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생활 입문이란..??
참되고 생활한 신심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초로 하여 결국 하느님의 참된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 그대로를 신심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자녀가 되도록 하느님의 사랑이 덕을 행하도록 꾸밀 때 이것을 성총이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이 덕을 행하도록 힘을 줄 때 이를 애덕이라 한다. 완전한 애덕으로써 우리가 열심히 또한 자주 선을 행하게 될 때 이를 신심이라 한다. 신심의 사람은 자주 빠르게 높이 하느님한테까지 나를 수가 있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활동하여 우리가 사랑으로써 열심히 또한 쉽게 선을 행하게 될 때, 이 정신의 경쾌한 활동과 씩씩한 힘을 신심이라고 한다. 이 책은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가 샬모지아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수도자들을 위한 서책이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하느님의 성소 (聖召)인 세속을 더 큰 수도회로 보았다. 그는 세속이라는 수도원이 번성하면 정식 수도생활의 성소를 받는 자도 증가할 것이라 생각했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신심 생활을 권고 하기 위해이 책을 썼는데, 다섯편으로 나누어 1편에는 신자들이 구세주를 자기안에 모시고 다가가도록하고 2편에서는 점차로 우리와 주의일치에 도달하도록 인도하고있다. 3편에서는 그 진보에 특히 필요한 몇 가지 덕에 대해 말하고있고 4편에서는 마귀의 암계(暗計)를 몇가지 보이고 이를 풀고 피하는 방법을 쓰고 있으며 마지막 5편에서는 이후 더 행복스럽고 일층 더 신심생활에 나가게하기 위해 잠깐 영혼에게 휴식을 주어 그힘을 보충하게끔 인도하고 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일치됨을 느끼고 싶은 분이라면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이 책이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 글쓴이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사보아 현의 살레시오 성에서 1567년 8월 21일에 후작 가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신앙심 강하고 경건한 부모님을 모셨다. 프란치스꼬는 파리시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입학한 후 빠두아 대학으로 옮겨 그 곳에서 신학과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향인 사보아로 돌아가기 전에 로마로 가서 사제가 되기를 결심하고 1593년 11월초에 사제가 되고부터 자기 완성과 성화에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비상한 결심을 하였다. 그 결과 칼빈 이단의 사람들을 7만명이나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1622년 리용에서 졸도한 후 평화로이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신지 40년만에 교활 알렉산더 7세에 의해 교회 박사 반열에 들게 되었다. 성 요한 보스꼬는 1859년 수도회를 창설하였고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를 수호자로 모셨다. 이 수도회가 살레시오 수도회다.
-신심 생활 입문 머리말-
나의 사랑하는 독자들이여,아무쪼록 이 선언을 읽어 주십시오..
이는 나의 기쁨도 되고 또한 당신들의 만족도 될 것입니다...
글리세라라는 꽃팔이 처녀는 꽃을 잘 섞어서 묘하게 변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어서 같은 종류의 몇 가지 꽃을 가지고 여러 모양의 많은 꽃다발을 만들었습니다..그래서 뽀지아스라는 화가가 이를 부러워하여 흉내를 내려고 생각했으나 글리세라가 꽃다발을 변화시키듯이 자기의 그림을 묘하게 변화시킬 수가 없어서 실망했다고 합니다..
하느님 성령께서도 당신 종의 혀와 펜으로 신심을 가르치실 때 그를 여러가지로 배합하여 조화시키므로 교혼은 늘 같은 한가지 것이지만 거기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나는 이 입문에다 선배들이 이미 말한 것 외의 것은 쓸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바라지도 않고 쓰지도 않겠읍니다..
독자들이여 내가 당신들에게 드리는 것은 같은 꽃이지만 내꽃다발은 그 배합의 변화가 있으므로 옛 선배들의 꽃다발과는 자연히 다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심에 대해서 기록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주로 세상의 번뇌를 피해 간 자들을 위해 썼으며,적어도 이런 완전한 은둔 생활로 인도하는 일종의 신심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시가안에 살고 집안일을 돌보며 또는 궁중에 머물면서 각각 자기환경에 따라 외면으로는 보통생활을 해야만 할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이런 이들은 가끔 불가능하다는 구실 밑에 신심생활을 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않습니다..
