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취재 / 무너지는 아가동산 위에 신축되는 이교부의 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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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춤, 삭발교, 공산주의자, 사이비종교, 폭행사건 등으로 70년대 후반 뉴스메이커였던 이교부 씨(58). 그는 최근 아가동산 사건을 계기로 15년만의 침묵을 깨고 자신의 나라를 부흥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씨는 96년 1월 7일 현재의 '주현교부'라는 신흥종교단체를 설립, "예수는 필요 없다"는 등 반기독교적 사상을 설파하며 4백여 명의 신도들과 함께 세를 불리고 있다. 이곳에는 이씨로 인해 면직당한 전직 목사를 비롯, 현직 목회자까지 관련되어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이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교부 나라'의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현교부를 세운지 만 1년만에 4백여 명의 신도들이 이씨를 찾아온 것이다. 이씨가 아가동산 사건을 계기로 부지런히 움직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자신 알리기'와 '아가동산 부수기'이다. 두 가지 이유 모두가 이씨에게는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 것이다. "날좀 보소" 15년간의 칩거를 통해 이씨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씨는 '때가 되면 다시 모이자'는 막연한 기대만을 제시한 채 김기순 씨를 따라 아가동산에 들어가는 신도들과 또한 제 갈 길 알아서 가는 신도들을 쳐다만 볼 수밖에 없었다. 폭행사건으로 출옥한 81년 4월. 뒤숭숭한 나라 분위기에 나체춤, 공산주의자 등의 꼬리표가 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이씨의 재기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난해 1월 7일, 그 동안 연락이 끊이지 않았던 일부 신도들을 모아 일단 '주현교부'라는 간판부터 달았다. 더이상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단체 설립과 동시에 '탈기독교' 선언도 했다. 어느 종교 단체, 특히 기독교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18년전 '이단'이라는 소리 때문에 14년간의 살붙이였던 아내와 이혼하게 됐던, 그런 쓰라린 아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다. 이러한 가운데 아가동산 사건은 이씨에게 호재였다. 이씨는 이 기회를 행여 놓칠세라 이 사건수사가 본격중이던 구랍 15일, "무엇이라고 써도 좋으니 내 이름만 나가게 해주시오"라는 심정으로 보도자료까지 언론에 배포하는 등 기민하게 움직였다. 2주 뒤에는, 특히 여신도와 함께 나체춤을 추었다는 항간의 비판에 대한 변증서격인 '이교부의 증언'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씨의 노력은 일간지와 TV뉴스에 자신의 이름이 수 차례 오르게 하는 성과(?)를 올리게 했다. 주현교부 집무실에서 이씨는 기자에게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변증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아가동산 건으로 배포한 보도자료 중 대부분의 지면도 '변증'에 할애된 것이었다. 그중 나체춤 사건에 대한 해명은 이씨가 특별히 신경쓴 부분이다. "나체로 춤은 안추었다" 나체춤과 관련, 이씨는 "나체로 춤을 춘 적이 없다"며 사건 자체를 부인했다. 불쌍한 한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옷을 벗었을 뿐이라는 것으로 춤을 추었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주장이었다(자료1 참조). "저는 그 여자가 누구에게 강탈을 당했던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저를 너무 깨끗하게 보았는지, 예수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여자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 여자가 딱해 보였습니다. 저마저 그 여자를 모른 체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저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었습니다". 이씨는 지금이라도 자신의 나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라며 지난날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이씨의 나체춤 변증은 세간에 알려진 내용과는 상당 부분 차이가 있었다. 추종 신도들은 이씨의 해명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삭발교, 폭행사건 등의 변증에 이르자 이씨는 '억울하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내용이 상당히 와전됐다는 것이다. 79년 당시의 폭행사건은 "3차 구타는 예배 도중에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한 명씩 교인을 향하여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세워 놓고 교주가 몽둥이로 머리, 가슴, 어깨, 둔부를 난타하여 실신한 채 밖으로 내쫓겼다"는 내용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씨는 자신을 따르던 목사 8명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장작으로 몇 차례 때린 것일 뿐 폭행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금욕주의적 생활의 방편으로 일부 신도들과 함께 머리를 깍고 다녔던 것이 자신의 단체를 '삭발교'로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아가동산 사건에 대해 "나에게 책임이 있다"며 역설적인 변증을 하고 나섰다. 교주 김기순 씨가 자신의 추종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도 쟁탈전으로 김씨와 등을 돌린 바 있는 이씨가 스스로 아가동산 사건 관련자로 나선 것은 오로지 김씨 수하에 있는 신도들 때문이었다. 즉, 김씨의 신도들을 다시 자신의 사람으로 회유해보자는 취지였는데 '신도 모으기'에는 '아가동산 부수기'가 선행되어야 함을 직감한 것이다.
