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ninapa )
[쿠베린] 제 1화 엘프의 구출1 1998-01-03 01:56 275 line
KUBERIN..
내 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1
붉은 불꽃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그 불꽃들을 보고 있다.
검붉은 빛이 오가는가 하면 맑을 정도로 곱고 부드러운 주홍빛이 스치고 지나갔
다.노랑빛이 별빛처럼 찰나에 스쳐가기도 하고 검은 티끌이 그 불꽃위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저벅거리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바쁘다.
나는 약간 목이 말라왔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그대로 앉아있었다.
뒤에서 마미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맥주하나 더!"
"이 덩치야! 네가 갖다 먹어! 바쁘다구!"
"체엣! 단골손님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웃음소리와 움직임
을 따라서 발끝으로 흔들림이 밀려온다.장화에 감싼 발가락이 그 진동으로 약간
간지러워졌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내 발가락 끝을 바라보았다.이렇게 시끌거리는 마미의 가게
가 좋았다.
손님들은 대부분이 단골들이 많았다.
이 항구도시에 선원들과 한편으로는 산을 넘어오는 여행자들이 주된 고객으로
가끔 드물게는 드워프나 엘프들도 있었다.요즘 한 십여년 사이에 다른 아인족들
도 늘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어찌되었든 인간이 대부분이었다.
마미는 내가 꼼짝않고 난로앞에 앉아있자 내 뒤로 저벅거리고 오더니 등짝을 사
납게 후려갈겼다.
"쿠베린! 이 느려터진 고양이놈! 타죽고 싶어?!"
난 웃고 있었다.
그녀라면 맞아줄 수도 있지만 다른 놈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배가 고프면 와서 아양이라도 떨라구!"
그녀는 사납게 말했고 나는 그녀를 미소띈 얼굴로 올려다보았다.마미의 얼굴이
내 웃는 얼굴을 보더니 핏 하고 웃음이 감돌았다.
그녀의 눈빛이 따스해 지고 그리곤 다가와 내 이마에 주저않고 쪽 하고 큰 소리
내며 키스해 주었다.
"내 귀여운 고양이.이리와서 뭘좀 먹으렴."
그녀는 내가 웃는 것을 좋아한다.싫어하는 자들이 많지만 그녀는 좋아했다.
나는 그녀에게 안겨서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나를 늘어진 바아에 앉히고 내 몫으로
뜨거운 맥주와 김이 펄펄 오르는 스튜를 듬뿍 퍼서 놓았다.
"목이 말랐지? 그럴 거 같았어."
내가 홀짝거리고 먹는 동안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님들의 아우성에 일
갈하면서 테이블로 다가갔다.
나는 목이 말랐던 터라 맥주를 주욱 들이키고는 가게안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람은 많아서 빈 자리는 없다.
테이블은 약 열개 정도로 사십명정도 들어오면 자리가 없다.
삐걱거리는 나무 탁자와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스쳐가서 밖의
차가운 공기에 비하면 이 안은 뜨거울 정도로 더웠다.그러나 땀을 흘리면서 굵
은 팔뚝을 내보이는 선원들은 웃고 떠드느라 정신들이 없었고 몇몇 여행자들인
양 보이는 사람들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자신들도 나름대로 즐기
고 있었다.
마미는 이 가게를 둘이서 지탱하고 있었다.
사라는 접시를 나르면서 마미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미가 주워온 고
아였다.나이는 열여덟이었는데 고집이 센 주근깨의 계집애로 나와는 그다지 좋
은 사이는 아니다.
그녀가 바삐 접시를 나르는 동안 나는 스튜를 할작거리고 먹어치웠다.마미의 솜
씨는 여전히 좋다.
마미의 사슴집이라고 하는 이 가게는 이 항구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중에 하나
로,마미의 남편의 아버지대부터 해왔다고 들었다.마미는 청상과부였는데 남편은
선원으로 바다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않았다.그덕에 그녀는 서른살부터 이 장사
를 시작하고 있었다.맥주와 먹거리를 팔고 위층에는 여관도 겸하고 있다.제법
건실하고 게다가 마미의 성격이 불같아서 그녀의 가게는 평판이 좋았다.이상한
놈들이 얼정거리는 법도 별로 없다.허긴 그런 놈들이 있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지만.
마미는 아마도 오십여세가량일 것이다.
그녀는 체구가 커서 왠만한 선원들과 팔뚝을 나란히 해도 지지않을 만큼 힘도
좋고 체구도 컸다.아름답다고는 결코 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난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그녀가 죽어 없어질때까지 그녀에게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쿠베린.쿠베린.아이구,내 예쁜 것,"
그녀가 내 머리를 안고 키스를 퍼붓고는 내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음.저기 가서 맥주통좀 가져다 줄래?"
난 게으르고 일은 거의 하지않지만 가끔 그녀가 바쁠 때는 도와주는 것을 원칙
으로 하고 있다.게다가 그녀가 큰 손과 몸집으로 날 안고 부비적거리면 특히나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일어나서 뒤 창고의 문을 열자 사라가 고함을 쳐댔다.
"포도주 통도 하나 더!"
그녀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나는 맥주통만 하나 들고 나와서 마미의 앞에 내려놓았다.마미는 귀엽다는 듯이
내 뺨에 키스하고는 맥주통의 뚜껑을 따고 줄지어 놓은 큰 맥주잔에 맥주를 담
았다.어두운 황색액체가 거품을 담고 흘러나왔다.
내가 그것을 넋을 잃고 보는 동안 마미는 무겁지도 않은지 그 큰 잔들을 일곱개
나 지고 나가 술꾼들에게 하나씩 내려주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내 전용 자리에 앉아서 뒹굴거렸다.
사라가 나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뭐야! 포도주도 가지고 오라고 했잖아!"
나는 들은 체도 하지않았다.내가 뒹굴 뒹굴 거리고 있는 동안 마미가 바삐 일하
면서 사라에게 고함을 질렀다.
"통 돼지 다 익었나 보고와!"
사라는 궁시렁 거리면서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마미가 바삐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난로앞에 가 앉으려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보지 못한 낯선 모습이었기때문
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상대도 날 주욱 노려보듯 바라보더니 곧 시선을 돌려서
마미를 돌아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이상했다.
나는 이 가게안에 있는 모든 녀석들의 움직임을 다 알아채고 있었는데 이 놈은
몰랐었다.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서 난 다시 내 전용자리로 가서 놈을 관찰하
기로 마음먹었다.
갈색의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이 반도 드러나지않은 녀석은 난로앞에 앉은 주
제에 로브도 벗지않고 있었다.곧 더워질 텐데 로브도 벗지않는군 하고 내가 호
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내 앞으로 한 녀석이 다가와 서서 물었다.
"야.너.맥주 한잔 따라봐."
나는 그 놈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취한 놈이었다.그리고 낯선 얼굴로 보아 그놈은 날 모른다.
허긴 이 도시 엘리야에서 날 모르는 놈은 없다.그리고 나에게 감히 이렇게 다가
서는 놈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런데 이놈은 감히 다가서서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내가 히죽 웃자 그놈은 헤에 하고 웃음을 짓고는 들고 있는 잔을 내 코앞으로
밀었다.
"이봐.한잔 따르라니까!"
나는 잔을 받아들고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놈은 내가 마미의 말대로 맥주통을 가져왔기때문에 내가 점원내지는 뭐 그런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그러나 그런 착각도 나에게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기에
나는 되도록 잔을 멀리 밀어놓았다.잔을 깨면 마미가 화를 낸다.
놈이 내가 잔을 오히려 밀어버리자 눈을 크게뜨면서 악악거렸다.
"이게! 따르라니까!"
그놈이 내 멱살을 쥐는 것을 사람들이 오오 하고 즐거운 듯이 돌아보는게 느껴
졌다.
다들 알고 있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놈이 내 멱살을 잡는 것을 내버려 두고는
말했다.
"사라! 창문 열어,"
사라는 부루퉁한 얼굴로 날 바라보곤 창문을 환히 열었고 뒤이어서 나는 그녀석
의 허리띠를 꽉 잡았다.놈이 내가 보이는 태도에 약간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나는 우슨 낯으로 그놈의 허리띠를 만지작 거리면서 그놈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
냈다.
"자식이..히죽거리고 있어!"
놈은 취해서 멀건히 있다가 내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나는 그 주먹을 잡고 공손히 창문가로 그를 끌고 가 다리를 걷어찼다.놈이 앞으
로 고꾸라지자 그 뒤를 이어 나는 그 발목도 잡아 단숨에 치켜 들었다.
내 키가 그다지 크지는 않기때문에 내가 그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면 그의 머
리통은 바닥에 호되게 부딪치기 마련이지만 키가 작은 것은 내 탓은 아니다.
와지근 하고 그가 머리를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동안 나는 그의 발목을 잡고 질
질 끌고 창문가에 가서 휘이 휘이 들어서 집어내던졌다.
푹 하고 밖에 쌓인 눈더미 위에 놈이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가게안에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카야! 쿠베린에게 덤비는 놈도 아직 있었어!"
웃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얼굴색이 변한 몇몇이 밖으로 뛰어나가 동료인듯한
그놈을 부축하여 어디론가 데리고 갔고 나는 그들의 환호에 가벼운 답례를 해
보이면서 내 전용좌석으로 가서 앉았다.내가 돈주머니를 마미에게 건네자 마미
는 쯧쯧 고개를 내젓고는 내 손에서 돈을 받아서 어디론가 치웠다.
"그놈 얼만큼 먹었지?"
내가 묻자 마미는 흠 하고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놈의 돈주머니만큼 먹어치웠지."
내가 히죽히죽 웃자 마미는 내 얼굴에 또 한번 키스해 주고는 몸을 돌려서 아직
까지 웃고 있는 자들에게 조용하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문득 난로가에 앉아있던 녀석이 날 바라본다.
내가 그놈에게 시선을 주자 로브를 입은 녀석이 천천히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
다.
그의 턱만 여전히 보였다.매끈하고 흰 턱이다.
냄새가 났다.풀냄새와도 흡사한 싱그러운 냄새였다.
나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란 것을 곧 눈치챘다.인간에게선 이런 냄새가 나지않는
다.
로브를 쓴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물었다.
"엘리야의 쿠베린이란 당신?"
나는 턱을 괴고 그를 빤히 보았다.
역시 맞다.이녀석은 날 보러 온 것이다.
내가 그를 보면서 고개를 그덕이자 그는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을 쉬
더니 가게안을 훑어보았다.
"어딘가 조용한 곳은 없습니까?"
나는 일어서서 위로 손가락질을 해보였다.
내 방으로 가자는 의미였고 그는 고개를 그덕이면서 나의 뒤를 따라왔다.
마미가 내가 그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흘긋 보았고 사라도 그것을 보았
다.나는 마미에게 키스를 던져 보였고 마미는 조금 얼굴을 찡그려보였다.
로브의 사내는 침묵하고 있었고 내가 내 방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여보낼 때
까지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음음..뭐냐?"
내가 묻자 그는 내 방안을 훑어보고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나는 침대에 대
굴 하고 주저앉았는데 그에게 그게 불안감내지는 불신감을 준 것인지 불안한 얼
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당신이 쿠베린이에요?"
목소리가 가늘다.
역시 인간은 아니구나 하고 내가 생각하면서 그를 관찰할때 그가 주저하듯 물었
다.
"아무리 보아도..겨우 십대소년처럼 보이는데.."
나는 히죽 웃었다.
"물론,물론.그렇게 보일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맞은 편에 앉은 그는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짙푸른 초록눈과 청동빛이 도는 갈색머리와 뾰족한 귀,그리고 인간으로는 가질
수없는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겉으로 보아선 십오륙세정도이지만 틀림없이
이녀석은 몇백세는 되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자아,엘프 양반.그래,부탁할 것은 무엇이지?"
내가 묻자 엘프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더니만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을 찾아요."
엘프의 이름은 카산.
북쪽의 노스엘스턴왕국의 엘프로서 귀족집안인데 어느날 엘프의 왕국에 난입한
인간의 사냥꾼들에게 누이동생을 잃어버렸다..라고 하는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난 턱을 잡고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거 언제적 이야기야?"
그는 고개를 숙이고 분노를 삭히는 듯 한동안 침묵했다.
"반년전."
"반년전이라..엘프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에게 자식들이 무슨 짓을 했을지 각오하
고 있어?"
내가 냉정하게 말하자 그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풀냄새가 나는 부드러운 살결을 보면서 나는 입맛을 다셨다.
"흐음..흐음..순진하구만."
"그러,.그러니까..부모님은 단념하셨죠.그러나 난 찾아야 겠어요."
"누이동생이..이 근처의 델리암왕국에서 노예로 팔렸다는 소문을 들었어요.간신
히 숲의 엘프에게 이야길 들어서..여기까지 온 거에요.그러다가 당신 소문을 들
었어요."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의뢰를 받아주실 거죠?"
나는 팔짱을 끼고 그의 눈앞에 앉은 나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호리호리하다.
호리호리뿐 아니라 여자로 오인될 만큼 예쁘장(?)하다.
검은 머리와 녹색눈을 하고 있고 피부는 희다.가끔 나를 놀리려는 자들이 나오
는 것은 그때문.게다가 키도 그다지 크지않다.지금 내 눈앞에 앉은 이 엘프의
소년보다야 약간 크지만 보통 이상은 결코 아니다.
"뭘 줄거지?"
