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1985 |
극단소재지 |
묵정동 |
퇴계로 |
퇴계로 |
원효로 |
신촌 |
신촌 |
혜화동 |
좌 동 |
좌 동 |
좌 동 |
작품수 |
1 |
7 |
8 |
7 |
4 |
5 |
5 |
4 |
3 |
4 |
공연일수 |
10 |
50 |
80 |
64 |
91 |
89 |
44 |
35 |
74 |
61 |
% |
16 |
14 |
22 |
18 |
25 |
24 |
12 |
10 |
20 |
17 |
|
1977년 (7작품 50일) |
1978년 (8작품 80일) |
1979 (7작품 64일) |
1월 |
|
3-15 "나비처럼 자유롭게" 재 20- |
20, 21 "백설공주" 부산 |
2월 |
|
-6 "빠담..." 재공연 22-28 "백설공주" |
|
3월 |
|
|
22-24 "피터 팬" 31- |
4월 |
12-18 "햄릿" |
6-10 "로미오와 쥴리엣" 14-16 "로미오..." |
-1 "피터 팬" 대구 21, 22 "피터 팬" 부산 |
5월 |
19-22 "빠담..." |
20-28 "세일즈맨의 죽음" |
7-10 "피터 팬" 재공연 24-28 "실수연발" |
6월 |
17, 18 "두리벙" |
8-12 "세일즈맨의..." 재공연 |
29, 30 "실수연발" 청주 |
7월 |
6-11 "나비처럼 자유롭게" |
22-30 "프란다스의 개" |
6-14 "실수..." 서울 청소년 |
8월 |
5-10 "보물섬" 26-30 "안나 크리스티" |
|
4-8 "끝없는 아리아" |
9월 |
19-26 "쟌 다크"
|
8-13 "멀고 긴 터널" 연극제
|
8, 9 "실수연발" 대구 11-13 "실수..." 부산 20-26 "종이연" 연극제 |
10월 |
|
|
|
11월 |
11-13 "햄릿" 광주 5, 6 "빠담..." 부산 7, 8 "빠담..." 대구 |
16-19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 (제1부) |
|
12월 |
11 "햄릿"대구 |
26, 27 "백설공주" 대구 |
8, 9 "멀고 긴 터널" 청주 |
창립단원인 이반교수는 엘리오트의 "대성당의 살인"을 공연하자고 제의해 왔다. 최근에 미국에서 귀국한 김한씨가 이를 번역했다는 것이다. 루터교의 신자로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반은 이 작품을 초동교회에서 예배극 형식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특정 종교의 제의에다 극적 요소를 가미시키는 예배극은 연극과 예배가 만남으로써 인간구원의 길을 여는 새로운 연극형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스웨덴과 영국에서 예배극을 공부하였고, 그의 스승이 바로 1935년 "대성당의 살인" 초연의 연출자였다. 우리는 1978년 크리스마스 특별공연을 기획하게 되었다. 초동교회 조향록목사를 뵈었더니 즉시 승낙하신다.
그러나 「공륜」 사무국 양 모국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 작품의 상연이 불가능하니 극단에서 자진 철회를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거부했다.
"우리는 기록을 위해서도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공륜에서 불가통보를 해주십시오."
결국 한국 최초의 예배극은 성사되지 않았다.
1978년은 벽두부터 바빴다. 극장이 모자라는 시대였지만 한겨울의 극장은 비어 있었다. 1월 3일 화요일 저녁 7시에 "나비처럼 자유롭게" 재공연의 막이 올랐다. 미국으로 돌아간 최형인 대신 이영란이 출연하였다.
연말부터 김갑수를 반장으로 하는 포스터 조가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에 풀통을 메고 나갔다. 너무 추워서 벽에 풀을 바르자마자 얼어붙었음으로 포스터 작업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걸핏하면 경찰에게 발견되어 가까운 파출소로 끌려갔다. 끌려가면 바보노릇을 해야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손님 발은 신통치 않았다.
