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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1리 |
[강산(江山)] |
강산리는 한때 장흥군 웅치면의 지역으로 기(箕 : 겨) 재밑이 되므로 강산(糠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암리, 채석리, 중선리, 강산리 등 4개 마을을 병합하여 웅치면 강산리라 하였다. |
강산마을은 1489년경 광산김(光山金)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던중 1503년 경주최(慶州崔)씨와 진주정(晋州鄭)시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대부분 진주정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뒷산의 생김새가 키 모양으로 생겨서 키산이라 불렀고 키질을 하면 겨가 쌓인다 해서 강산(糠山)이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마을 앞에 냇물이 흐른다고 해서 강(糠)을 강(江)으로 한글자만 바꿔 강산(江山)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
[신기(新基) ] |
신기 마을은 1605년경 강산마을에서 살던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후 진주정씨(晋州鄭)씨와 하동정(河東鄭)씨가 들어와 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새로 터를 잡았다고 해서 새터(新基)라 불리우고 있다. |
[내곡(內谷) ] |
내곡 마을은 1490년경 김해김(金海金)씨가 입향하여 15세대가 부락을 형성하였다가 떠나고 지금은 3세대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이 있어 내곡(內谷)이라 했다 한다. |
강산2리 |
[구암(九岩) ] |
구암 마을은 1649년경 청주한(淸州韓)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후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들의 이름이 구와등(龜臥登)인데 이곳에 큰바위가 있어 구암(九岩)이라 부르다가 1755년경, 풍수지리설에 능한 마을 노인에 의해 마을형국이 비둘기 같이 생겼다 해서 한자의 ‘구’를 ‘鳩’로 바꾸었는데 1945년경 또 다시 마을 가운데 큰바위가 9개가 있다 해서 ‘鳩’를 ‘九’로 바꾸어 구암이라 부르고 있어 같은 지명이 3번이나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
[연향(蓮香) ] |
연향 마을은 1650년경 함(咸)씨가 들어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는데 그후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에 작은 방죽이 하나 있는데 해마다 연꽃이 피어 그 향기가 다른 어떤 꽃보다 독특하여 연향(蓮香)이라 불렀다 한다 |
[장변(場邊) ] |
장변 마을은 광복후인 1946년경 이곳에 5일시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평산신(平山申)씨를 비롯한 2세대가 맨 처음 정주(定住)했다 한다. |
마을의 지명은 면소재지에서 약 2km 떨어진 북쪽인데 옥암과 대야의 중간 지점을 선택하여 시장(市長)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후 1967년경까지는 반나절 장으로 유지하다가 1968년부터 교통의 발달로 생활권이 보성5일시장으로 바귀어 짐에 따라 폐쇄되고 경제권의 이동과 함께 한사람 두사람 떠라버려 작은 마을이 되고 말았으며 지금은 곰재(龍峙) 장터의 향수만 쓸쓸히 남아있다. 시장가(場邊)에 위치한 것을 한자음 그대로 빌어 쓴 것이다. |
강산3리 |
[채석(採石) ] |
채석 마을은 고려초에 장흥마(長興馬)씨가 입향하여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하며 웃돔(上村) 아래돔(下村)으로 불리우고 있다. |
그후 마씨는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본래 지명은 서북방 800m쯤 산기슭에 마장자(馬長者)가 있어서 마리(馬里)했으나 1914년경에 일본인들이 돌이 하도 많아 돌 치우기에 고개를 저을 정도여서 채석(採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성봉(聖鳳) ] |
성봉 마을은 1914년경 일본인 전갑(田甲)이라는 사람이 황무지를 개가하여 단감 나무를 심고 살았는데 1956년도에 월남한 피난민 25세대가 입향하여 이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풍수설에 의하면 거북이 4마리의 모양리라 해서 사거북(사계비)이라 하였으나 1956년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마을명을 성봉이라 불렀는데 마을사람 모두가 피난와서 정착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당시 마을사람들은 밝고 예쁜 마을이 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한다. |