사실 아가동산의 실체가 사건화 되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이씨는 아가동산 부수기를 위해 치밀한 수순을 밟았다. 먼저 주현교부 설립 후 자신의 설교 테이프를 아가동산 내부에 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존재 확인을 겸한 아가동산 부수기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후 이씨는 한두 차례 경기도 이천 소재의 아가동산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씨의 이같은 노력 때문인지 아가동산을 탈출한 신도 몇 명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비리를 이씨에게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굴러온 것이다. 이씨는 탄원서 작성, 변호사 선임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들을 도왔다. 그리고 아가동산 사건은 끝내 터졌다. 아가동산은 와해직전 상태로 몰렸다. 그리고 '아가야'로 불리워진 김기순 씨는 아가동산을 나오게 됐던 것이다. 상당수의 신도들도 이탈했다. 그중 40여 명이 최근 이씨를 찾아왔다. 이씨를 찾는 이탈 신도들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김씨가 이씨를 추종했다는 것은 최근 사실로 드러났다. 이씨와 김씨와의 관계는 79년 폭행 사건으로 인해 이씨가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것을 계기로 급속히 식어갔다. 이교부 씨가 교도소 안에 있는 동안 김씨는 급기야 이씨의 추종자들을 빼내 '딴살림'을 차리기에 이른 것이다. 김씨의 딴살림은 아가동산을 세우는 데까지 불었다. 김씨는 아가동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신도들에게 "이교부의 영이 내게 임했다", "이교부의 말을 믿는 자는 육에 거한 자이고, 내 말을 듣는 자는 영에 거한 자이다"는 등의 말을 수시로 했다. 신도들이 원래는 이교부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인 점을 감안, 신도들과 이씨와의 '끈'을 끊으려 한 전략차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신도들이 이씨의 존재를 항상 인식하게 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재창립 1년만에 '이교부의 나라'는 점점 부흥되고 있다. 초기에는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탈기독교를 선언한 후 '교부'라는 자신의 이름자를 사용해 '주현교부'라는 단체명을 달았다. 신도들은 '교부님'으로 이씨를 호칭하고 있다. 상당수의 신도들은 단체 주변 지역에 모여 살고 있고, 약 20명의 신도들은 아예 단체 내에서 숙식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매주일 10시 30분에는 정기 집회가 열리고, 이때 이들은 자신들만의 찬송가, 즉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의 곡 중 일부를 임의로 취해 편집한 찬송가를 사용한다. 이씨는 반기독교주의와 도덕주의라는 두 가지로 자신의 사상을 재정립, 매주일 설교 시간을 통해 설파하고 있다. 이씨의 반기독교 사상은 그가 기독교를 정의한 데서 잘 드러나 있다. 이씨는 기독교의 존재 목적을 '부자 되고 병낫고 죽어 천당 가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라고 하는 것'으로 판단,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는 자신의 희생이 아니라 남을 누르고 천당만 가려고 한다. 그런 예수는 필요 없다"며 오히려 참 종교는 이씨 자신을 믿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다(자료3 참조). 심지어 이씨는 '결의'라는 자신의 글에서 "인류(사람)를 보이는 하나님으로 받든다"고까지 천명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씨의 추종자 중 전직 목사였던 박종희 씨와 이상용 씨가 '착하게 살기 위해 기독교를 버린' 대표적인 경우이다. 박종희 씨는 "세상을 초월한 상태로 내 인격이 바로 되어야 하는데 그 일을 위해서 애를 써왔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었다"며 그러나 이씨를 만난 후엔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신앙과 삶의 불일치로 불안했던 마음이 이씨를 통해 기독교를 버림으로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채윤 목사(59, 낙안읍성교회)는 현직 목회자이지만, 이교부 씨에게 영향받은 정도는 위의 두 전직 목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창기부터 이씨를 알아왔다는 장목사는 이교부 씨 인터뷰에 동석한 자리에서 이씨의 반기독교적인 발언이 있을 때마다 "그 부분은 잘 이해해야 한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씨의 사상에 절대 이단성이 없음을 이씨를 대신해서 설득하려 한 것이다. 이씨의 나체춤 사건에 대해, 그는 "예수사랑의 정신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말하는 등 이씨를 향한 맹종의 믿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현재 이 집단 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신도들 상당수는 특별한 직업이 없다. 이씨를 통해서만 이 땅에 평화가 온다는 박용한 씨(31), 이씨의 뜻을 따라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는 염수암 씨(42), 이씨의 설교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김현조 씨(30) 등 기자가 만난 신도들은 한결같이 비전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듯했다. 이들에게 이씨는 '선구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씨는 이들과 함께 '이교부의 나라'를 세우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씨는 자신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며 조선족들이 보내온 편지를 들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진출에 성공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는 일본, 캐나다 등지에 흩어진 신도들에게도 연락을 취할 계획이다. 아직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가동산 신도들을 향한 마음도 간절하다. 이씨에게는 한 나라(?)의 수장인양 만감이 교차되는 요즈음이다.
