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우리교회의 옛 모습(1908-1965)
1. 선교의 시작
1890년 9월, 조선 인천항에 첫 발을 들여놓은 영국성공회 선교사 고요한 주교가 서울과 인천, 강화 지역에 대한 선교활동을 펼친 이후 1904년에는 그 영역이 수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후 수원을 거점으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펴며 그 영역을 남쪽으로 점점 확대하게 되었다. 이에 수원을 포함한 경인지역을 선교사 부재열 신부가 총괄하고, 그 이남 지역의 선교를 김우일 신부와 구세실 신부가 맡았다. 그들의 선교 진로는 평택을 거쳐 한 쪽은 안중, 둔포, 백석포의 남서쪽으로, 또 한 쪽은 천안, 병천, 진천, 청주의 동남쪽이었다. 이와 같은 그들의 선교의 진로는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구세실 신부는 평택에서 성환, 직산을 거쳐 천안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인 부대리를 또 하나의 선교 거점지역으로 정하고 1906년도에 그곳에 부대리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그 인근 지역을 부단히 돌아다니던 중에 병천이 그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천안에서 동쪽으로 30리길인 병천은 천안 인근 지역의 농촌 지역과는 다르게 예부터 큰 장이 서는 곳이기도 하여서 문물이 성행하고 유동인구도 많아 선교지역으로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세실 신부와 진천의 김우일 신부는 병천에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1906년 이 지역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현재 병천교회에 대한 남아있는 자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908년 11월에 발행된 옛 성공회보인데, 여기에 병천교회의 초창기 기록이 남아있다.
그 내용인즉슨 ‘목천아내교회’(병천교회의 옛 이름)의 교인들이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병천 지역의 교회에 관련된 소식으로 보이며, 이 기사는 당시 진천교회 전도사인 임야고보씨가 진천교회 통신란에 함께 올린 소식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원문은 아래와 같다.
“목천아내교회 부회장 송사윤씨와 오순삼, 박창열씨 등 몇몇이 각자 출연해 학교를 창설하여 학생 십여 명을 열심히 가르치시니 장차 많은 학생이 지망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이번 가을에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그 분들의 열성을 찬송하오며 주의 도우심이 있기를 간절히 기구하나이다.”
여기서 목천아내란 목천, 아우내(幷:어우를 병, 川:내 천 - 두 개의 천이 어우르는 곳)의 줄임말로서 당시 병천은 행정구역상 목천군 갈전면 병천리였고, 이곳을 병천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모두 아우내라고 불렀다. 그리고 위의 기사에서 거론된 송사윤, 오순삼, 박창열 등의 인물에 관하여 그 성명 이상에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도리가 없다. 분명 그 후손이라도 이 지역에 살고 있을 법한데 그 추적이 안 되었으며, 이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기록이 있는데 우리 성공회 출판부에서 나온 대한성공회 관구요람에 있는 내용으로 아래와 같다.
“1908년 진천의 김우일(金宇逸) 신부와 구세실(具世實) 신부가 병천 지역을 답사하여 교우 가정에 기도회를 마련하게 됨으로 이 지역에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0일 진천의 김우일 신부와 수원의 브라이들 신부가 수원에서 제대를 가져와 기증하였다.
최초의 교회는 점촌에서 큰 도기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정관서 댁에서 1908년에 시작되었으나 장소가 너무 좁아 다음 해인 1909년에 구 장터 가까이 다리 근처에 대지를 구입하여 그곳의 초가로 제2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1912년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현 교회 대지를 매입하고 모든 건물을 이 대지에 세워 제1성당, 제2성당, 사제관, 전도사관, 학교, 기도실 등 여러 채의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남녀가 구별된 모임을 요구한 사회이기에 1913년에는 2개의 회의실을 가져 남녀가 따로 기도실과 학교 건물에서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 앵글로 가톨릭 대회(Anglo Catholic Congress)의 지원으로 장산리 장명에 있는 기와집(홍대용의 아흔아홉 칸 기와집)을 헐어 그것으로 병천 새 교회를 지어 박어거스틴 신부가 축성하였다.”
위의 기록은 아주 구체적이다. 그런데 이 기록의 출처는 다름 아닌 교회 내에 보관되고 있던 교회 약사인데, 그것을 누가 언제 작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뿐더러 그 내용의 정확성 여부도 불분명하다. 위의 두 기사 내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최소한 1908년 4월 이전부터 병천 지역에 목천아내교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자료에서도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성공회대학교 역사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1906년부터 1911년 사이의 총 17건의 토지 매매문서와 양도증서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토록 많은 토지 매매문서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 시기에 병천 지역에서 교회와 학교를 짓기 위해 무척 활발한 활동이 있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이 매매문서들과 양도증서들의 대부분은 부재열 신부와 김우일 신부가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지역은 갈전면의 병천리와 소근리, 그리고 서면 등 크게 세 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현재 교회가 있는 곳과 그 인근 지역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들 문서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06년 11월 30일자로 되어 있는 토지 매매문서(충남 목천군 갈전면 병천후촌 집 4칸, 삼백삼십냥, 소유자 :김우일)이다. 그리고 1년 후인 또 1907년에 작성된 토지 실측도(충남 목천군 갈전면 병천리 252, 63평에 대한 토지 실측도) 그리고 1908년 2월 20일자 토지 매매문서(충남 목천군 갈전면 병천리 논 45두락, 50냥) 등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교회가 세워지기 최소한 2년여 전인 1906년부터 이 지역의 선교를 위한 준비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병천에서는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이를 준비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예배가 이뤄지고 있었음을 이를 바탕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공회의 병천 지역 선교 시작을 1908년으로 보기보다는 교회와 학교 부지를 활발히 매입하던 시기인 1906년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지매매문서들을 보면 매입자가 천안 부대리교회의 구세실 신부나 진천교회의 김우일 신부의 명의로 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이 수원교회의 부재열(브라이들) 신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병천 지역의 토지 매매문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모든 지역의 성공회 토지 매매문서에서의 매입자 명의가 거의 모두 부재열 신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대표명의(부재열 신부)로 매입했음을 알 수 있다.
