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문연, 2008년 7-8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초대석
노향림
좌담 : 노향림 ․ 맹문재 ․ 황진성(사회)
사진 및 글 정리 : 김안
2008년 6월 16일, 시사사 회의실
황진성 : 노향림 선생님, 맹문재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면으로만 뵙던 두 분 선생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향림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시를 쓰는 일은 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때까지 밀어붙이는 작업이라 오랜 세월 하다보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질 것 같아요.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다고 들었는데요?
노향림 : 제가 몸집은 크게 보여도 몸이 약해요.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많은 사랑을 해주셔서 어른이 된 지금에도 나약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내색을 안 하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작품 「지하 계단에서」를 읽다보니까 “몸속에서 당(糖)이 나오는 나는 아직도/단 음식과 말수를 줄이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보이더군요, 2007년 『시인세계』 가을호 특집인 「시인의 아내, 시인의 남편」에서도 부군이신 홍신선 선생께서 노 선생님의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고 걱정하시는 걸 읽은 적이 있는데요. 괜찮은지요?
노향림 : 사실 건강이 안 좋아 매일 힘들어요.
황진성 : 아픈 시간들을 더 예리하게 갈고 닦은 것이 오늘날 시 쓰기에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요?
노향림 : 그건 사실이에요. 모든 걸 다 갖추었다면 시인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란 것이 제겐 큰 행운입니다. 바다가 저를 불러준 것 같아요. 바다가 없었으면 지금 시를 쓰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대화할 사람이 없어 늘 바다와 했지요.
맹문재 :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작품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1999년 『내일을 여는 작가』 봄호에 발표한 「병」을 읽다가 큰 흥미를 가지고 같은 해 『현대시학』 3월호에 ‘적응’이라는 주제로 작품론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작품은 “어스름이 오면/피가 잘 돌지 않는다”라고 시작하고 있어 매우 슬프고 절망적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그 이유를 시의 화자가 처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그 작품을 쓰신 계기를 듣고 싶네요.
노향림 : 그때 정말 아팠어요. 의사가 피가 굳어지는 병이라고 하면서 운동을 많이 하라고 했는데, 시를 완성하는 일 또한 병이라 매달리다보니 더 아프게 된 것 같아요. 그 당시 고층 아파트 한강변에 살았는데 잠이 안 오거나 몸이 아플 때 한강변을 내려다보곤 했어요. 그러면 고수부지 쪽에서 사람들이 산책하는 것이 개미 행렬처럼 보였어요. 당시 용강동에 ‘창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근무하던 이시영 선생도 자주 산책했다고 하던데, 저는 많이 걷지도 못했어요. 왜 그리 숨이 차던지요.「병」이란 시는 고층 아파트 창에서 마포대교를 지나 순식간에 지나가던 버스를 내려다보며 ‘우리 인생도 저렇게 흘러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쓴 작품입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병」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슬픈 분위기를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악」이란 작품에서 “슬픔이 배어 있는 나의 오관”이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 여실한 예이지요.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노향림 : 제가 많이 아픈 사람이라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요. 「음악」은 강릉에 갔을 때 벼랑 위의 찻집을 찾았는데 마침 찻집 이름이 ‘벼랑 위의 찻집’이었어요. 거기서 음악을 듣다가 구상한 작품입니다. 어디서든지 시를 구상하는 습벽이 있어서 딱 맞아 떨어지는 어휘를 발견하면 정신이 몸 밖으로 나오는 환희의 경지를 순간적으로 느껴요. 바다가 보이는 찻집이어서인지 시가 쉽게 나오더군요. 어린 시절부터 혼자 바다를 보아서 쓸쓸함과 소외가 몸에 박혀 있어요. 바닷가에 살다 보면 맑은 날에는 너무 눈부셔서 해가 바다에 꽂히는 것 같은데, 그런 땐 살아야겠다는 열의가 느껴졌어요. 등단 때부터 쓸쓸함이나 소외감은 저의 전매특허일 정도로 제 오관을 자극했어요. 1970년대의 시단은 참여냐 순수냐 해서 우리 같은 사람은 발 디딜 곳이 없었어요. 저는 전위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남이 하지 않는 것, 제 생긴 대로 제 목소리를 내는 개성을 살리고 싶었다고 할까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쓰신 작품들 중에는 ‘슬픔’과 달리 ‘햇빛’이나 ‘햇살’이란 시어도 많이 나옵니다. 양적인 면으로 보면 훨씬 많다고 볼 수 있지요. 다섯 번째 시집 제목이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가 그 단적인 증거이지요. ‘햇빛’을 작품의 시어로 많이 사용하는 의도가 있는지요?
노향림 : 제가 원래 병과 가난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유년시절 목포 바다가 보이는 언덕 아니 벼랑 위에 딱 한 채 서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낮에는 부모님이 일 나가시고 오빠들이 학교에 가 저만 남아 있었어요. 아파서 늘 혼자 집에 누워 있었어요. 너무 고요해서 대낮의 정적이 더 무서웠는데, 유리창이 빙 둘러쳐진 집이어서 맑은 공기 속에서 햇살이 내리쬐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눈부셨어요. 병과 함께 누워 있는 쓸쓸함과 고통도 컸지만 바다나 햇살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어요. 그래서 그때 느낀 환희나 기쁨을 시에다 모두 쓰고 싶었어요. 모든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햇빛에서 나와요. 감춤과 드러냄, 시의 이중적 구조를 좋아해요. 존재하는 것은 모두 비워내고 부재하는 것은 사물의 존재를 채워 넣지요. 그렇게 슬픔이 실제적 구조라면 햇빛은 상상력의 구조로 짜 넣지요. 제가 시에서도 썼지만 천년의 섬인 압해도가 암말 짐승처럼 보이거나 또는 한 마리 학이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넣었지요. 그 모든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햇빛에서 나와요.
맹문재 : 「어느 따뜻한 날의 기억」이라는 작품에 “나는 다만 살림방 하나와 상상력을/사은품으로 받았을 뿐이네.”라는 구절이 나오듯이, 선생님께서는 시를 쓸 때 상상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의 시들은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예리한 이미지 묘사가 지배적인데, 상상력이 가미되어 작품의 의미 영역이 넓습니다. 상상력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노향림 : 상상력에도 예리하고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어야지요. 저는 시를 객관화시키고 전통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의 구조는 상상력으로 짜고 구체적 이미지를 넣어야 될 것 같아요. 제게 햇빛은 몸과 마음을 빠져나온 순간적인 입자들이라고 할까요. 그 찰나의 번쩍거림은 무속적인 환희라고나 할까요.
황진성 :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타고난 시적 재능, 감수성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번뜩이는 영감을 잡아내어 그것을 시로 만드시는데 그 영감이 아무에게나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시는 언어로 잘 짜서 완성시키는 작업인 기술 즉 테크닉도 필요할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시는지요?
노향림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먼저 존재하는 것에서는 의미를 제거하고 비워내서 허무로 가고, 부재하는 것은 채워 넣고, 행과 행 사이의 이미지를 압축시켜요. 1970년대의 어느 비평가가 어느 일간지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만 남도록 하지요. 주제는 우울하거나 암울한 것이지만 그것에서 밝음을 상상하지요. 반대를 꿈꾸는 것, 그러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극한 상황을 꿈꾸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제가 하는 작업입니다. 그래도 시인으로서의 본 모습까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진성 : 극한까지 자신을 몰고 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저 같으면 신경성 위장병이 도질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뚫고 나갈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지요?
노향림 : 주변에서 시를 잘 읽었노라고 격려해 주시는 일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홍신선 선생(남편)도 처음엔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줘서 힘이 되었지요. 지금은 가만히 저를 내버려 두는 일이 도와주는 일이지만요. 결혼하기 전에는 남편이 집필실도 마련해 준다고 하고 밥도 해주겠다고 했어요.(일동 웃음) 그런데 남편은 야간고등학교 교사였고 참 가난했거든요.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또 시에 매달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더라구요. 그렇지 않았으면 현실에 더 괴로워했을 겁니다. 물론 상황이 더 악화되었으면 시를 포기하고 제가 좋아하는 연극을 했을 거예요. 학교 다닐 때 연극도 좀 했거든요. 연극이 더 가난해지는 일이지만요. 홍 선생이 이해해주고 살림 못하는 것도 봐주니까 제가 시에 몰입할 수 있어요. 제가 지금도 김치를 잘 못 담그거든요. 담글 줄은 알지만 까다로운 홍 선생의 입맛을 못 맞춘다는 말이지요. 사실 예술 하는 사람을 아내로 둔 사람은 불행해요. 홍 선생은 농촌 출신에다 효자이고 평론가처럼 예리한데 제가 못 따라가니까 주부로서는 영점인데도,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니까 시를 쓴 것 같아요. 저는 그 대신 극한의 긴 싸움을 혼자 하는 거예요. 지금도 집필실이 따로 없지만 기도실에 들어가듯 방에 박혀 정적 속에 갇혀 작업을 하지요. 지금도 시만 쓰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맹문재 : 2007년 『시인세계』에 ‘시인 남편 시인 아내’라는 특집이 있었는데 홍 선생님께서 노 선생님이 철이 없어 포항에 가서 살고 싶다고 쓴 것을 봤는데요.(일동 웃음)
노향림 : 아, 그 얘기요. 쓴 줄도 몰랐는데 잡지가 와서 보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철을 만드는 포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더군요. 시 쓰는 아내를 둔 것 자체가 불행이겠지요. 입맛에 맞는 반찬 한 가지라도 더 만들 줄 아는 아내를 두지 못 했으니깐요.