내가 묻자 카산은 주섬 주섬하면서 품안 깊숙이 에서 작은 단검을 빼내어 들었
다.그 단검의 자루에는 푸르고 큰 보석이 박혀있었다.물론 이것은 드워프의 물
건으로 굉장한 장식이 되어있었다.청동과 백금을 사용해서 만든 이 장식용단검
의 가치는 물론 엄청나게 비싼 것이겠지만 그보다 이 눈알만한 이 보석은 보통
물건은 아님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스카이 롬이군,."
"네.스카이 롬입니다.제 생일 선물로 부모님께서 해 주신 겁니다."
카산이 조용히 말했다.그는 그것을 내게 들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았다.
엘프의 가계에서 내려오는 이 스카이 롬은 대개는 탄생석으로 향기를 뿜어낸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이 향긋한 풀향기와 꽃내음을 섞은 이 향기는 이 보석에서
나는 것이었다.이 엘프의 소년은 틀림없이 귀족의 가계였다.
나는 보석에 혹해서 한동안 그 푸른 보석을 바라본 뒤에 품안에 넣었다.
한숨을 삼키고 있던 카산은 날 보더니 진지하고도 불안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도와주실겁니까?"
"응.받아들였다.그 소녀를 찾아내마.이름은?"
"달리아나."
그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눈 안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뺨에 손을 대고는 히죽히죽 웃었다.
"찾아주마.그녀의 물건이라도 있나?"
그는 급히 뒤적이면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백금장식이 된 손거울로 꽤나 고급이
었다.그것을 그가 내밀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너무 오래 가지고 있었어.냄새가 전혀 안나."
"그,..그럼?"
"너와 비슷한 냄새가 날까? 그녀?"
"아..아,네.저랑 쌍동이니까.."
그가 급히 대답하는 순간 나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박았다.
그가 놀라서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나는 덥석 끌어안고 코를 박아 냄새
를 빨아들였다.맥박이 거세어 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그 냄새를 각인했다.
혀를 내밀어서 목덜미를 약간 핥아보았다.
음음..좋은 냄새다.이래서 엘프는 맛있어..먹고싶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카산은 당황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나는 히죽
히죽 웃었다.
"맛있는 냄새.인간과는 다른 좋은 냄새다.인간에겐 누린내가 나거든."
내가 콧등을 찌푸리자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더니 외쳤다.
"나..날 잡아먹을 건가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입안에서 송곳니가 튀어나온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카카.."
나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침대위를 대굴거리고 굴렀다.입안에서 튀어나온 송
곳니가 재빨리 사라지자 나는 입술을 만지작 거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쿠베린이란 것을 기억하나봐."
"아..알고 말고요! 엘리야의 쿠베린! 묘인족의 왕!"
그가 창백해서 날 바라보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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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이건 옴니버스가 될 예정입니다요.^^
엘리야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떠돌이가 많다.
그런 것쯤은 감안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이 훨씬 재미있다.만약에 이 곳이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면 결코
이곳에 엘프따윈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저자거리
에도 드워프따윈 없었을 것이다.
"여어,.쿠베린."
묵직한 얼굴로 파이프를 물고 있던 드워프 마루투가 나에게 낮게 인사를 건넸
다.그는 대장장이 일을 맡고 있다.그가 만드는 무기는 유명해서 용병들이 그에
게 특별주문을 하러 직접 올 정도다.
그는 오늘은 별로 일이 없는 지 자신의 가게 등받이도 없는 쪽의자에 웅크리고
앉아서 늙어빠진 드워프다운 태도로 파이프를 물고 있다.그의 누런 수염에 빵부
스러기가 달려서 지저분한 드워프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내 뒤에 있던 카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드워프 대장장이를 보았다.카산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뾰족한 귀를 숨기고 있었는데 나로선 그게 더 편해서 그렇
게 하라고 놔두었다.
길가에는 갖가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아직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이라 그다지 손님도 통행인들도 없지만 그런데로 북
적대고 있었다.나는 하품을 하고는 몸을 좌악 펴서 기지개를 다시 켰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내 취향이 절대 아니다.
나는 반드시 오후에 일어나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었다.
대저 일찍 일어나서 설쳐대는 것들은 다 천한 것들로 나같은 우수한 종족은 느
긋하게 일어나는 것이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부지런한 엘프는 나에게 아침일찍 와서 졸라댔다.
의뢰금을 건넸으니 얼른 얼른 일을 해달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던 것이다.
"일어나세요! 쿠베린!"
그가 쨍알거려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쳐박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떴다구요! 어서.어서 움직여 주세요! 당신은 내 의뢰를 받아들였
으니 일하란 말이에요!"
그가 어젯밤 놀린 것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인지 떼를 쓰듯이 내 침대가에 와서
고함을 질럭댔고 나는 화가 나서 베개를 그에게 집어던졌다.그는 얼굴을 맞고
뒤로 자빠졌지만 곧장 오뚝이같이 일어나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곤 내가 둘둘 말고 있는 이불을 확 제끼더니 외쳤다.
"당신! 정말로 일어나지않을 건가요! 당신,그래도 묘인족의 왕이에요? 신의를
지켜요!"
그가 허도 쨍알거려서 나는 그의 뾰족한 귀를 잡아 당겨 그의 귀에 속삭여 주었
다.
"너,그렇게 나에게 먹히고 싶은거야? 난 잠을 못자면 ..고기를 먹어야 해..생생
하고 피가 뚝뚝..떨어지는 고길 말야."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그는 입을 똑 다문채 나의 입을 뚫어지도록 바라
보았다.물론 송곳니는 드러나지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나갔다.그 모습에 나는 한동안 침대
에 얼굴을 파묻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조용했는데 저 잔소리쟁이 사라와 작당이 된 엘프녀석은 다
시 내게 도전했다.그는 사라의 뒤에 서서 사라가 날 깨우도록 종용한 것이다.그
의 말을 기꺼이 들은 사라가 나의 옆에 서서 깽깽거리고 고함을 질러댔다.
"밥 안줄거야! 일어나!"
무례하고 시끄러운 계집애.
나는 저런 계집애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그리하여 나는 평소와 달리 이른 낮에 침대에서 나와야 했다.그 덕분에 여전히
몸은 찌뿌드했다.아직 식욕은 없었지만 만약에 먹는다면 마미에게 부탁해서 통
돼지 구이중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향내나는 부위로 골라달라고 말을 해야
지 하고 나는 식사에 대해 심각하게 결정했다.
내가 식사에 대해 결정을 내릴 무렵 카산은 어리벙벙한 상태로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그 같은 깊은 곳에서 지내는 귀족엘프로서는 이런 곳 구경은 당연 했을
리가 없다.나도 그건 잘 알고 있었는데 새삼 녀석이 두리번 거리고 있는 꼴을
보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졌다.
허나,나는 프로이니까 일단 의뢰받은 일은 해결해 주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
되어 그가 벙벙하니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을 구경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목적한
곳으로 다가갔다.
"어마! 이런 대낮에 웬일?"
놀란 어조로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하품을 참고 그녀에게 물었다.
"군터는 있나?"
"있죠.있어요.잘생긴 양반."
마리아가 요염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목에 팔을 감았다.그녀는 지금 일하는
복장이 아닌 지라 평범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나마 양 옆이 주욱 찢어
져 허벅지 안쪽까지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화사했다.즉 보통의 아가씨보단 요
란스러운 것이다.
"화장 ..안했군."
나는 그녀의 목에 코를 박았다.마리아가 간지럽다는 듯이 쿡쿡 웃어댔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진한 키스마크를 남겼다.
"맛있는 냄새! 화장하지 말아! 훨씬 섹시해!"
마리아가 깔깔대고 웃어댔다.그녀는 얼굴을 붉히곤 내 입술에 자신의 것을 겹쳤
다.이미 그녀의 긴 다리가 내 허리춤에 와 감기고 있었다.
음..맛있는 냄새때문에 정신을 잃어선 안되지.
나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물었다.
"나,군터보러 왔어.이따 밤에 다시 와도 되지?"
마리아가 내게 눈을 흘겼다.
스무살의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흑발의 근사한 미녀로 이근처에서 최고로 가는
작부아가씨다.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맨 살결의 모습을 보여준다.왜냐면 난 화장
품 냄새가 질색이니까.
"그래요.쿠브,"
그녀는 윙크하고는 내 뒤에 선 카산을 바라보았다.
"누구?"
"응.의뢰인."
카산은 굳어 선 채 마리아의 화사하고도 매끈한 다리가 내 허리에 와 감겨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드러난 턱이 새빨개져 있는 것을 보아 아마
도 전신이 완벽하게 붉어져 있을 것이라고 난 확신했다.
마리아는 깔깔 웃고는 문을 열어 우리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그녀는 목욕이라도 갔다 오는 것인지 머리칼이 젖어있어 더 매력적이었다.시선
이 자꾸 그녀에게 쏠리는 것은 수컷인 이 몸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에 들어가면 핑크빛으로 좌악 늘어진 융단과 함께 술냄새가 아예 배어버린 테
이블이 곳곳에 놓여져 있었다.그리고 늙어빠진 로비나가 큰 주걱을 들고 점심을
만드는 지 분주하게 부엌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계단은 한 중앙에
있어 이 삼층 건물을 더 좁아 보이게 했는데 즉,아래층은 술집이고 위층은 영업
(?)을 하는 방들의 집합소다.
"어디있어? 군터는?"
마리아가 나에게 매력적인 웃음을 보이면서 물었다.
"이층,내방에 안갈래요? 쿠브?"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그녀는 유혹적으
로 내 뺨을 건들고는 윙크해보였고 나는 견디지 못해서 그녀의 허리를 다시 끌
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허공으로 떠오를 무렵,즉 내가 그녀의 몸
을 안고 고개숙여 키스를 하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가 맥주잔을 내게 집어던졌
다.
물론 맞을 나는 아니다.
나는 잽싸게 몸을 피하면서 키스를 마무리했다.
그녀가 기분좋은 얼굴로 내게 답삭 매달렸고 나는 젊은 여자의 맛있는 냄새에서
코를 돌려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슬퍼하면서 뒤에 선 뚱보를 바라보았다.
낮인데도 술에 취한 뚱보는 계단 머리에 팔을 기대곤 날 바라보면서 훌쩍이고
있었다.이 녀석이 취해있다는 것은 일목요연하다.
취하기만 하면 울기 때문이다.
"군터어!"
내가 한숨을 쉬자, 군터는 누구냐고 묻듯이 내 뒤에 선 카산을 가리켰고 그리고
나선 재빨리 흘러내리는 코를 손수건으로 눌렀다.
"음.의뢰인이야.물어볼 게 있어 왔다."
나는 마리아에게서 간신히 손을 떼고 군터에게 다가갔다.
마리아는 토라진 채로 내게 혀를 내밀어 보이곤 계단으로 뛰어올라가 버렸다.
여전히 근사한 각선미.
군터는 훌쩍이면서 테이블에 가 앉았다.그는 나이 오십여세가량으로 보이긴 하
지만 실은 서른몇 밖에는 안되었다.그가 늙어보이는 이유는 뚱뚱한 데다가 울상
을 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에도 포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 나와 마리아가 보여준 사랑의 장면으로 넋을 잃고 있는 카산의 뒷덜미
를 잡아서 자리에 앉힌 뒤에 나는 군터의 앞에 가 앉았다.
"뭐야? 쿠베린?"
훌쩍이는 군터는 코를 팽 풀었다.
눈이 충혈되어 도저히 이 얼굴이 서른이라고는 믿어지질 않는다.
"너.노예상 바바를 알지?"
"알지.얼마전에도 몇 팔고 갔어."
"바바가 어디있던?"
"베델에 있지.베델공작이 새로운 노예를 갖고 싶다고 불렀대."
"베델공작이? 그 녀석은 겨우 스물 다섯밖엔 안된 주제에 맨날 노예를 사들여
뭘 한대?"
"모르지.뭐.사이좋게 공놀이라도 하는 건지."
그것도 농담이라고 한 것인지 군터는 제가 말한 주제에 저 혼자 히죽히죽 웃었
다.
"내가 전에 듣기로 말야,바바가 엘프를 데리고 있다면서? 너 봤나?"
군터는 코를 다시 캥 하고 풀어내곤 더러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었다.그리
곤 그 더러운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는 기름때가 잔뜩 끼어 이마에 찰싹 붙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봤어.예쁘더군.너무 비싸 사진 못했고.베델 공작에게 팔겠다고 했어."
카산의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는 주먹을 쥐고는 테이블
을 쾅 하고 내리치고는 크게 외쳤다.
"어딥니까! 그 엘프는 어떻게 생겼죠!"
군터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카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카산의 동요를 모른 척 하고는 다시 군터에게 물었다.
"노예상 집합 장소는 어디야?"
"아아..그것도 베델공작의 영지인 아글랑이야.아글랑에서 노예시장이 크게 열
려.알잖아? 베델공작은 돈을 물쓰듯 하는 데다가.."
군터는 살벌한 카산의 눈초리를 느끼면서 조금 술이 깨는 듯했다.
"엄청난 색골이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산이 다시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하고 테이블이 박살이 났고 나도 군터도 눈을 크게 뜨고는 두 동강이 난 테
이블을 바라보았다.원목을 깎아 만들어낸 이 테이블은 상당히 두꺼울 뿐더러 무
겁고도 단단하다.이것을 단지 맨손으로 내리쳐 두동강이 났다면..이녀석의 성미
를 앞으로 돋구지않는 편이 현명할 것 같다.