그들은 어느 짐승이든지 그리스도의 빨마라는 풀이삭을 먹으려하지 않는것철머 세속에서 살며 바쁜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그리스도교의 신심의 빨마를 맛볼 수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진주는 바다안에 있으면서 조금도 짠물에 물들지 않고 또 세리도안느 섬 부근에는 바다가운데 단물이 솟는 생이 있는 것처럼 또는 삐라우스트라는 새는 불꽃 속을 날아 다녀도 그 날개를 태우지 않는 것과도 같이 씩씩하게 참아 견딜 줄 아는 영혼은 세속에 살면서 이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고 세기의 쓰라린 파란 중에도 신심의 단 샘을 찾아내며 지상의 갖가지 정욕 중에서 경건한 생활의 거룩한 희망의 날개를 태우지 않고 날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인 만큼 나는 여러분들이 일층 더 조심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용맹히 이 거룩한 계획을 시작하는 자들에게 내가 감히 이 임무를 담당치 못함을 알면서도 이 작은 책으로써 얼마쯤 도움이 되기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입문을 공표하게 된 것은 사실은 나의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얼마전에 고귀한 가문의 한 유덕한 영혼이 하느님의 성총을 받고 신심생활로 들어가려고 하여 이에 대한 특별한 도움을 나에게 청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한 이전부터 그가 이 계획에 매우 적당함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바르게 이해시키려고 애를 써, 그의 원의와 환경에 적당한 모든 영적 수업을 가르쳐 인도하고 또한 필요한 때에는 이를 참조할 수 있게 교훈의 요점을 잡아 써 주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학식도 많고 경건한 어떤 수사에게 보였던 바 이분은 여러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것을 공표하라고 나에게 간절히 권하였습니다..
이분의 우정은 내 의지에 큰 힘을 주었고 그의 판단은 나의 판단에 큰 권위를 가졌으므로 나는 쉽게 설복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이의 유익이 되도록 다시 읽어 질서를 세우고 또한 적당한 권고와 교훈을 부가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분주한 떄에 했으므로 고르게 완성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똑똑하고 알아듣기 쉬운말로(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려고 애썼읍니다)설명하였고 정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여러가지 주의에 불과하며 문장을 꾸미는데 대해서는 다른 많은 일을 가진 나로서는 거기에 거의 생각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필로테아에게 씁니다..
처음에는 다만 한 영혼을 위해서 쓴 것을 여러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쓰는 고로 누구든지 깊은 심심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적합한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즉 필로 테아라는 말은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자 혹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신심생활을 원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한 영혼을 마음에 그리고 이 입문을 다섯편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제1편에서는 설명과 영적 수업으로써 필로테아의 단순한 희망을 하나의 견고한 결심으로 변하게 해 보았습니다..
총고해 후에 그 결심을 서약하고 즉시 거룩한 영성체로써 자기를 구세주께 바치며 또한 구세주를 자기안에 모시고 그는 행복에 넘쳐 구세주의 거룩한 사랑안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나는 점차로 우리 주와의 일치에 도달하도록 두가지 큰 방법을 그에게 보이고 그를 더욱 앞으로 인도해 갑니다..
즉 그것은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성체성사를 잘 이용하는 방법과 주께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거룩한 기도인데 이를 위하여 제 2편을 썼읍니다..
