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향 소개
진 례 :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보면 무안현 진례면 이라 불리었다.
◎금송리 금산(錦山)
마을 앞에 고인돌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마을의 정착년대가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씨가 살았다는 말만 전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500여 년 전에 전주최씨가 정착하였으며, 이어 광산김씨 자분(自芬)의 손자인 혼(混 1470~1534)이 1500년대에 학교면 월산리에서 이주 정착하였고 150여 년 전에 나주김씨, 130년 전에 무안박씨 그리고 80여 년 전에는 김해김씨가 정착하여 여러 성씨가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속금산이라는 마을 뒷산의 명칭을 따서 마을 이름을 "금산(錦山)"이라고 하였다고 하며(1789년 호구총수 지명 束錦山) 속금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를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하다. 속금산은 원래 용금산이라 했는데 그 이름처럼 금광이 많이 있다.
◎ 금송리 향동(香洞)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제주양씨가 최초로 입촌하였다고 하나 정확히는 알 수 없고 양씨가 신안군 지도면으로 이거한 후 전주최씨가 250여 년 전에 입촌하였으며 150여 년 전에는 압해정씨와 이천서씨가 무안군 몽탄에서 이거 정착했고 지금은 영성정씨가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학교남초등학교가 위치하여 영재교육에 일익을 담당했었다.
약 400여 년 전 제주양씨가 입촌하여 옆 마을인 금산(錦山)보다 위쪽에 위치한다 하여 "상동(上洞)"이라 불렀는데 그 후손이 거부장자로 살았다 하여 지금도 "장자터"라 부르기도 한다. 그 후 전주최씨가 입촌하면서 기념으로 심은 향나무가 잘 자랐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향동(香洞)"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 금송리 방우동(放牛洞)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하동정씨 정두경이 입촌하여 촌을 형성하였고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살고 있으며 마을의 뒷산 형태가 고삐풀린 소가 풀을 뜯는 모습이라 해서 마을이름을 "방우동(放牛洞)"이라고 하였다 한다.
◎ 금송리 반송(盤松)
이 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보면 반송정(盤松亭)으로 되어 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의 지명은 反谷과 反松 두 마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한자(漢字) 표기도 다르다. 지금은 후동, 반곡, 반송을 합해 옛날과 같이 반송(盤松)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맨 먼저 고령신(申)씨 냉(冷)이 1526년경(냉은 1506년생)에 입촌했으며 이어 금성나씨 창서(昌緖 1568년생)가 1590년경에 입촌했고 이어 인평대군(麟坪大君) 준(濬)의 후손인 전주리씨 무림(茂林)이 1650년경 귀양왔다가 정착하여 그 후손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마을 이름을 반송(盤松)이라 정한 전설은, 마을이 생긴 얼마 후 한 대사가 지나며 마을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하자 조그만 연못가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음을 보고 연못이 소반처럼 생겼으니 "반송(盤松)"이라 하라 했다고 한다. 연못은 지금 방앗간이 들어서 있는 자리다.
◈ 월호리 망월동(望月洞)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동복오씨가 입향하였고 이어 무안박씨와 남원양씨가 입향하였다 하며 지금은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마을 어귀로부터 마을 안에 이르기까지 당산나무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당사골(堂祠谷)"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흉년과 가뭄으로 비 오기만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이 마을 옆에 있는 월출봉(月出峰)에 올라가 옛 이야기를 나누며 하늘을 쳐다보고 천문을 연구하며 천기를 점치기도 하고 장마와 가뭄을 이야기 하면서 달뜨는 시간을 기다렸다 하여 "망월동(望月洞)"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일설에는 마을 옆 월출봉에서 달을 관찰하여 풍년과 흉년, 가뭄과 비올 때를 알아냈다 하여 "망월동(望月洞)"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기도 한다.
◈ 월호리 배야(背野)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전주이씨(全州李氏) 응주가 입촌하여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주이씨는 없다. 그 후 무안박씨(務安朴氏)와 상산김씨(商山金氏)가 입촌하였으며 이곳에는 옛 진례면의 경찰주재소, 면사무소와 관사, 그리고 시장(市場)이 있었다.
금송평야(錦松平野)에 등져있는 평야(平野)라는 뜻이 담겨져 있어 마을이름을 배야(背野)라고 했다고도 하나 그보다는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영산강 중류를 고려 때는 곡강이라 불렀는데 그 까닭은 물이 지세에 등져 흐르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곡강의 배류지가 바로 마을 앞이며 배류지를 끼고 있는 평야라는 뜻으로 마을 앞의 평야를 배야(背野)라 했고 마을 이름도 배야(背野)라고 하였다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 월호리 기동(基洞)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추계추씨가 들어왔다고 하나 현재 그 후손은 1호도 없으며 그 후 나주김씨와 이천서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하며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옛날에 어떤 도사가 마을 앞을 지나가면서 사방이 조그만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 마을 터로서는 아주 좋은 터라고 하였다 하여 마을명을 "기동(基洞)"이라고 하였다 한다. 옛날에는 영산강과 접해있는 마을이라 하여 임강촌(臨江村 1789년 호구총수지명)이라 했다.