군터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나는 턱을 고일 장소가 사라져 버렸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리를 꼬아 내 다리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고였다.
"그런데 군터.그 엘프 노예중에서 이런 얼굴을 한 애가 있었나?"
나는 카산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않고 그가 뒤집어 쓴 로브를 홱 벗겼다.
카산이 화들짝 뛰어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군터는 카산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뜬 다음 으으 하고 입술을 떨었다.
"에..엘프였군?"
"그래.엘프야.이렇게 생긴 엘프 소녀가 있었어?"
"아아..잘 모르겠어.내가 본 건 ..두명뿐이었거든.하지만 바바는 네명의 엘프를
데리고 있다고 했고..또 다른 엘프 노예가 있다고 바바가 말했던 거 같아.바바
의 엉망진창 친구들 중에 엘프를 데리고 있는 자들도 서넛 되었던 거 같아."
갑자기 그의 말투가 또렷해진 것은 카산의 미모에 감명을 받은 것인지 혹은 그
의 엄청난 힘에 감명받은 탓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그덕이고 군터의 어깨를 툭
툭 치며 일어섰고 내 뒤를 따라서 카산도 일어섰다.
"그래,그래.그럼 난 간다."
"에..그..그래."
카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군터가 급히 돌아선 카산에게 물었다.
"저기..여자야? 남자야?"
카산이 쏘아보면서 그 말에 대꾸하듯이 바로 옆에 있던 테이블을 다시 한번 후
려갈겼다.
퍼석 하고 테이블이 먼지를 휘날리면서 박살이 나 주저앉았다.
군터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박살난 테이블을 내려다 바라보았다.
"나..남자였군.."
"당장 그리로 가는 거죠!"
카산이 급히 물었고 나는 손을 저어보였다.
"그래.그래."
"거기까진 얼마나 걸려요? 베델의 아그랑이란 곳까지는!"
그가 초조하게 외쳤다.
"음,오래 안걸려.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루반나절 정도인가.."
"어서 출발해요!"
그가 악을 질렀다.나는 거리에서 악을 지르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밥은 먹고 가야지."
"밥이 문젭니까!"
그가 눈이 벌개서 외쳤다.초록빛의 맑은 눈이 엉망으로 충혈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눈물이 글썽글썽해져 있었다.
"카산."
나는 진지하게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어깨에 내 손을 얹었다.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해."
"네? 아시면..바로 출발.."
그가 말하려 하자 나는 점잖게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누르고는 그의 손을 잡아
내 입가로 가져갔다.
난데없는 내 행동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붉히자 나는 진지한 어조로 말
해주었다.
"가는 도중에 내가 배고파 지면..네가 내 도시락 해줄거야?"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나는 그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한 뒤에 그 손을 내려
놓고는 다정하게 어깨를 톡톡 쳐주었다.
그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멍청히 날 바라보는 동안 나는 그를 놔두고는 다시
나의 집이자 마미의 집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미는 나를 보곤 웃는 얼굴로 이미 음식을 듬뿍 퍼주었다.
그녀가 자랑하는 훈제통구이에 구수한 선지맛이 배어나는 스튜가 두그릇 있었
다.내가 허겁거리고 먹어치우는 동안 엘프 카산은 코를 찡그리고는 오도마니 앉
아있었다.
마미가 뜨끈거리는 맥주를 내 앞에 턱 하니 내려놓았고 나는 그것을 좍 들이키
면서 마미의 아름드리 거목과도 같은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미! 사랑해!"
그녀가 호탕한 소리로 웃고는 내 등짝을 철썩 때렸다.
"내 귀여운 쿠베린.오늘 어디갈거야?"
"응.일하러."
그녀는 내뺨에 자신의 것을 비비고는 아무것도 먹지않는 카산을 도끼눈으로 바
라보았다.
"왜 안먹어? 내 요리가 불만이야?"
"아..아니요.그게 아니라.."
"먹어!"
그녀가 엄한 눈초리로 강요했다.나는 그녀의 허리에 코를 묻고는 그녀가 언제나
앞치마에 묻혀오는 피냄새와 고기 냄새,그리고 음식냄새를 맡고는 그녀의 손목
에 코를 댔다.
"음,오늘은 기분이 나쁘군,마미."
마미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내 머리칼을 사납게 흐뜨러뜨렸다.
"내 귀여운 고양이.이번 의뢰인은 참새처럼 먹어대는 구나."
나는 깔깔 웃었다.그녀는 내 등짝을 한번 더 후려갈기고는 저벅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전용 자리에 앉아서 식어가는 피 냄새 물씬한 스튜그릇을 멍하니 바라
보는 카산에게 물었다.
"뭘 다른 거 먹겠어?"
"...아뇨.."
그가 고개를 급히 저었다.
"저..저어기..쿠베린,다..다 드셨으면 ..이제 출발해요."
그가 울상인 얼굴로 말했다.
음 귀여운 데가 있는 의뢰인이군.이런 애들만 오면 얼마나 돈벌이가 간단하단
말인가.
나는 조용히 머리를 주걱거렸다.
"기다려.맥주 한잔 더 마시고."
내가 지나가던 사라에게 한 잔 더 했더니 사라가 당장 도끼눈을 하고 깽깽 소리
를 내질렀다.
"대체 당신은 정신이 있어? 쿠베린! 이 늙어빠진 고양이! 이 사람은 지금 동생
을 찾아 애가 탄다는 데 아구 아구 먹어대기나 하고! 이 게을러빠진 작자같으
니!"
나는 하도 시끄러워서 그녀의 얼굴에 뭔가 집어 던질까 생각하다가 이성을 발동
시켰다.그렇게 해선 곤란하지.저 못생긴 소녀가 얼굴에 상처라도 입는다면 후환
이 두렵다.
"시끄러우니까 맥주 한잔 가져와!"
내가 잘라 말하자 사라가 이번엔 카산과 같이 울상이 되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대체,,당신이란 작자는 동정심이란 게 없어?"
"없어.난 맥주가 먹고 싶을 뿐."
내가 잘라 말하자 사라가 하 하고 기가 막힌 듯 나를 노려보더니 씩씩 대며 외
쳤다.
"네가 갖다 먹어!"
그녀는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체에 하고 팔짱을 낀 채 맥주가 오기를 기다렸다.
사라는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도 결국은 가져온다.
아닌게 아니라 잠시 기다리니 그녀가 맥주를 가지고 와 사납게 집어던지듯이 테
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그녀가 도끼눈을 하고 가버리자 마자 나는 맥주를 좌악 들이키고는 카산이 나를
바라보는 얼굴을 빤히 보고 물었다.
"네 거,내가 먹어도 되지?"
"네에.."
카산은 자신의 밥그릇을 내게 밀어 놓았고 나는 그것을 받아 아귀아귀 다시 삼
켰다.약간 식긴 했지만 여전히 맛은 좋다.
"저..정말 많이 드시는 군요,."
카산이 멍하니 중얼거렸고 나는 깨끗이 다 비운 뒤에 기분좋게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배고프면 널 잡아먹을 지도 모른다고."
흐흐 웃자 카산이 억지로 배시시 웃었다.
"그거..농담이죠? 당신,난폭하게 말하지만 ..사라나 마미에게 대하는 거 보
면.."
어쭈.날 놀리는 군.
흐흐하고 난 웃어보이곤 카산의 손을 가볍게 잡으려 시도했다.그러나 카산은 재
빨리 피해버렸다.
"거봐.무섭지?"
내가 킬킬 거리자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묘..묘인족을 안다면 ..당연히.."
그가 중얼거렸고 나는 흐흐 웃고는 뒤에 다가오는 녀석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물
었다.
"스카.마차 구했어?"
"아아.그래."
스카는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 거리면서 내 옆에 와 앉았다.
카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스카는 카산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히죽 웃어보
였다.
"너랑 이놈이랑 나란히 앉혀놓으면 장사 잘되겠다.쿠베린."
카산이 그와 나를 번갈아 보았고 나는 일어서서 카산에게 손짓했다.
"출발이야."
카산이 급히 일어나면서 물었다.
"무슨 장사요?"
"뭐겠어? 미소년장사지."
히죽이 스카가 웃어댔다.
스카는 용병이다.
그리고 그는 용병인 주제에 피를 매우 매우 싫어한다.피를 매우매우 좋아하는
나의 성격과는 반대지만 제법 치밀한 면이 없잖아 있다.아주 약간.그는 그럼에
도 불구하고 오래된 용병답게 검도 잘 쓰고 도끼와 창도 제법쓴다.비록 나에게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제법 솜씨가 있다.
이녀석과 내가 아귀가 맞게 된 이유는 이녀석이 용병대에 들어가기 싫어하기 때
문이다.즉 집단이란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아무리 솜씨 좋고 머리좋은
녀석이라도 혼자만 일하길 즐긴다면 그 효용가치는 반푼밖에는 안된다.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호원정도로 그런 일이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다.게다가
그 주제에 또 정의감에 넘쳐 흘러 추악한 부자들의 경호원은 배겨내질 못한다.
이런 녀석이 어찌 잘나가는 용병이 되겠는가.
당연 나의 심부름꾼이나 해야지.
"갑자기 왠 마차야? 넌 마차를 타는 걸 싫어하잖아?"
스카가 말을 몰면서 물었고 나는 가능한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면서 대꾸했다.
"응,나는 어떤 가련한 아가씨를 구해올 참이거든.그 아가씨보고 걸어라 라고는
말할 수 없잖아?"
옆에 있던 카산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그는 내 손을 잡고 싶은
모양이지만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관도를 통해서 내달리는 마차는 4인승으로 두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이 마차
를 빌리라고 이미 스카에게 말해두었고 그는 빌려온 것이다.
마차를 타고 달리면 아그랑까지는 겨우 서너시간밖에는 걸리지않으며 물론 걸어
가는 것보다는 빠르다.내가 달려간다면 겨우 삼십여분이 걸리겠지만 스카나 이
엘프 녀석이나 그렇게 빠르진 못하니까 내가 참아야 한다.
나의 도시 엘리야에서 아그랑까지는 곧장 관도가 뚫려있다.
델리암왕국은 상인에게 매우 친절한 자세를 보이고 있어 통상관계나 상업의 발
달에 매우 주력하고 있었다.덕분에 각 자치도시나 영주들의 영지로 통하는 무수
한 관도가 델리암왕국의 전 영토에 거미줄 처럼 깔려있다.이 관도를 따라 달리
면 대개는 경비대도 가끔 보는데 그 덕에 산적이나 야적떼가 적은 편에 속한다.
물론 적을 뿐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다.만약 없다면 나의 장사는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임은 확실한 것이니까.
흐흐 웃고 있던 나는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바닥에 모포를 잘 깔
고 마차칸에 앉은 카산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카산이 어
리둥절하는 동안 나는 되도록 편안히 누웠다.그리곤 그의 무릎에 머리를 배고
스카를 향해 외쳤다.
"야! 아그랑에 도착하면 깨워라!"
그리곤 아까 못잔 잠을 청하러 눈을 감았다.
마차를 몰던 스카가 흐 하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게을러 빠진 고양이놈."
"너..죽는다.스카."
나는 그렇게 그에게 경고하고는 따스한 살내음이 콧속으로 스미는 것을 기분좋
게 음미하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바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인지 사방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저자거리로 변해있었고 스카는 묵묵히
마차를 몰고 있었다.내가 고개를 돌려 엘프 녀석을 보니 그녀석은 다리가 저릴
텐데도 내 머리를 아직도 고이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고 있었다.
기특한 녀석.
나는 흐음 하고 몸을 일으켜서 일어나 앉았다.
카산이 날 바라보면서 기대에 찬 눈빛을 던지는 동안 나는 스카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묵을까?"
스카가 뒤도 돌아보지않고 대꾸대신 손가락질을 해보였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좁아 터진 골목길. 그 한 모퉁이에 비죽이 고개를
내민 낡아빠진 간판이 보인다.
'음유시인의 노래터'
"또 저기냐!"
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스카가 모른 척하고는 그리로 마차를 몰았다.이 마차가
아마도 조금만 더 컸다면 결코 드나들 수 없을 그런 골목으로 그는 마차를 몰다
가 세웠다.우리들은 비적거리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카산은 주삣대면서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
다. 음침한 골목에는 군데 군데 취한들이 쏟아놓은 오물이 바짝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나는 카산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장을 바라보았다.
불야성을 이루는 시장터는 갖가지 물건을 파는 장사치로 가득차있었다.이미 해
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터라 여기저기엔 불을 밝히기 위해서 이곳 저곳에 등을
밝혀놓고 있었다.베델 공작은 호색한이긴 하지만 절대로 폭정을 하는 법도,부당
한 이익을 취하는 법도 없어 제법 상인들에게 인기가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야시장- 밤에 서는 시장이 아니라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시장이다-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멀리 엔도라에서 오는 장사치들은 근사한 엘루아 융단을 내어놓고,멀리서 온 드
워프의 대장장이는 음침한 얼굴로 주억거리면서 기사들에게 팔 검을 내어놓고
있다.어딘가 이름도 모를 곳에서 온 아인족의 비늘이 달린 어떤 장사치가 심각
한 얼굴로 호박색 눈을 번뜩이면서 사람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여기저기서 애
들이 뛰어다니다가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뚱뚱한 아줌마
들과 턱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사내들이 삿대질을 하고 싸우고 있었다.