제 3편에는 특히 그 진보에 필요한 몇가지 덕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를 지시하고 특히 혼자서나 혹은 다른방법으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특수한 교훈을 주고 제 4편에서는 마귀의 암계를 몇가지 보이고 이를 풀고 혹은 피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 5편에는 이후 더욱 행복스럽고 일층 더 신심생활에 나아가게 하기위해서 잠깐 영혼에게 휴식을 주어 그 힘을 보충하게끔 좀 고요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현대는 참으로 이상한 시대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심의 특별한 행위는 수도자나 신심가에게 한한 것이라고 말할 줄로 미리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나처럼 바쁜 교구를 관리하는 주교에게는 그러한 여유는 없고 또 중요한 일에 종사해야할 정신은 그런 것 때문에 산란해진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나는 저 위대하신 성 디오니시오를 본받아 마치 세라핌이 천신들 중에 가장 뛰어남 같이 주교의 직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우월한 고로 영혼들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주로 주교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이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고대 주교나 교부들은 이 임무에 충실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들에게 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몇몇 영혼들에게 특별히 지도할 만한 주의를 잊지않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편지로써 명백합니다..
이 점에 있어 그들은 사도들을 본받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전세계에 걸친 일반적 수확외에 특별한 애정으로 뛰어나게 눈을 이끌은 이삭을 꺾었습니다..
디모테오 띠또 필레몽 오네시모 성녀 떼글라 아삐아가 위대하신 성 바울로의 사랑하는 자녀였고 성 말구와 성녀 베드로닐라가 똑같이 성 베드로의 자녀이었던 것을 그 누가 모르겠읍니까?
성녀 베드로닐라가 성 베드로의 친딸이 아니고 다만 영신적 딸이었던 것은 박학한 바로니우스와 갈로니우스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 성 요한도 성서중의 서간 하나를 경건한 애렉다 부인에게 보내지 않았습니까?
나는 솔직히 고백합니다만 특별히 어떤 영혼을 지도하는 것은 힘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위안이 되는 수고입니다..
마치 농부나 과수원하는 이가 몹시 바쁘고 일이 많은 때에 가장 만족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를 계획하는 자에게 갚음이 되는 즐거움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하고 피로를 회복케 하는 일입니다..
마치 행복스런 아라비아 나라안에서 옥계수를 가진 자는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고 전해오는 것과 같으며 사냥군이 어미 호랑이의 정신을 흩어 놓으려고 새끼 호랑이를 한마리만 남겨두고 다른 놈을 다 빼앗아 버릴때 어미 호랑이는 이 한 마리를 제 굴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큰 새끼일지라도 그를 업고 달아나는 속도란 아주 재빠르며 늦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답니다..
즉 자연적 애정이 그 짐을 가볍게 합니다..
거룩한 완덕의 희망을 가진 한 영혼을 만났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몇배의 열심으로써 그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기 아이를 품에 안고 조금도 피로와 짐으로 느끼지 않듯이..
그러나 여기에는 꼭 아버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그 시대의 전교사들은 제자들을 다만 나의 아들이라고만 부르지 않고 더욱 다정하게 어린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끝으로 나의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나 스스로는 깊은 신심을 갖지도 못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쓰고 있읍니다만 신심 깊게 되려고 하는 원의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원의가 나로 하여금 당신들에게 가르치게 합니다..
어떤 위대한 학자가 말한대로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하고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듣는 것이며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 아오스딩도 경건한 플로렌리나에게 편지를 애긍을 분배하는 소임은 자기가 그것을 받기 위한 공로가 되는 때가 가끔있고 가르치는 직책은 배우는 기초가 된다고 말했읍니다..
알렉산더 왕은 가장 사랑하던 아름다운 곰빠스빼 아가씨의 초상을 유명한 화가 아뻬레스에게 그리도록 명하였습니다..
아뻬레스는 오랫동안 곰빠스빼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의 모상을 캔버스에 그리다가 그의 마음이 아가씨에게 대한 애정으로 불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알렉산더 왕은 이것을 알고 동정하여 그를 그의 부인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름다운 친구를 잃었으나 쁘리니우스의 말대로 왕은 이 행위로써 전쟁에서 일대 승리를 얻은 것보다 더 그 마음의 위대함을 나타냈습니다..