하여튼 김우일 신부와 구세실 신부가 선교지역을 점점 넓히며 1906년, 또는 그 이전에 병천 지역에 들어와 토지 매입 등을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이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이들을 찾아가 자신들의 선교 의지를 밝히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이들이라 함은 아마 이 지역의 유지들이었던 강대형(아브라함), 정관서(鄭管敍, 요셉), 전택서(錢澤序, 시몬), 송인섭(宋仁燮), 김정호(金晶鎬)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조인원(趙仁元)과 유중권(劉重權)도 이 지역의 유지였으나 이들은 읍내에서 청주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용두리에 살았고, 성공회보다 1-2년 늦게 들어온 감리교회 교인들이기 때문에 성공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따라서 구신부는 읍내에 거주하는 유지들인 강대형(아브라힘)과 전택서(시몬), 송인섭 그리고 읍내에서 개울(아우내천) 건너 점촌(현재 수신면 장산리)에 사는 정관서(요셉), 또는 가전리에 살던 김정호를 등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특히 병천 장터에서 현미싸전을 펼쳐 큰 부자로 있던 전택서(시몬)와 점촌에서 큰 옹기집을 운영하고 있었던 정관서는 김우일, 구세실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와, 이 지역에서 그들이 초기 선교를 펼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선 점촌의 정관서(요셉)는 자신의 집을 예배하는 장소로 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그들의 선교를 도와준다. 이에 수원의 부재열 신부와 진천교회의 김우일 신부가 제대를 가져오고 수녀님이 촛대를 가져옴으로써 1908년 4월 10일 교회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그도 교인이 되어 요셉이라는 세례명를 받게 되며, 1908년 목천아내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기도 한다.
그 후 1911년 교회와 근대식 교육기관인 진명학교와 사무실 등을 한 터로 옮기고, 그 해 11월 6일 주교가 방문하여 교회를 축성하고 성 마태라 봉한다. 그리고 1921년 병천의 전택서(시몬)는 사재를 들여 수신면 장산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 과학자 홍대용 대감의 아흔아홉칸 짜리 기와집을 헐어 그 기와와 대들보 등 자재들을 병천 현 교회 부지로 그대로 옮겨 와 기와집으로 교회를 건축하였으며, 1933년(계유년) 7월 16일에는 현 봉황리교회를 같은 방법으로 건축하여 축성하고 성 야고보라 봉한다. 병천 및 봉항리 교회 건축에 관해서는 다른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밝히기로 한다.
또한 읍내에 큰 땅을 가지고 있는 등 대부호였고 병천에서 강주사라고 불리던 또 다른 유지인 강대형(아브라함)도 구세실 신부를 도와 학교와 교회 건축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그는 우리 민족의 운명은 장차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켜 힘을 키우는 것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여 1908년 사재를 들여 근대식 교육기관인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직접 세웠는데, 이 학교는 재정의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1912년 문을 닫게 되고, 그 후 이 흥호학교를 기반으로 하여 병천교회에서는 진명학교를 세우기에 이른다.
한편 병천(아우내) 최고의 유지였던 송인섭과 그의 형제들은 역시 음으로 양으로 초창기 교회 건축과 진명학교 건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것은 과거 성공회보 기사 중 학교 재정을 위한 후원자 명단에서 그들의 이름을 심심찮게 발견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그 밖에 성공회 교인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가전리 부호였던 김정호도 진명학교 건축을 위해 자신의 땅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옛 성공회보의 기사 내용이나 문서들의 내용과 그것을 근거로 하여 기록, 출판된 책자들과, 지역민과 교인들의 각 증언에 의한 성공회 초창기 선교의 모습들에서 약간의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차이점들은 물론 우리 초창기 선교의 모습을 확실치 않게 보이게 할 수도 있으나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방면의 도움을 줌으로써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세워졌음을 반증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성공회 병천교회가 이 지역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부재열 신부와 김우일 신부, 그리고 구세실 신부 등 선교사들과 초기 이곳에 부임했던 전도사들의 선교 열정과 이 지역 발전을 위해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몇몇 유지들의 뜻과 그리고 많은 교인들의 기도와 협조가 함께 어우러져 성공회 병천교회가 세워지고 동시에 진명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