그것은 그렇고 우리의 다음 스케줄은 "빠담..."의 재공연이었다. 코리아나극장은 주로 영화를 상영했지만, 우리들의 "빠담..." 공연을 받아주었다. 흥행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윤복희는 과로로 공연 직전 쓸어졌다. 링거를 맞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무대에 섰지만 관객들은 그 때까지 극장을 떠나지 않았다.
2월 제2회 해태명작극장 "백설공주"12)가 개막되었다. 드라마센타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연출을 맡은 황은진씨는 난쟁이들에게 앉은뱅이 연기를 주문했다. 공연이 끝나면 배우들은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 관객은 박수를 쳤다. 이반의 극본은 심플했지만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이반은 해방 직후 고향에서 본 이 "백설공주"의 이미지를 그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최창권의 음악도 좋았다. 나는 아이들이 극장에 들어오면 백설공주의 주제곡을 가르치게 했다. 극중에 그 노래가 나오면 아이들은 신나게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극장 안은 즐거움으로 가득 찼고 극이 끝나 극장 밖으로 나오는 관객들은 모두 주제곡을 흥얼거렸다. 공연은 원래 28일까지였지만 3월 초하룻날이 비어있어서, 우리는 하루를 연장하기로 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 콜 때 공연 1일 연장을 발표했을 뿐인데, 이 공연에도 관객은 몰렸다. 소위 「입선전」 덕택이었는지, 눈이 내려 질척한 남산언덕은 어린이 관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들의 작업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제3회 청소년극장 연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13)이었다. 황은진씨가 TV로 바쁜 몸이었지만, 연속적으로 연출을 맡았다. 신예 강태기와, 그 해 고려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문지현이라는 해내기 배우를 기용했다. 시민회관 별관은 교통요지에 위치하고는 있으나 워낙 황막한 환경에 있다. 다방이나 음식점이 코리아나호텔과 신문회관, 세실극장 주변에 한정되어 있고 물가가 비싸다. 극장거리란 좀 만만해야 한다. 모임의 장소는 문턱이 낮아야 하고 화려하지는 못하더라도 맘편히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주변에 있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국립극장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극장 내부도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서울시가 현재 시의회 건물로 쓰고 있지만, 한마디로 매력이 없는 낡은 「집」이다. 극장으로서 갖추어야할 공간성이나 분위기가 없는 것은 물론 조명시설 음향기재도 엉망이고, 특히 홀의 음향전달에 문제가 많다. 이곳에서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나 "아가씨와 건달들"이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공연은 그저 형식에 그치고 마는 정도이다.
1978년 4월 말에 세종문화회관의 신축개관기념 예술제가 열렸다. 집을 짓는 동안 사무국장으로서 큰공을 세운 이상만씨가 회심의 축제를 마련하였다. 연극협회가 연극부문의 프로그램에 관여하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북벌"을 대극장에서 발표하였고, 극단 현대는 소극장에서 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공연하게 되었다.
"북벌"은 졸작 "남한산성"의 후속편이다. 내 계획은 "남한산성" "심양의 봄" "북벌"로서 3부작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운뎃토막인 "심양의 봄"은 아직 공부 중이다.
"북벌"은 효종의 북벌의지를 그리고자 하였다. 연출을 맡으신 이진순선생은 특유의 힘으로 이 졸작을 웅대한 드라마로 완성하여 주셨다. 이 작품을 쓰는 데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종가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드린다. "남한산성"에서 최명길 역을 맡아 열연하신 장민호선생은 송시열로 분하셨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일을 추진하였다. 첫째는 밀러의 신간 Theatre Essays of Arthur Miller를 편역하는 일이었고, 이에 맞추어 밀러를 한국에 초청하는 일이었다. 전자는 문학사상사가 『아더 밀러 연극론집--연극론 12강』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밀러는 그 즈음 중국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의 장막과의 통신은 긴 시간을 요하였다. 결국 5월 초에 중국방문은 이루어졌지만, 당시 나이 68세의 그는 중국여행에 이어 한국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 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5월 하순 「방문은 어려울 듯」하는 짤막한 전보 한 장이 국무성으로부터 날아왔다. 물론 군사정권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던 그가 한국방문을 기피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문서상의 외교적 언사를 그대로 믿고 그의 방한에 가슴을 부풀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세일즈맨의 죽음』14)은 호평이었다. 그래서 드라마센타를 빌려 닷새공연을 더 했다. 이순재와 이정길의 마지막 장면은 불꽃 튀는 대결이었다.
