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정호연 - 30대 후반. 다움의 아버지. 다움을 돌보고 간암을 앓고 있어 무척 쇠약해 져 있다.
정다움 - 110살. 백혈병을 앓고 있다.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없다.
여진희 - 30대 초반. 호연의 잡지사 후배
하애리 - 30대 중반. 화가. 호연의 전 부인
민과장 - 40대 후반. 다움의 치료를 맡고있는 의사
송계장 - 30대 중반. 다움이 입원해 있는 병원 원무과 직원
◎무대
주 무대는 다움이 입원해 있는 병실이다.
중앙의 단 위에 병실 침대가 놓여 있다.
병실 뒷면은 병원 복도이고 밖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무대 우측 전면에 벤치와 가로등이 놓여있는 데
이곳은 소아 병동 뒤쪽이다.
무대 좌측에는 원무과, 민과장 사무실 등의 장소로 쓰이는 공간이 있다.
어둠 속, 다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움(소리) : 나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요. 다음달이면 3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지만, 학교에 나간 날을 몽땅 합쳐봤자 여섯달도 안될 겁니다. 하지만 난 6학년 형들이 보는 수학책에 있는 문제도 혼자서 풀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답니다. 그렇지만 아빤, 살아가는 게 열이라고 한다면 공부는 그 중에 하나밖에 안된대요. 아빠한테 묻고 싶습니다. 그럼 나머지 아홉은 뭐냐구요. 하지만 아마 아빠도 잘 모를거예요. 만약 아빠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나머지 부분을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쓸쓸하고 힘없는 모습은 아닐테니까요. 아빤 내 앞에 있을때는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척 하지만, 돌아서면 금방 지금 같은 모습으로 날 속상하게 만듭니다.(다움이의 비명소리,,병실에서는 골수채취 중이다) 난 백혈병에 걸렸어요. 백혈병은요, 날 죽일 수도 있는 병이에요. 그 동안 죽는 애들도 봤어요. 자다가 죽은 애도 있었구, 소리를 막 지르다가 죽은 애도 있었죠. 내가 만약 죽게 된다면 자다가 죽은 애처럼 죽었으면 좋겠어요. 백혈병에 걸렸다고 모두 죽는 건 아니지만, 난 요즘자신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오늘도 골수주사를 맞는데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얼마나 더 아파야 죽게 되나요? 하나님께도 매일 이렇게 기도드려요. 하나님, 빨리 날 하늘 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병실. 다움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민과장 : (들어오며) 어이구, 다움이 노래도 잘하네.
다움 : 과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민과장 : 인사성도 밝고. 근데 아버진 어디 가셨니?
다움 : 또 담배피우러 나가셨나봐요. 아빠 멍텅구리!
민과장 : 다움이 그런 말하면 못써.
다움 : 선생님. 전요, 아빨 사랑하지만 담배피우는 아빤 싫어요. 아빠가 담배피우는
건 다 나땜에 속상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난요, 아빠가 나땜에 그렇게 쓸쓸
하고 힘 없는게 싫어요. 선생님. 나 참 많이 나쁜 아이죠? 안그래도 나
때문에 슬픈 아빨 더 슬프게 만드는 나쁜 아들이에요. 아까도 괜히
쓸데없는 얘길 해서….
민과장 : 골수 주사맞을 때 얘기구나. 아빠도 다 이해하실거야. 다움아, 주사가
많이 아프지?
다움 : 아무리 아파도 그런 말하는게 아닌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빠한텐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와 버린걸요.
민과장 : 다움아, 아픈건 좋은 신호야. 왜냐하면 네 몸 속에 있는 나쁜 병균들이
공격을 받아서 마구 소리를 지르는 거거든.
음… 만화영화를 보면 악당들을 무찌르려면 그만큼 힘이 많이 들잖니?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주인공은 지는 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파도
조금만 참으면 다움이가 이기는 거야. 알았지?