황진성 : 이 기회에 연애담도 좀 들려주세요. 선생님께서 나이가 좀 연상시라는데요? (일동 웃음)
노향림 : 저는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나와서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어요. 홍 선생은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나와서 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하고 김춘수, 김현승,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재등단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갔다 왔지요. 그 후 함께 숭실대학교에 계시던 김현승 선생의 제자가 되어서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왜냐하면 홍 선생은 갓 제대한 후라 짧은 머리에 늘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고 나이도 안 맞아서 생각을 못했었지요. 그런데 김현승 선생님께서 축구를 매우 좋아하셔서 <수색다방>(당시 월드컵 축구를 중계하던 장소는 그곳밖에 없었고, 원두커피를 파는 집도 그곳밖에 없었음)에 제자들과 함께 모여앉아 티브이로 보곤 했지요. 그때 홍 선생은 정말 깡마른 체격에다 후줄근한 단벌 신사처럼 한 가지 옷만 입고 나타났는데 내성적이라 늘 구석에 앉아 말이 없었어요. 김현승 선생님께서 경기가 끝나면 자장면을 사 주시면서 둘이 잘 맞을 것 같으니까 잘해보라고 늘 부추겨 주셨어요. 한 번은 아무도 안 오고 사전에 약속을 했는지 홍 선생하고 저만 온 거예요. 집에 오는 길이 같은 방향이라 함께 차를 타고 오다보니까 저는 먼저 내리고 그 버스를 타고 홍 선생은 가는 코스였어요. 하루는 종로2가에 있는 <낭만>이란 호프집에서 호프를 한 잔 하자고 했어요. 내가 술을 못 한다고 하니까 그럼 자신의 고민을 상담해 달라고 해서 갔지요. 그곳에서 내가 영문과에서 공부한 엘리엇의 「황무지」’에 대해 줄줄 얘기하더라고요.
황진성 :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일부러 공부를 해오셨나 봐요.
노향림 : 그럴지도 모르지만, 정말 실력이 있더라구요. (일동 웃음) 그 후에 내가 <한국시> 동인활동을 했는데 거기도 들어 왔어요. 동인활동이 끝나면 집이 같은 방향이다 보니까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친해지게 되었지요.
맹문재 : 방금 말씀하신 <한국시> 동인에 대해서 듣고 싶네요.
노향림 : 김춘수, 문덕수 선생님 등 몇 분이 『한국시』 잡지를 하다가 오규원 시인에게 물려주셨지요. 정의홍 시인이 자꾸 저더러 <한국시>에 들어오라고 졸랐어요. 오규원 시인도 저보고 동인이 되었으면 한다구요.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되었네요. 경주의 정민호 시인, 그리고 부산의 양왕용 시인, 청주의 양채영 시인 들이 함께했어요. 강은교 시인 등 다른 시인들과 <70년대>라는 동인지를 만들며 그쪽 동인활동도 하고 있었어요. 오규원 시인은 저보고 전통 시에서 벗어나 외부세계를 많이 그리고, 이미지 위주의 시를 선명하게 그려보라고 권했어요. 그분을 만난 것은 제게 행운이었어요. 그 후 <한국시> 동인은 다른 동인과 합류하고 또 서로 갈라져 나가며 해산되었어요. 저는 계파가 많았던 것이, 서로 다양하게 개성 있는 목소리를 내던 것이,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해요. 당시 문학지로는 『문학과지성』과 『창작과비평』의 양대 산맥이 있었는데, 문지는 순수문학이었고 창비는 참여문학을 지향했지요.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진을 치는 듯한 느낌이어서 저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저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전통 시에서 벗어난 외부세계를 그렸어요. 당시 유행이 러시아 학파의 신비평주의인 ‘낯설게 하기’였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자신이 낯설어질 때의 느낌을 작품으로 옮겨 보려고 노력했지요. 물론 그것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 우리는 가난해서 와우산에 있던 와우아파트에서 살았는데(나중에 아파트가 무너져서 뉴스에 나온 그 아파트예요.) 밤이면 정말 무서웠지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썼어요. 그때가 삼십대에서 사십대였을 거예요. 지금 제 앞에 있는 젊은 두 분이 부러운데 당시를 생각해보면 나도 참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신문에 평론란이 있어서 시평이 많이 실렸는데 『문학과지성』의 1세대 편집인이셨던 김주연 선생님, 김현 선생님, 그리고 『현대시학』을 운영하시던 전봉건 선생님께서 제 시의 평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때 가장 활발하게 제 세계를 그렸던 것 같아요.
황진성 : 「연습기를 띄우고」를 그때 쓰신 거 맞나요?
노향림 : 네.
황진성 : 저는 요즘 그 시를 처음 봤는데, 시대를 뛰어넘어 참 와 닿았어요. 선생님의 청춘 시기가 많은 고민과 갈등으로 치열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20대를 보내며 진로나 결혼 문제 등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되었지요. 아직도 미숙해서 제 결정이 올바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데, 그 작품을 읽으면서 힘들게 살았던 것이 생각났어요.
노향림 : 사람들은 그 시를 잘 모르지만, 저도 그 작품에 많이 애착이가요. 당시에 여성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김현 선생님한테 평을 받았던 시이기도 해요. 그 이전 예기를 하지요. 첫 시집 『K읍 기행』을 낼 당시(지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신인 문예진흥원에서 지원금을 받아서 자비로 냈는데) 흑자가 났어요. 인세도 받고 가계에 보탬이 좀 됐지요. <평민사>를 하던 김종찬 씨가 그 시집을 자비로 사서 서점에 다 깔아 주었어요. 첫 시집은 그렇게 기분 좋게 다 팔렸어요. 그러자 당시 그 시를 시선집으로 내보겠다고 어느 출판사가 사정사정해서 미발표작과 함께 얄팍하게 선집으로 나왔는데, 너무 안 좋은 판본과 질이 나쁜 종이로 간행되어 잊고 지냈는데, 말씀하시네요. 지금은 그 시집을 구할 수도 없어요. 「연습기를 띄우고」는 제대로 시집에 묶여서 나온 시가 아니지만 문학적인 가치로 봐서는 후학들에게 권해주고 싶어요.
황진성 : 제가 선생님 초기 시집들을 구하려고 했는데 한 권도 구하지 못했어요. 젊은 시절의 꿈을 하늘에 띄워 보내려 고민하는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시는 꼭 다시 시집으로 엮여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노향림 : 당시에 썼던 「꿈」이란 시도 김현 선생님이 “이 시는 슬픔과 비애를 주지만 읽고 나면 행복한 느낌이 든다. 꿈과 고통을 동시에 주는 시가 노향림 시의 본질이다.”라는 평을 했고, 노향림의 대표시가 될 것 이라고 해주었지요. 그 격려에 힘입어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요. 다 읽고 나면 행복한 느낌이 든다는 평에 오랫동안 행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에는 마음의 눈이 맑게 열려 있었고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살아서인지, 남들이 까끌까글하다고 생각하는 소금이 저에게는 미끈거리는 물질로 환원되었지요. 그렇게 느낄 정도로 감각적인 면이 있었어요. 항상 아파서 누워만 있었는데,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창밖을 지나는 소리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유년의 체험을 그린 것이지요. 제가 과작이라 시를 많이 쓰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해요. 어쩌다 시인 자신이 쓴 시에 만족하게 되는데 「꿈」이란 시가 그래요. 제 시 중에서 가장 낭송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맹문재 :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돌려볼까요? 선생님께서는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지금까지 『K읍 기행』(현대문학사, 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문학사상사, 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문학사상사, 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창비, 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 2005) 등 다섯 권의 시집을 간행하셨습니다. 각 시집마다 사연이 있을 텐데 궁금하네요. 이 다음 후학들이 선생님의 시세계를 연구할 때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도록 정리를 좀 해주시지요. 먼저 『K읍 기행』부터 부탁드려볼까요?
노향림 : 첫 시집은 돈이 없어서 못 내고 있었는데, 김현승 선생님께서 당시 발표했던 시들을 보시고 왜 시집을 내지 않고 미루느냐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조금 전 말씀 드렸지만 1977년 문예진흥원의 도움을 받아 냈지요. 선명한 이미지의 시를 쓸 때이기도 하고 또 첫 시집이고 해서 주위 분들이나 선배 시인들이 잘 봐주신 것 같아요. 노란 표지에 ‘현대문학’에서 이름을 빌려 ‘현대문학 간’, 이렇게 씌어 있을 겁니다. 시집이 나오자 시어가 너무 생생하다는 평을 받았어요. 당시 첫 아이를 병으로 잃어서 그 아픔을 신생아실을 들여다보면서 쓴 시인 「신생아실」도 괜찮다는 평을 얻었지요. 햇빛에 비치는 유리창이 날카로운 깨진 유리 조각으로 보였지요. 그렇지만 뒤에 남은 햇살이 아이를 데려갔다고 긍정으로 끝나는 시입니다. 시에서는 그 선명한 아픔을 환희로 바꾸었지요. 비애나 슬픔 속에서 견딜 수 있던 것도 시의 힘인 것 같아요. 당시 돈도 없어서 멀리 여행을 가지 못하고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고는 했는데, 그때 보고 느낀 것이 다 시로 나왔어요. 역촌동역 입구에서 약국 문을 밀고 나오는 사람들이 싱싱해 보였어요. 하얀 얼굴들이 초겨울 같다고 그렸지요. 그 시 역시 첫 시집에 수록된 시 「역촌동 입구」지요. 그때만 해도 미개발된 집들이 산등성이에 알약같이 흩어진 마을처럼 보였어요. 「바람 부는 날」과 「신생아실」 이런 시 제목들이 많이 애착이 가는 시어의 화두였어요. 당시 한강이 모래사장이었는데 바람 부는 날 가면 덤프트럭에서 쏟아져내려오는 모래들이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햇빛과 바람이 없었으면 시를 못 썼을 것 같아요. 첫 시집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를 쓰고자 했어요.
맹문재 : 첫 시집은 생생한 이미지라는 평과 함께 인세를 받는 등 나름대로 성공했네요. 두 번째 시집인 『눈이 오지 않는 나라』도 어떤 평을 받으셨는지요?
노향림 : 당시 평론했던 정현기 선생님이 『문학사상』 주간을 맡고 있었는데 시집을 내자고 해서 출간하게 되었어요. 풍경을 뒤집어 보여주려고 현대 감각으로 또 전위적으로 쓰려고 했어요. 시 제목은 누구나 똑같이 공유하지만 내용은 철저히 다른 시를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눈이 오지 않는 나라』는 열대나 아열대성의 나라에선 얼마든지 그 말을 누구나 쓰지만, 제가 시로 옮겨 올 땐 새로울 것이다 해서 쓴 시집 제목입니다. 「풀잎」도 강은교 시인의 제목과 휘트먼의 제목이 같지만 내용이 확연히 다르듯이 말이죠. 다르게 썼기에 모두 좋잖아요. 기를 제 감각으로 받아 들여서 영혼의 눈이 있다고 생각한 뒤에 다시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업을 했어요. 체험했던 모든 일을 확 뒤집어서 보여주고자 했어요. 어린 시절 장티푸스와 복막염을 앓았던 기억, 퉁퉁 부은 배로 기어가 압해도를 바라도던 기억, 또 결혼을 해서 첫아이를 낳았다가 잃었던 기억들을 다 시로 써낸 것 같아요. 그땐 지하철 1호선만 있을 때인데 그것을 타고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며 번개처럼 스치는 영감이 떠오를 때 그것을 잡아내려고 했지요. 시 쓰는 일은 갈수록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황진성 : 선생님의 시는 선명한 이미지와 묘사가 탁월한데, 「눈이 오지 않는 나라」를 비발디의 사계를 빠른 템포로 들으며 낭송하면 그 정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말하는 음악가도 있더군요. 결국 시인은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데 작품이 뛰어나니까 평론가들에게 인정받았고, 그 힘이 격려가 되어 더 열심히 시를 쓰신 것 같네요.