번쩍이는 팔찌등 장신구를 파는 떠돌이서부터 오랫동안 이 아글랑에서 장사를
해온 토박이 장사치들까지 이 아글랑의 중심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카산이 넋을 잃고 입김이 나오는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난리를 치는 이 장터의
인간들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전신의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역시 추운 날
씨 탓으로 약간 상태가 좋지않았다. 이런 몸에는 뜨거운 맥주와 뜨거운 스튜,그
리고 뜨근한 난로가가 어울릴 것이다.
나는 '음유시인의 노래터'의 간판을 노려보았다.
이 구석에 박힌 낡아빠진 가게를 선호하는 스카는 단지 한가지 이유만으로 이곳
에 무조건 숙박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의 누이동생 잔느가 경영하는 가게란 이유다.
아직도 멀건히 선 카산의 목덜미를 끌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자리도 그다지 좋지않고 가게도 좁다.게다가 맥주맛은 그
저그렇고 뭐 하지만 ..마미만큼은 못하지만 음식 맛은 나쁘진 않다.허긴 스카의
누이가 하는 곳이라 할 지라도 난 음식맛이 나쁘다면 절대로 이 곳에 오지않는
다.
스카가 이미 들어가 바아에서 맥주를 따르고 있는 그의 누이동생에게 키스하고
있었다.그의 누이동생 잔느는 그와 닮은 주먹코와 그를 전혀 닮지않은 덩치와,
그와 전혀 닮지않은 발랄함을 가지고 있다.내가 카산을 데리고 들어가자 상쾌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내게 미소를 던졌다.
"어서와요.쿠베린."
"응."
나는 간단히 대꾸했다.
아무데나 빈 탁자에-허긴 반 이상이 비어있었다.저녁 때인데도 불구하고-턱 하
니 자리잡고 앉자 그녀가 눈치빠르게 뜨근 뜨근한 맥주를 내왔다.그리곤 따근한
수건을 나와 카산에게 건네주었다.
"쿠베린,어쩐 일이에요? 당신은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거 질색일텐데."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그녀의 재빠른 서비스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만족
스레 맥주를 들이켰다.
"이 게으른 고양이가 여기까지 왔을 땐 일이지,뭐."
"아."
그녀는 카산을 보았다.
카산이 깊게 로브를 쓰고 있다가 천천히 로브를 벗자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잔느는 그다지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음식? 쿠베린은 선지가 듬뿍 들어간 스튜와 반쯤 익힌 꼬치구이 바베큐로
할건데."
나는 흐흐 하고 웃었다.만족스런 메뉴다.
당황한 카산은 그녀를 보다가 다시 날 보곤 스카를 보았다.스카가 그의 눈치를
재빨리 보면서 대신 주문시켰다.
"담백한 것으로 해.말린 과일을 넣은 요리라면 무난할 거야."
"그러죠."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일어서 주방으로 갔다.
"맥주 더할건가?"
바아에서 맥주통을 든 사내가 묵직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와 같이 일하는 절름발이 사내,코스루는 용병이었다가 은퇴한 사내로 얼굴
과 팔뚝에 누구든지 질릴 것같은 흉터가 길게 늘어져 있다.그는 스카의 선배격
이었고 지금은 스카의 누이인 잔느의 남편이었다.오십여세가 되어 보이는 데 잔
느는 겨우 삼십여세로 거의 20년 연하의 결코 어울리지않는 부부다.솔직히 말해
나는 이 가게가 잘 안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코스루의 음침하고도 끔찍한 얼굴
탓이라고 믿고 있다.
한 가운데가 벅 그어진 얼굴의 그 흉터와 무언가가 찢어갈긴 듯한 흉터가 고스
란히 남은 그의 팔뚝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척이나 어지럽히고 있기때문이
다.
"베델공작의 노예장터는 언제 서는 거야?"
"내일 낮에."
코스루는 무뚝뚝한 어조로 억양없이 대답하고 내 잔에 맥주를 주욱 따라 주었
다.그는 나에게 호감을 전혀 가지고 있지않았고 뭐 그런 면에선 나도 할 말이
없다.나도 그가 전혀 좋지않았으니까.
그의 시선이 잠시 카산을 훑었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 군.이 엘프."
스카가 코스루의 말을 듣고 카산을 보았다.얼굴이 파리해보였다.
"가서 쉬는 게 좋겠다.얼른 음식을 좀 먹고."
카산은 네 네 하고 고개만 그덕였다.
"일어나세요! 쿠베린!"
그 목소리.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카산이 내 방에 온 것이다.
나는 침대위에서 대굴거리고 스카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고 스카는 코를 골고 있
었다.카산은 내가 그를 끌어안고 자는 것을 보고 약간 경악한 듯 했지만 나에게
다가와 소리쳐서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저에게.."
나는 대답으로 그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조용히 눌러주었다.
우욱하고 그가 뒤로 나자빠지는 동안 내가 경고해 주었다.
"노예장은..낮이야.낮.들었겠지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 지는 모른다.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으니까.
내가 잠에서 깬 것은 내 휴대용 난로가 없어서 품안이 서늘했기때문이다.
스카는 아직 정의의 사도로서 피가 끓는 탓인지 인간치고는 따스하다. 여러명의
인간을 시험해 본 결과 그는 내가 아는 인간들 중 가장 따스하다.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비비적거리고 일어서니 햇빛이 방안에 반쯤 들어와 방안
의 온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오.제법 오늘은 따스한 날씨잖아?
어느정도 풀린 몸을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문득 텅 빈 방안을 보고 깨달은 것은 스카녀석, 이 난로가 감히 주인이 깨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분노였다.
자식, 방자하군.
옷가지가 걸린 것을 확인하고 적당히 걸친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뭐가 그리
도 재미있는지 스카와 카산,그리고 잔느가 낄낄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나는 약
간 심술이 나서 그들의 옆을 지나면서 잔느에게 물었다.
"더운 물은 없어?"
"없어."
대답한 것은 코스루였다.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신 대꾸하고는 나를 아니꼽다
는 듯이 바라보았다.
흐응,아니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해주고 어슬렁거리며 밖에 나와보니 어랍쇼,눈이 내려 제법 쌓여있었
다.아글랑의 더러운 길을 깨끗이 덮어버린 눈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제법 상쾌
해졌다.내가 그 눈을 퍽퍽 밟아주면서 우물가로 가보니 몇몇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나는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물 한 바가지 얻어서 양치겸 세수
를 적당히 마쳤다.
물을 긷던 어떤 예쁜 소녀가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계집애로군 하고 내가 마주 미소를 던지자 얼굴이 발개진
그녀가 화들짝 놀란 척을 하면서 물동이를 지고 가버렸다.
호오.,아침부터 기분이 나쁘지않군.
내가 싱글대면서 가게에 다시 들어 오니 잔느가 내가 좋아하는 스튜를 한가득히
끓여 놓고 나를 맞이했다.
"이제 장이 설 시간이야."
코스루가 무심히 말했고 카산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발딱 일어섰다.
나는 스튜를 먹어대면서 스카에게 명령했다.
"바바의 숙소는 알아놨어?"
"아,에브라의 푸른 날개 란 여관이야.최고급여관에서 머무는 거 같더군."
"그 돼지 말고 다른 녀석들은?"
"모두 거기서 머문대,노예상들이 전부 모여서 쓸만한 애들을 골라 베델공작에게
내밀어 볼 건가봐."
카산의 얼굴이 굳어지고 앞니로 하얗게 질린 입술을 꾸욱 누르고 있다.그런 표
정을 보아 하니 매우 다급해 하는 듯 해서 나는 순순히 서둘러 주기로 했다.
"그럼 지금 에브라로 가자."
"넵."
카산이 뛰어오를 듯 기뻐하는 순간 나는 잔느에게 한 그릇 더 하고 말했다.
'에브라의 푸른 날개'는 최고급여관으로 보통 귀족이나 거상들이 머무는 곳이
다.종업원이 약 육십여명 되며 식사시중을 드는 녀석들만 이십여명이 넘는다.당
연 호위하는 놈들도 있고 허드렛일을 하는 놈들도 있었다.
스카와 나,카산은 에브라의 푸른 날개의 거대한 대문을 막 들어서서 식당문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이 여관은 다른 곳과 달리 식당만 이층이었다.
일층은 흔히 보통 사람들이 와서 먹는 곳이고 이층은 귀족이나 대상들만이 출입
한다.당연 나는 이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식사담당인듯한 점원이 우리들을
찌릿 하고 바라보며 은근히 신분을 물어왔다.
"나? 나는 쿠베린이다."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내가 들어서는 것을 감히 막지 못하는 것을 보아 녀석의 견문이 좁은 건 아닌
듯해서 나는 씩씩하게 이층으로 올라 바바의 거대한 몸집을 찾았다.
바바의 성을 나는 모른다.허긴 내가 그의 성을 알 바도 없고 알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어찌되었든 이 뚱뚱한 놈을 나는 바바라 부르고 다른 자들도 다 바바
라 부른다.
놈은 옆에 미녀 둘을 거느리고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는 말 그
대로 부러질 듯한 엄청난 음식이 쌓여있었다.
향기로 보아 틀림없이 비싼 포도주로 절인 듯한 구앙요리와 온갖 향신료를 듬뿍
듬뿍 넣은 거대한 스튜와 이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멀리 더운 지방에서 가져
온 지하의 과일들과 넘쳐흐르는 포도주가 꿀병과 나란히 놓여있었다.
나는 갑자기 식욕이 동해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맞은 편에 턱 하니 앉았다.그의
뒤에 서있던 말뚝같은 거인 두명이 날 보고 눈을 부라렸다.
"뭐야?"
바바는 구앙의 다리 한쪽을 입에 넣다가 날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쿠베린!"
그의 턱이 약간 굳었다.이중턱도 부족한 사중턱을 가진 이 녀석에겐 목이란 게
존재하지않으며 그 배는 거의 동산을 방불케 한다.겨우 오십세도 안된 놈이 이
렇게 살이 쪄서야 어디 써먹겠는가 하고 난 그 움직이는 비계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녕."
뒤에선 스카가 자신의 동종업자인 바바의 호위를 향해 윙크 해보이고 있었다.두
사내는 눈쌀을 찌푸린 채 나와 스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바바의 식탁앞에서 가장 먹음직 스런 통으로 구운 새끼 돼지의 배를 점잖
게 가르면서 그에게 물었다.
"잘있었나?"
"아아..왠일이죠.쿠베린?"
바바의 안색이 곱지 못하였다.옆에 앉은 두 미녀는 날 보고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가볍게 윙크해보였다.
"음.조금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나는 시익 웃으면서 돼지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생각한 대로 이 새끼돼지 통구이는 배안에 온갖 향신료를 넣고 쌀과 마른 과일
을 넣어 찐 것이다.근사한 냄새가 내 후각을 어지럽혔다.
"뭡니까? 저..저는 지금 식사중이고..이미 약속이 되어 있어서."
그가 약간 엉덩이를 뒤로 빼려는 자세를 취했다.
"아아..너무 당황하지 마.바바.난 그저 조금 물어보려고 해."
"뭘요?"
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보았다.
"어릴 때 부터 난 바바를 잘 알고 있어.그지?"
내가 빙글 빙글 웃으며 말하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동한 뺨에 흐르는 땀이 그를 더더욱 축축하게 보이게 했다.늘어진 양볼 옆에
는 에메랄드로 만든 듯한 귀고리가 걸려있고 포동한 손가락에는 굵은 아메지스
트가 박힌 금반지가 세개나 끼어져 있었다.입은 옷은 흰 아그라노의 모피에 안
은 비단이다.돈좀 벌었군 하고 내가 새삼 생각하면서 새끼돼지를 먹어치우는 동
안 바바가 급히 다시 물었다.
"자자.뭘 물어보실 겁니까? 전 약속이 있어요."
"알아.알아.베델과의 약속인 것은."
"아시면서,,."
그가 우물 우물 거린다.
"음,요즘 노예시세에서 말이지,엘프소녀는 얼마나 하나?"
"아아..노예시셉니까?"
그의 얼굴이 금방 화색을 띄었다.
옆에 카산이 바르르 떨고 있었지만 바바는 날 보면서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
고 있었다.
"음,.요즘은 구천길레정도 합니다.소년은 팔천 길레.그러나 워낙 엘프는 구하기
어렵고.."
그가 턱을 어루만졌다.
"게다가 엘프사냥꾼이란 놈들은..그다지 좋은 놈들이 못됩니다.저질인 놈들이
많아서 상품 가치가 있는 엘프는 ..별로 많지않아요."
"그 엘프 사냥꾼들이란 놈들은 어떤 놈들야?"
카산이 바르르 떨고 있다.그의 몸전체에서 분노의 기운이 뻗히고 있었다.
"말 그대로 쓰레깁니다.원래 노예란 자진해서 몸을 파는 자들을 정법 거래로 하
는 거 잖습니까? 그런데 놈들은 엘프의 마을이나 아인족의 마을을 습격해서 말
도 제대로 못하는 애들을 잡아와선 노예상들에게 파는 겁니다.나중에 그일을 알
게 된 엘프족이나 아인족에서 우리들을 찾아와서 얼마나 행패를 부리는 지!"
그가 한탄하듯 말했다.
"저희들은 분명히 노예들에게 묻는 다구요,너 진짜 자진해서 온 거니 하고 말이
죠."
나는 흐 하고 식탁 밑의 그의 발을 걷어 차 주었다.
"너 농담하냐! 잡혀온 애들이 아니오 할리가 없잖아!"
음음 하고 일그러진 얼굴이 된 바바는 차인 정강이를 쥐면서 억지 웃음을 띄워
보였다.