다움 : 그치만 병원에서 시키는대로만하면 병이 다 낫는다고 그랬는데 벌써 2년째잖아요. 이젠 내 병이 지겨워요. 아마 아빠도 마찬가질거예요. 왜냐하면 아빤 빈털터리가 된게 분명하니까요. 아까도 원무과에서 부르던걸요. 빈털터리가 된 아빨 위해서라도 내가 빨리 하늘나라로 가는게 나을지도 몰라요.
민과장 : 다움이가 하늘나라로 가면 아빠는 어떻게 하고? 다움이는 아빠랑 헤어지는게 좋으니?
다움 : 그건 아니지만….
민과장 : 그런 소리하면 분명히 아빠는 슬퍼하실거야.
다움 : 내가 하늘나라로 가면 아빠 혼자 어떻게 살지 그게 걱정되긴 해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민과장 : 그럼. 그러니까 힘내서 나쁜 병균들을 이겨내야지. (레고상자를 내민다.) 그리고 이거, 성호 어머니가 전해 주라고 그러시더라.
다움 : 성호 엄마가요?
민과장 : 그래. 들어오시라는데 그냥 이것만 다움이한테 전해주면 된다고…
다움 : 성호 엄마, 어디 계세요?
민과장 : 저기 밖에.
다움, 밖으로 뛰쳐 나간다.
호연 등장
호연 : 다움아, 정다움!
민과장 : 그냥 두세요. 성호 어머니 보러 가는 거니까.
호연 : 아, 예. 참, 성호는 어떻게 됐습니까?
민과장 : 안타깝게도 그저께 중환자실에 실려오자마자 결국…. 상태가 너무 악화되서 손 쓸 틈이 없었습니다.
호연 : 성호 어머니가 상심이 크셨겠군요. 안그래도 여자 혼자 힘으로 성호 간병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민과장 : 성호 치료할 때도 여기저기 애타게 돌아 다니시는 거, 참 안쓰러웠는데…. 얼굴이 아주 말이 아니시더라구요. 정선생님도 몸 좀 돌보세요. 전보다 많이 까칠해지셨습니다.
호연 : 예, 그래야죠.
민과장 : 정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호연 : 예.
민과장 : 다움이 백혈구 수치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 군요.
호연 : 그럼…?
민과장 : 방사선하고 약물 치료가 한계에 다다랐단 겁니다.
호연 : 그 정도로 악화됐습니까? 항암제도, 방사선도 안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거죠?
민과장 : 조혈모세포이식, 흔히들 얘기하는 골수 이식밖에는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호연 : 골수 이식이요?
민과장 : 상당히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이긴 하지만 이제까지의 약물치료가 실패한 이상 담당의사로서 이식을 권할 수 밖에 없군요. 물론 일치하는 골수를 찾느냐가 우선입니다만, 분명한 건 완치의 기회라는 겁니다. 이식한 골수가 성공적으로 자리잡는걸 생착이라고 하죠. 생착만 되면 백혈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선생님만 동의하신다면, 다움이와 맞는 골수가 있는지 의뢰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밝혀둘 게 있습니다. 물론, 일치하는 골수를 찾을 수 있느냐가 문제지만, 골수 이식은 치료비가 상당히 많이 듭니다.
호연 : 얼마나?
민과장 : 대략 삼, 사천정도 생각하셔야 할겁니다.
다움이 레고상자를 들고 힘없이 들어온다.
민과장 : 다움이, 성호 어머니 만났니?
다움 : (고개를 끄덕인다.)
민과장 :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사내 대장부가 씩씩하게 굴어야지. 정선생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호연 : 아, 예. 다움아, 선생님께 인사드려야지.
다움 :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민과장 나간다.
호연 : 다움이, 성호 엄마 만났어?
다움 : 네. 아빠한테 인사 못드리고 가서 미안하다고 그러셨어요. …아빠, (레고 상자를 내보이며) 성호 엄마가 주고 가셨어요. 성호가 젤루 아끼던건데 왜 나한테 주셨을까요?
호연 : 다움아, 성호는 퇴원해서 더 좋은 걸로 샀을 거야.