맹문재 : 세 번째 시집인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 하네』에 대해서 들을까요?
노향림 : KBS 방송국에서 시를 가곡으로 만드는 일이 있었어요. 시를 두 편 달라고 해서 쓰게 됐어요. 사실 압해도의 연작시를 쓰게 된 태동이 「꿈」이었지만요.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쓴 시여서 제목을 아예 고향 앞바다인 「압해도」 정해버렸지요. 또 한 작품은 제목을 먼저 써놓고 쓰면 시가 잘 안 나오는 스타일인데 그냥 「해 뜨는 나라의 아침」이라고 써놓고 썼지요. 제가 원래 시를 참 힘들게 쓰는 편인데, 그 시를 쓸 때는 너무 잘 나와서 행복했어요. 어머니와 같이 압해도에 건너가서 먹던 무화과 열매며, 어린 시절 적막한 바다를 보며 지냈던 그 우울함을 환희로 바꾸고 싶었어요. 그 뒤 압해도를 쓰고 싶어서 자서전같이 백 편 정도 썼어요. 그 섬이 너무 그리워서 언젠가 써야지 하며 50년 가까이 아껴두고 묵혀두어서인지 막상 쓰려니까 줄줄 나오더군요. 당시 일본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던 시기였고, 희망찬 노래가 변변한 것이 없어 아예 맑고 희망찬 노래가 되도록 해달라고 KBS 측에서 요청했어요. 그래서 독도를 “오 찬란한 동해의 아침 햇살이여”라고 맘 속으로 시작하며 썼어요.
황진성 : 최영섭이 곡을 붙이고 바리톤 박정하가 부른 「압해도」를 들은 적이 있어요.
노향림 : 여러 명의 테너와 바리톤이 번갈아 가며 불렀는데 “우리보다”가 노래할 때 발음이 안 되어서 “울리”로 불리는 등 표기가 잘못된 부분도 있어요.
황진성 : 그 노래를 들으니 가보지는 못했지만 압해도의 너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며 마치 제 고향같이 그 섬이 그리워지더군요. 어린 시절에는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은 강을 보고 사신다고 했는데 저도 물을 참 좋아하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그런 환경에서 살아보지 못했어요. 어떻게 보면 선생님께서는 자연의 혜택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바다와 강이 선생님 시의 영원한 모티브가 된 것은 아닐까요?
노향림 : 그렇지요.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시집이 나오고 나서 압해도에 시비를 세웠다고 연락이 왔더군요. 제막식에 참석했어요.
황진성 : 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십시일반해서 시비를 세웠다고 들었어요. 김이나 미역을 따서 가난하게 생계를 잇는 분들이, 시를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그런 시비를 세웠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네요. 많은 사람들에게 시를 알게 해주신 일에 선생님의 공이 컸네요.
노향림 : 그 섬까지 옛날에는 똑딱선으로 갔는데요. 철선으로 다니다가 지금은 연육교가 생겨서 신비감이 좀 사라졌다고 말하는 분도 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네 번째 시집인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에 대해서 들을까요.
노향림 : 저는 이 시집에 애착이 가요. 삶과 죽음의 세계를 그리는 연장선이라고 누가 말한 평도 있는데요, 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담으려 했어요. 표제작인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은 제가 어린 시절에 뱃사람들이 먼 바다로 출항하기 전 당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쓴 시예요. 후투티는 오디새라고 하기도 하는데 경기도 지방까지만 오는 새죠. 머리에 왕관을 쓴 모양의 철새인데, 당제에서는 짚으로 만든 오디새를 놓고 비는 거였어요. 왜 남쪽까지는 내려오지도 않는 새를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나 하고 이상하게 여겼는데, 새를 빌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려는, 바닷길을 잘 풀어서 비단길처럼 폭풍을 만나지 않고 만선이 되어 잘 다녀 올 것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념적인 새를 만들어 걸어 놓고 비는 행위가 배를 타고 나간 사람이나 집에서 기다리는 아낙네들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을 위한 기다림의 기도였다고 시인이 된 뒤에 깨달은 거죠. 그 행위를 빌어 인간은 신을 닮고 싶어 하는 영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보고 자랐지만 기복 신앙은 우리의 전통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무엇인가를 위해 비는 무속 신앙, 없는 것을 끌어내고 영혼의 세계를 그리워해서 영혼의 힘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싶어 하는 것을 뱃사람들을 통해서 보았지요. 오지 않거나 없는 새를 짚으로 만들어 기원하는 행위. 그것은 신들린 세계가 아니면 보기 힘들어요. 그 무속적 세계를 보며 영혼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은 시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불변하는 시간과의 싸움, 영원불변한 것과 불가사의한 것을 자기 안에서 화합하거나 부정하며 끌어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시라면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집 해설에서 이숭원 선생이 오랜 적막에 담갔다가 끄집어낸 시라는 평을 해주셨어요.
맹문재 : 지금까지 간행한 시집을 보면 시의 이미지 묘사기 지배적인데, 정신에 대한 깊은 천착을 볼 수 있네요. 이제 다섯 번째 시집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까요.
노향림: 다섯 번째 시집에서는 예리한 이미지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시를 삶에 끌어 내렸다고 생각해요. “댓잎소리”를 “착검”하는 것에 비유한 것을 보면 아직 내 감각이 죽지 않았구나 느꼈어요.(일동 웃음) 집 근처 있는 교회에서 낮 12시마다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요. 내려다보면 노인 급식소처럼 점심 식사대접을 하는 봉사를 하는 거예요. 줄 지어 선 행렬 위로 햇살이 내려쬐는 것이 하늘이 시혜를 베푸는 것 같아요. 지금도 길게 늘어 선 줄을 12시면 어김없이 보지요. 그렇게 맑은 하늘의 해가 골고루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구나 하고 문득 살아 있음의 고마움을 느끼지요. 그때마다 너 살아 있구나 하고 쨍 하니 해가 종소리를 치는 것 같아요. 그때 영감을 얻어 쓴 시가 「해에게선 종소리가 난다」이지요. 시집 제목도 그렇게 했지요. 시인들 누구나 그렇겠지만 시집 제목을 정할 땐 고민을 많이 하는데 시집 제목을 준 작품이 바로 이 시지요. 일용직 사람이나 노인들, 점심 한 끼로 하루를 때우며 사는 사람들, 해가 치는 종소리는 우리 모두 수세기 동안 들어온 종소리인데 왜 우리는 못 들었을까. 그걸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겐 또는 시들고 병든 마음엔 깨진 종소리일 뿐이겠죠. 저마다 나에게만 그렇게 삶이 고단하고 힘든가 하는 고뇌 때문인 것 같아요. 이 시집에서는 「편지」라는 시를 제일 앞에 놓았는데 삶으로 내려오는 디딤돌이었으면 해서 자갈돌 깔린 길을 이야기했지요.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몰라주더니 다시 읽은 분들은 무언가 안정적이고 평화로워진다는 분들이 있더군요.
황진성 : 저는 “깨진”의 의미가 깨닫는 것, 밥 한 끼를 얻어먹으며 삶에 대해 깨닫는 것,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나아가 영혼과 우주를 깨닫는 일이라는 생각해어요. 또한 일상의 번잡한 것과 욕망으로부터 나를 깨는 것 즉 부수는 일, 이렇게 이중적 의미로 해석했어요. 시 제목 하나에서 이렇게 다중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노향림 : 네 맞아요. 그렇게 알아맞히는 독자들이 있다면야 시집을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랜 기간이 걸리더라도 숙성을 시켜서 시집을 내야겠구나 하고요. 갈수록 시가 어렵다는 걸 알고 보니까 시에 더 긴장감이 있어야 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진성 : 제 생각에 요즘 3년도 안 되어 시집을 내는 시인들이 많은 것에 비해 선생님께서는 시집 간행의 간격이 매우 긴 편이지요. 10년, 7년, 8년씩인데 그만큼 많이 고심하고 충분히 숙성시킨 다음에 내 놓으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름의 좋은 시집을 내고 싶어서 아직 첫 시집을 못 내고 있는데,(모두 웃음) 선생님의 시집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향림 : 네 감사합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수필도 많이 쓰셨잖아요. 『나는 더 혼자이리라』(청맥, 1988) 『키 낮추기와 꿈 높이기』(한겨레, 1988) 『행복의 모래성』(준, 1989) 『누구를 위해서 사랑하는가』(한겨레, 1990) 『아픔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한겨레, 1992) 『그가 있는 이유』(한겨레, 1993)『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등 여러 권의 수필집을 간행하셨습니다. 수필을 왜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신달자, 유안진 선생님 등도 수필을 쓰셨는데,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노향림 : 사실 수필 쓴 것을 좀 부끄럽게 생각해요. 그 시간에 시나 더 쓸 걸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분량도 많아서 쓰느라고 참 힘들었어요. 미지의 독자를 상대하니까 두려움도 있었고요. 상업적인 것도 출판사에서는 생각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당시 여성 독자들이 의외로 많았어요. 부유하고 화려한 공주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썼는데 많은 공감을 주었다들 하대요.
맹문재 : 저는 여성 시인들이 수필을 쓴 것이 의미가 크다고 봐요. 시보다 수필이 일반 독자에게 다가가기 쉬워 사회적으로도 또 문화사적으로도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이 자기를 인식하는데 기여한 것이지요.
노향림 : 수필에 큰 의미는 두려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때부터 여류라는 말이 없어지고 여성 시인들도 동등하게 대접을 받기 시작했어요. 여성으로서의 부끄러움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그 부분에 점수를 줄 수 있지요.
황진성 : 여류란 말은 저도 좋아하지 않아요. 197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여성 시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산업사회의 경제발전으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을 문명 비판적 경향과 전통적인 세계의 내면의식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내용으로 했지요. 1970년대 한 획을 그은 우리나라 여성 시인으로서 유신과 광주 항쟁 등 정치적 격랑기를 어떻게 넘어 오셨는지요?