"어쨌든 놈들 때문에 상당히..우리도 손해를 본다구요,"
"알았어.알았어.너,엘프 몇이나 데리고 있냐?"
"아..세명입니다.모두 적법한 절차를 거둔..애들로.."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바라보았다.
"바바,넌 나에게 빚이 있어.그지?"
"아,.."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엘프 노예를 하나 구하려는 데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네가 어릴 때
저지른 일들을 조용히 덮어주도록 노력하겠다."
바바의 얼굴이 항의로 일그러졌다.
"전에도 그런 말 하고선 아직까지 계속이잖아요! 쿠베린!"
그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노력하겠다고 했잖아? 앞장서."
내가 잘라 말하자 바바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뒤에 선 자신의 호위들을 바라본
다.나는 코웃음을 쳤다.
"장난하니? 바바? 너 설마하니 나에게 뭔가..대항하려는 거 꿈에도 생각마."
나는 킬킬 웃었다.
호위들이 검자루를 쥐려다가 우움 하고 멈추었다.
그들도 애송이는 아니다.나에 대해선 다들 알고 있었다.나에게 덤벼 들어 살아
난 놈들은 없다.
바바는 한숨을 쉬면서 아리따운 미녀들을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정말..정말 한번만이죠? 그죠?"
"시끄러,나중에 네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널 기꺼이 도와주잖아?"
바바는 날 흘겨 보았다.
"그치만..그땐 엄청난 돈을 요구할 거잖아요?"
"잔소리가 많다."
스카가 킥킥대면서 긴장하는 카산의 어깨를 잡아주고 있었다.
그는 아마 방을 일곱개 정도 잡아놓았던 모양이었다.여기저기에서 호위들이 우
리들을 보고 긴장된 눈빛을 던지고 있는 동안 나는 바바의 뒤에 느긋하게 서서
그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참아주고 있었다.
그가 복도를 계속 걸어 드디어 어떤 방앞에 멈추어 섰다.그리곤 호위를 시켜 문
을 열게 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안은 밝은 햇빛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침
대가 세개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 세명의 소녀들이 앉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보고는 카산과 닮은 냄새나 얼굴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김이 빠졌다.둘은 금발,하나는 흑발이었다.
카산도 그런지 긴장했던 몸이 흐늘 거리면서 스카의 가슴으로 기대버렸다.
"자아..이 애들입니다.이쪽은 숲의 엘프고.이 애는 물의 엘프,이쪽은 땅의 엘프
죠."
바바가 소개했다.
나는 그들을 하나 하나 보고는 공용 엘프어로 물었다.
"너희들 중에 노스엘스턴에서 온 엘프를 아는 자가 있냐?"
소녀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었다.
그러자 카산이 로브를 확 벗어 재끼고는 간절히 그들에게 외쳐 물었다.
"내 누이를 아는 분은 없나요? 에닌을 아시는 분은?"
앗 하고 그들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한눈에도 고귀한 얼굴의 엘프인 카산은 노스엘스턴의 귀족엘프라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엘프들은 보통 평범한 엘프들로 사람으로 말하면
평민 엘프임은 확실했다.
"저희들은 에닌이란 분은 모릅니다."
지저귀는 새 소리를 하고서 검은 머리의 엘프소녀가 대답했다.그녀는 진지한 얼
굴이 되어 나와 카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칼,이건 드문 검은 까마귀의 엘프로,숲의 엘프중 하나다.변
신술이 있어서 능히 도망갈 수 있을 텐데 여기에 있다니 하고 나는 조금 의외였
다.
"넌 누구냐?"
내가 까마귀의 엘프에게 물었다.
검은 머리에 우아한 목을 가지고 있는 소녀는 열댓살 정도로 보였는데 다른 엘
프들보다 월등히 침착했다.
"비오나라고 합니다.묘인족의 왕이시여."
그녀가 날 알아보고 있었다.
호오 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아는 것을 보면 이 애는 상
당히 나이가 든 게로군 하고 고개를 그덕이고 있을 때 카산이 머리를 쥐어 뜯으
면서 바바에게 덤벼들었다.
"내 동생은 어딨어!"
흥분한 그의 팔뚝이 바바의 거대한 비계를 짓누르면서 단숨에 그를 벽으로 치밀
어 붙였다.펑 하고 바바의 거대한 몸이 가냘픈 엘프의 손에 내동댕이쳐져 벽에
붙어 버리는 순간 그의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빼어들어서 카산의 목을 겨누어갔
다.옆에 서있던 스카가 놀라 카산의 팔뚝을 잡아 챘다.
"진정해!"
원래는 잡아 채려 했었겠지만.. 나는 스카에게 카산의 무서운 힘을 알려주지않
았다.스카는 잡아채기는 커녕 거구를 휘청이면서 카산에게 휘말려 비틀거렸고
다른 호위들은 카산에게 검을 겨누기만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주인님을 놔드려!"
"놔라!"
바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나는 카산이 흥분해서 그를 짓눌러 죽이긴 간단
하겠군 하고 여유롭게 생각했다.
"사..살려줘! 내가 어떻게 알아!"
바바가 비명을 올려댔다.
나는 카산의 옆에 가서 바바에게 물었다.
"다른 엘프노예들을 가진 놈들은 누구 누구지?"
"모..몰라! 다들 내어 놓지를 않는다구! 난,.난..."
"베델공작의 앞에서 품평회를 할 거라던데? 사실야?"
"그,그..그래! 쿠베린! 살려줘어!"
바바의 얼굴이 자주색으로 변하고 컥컥 거리기 시작했다.그의 목을 누르고 있는
카산은 증오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로 당장이라도 바바의 목을 부러뜨릴 듯
짓누르고 있었다.
"음,..그럼.우리들도 베델의 성에 가봐야 겠군,그지?"
"쿠...쿠,.베.."
바바가 욱욱 대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컥컥거렸다.
더이상 견딜수 없었는지 호위중 하나가 카산에게 검을 찔러왔고 다른 자들도 일
제히 그를 향해 칼을 휘둘러댔다.스카가 그 검을 막아서는 동안 나는 카산의 어
깨를 잡고 완강하게 바바의 목을 조르고 있는 그의 팔뚝을 잡아 끌었다.
그러자 눈에 뵈는 게 없는지 카산이 퍽 하고 감히 내 배를 팔꿈치로 갈겼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뒤로 집어던
져버렸다.
콰당 하고 카산의 몸이 나동그라 지자 마자 바바가 캑캑 대면서 바닥에 혼절하
듯이 쓰러졌는데 나는 그의 얼굴에 대고 말해주었다.
"네 숙소에서 머물 게,바바."
그리고 나선 나는 몸을 카산에게 돌렸다.
카산은 흑흑 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에게 다가서자 마자 나는 그 녀석의 턱을 걷어차올렸다.
그가 뒤로 나동그라 지자 놀란 스카가 나의 팔을 잡고 외쳤다.
"왜,..왜 이래!"
"이 건방진 엘프자식! 감히 누구 앞에서 발광하는 거야!"
나는 그의 옆구리를 한 번 더 걷어찼다.
감히 날 치다니!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는데 그 덕에 전신에 살기가 돋쳐올라 나도 모르게
손톱이 길게 솟아 오르고 송곳니가 튀어 나왔다.그것을 보고 스카가 재빨리 뒤
로 물러났고 보고 있던 호위들과 바바도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정면으로 날 본 카산은 겁에 질려 눈이 휘둥그레 져서 비슬 뒤로 기어서 덜덜
떨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내가 알아서 한다구! 이 얼간이야!감히 누구 앞에서 건방을 떠는
거야!"
내 고함소리가 쩌렁하게 울려퍼져 바로 옆에 있던 방 유리창이 왕창 깨져버렸
다.
귀를 감싸안고 예민한 엘프들이 공포에 질려 울기 시작할 때 카산이 머리를 무
릎에 내리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잘..잘못했어요!"
그가 흐느껴 우는 동안 나는 손톱을 집어 넣고 홱 고개를 돌려서 바바를 바라보
았다.바바의 얼굴도 공포에 질려있다.그는 내가 변신하는 것을 몇번이나 보았기
때문에 더 무서워 할 지도 모른다.
"음.,뚱땡이 바바.겁낼 거 없어."
나는 되도록 점잖게 말했다.
송곳니가 아직 나와 있어 시익 웃으면 그대로 드러난다.
스카는 아무것도 못본 척 하고 약삭빠르게 엘프 소녀들을 위로 하고 있다.새파
랗게 질린 바바를 보면서 나는 달래 듯하면서 다가가 천천히 말했다.
"이 엘프자식은 널 해치지못할 거야.내가 있으니까."
나는 아주 믿음직 스런 태도로 말했다.
"대신에, 알지? 바바?"
난 히죽이 웃었다.아직 몸안에 분노로 인한 살기가 남아있어 송곳니가 수욱하고
입술 사이로 드러난다.
"내 성미를 건드리면 네 몸뚱이를 갈기 갈기 찢어 발겨 거리에 갈갈이 흩어놓을
것이란 걸.."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곤 뒤로 넘어가 버렸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
이수영 (ninapa )
[쿠베린] 제 1화 엘프의 구출 4 1998-01-12 21:23 462 line
KUBERIN.......
내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4
"푸하하하..어서오시게나!"
"어서와!"
"반갑네."
결코 반가울 것 없는 사내들이 반가운 척을 하고 있었다.
베델 공작의 성,대전 안.
둥글고도 높은 천장은 둥근 치즈를 잘라놓은 듯이 보였고 우아한 색조의 벽화와
조각들이 금박과 은박을 입고 번득이고 있었다.바닥에 깔린 녹색이 깃든 청색
카펫은 분명 엘루아 융단이었다.바닥은 흰 대리석을 깔았는데 군데 군데 타일이
보인다.물결무늬를 넣은 타일은 단조로운 바닥석재에 변화를 주고 있어 보기에
영 나쁘지않다.
음,약간 인색했군.상당히 좋다.
이 베델공작은 올해 스물 다섯이라 알려져있다.그의 부친 베델대공은-대공이라
부르는 것만 보아도 보통 인물은 아님을 알수있다- 델리암 왕국이 야만인 팔라
샤족의 습격을 받았을 때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으로 알려져있다.
역시 그의 조부인 베델노공-이쪽도 상당한 사람으로-은 델리암 왕국의 왕권분쟁
때 태자의 호위로서 태자의 생명을 일곱번 구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어찌
되었든 이 베델 집안은 상당한 전사의 집안으로서 이 일대 베델공작의 영지는
부유함과 명랑함의 대명사를 가지고 있었다.내가 베델의 영지에 속하지 않는 자
유도시 엘리야에서 살긴 해도 그의 영향은 매우 크다.엘리야의 주민이 대부분
어부와 상인,농사꾼 그리고 약간의 용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베델의 주민
대부분은 상인과 농사꾼이 대부분을 이룬다.물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긴 하겠
지만 베델의 영지의 상인들은 거의 자유도시에서 누리는 것 정도의 권리를 누리
기때문에 상인들에겐 인기가 좋다.
자유도시는 자유롭긴 하지만 약간 위험 부담이 있기때문이다.즉 치안이 일반 영
지보다 좋지않은 것이다.그런 면에서 본다면 베델영지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그의 변덕에 좌우된다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
머리가 좋았던 그의 조상들은 아무도 돌아보지않던 바위만 그득한 돌산을 채석
장으로 바꾸어 돈을 벌었고 또,그 채석장을 개발하기 위해 난리를 치는 동안 놀
랍게도 구리광산을 발견했다.그 덕분에 베델공작은 대 부호였다.게다가 산이 없
는 평원은 풍부한 토양을 가지고 있어 농사엔 그만이었다.
즉 그리하여 어부만 없고 모든 산업을 가지게 된 이 베델공작은 영지를 쏘다니
며 치안을 살피는 것 이외엔 할일이 거의 없게 된 셈이었다.게다가 지금은 태평
성대다.허긴 나라도 할일이 없어 주색잡기나 하게 될 것이다.
베델의 성은 델리암왕국의 영주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평판으로 왕성을 제외하고
는 가장 큰 크기였다.물론 영지가 크니까 별 할말은 없었고 또 호화롭지는 않은
편이어서 그다지 혹평은 없었다.게다가 무엇보다 약 백 이십여명이나 되는 기사
들이 이 성에서 살고 있다.그덕에 이 성이 크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현재 델리암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을 가진 것은 물론 왕의 외숙부인 화이딘스대
공으로 그는 델리암에서 가장 광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다.소문에 따르면 왕보다
도 많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뭐 다다익선이라고 땅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기도 할 게다.그 다음이 물론 왕이고 그다음이 이 베델이었다.
베델대공은 50세가 넘어서야-허긴 매일 전쟁터를 뛰어다녔으니 언제 씨를 뿌릴
수가 있었겠나- 겨우 아들을 보았는데 그게 이 베델공작이었다.베델 대공은 이
젊은 베델 공작이 19살때 죽었다.
모두들 19세의 공작이 무슨 짓을 할 지 상당히 걱정했었지만 의외로 이 젊은 공
작은 잘 해나갔다.상인을 육성시킨 것도 그였고 무엇보다 다들 걱정했던 베델대
공이 거느린 대 규모의 기사단-반은 용병이오.반은 가신인-을 진짜 거느릴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이 베델기사단은 젊은 19세의 청년에게 충성
을 맹세했다.그 다음 부터는 일사천리로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즉 젊은 베델은
자신의 영지를 영주로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이.바바.안색이 나쁘군."