이해 봄 나는 김상열을 처음 만났다. 그에게 해태명작극장 극본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극단의 소속감이 느슨하지만 옛날엔 남의 극단에 참여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나는 위다부인의 『프란다스의 개』를 써달라고 했다. 그는 즉시 응낙하였다. 이로써 그와의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원고를 가지고 다시 만난 날, 나는 극단을 같이할 생각이 없는 가고 타진하였다. 그는 극단 가교 단원이었다. 당시 가교의 활동이 부진한 편이었고 현대만큼 기회가 많은 단체도 없던 터였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며칠 있다 연락이 왔다. 해보겠다고. 그의 첫작업은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품인 이재현의 『멀고 긴 터널』연출이었다. 우리가 『프란다스의 개』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이재현의 신작 정리에 몰두했다.
해태명작극장 세 번째 공연 『프란다스의 개』15)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준비하고 있었지만 시민회관별관을 빌릴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구의동의 어린이회관 「무지개극장」을 쓰기로 하였다. 어른들의 어린이연극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부족하였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애들을 객석에 넣고 로비를 서성대기 일쑤였다. 나는 한 어머니에게 공짜로 넣어드릴 테니 무대를 한번 보십시오 했다.
"들 껄 뭘 봐요?"
"니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른들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마지못해 극장으로 들어갔다. 공연이 끝나고 애의 손을 잡고 나오는 그녀를 만났다. 아유, 고마워요, 정말 후회할 뻔했어요. 그녀는 즐겁게 소리쳤다.
9월에 제2회 대한민국연극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재현씨가 한국전쟁 때의 포로얘기를 소재로 한 『멀고 긴 터널』을 가지고 찾아왔다. 나는 언제나 시험이나 경쟁 같은 것에 자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 없이 넣었는데 심사에 들었고 열심히 연습한 것이 인정되어 대통령상까지 타게 되었다.
이해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 제1부의 공연이었다. 동양TV의 홍두표 상무가 이 계획을 듣고 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일본으로 날아갔다. 기쿠다 가즈오菊田一夫가 각색한 대본도 빌렸고 장치 조명 무대제작에 일본인들을 섭외했다. 장치에 오카다 미치야岡田道也, 아사히TV 데자이너, 조명 데자인에 다나카 쯔네오田中恒雄 일본예술대학 교수, 장치제작에 마쯔키 가쓰지松木勝次 배우좌俳優座 장치제작소 원로였다. 약 6천5백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했다. TV에서는 1분40초짜리 스파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갔다. 동양방송의 탤런트들이 대거 참여했다. 스칼렛 오하라에 유지인, 렛 벗틀러에 백일섭, 애슐리에 임동진, 멜라니에 서승희, 그리고 이순재 강부자 김길호 등 스타들이 등장했다.