나의 친구인 독자들이여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성의는 내가 주교이므로 사람들의 마음의 캔버스 위에다 오직 보통 덕행만을 그릴 뿐 아니라 그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심의 덕을 그리라고 하십니다..
나는 이대로 직무를 다하고 외에 어쩌면 사람들 마음에 이를 새겨주고 있는 동안에 내 마음에도 깊이 박혀져서 어느덧 내 마음도 이덕에 대한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써 기쁘게 이를 시작하는 바입니다..
내가 이를 깊이 사모하는 것을 만을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나에게 영원한 약속으로 이를 주실 것입니다..
마치 아름답고 정숙한 레벡가가 이사악의 낙타에게 물을 준 연고로 귀걸이와 함금 팔찌를 받고 그의 아내가 됨같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양의 무리를 거룩한 신심의 샘에 인도한 것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나의 귀에다 그 거룩한 사랑의 황금 말씀을 끼워 주시고 내 팔에는 그를 바르게 실행할 힘을 주시며 그 무한하신 자비는 내 영혼을 주의 정배로 삼아 주시리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 거룩한 사랑과 힘은 진정한 심심의 골수이며 이것을 성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내가 기도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나의 글자 행위 말 의지 사상을 언제나 성교회에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안느시에서 1609년 성녀 막달레나 축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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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Saint Francis de Sales St. Franciscus de Sales, E. et D San Francesco di Sales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1567 at Chateau of Thorens, Savoy - 28 December 1622 at Lyons; buried at Annecy Beatified:8 January 1662 by Pope Alexander VII Canonized:19 April 1665 by Pope Alexander VII
이 위대한 주교는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샤토 드 살에서 태어나 파리의 아네시와 클레르몽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파두아 대학교에서는 법률과 신학을 전공하여, 불과 24세의 약관에 법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 이사직의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생활을 위하여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카블레 지방의 선교사로서 5년 동안 활동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군사력으로 가톨릭을 억누르는 사보이 공작의 노력에 피나는 항쟁을 하고 있었다.
암살자와 칼빈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99년, 그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는 곧 반개혁자의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뛰어난 고해신부이자 설교가이며, 해박한 신학지식과 이해심은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예비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교구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1604년, 그는 프란치스까 드 상탈을 만나 그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녀와 함께 방문회를 세웠다(1610년)
그는 프랑스 리용에서 운명하였는데,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 신심생활 입문(1609년), 2.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65년에 시성되었다. 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성바오로수도회에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축일:12월12일,게시판1519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31일.게시판1187번.
프란치스코 드 살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변호사가 되고, 나중에는 프랑스 사부아 지역의 상원 의원이었던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법률을 공부하러 파도바로 갔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적당한 시기에 부모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완강하게 반대를 했지만, 착한 프란치스코의 꾸준하고 열심한 설득에 결국은 허락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는 사제로 서품되어 얼마 뒤에는 칼뱅교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사무관으로 선출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칼뱅과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기로 결심하고, 특히 샤빌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진정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는 자그마한 팜플렛을 만들어 배부하고 설교도 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35세에 제네바의 주교가 된 프란치스코는 교구의 사목 행정을 담당하면서도 설교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의 부드러운 성격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한 숟가락의 꿀은 한 통의 식초보다 더 많은 파리를 끌어들인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널리 알려진 [신심 생활의 입문]과 [신애론] 외에도 수많은 소책자를 쓰고 광범한 분야에 걸쳐서 편지 왕래를 했다. 그의 이러한 문필 생활로 인해 그는 가톨릭 신문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짧고도 바쁜 일생을 보냈지만 ’방문 수녀회’를 창설하는 일에서 또 다른 성녀인 잔 프랑스아 드 샹탈과 협력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이 수녀원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데서 모범을 보인 덕행, 즉 겸손과 신심 그리고 상호 애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여인들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프란치스코 드 살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온화함을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사랑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변호해 줄 자세가 되어 있다. 