제법 걱정하는 척을 하면서 뚱땡이가 바바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바바의 옆에 점잖게 서 있는 동안 바바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동료에게 고
개를 그덕였다.
바바의 옆에 선 두사람은 모두 노예상으로 델리암에서는 아마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 노예상으로 노예상도 이정도로 대규모라면 아마 작은 영지의 영주부
다 나을 것이다.나는 때때로 노예를 팔아서 돈을 번다면 나도 하고 싶다고 생
각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스카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네가 하면 모든 노예를 다 굶겨 죽이기 알맞지.아님 네가 다 잡아 먹던지."
음..그 말에는 동감을 한다.
어쨌든 바바주변의 뚱땡이들은 모두 유명한 노예상으로 하나는 통칭 부리바,하
나는 티그라고 했다.모두 뚱뚱하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셈이다.
부리바가 나를 흘긋 보면서 물었다.
"누구야? 새 애인?"
나는 멀건히 바바를 대신 바라보았다.바바가 남자를 좋아했었단 말인가?
바바의 얼굴에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조칸데."
내가 생글 생글 웃으면서 말했고 부리바는 내 머리에 감히 손바닥을 올리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오,이런 건방진 짓을 이 쿠베린님에게? 갈갈이 물어 뜯어주지.
그 솥뚜껑같은 손이 날 잡으려 하는 순간 스카가 잽싸게 그 손을 잡고 말했다.
"조심하십쇼,이 애는 뭅니다."
나는 스카를 쏘아보았다.
스카는 빙글 거리고 웃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두들기고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나는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뒤에 선 카산은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문다고? 하하..예쁜 얼굴에 어울리지않는 버릇이군!"
그가 배를 잡고 웃었다.둥실한 배가 출렁거렸다.거의 선지로 만든 젤리같은 수
준의 배였다.
"정말.바바와는 닮지않았군,자네 동생은 어떻게 생겼나?"
"미남..이지."
바바가 내 눈치를 보면서 땀을 닦아냈다.그의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
고 안색은 파랬다.그리고 그의 그나마 목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퍼렇게 멍
이 들어있었다.그것을 머플러로 가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 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 문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큰 소리를 질러댔다.
"공작전하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천천히 금발의 청년이 들어섰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금발에 약간 느긋한 얼굴을 한 젊은이로,상당히 맛있게 생
겼다.적당히 몸에 붙은 근육이 얇은 비단의 튜닉위로 드러나 있었고 허리에는
가문의 물건인 듯한 보검이 달려있다.생각보다는 우아하지 못한 자세로 들어오
면서 이 금발의 청년은 사방에 늘어선 인물들에게 손을 들어서 인사를 해보였
다.생글 거리는 웃음이 약간 느끼했다.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 아니냐?"
스카가 뒤에서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음..몸과 얼굴만 본다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지."
나도 동의했다.나는 턱을 쥐고는 이 젊은 공작을 주시했다.
그의 부친인 베델대공은 괜찮은 사내였다.정말 괜찮은 애완동물이었다.
빨리 죽어버린 게 천추의 한이긴 하지만. 인간나이 69세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시점으로 볼때 인간들은 너무 쉽게 죽어버린다.그 펄펄 날던 에너지를 자
랑하던 귀여운 소년이 순식간에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된다..크으..
가슴 아프다.
저 매끈한 피부가 어느새 주글진 얼굴로 번해 버린단 거지...인간이야말로 너무
나 덧없는 생명체였다.
"자..잠깐.너 ..베델대공을 안다고 하지않았었나?"
스카가 다시 등너머로 물었다.
나는 약간 기억을 되살리던 차라 귀찮아 대꾸하지않았다.
베델대공을 만난 건 그의 나이 14세 때.그리고 32세 때.그리고 59세 때.더이상
은 만나지 않았다.그의 노화가 시작되어 쭈굴한 얼굴을 보는 건 고통이니까.
으음.인간에게 깊은 애정을 주는 것도 좋은 건 아니야.
나는 흘긋 스카를 바라보았다.
이 뜨끈한 나의 난로 스카도 이제 40을 바라보고 있다.곧 50이 되고 곧 70이 되
면 이녀석도 죽어버린다.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지끈거렸다.
카산이 스카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엘프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그래,엘프는 잘 죽지않는다.나처럼.
젊은 베델이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 앉자 마자 노예상들이 줄지어 그의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베델가문의 상징인 거대한 그리핀이 새겨진 의자 위에 제멋대로 앉은 베델은 자
신의 아버지와는 그다지 닮지않았다.그러나 그 초록색 눈만은 얼추 닮은 것 같
기도 하다.
"자아.그럼 오늘 노예시장을 시작합시다."
베델이 큰 소리로 웃음섞인 음성으로 내뱉었다.
호오.목소리도 비슷.
갑자기 사람들이 환호성 비슷한 것을 올리면서 갈라서고 그 사이로 좌악 하고
붉은 비단이 바닥으로 깔렸다.
그리고는 상인인 듯한 젊은이가 앞으로 나서더니 크게 외쳤다.
"다비에서 온 고로스입니다! 오늘 제가 데려온 노예는 아인족의 파란색 피부의
미소년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챙 하고 징소리가 났다.
놀고 있군
하고 내가 생각할 무렵 아닌 게 아니라 붉은 비단위에 선명한 푸른 피부의 소년
이 걸어나왔다.소년은 은으로 만든 듯한 팔찌를 두 손목에 차고 그 사이를 사슬
로 묶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장신구 같지만 실은 포박하기 위한 도구였다.
소년은 푸른 피부에 초록 눈을 하고 있었고 발은 물갈퀴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
다.검은 빛을 띈 머리칼은 역시 초록색이었는데 그 선명하게 잘 생긴 윤곽아래
두 눈은 증오로 떨고 있었다.
"와아."
사람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소년의 살결이 다 드러나도록 최소한의 옷을 입혀 놓고 있는데 그 매끄러운 피
부는 거짓말 처럼 완벽해서 티끌하나 없이 푸른 빛이었다.파란색이라고 해서 역
겨울 것 같지만 희미한 하늘빛에 가까와서 결코 역겹지는 않았다.오히려 아름다
와서 넋을 잃을 듯한 외모였다.
"근..근사하군,저런 아인족 본적 있나?"
스카가 나에게 물었다.그도 카산도 눈을 부릎뜨고 있었다.
"저건 맛없어."
내가 대꾸했다.
"남방 에고린의 아인족이야.매우 기품높은 청색아인족이지.인간의 손에 잡히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린다는 군."
"에.."
카산이 당황해서 날 바라보았다.
푸른 소년은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입안에 재갈을 물린 듯 어딘가 입
매가 이상했다.노예상인들이 개발한 혀깨무는 것을 방지하는 작은 도구가 지금
이순간에 쓰이고 있는 듯했다.
베델이 박수를 쳤고 다른 몇몇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푸른 색의 아인족은 처음 보는 것이야.어디서 온 것인가?"
베델이 느긋하게 물었고 앞선 교활한 얼굴의 상인이 대꾸했다.
"남방 에고린의 유명한 아인족으로서..충성심과 기품이 매우 높습니다.지금 자
갈을 물려놓은 상태입니다만 만약에 그 자갈을 풀어놓으면 즉시 혀를 깨물지도
모릅니다."
놈은 의외로 솔직하게 말했다.
베델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노예로선 쓸수 없잖은가?"
"네.어렵죠,.보통 사람이라면 힘들 것입니다.그러나 만약 공작님과같이 인품있
으신 분이 애정으로 감화하시어 이 애를 길들이신다면 그건 평생을 걸쳐 완벽한
충성심을 받으실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헤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자식.상당하잖아?
내가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공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얼마인가?"
"만오천 길레입니다."
오옷 하고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그런! 고가라니! 말도 안돼! 몇배나 되는 금액아닌가!"
사람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 공작은 흐음 하고 턱을 괴곤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기다려봐.생각해 볼 테니."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눈하나 깜짝하지않았다.
청색피부의 노예는 그리고선 끌려나갔다.
그 다음으로 줄지어 나온 노예들은 대체적으로 아인족과 엘프들이었다.소녀들
두엇이 나왔지만 아무도 에닌은 아니었다.카산이 점점 긴장으로 지쳐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바바의 세명의 엘프들이 나섰다.
그 중 검은 머리의 비오나가 공손히 앞으로 나서서 붉은 비단 위에 섰는데 그녀
의 눈동자는 똑바로 공작을 향하고 있었다.
공작은 턱을 고이고선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자 의외인듯 그녀를 바라보
았다.
"숲의 엘프입니다."
바바가 땀을 흘리면서 설명했고 뒤이어서 두명의 엘프들이 소개되었는데 비오
나,숲의 엘프는 비단 위에서 갑자기 천천히 걸어서 공작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막 붙잡으려 하는데 공작이 손을 들어서 멈추게 했다.
비오나는 주욱 걸어서 공작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의 발 아래 살짝 앉으면서 물었다.
"저를 사주시겠어요?"
공작의 눈이 커졌다.
비오나는 손을 뻗어서 그의 손등에 키스했다.
"어..어째서?"
공작이 그녀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비오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
다.
"그건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아무도 듣지못했겠지만 나는 들었다.
공작은 뚫어질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엘프는 인간과는 다르다.거짓을 모른다.
공작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마치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이 꿈결처럼 부드럽게 그의 손아귀에서 흘러나갔다.
"아름답군.."
공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를 사주시겠습니까?"
그녀가 다시 물었다.
공작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않고 큰 소리를 질러 바바를 불렀다.
"바바! 이애를 사겠다!"
바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이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넵.그애는 일만 길레 되겠습니다!"
"알았다."
공작은 더이상 그를 바라보지않고 비오나의 흰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비오나가 황홀하게 웃음을 지었는데 정말로 만족한 웃음이었다.
"대..대체 어떻게 된거지? 엘프는 대개 스스로 팔리길 원할리가 없는 것인데!"
놀라 스카가 내게 물었다.
"바보녀석."
나는 그렇게만 말해주곤 고개를 돌렸다.
공작이 비오나를 자신의 무릎위에 앉히고 다시 시선을 돌릴 때 비오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는 요염하게 앉아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보던 사람들 모두가 아연해서 바라보는 동안 다음 노예상이 흠흠 거리면서 소개
했다.
"다음은..저는 티급니다.이번에 제가 데려온 아이는 묘인족의 아이와 엘프 소녀
입니다.이 애는 귀족 엘프로.."
그 순간 카산이 몸을 굳혀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내가 꽉 잡았다.카산은 당장이
라도 흥분하여 날뛸 듯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 묘인족의 아이라구!
내가 격노하기 직전에 나는 스스로를 억눌렀다.카산이 발광하려는 것과 똑같은
꼴이 아니겠는가 하고 스스로를 달랜다음 생각했다.정말 묘인족의 아이가 있을
리가 없다.묘인족의 가장 어린 녀석은 다름 아닌 내 동생 캐러딘으로 그놈은 지
금 북방에 있다.그러니 누군가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묘인족의 애가 있을리가
없다.나는 있을리가 없다를 반복하면서 주시했다.
카산이 벌벌 떠는 것이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손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었
다.
붉은 비단위를 걸어오는 것은 청동색 머리칼의 소녀와 금갈색 머리칼을 가진 소
년이었다.카산이 당장이라도 날뛰려는 것을 꾸욱 누르면서 나는 그 소녀가 에닌
임을 확신했다.
일단 냄새가 같고 생김새도 같다.
다른 엘프와는 다른 우아한 기품이 전신에 어려있는데다가 다른 자들과 달리 공
포감도 거의 없이 잔잔한 얼굴.
그리고 또한 소년은 금갈색 머리에 고양이눈을 한 갈색피부의 소년이었다.물론
묘인족과 비슷한 느낌이긴 했다.그러나 녀석은 묘인족이 아니라 아인족의 한 명
으로 전혀 우리완 다르다.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비웃음을 던졌다.
여기 있는 자들 중에서 묘인족을 아는 것은 드물어서 스카나 카산정도만이 알고
있었다.물론 비오나도 알고 있다.저 나이든 까마귀의 엘프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은 묘인족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바바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날 흘긋 보았고 내가 히죽이 그를 향해 웃어보이자
흠칫하더니 손을 들어서 외쳤다.
"이봐,티그! 그앤 묘인족이 아니다!"
티그란 뚱땡이가 불쾌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구?"
"묘인족을 잘 모르는 거 같은데..나는 묘인족을 봤어.그앤 묘인족이 아냐."
"너,지금 나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거냐!"
티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흥분한 기색이 되었다.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만약 인종을 분류하는 데에 전문가인 노예상이 틀렸다고
하면 그건 신용에 대한 문제였다.게다가 지금 이 자리는 공작이 있는 자리였다.
공작은 바바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시선을 돌려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묘인족이란..고양이를 닮은 종족이 아냐?"
공작이 흥미진진한 듯 물었다.
나는 저녀석의 얼굴을 한대 후려치고 싶은 기분을 억제했다.저 자식은 내가 자
기 아버지랑 숲에서 사냥하고 돌아다닐때 물론 강보에서 기어다니고 있었지.
"음..바바! 그렇다면 넌 대체 이 애의 어디가 묘인족이 아니라고 하는 거냐!"
흥분한 티그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듯이 외칠 때 바바가 헛기침을 하면서 나를 흘
긋 거리고 보며 말했다.