문학이라는 배는 역사의 강을 타고 이성과 감성의 양안을 왔다 갔다 하며 발전하였다고 정인섭교수의 문학개론는 시작된다. 고전주의와 사실주의는 이성의 땅에, 낭만주의는 감성의 땅에 속한다. 이성은 감성에 의해 극복되고 감성은 이성으로 제어된다. 라씬느의 신고전주의는 쉴러의 낭만주의를 낳았고 입센의 사실주의는 그 뒤를 잇는다. 만약 연극이 재미와 교훈이라는 양안을 왕래하였다고 가정한다면, Horace16)는 이미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신파에서 신극으로 또는 연극에서 뮤지컬로 성쇠가 이어지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연극사를 얘기할 대목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10년대에, 일본의 신파극을 배운 임성구가 혁신단을 만들어 한국최초의 신파극을 소개하였고, 이어서 많은 신파극단이 활약을 하게 된다. 20년대에는 일본에 유학했던 박승희가 토월회를 만들어 계몽적 연극을 시작하였다. 30년대에는 극예술연구회와 동양극장이 출현하여 한국연극의 두 주류를 형성하였다. 전자는 신극을 표방하였고 후자는 재미의 연극을 추구하였다. 전자의 멤버들은 모두가 일본유학파로서 지식인들로서, 이헌구(조선일보 학예부장) 서항석(동아일보 학예부장)을 투 톱으로 하는 화려한 논객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옹호하면서 동양극장의 「눈물 연극」을 호되게 비판하였다. 「동양파」들은 극연의 연극을 「공회당 연극」이라 비아냥거리면서 자신들은 그래도 「고등 신파」를 한다고 맞섰다. 극연은 『춘향전』에서 유일하게 기염을 토했지만, 관객은 단연 「동양」에 몰렸다. 민중의 입장에서는 극연이 분명 Minority였으나 후세의 연극사에서 보는 바로는 극연을 정통으로 보고 있다. 극연은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의 고전 연극론의 집대성으로 알려진 Natya Sastra에서는 분명히 연극의 재미와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관중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글을 쓰는 「먹물」들은 언제나 이성의 편이고 재미를 추구하는 연극은 언제나 이들의 매도의 대상이 되어왔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극연의 논지가 살아 남았고, 유치진은 정통으로 인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유치진은 재미를 외면하고 의미만 찾았을까? 신협의 연극들을 어떠했을까? 내가 보기에 신협의 연극은 「상업연극」이었다. 그들에게는 전주錢主가 있었고 공연이 끝나면 「배당」을 받았다. 신협의 전성기는 50년대였고 그 시대에 어느 누구도 신협의 연극을 상업적이라 「비판」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들어와 한국의 연극계는 재편되고 있었다. 기성연극으로 인정받았던 국립극장의 두 집단--신협과 극협은 이제 Minority로 전락하고 있었고, 연극계는 새파랗게 젊은 천둥벌거숭이가 주인행세를 하려하고 있었다. 단명했던 제작극회와 그를 이은 동인 실험 민중 자유 광장--이들은 현실적으로 아마추어극단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과 함께 「아마추어 평론가」들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이제 성장할 재목들이었을 뿐, 「준비된」 연극인은 아니었다.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 연극은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가는 도정이듯이 한국의 아마추어는 프로로 가는 도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소임을 하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두현교수는 제작극회의 재건이 논의될 때마다 "작극회의 소임은 끝났다, 더 이상 연연하지 말자"라고 했다. 2001년 현재, 제작극회는 형식상으로만 존재한다. 옛날 김경옥 최창봉 차범석 오사량 조동화 노희엽 박현숙 등이 주재했던 제작극회는 60년대 중반에 해소되었다. 그들은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하던 때가 있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극단 산하가 태동되었고 그 이후의 제작극회는 안평선의 제작극회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지금 신협이 그렇고 실험이 그렇다. 민중도 이근삼 양광남 김정옥 양동군 김정실 등이 주도했던 최초의 모습은 아니고 80년대 이후 정진수에 의해 재편되었다. 광장도 이진순이 문석봉에게 인계하였을 때 이미 그 성격의 변화를 예견케 하였다. 자유만이 최초의 김정옥 이병복이 박정자 박웅 권병길 등을 이끌고 있다. 어쩌면 현재의 현대도 김의경의 색깔과는 다를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극단은 달라진다. 극단은 유기체이기 때문에 수명이 있는 법이다.
1970년대 말의 한국 연극계는 현대의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에 대해서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나는 개인적으로 관객 없는 연극을 상상할 수 없다. 관객이란 연극의 존재 가치이고, 연극인 자신의 존재 근거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Paymaster=支拂者이다.