◈ 월호리 용호(龍湖)
고인돌 등의 문화유적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나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고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남원양씨가 무오사화 때 경기도 시흥군 부곡면에서 망월동(望月洞)이란 마을에 은신을 목적으로 왔다가 자손들이 번창하자 용호(龍湖)마을로 이주하여 남원양씨촌을 형성하였으며 현재도 이 마을은 몇 호를 제외하고는 남원양씨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망월동(望月洞)이란 마을에서 새로운 터로 이주하였다 하여 한때는 마을 이름을 신기(新基 1789년 호구총수지명)라 했다가 앞산(고문산) 및 영산강 줄기인 호수에서 용이 살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용호(龍湖)"라고 하였다 한다.
용호는 속금산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이 마을에서 강 건너 동남쪽으로 보이는 곳이 나주군 공산면 덕음 광산이고 남서쪽은 고문산이며 강 안쪽 함평땅은 옥수봉이다. 이처럼 사방이 산으로 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어서 영산강 하구언 공사 이전에는 영산강이 범람하면 이곳은 마치 호수를 방불케 하며 가물면 강물이 바닷물처럼 짰었다고 한다. 현재는 민물이 되었다.
◇ 석정리 원석정(元石亭)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순흥안씨가 최초로 입향했다고 하나 지금은 1호도 없고, 후에 전주리씨가 조선시대 때 피난 와 은신처로 삼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전주리씨촌을 이루었으나 약 80여 년 전부터는 여러 성씨가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본래 목포부 진례면의 지역으로서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석정(石井)으로 표기했으나 마을에 석산정(石山亭)이 있었으므로 "석정" 또는 "똘쟁이"라 하였는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부터 여기 마을명을 "석정(石亭)"이라고 하였고 학교면에 편입되었다.
◇ 석정리 화지(花枝)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순흥안씨가 입향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1호도 없으며 그 후 제주양씨가 입향하여 현재는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 주변에 화심(花心)이란 명당혈(明堂穴)이 있었는데 좌청룡(左靑龍)은 당상골, 우백호(右白虎)는 동백골이라 하여 동백꽃과 무성한 당산가지를 연관시킨데서 "화지(花枝)"라는 촌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1914년 이전에는 목포부 진례면에 속했었다.
◇ 석정리 건지(乾枝)
지금부터 200여 년 전이 되지 않을 때 이천서씨가 입향하여 이천서씨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50년 전부터 여러 성씨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옛날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물이 고갈된 관계로 땅이 메말라져서 심어져 있던 나무의 가지까지도 메말랐으며 모든 작물이 잘 되지를 않고 메말라 죽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지(乾枝)"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이전까지는 목포부 진례면에 속했었다.
◇ 석정리 흥룡(興龍)
이 마을에는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인동장씨가 입향하였는데 마을 뒤로 2개의 산봉우리가 만나고 있어 풍수지리상 겨울 북풍을 막고 남향이므로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것이 마을형성의 출발이었으며 30년 전까지만 해도 인동장씨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지금은 기타 성씨도 함께 살고 있다.
약 350여 년 전 인동장씨가 입촌했고 마을 좌우측 산과 마을 뒤쪽으로 산이 마을을 싸고 있어 마을 입구에서 보면 용(龍)이 도사리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마을이 흥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마을명을 "흥룡(興龍)"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보면 무안현 진례면 동림(東林)은 나오나 흥용은 없어 당시에는 동림마을으로 부른 것 같다.
현재 이웃마을인 동림 마을의 림(林)자를 붙여 흥림으로 부르기도 하여 위에 언급한 바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 석정리 동림(東林)
이 마을은 300여 년 전 장흥고씨가 입향하였는데 지금도 장흥 고씨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기타 성씨가 모여 살아가고 있다.
옛날에 어떤 도사 한분이 영산강 줄기에 위치한 석관정이라는 곳에 나타나 사방을 둘러보고 현재의 이 마을에 도착하여 보니 석관정에서 본 바와 같이 동쪽의 나무와 터가 나무랄 데 없이 좋다 하여 "동림(東林)"이란 글자를 새겨놓은 후 배를 타고 사라진 다음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그리하여 도사가 새겨놓은 글자가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석관정에서 보아 동쪽에 위치한 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마을명을 "동림(東林)"이라고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는 목포부 진례면에 속했던 마을이다.
자료출처 : http://www.hampyeong.jeonnam.kr/hakyo (학교면사무소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