[토동(土洞) ] |
토동마을은 제암산을 뒤로하여 그 산자락에 형성된 조선말엽 동학란을 피해온 성명미상의 선비가 은거하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다. |
마을의 지명은 임진왜란, 동학란, 갑오경장 3ㆍ1운동 등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선비들이 피난해와 숨어살면서 서재(書堂)을 차려 마을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살았다 하여 서재동(書齋洞) 또는 사동(士洞)이라 불리웠으나 일침시대에 왜인들이 선비사(士)자의 아래획을 일부러 길게 그어 흙토(土)자를 만들어 표기한 이래 토동(土洞)이 되고 말았다. |
강산4리 |
[중선(重船) ] |
중선마을은 1530년경 연월엄씨와 평산신(平山申)씨 전주이(全州李)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으나 그후 김해김(金海金)씨와 하동정(河東鄭)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
마을의 지명은 1530년경 한 도사가 지나면서 마을 주산의 흐름을 보고 과연 힘 있는 큰배의 형국이라 마을 앞들에 짐대를 세워달면 자손만대에 부(富)를 누린다 하므로 그때부터 정월 대보름 날이면 온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해서 배의 돛대대신 짐대를 만들어 마을 중상에 세우고 풍년제를 지냈다 한다. 중선(重船)이란 ‘크고 무거운 배’라는 뜻으로 마을의 형국이 풍수지리설에 이와 같다하여 한자를 빌어 표기했다. |
중산1리 |
[중흥(中興) ] |
중산리는 한때 장흥군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분지형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증흥(中興)이라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흥(中興)과 약산(藥山) 2개 마을을 병합하여 중산리라 하였다. |
중흥마을은 1800년경 죽산안(竹山安)씨와 보성선(寶城宣)씨가 입향하여 부락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촌, 중촌, 화촌, 서촌 4개리로 분류하였으나 지금은 중흥(中興)마을로 통합하여 소재지 마을로 형성되고 있다. |
중산2리 |
[약산(藥山) ] |
약산마을은 15300년경 밀양박(密陽朴)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그후 보성선(寶城宣)씨 김해김(金海金)씨와 기타 여러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이 평탄하여 평장(平莊)이라 하였으나 주민들에게 변고가 많아서 1565년경 전라감사가 약산(藥山)이라 개칭하였고 해방이후에 약인(藥仁) 약의(藥義)로 분리했으나 현재는 약산으로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
대산1리 |
[해룡(海龍) ] |
대산리는 한때 장흥군에 속한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전리, 임수리, 장내리, 해룡리, 복흥리 등 5개 마을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해룡마을은 고려말엽에 웅(熊)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 하는데 그후 광산김(光山金)씨가 들어와 살면서 부락을 다시 형성하여 지금은 광산김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 형국이 바다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이라 하여 해룡(海龍)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
[담안(담안) ] |
담안마을은 고려말엽 범(凡)씨와 임(林)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다 떠나고 조선초엽에 수원백(水原白)씨와 하동정(河洞鄭)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수원백씨와 하동정씨, 광산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옛 명칭은 선형동(船形洞)이라 하였으나 범(凡)씨와 임(林)씨가 살던 시절에 마을의 형태가 배형국과 흡사하므로 배(船)를 고정시키기 위해 마을 주위에 돌담을 쌓았다 하며 그래서 들독(業石)거리는 배의 닻에 해당된다고 한다. |
임(林)씨가 살던 밖의 들과 통하는 문을 임문(林門), 왼쪽 청룡동 밖의 들과 통하는 문은 남문(南門), 계(繫) 밖의 들과 통하는 후문(後門)을 쌓고 담안(담안)에 있는 마을이하 하여 담안이라 하였다 한다. |
[복흥(卜興) ] |
복흥마을은 1900년경 김해김(金海金)씨와 밀양손(密陽孫)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은 5세대가 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 형태가 복(卜)字 형이기에 흥(興)하라는 뜻으로 복흥(卜興) 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