다움 : 그저께 밤에 아파서 중환자실에 실려가더니 나한텐 말도 안하고 그냥 갔나봐요. 성호랑 퇴원하면 에버랜드가기로 약속했었는데…. 아빠! 난요, 성호가 고집불통에다가 멍청하지만요, 그래도 성호를 참 많이 좋아했어요. 전에 내가 많이 아팠을 때 내 손도 꼭 잡아주고요, 간호사 누나 몰래 내 약도 대신 먹어줬었거든요. …아빠, 이제 성호 못보는 거죠?
호연 : 왜, 다움이 보러 놀러 올거야.
다움 : …아빠. 나도 다 알아요. 성호, 하늘나라 간거죠?
호연 : 다움아….
다움 : 아까 아줌마가 날 안고는 한참을 우셨는걸요. 성호가 병이 다 나서 퇴원했는데 왜 아줌마가 그렇게 슬프게 우시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성호는 볼 수 없는거잖아요. 저요, 이제부턴 맨날맨날 성호를 위해서 기도할래요. 원래는 성호가 하나님을 안믿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없지만 성호만큼은 특별히 허락해 달라구요. 성호는 여기서 아프기만 했으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살아야지 공평한거 아니겠어요?
호연 : 그래, 다움아. 성호를 위해서 기도하렴.
다움 : 난 아빠도 교회에 다녔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 죽잖아요. 아빤 죽고 나서 나랑 못만나도 괜찮아요? 난요, 아빠가 걱정된단 말예요. 아빤, 나 없으면 많이 슬퍼할 거잖아요.
호연 : 그럼. 아빤 다움이 없으면 슬퍼서 막 울어 버릴지도 몰라. 아빤 맘이 너무 아플 테니까.
다움 : 다움이도 아빠가 아픈 거 싫단 말예요. 그러니까 아빠도 나랑같이 교회에 가요.
호연 : 그래, 다움아. 다움이 병, 다 나으면 아빠도 하나님께 고맙다고 인사하러 갈게.
다움 : 아빠. 난 아빠랑 평생 같이 살면 좋겠어요.
호연 : 그래, 다움아. …근데, 다움이는 엄마 보고 싶지 않니?
다움 :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호연 : …응. …엄마가 그림 전시회땜에 프랑스에서 돌아 왔대.
다움 : …
호연 : 엄마 보고 싶지?
다움 : …아빠는요?
호연 : 아빤 다움이 생각을 묻고 있는 거야. 다움이가 엄마가 보고 싶으면 만나는 거지, 아빠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다움 : 난요, 아빠가 중요해요. 그리고 난요, 엄말 만나고 싶지 않아요.
호연 : 엄만 다움일 많이 보고 싶어할 텐데?
다움 : 아뇨. 아빠가 틀렸어요. 엄마는 날 보고 싶어하지 않아요.
호연 : 왜 그렇게 생각해?
다움 : 다움이가 보고 싶으면 엄만 벌써부터 왔을거예요. 근데 엄만 이제까지 한 번도 안왔잖아요. 그리고 엄만 옛날부터 날 귀찮아 했어요.
호연 : 다움아, 엄만 널 귀찮아 한게 아냐. 엄마한텐 다움이만큼이나 그림그리는 일이 중요해서 그렇지.
다움 : 아빤 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딴 엄마들은 안그러잖아요. 아빠가 속상할까봐 말은 안했지만요, 나도 좋은 엄마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좋은 엄마가 있으면 아빠가 이렇게 혼자서 힘드시진 않을거 아녜요? 그리고 전엔 나한텐 좋은 엄말 안 주고 나보다 백 배쯤은 멍청한 성호한테는 좋은 엄말 줘서 하나님한테 화딱지가 나기도 했지만요, 이젠 아녜요. 난 아빠만 있으면 돼요.
호연 : 다움아.
다움 : 아빠. 졸려. 나 잘래요. (누워 자는 척 한다.)
호연이 다움에게 다가가자 다움, 호연을 꼭 껴안는다.
원무과 사무실. 송계장과 호연이 앉아 있다.
송계장 : 이번에도 두 차례나 날짜를 넘기셨군요.