노향림 : 직접 현실에 참여하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러나 기존의 틀과는 다른 나만의 시세계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어요.
황진성 : 정치적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길을 열심히 추구함으로써 여류란 말이 없어질 정도로 우리의 여성시를 한 단계 끌어 올리셨잖아요. 그것도 참여의 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런 뜻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후배 여성 시인들에게 당부나 권유의 말씀을 한마디 부탁드려볼까요?
노향림 : 선배 시인들의 시를 답습하면 안돼요. 자기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열어 가야겠지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시인이 되는데 영향을 주신 분들이 있겠지요.
노향림 : 정말 또 솔직해지지 않을 수 없네요.(일동 웃음) 아버지는 동경 예술대를 나오신 분으로 흰 양복에 백구두만 신고 다녔어요. 당시의 지식층을 나타내던 소위 인텔리겐치아였지요.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한 번 나가면 몇 달 씩 안 들어오곤 했는데, 어머니가 불평을 하면 술주정도 하셨어요. 그때마다 책은 꼭 몇 권씩 사오곤 하셨죠. 그동안 무얼 했는지 식구들은 감히 여쭈어보지도 못했구요. 그래서 어머니가 신앙을 가졌는데, 하얗게 눈이 오는 새벽에도 장독대 앞에서 꼼짝 없이 움직이지 않고 눈을 맞으며 기도를 해 눈사람인지 어머니인지 못 알아 볼 정도였어요. 아버지의 방랑벽을 없애달라는 기구였겠지요. 어머니는 그래도 아버지가 사 오신 강경애 소설이나 이광수 소설 등을 열심히 읽었어요.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좋으셨고 아버지 대신 가계를 이끌어 간 강인한 분이세요.
저의 친구에 의하면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썼다고 해요. 중학교 때는 서정주 선생께서 학교에 오셔서 문학 강연을 했어요. 글을 잘 쓴 사람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구경을 시켜준다고 했는데, 저는 그때 수줍음이 많아서 글을 안 냈어요. 그때 친구는 글을 내서 일주일 동안 서울 구경을 다녀왔어요. 그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오기도 생겨서 그때부터 열심히 글을 썼는데, 아버지께서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을 보내주셨어요. 글재주가 조금 보이자 허황한 아버지는 금의환향해서 돌아오라고 저를 무작정 서울로 올려 보낸 것이지요.
학교에 가자마자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바람에 그만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지요. 거기에다 교통사고까지 나서 병원에 누워서 지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헤밍웨이를 만난 것이 큰 전환점이 되었어요. 그 짧은 대화체와 압축을 헤밍웨이에게 배웠지요. 그 당시 헤밍웨이가 살아 있어서 갖가지 뉴스를 몰고 온 것도 문학에 심취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편을 써보기도 하면서 소설을 쓸까도 고민했지요.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밤 새워 잡은 고기가 다 뜯겨 없어져도 좌절하지 않아요. 그 비애를 환희로 바꾼 점이 너무 좋았어요. 그것이 좋아서 혼자 글을 긁적거리다가 교내에서 문학상을 타기도 했어요. 지금도 헤밍웨이를 좋아해서 읽고 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또 다른 특징은 식물성이라는 점이지요. 선생님의 작품은 동물을 제재로 삼은 것보다 식물을 제재로 삼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영산홍, 깨꽃, 철쭉, 분꽃, 등꽃, 박꽃, 달맞이꽃, 풀꽃, 애기똥풀꽃 등에서 여실하게 볼 수 있지요.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네요.
노향림 : 네 맞아요.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끄집어낸 것이 제게는 많아요. 지금은 영감을 중요시하지 않지만 저는 영감이 제 안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무녀적인 기질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요. 저에게 식물성은 역동적이어서 양면성을 갖고 있어요.
황진성 : 「깨꽃」에서도 초경하는 소녀의 이미지를 나타낸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아요.
노향림 : 네 맞아요. 대담하게 쓰고 싶었어요. 모든 소재가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육감적인 소재를 써도 제 시는 식물적 이미지로 느껴진대요. 김춘수 선생님께서 생전에 제 시를 좋게 봐 주셨어요. 선생께선 언어 자체가 시가 되는 분인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만나 뵈었지요. 그분의 시론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요. 시론과 시가 나란히 가시는 분도 드문데 그분은 실제로 그렇게 하셨지요. 의미에서 무의미로 또 의미로 돌아온 시론대로 시를 쓰시다 가신 분이예요. 홍 선생의 초기 시도 칭찬을 해주셨고, 또 추천을 세 번에 걸쳐 해주신 분이지요. 식물적 이미지는 김춘수 선생님의 영향인 것 같아요.
맹문재 : 선생님의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길’ 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길’을 주제로 삼은 작품은 많은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보이는 것이지요. 가령 한용운은 「나의 길」에서 한 인간 존재로서의 길을 부단히 인식했고, 김소월은 「길」에서 식민지 상황에서 집을 잃은 한 나그네의 비애감을 그렸습니다. 김지하는 「황토길」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농민들의 한숨을 담았고, 박노해는 「썩으러 가는 길」에서 참다운 노동의 길을 군대 가는 후배에게 전했습니다. 많은 작품들에서 ‘길’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징성이 매우 넓기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의 작품들에도, 가령 「강화읍을 지나며」「도원길」「을왕리 시편」「이항리」「어떤 태백」「양수리의 저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길이 많이 등장합니다.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길은 작품마다 다를 수 있지만,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노향림 : 참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그거에요. 저는 이미지 시를 쓰면서 이쪽에서 기여를 하고 싶어요. 주제를 뚜렷이 정하지 않아도 존재로서의 길 말입니다. 시인들이 역사 속에서 박해도 많이 받았는데, 선각자적인 길을 간 분 들에 비해 제가 참여하지 못한 아픔이 있습니다. 제 약점일 수 있지요. 상상력으로 쓸 수도 있지만 저는 체험하지 못한 것은 잘 못써요. 길에 관한 시는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기억에 남아요. 모든 시인은 길을 안 쓸 수가 없어요.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참신성은 잃지 않고 싶어요. 그것이 다 제 길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의 길도 길이라고 생각해요. 무형의 보이지 않는 길도 길이지요.
황진성 : 행동으로 참여하거나 시로 기여한 것도 다 의미가 있다고 봐요. 결국 시인에게는 작품이 말해주지 않을까요.
맹문재 : 선생님의 시를 보면 음악에 대해서도 간간히 나오는데, 음악 듣는 취미가 있는가 보지요. 특히 스페인 태생 맹인 작곡가인 ‘로드리고’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노향림 : 고전이나 팝송 모두 다 좋아해요. 로드리고는 맹인이었는데 역사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꿋꿋이 일어서서 자기만의 음악으로 예술에 기여한 부분이 좋아요. 그 자체가 참여 아닌가요?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도 좋아하는데 음악에 미친 듯 몰입하는 집중력과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생명력이 있어요. 살아생전 그는 소심해서 인간과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면과 심장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와 비슷하지요. 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고민하고 고통 받는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인 면도 좋아해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자랐어요. 아버지가 수동으로 바늘을 꽂아 듣는 레코드를 구해 와서 계속 음악을 틀어 놓아 음악을 실컷 듣고 자랐습니다. 돈도 없이 어디서 그런 걸 장만해온지 몰랐지만요. 그 시절 전축 있는 집도 드물었는데, 저의 것은 외제 전축이었어요. 레코드사론 외국의 콜럼비아사나 빅터 레코드사가 있었는데,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나 푸치니의 「자니스끼끼」 중에서 「오 마이 파파」 등을 계속 틀어 놓고 온 가족이 함께 들었지요. 아버지는 돈 버는 일엔 무관심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걸 식구들이 늘 따라와 주기를 바랐어요.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 시가 더 잘 나와요. 주인공이 있어 극적인 무대를 채워주는 오페라를 저는 좋아해요. 그래서 홍 선생한테는 아직도 철없는 아내지요.
황진성 :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의 예술적 감수성에 어머니의 강인함까지 물려받으신 것 같아요. 선생님 댁은 부부가 유명한 시인이시니 아드님께서 굉장히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 같아요. 문학을 하나요?
노향림 : 예전에 와우아파트에 살 때는 전기도 아껴 쓰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홍 선생과 내가 따로 따로 밤샘을 하며 몸이 상하도록 시를 쓰는 모습을 보고 질려서 아들은 절대로 글 쓰는 일은 안 하겠다고 했어요. 어린 나이인데도 말이죠. 어렸을 때 일기도 잘 쓰고 글짓기도 잘하고 글의 짜임새나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논리적이어서 평론을 하면 잘했을 것 같은데 아쉽지요. 너무 잘 쓴 것이어서 아이의 일기장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어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어요. 남들이 보면 키도 크고 잘 생겼다고 하는데 컴퓨터작업에 몰두하느라고 연애할 시간이 없어서인지 37살인데 아직 미혼이에요.
황진성 : 나이가 들면 문학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요?
노향림 : 시키고 싶지 않아요. 너무 고통스러운 작업이라서.
황진성 : 고향이 해남이신데 목포에서 자라나셨지요? 가족과 고향의 이야기를 부탁드려볼까요?
노향림 : 해남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부모님은 저를 낳자마자 목포로 나왔다고 해요. 해남에는 산이면이 있는데 산이 두 개 마주보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얘기밖에 없어요.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왔지요. 아버지가 꼭 서울에 가서 시인이 되어 오라고 했고, 또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 진로도 못 정했어요. 사실 밀어줄 돈도 없으셨는데(일동 웃음) 그래서 등단도 늦어진 거죠.
부모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두 분 다 돌아가실 때 꿋꿋하게, 아픈 내색도 없이 의연하게 가셨어요. 정말 나도 나중에 저런 모습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분들이세요. 살아 계실 때 잘 해드리지 못 했는데 지금 참 그립네요.
황진성 : 살아계실 때 시인이 된 모습을 보여드린 것만으로도 효도를 하신거지요. 앞으로 그런 것들이 녹아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지요?
노향림 : 앞에 계신 분들이 좋은 작품을 많이 쓰셨으면 좋겠고요, 저도 더 열심히 쓸 겁니다. 더 철저히 써서 좋은 작품을 더 남기고 싶어요.