저는 심리학 공부는 못했으나 그 여자가 왜 그러는지를 알았습니다. 옷이 마치 뱀같이 생각된 것 같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더럽고 추한 것 같아 보이기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치는 것이 뱀같이 생각된 모양입니다. 어떠한 사연으로 폭행과 실망을 당하다보니 마음에 항상 이 땅을 증오하였고 의로운 사람이 이 땅에 어디 없나 하고 찾아다니다가 저의 설교와 행하는 것을 와서 본 그 여자는 제가 마치 하나님, 의인, 구세주로 보여서 저에게 그렇게 하였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도 과거 어려서, 이 세상을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가고 싶었던 때가 있었기에 그 여자의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너무나 죽음과 같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얼마동안 망설이면서 내가 벗고 인도하면 나를 참으로 구세주로 믿고 그후에는 내 말을 들을 것이나 그렇지 않고 나마저 구경하고 있으면 그 누구도 그 여자를 인도하지 못하고 그는 물속이나 불속에 또는 고층에 올라가 반드시 죽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지식은, 가지기도 어려운 일이나 그렇게 행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입니다. 말과 행위가 그렇게 차이가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내 자신이 오히려 더러웠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고 위선자라고 했었는데 오히려 내 자신이 위선자였습니다. 용기를 내어 옷을 벗고 "자매여 이리 오시오. 나는 자매를 잘 아는 자입니다." 했더니 그러게 울고 소리치던 여자가 나에게 와서 안기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와 오래 떨어져 있다가 만나 품에 안기듯이 했습니다. 그 여자는 "주님 저는 다시는 안떠나고 같이 살고 죽으며, 천당까지 같이 가요. 약속해요." 했습니다. <자료2> 아가동산에서 탈출한 노인숙(가명) 씨의 증언 이때부터 김기순 씨는 이교부 씨가 아가동산에 올 것이라는 메시지에서 그의 영이 자신에게 임했다, 즉 이교부 씨는 육신이 오는 것이 아니고, 영이 온다는 것으로 신도들을 설득했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육에 거하고 영에 속한 자는 영에 거한다'는 말을 들어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그 말의 뜻을 못알아듣는다며, 자신이 영으로 해석한다며 이교부 씨의 말을 그대로 믿는 자는 육에 거한 자이고 자신이 해석한 것을 듣는 자는 영에 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가동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곳에 계속 있었다면 새로운 나라를 이루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 참고 기다리는 신앙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김기순 씨는 자신이 만왕의 왕, 사랑의 대상자, 자신하고만 1:1로 사랑을 해야만 그 나라에서 인격이 이루어진다고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자료 3> 이씨의 탈기독교 선언 이유 <자료4> 이씨가 밝힌 자신의 사상 제가 말하는 하나님은 태초에 조상으로부터 영원히 태어날 인류와 정신, 사상, 이념이라고 하겠으며, 천당은 죽어서 간다는 천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정의와 평화, 평등, 만민이 마음 속에서 똑같이 추구하고 원하는 사회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인, 신도라는 말을 부모, 형제, 자매, 가족이라고 또는 우리라고 부를 것입니다. 모든 종교, 사상, 법을 만들 때는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평화 통일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기 위함인데 결국은 그 법과 교리에 매어서 맹신이 되어 자유보다 종이 된 것이며 조금만 다르면 이단시하고 다투고 싸우며 죽이고 원수가 되어 당파만 분열된 것입니다. 어느 교리, 사상, 지식이 옳다고 하기 전에 말과 행동이 같으며 정의를 행함으로 모든 사람이 믿고 따르고, 자원함으로 동참하며 동조하게 될 때만이 옳은 진리, 사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월간<교회와신앙> 97년 2월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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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02월 0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