호연 : 죄송합니다.
송계장 : 죄송하다는 말로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전번에도 이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을 하셔놓고선 또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호연 : 돈 받기로 한 일이 잘 안돼서 그럽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십시오. 이번엔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송계장 : 안됩니다. 내일부터 모든 치료를 중단하겠습니다.
호연 : 치료를 중단하겠다니, 아이더러 그냥 죽으란 소립니까?
송계장 :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셨어야죠. 병원을 운영하는 우리 입장을 생각해 보세요.
호연 : 제발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단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주십시오.
송계장 : 이거 참 난감하군요. 선생님처럼 장기 입원환자 보호자로선 우리가 야속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 야속하겠죠. 하지만 병원 사정도 이해해 주셔야죠. 하여튼 이번엔 확실히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럼 모레까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봐드릴 수 없어요.
병실. 다움과 진희가 앉아 있다.
진희 : (주목을 주며) 다움아, 이거 고모가 주는 선물이야.
다움 : 아줌마. 고맙습니다.
진희 : 다움아, 고모라고 부르라니깐.
다움 : 고모는 아빠랑 남매여야지 고모죠. 진희 아줌만 아빠 동생이 아니잖아요.
진희 : 고모랑 다움이 아빠랑은 남매만큼이나 친한 사이야.
다움 : 그래도….
진희 : 그래, 그럼. 다움이가 맘 내킬 때 고모라고 불러.
다움 : …근데 이게 뭐예요?
진희 : 주목이라는 건데,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야. 다움이가 심심해 할까봐 가지고 왔어. 다움인 조각을 잘 하니까 이걸로 다움이가 만들고 싶은 거 만들어. 근데 그 손에 쥔 건 뭐야?
다움 : (꽃 핀을 쥔 손을 숨긴다.)
진희 : 어디 줘 봐. 어머, 이거 참 예쁜 꽃핀이다.
다움 : 선물할 거예요.
진희 : 누구한테?
다움 : 친구한테요.
진희 : 여자 친군가 보지? 어머,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그 친구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다움 : 은미는요! …누구나 다 좋아해요.
진희 : 그 친구 이름이 은민가 보지? (머리에 핀을 꽂으며) 한번 해 봐도 되지?
다움 : 그거….
진희 : 어때? 이쁘니?
다움 :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진희, 꽃핀을 빼서 제자리에 두고는 시계를 쳐다본다. 잠시 어색한 침묵.
진희 : 아빠가 늦으시네? (진희 책을 집어든다.) 어린이 과학백과?
다움 : 십이권 중에서 그게 제 팔권이에요. 거기 보면 가시고기라는 물고기가 나와요.
진희 : 가시고기?
다움 : 예. 가시고기는요, 정말 이상한 물고기예요. 엄마가 알을 낳고 어디로 도망가면, 아빠가 알들을 지켜야 돼요. 알들을 지키느라고 다른 물고기랑 목숨을 걸고 싸우고요,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자고 알들을 보호하는 거예요. 근데요, 새끼들도 알에서 깨어나면 아빨 버리고 다 떠나버려요. 그럼 혼자 남은 아빤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린대요. 꼭 우리 아빠같죠? 그치만 난 아빨 떠나지 않을 거예요.
진희 : 그래. 아빠가 다움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다움 : 아줌마는요?
진희 : …무슨 말이니?
다움 : 아빨 사랑하느냐구요.
진희 : 사랑? (웃음) 사랑이란 말은 어른들이나 쓰는 말이야. 꼬마는 이렇게 물어야지. 좋아하느냐구.
다움 : 난 꼬마가 아니에요. 그리고 좋아하는 거하고 사랑하는 거하고는 아주 달라요.
진희 : 그래? 어떻게 다른데?
다움 : 아빠가 그랬어요. 강아지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구요. 사랑은 말이죠, 자기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거랬어요. 아빠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요. 아줌만 우리 아빠한테 그럴 수 있어요?
진희 : 다움인 고모가 아빠랑 친한 게 싫으니?