황진성 : 앞으로 한국시사에 길이 남을 더 좋은 시를 많이 쓰셔서「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에서처럼 선생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세요. 두 분 선생님, 오랜 시간 진솔하고도 즐거운 말씀을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초대석
노향림
좌담 : 노향림 ․ 맹문재 ․ 황진성(사회)
사진 및 글 정리 : 김안
2008년 6월 16일, 시사사 회의실
황진성 : 노향림 선생님, 맹문재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면으로만 뵙던 두 분 선생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향림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시를 쓰는 일은 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때까지 밀어붙이는 작업이라 오랜 세월 하다보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질 것 같아요.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다고 들었는데요?
노향림 : 제가 몸집은 크게 보여도 몸이 약해요.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많은 사랑을 해주셔서 어른이 된 지금에도 나약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내색을 안 하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작품 「지하 계단에서」를 읽다보니까 “몸속에서 당(糖)이 나오는 나는 아직도/단 음식과 말수를 줄이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보이더군요, 2007년 『시인세계』 가을호 특집인 「시인의 아내, 시인의 남편」에서도 부군이신 홍신선 선생께서 노 선생님의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고 걱정하시는 걸 읽은 적이 있는데요. 괜찮은지요?
노향림 : 사실 건강이 안 좋아 매일 힘들어요.
황진성 : 아픈 시간들을 더 예리하게 갈고 닦은 것이 오늘날 시 쓰기에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요?
노향림 : 그건 사실이에요. 모든 걸 다 갖추었다면 시인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란 것이 제겐 큰 행운입니다. 바다가 저를 불러준 것 같아요. 바다가 없었으면 지금 시를 쓰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대화할 사람이 없어 늘 바다와 했지요.
맹문재 :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작품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1999년 『내일을 여는 작가』 봄호에 발표한 「병」을 읽다가 큰 흥미를 가지고 같은 해 『현대시학』 3월호에 ‘적응’이라는 주제로 작품론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작품은 “어스름이 오면/피가 잘 돌지 않는다”라고 시작하고 있어 매우 슬프고 절망적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그 이유를 시의 화자가 처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그 작품을 쓰신 계기를 듣고 싶네요.
노향림 : 그때 정말 아팠어요. 의사가 피가 굳어지는 병이라고 하면서 운동을 많이 하라고 했는데, 시를 완성하는 일 또한 병이라 매달리다보니 더 아프게 된 것 같아요. 그 당시 고층 아파트 한강변에 살았는데 잠이 안 오거나 몸이 아플 때 한강변을 내려다보곤 했어요. 그러면 고수부지 쪽에서 사람들이 산책하는 것이 개미 행렬처럼 보였어요. 당시 용강동에 ‘창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근무하던 이시영 선생도 자주 산책했다고 하던데, 저는 많이 걷지도 못했어요. 왜 그리 숨이 차던지요.「병」이란 시는 고층 아파트 창에서 마포대교를 지나 순식간에 지나가던 버스를 내려다보며 ‘우리 인생도 저렇게 흘러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쓴 작품입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병」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슬픈 분위기를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악」이란 작품에서 “슬픔이 배어 있는 나의 오관”이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 여실한 예이지요.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노향림 : 제가 많이 아픈 사람이라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요. 「음악」은 강릉에 갔을 때 벼랑 위의 찻집을 찾았는데 마침 찻집 이름이 ‘벼랑 위의 찻집’이었어요. 거기서 음악을 듣다가 구상한 작품입니다. 어디서든지 시를 구상하는 습벽이 있어서 딱 맞아 떨어지는 어휘를 발견하면 정신이 몸 밖으로 나오는 환희의 경지를 순간적으로 느껴요. 바다가 보이는 찻집이어서인지 시가 쉽게 나오더군요. 어린 시절부터 혼자 바다를 보아서 쓸쓸함과 소외가 몸에 박혀 있어요. 바닷가에 살다 보면 맑은 날에는 너무 눈부셔서 해가 바다에 꽂히는 것 같은데, 그런 땐 살아야겠다는 열의가 느껴졌어요. 등단 때부터 쓸쓸함이나 소외감은 저의 전매특허일 정도로 제 오관을 자극했어요. 1970년대의 시단은 참여냐 순수냐 해서 우리 같은 사람은 발 디딜 곳이 없었어요. 저는 전위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남이 하지 않는 것, 제 생긴 대로 제 목소리를 내는 개성을 살리고 싶었다고 할까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쓰신 작품들 중에는 ‘슬픔’과 달리 ‘햇빛’이나 ‘햇살’이란 시어도 많이 나옵니다. 양적인 면으로 보면 훨씬 많다고 볼 수 있지요. 다섯 번째 시집 제목이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가 그 단적인 증거이지요. ‘햇빛’을 작품의 시어로 많이 사용하는 의도가 있는지요?
노향림 : 제가 원래 병과 가난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유년시절 목포 바다가 보이는 언덕 아니 벼랑 위에 딱 한 채 서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낮에는 부모님이 일 나가시고 오빠들이 학교에 가 저만 남아 있었어요. 아파서 늘 혼자 집에 누워 있었어요. 너무 고요해서 대낮의 정적이 더 무서웠는데, 유리창이 빙 둘러쳐진 집이어서 맑은 공기 속에서 햇살이 내리쬐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눈부셨어요. 병과 함께 누워 있는 쓸쓸함과 고통도 컸지만 바다나 햇살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어요. 그래서 그때 느낀 환희나 기쁨을 시에다 모두 쓰고 싶었어요. 모든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햇빛에서 나와요. 감춤과 드러냄, 시의 이중적 구조를 좋아해요. 존재하는 것은 모두 비워내고 부재하는 것은 사물의 존재를 채워 넣지요. 그렇게 슬픔이 실제적 구조라면 햇빛은 상상력의 구조로 짜 넣지요. 제가 시에서도 썼지만 천년의 섬인 압해도가 암말 짐승처럼 보이거나 또는 한 마리 학이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넣었지요. 그 모든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햇빛에서 나와요.
맹문재 : 「어느 따뜻한 날의 기억」이라는 작품에 “나는 다만 살림방 하나와 상상력을/사은품으로 받았을 뿐이네.”라는 구절이 나오듯이, 선생님께서는 시를 쓸 때 상상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의 시들은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예리한 이미지 묘사가 지배적인데, 상상력이 가미되어 작품의 의미 영역이 넓습니다. 상상력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노향림 : 상상력에도 예리하고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어야지요. 저는 시를 객관화시키고 전통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의 구조는 상상력으로 짜고 구체적 이미지를 넣어야 될 것 같아요. 제게 햇빛은 몸과 마음을 빠져나온 순간적인 입자들이라고 할까요. 그 찰나의 번쩍거림은 무속적인 환희라고나 할까요.
황진성 :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타고난 시적 재능, 감수성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번뜩이는 영감을 잡아내어 그것을 시로 만드시는데 그 영감이 아무에게나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시는 언어로 잘 짜서 완성시키는 작업인 기술 즉 테크닉도 필요할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시는지요?
노향림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먼저 존재하는 것에서는 의미를 제거하고 비워내서 허무로 가고, 부재하는 것은 채워 넣고, 행과 행 사이의 이미지를 압축시켜요. 1970년대의 어느 비평가가 어느 일간지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만 남도록 하지요. 주제는 우울하거나 암울한 것이지만 그것에서 밝음을 상상하지요. 반대를 꿈꾸는 것, 그러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극한 상황을 꿈꾸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제가 하는 작업입니다. 그래도 시인으로서의 본 모습까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진성 : 극한까지 자신을 몰고 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저 같으면 신경성 위장병이 도질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뚫고 나갈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지요?
노향림 : 주변에서 시를 잘 읽었노라고 격려해 주시는 일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홍신선 선생(남편)도 처음엔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줘서 힘이 되었지요. 지금은 가만히 저를 내버려 두는 일이 도와주는 일이지만요. 결혼하기 전에는 남편이 집필실도 마련해 준다고 하고 밥도 해주겠다고 했어요.(일동 웃음) 그런데 남편은 야간고등학교 교사였고 참 가난했거든요.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또 시에 매달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더라구요. 그렇지 않았으면 현실에 더 괴로워했을 겁니다. 물론 상황이 더 악화되었으면 시를 포기하고 제가 좋아하는 연극을 했을 거예요. 학교 다닐 때 연극도 좀 했거든요. 연극이 더 가난해지는 일이지만요. 홍 선생이 이해해주고 살림 못하는 것도 봐주니까 제가 시에 몰입할 수 있어요. 제가 지금도 김치를 잘 못 담그거든요. 담글 줄은 알지만 까다로운 홍 선생의 입맛을 못 맞춘다는 말이지요. 사실 예술 하는 사람을 아내로 둔 사람은 불행해요. 홍 선생은 농촌 출신에다 효자이고 평론가처럼 예리한데 제가 못 따라가니까 주부로서는 영점인데도,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니까 시를 쓴 것 같아요. 저는 그 대신 극한의 긴 싸움을 혼자 하는 거예요. 지금도 집필실이 따로 없지만 기도실에 들어가듯 방에 박혀 정적 속에 갇혀 작업을 하지요. 지금도 시만 쓰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맹문재 : 2007년 『시인세계』에 ‘시인 남편 시인 아내’라는 특집이 있었는데 홍 선생님께서 노 선생님이 철이 없어 포항에 가서 살고 싶다고 쓴 것을 봤는데요.(일동 웃음)
노향림 : 아, 그 얘기요. 쓴 줄도 몰랐는데 잡지가 와서 보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철을 만드는 포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더군요. 시 쓰는 아내를 둔 것 자체가 불행이겠지요. 입맛에 맞는 반찬 한 가지라도 더 만들 줄 아는 아내를 두지 못 했으니깐요.
황진성 : 이 기회에 연애담도 좀 들려주세요. 선생님께서 나이가 좀 연상시라는데요? (일동 웃음)
노향림 : 저는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나와서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어요. 홍 선생은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나와서 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하고 김춘수, 김현승,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재등단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갔다 왔지요. 그 후 함께 숭실대학교에 계시던 김현승 선생의 제자가 되어서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왜냐하면 홍 선생은 갓 제대한 후라 짧은 머리에 늘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고 나이도 안 맞아서 생각을 못했었지요. 그런데 김현승 선생님께서 축구를 매우 좋아하셔서 <수색다방>(당시 월드컵 축구를 중계하던 장소는 그곳밖에 없었고, 원두커피를 파는 집도 그곳밖에 없었음)에 제자들과 함께 모여앉아 티브이로 보곤 했지요. 그때 홍 선생은 정말 깡마른 체격에다 후줄근한 단벌 신사처럼 한 가지 옷만 입고 나타났는데 내성적이라 늘 구석에 앉아 말이 없었어요. 김현승 선생님께서 경기가 끝나면 자장면을 사 주시면서 둘이 잘 맞을 것 같으니까 잘해보라고 늘 부추겨 주셨어요. 한 번은 아무도 안 오고 사전에 약속을 했는지 홍 선생하고 저만 온 거예요. 집에 오는 길이 같은 방향이라 함께 차를 타고 오다보니까 저는 먼저 내리고 그 버스를 타고 홍 선생은 가는 코스였어요. 하루는 종로2가에 있는 <낭만>이란 호프집에서 호프를 한 잔 하자고 했어요. 내가 술을 못 한다고 하니까 그럼 자신의 고민을 상담해 달라고 해서 갔지요. 그곳에서 내가 영문과에서 공부한 엘리엇의 「황무지」’에 대해 줄줄 얘기하더라고요.