대산2리 |
[임수(林水) ] |
임수마을은 조선초기에 봉(奉)씨와 영광정(靈光丁)시가 입향하여 터를 잡아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조선중엽 상주주(尙州周)씨와 전주(全州李)씨, 김해김(金海金)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앞으로 흐르는 물과 숲(林)이 성하면 물이 좋은 마을로 영혼히 번창한다 해서 임수(林水) 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
[신전(薪田) ] |
신전마을은 조선말엽 신안주(新安朱)씨와 영월엄(永月嚴)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는데 그후 김해김(金海金)씨를 비롯한 여러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 앞을 숲으로 가려야 부유하고 오래 발전할 것이라 하여 울타리 안의 새밭(터)란 뜻에서 신전(薪田)이라 부르고 있다. |
용반1리 |
[용추(龍湫) ] |
용반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은리, 임내리, 덕림리, 덕산리, 용반리 등 5개 마을을 병합하여 용반리라 하였다. |
용추마을은 조선초기에 경주김(慶州金)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 하는데 그후 1898년경 죽산안(竹山安)씨와 수원백(水原白)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크게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죽산안씨와 수원백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뒤의 산비탈을 1km쯤 올라가면서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폭포가 있으며 옛날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용추’(龍湫)로 부르고 있다. |
[덕림(德林) ] |
덕림마을은 조선초기에 경주최(慶州崔)씨가 처음으로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에 큰 나무가 많이 우거져서 옛적에는 ‘숲안’(林內)이라고 했으나 ‘숲안’(竹內)이라는 이름엔 별 의미가 없다하여 조선말엽부터 큰숲이라는 뜻의 덕림(德林)이라 부르고 있다. |
용반2리 |
[대은(大隱) ] |
대은마을은 고려말엽에 창녕조(昌寧曺)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떠나고 그후 조선 초기에 김해김(金海金)씨가 들어와 살았다 전해오며 1600년경에 관산임(冠山任)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가 들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쌓여 외부에서 마을을 보면 마을인지 숲속인지 문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마을 이름을 ‘대은’(大隱)이라 부르고 있다. |
[덕산(德山) ] |
덕산마을은 1607년경 천안전(天安全)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떠나고 그후 1720년경에 수원백(水原白)씨가 들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다. |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 뒷산에 범바위등이 있어 덕산(德山)이라 불리우고 있다. |
[동고지(東顧枝) ] |
동고마을은 1680년경부터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예부터 이 마을에서 단일(單一) 성씨가 성(盛)하지 못하다는 구전(口傳) 때문에 한성씨만 살지 않고 여러 성씨가 함께 살아오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의 형태가 동(東)쪽으로 뻗은 나뭇가지 같다는 풍수설에 의해 ‘동고지’(東顧枝)라 하였으나 1900년경부터 끝의 ‘지’(枝)자를 발음하기 귀찮다 해여 때버리고 ‘동고’라 부르고 있다. |
봉산1리 |
[녹동(鹿洞) ] |
봉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녹동리, 산남리, 상수리 등 3개 마을을 병합하여 봉산리라 하였다. 녹동마을은 약 400년전 한양조(漢陽趙)씨 조주상이란 분이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 자손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중 한분이 입향하여 이 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
마을의 지명은 북으로는 형제봉, 남동쪽으로는 학성산과 심봉산이 있고 마을뒤에는 함매등과 봉선등이 서로 대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슴과 같다하여 ‘녹(鹿 : 사슴논) 동’(洞 : 고을동)이라 부르고 있다. |
[매남(梅南) ] |