다움 : …싫은 건 아니지만 …만약에 아빠랑 아줌마가 결혼하면 아줌마도 우리 엄마처럼 날 귀찮아 할 지 모르잖아요.
진희 : 다움아! 아빠랑 고모는 결혼하고 그럴려고 그러는거 아냐. 그리고 만약에 그렇다 그래도 다움일 귀찮아 하거나 그러지 않아.
다움 : 엄마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치만 결국엔 아빠하고 날 버렸다구요.
진희 : 다움이 엄만 다움일 버린게 아냐. 다만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런 것 뿐이지.
다움 : 알아요. 엄마한텐 그림 그리는 일이 있으니까요. 아줌마. 미리 말해두지만 난 아무래도 괜찮아요.
호연 등장.
호연 : 다움아, 많이 기다렸어?
다움 : 아빠! 아줌마가 이거 주셨어요.
호연 : 그래? 고맙다는 인사는 드렸어?
다움 : 네. 나 이걸로 아빠 얼굴 만들거예요.
진희 : 어디 갔다 와요?
호연 : 그냥 일이 좀 있어서.
진희 :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해요.
호연 : 다움아, 진희 고모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움 : 난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진희 : 다움아, 다음에 보자.
다움 : 안녕히 가세요.
진희와 호연, 밖으로 나오며 벤치로 향한다.
진희 :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호연 : 별거 아냐. 근데 무슨 일이야?
진희 : 그렇게 빨리 보내고 싶어요?
호연 :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하군.
진희 : 미안할 짓은 첨부터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첫 인터뷰 섭외 실패했을 때 선배가 한 말이에요. 그 때 내가 속으로 생각했죠. 잘난 척 하지 마라, 언젠간 당신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때가 올거다. 그렇지만 선배 밑에서 일 할 땐 그 소릴 한번도 듣지 못했죠. 요즘은 너무 많이 들어서 탈이지만. 선배! 다움이가 선배랑 결혼할거냐고 묻던데요.
호연 : 그 녀석, 참 엉뚱한 데가 있어.
진희 : 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
호연 : ….
진희 : 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
호연 : 진희씨! 난 이미 한 번 실패한 사람이야.
진희 : 단지 그 이유 뿐 인가요?
호연 : 알잖아,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거.
진희 : 알아요. 선배 머릿속엔 다움이 밖에 없다는 거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완치된 다음엔, 그 땐 어쩔 거예요?
호연 : 진희씬 참 좋은 사람이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고 싶어.
진희 : 다움이가 완치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 선배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랬어요. (봉투를 내밀며) 자, 받아요. 자서전 대필한 원고료예요.
호연 : 다 끝난 일인데 어떻게?
진희 : 내가 그랬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 낼거라고.
호연 : 진희씨… 나 이 돈 받을 수 없어.
진희 : 이젠 이런 것까지 무시할 건 가요? 내가 이 돈 받아내려고 얼마나 싸웠는지 알아요? 선배가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받아둬요. (봉투를 주고는) 갈게요, 선배. 선배도 다움이가 기다릴 테니까 빨리 가보세요. (나간다.)
호연 : 진희씨! 진희씨!
민과장 등장
민과장 : 자주 오시는 것 같던데 보통 사이가 아니신가 봅니다.
호연 : 아뇨. 그냥 후뱁니다.
민과장 : 담배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호연 : 아뇨, 괜찮습니다.
민과장 : (벤치에 앉으며) 골수 이식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안돼 있는 게 우리 현
실이죠. 성덕 바우만 군의 골수 이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조직 검사를 하려고 해도 샘플이
너무 부족하고…. 미국 같은 경우에는 삼 백만 종류의 샘플을 확보해
놓고 있어서 언제든지 기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야 단일민족이
니까 십 오만 정도의 샘플만 있어도 공여자를 찾을 수 있는 데, 샘플이
고작 삼만 남짓에 불과하니….
호연 : 다움이…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까?
민과장 : 왜 아이를 하나만 두셨어요.
호연 : 골수 제공자를 찾지 못한 거군요.
민과장 : 최종적으로 맞는 샘플이 없어요. 유감입니다.
