played.
Today, traditional mask dramas have two tasks of preserving and recreating them. While play in the tradition society is a part of everyday life, in modern society play and work are strictly separated, play as a form of culture is gradually disappearing, and produced on a commercial scale. For our folk culture in order to become an alternative of consumption-oriented culture, we need to investigate the nature of modern culture, and must not inquire into its external form. We can succeed to traditional mask drama creatively only when we seek to examine what kind of principle the folk-natured mask drama is presented by, and apply it effect to present proble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