"묘인족은..겉모습이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지않아..그들은..변신족이고...겉으
로보기엔 완벽한 인간으로 보인다구,."
모두의 시선이 금갈색 머리칼을 한 소년에게로 쏠렸다.
소년이 캬아 하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체엣 하고 내가 중얼거릴 때 카산이 중얼거렸다.
"저,,.에닌이에요! 에닌을,.!"
"알았어,기다리라구,.기다려!"
내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동안 티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외쳤다.
"그렇다면..증명을 해봐! 묘인족이 아니란 증명을 하라구!"
"그건 저애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거 아닌가?"
내가 조소하듯이 하며 대꾸하자 티그는 이를 악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거친 놈이야! 당장이라도 결박을 풀면 덤벼들어!"
"자갈만 풀어보라구,"
바바가 덧붙여 말하자 이를 갈던 티그는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엄청난 일이 되어도 난 몰라!"
그가 이를 갈며 외쳤다.그 순간 부하중 한명이 그의 입을 벌리고 혀깨물기 방지
용 자갈을 꺼냈다.그것은 혀를 굳은 돌로 감싸는 것인데 도저히 이빨로는 깰수
없는 물건이다.그것을 꺼내자 마자 아아아아 하고 괴성에 가까운 소리가 소년에
게서 터져나왔다.
"더러운 놈들! 개자식들! 이 추악한 인간들!"
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할 무렵 티그가 크게 외쳐 물었다.
"너는 묘인족이냐?"
"아니라고 했잖아! 이 멍청한 돼지놈!"
소년이 악을 지르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바바가 웃음을 터뜨렸고 티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는 욱 하고 이를 악
물고는 주먹을 쥐었다.
"아니.아니.티그.그건 그대의 잘못은 아냐."
공작이 말했다.
"여기 있는 누구도 바바이외엔 묘인족을 볼 수가 없었잖아? 묘인족은 깊은 산과
숲에 사는 신비의 종족이라 알려져있어.게다가 그들이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하
고 있다면 묘인족을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말 그대로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지."
바바가 웃었다.
"그리고 일단 묘인족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이지.묘인족 한 사람이 병사 이백
명은 몰살 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데 잡을 수가 있을 거 같아?"
공작이 바바를 향해 물었다.
"호오,.그대는 묘인족을 보았다고 했지? 어떤가?"
"아아..소인이 어릴때에 본 것입니다.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무시무시했으며..
어떤 자도 잡지 못했습니다."
바바가 날 자꾸 힐긋 거리면서 대답했다.
나는 공작을 바보취급하면서 생각했다.
역시 멍청한 놈.나는 네가 강보에 싸여있을 때 네 아비와 사냥하고 있었다니까.
그런 대화들이 오고갈때 분노한 티그가 부하에게서 채찍을 빼어들어서 금갈색
소년을 향해 후려갈겼다.
차악 하고 채찍소리가 무섭게 울려퍼졌다.
소년은 등을 뒤로 하고는 엘프 에닌을 감싸고 얻어맞았다.
그의 매끈한 갈색피부에서 피가 스며나왔지만 소년은 미동도 하지않고 자신의
옆에 서있던 에닌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차악 차악 하고 연속해서 세번의 채찍이 가해졌다.
보는 사람들이 옷 하고 비명을 올릴 즈음 공작이 외쳤다.
"그만하라!"
티그는 울분이 쌓인 얼굴로 바바를 노려보고는 채찍을 바닥에 집어던져 버렸다.
피가 줄줄 흐르는 몸이 된 금발 소년은 움찔하지도 않은 얼굴로 사납게 그를 노
려보았다.살기가 그의 눈에서 스쳐나가는 동안 티그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공작
을 바라보았다.
"공작님의 거성을 더럽혀서 죄송합니다.묘인족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이런 실수
를 하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뚱보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공작에게 말했다.놀라울 정도로 분노와 좌절감을 감추
고 있는 얼굴이었다.
공작은 금발머리를 약간 흔들며 못마땅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여긴 숙녀분들도 계시는 자리인데 감히 피를 보이다니!"
그가 가볍게 분노의 표정을 짓는 동안 재빨리 내가 나서서 말을 했다.
"치료를 하는 게 어떨까요?"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나는 빙글 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저 다친 소년을 위해 공작님께서 방을 하나 빌려주신다면 이 미천한 몸이 치료
를 하려 합니다만?"
공작은 나를 의아하게 보았고 티그는 나를 매우 못마땅한 듯-실은 죽일 듯이-바
라보았다.사람들이 나의 곱상한 미모에 호감을 느낄 무렵 소년이 외치기 시작했
다.
"싫어! 필요없어! 이 더러운 인간들!"
나는 미소를 진하게 머금으면서 바바를 바라보았다.
찔끔한 바바가 급히 말했다.
"저..이 분,.아니,이 애는 저의 조카로서 의술을 공부한 아이인데 제 노예들을
그동안 보살펴 왔습니다.그러니까..그러니까.."
그때 공작의 무릎위에 있던 비오나가 한마디 공작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맞습니다.저분은 저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공작이 호오 하고 날 보았고 나는 의기 양양하고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
였다.
"그럼,내가 방을 하나 주지.,치료하라."
공작이 허락하자 시종하나가 걸어나와서 내 앞에 와 섰다.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기 전에 카산이 흥분하지 않도록 카산에게 다가가 나 그의
어깨를 꽉 눌러주었다.아픔으로 그의 로브아래 드러난 입가가 바르르 떨었다.아
마 어깨에는 내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날 것이다.
"내 말대로해라.멍청아."
카산이 나를 증오로 노려보는 동안 나는 몸을 돌려 경쾌하게 걸었다.붉은 비단
위의 두 소년,소녀는 나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싫어! 내 몸에 손대지마!"
나는 방그레 웃음 지었던 사교용 미소를 없애고 위협용 미소로 바꾸었다.
"자식..죽어볼래,아님 계속 소리지를래?"
소년의 눈이 커졌다.
과연 고양이 눈이다.그러나 묘인족은 이런 고양이 눈은 가지지않는다.
눈동자가 마름모꼴이라 할수있는 이 날씬한 타원형의 눈동자는 언뜻 보면 섬짓
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이 소년의 경우는 초록색과 보라색이 얼룩져 마치 살
아있는 보석같았다.이제서야 이 종족이 무슨 종족인지 알것 같았다.
이건 야묘족이라는 놈들이다.
소년의 얼굴이 약간 공포에 찌들었다.
"따라와."
나는 그 두개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엘프 소녀를 감싸려고 소년이 버둥거리는 것을 나는 낮게 웃으면서 위협했다.
"순순히 따라 올래? 아님 죽어볼래?"
욱 하고 소년이 입술을 깨물었다.
"허긴..죽여달라고 애원한다면..갈갈이 찢어 이 애 얼굴에 네 살점을 던지는 것
도 좋지만.너같은 하급종족은 나에게 있어 파리 한마리나 마찬가지니까.."
우욱 하고 공포의 표정이 점차 커질 때 나는 사람들 보는 데에선 방글 방글 웃
는 얼굴로 두 소년 소녀의 팔뚝을 잡아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잠깐! 그 앤 다치지않았어!"
티그가 내가 소녀를 데려가려하자 마자 의아한 듯 크게 외쳤다.
"오? 그래요? 허나 아까 당신이 처음 채찍질 할때 이미 다쳐버렸소,."
나는 빙글 웃었다.
그리고는 주저하지않고 티크가 안보이는 틈을 타서 소녀의 흰 팔뚝에 손톱을 대
고는 죽 그어버렸다.악 하고 소녀가 낮게 신음했고 소년이 분노로 나를 쳐다보
는 순간 나는 소녀의 피가 흐르는 팔을 들어서 티그에게 보였다.
티그는 움찔 하더니 알았다는 듯이 손을 저어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뒤를 따르는 스카와 카산을 데리고 그 앞에서 유유히 밖으로 걸
어나갔다.
시종이 복도를 통해서 피를 줄줄 흐르는 소년을 걱정스레 바라보면서 걷는 동안
나는 스카에게 턱짓을 하면서 시종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넵?"
시종이 날 바라보았다.
"매우 좋은 거성이군요."
"아아.."
시종이 자랑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실례지만.."
"네?"
"잠시 주무시구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스카가 탓 하고 달려들어 시종의 목줄기를 쳐내렸다.
시종이 축 늘어져 기절하는 순간 우리들은 재빨리 시종의 몸을 잡아 당겨내고는
옷을 벗겨 아무방이나 열고 알몸의 시종을 들여보냈다.
"어..어쩔려고?"
카산이 눈을 크게 뜰 무렵 나는 두 소년 소녀를 옆구리에 끼고는 스카에게 말했
다.
"넌 카산을 데리고 나와.그리고 빌어먹는 시인의 여관에서 보자구!"
내가 창턱에 발을 디디고 말하자 스카가 가볍게 항의했다.
"빌어먹는 시인이라니! 음유시인의 노래터라구!"
그가 항의할 무렵 나는 그에 신경을 쓰지않고 창문에서 뛰어 내렸다.
등 뒤로 카산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 몸은 지금 지상 4층에서 뛰어내린 관계로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엘프
소녀가 비명을 삼키는 동안 나는 아래에 적당히 내려설 곳을 물색하면서 몸을
조금 틀었다.
착지 장소로는 여물을 잔뜩 담아놓은 달구지를 택했다.
지키는 사람도 없다.좋았어!
내 발이 퍽 하고 달구지에 처박히는 순간 달구지가 와락 뒤로 뒤틀려 흔들렸고
나는 그 여력을 이용하여 뒤로 튕겨올라 멋지게 착지 했다.
"쟌!"
나는 히히 웃고는 소여물을 먹이려고 갈쿠리를 들고 있던 사람들이 멍청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내달리기 시작했다.아무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모른다.그리고 나로선 그게 더 좋았다.
내 옆구리에 매달린 두 녀석들은 완전히 넋을 잃은 것인지 죽은 듯이 조용하다.
혹시 진짜 죽었는가 싶어 손가락으로 가슴을 더듬거려 보니 심장뛰는 것이 느껴
진다.
흐음,죽지는 않았군.
나는 랄라라 하면서 계속 치달렸다.
나의 괴이한 몰골을 보는 자들이 증언을 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어느샌지 해가 지고 있는 이 아름다운 베델의 아그랑도시의 전경을 바라보기 위
해 담장으로 튀어 올랐다.그리고는 담장에서 다시 다른 집의 지붕으로,그리고
어느 아리따운 아가씨가 옷을 갈아입는 그 삼층방을 유유히 훔쳐보며 다른 집의
지붕으로.
계속해서 지붕 위를 뛰고 있는 가운데 나는 점점 흥에 겨워져서 중얼거렸다.
"호오호..내 이름은 쿠베린,.성은 없고 인간도 아니며..나는 묘인족의 왕!"
이 노래는 내가 지은 것이다.
스카는 이 노래를 들으면 뒤로 자빠져 버리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허긴 인간들 따위가 나의 이 고상한 노래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내가 해 지는 붉은 노을 아래 두 소년 소녀를 끼고 마침내 지붕에서 지붕으로
이어진 나의 지름길을 통해 저 빌어먹을 시인집에 도착했을 때는 스카도 이미
준비를 마친 뒤였다.
"라라랄!"
"제발좀 그 이상한 노래좀 하지마!"
스카가 울상을 하고 외쳤다.
그는 이미 말고삐를 쥐고 있었는데 마차에 타고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카산이 내
옆구리에 낀 소녀에게 손을 뻗혔다.
"에닌!"
소녀가 죽은 듯이 내 옆구리에 끼어 있다가 고개를 팟 하고 쳐들고는 그를 보았
다.카산이 로브를 벗어던지면서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에닌이란 이 아름다운 엘프소녀는 멍하니 카산의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이미 그
순간 마차는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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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ninapa )
[쿠베린] 제 1화 엘프의 구출 5 1998-01-17 00:55 278 line
KUBERIN.....5
내 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5
"보고 싶었다! 에닌!"
카산이 그녀를 끌어안고 울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옆에서 그를 탁 밀치면서 야
묘족의 소년이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카산은 에닌과 똑같은 얼굴을 들어서 그를 빤히 보았기때문에 소년은 어어 하고
입을 벌렸다.카산이 낮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에닌,오빠다."
야묘족의 소년이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카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이 아가씨는..."
나는 그들의 모양새를 보다 말고 조금 놀라서 에닌의 어깨를 확 잡아 끌었다.
"자갈을 아직 안빼낸 거냐?"
"그게 아니고..이 아가씬 말을 못해!"
소년이 대신 말했다.
카산이 놀라서 에닌의 어깨를 흔들었다.그러나 눈물만 주르르 흘릴 뿐 아닌게
아니라 에닌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카산이 연민과 충격으로 그녀의 몸을 흔
들면서 몇번이고 애타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을 못하게 된거야?"
"뭔지,.뭔지는 모르지만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거 같아요.당신,이 아가씨 오빠?
구하려 온 거구나."
야묘족의 소년이 안도한 듯 말했다.그는 나와 카산을 번갈아 보고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난 또..이상한 괴물인가 해서 놀랐지 뭐야."
나는 그녀석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치고는 카산과 에닌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
"몰라요!"
카산이 에닌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고 에닌도 울기 시작했다.
난데 없는 눈물의 바다가 되어 버려서 나는 난처해졌다.말을 몰던 스카가 자꾸
만 물어온다.
"왠 눈물이야? 왜 울어?"
"몰기나 해!"