호연 :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민과장 : 치료를 계속 해야죠.
호연 : 아무런 희망도 없는 치료를 계속 받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골수 이식이
최후의 방법이 아니었던가요? (사이) 좋습니다. 치료를 계속 받는다 칩시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일 년? 아님 육개월?
민과장 : ….
호연 : 제가 너무 멀리 잡은 건가요? 그러면서 계속 치료를 받으라니,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민과장 :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선택은 보호자께서 하시는 거죠.
호연 : …퇴원하겠습니다.
민과장 : …
호연 : 어차피 같은 결과라면 당연히 퇴원을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
민과장 : 신중히 생각하세요.
호연 : 이제껏 충분히,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습니다.
민과장 : 퇴원은 아이의 생명의 한계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아니, 분명 그럴겁니다.
호연 : 압니다. 너무 잘 압니다. 그렇다고 남은 시간마저 그 끔찍한 고통을 더
겪게 할 순 없습니다. 이 년이 넘는 시간을 고통 속에서만 살아온
아입니다. 이젠 단 하루라도 진정으로 아이가 원하는 시간을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과장 :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장 퇴원은 불가능합니다.
이대로 치료를 그만 두면 백혈구 수치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질 겁니다.
항암제 강도를 높여서라도….
호연 : 아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차라리 아이를 편안하게 보내는 거
아니겠어요? …필요한 조치 부탁드립니다.
병실. 다움이 조각을 하고 있다.
호연 들어와 다움을 한참 쳐다본다.
호연 : 다움이 뭐해?
다움 : 어, 아빠. 아빠 얼굴을 조각하고 있어요.
호연 : 그랬어? 야, 다움이, 아주 잘하는구나. 다움이 커서 조각가 될 거야?
다움 : 싫어요. 조각은 그림이랑 비슷한 거잖아요. 그럼 엄마랑 닮은 거니까
싫어요. 난요, 아빠처럼 시인이 될 거예요.
호연 : 다움이 엄마가 왜 싫어?
다움 : …엄마가 날 싫어하니까 나도 엄마가 싫어요.
호연 : 왜 엄마가 다움일 싫어한다고 생각해?
다움 : 한국에 왔다면서도 날 안 보러 오잖아요.
호연 : 아, 그거, 아빠가 잘 못 안거야. 알아 봤더니 엄마가 아직 한국에 안왔대네.
다움 : …그럴 줄 알았어요.
호연 : 왜? 실망했니?
다움 : 내가 그런거에 왜 실망을 해요? (조각만 하고 있다.)
호연 : …다움아, 우리 퇴원할까?
다움 : 정말요? (금새 시무룩해져서) 또 재발하면 어떡해요?
호연 : 이젠 재발 안해. 민과장님이 퇴원해도 된댔어.
다움 : 와, 정말이죠, 아빠.
호연 : (고개를 끄덕인다.)
다움 : 언제요? 언제 퇴원해요?
호연 : …내일 당장!
다움 : 진짜요? 와, 정말 캡이다. 아빠, 퇴원하면 다시는 병원에 안 오는 거죠?
호연 : (고개를 끄덕인다.)
다움 : 아빠,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많이 아팠는데 그냥 죽으면 굉장히 억울할 거 같아요. 그쵸?
호연 : ….
다움 : 빨리 자야겠다. 아빠, 나 잘래요. 그래야지 내일이 빨리 올 거 아녜요? 아 빠, 귀 만지게 해주세요. 난 아빠 귀를 만져야지 잠이 잘 오거든요.
호연 : 오, 하나님!
호연의 귀를 만지며 잠드는 다움. 다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호연. 무대 어두워진다.
다움이 짐을 챙기고 있다.
다움 : 안녕, 안녕. 침대야. 의자야. 모두다 안녕이다. 나 인제 퇴원한다. 너희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야. 은미한테 꽃핀도 선물하고 학교 가서 애들이랑 야구도 할거야. 축구도 하고. 병원에는 다시는 안 올거야. 안녕, 안녕. 모두 안녕.
