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괴산군 청안면에서 태어났고 그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청안면 소재지에서는 우리 쪽을 보고 산넘어라 부르는데 지네들보다 약간은 깡촌이라는 의미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이 잘도 어울리게 질마재란 고개를 넘으면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섰고 길게 난 협곡 가운데 있는 오리목이란 조그만 마을이 내가 자란 곳이다
내 몸이 불편하고 학교가 먼(5리) 관계로 열살쯤에 서울로 전학을 시켰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잘 해야 4박5일이나 5박6일쯤 걸려야 받을 수 있는 편지 왕래가 고작이였던 시절이니 늘 부모님 정이 그립고 향수에 젖어 사는 것이 일이였다
어린 나이에 떨어져 있어도 어머니 보고 싶다 말 한번 안하고 눈물 한 방울 안 보인다고 주위에서는 독하다 소리도 들었지만 꿈 속에서는 어머니 생각에 늘 울고 살았다
그 시절에 고향을 생각하면 당연히 부모 형제가 제일 먼저 떠 올랐지만 더불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3당숙이시다
3당숙이라 하면 9촌에 해당하는 촌수이다
지금 시대 아이들에게 3당숙이라 하면 거의 촌수도 헤아리지 못하는 남 남일 것이다
3당숙이라 해서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그 분이 우리 아버지한테 부르는 말이시다
그러니까 나하고는 열촌이 되는 분이시다
우리 한 마을 십중 팔구는 모두 4촌 6촌 8촌 일가 붙이고 그져 아저씨 조카 형님 동생하고 살다 보니 열촌쯤은 아주 가까운 촌수로 알고 살았다
우리 아버지가 3당숙이시니 나하고는 동항렬이라 형님 동생 사이인데 연세가 아버지보다 다섯살이 많으셨지만 항상 아저씨라 하시던지 3당숙님이라 하면서 깍듯이 존칭을 쓰셨고 아버지는 그 형님에게 하대를 하셨다
아버지보다 더 늙으신 분이 어린 내게 한번도 이름을 부른적 없이 항상 동생 동생 하며 위해 주는게 어린 맘에 왜 그리 므흣(흐뭇의 신세대 버젼)한지 그 형님만 보면 늘쌍 좋았다
하긴 나만 좋아한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호인이셨다
자기집 식솔들 끼니가 궁해도 어느집이 굶는다 하면 제일 먼저 쫓아 갔으며 동네 험한 일은 도두 맡아 하는 그런 분이셨다
농토도 별로 없고 식구는 많다보니 무슨 일이든 해 내야 하는 그런 처지이기도 하셨지만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살다보니 우리집 머슴살이를 여러해 하셨는데 일도 열심히 하셨을 뿐만 아니라 솜씨도 좋고해서 어른 애 할 것 없이 우리 식구 모두들 좋아 했었다
정은 또 얼마나 많은지 초여름만 되면 버찌와 오디도 따다 주고 가을이면 알밥도 주어다 주곤 하셔서 근엄하시기만 하고 그런 것은 한번도 안 하시는 우리 아버지보다 그 형님이 더 좋을 정도였다.
곤궁한 살림이고 여러 자식이다 보니 한명도 제대로 교육은 못 시키고 어린 나이에 더러는 고향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살고 더러는 객지로 나가 살았는데 나중에는 모두 밥술이나 먹게 되어서 아버지가 착하게 살아 자손들이 복 받은 것이라 모두들 대견해 한다
그 착하게 사신 10촌 형님에게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애들은 많은데다 일찍 상처를 하시고 혼자 건사를 하느라 그런지 조금 세월이 흘러서는 연세보다 많이 늙어 보이고 실제로도 동년배들보다 힘을 못 쓰셨다
50이 넘어서는 어찌나 늙어 보이는지 버스만 타면 좌석 양보는 의례 받는 것으로 돼 있었다
50하고도 딱 중간에 왔을 때(55세) 몸이 허약해져서 힘도 들고 농삿일을 못하게 되어 청주 큰 자식한테 나와 살게 되었다
요즘엔 많이 혼재되어 살고 있지만 그 당시엔 당연한건지 희한한건지 모르지만 상당공원을 깃점으로 증평 음성 오창쪽에서 나온 양반들은 우암동 내덕동 쪽에 많이들 살았고 반대 편에서 나온 양반들은 또 그대로 그 가까운 쪽에서 사는 분들이 많았었다
하기야 수구초심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게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 형님과 그 아들도(나에게 조카 촌수)그 것을 지키느라 그런지 내덕동에서 살았는데 그 동네 경노당에서 나오라 하시더란다
그도 그럴것이 실제로는 55세였지만 한참이나 더 늙어 보이는 늙은이가 살고 있으니 경노당에서도 그럴만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늙어 보인다고는 하지만 어찌 그 나이에 거길 가겠는가
몇 달인가를 버티고 있으니 경노당 회장님이랑 몇 분이서 직접 오셨더란다
더 버티는 것도 이상하고 해서 그 곳이 어떤가 하고 한번 가 보셨더란다
가던 첫 날인데 통성명을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윤 아무개요 성함을 말씀 하시니 나이는 얼마요 하더란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쉰 다섯이요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댓 댔슈 했더란다
쉰 다섯이니 댓 댔슈가 절대 거짓을 말한건 아니지만 옆에서는 자기들끼리 사분 오열 되더란다
서너분은 여순 다섯인감 하시고 너 댓분은 일흔다섯 아녀 하시고 한 두분은 열든 다섯 아녀 하시는 분도 계시더란다
그러더니 주인공은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일흔 다섯으로 낙찰을 보더란다
옆에 있던 우리 10촌 형님은 절에 간 색시처럼 뻘주미 앉아 있다 졸지에 나이를 스무살이나 더 먹었는데도 지나치게 늙어 보이는 지은 죄가 있어서 아무소리 못했단다
다음부터는 일흔다섯 밑으로는 형님 대접 받고 그 위로는 형님 대접 해 주며 경노당 연세로 여든 다섯까지 비교적 장수(?)하시다 돌아가셨다
실제로는 예순 다섯에 돌아 가셨으니까 비교적 단명하셨지만 말이다
난 지금도 명절이 되어 고향을 떠 올리면 푸근한 성품에 늘 웃음을 잃지 않고 계시던 그 10촌 형님이 생각난다
다섯살이나 적은 우리 아버지께 때론 아저씨.. 때론 3당숙님..하시면서 정다운 얼굴을 하시던 그 보습이 눈 앞에 어른 거린다
(조금 기다려 봐도 아무 글도 안 올라 오기에 졸필이나마 제가 한번 올려 봤습니다
다른 회원들의 일상사라도 올려 주시면 보다 활성화가 된 카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