황진성 :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일부러 공부를 해오셨나 봐요.
노향림 : 그럴지도 모르지만, 정말 실력이 있더라구요. (일동 웃음) 그 후에 내가 <한국시> 동인활동을 했는데 거기도 들어 왔어요. 동인활동이 끝나면 집이 같은 방향이다 보니까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친해지게 되었지요.
맹문재 : 방금 말씀하신 <한국시> 동인에 대해서 듣고 싶네요.
노향림 : 김춘수, 문덕수 선생님 등 몇 분이 『한국시』 잡지를 하다가 오규원 시인에게 물려주셨지요. 정의홍 시인이 자꾸 저더러 <한국시>에 들어오라고 졸랐어요. 오규원 시인도 저보고 동인이 되었으면 한다구요.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되었네요. 경주의 정민호 시인, 그리고 부산의 양왕용 시인, 청주의 양채영 시인 들이 함께했어요. 강은교 시인 등 다른 시인들과 <70년대>라는 동인지를 만들며 그쪽 동인활동도 하고 있었어요. 오규원 시인은 저보고 전통 시에서 벗어나 외부세계를 많이 그리고, 이미지 위주의 시를 선명하게 그려보라고 권했어요. 그분을 만난 것은 제게 행운이었어요. 그 후 <한국시> 동인은 다른 동인과 합류하고 또 서로 갈라져 나가며 해산되었어요. 저는 계파가 많았던 것이, 서로 다양하게 개성 있는 목소리를 내던 것이,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해요. 당시 문학지로는 『문학과지성』과 『창작과비평』의 양대 산맥이 있었는데, 문지는 순수문학이었고 창비는 참여문학을 지향했지요.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진을 치는 듯한 느낌이어서 저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저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전통 시에서 벗어난 외부세계를 그렸어요. 당시 유행이 러시아 학파의 신비평주의인 ‘낯설게 하기’였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자신이 낯설어질 때의 느낌을 작품으로 옮겨 보려고 노력했지요. 물론 그것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 우리는 가난해서 와우산에 있던 와우아파트에서 살았는데(나중에 아파트가 무너져서 뉴스에 나온 그 아파트예요.) 밤이면 정말 무서웠지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썼어요. 그때가 삼십대에서 사십대였을 거예요. 지금 제 앞에 있는 젊은 두 분이 부러운데 당시를 생각해보면 나도 참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신문에 평론란이 있어서 시평이 많이 실렸는데 『문학과지성』의 1세대 편집인이셨던 김주연 선생님, 김현 선생님, 그리고 『현대시학』을 운영하시던 전봉건 선생님께서 제 시의 평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때 가장 활발하게 제 세계를 그렸던 것 같아요.
황진성 : 「연습기를 띄우고」를 그때 쓰신 거 맞나요?
노향림 : 네.
황진성 : 저는 요즘 그 시를 처음 봤는데, 시대를 뛰어넘어 참 와 닿았어요. 선생님의 청춘 시기가 많은 고민과 갈등으로 치열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20대를 보내며 진로나 결혼 문제 등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되었지요. 아직도 미숙해서 제 결정이 올바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데, 그 작품을 읽으면서 힘들게 살았던 것이 생각났어요.
노향림 : 사람들은 그 시를 잘 모르지만, 저도 그 작품에 많이 애착이가요. 당시에 여성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김현 선생님한테 평을 받았던 시이기도 해요. 그 이전 예기를 하지요. 첫 시집 『K읍 기행』을 낼 당시(지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신인 문예진흥원에서 지원금을 받아서 자비로 냈는데) 흑자가 났어요. 인세도 받고 가계에 보탬이 좀 됐지요. <평민사>를 하던 김종찬 씨가 그 시집을 자비로 사서 서점에 다 깔아 주었어요. 첫 시집은 그렇게 기분 좋게 다 팔렸어요. 그러자 당시 그 시를 시선집으로 내보겠다고 어느 출판사가 사정사정해서 미발표작과 함께 얄팍하게 선집으로 나왔는데, 너무 안 좋은 판본과 질이 나쁜 종이로 간행되어 잊고 지냈는데, 말씀하시네요. 지금은 그 시집을 구할 수도 없어요. 「연습기를 띄우고」는 제대로 시집에 묶여서 나온 시가 아니지만 문학적인 가치로 봐서는 후학들에게 권해주고 싶어요.
황진성 : 제가 선생님 초기 시집들을 구하려고 했는데 한 권도 구하지 못했어요. 젊은 시절의 꿈을 하늘에 띄워 보내려 고민하는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시는 꼭 다시 시집으로 엮여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노향림 : 당시에 썼던 「꿈」이란 시도 김현 선생님이 “이 시는 슬픔과 비애를 주지만 읽고 나면 행복한 느낌이 든다. 꿈과 고통을 동시에 주는 시가 노향림 시의 본질이다.”라는 평을 했고, 노향림의 대표시가 될 것 이라고 해주었지요. 그 격려에 힘입어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요. 다 읽고 나면 행복한 느낌이 든다는 평에 오랫동안 행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에는 마음의 눈이 맑게 열려 있었고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살아서인지, 남들이 까끌까글하다고 생각하는 소금이 저에게는 미끈거리는 물질로 환원되었지요. 그렇게 느낄 정도로 감각적인 면이 있었어요. 항상 아파서 누워만 있었는데,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창밖을 지나는 소리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유년의 체험을 그린 것이지요. 제가 과작이라 시를 많이 쓰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해요. 어쩌다 시인 자신이 쓴 시에 만족하게 되는데 「꿈」이란 시가 그래요. 제 시 중에서 가장 낭송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맹문재 :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돌려볼까요? 선생님께서는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지금까지 『K읍 기행』(현대문학사, 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문학사상사, 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문학사상사, 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창비, 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 2005) 등 다섯 권의 시집을 간행하셨습니다. 각 시집마다 사연이 있을 텐데 궁금하네요. 이 다음 후학들이 선생님의 시세계를 연구할 때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도록 정리를 좀 해주시지요. 먼저 『K읍 기행』부터 부탁드려볼까요?
노향림 : 첫 시집은 돈이 없어서 못 내고 있었는데, 김현승 선생님께서 당시 발표했던 시들을 보시고 왜 시집을 내지 않고 미루느냐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조금 전 말씀 드렸지만 1977년 문예진흥원의 도움을 받아 냈지요. 선명한 이미지의 시를 쓸 때이기도 하고 또 첫 시집이고 해서 주위 분들이나 선배 시인들이 잘 봐주신 것 같아요. 노란 표지에 ‘현대문학’에서 이름을 빌려 ‘현대문학 간’, 이렇게 씌어 있을 겁니다. 시집이 나오자 시어가 너무 생생하다는 평을 받았어요. 당시 첫 아이를 병으로 잃어서 그 아픔을 신생아실을 들여다보면서 쓴 시인 「신생아실」도 괜찮다는 평을 얻었지요. 햇빛에 비치는 유리창이 날카로운 깨진 유리 조각으로 보였지요. 그렇지만 뒤에 남은 햇살이 아이를 데려갔다고 긍정으로 끝나는 시입니다. 시에서는 그 선명한 아픔을 환희로 바꾸었지요. 비애나 슬픔 속에서 견딜 수 있던 것도 시의 힘인 것 같아요. 당시 돈도 없어서 멀리 여행을 가지 못하고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고는 했는데, 그때 보고 느낀 것이 다 시로 나왔어요. 역촌동역 입구에서 약국 문을 밀고 나오는 사람들이 싱싱해 보였어요. 하얀 얼굴들이 초겨울 같다고 그렸지요. 그 시 역시 첫 시집에 수록된 시 「역촌동 입구」지요. 그때만 해도 미개발된 집들이 산등성이에 알약같이 흩어진 마을처럼 보였어요. 「바람 부는 날」과 「신생아실」 이런 시 제목들이 많이 애착이 가는 시어의 화두였어요. 당시 한강이 모래사장이었는데 바람 부는 날 가면 덤프트럭에서 쏟아져내려오는 모래들이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햇빛과 바람이 없었으면 시를 못 썼을 것 같아요. 첫 시집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를 쓰고자 했어요.
맹문재 : 첫 시집은 생생한 이미지라는 평과 함께 인세를 받는 등 나름대로 성공했네요. 두 번째 시집인 『눈이 오지 않는 나라』도 어떤 평을 받으셨는지요?
노향림 : 당시 평론했던 정현기 선생님이 『문학사상』 주간을 맡고 있었는데 시집을 내자고 해서 출간하게 되었어요. 풍경을 뒤집어 보여주려고 현대 감각으로 또 전위적으로 쓰려고 했어요. 시 제목은 누구나 똑같이 공유하지만 내용은 철저히 다른 시를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눈이 오지 않는 나라』는 열대나 아열대성의 나라에선 얼마든지 그 말을 누구나 쓰지만, 제가 시로 옮겨 올 땐 새로울 것이다 해서 쓴 시집 제목입니다. 「풀잎」도 강은교 시인의 제목과 휘트먼의 제목이 같지만 내용이 확연히 다르듯이 말이죠. 다르게 썼기에 모두 좋잖아요. 기를 제 감각으로 받아 들여서 영혼의 눈이 있다고 생각한 뒤에 다시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업을 했어요. 체험했던 모든 일을 확 뒤집어서 보여주고자 했어요. 어린 시절 장티푸스와 복막염을 앓았던 기억, 퉁퉁 부은 배로 기어가 압해도를 바라도던 기억, 또 결혼을 해서 첫아이를 낳았다가 잃었던 기억들을 다 시로 써낸 것 같아요. 그땐 지하철 1호선만 있을 때인데 그것을 타고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며 번개처럼 스치는 영감이 떠오를 때 그것을 잡아내려고 했지요. 시 쓰는 일은 갈수록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황진성 : 선생님의 시는 선명한 이미지와 묘사가 탁월한데, 「눈이 오지 않는 나라」를 비발디의 사계를 빠른 템포로 들으며 낭송하면 그 정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말하는 음악가도 있더군요. 결국 시인은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데 작품이 뛰어나니까 평론가들에게 인정받았고, 그 힘이 격려가 되어 더 열심히 시를 쓰신 것 같네요.