나는 약간 김이 빠져서 의자에 걸터앉았다.기분이 잡쳤다.
에닌이란 이 엘프아가씨는 완전히 벙어리가 된 모양이고 그것을 본 카산의 얼굴
은 완전히 죽상이었다.그들이 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왠지 속이 치밀어서 아까
의 상쾌한 기분이 사라져버렸다.
야묘족의 소년은 날 흘긋 흘긋 보면서 자신의 머리통을 문질렀다.
"저..당신,"
"뭐냐? 애송아."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기운이 센 거지?"
"흥,"
나는 체엣 하고는 대굴 누워버렸다.
야묘족의 소년이 무릎걸음으로 기어오더니 에닌과 카산의 눈물의 상봉을 더이상
보기 괴롭다는 듯이 내 옆에 와 앉았다.
"당신이 구해주려고 그러는 줄 몰랐어.미안해."
호오,의외로 솔직하구만.
"나도 저 아가씨 덕에 같이 구출되었군.감사해야 겠네."
"돈이 있다면 내놔."
그가 고개를 저었다.
"가진 게 있을리가 있어? 노예로 팔린 주제에?"
흐응 하고 내가 아직도 울고있는 두 남매를 바라보는데 소년이 내 옆에 찰삭 붙
더니 말했다.
"내가 서비스 잘 해줄테니 날 데리고 가지 않을래?"
"웃기지마라."
"나..수명도 길고 쓸만한 놈이야.당신이 날 구해주었으니까 당신이 늙어죽을때
까지는 내가 서비스하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몬드빛의 동공을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를 반복하면서 혀를 내밀어 내
뺨을 핥았다.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가 빙긋 웃었다.
"내 은인이잖아? 먹을 거 정도는 달라구."
"놀고 있네,짜샤! 난 계산이 철저하다구! 내가 왜 널 먹여키우냐? 게다가 야묘
족 놈들은 워낙에 먹어댄다구!"
나는 녀석에게 손가락을 들어서 이마를 쿡쿡 찔렀다.
앞에서 마차를 몰던 스카가 껄껄 대고 웃었다.
"그래,그래.생각해 보니 쿠베린이 늙어죽을 때 까지 봉사한다면 넌 앞으로 오륙
백년은 족히 봉사해야 할거다!"
야묘족의 소년은 흐응 하고는 내 앞에 와 도사리고 앉아 날 바라보았다.
묘인족과는 달리 이 야묘족은 몸에 고양이티가 팍팍 난다.녀석은 긴 손톱을 숨
긴 손으로 내 옆구리를 박박 긁듯이 흔들더니 아양떨듯이 말했다.
"이 엄동 설한에 내가 어디서 살 수 있을 거 같아? 나,당신에게 반했다구."
"아까는 죽일듯이 덤벼들던 주제에! 놀고있네! 난 취미없어!"
녀석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앞에서 말을 모는 스카는 계속 웃고 있다가 카산남매가 아직도 울고 있다는 것
을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그리곤 고양이녀석에게 속삭였다.
"넌 따뜻하니?"
"물론이죠."
녀석이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다 대답하자 스카가 웃음을 던지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봐,이봐.들었지? 저 애를 난로로 쓰라구.나도 이제 널 끌어안고 자는 건 그
만두겠어.마치 변태취급받잖아?"
"왜? 난 돈안드는 난로가 좋아."
내가 비꼬자 스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봐,너,내가 말은 안했지만 넌 소녀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게다가 밤만 되면
내 침대에 끼어들어와 내 품안에서 자잖아! 그런 것을 몇번이나 여관에서 들켜
서 내가 얼마나 죽일놈 취급 받았는지 알기나 해!"
나는 흐응 하고 웃었다.
내가 알게 뭐냐? 나는 따스하게 자기만 하면 된다.
"이제 내 나이 40이라구! 너만한 아들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 내가 널
밤마다 끌어안고 자야겠냐!"
"아들이라고 생각해라.스카."
내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이 미친고양이놈!"
스카가 날 보면서 욕설을 퍼부어대기 시작했고 나는 라라라 하고 흥얼거리면서
다리를 까닥거렸다.마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두 남매는 이젠 눈물
을 거두고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샌가 이 야묘족의 소년은 내 옆구리를 파고 들어오더니 웅크리고 자기 시작
했는데 그 감촉이 제법 따스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를 부둥켜 안고 잠이 들어
버렸다.
"이름이 뭐냐?"
스카가 내 몸을 덥석 안아 나르면서 내 옆을 걷는 녀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스카의 몸안에 팍 파고들어서 깊이 자고 있었다.지금은 오밤중이지만 나는
오늘 지나치게 일찍(?) 일어난 탓에 계속 자고 있었다.
"가빈이에요."
"가빈.조금 희안한 이름이군,몇살인데?"
"69세요."
잠시 스카는 벙벙한 듯 말을 멈추었다.
나는 자면서도 자식 그걸 질문이라고 던지냐 하고 비웃고 있었다.어찌되었든 스
카는 나를 가볍게 안고 걷고 있었다.야묘족의 이 가빈이란 녀석은 끝까지 따라
오고 있다.젠장.
"쿠베린은 깊이 잠들었나요?"
카산의 음성이 들렸다.어딘가 김이 빠진,슬픈 음성이었다.
나도 기분이 울적해졌다.일이 이렇게 그다지 좋지않은 결과를 가져오면 나도 기
분이 울적해져 버린다..허긴 어쩐지 일이 너무 쉽더라.
"아냐.이녀석은 자면서 들을 건 다 들어."
스카의 음성.
"그래요오..그럼 ..우리들은..이대로 떠난다고 전해주세요."
"자.잠깐! 이 밤중에 어딜가? 게다가 이런 눈속에서? 몸녹이고 뭐라도 좀 먹
고..그리고 내일 아침에 가라구! 쿠베린의 집안에 있을 때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니까!"
스카가 당황하여 크게 떠들었고 나는 잠시 갈등을 겪었다.
이 어린 놈들을 여기서 재워 줄 것이냐 말 것이냐..
그러나 내가 결론을 내기도 전에 당황하고 있는 카산과 에닌을 스카가 끌고 내
집이자 마미의 집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스카의 품안에서 눈을 뜨고 두 남매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넋이 빠진 얼굴.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고 눈을 발갛게 부어있었다.
"비켜.스카."
"어."
스카가 손을 떼자 마자 나는 스카의 어깨를 밟고 기어올라 가볍게 등 뒤로 착지
했다.카산과 에닌이 날 보고 주춤 하는 동안 나는 손짓을 했다.
"이리와서 뭔가 먹어라.그리고 불을 쬐."
마미의 사슴집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그들은 날 보고는 어이 하고 아는
척을 했고 내가 들어오자 마미는 거대한 두 팔을 벌려서 나를 덥석 안아 흔들어
댔다.
"내 귀여운 고양이!"
나는 그녀의 품안이 좋아서 한동안 그렇게 하고 있은 뒤에 그녀의 목에 매달려
아양을 떨었다.
"밥줘어."
"하하하하하..내 귀여운 고양이.얼른 따스한 자리로 와라!"
그녀는 난로가에 앉아있던 턱수염 난 사내들 셋을 우락부락하게 내 쫑고는 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그리고는 말도 하지않았는데 거대한 맥주조끼에 그득히 맥
주를 담고 엄청난 그릇에 역시 대단한 양의 양고기 스튜를 꺼내 놓았다.갓 구운
빵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지젤리를 잔뜩 얹어서 건내주며 그녀는 으하하하 하고
웃어보였다.
내가 아귀거리고 먹는 동안 스카는 쓴 얼굴로 옆에 앉아서 두 남매를에게 앉으
라고 권했고 두 남매는 내 의자의 옆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서 내가 하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고있었다.가빈이란 녀석은 내 옆에 앉더니 침을 질질 삼킬 거 같
은 얼굴로 내 음식을 쳐다보고있었다.보다 못한 스카가 음식을 더 달라고 했고
사라가 대단히 불친절한 기세로 나에게 턱 하고 그릇을 두고 갔다.가빈은 내 눈
치를 보더니 허겁거리고 먹기시작했다.
가게안은 손님들의 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고 나는 계속 먹었다.
두 엘프는 아무말도 하지않았고 나는 다 먹고 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노스엘스턴으로 돌아갈 건가?"
"네."
카산이 우울하게 말했다.
"에닌이 왜 말을 못하게 되었는지 물어봤어?"
"네.그러나 너무나 겁에 질려서 말을 못해요."
카산이 에닌의 어깨를 잡고 연민에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토닥였다.나는 에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가빈을 바라보았다.가빈은 마구 먹다 말고 나의 시선
에 흠칫했다.
"이봐.너.가출했지?"
가빈이 우물 했고 나는 잘라 말했다.
"가출하다가 노예상에게 잡혔지?"
"에.."
"그리곤 나에게 들러붙은 뒤에 겨울을 나면 내 물건 가지고 도망갈 심산이지?"
"노..농담말아요!"
나는 흐응 하고 중얼거렸다.
"스카,넌 모르는 모양인데 야묘족은 대단한 도둑들이야.이름난 도둑중에서 야묘
족이 얼마나 많은 지 순진한 넌 모를거다."
스카가 눈을 부릅뜨자 가빈이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질렀다.]
"아냐! 난 도둑아냐!"
스카와 카산이 동시에 비난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나는 그를 보곤 흥 하고
말했다.
"게다가 완전히 거짓말 장이지.잘 알고 있다구."
"아니야! 난 거짓말 장이 아냐!"
가빈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그는 흥분해서 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나는 흐응 흐응 하고 손을 내저어 보였고 그는 더더욱 화를 냈다.
"그렇게 화를 내는 게 더 수상하군."
"씨이!"
그가 마지막 수단으로 눈물을 택했는지 눈물을 줄줄 흘린다.
그 때 마미가 등장했다.
"이번에 온 애는 왜이렇게 시끄럽니?"
그녀는 울고 있는 가빈을 보면서 눈쌀을 찌푸렸다.
"아아.도둑 고양이야."
내가 냉담하게 말하자 마미는 가빈의 목덜미를 잡더니 그를 동그마니 단숨에 들
어올렸다.그리고는 얼이 빠진 듯 그녀를 바라보는 가빈을 보고는 생긋 웃었다.
"과연,고양이구나,쿠베린."
"넵넵,거짓말장이에 도둑고양이죠."
내가 말하자 적당히 하라고 카산이 외쳤다.
"그만 좀 해요! 저 사람도 노예로 고생했잖아요!"
"뭘 고생해? 너,거물 노예상에게 잡힌 노예들이 어떻게 되는 지 아냐?"
나는 쯧쯧 혀를 차며 비웃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에닌의 얼굴과 카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들은 듣고 싶
지않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나는 가차없이 말했다.
"아주 엄청나지.엄청난 고생이고 말고."
내가 흐흐 웃어보이자 에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개는 비단 금침에서 잠을 자고 매일 좋은 음식과 시종들까지 나서서 씻기고
시중들어준다구.거물 손님에게 팔리기 까지 다른 자들은 손도 못대게 하고 말이
야.안그래?"
내가 에닌에게 동의를 구하자 에닌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그,.그런가요?"
카산이 멍하니 나에게 물었다.
"공작에게 바치려고 생각했을 테니까 분명히 잘 닦이고 입혀서 고이고이 왕자공
주처럼 모셨을 거라고.근데 무슨 고생을 해?"
카산이 멍하니 날 바라보았고 가빈도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맥주를 단숨에 다 들이켜 마지막으로 입가심을 했다.
스카는 여전히 싱글 벙글 웃고 있다.
"낼 아침에 떠날 거면 떠나.카산.그리고 아침에 떠날 거라면 절대로 절대로 나
를 깨우지 말것."
나는 기묘한 안도의 얼굴이 된 카산을 향해 말했다.
"만약 날 깨운다면.."
나는 그의 목줄기에 혀를 대고 핥았다.
카산이 혼비백살 할 무렵 나는 히죽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약간 효과를 내기 위
해서 송곳니도 드러내 보였다.
"그때는 널 먹어버릴 거야."
카산이 소름끼친다는 표정이 되어서 뒤로 물러날 무렵 나는 부른 배를 어루만지
면서 일어났다.
"스카.마차 빌린 거 갖다 놔줘."
"아아..그래."
스카가 히죽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가빈은 얼렁한 얼굴로 나와 스카를 번갈아 보다가 스카에게 물었다.
"저..따라가도 되요?"
"저 놈을 따라가.지금은 저래도 잘 때 들러붙으면 절대로 널 품안에서 놓지않을
걸."
그가 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못들은 척 해주었다.
뜨끈하고도 뜨끈한 새 난로가 왔다.놈이 내 침대에 기어들어와 두 팔로 내 어깨
를 꼭 끌어안았는데 나보다 체구가 작다.체에..귀찮게 내가 끌어안아야 하나?
나는 그 놈을 푹 끌어안고 자면서 또 푸념같은 소릴 들었다.
"...어떻게 알아차렸어요?"
멍청한 자식.
"그애..사냥꾼들에게 짓밟혔대요..엉망으로요.."
그 딴 거 알고 싶지않아.멍청아.
"그런데 오빠가..찾으러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그래서.."
나는 그녀석의 입을 내 입으로 막고는 계속 잠을 청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나는 내 잠을 방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감사해요.."
누군가가 말할 리 없는 녀석이 내 옆에서 말하고 있었다.
이건 새벽이었고 나는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시간이다.그러나 나의 예민한 귀
는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정말로 감사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내 머리맡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