극단 현대는 분명히 관객이 있는 연극을 지향하였다.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관객을 육성하기 위해서, 어린이극장, 청소년극장, 뮤지컬을 제작하였다. 우리의 간판 레퍼토리인 JCS는 2백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내 Idea가 아니고 최문경의 것이지만, 농,어,광촌의 청소년을 위한 이동무대, 근로청소년을 위한 공단工團방문訪問공연 등을 하여 연간 15-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1987년 8월 9일 뜨거운 여름 아침, 제1회 농,어,탄광촌의 청소년을 위한 이동무대가 떠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40평 무대는 철골로 조립하고 덧마루를 덮는 형식이다. 조명 음향 장비를 실은 대형 트럭이 3대, 봉고차, 버스, 승용차 2대에 60여명의 인원이 첫 공연지 문경을 향하였다. 무대조립을 위한 고가 사다리와 발전 차까지 준비되었다. 8월 9일부터 10월 22일까지 54회의 공연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한 일을 일개 사립극단이 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 제1부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오카다는 회전무대를 활용하여 120도로 3분할한 사실주의 장치였다. KKK단의 방화, 대포를 맞고 무너져내리는 건물더미, 불길을 헤치고 질주하는 마차 등 스펙터클이 재현되었다. 무대 상의 실수도 있었다. 모터를 장착한 분수대는 정작 세워보니 스페이스가 나지 않았다. 애써 만들었지만 공연에서는 써먹지 못했다. 마차는 등장할 때까지는 좋았으나 곧 어디엔가 걸려서 바퀴가 부서졌다. 불나는 장면은 아무래도 미흡했다. 무대기술이란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물대의 말은 일본 하도마회사 제품으로, 공수되어 왔다. 1백40만원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대중극의 가능성을 시도해본 귀중한 기회였다고 할 것이다.
나영세는 이때에 해태제과의 선전부장이 되어있었다. 어느 날 진양 아파트로 나를 찾아왔다.
"형, 내년 해태명작극장 작품을 피터 팬으로 합시다."
"엉? 생각도 못해 본 일인데."
"세종문화회관을 빌려서 크게 한번 때립시다. 우리가 2천 댈 게"
세종은 4천여석의 대극장이다. 여기서 어린이연극을 해?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피터 팬이 날아야하는데 그건 어찌한다? 우선 이반에게 극본을 의뢰했다. 세종에 교섭을 해서 겨우 사흘을 얻었다. 모 기계공작소는 세종 기계주임에게서 소개를 받았다. 그에게 비행기구의 설계를 맡겼다. 그 설계를 가지고 79년 2월 중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립극장의 무대과장 오오키大木靖을 만나 설계를 보여주었다. 설계 상으로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가부키에서 쓰는 가장 초보적인 날틀을 세심히 관찰해두었다.
개막 일주일을 앞두고 예매가 개시되었다. 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막 전에 매진사태가 왔다. 전화가 빗발쳤다. 한 아버지가 다급하게 표를 찾았다.
"표가 매진되었는데요."
"야, 이 개새끼들아, 공연을 좀 길게 하면 안 되냐? 애들한테 졸려서 못 살겠다!"
21일 밤 공연 전날. 우리들은 관행대로 밤을 새워 장치를 세웠다. 새벽 3시, 드디어 날틀이 준비되었다. 다만 볼트를 무대바닥에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Counterweight를 얹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윤복희의 40Kg이야 들어올리겠지 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몸이 가벼운 이영주를 날틀에 매어 달았다.
"자, 댕겨!... 땡기래두."
50Kg 이영주의 몸은 뜨지 않는다. 장정 서넛이 매어 달렸으나 막무가내, 꼼짝을 않는 것이다. 설계사가 입을 열었다.
"오모리[重り=Counterweight] 장치가 안 돼서 안 올라가는 겁니다."
"앗차."
과학은 엄격한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알아줄 리 없었다. 모두 힘이 빠졌다.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풀리자 우리들은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터 팬이 날지 않으면 이건 사기지."
"할 수 없어. 내가 일본 국립극장에서 본대로 초보적인 방법을 채택하는 수밖에."