그의 착한 마음은 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에서 나타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애덕과 기쁨의 빛을 비추는 관점을 제공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1567년 사보이아에서 태어났다. 사제로 서품된 후 자기나라에서 가톨릭 교회의 재건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제네바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참다운 목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만사에서 모범이 되고 저서로써 모든 이에게 신앙을 가르쳐주었다. 1622년 12월 28일 리옹에서 세상을 떠나, 1623년 1월24일 안네시에 묻혔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주교의 [신심 생활 입문]에서 (Pars, 1, cap. 3)
신심 생활은 모든 소명과 직업에 가하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그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설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 필로테아여, 주교가 샤르트르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카푸친회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지, 또는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으며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착오는 극히 많다. 따라서 세속은 참된 신심과 그릇된 신심을 구별치 않고 또는 구별하려고도 않으며 신심을 배척하고 이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배척은 위에 말한 그릇된 신심에 한해서만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필로테아여, 진정한 신심은 아무것도 손상치 않고 오히려 만사를 완성시킨다. 자기의 정당한 직무를 거스르는 자의 신심은 확실히 그릇된 신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지 않게 하며 꽃은 이전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참된 신심은 이보다 더 어떠한 직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성질에 따라 광채를 더한다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도 그의 경우를 신심과 합치시켜면 그의 경우는 일층 더 아름다워진다.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임금께 대한 충성은 두터워지고 각자가 맡은 일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신심 생활의 군인들의 병영,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유설이며 이단의 교설이다. 필로테아여, 관상적인 신심이나 수도원식 또는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전연 맞지 않을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위에 말한 세 가지 신심 외에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가톨릭홈에서)
"거짓 예언자가 여기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여 넘길 것입니다.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마태 24, 11).
주 예수의 이 예언 말씀은 16세기에 놀랄 정도록 맞아 들어갔다. 즉 루터를 위시해 쯔빙글리나 칼빈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각각 이단을 주장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세우므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여러 지방의 인심을 현혹케 했다.
그러나 자비 깊으신 하느님께서는 가련한 양(羊)인 신자들이 포악한 사람인 이단자들에게 현혹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인의 유명한 성인을 보내셔서 교회를 개혁케 하셨다. 그들은 즉 독일에 있어서는 성 베드로 가니시오,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프랑스에 있어서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축일:12월21일.게시판1531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182번.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1567년 8월 21일에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사토 드 살에서 후작가(候爵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모두 경건하고 독실한 신자였고, 특별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아들의 교육을 세심한 주의로 시행하는 동시에 그 순진한 어린 마음에 신앙과 덕행의 씨를 뿌리며 이를 양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첫째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파리에 있는 예수회의 대학에 입학하고 오래지 않아 그 지혜와 성실한 점으로 단연 출중한 성적을 올려 교사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신앙 도덕을 위협하는 많은 위험 중에서는 자숙하여 기도와 고행에 그러한 십자가의 길로써 무사히 백합화와 같은 마음을 끝까지 보존할 수가 있었다. 그가 가장 정덕에 대해 노력한 것은 그때에 비로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렸을 때 성 마리아 제대 앞에 엎드려 일평생 동정을 지킬 서원을 발한 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파도바 대학으로 가서 신학과 법학 박사의 학위를 획득하고 대 성공리에 졸업했지만, 옛 고향인 사보아에 금의환향(金衣還鄕)하기 전에 먼저 성도(聖都) 로마를 방문하고 세상에서 출세해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사제가 되어 희생의 생활을 하려고 결심했다. 그런 줄도 모르던 아버지는 벌써부터 그를 사보아에서 변호사 개업을 시킬 예정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관계로 아들의 희망을 듣고 나서 즉시 승낙하게 되어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수도 생활을 위해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교황에게 아네시 주교의 참사원(參事員)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제단에서 처음으로 미사 성제를 드린 것은 1593년 12월 초순경이 었다. 