호연 : (들어오며) 다움아, 준비 다 됐어?
다움 : 예, 아빠. 그러니까 우리 빨리 가요.
호연 : 옷 단단히 입고. 자, 이건 아빠 선물! (모자를 준다.)
다움 : 와, 찬호형 모자다. 아빠,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호연 : 퇴원하는 게 그렇게 좋아?
다움 : 네. 나 이제 다시는 안 아플거예요.
민과장 등장
다움 :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니다. 안녕히 계세요다.
민과장 : 다움이 퇴원해서 신나는구나.
다움 : 네!
민과장 : 몸조심하고, 어디 아프면 아빠한테 꼭 말씀드리고.
다움 : 이제 다시는 안 아플거예요.
민과장 : 그래, 그래야지. 다움아, 밖에서 간호사 누나들이 기다리던데?
다움 : 네. (밖으로 나간다.)
민과장 : 어디로 가실 겁니까?
호연 : 아, 예. 딱히 정한 곳은 없습니다.
민과장 : 조금이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곧바로 병원에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흘에 한번씩은 꼭 연락하시고요.
호연 : 네, 그러겠습니다.
다움 : (들어오며) 아빠!
호연 : 응, 다움아. 가자.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다움 :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선생님, 감사합니다.
호연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움 : 아빠, 빨리 가요.
다움과 호연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는 민과장.
무대 서서히 어두워 진다.
어둠 속, 새 소리, 물 소리, 다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움 : 내가 정말 병이 다 나은 모양이에요. 병원에 있을 때처럼 아픈 주사랑 쓴 약을 안 먹어도 아프지 않거든요. 아빠 말처럼 산에는 신기한 것들이 아주 많답니다. 아빠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으면 구절초, 쑥부쟁이, 참나리라는 풀들도 볼 수 있고요, 박새랑 물까마귀가 날아다녀요. 다람쥐도 막 뛰어다 니구요. 그리고 병원에 있을 땐 소독약 냄새가 나는 밥을 먹어야 됐는데, 여기선 산딸기랑 버섯이랑 맛있는 것들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요. 아빠 얼굴도 햇살처럼 환해졌구요. 그래서 난 지금 너무너무 행복하답니 다.
모든 소리가 잦아들며
갑작스런 앰블란스 소리.
무대 중앙에 호연이 절망에 빠져 앉아 있다.
호연 : 하나님! 그래요. 난 당신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참 잔인도 하시군요. 정말 잔인도 하십니다. 나한테 남은 건 오직 아이뿐인데, 왜 그 소망마저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내가 너무 많은 걸 원한 건가요? 내 소망이 그렇게 도 지나친 것이었습니까? 하나님, 아이를 살려주세요. 당신이 정말 절대적 인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이를 살려주세요. 난 당신을 모르고 어쩌면 앞 으로도 내내 그럴 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믿음 없는 자에 대한 대가라면 차라리 절 데려 가세요. 기꺼이 아일 대신하겠습니다. 아인 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당신을 사랑하구요, 세상을 사랑하는 아입니다. 부디 그 맑은 영혼을 살려주십시오. 아이를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흐느끼는 호연. 무대 어두워진다.
민과장의 사무실. 민과장과 호연이 앉아 있다.
호연 : 선생님! 어떻게 공여자를 찾으신겁니까?
민과장 : 우리 현실상 외국 기관에 의뢰하는 건 드문 일입니다만, 제가 일본 유학 시절에 친분이 있던 몇몇 의사한테 다움이 골수 샘플을 보냈습니다. 그 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다움이와 일치하는 샘플을 찾아낸 거죠.
미도리라고 일본 여성입니다.
외국인한테 골수를 공여한다는 사실에 망설이는걸 저희들이 간곡히 설득 해서 어렵게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어디서 지내셨습니 까?
호연 : 산에 있었습니다.
민과장 : 물 좋고 공기 맑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다움이 체력이 많이 좋아졌더군 요. 이식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으면 어쩌나 많이 걱정했 었는데.