「초보식」이란 Batten에 또 하나의 Batten을 달고 거기에 활차滑車=Carriage를 장치하여 좌우운동을 하게 하고, Batten을 움직여 상하운동을 하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다.
"지금 5신데, 되겠습니까, 김사장?"
"글쎄요, 가게 여는 시간이 일러야 9시거든요. 서둘러 보긴 하겠습니다만..."
"오늘 12시에 낮공연이 있습니다. 고아원 원생과 장애 아동들을 초청했거든요."
김사장은 11시가 넘어서야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때부터 설치에 들어갔다. 12시 공연시간이 되자 MBC 간부들과 이환의사장이 나타났다. 12시가 넘고, 아이들은 와글와글, 이환의사장은 옆에 앉은 나에게 다그친다.
"시작 안 합니까?"
무대와 객석을 나는 들락날락했다. 12시 30분, 설치 끝. 그러나 연습할 시간이 없다. 할 수 없다, 그냥 막을 올려라. 서곡이 울리기 시작했다. 막이 오른다. 아, 드디어 윤복희가 무대 상공에서 날아 들어온다. 아이들은 함성을 질렀다. 아, 드디어...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운동신경이 발달한 윤복희가 아니고는 연습도 없이, 겁도 없이 누가 이 역할을 해내었을까?
몸은 작지만 예쁘고 깜찍하고 욕심 많고, 어떤 때는 한없이 헌신적이고 어떤 때는 한없이 Egotistic한, 이 종잡을 수 없는 우리 보배는 그때까지의 가수생활에서 자신을 대담하게 변신하였다. 많은 사람이 현대극장이 상업근성에 젖어있다고 비난했지만, 이후 현재까지 이어진 윤복희의 활약은 현대의 공이 아닐까?
하여튼 『피터 팬』은 지금까지의 어린이연극의 한계를 깨뜨렸다.
명동시절, 나는 첫 막을 올리고는 곧 자리를 떴다. 목욕탕이나 다방으로 전전하다가 극이 끝날 때쯤에나 극장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연극을 그대로 눌러앉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새 장치를 세우고 그 북적대는 속에서 조명을 맞추고, 단 한차례의 무대연습도 없이 막을 올린 연극을 부끄럼 없이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피터 팬』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공연이었는지 모른다. 그날, 예전처럼 무대연습도 없이 막이 올라간 『피터 팬』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창단 4년차의 현대는 다시 네 번째의 청소년극장을 준비했다. 김상열 각색 연출의 『실수연발』이었다. 공연지역도 부산 대구 광주에서 청주로 확대되었다. 전속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루어냈다.
다음의 표에서 초기 청소년극장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개척이 얼마나 본격적이었던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극장 1회-7회
<제1회> 『햄릿』 1977년
|
관람인원수 |
관람학교수 |
공연장소 |
4월 |
19,259 |
24 |
서울 류관순기념관 |
11월 |
5,000 |
16 |
광주 시민회관 |
12월 |
3,600 |
11 |
대구 시민회관 |
계 |
27,859 |
51 |
|
<제2회> 『쟌 다크』 1977년
9월 |
22,647 |
27 |
서울 류관순기념관 |
<제3회> 『로미오와 쥴리엣』 1978년
4월 |
29,324 |
35 |
서울 류관순기념관 |
<제4회> 『실수연발』 1979년
6월 |
6,721 |
|
청주 시민회관 |
7월 |
32,211 |
46 |
서울 류관순기념관 |
9월 |
11,744 |
32 |
부산 시민회관 |
9월 |
4,451 |
12 |
대구 시민회관 |
|
55,127 |
99 |
|
<제5회>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1980, 81년
80/3월 |
7,629 |
17 |
대구 시민회관 |
5월 |
40,614 |
55 |
서울 류관순기념관 |
6월 |
16.291 |
36 |
부산 시민회관 |
7월 |
27,477 |
78 |
서울 류관순기념관 |
10월 |
36,428 |
92 |
서울 류관순기념관 |
11월 |
18,337 |
50 |
부산 시민회관 |
12월 |
17,118 |
45 |
서울 류관순기념관 |
81/9월 |
20,552 |
33 |
광주 전남대학교 강단 |
10월 |
8,592 |
28 |
대구 시민회관 |
|
193,038 |
434 |
|
<제6회> 『사운드 오브 뮤직』1981년
5월 |
57,610 |
145 |
서울 류관순기념관 |
6월 |
28,452 |
56 |
부산 시민회관 |
6월 |
24,869 |
62 |
대구 시민회관 |
7월 |
29,269 |
84 |
서울 류관순기념관 |
|
140,200 |
347 |
|
<제7회> 『뿌리』 1983년 태평양화학 후원
3월 |
10,204 |