맹문재 : 세 번째 시집인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 하네』에 대해서 들을까요?
노향림 : KBS 방송국에서 시를 가곡으로 만드는 일이 있었어요. 시를 두 편 달라고 해서 쓰게 됐어요. 사실 압해도의 연작시를 쓰게 된 태동이 「꿈」이었지만요.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쓴 시여서 제목을 아예 고향 앞바다인 「압해도」 정해버렸지요. 또 한 작품은 제목을 먼저 써놓고 쓰면 시가 잘 안 나오는 스타일인데 그냥 「해 뜨는 나라의 아침」이라고 써놓고 썼지요. 제가 원래 시를 참 힘들게 쓰는 편인데, 그 시를 쓸 때는 너무 잘 나와서 행복했어요. 어머니와 같이 압해도에 건너가서 먹던 무화과 열매며, 어린 시절 적막한 바다를 보며 지냈던 그 우울함을 환희로 바꾸고 싶었어요. 그 뒤 압해도를 쓰고 싶어서 자서전같이 백 편 정도 썼어요. 그 섬이 너무 그리워서 언젠가 써야지 하며 50년 가까이 아껴두고 묵혀두어서인지 막상 쓰려니까 줄줄 나오더군요. 당시 일본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던 시기였고, 희망찬 노래가 변변한 것이 없어 아예 맑고 희망찬 노래가 되도록 해달라고 KBS 측에서 요청했어요. 그래서 독도를 “오 찬란한 동해의 아침 햇살이여”라고 맘 속으로 시작하며 썼어요.
황진성 : 최영섭이 곡을 붙이고 바리톤 박정하가 부른 「압해도」를 들은 적이 있어요.
노향림 : 여러 명의 테너와 바리톤이 번갈아 가며 불렀는데 “우리보다”가 노래할 때 발음이 안 되어서 “울리”로 불리는 등 표기가 잘못된 부분도 있어요.
황진성 : 그 노래를 들으니 가보지는 못했지만 압해도의 너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며 마치 제 고향같이 그 섬이 그리워지더군요. 어린 시절에는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은 강을 보고 사신다고 했는데 저도 물을 참 좋아하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그런 환경에서 살아보지 못했어요. 어떻게 보면 선생님께서는 자연의 혜택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바다와 강이 선생님 시의 영원한 모티브가 된 것은 아닐까요?
노향림 : 그렇지요.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시집이 나오고 나서 압해도에 시비를 세웠다고 연락이 왔더군요. 제막식에 참석했어요.
황진성 : 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십시일반해서 시비를 세웠다고 들었어요. 김이나 미역을 따서 가난하게 생계를 잇는 분들이, 시를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그런 시비를 세웠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네요. 많은 사람들에게 시를 알게 해주신 일에 선생님의 공이 컸네요.
노향림 : 그 섬까지 옛날에는 똑딱선으로 갔는데요. 철선으로 다니다가 지금은 연육교가 생겨서 신비감이 좀 사라졌다고 말하는 분도 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네 번째 시집인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에 대해서 들을까요.
노향림 : 저는 이 시집에 애착이 가요. 삶과 죽음의 세계를 그리는 연장선이라고 누가 말한 평도 있는데요, 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담으려 했어요. 표제작인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은 제가 어린 시절에 뱃사람들이 먼 바다로 출항하기 전 당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쓴 시예요. 후투티는 오디새라고 하기도 하는데 경기도 지방까지만 오는 새죠. 머리에 왕관을 쓴 모양의 철새인데, 당제에서는 짚으로 만든 오디새를 놓고 비는 거였어요. 왜 남쪽까지는 내려오지도 않는 새를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나 하고 이상하게 여겼는데, 새를 빌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려는, 바닷길을 잘 풀어서 비단길처럼 폭풍을 만나지 않고 만선이 되어 잘 다녀 올 것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념적인 새를 만들어 걸어 놓고 비는 행위가 배를 타고 나간 사람이나 집에서 기다리는 아낙네들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을 위한 기다림의 기도였다고 시인이 된 뒤에 깨달은 거죠. 그 행위를 빌어 인간은 신을 닮고 싶어 하는 영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보고 자랐지만 기복 신앙은 우리의 전통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무엇인가를 위해 비는 무속 신앙, 없는 것을 끌어내고 영혼의 세계를 그리워해서 영혼의 힘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싶어 하는 것을 뱃사람들을 통해서 보았지요. 오지 않거나 없는 새를 짚으로 만들어 기원하는 행위. 그것은 신들린 세계가 아니면 보기 힘들어요. 그 무속적 세계를 보며 영혼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은 시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불변하는 시간과의 싸움, 영원불변한 것과 불가사의한 것을 자기 안에서 화합하거나 부정하며 끌어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시라면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집 해설에서 이숭원 선생이 오랜 적막에 담갔다가 끄집어낸 시라는 평을 해주셨어요.
맹문재 : 지금까지 간행한 시집을 보면 시의 이미지 묘사기 지배적인데, 정신에 대한 깊은 천착을 볼 수 있네요. 이제 다섯 번째 시집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까요.
노향림: 다섯 번째 시집에서는 예리한 이미지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시를 삶에 끌어 내렸다고 생각해요. “댓잎소리”를 “착검”하는 것에 비유한 것을 보면 아직 내 감각이 죽지 않았구나 느꼈어요.(일동 웃음) 집 근처 있는 교회에서 낮 12시마다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요. 내려다보면 노인 급식소처럼 점심 식사대접을 하는 봉사를 하는 거예요. 줄 지어 선 행렬 위로 햇살이 내려쬐는 것이 하늘이 시혜를 베푸는 것 같아요. 지금도 길게 늘어 선 줄을 12시면 어김없이 보지요. 그렇게 맑은 하늘의 해가 골고루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구나 하고 문득 살아 있음의 고마움을 느끼지요. 그때마다 너 살아 있구나 하고 쨍 하니 해가 종소리를 치는 것 같아요. 그때 영감을 얻어 쓴 시가 「해에게선 종소리가 난다」이지요. 시집 제목도 그렇게 했지요. 시인들 누구나 그렇겠지만 시집 제목을 정할 땐 고민을 많이 하는데 시집 제목을 준 작품이 바로 이 시지요. 일용직 사람이나 노인들, 점심 한 끼로 하루를 때우며 사는 사람들, 해가 치는 종소리는 우리 모두 수세기 동안 들어온 종소리인데 왜 우리는 못 들었을까. 그걸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겐 또는 시들고 병든 마음엔 깨진 종소리일 뿐이겠죠. 저마다 나에게만 그렇게 삶이 고단하고 힘든가 하는 고뇌 때문인 것 같아요. 이 시집에서는 「편지」라는 시를 제일 앞에 놓았는데 삶으로 내려오는 디딤돌이었으면 해서 자갈돌 깔린 길을 이야기했지요.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몰라주더니 다시 읽은 분들은 무언가 안정적이고 평화로워진다는 분들이 있더군요.
황진성 : 저는 “깨진”의 의미가 깨닫는 것, 밥 한 끼를 얻어먹으며 삶에 대해 깨닫는 것,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나아가 영혼과 우주를 깨닫는 일이라는 생각해어요. 또한 일상의 번잡한 것과 욕망으로부터 나를 깨는 것 즉 부수는 일, 이렇게 이중적 의미로 해석했어요. 시 제목 하나에서 이렇게 다중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노향림 : 네 맞아요. 그렇게 알아맞히는 독자들이 있다면야 시집을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랜 기간이 걸리더라도 숙성을 시켜서 시집을 내야겠구나 하고요. 갈수록 시가 어렵다는 걸 알고 보니까 시에 더 긴장감이 있어야 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진성 : 제 생각에 요즘 3년도 안 되어 시집을 내는 시인들이 많은 것에 비해 선생님께서는 시집 간행의 간격이 매우 긴 편이지요. 10년, 7년, 8년씩인데 그만큼 많이 고심하고 충분히 숙성시킨 다음에 내 놓으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름의 좋은 시집을 내고 싶어서 아직 첫 시집을 못 내고 있는데,(모두 웃음) 선생님의 시집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향림 : 네 감사합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수필도 많이 쓰셨잖아요. 『나는 더 혼자이리라』(청맥, 1988) 『키 낮추기와 꿈 높이기』(한겨레, 1988) 『행복의 모래성』(준, 1989) 『누구를 위해서 사랑하는가』(한겨레, 1990) 『아픔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한겨레, 1992) 『그가 있는 이유』(한겨레, 1993)『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등 여러 권의 수필집을 간행하셨습니다. 수필을 왜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신달자, 유안진 선생님 등도 수필을 쓰셨는데,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노향림 : 사실 수필 쓴 것을 좀 부끄럽게 생각해요. 그 시간에 시나 더 쓸 걸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분량도 많아서 쓰느라고 참 힘들었어요. 미지의 독자를 상대하니까 두려움도 있었고요. 상업적인 것도 출판사에서는 생각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당시 여성 독자들이 의외로 많았어요. 부유하고 화려한 공주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썼는데 많은 공감을 주었다들 하대요.
맹문재 : 저는 여성 시인들이 수필을 쓴 것이 의미가 크다고 봐요. 시보다 수필이 일반 독자에게 다가가기 쉬워 사회적으로도 또 문화사적으로도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이 자기를 인식하는데 기여한 것이지요.
노향림 : 수필에 큰 의미는 두려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때부터 여류라는 말이 없어지고 여성 시인들도 동등하게 대접을 받기 시작했어요. 여성으로서의 부끄러움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그 부분에 점수를 줄 수 있지요.
황진성 : 여류란 말은 저도 좋아하지 않아요. 197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여성 시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산업사회의 경제발전으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을 문명 비판적 경향과 전통적인 세계의 내면의식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내용으로 했지요. 1970년대 한 획을 그은 우리나라 여성 시인으로서 유신과 광주 항쟁 등 정치적 격랑기를 어떻게 넘어 오셨는지요?