매남마을은 조성중역 녹동마을에 살던 한양조(漢陽趙)씨가 아들 6형제를 데리고 이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해오나 지금은 진원박(珍原朴)씨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산에 자생한 매화가 많아서 봄이면 가히 장관을 이루엇다 하여 매화마을이란 뜻으로 ‘매남(梅南)’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봉산2리 |
[외삼수(外三水) ] |
외삼수 마을은 고려효종때 청주김(淸州金)씨가 처음 마을을 세웠다고 전해오는데 조선중엽에 다시 장흥읍 견산리에 살던 죽산안(竹山安)씨가 들어와 현재까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보성강(寶城江)의 발원인 비래천(飛來川)과 단풍천(丹楓泉) 찬샘(寒泉)의 3천(三泉)이 있어 고려때부터 삼수(三水)라 불러왔다 하며 현재는 마을이 안, 밖으로 나누워 안쪽마을을 안삼수(內三水), 바깥쪽 마을을 외삼수(外三水)로 부르고 있다. |
봉산3리 |
[삼수(三水) ] |
삼수 마을은 조선초기에 장수황(長水黃)씨와 한양조(漢陽趙), 수원백(水原白)씨가 마을을 형성했다 전해오나 조선조 숙종때의 박몽형이 이주해온 이래 지금까지 진원박(珍原朴)씨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
마을 지명은 섬진강 발원지인 비래천(飛來川)과 상진천(上眞泉), 하진천(下眞泉)을 합해 삼수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고 일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모셨던 당산나무가 세그루 있었는데 (현 단산) 석삼(三) 나무수(樹)자를 써서 삼수(三樹)로 불러오다 풍수지리상 마을터가 화란(火難)이 두려우니 물수(水)로 고쳐 부르라 하여 그후부터 삼수(三水)라 하였다는 말도 전해온다. |
유산1리 |
[왕초(王草) ] |
유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오류, 내동, 왕초, 부춘, 유산의 다섯마을을 병합하여 유신리라 하였다. |
왕초마을은 조선말엽 청주한(淸州韓)씨 파평윤(坡平尹)씨, 죽산안(竹山安)씨가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안씨와 한씨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는 인삼(人蔘)을 재배하였다고 하며, 인삼은 모든 풀(草)의 왕(王)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왕초(王草)라 했다 전해온다. |
[부춘(富春) ] |
부춘마을은 조선중엽에 보성선(寶城宣)시와 수원백(水原白)씨가 입향하여 부락을 형성,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처음에는 옹기를 굽는 마을이라 하여 점등, 또는 솔밭등이라 불렀으나 안진사라는 분이 매년 봄이면 식량이 떨어져 고생하는 것을 보고 춘궁기가 없으란 뜻에서 부춘(富春)이라 부르게 하였다 한다. |
유산2리 |
[내동(內洞) ] |
내동마을은 조선중엽 오류동(五流洞)의 광산김(光山金)씨가 번창하자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
마을의 지명은 오류동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였기에 본 마을인 오류동의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동(內洞)이라 부르고 있다. |
[오류(五柳) ] |
오류마을은 1300년경 덕수장(德水張)씨와 영광김(靈光金)씨가 입향하여 살았는데 장씨는 장흥으로 이주하고 영광김(靈光金)씨는 갑오경장때 동학의 지역 인물인 김보열(金甫烈)이 진을 치고 활약하자 정부군이 소탕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1400년경부터 광산김(光山金)씨가 입향하여 지금까지 성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지명은 광산김씨 입향조(入鄕祖)인 김평석(金平碩)이 장흥에서 이주해 왔는데 그의 4대손인 김혼(金混)이 임진왜란때 경상좌병사 참모로 싸우다가 전사하자 그의 부인이 14세된 아들 홍업(弘業)을 데리고 초온제를 모신 후 자결했다. 아들 홍업(弘業)이 집앞에다 다섯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집에서 글 공부만 하다가 세상을 마치자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오류동(五柳洞)이라 부르고 있다. |
[신류(新柳) ] |
신류마을은 1750년경 장흥에서 큰 재배로 흉년을 당한 진주정(晋州鄭)씨가 곰재를 넘어서 살 곳을 찾아오다 물이 좋고 땅이 넓어 새로이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
마을의 지명은 새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신지(新地) 또는 신기(新基)라 부르다가 새터(新基)라는 지명이 싫어서 1900년경부터 유산(柳山)리의 ‘유’자와 신기의 ‘신’자를 합해 신류(新柳)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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