37 |
|
총 제작 건수 23회 |
478,399 |
1,030개교 |
|
『실수연발』의 부산 공연을 끝냈을 때 제3회 대한민국 연극제 참가작품 『종이 연』의 개막은 불과 1주일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전 참가자들이 하루 중 10시간 이상을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상열은 이번에도 장소현의 이 작품을 「너무 많이」 개작하였다. 장소현은 미국서 날아와서 이 무대를 보았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말이 없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가을 돈의 여유가 좀 생겼다. 우리는 연습실을 원효로로 옮겼다. 근 2년동안 집과 극단이 같이 있었음으로 가족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가족은 언제나 긴장해서 살아야했고, 사생활은 완전히 유린되었다. 아들 진우는 12, 3살이었고, 딸 진영은 그의 두 살 아래다. 애들보다는 아내의 고통이 심했을 것이다. 그녀는 근 3년간이나 30여명의 젊은이들에게 점심을 해먹였다.
『종이 연』 쫑파티에서 차기공연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윤복희씨가 『수퍼스타』 얘기를 다시 꺼냈다. 표재순은 「예수전」을 합시다 했다. 그가 크리스챤이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기독교계의 반발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수퍼스타』(2000) 공연에 대해 어느 젊은 평자가 가사를 그렇게 고쳐 가지고 수퍼스타가 성립되는가고 통렬하게 꼬집은 것을 읽었다. 그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미국의 오리지널 프로덕션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기독교계의 반발」을 고려하여 「예수전」을 했다는 완곡한 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린 것처럼 보인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극히 일부를 완곡하게 번역하였을 뿐이며, 원작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작품이란, 특히 서양작품을 한국사회에 소개하는 경우, 한국식 표현을 찾아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한국적 표현」이란 언어적인 것은 물론이요 무대 상의 물리성-기계성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그는 평론가의 자격이 없다. 모름지기 평론가는 예술 창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도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그것의 가치를 끄집어내는 보다 차원 높은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 12월, 우리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미국 코넥티컷주에 있는 미국농아극단17) 초청공연이었다. 1백 만원 밑진 이 공연은 그러나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장애자들의 열띤 연기에 우리들은 감동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이러한 노력을 한 분이 계셨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고 정운(본명 鄭昌雲)씨가 농아연극을 만들어 미국공연까지 가게 된 것은 나의 충고 때문이었다.
1980년 벽두, 김상열/추송웅의 『도적들의 무도회』18)를 공연했다. 『수퍼스타』 공연 불과 달포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쉬지 않고 공연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무래도 벗어났어야 할 것이었다.
『수퍼스타』19)는 1980년 2월 22일 개막되었다. 정성조 편곡․지휘로 14인조 정성조 악단의 반주, 총 45명의 출연진이었다. 나는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 그 해는 유난히도 추웠다. 저녁 6시면 40여 출연자들이 모였고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연습에 열을 올렸다. 통행금지가 있던 때여서 그 이상 연습은 불가능했다... 개막이 박두할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표형, 이거 될까?”
“김형, 이거 히트할 거요. 두고보쇼.”
