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폐위에 항거한 송보산(宋寶山)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의 백성은 요순때와 같은 백성이 되나 요순때와 같은 백성이라
도 걸주(桀紂)와 같은 임금이 다스리면 요순때와 같은 건량한 백성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세종대왕의 총애 밑에서 충성을 다하여 보필하였으나 성군 세종의 승하와 문종의 2년 간의 짧은 지비정에 이어 단종대왕의 축출로 인한 간사한 무리들의 득세는 한문의 정통을 체득한 선비로서는 차마 견뎌
내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사육신(死六臣)은 생명을 버리면서 항거하였으나 생육신(生六臣)은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다.
세조(世祖 : 광능은 세조의 능)에 권세 있는 간사한 무리가 정권을 잡아 악독한 행동을 자행하여 세상의
일이 날마다 그릇됨을 보고 우울하여 고향의 집으로 돌아왔다.
(광능조 권간병정 자행악독견시사일비 울울귀향노 : 光陵朝 權奸秉政 恣行惡毒見視事日非 鬱鬱歸鄕盧)
이 글은 박성양(朴性陽)선생이 지은 퇴휴재 선생의 신도비 기문(記文)에서 옮겼다.
선생께서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등극에 반대하고 단종대왕(端宗大王)의 폐위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장수땅으로 돌아 왔으니 비록 사절(死節)하지는 못하였으나 생육신의 행적에 비겨 부족함이 없다.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지조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권세에 아부하고 벼슬이나 돈에 팔려 아부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을 때 퇴휴재 선생의 지조와 정신을 높이 우러러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선생의 휘는 보산(寶山)이며 자는 대인(大仁), 관향은 연안(延安)이며 퇴휴재(退休齊)는 아호(雅號)
이다.
고려국 동덕 좌명공신(同德 佐命功臣)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휘경(卿)의 고손(高孫)이며 이의판서
(吏議判書) 휘훈(勛)의 증손이 되는데 문과에 등과하고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원주목사(原州牧使)에
부임하여 홍건적(紅巾賊)과 싸우다가 순절한 휘 광언(光彦)은 조부가 되고 화령부윤(和寧府尹)의
벼슬에 있던 휘 흥도(興道)가 선생의 부친이다.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였으며 1402년(태종 2년) 2월 3일 출생하였는데 선생은 낳을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의용이 웅장하였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께서 사사하여 정통학문의 진수를 터득하였다.
선생은 특히 춘추의 제자백가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달통하였으니 세상에 이르기를 송춘추(宋春秋)라
하였다. 송춘추라 함은 춘추사기와 제자백가의 학문에 해박한 석학이라는 뜻으로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는 별명인 것이나 점필재 선생의 문화에서 수학하면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선생과
일두(一 ) 정영창(鄭汝昌)선생과 정이가 돋독하였으며 두 선생도 선생의 박식한 학문과 명확한 이론에
심히 경복하였다.
1428년(세종 10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의 영예를 차지하고 1429년에 문과별시(文科別試)에 合格
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보직됨으로써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병조(兵曹) 예조(禮曹)
의 정랑(正郞)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 교리
(校理) 등을 거쳤으며 1438년(세종 20년)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가 1449년(세종 31년)에 예조판서
(禮曹判書)에 발탁되었다. 1456년 세조의 등극과 동시에 사표를 던지고 장수현 임남면 침령에 새터를
잡아 낙향하였으며 동조에서 이조판서의 벼슬에 있다가 먼저 장수에 돌아온 동서(同壻)인 손재(遜齊) 김남택(金南澤)과 한 마을에 살면서 시문과 풍류로 생을 즐겼다.
<꽃이 필 때나 단풍이 물드는 가을을 당할 때마다 두서넛 벗들과 같이 맑은 물 높은 산 사이를 노닐면서
산의 고요함과 물의 흐름의 인자함과 슬기로운 참다운 취미를 즐겼다.
: 每値花辰楓秋 伴二三友朋 逍遙於泓 之間 以樂山靜水動 仁智之眞趣> 하였으니 산수가 수려한 장수 땅
에 들어온 두판서는 진실로 요산 요수(樂山樂水)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던 것이다.
두판서는 모두가 정신재(靜愼齊) 백장(白莊) 선생의 손녀서(孫女壻)로 판서를 지낸 백형옥(白刑玉)의
사위가 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백씨 부인들의 권유도 있었을 뿐 아니라 정신재 백장선생의 유덕을
흠모하는데 더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이 교리(校理) 재직시 올린 상소문의 일부를 보면 선생의 치국제세(治國濟世)하던 경윤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以爲人心者 國家之元氣 敎化 養之氣之具也 不任賢者則敎化不行 不去苛斂
則人心不安 失人心以而得天下 蔑敎化而求治平 非臣文敢知也
인심이라 하는 것은 국가의 원기요 교화는 원기를 기르는데 필요한 바이니 어진 재사에게 맡기지
않으면 교화를 행하지 못하고 조세를 혹독하게 거두는 것을 없애지 않으면 인심이 불안하니 민심을
잃고서 천하를 얻음과 교화를 엄수히 여기고 평안하게 다스려짐을 구하는 것은 신은 감히 알지 못하
는 바입니다.
그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호족들과 강한 자를 물리치고(黜豪族) 혹독한 추렴을 없애고(除暴斂) 가르침을 밝게하고(明敎化) 규율
과 법을 떨치고(振紀綱) 옥사와 송사를 공평히 하고(平獄訟) 말을 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開言路) 등등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를 덜어 주고 국가의 터전을 반석위에 세울 수 있는 수천마디의 주옥같은 경륜이
담겨져 있다.
天下之事 不進則退 國家之事 不治則亂 進退治亂 固有基數而其所以進退治
亂者實由於人 故人君當審其治亂之機 勉其所以治 去其所以亂 期於必治而復己
不可安以 小成局於常規 悠乏度日 任其成敗也
천하의 일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과 같고 국가의 일은 다스리지 않은 즉 어지러우나 나아가고
물러나고 다스리고 어지러움이 진실로 그 헤아림에 있음으로 그 진퇴 치란하는 것이 실로 사람에 연유
하는 바라. 마땅히 그 치란이 기회를 살펴 그 다스리는 바에 힘쓰고 그 어지러운 바를 없애어 반드시
다스린 후를 기다려 그치고 적은 것을 이룸에 안심하는 것은 불가하니 항시 쓰는 법에 굽히어 오랫동안
세월을 보내고 그 성패를 맡기는 것이니라.
선생의 충성심과 백성들의 피해를 덜어 주려는 충정은 지극하였으며 세종대왕의 인정을 받아 예조판서
에까지 등용되었으나 선생의 탁월한 경륜을 발휘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짧았다.
세종대왕의 서거와 문종대왕의 단명은 선생으로 하여금 실의에 빠지게 하였으며 선생을 산수에 은둔하게 하는 마음을 굳히게 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천하의 수재 뢰계 유호인(兪好仁)이 선생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생의 소개를 받아 점필재
선생의 문하로 옮겨 성리학과 문장(文章)에 대한 탐구에 전력을 다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은 장수에 들어와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도학과 춘추 백가의 학문을 전수시켰음으로 세상선비
의 추앙을 받았다.
장수 선비들의 발의로 월강사(月岡祠)에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1484년(성종 15년) 10월 2일 장수군 임남면 침령에서 별세하셨다.
진안 구산사 근처에 신도비를 세우고 박성양(朴性陽)선생이 비명을 골랐으니 지금까지도 선생의 학문과
덕망 지조에 대하여 엄숙히 머리숙여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백과사전(전주한옥마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