노향림 : 직접 현실에 참여하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러나 기존의 틀과는 다른 나만의 시세계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어요.
황진성 : 정치적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길을 열심히 추구함으로써 여류란 말이 없어질 정도로 우리의 여성시를 한 단계 끌어 올리셨잖아요. 그것도 참여의 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런 뜻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후배 여성 시인들에게 당부나 권유의 말씀을 한마디 부탁드려볼까요?
노향림 : 선배 시인들의 시를 답습하면 안돼요. 자기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열어 가야겠지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시인이 되는데 영향을 주신 분들이 있겠지요.
노향림 : 정말 또 솔직해지지 않을 수 없네요.(일동 웃음) 아버지는 동경 예술대를 나오신 분으로 흰 양복에 백구두만 신고 다녔어요. 당시의 지식층을 나타내던 소위 인텔리겐치아였지요.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한 번 나가면 몇 달 씩 안 들어오곤 했는데, 어머니가 불평을 하면 술주정도 하셨어요. 그때마다 책은 꼭 몇 권씩 사오곤 하셨죠. 그동안 무얼 했는지 식구들은 감히 여쭈어보지도 못했구요. 그래서 어머니가 신앙을 가졌는데, 하얗게 눈이 오는 새벽에도 장독대 앞에서 꼼짝 없이 움직이지 않고 눈을 맞으며 기도를 해 눈사람인지 어머니인지 못 알아 볼 정도였어요. 아버지의 방랑벽을 없애달라는 기구였겠지요. 어머니는 그래도 아버지가 사 오신 강경애 소설이나 이광수 소설 등을 열심히 읽었어요.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좋으셨고 아버지 대신 가계를 이끌어 간 강인한 분이세요.
저의 친구에 의하면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썼다고 해요. 중학교 때는 서정주 선생께서 학교에 오셔서 문학 강연을 했어요. 글을 잘 쓴 사람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구경을 시켜준다고 했는데, 저는 그때 수줍음이 많아서 글을 안 냈어요. 그때 친구는 글을 내서 일주일 동안 서울 구경을 다녀왔어요. 그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오기도 생겨서 그때부터 열심히 글을 썼는데, 아버지께서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을 보내주셨어요. 글재주가 조금 보이자 허황한 아버지는 금의환향해서 돌아오라고 저를 무작정 서울로 올려 보낸 것이지요.
학교에 가자마자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바람에 그만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지요. 거기에다 교통사고까지 나서 병원에 누워서 지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헤밍웨이를 만난 것이 큰 전환점이 되었어요. 그 짧은 대화체와 압축을 헤밍웨이에게 배웠지요. 그 당시 헤밍웨이가 살아 있어서 갖가지 뉴스를 몰고 온 것도 문학에 심취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편을 써보기도 하면서 소설을 쓸까도 고민했지요.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밤 새워 잡은 고기가 다 뜯겨 없어져도 좌절하지 않아요. 그 비애를 환희로 바꾼 점이 너무 좋았어요. 그것이 좋아서 혼자 글을 긁적거리다가 교내에서 문학상을 타기도 했어요. 지금도 헤밍웨이를 좋아해서 읽고 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또 다른 특징은 식물성이라는 점이지요. 선생님의 작품은 동물을 제재로 삼은 것보다 식물을 제재로 삼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영산홍, 깨꽃, 철쭉, 분꽃, 등꽃, 박꽃, 달맞이꽃, 풀꽃, 애기똥풀꽃 등에서 여실하게 볼 수 있지요.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네요.
노향림 : 네 맞아요.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끄집어낸 것이 제게는 많아요. 지금은 영감을 중요시하지 않지만 저는 영감이 제 안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무녀적인 기질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요. 저에게 식물성은 역동적이어서 양면성을 갖고 있어요.
황진성 : 「깨꽃」에서도 초경하는 소녀의 이미지를 나타낸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아요.
노향림 : 네 맞아요. 대담하게 쓰고 싶었어요. 모든 소재가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육감적인 소재를 써도 제 시는 식물적 이미지로 느껴진대요. 김춘수 선생님께서 생전에 제 시를 좋게 봐 주셨어요. 선생께선 언어 자체가 시가 되는 분인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만나 뵈었지요. 그분의 시론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요. 시론과 시가 나란히 가시는 분도 드문데 그분은 실제로 그렇게 하셨지요. 의미에서 무의미로 또 의미로 돌아온 시론대로 시를 쓰시다 가신 분이예요. 홍 선생의 초기 시도 칭찬을 해주셨고, 또 추천을 세 번에 걸쳐 해주신 분이지요. 식물적 이미지는 김춘수 선생님의 영향인 것 같아요.
맹문재 : 선생님의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길’ 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길’을 주제로 삼은 작품은 많은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보이는 것이지요. 가령 한용운은 「나의 길」에서 한 인간 존재로서의 길을 부단히 인식했고, 김소월은 「길」에서 식민지 상황에서 집을 잃은 한 나그네의 비애감을 그렸습니다. 김지하는 「황토길」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농민들의 한숨을 담았고, 박노해는 「썩으러 가는 길」에서 참다운 노동의 길을 군대 가는 후배에게 전했습니다. 많은 작품들에서 ‘길’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징성이 매우 넓기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의 작품들에도, 가령 「강화읍을 지나며」「도원길」「을왕리 시편」「이항리」「어떤 태백」「양수리의 저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길이 많이 등장합니다.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길은 작품마다 다를 수 있지만,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노향림 : 참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그거에요. 저는 이미지 시를 쓰면서 이쪽에서 기여를 하고 싶어요. 주제를 뚜렷이 정하지 않아도 존재로서의 길 말입니다. 시인들이 역사 속에서 박해도 많이 받았는데, 선각자적인 길을 간 분 들에 비해 제가 참여하지 못한 아픔이 있습니다. 제 약점일 수 있지요. 상상력으로 쓸 수도 있지만 저는 체험하지 못한 것은 잘 못써요. 길에 관한 시는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기억에 남아요. 모든 시인은 길을 안 쓸 수가 없어요.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참신성은 잃지 않고 싶어요. 그것이 다 제 길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의 길도 길이라고 생각해요. 무형의 보이지 않는 길도 길이지요.
황진성 : 행동으로 참여하거나 시로 기여한 것도 다 의미가 있다고 봐요. 결국 시인에게는 작품이 말해주지 않을까요.
맹문재 : 선생님의 시를 보면 음악에 대해서도 간간히 나오는데, 음악 듣는 취미가 있는가 보지요. 특히 스페인 태생 맹인 작곡가인 ‘로드리고’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노향림 : 고전이나 팝송 모두 다 좋아해요. 로드리고는 맹인이었는데 역사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꿋꿋이 일어서서 자기만의 음악으로 예술에 기여한 부분이 좋아요. 그 자체가 참여 아닌가요?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도 좋아하는데 음악에 미친 듯 몰입하는 집중력과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생명력이 있어요. 살아생전 그는 소심해서 인간과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면과 심장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와 비슷하지요. 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고민하고 고통 받는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인 면도 좋아해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자랐어요. 아버지가 수동으로 바늘을 꽂아 듣는 레코드를 구해 와서 계속 음악을 틀어 놓아 음악을 실컷 듣고 자랐습니다. 돈도 없이 어디서 그런 걸 장만해온지 몰랐지만요. 그 시절 전축 있는 집도 드물었는데, 저의 것은 외제 전축이었어요. 레코드사론 외국의 콜럼비아사나 빅터 레코드사가 있었는데,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나 푸치니의 「자니스끼끼」 중에서 「오 마이 파파」 등을 계속 틀어 놓고 온 가족이 함께 들었지요. 아버지는 돈 버는 일엔 무관심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걸 식구들이 늘 따라와 주기를 바랐어요.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 시가 더 잘 나와요. 주인공이 있어 극적인 무대를 채워주는 오페라를 저는 좋아해요. 그래서 홍 선생한테는 아직도 철없는 아내지요.
황진성 :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의 예술적 감수성에 어머니의 강인함까지 물려받으신 것 같아요. 선생님 댁은 부부가 유명한 시인이시니 아드님께서 굉장히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 같아요. 문학을 하나요?
노향림 : 예전에 와우아파트에 살 때는 전기도 아껴 쓰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홍 선생과 내가 따로 따로 밤샘을 하며 몸이 상하도록 시를 쓰는 모습을 보고 질려서 아들은 절대로 글 쓰는 일은 안 하겠다고 했어요. 어린 나이인데도 말이죠. 어렸을 때 일기도 잘 쓰고 글짓기도 잘하고 글의 짜임새나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논리적이어서 평론을 하면 잘했을 것 같은데 아쉽지요. 너무 잘 쓴 것이어서 아이의 일기장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어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어요. 남들이 보면 키도 크고 잘 생겼다고 하는데 컴퓨터작업에 몰두하느라고 연애할 시간이 없어서인지 37살인데 아직 미혼이에요.
황진성 : 나이가 들면 문학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요?
노향림 : 시키고 싶지 않아요. 너무 고통스러운 작업이라서.
황진성 : 고향이 해남이신데 목포에서 자라나셨지요? 가족과 고향의 이야기를 부탁드려볼까요?
노향림 : 해남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부모님은 저를 낳자마자 목포로 나왔다고 해요. 해남에는 산이면이 있는데 산이 두 개 마주보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얘기밖에 없어요.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왔지요. 아버지가 꼭 서울에 가서 시인이 되어 오라고 했고, 또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 진로도 못 정했어요. 사실 밀어줄 돈도 없으셨는데(일동 웃음) 그래서 등단도 늦어진 거죠.
부모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두 분 다 돌아가실 때 꿋꿋하게, 아픈 내색도 없이 의연하게 가셨어요. 정말 나도 나중에 저런 모습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분들이세요. 살아 계실 때 잘 해드리지 못 했는데 지금 참 그립네요.
황진성 : 살아계실 때 시인이 된 모습을 보여드린 것만으로도 효도를 하신거지요. 앞으로 그런 것들이 녹아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지요?
노향림 : 앞에 계신 분들이 좋은 작품을 많이 쓰셨으면 좋겠고요, 저도 더 열심히 쓸 겁니다. 더 철저히 써서 좋은 작품을 더 남기고 싶어요.
황진성 : 앞으로 한국시사에 길이 남을 더 좋은 시를 많이 쓰셔서「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에서처럼 선생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세요. 두 분 선생님, 오랜 시간 진솔하고도 즐거운 말씀을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