... 문제는 Band에 있었다. 정성조 밴드는 String이 전혀 없는 관악기 편성이었다. 요즘처럼 PA System이 보급되어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Stand Mic와 Suspend Mic를 놓고 우리들은 노래를 힘껏 불렀지만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빵빵 울려 퍼지는 Trombone과 Trumpet 소리는 감당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작게 불러달라고 간청해도 듣지 않자 연출자 표재순은 도끼를 찾았다. Band Man 들은 이 신나는 곡들을 작게 불려고 노력했지만, 곡에 도취되면 어느 샌가 자기도 모르게 신이 들린 듯 빵빵 불어 젖혔던 것이다.
국립극장에서 2월 22-28일까지 1주일 공연, 다시 3월 5-9일까지 닷새 공연. 이어 3월 15-17일 대구공연 때문에 우리는 서울스튜디오에서 반주 녹음을 하였는데, 이 어려운 곡들을 하루만에 녹음하였다. 12일간의 생음악 반주 경험 덕분에 녹음은 초스피드로 진행된 것이었다.
...『수퍼스타』성공의 비결은 <로이드-웨버의 다이나믹한 Rock 음악, 표재순의 치밀한 연출, 군중들의 몸을 던지는 연기>의 3박자였다. 아니, 또 하나의 요소가 있었다면 Production에 내던진 우리들의 열정이었다... 이때는 정녕 영성靈性이 우리들을 지배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영성의 문제, 결코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다. 신심信心이 아니었든들 이 공연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New York이나 London, 또는 가까운 일본에서의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뉴욕에서『수퍼스타』를 공연하는 극장을 배회조차 아니했었다. 악보도 카세트에서 채록한 것이었다. 유일한 참고서라면 『수퍼스타』의 Vocal Selections 뿐이었다. 극단 현대는 94년이래 저작료를 지불해오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Royalty는 생각도 못할 때였다. 그러니 악보를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퍼스타』초연은 본고장에서 71년, 일본에서 73년. 우리는 80년이니까, 그렇게 늦은 것이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채록한 악보만 가지고 이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해적판 공연이라고는 하지만, 놀라운 것이라 치부해도 좋을 것이다.
1981년 여름, ITI 마드리드 총회를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처음 『수퍼스타』의 런던 공연을 보았다. 81년 8월, 숭의음악당 공연 때에 나는 한 관객의 편지를 공개한 적이 있다. “당신들의 공연을 조금 우습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외국에서 『수퍼스타』를 보고서야, 한국의 『수퍼스타』는 꽤 괜찮은 공연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인색했던 공연 평가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런던의 ‘진짜’ 공연과 우리의 것은 (적어도 Staging에 있어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공연은 아니었다.
그 중에도 우리 공연의 특징은 유다와 예수의 죽음 처리에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들은 유다와 예수를 땅에 묻었다. 우리는『피터 팬』에서의 경험을 살려, 유다는 교수형에 처하고 예수는 승천하게 했다. 예수가 Pink와 Violet 조명을 받으며 승천하는 장면은 한국 JCS의 압권이었다..."20)
때는 해빙의 봄, 3K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것은 아주 해방감에 찬 찰나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67년 5월 말, 내가 미국을 처음 가서, 밤 12시가 가까운 시각에 차를 몰고 카네이션 아이스크림 집을 찾아갔을 때의 흐느적한 느낌, 여름의 후텁지근함이 오히려 상큼한 서릿길보다 행복하였던 기억... 그때, 그러면서, 나는 소주 두어 잔을 급히 목구멍에 털어 넣고 아슬아슬한 총알택시에 올라타는 때의 긴장감을 기억해냈었다. 12시란 그런 시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LA의 밤거리는 마냥 느렸다-- 말하자면 해빙의 봄이란, 잠시였지만, 그러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그런 시대에 걸맞지 않게 우리는 「총알택시에 올라타는」 모험에 다시 도전하고 있었다.
JCS는 앞의 도표에서 보듯이 143회 288,968명을 동원하였다(일반관객 95,930명, 학생관객 193,038명). 학생관객이 일반관객의 2배를 차지하고 있다.
이해 4월에 우리는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 제2부21)를 예정하고 있었다.
<2001년 공연문화저널 1호에 실린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