그 후 그는 뜨거운 신앙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며 사제로서의 성무를 완전히 이행했고, 아네시 주교는 그의 수완을 인정하여 특히 중대하고 어려운 사명을 그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보아의 남부에서 세력을 부리고 있던 칼빈파 이단에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개종시키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지만 일단 착수해보니 그 사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이단자들에게 쫓겨 깊은 산으로 피신한 때도 있었고, 초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일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위험하게도 생명을 빼앗길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은 영웅적인 인내와 온순과 겸손으로 취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후 비로소 크리스카스 밤 미사를 이단의 중심지에서 봉헌하고 8백 명의 개종자에게 성체를 영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칼빈파의 지반은 점차 붕괴하여 연거푸 개종자들이 증가해, 1597년에는 프란치스코의 노력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7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참으로 사보아의 남부에 있던 칼빈파의 이단이 전멸된 것은 오로지 성인의 감탄할 만한 기도와 희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네시 주교는 자기의 후계자로서는 이 젊은 사도 프란치스코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교황에게 추천했으므로, 그는 1599년에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는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어도 항상 겸손하며 자기가 맡은 영혼을 돌보는데도 각별한 열의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자기 교구에 있어서 성직 지원자의 전형(銓衡)을 엄격히 하고, 참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을 뽑고, 모든 이에게 모범을 보이는 완덕의 생활과 그의 스승다운 깊은 학문 등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은 주교직에 있으면서도 주일에는 신자들에게 도리를 설명해 주고 성사를 주는 등 보농 사제들과 같이 영혼의 지도에 노력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사도적 활동이 세상에 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유명한 명성은 프랑스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국왕은 파리나 리용의 대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칼빈파 이단을 전멸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를 초빙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시에서 강론과 기타 모든 방법으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덕이 높고 학식이 많은 성인에게 영적 지도를 청하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여서 그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기에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지만, 끝까지 친절하고 온순한 주교는 서간으로써 각자에게 적당한 권고와 교훈을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의 희망을 채워주려고 했다. 또 그의 유명한 저작 필로테아라는 신심생활의 입문서도 그의 지도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청으로 저술한 것이다.
성인의 개인적 지도로 가장 훌륭하게 된 이는 한 수녀원을 창설한 샹탈의 백작(伯爵)부인 성녀 프란치스카였다. 성인은 1604년 사순절의 강론때에 처음 프란치스카를 만나 즉시 그녀가 하느님께 간선된 부인이라 이미 1610년 6월 6일 두 동료와 같이 하느님의 전선을 찬미하여 유화(柔和), 소박(素朴), 자비(慈悲)의 정신을 세상 사람에게 알려주는 새 수도회(방문회)를 세웠다.
그 이상(理想)에 대해서 성 주교 자신의 얼마나 열렬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가는 그가 프란치스카에게 말한 다음의 말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는 언제 참된 사랑과 온순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 나는 온전히 자기를 끊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모든 사람들의 희망대로 하고 그를 위해 진력하고 싶다!" 이와 같이 사랑이 대단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아무리 완고한 이단자라 해도 그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전후 20년간 주교직에 있으면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감화를 주며 제네바에 있는 600여개의 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심을 북돋아 주고 교리를 모르면 그들에게 잘 깨닫게 해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중부 프랑스, 동부 프랑스의 사람들도 이 성스러운 주교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인을 초대하고 교훈을 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무와 영혼의 지도에 진력한 결과, 과로하게 되어 아직 노년이라 할 수 없는 55세 때인 1622년 12월 28일, 리용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모인 사람들이 병자를 위한 기도문을 외울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신심 생활 입문(1609년)과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 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55년에 시성되었다. 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대구대교구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청소년들의 스승이요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요한 보스코(St. John Bosco, 1815~1888) 에 의해 1854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창립된 살레시오 수도회는 청소년 교육을 주목적으로 한다.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성인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도적 사명감과 고귀한 정신에 감명되어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로 하였다고 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 사제 축일:1월31일.게시판922번.
♬13.Mandatum Novum Do Vobis-베네딕도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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