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達城)은 경북 남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달구화 또는 달구벌이라 불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조에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시가지를이룬 전역이 대구부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으로 개칭하였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시조 서진(徐晋)이 고려조에서 판도판서를 지냈고, 그의 아들 기준(奇俊)과 손자 영(穎)에 이르기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달성에 세거하며 관향을 달성으로 하게 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와 9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이어왔다.
현감공파(縣監公派 : 濟) 학유공파(學諭公派 : 渡) 판서 공파(判書公派 : 涉)
감찰공파(監察公派 : 近中)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蓮) 생원공파(生員公派 : 錫蓂)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笭) 참판공파(參判公派 : 宗一)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 震)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 균형(鈞衡)이 공민왕때에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방탕한 횡포를 탄핵하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그의 아들 [침]은 조선이 개국한 후 조봉대부로 전의소감을 지냈다.
침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문한(文翰)은 현감을 지냈으며, 차남 문간(文幹)역시 현감을 역임했고, 막내 문덕(文德)은 숙부인 송화 부사 [습]에게 출계하여 이조정랑과 만경 현감을 지냈다.
대사간 충(衷)의 증손 한정(翰廷)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영주 이산면 한성동으로 내려가 은거하다가 소백산 밑 순흥으로 옮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연구에 진력하며 스스로 호(號)을 돈암(遯庵)이라 불렀다.
한말에 와서는 서화에 탁월하여 [팔능]으로 일컬어졌던 병오(丙五)와 독립운동가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상일(相日)이, 영친왕 결혼식전에 참석했던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 등의 살해를 기도하다 피체되었던 상한(相漢)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
첫댓글 진사공파 할아버님 휘가 틀리게 올려 놓으셨네요. 錫苓(석령)이십니다.대죽변이 아니고 풀초변 입니다. 달성서씨에 관련한 자료 사진들을 다음카페 달성서씨 모임방에서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