호연 : 산에 있는동안 몸에 좋다는 건 닥치는 대로 먹였습니다. 애가 싫다는데도 억지로 뱀탕까지 끓여 먹였구요. …정말 이식수술만 받으면 완치가 가능한 겁니까?
민과장 : 임상 사례로 보면 골수 이식 후 생존률이 팔십 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습 니다.
호연 : 팔십 퍼센트나요?
민과장 : 이식의 과정만 이겨내면요. 중요한 건 환자의 투병의지입니다. 선생님이 곁에 있는 한, 다움인 반드시 이겨낼 겁니다. 이제 곧 이식 준비에 들어 갈 겁니다. 재발에 재발을 거듭했으니 선생님 심정 잘 이해합니다. 하지 만 이번엔 감히 말씀 드리고 싶군요. 절 믿어보십시오. 희망이 있습니 다. 아니, 틀림없이 완치되서 웃으면서 병원을 떠날 수 있을 겁니다. 그 땐 저도 떳떳하게 다움이의 인사를 받을 수 있을 테구요.
병실. 다움이 누워있고 곁에 애리가 있다.
애리 : 다움아! …엄마야, 다움아.
다움 : 엄마…?
애리 : 그래, 다움아. 엄마야. 엄마가 왔어.
다움 : 엄마….
애리 : …우리 다움이, 엄마가 많이 밉지? 이 엄마를 용서하렴. …우리 다움이 그 렇게 아팠는데도 많이 컸네.
다움 : 여기 어디예요? 나 퇴원해서 아빠랑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애리 : 다움이가 또 쓰러져서 병원에 다시 온거야.
다움 : 어? 아빠는요? 아빠는 어딨어요?
애리 : 다움인 아빠만 보고 싶니? 엄만 보고싶지 않았어?
다움 : …
애리 : 아직도 엄마가 미운가 보구나. 이 엄말 용서해줘. 하지만 엄마로선 어쩔 수 없었단다.
호연, 들어온다.
다움 : 아빠!
호연 : 다움아! 미안하다, 아빠가… 아빠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질거야.
애리 : 당신이란 사람,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어쩜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어요!
다움 : 내가 아픈게 왜 아빠 탓이에요!
애리 : 다움아….
호연 : 다움아,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다움 : …아빠한테 소리지르니까 그러죠. 엄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애리, 병실 밖의 복도로 나간다. 호연, 따라 나선다.
애리 : 좋겠군요.
호연 : 무슨 소리야?
애리 : 나 없는 사이에 애를 철저히 당신 편으로 만들어 놨어요.
호연 : 애가 오랜만에 당신을 봐서 낯설어서 그러는 것 뿐야.
애리 : 애가 소리 지르는 것 봤죠? 사 년 만에 만난 엄마한테 말예요. 축하해요. 당신 나한테 멋지게 복수한 셈이니까.
호연 : 복수?
애리 : 참 장한 아버지군요. 자길 죽일 뻔한 아빠도 아빠라고 정이 철철 넘쳐요.
호연 : 그런식으로 비꼬지마.
애리 : 앨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당신이 아버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애 를 살릴 수 있는방법을 뻔히 눈 앞에 두고도 아일 죽일뻔 했다구요.
호연 : 그땐…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어.
애리 : 최선이요? 애가 죽을 뻔한게 최선인가요? 퇴원할 상황이 아닌데 당신이 억 지로 퇴원을 시켰다더군요. 왜 그랬죠?
호연 : 희망없는 치료로 아일 괴롭히고 싶지 않았어. 그 뿐이야.
애리 : 그래서 아일 이렇게 맥없이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어요? 정말 무책임한 사람이군요. 돈 때문에 애를 죽일 작정이었나요?
호연 : 뭐라구? 돈?
애리 : 원무과에 알아봤더니 당신 전부터 치료비가 항상 밀렸다더군요. 이제 골수 이식 수술비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예치금을 내지 않으면 병원에서 치 료해 주지 않을거예요. 어디서 돈이 뭉텅이로 떨어지나요? 당신은 수술비 는커녕 이천만원이란 예치금도 감당할 수 없는 빈털터리예요. 이대로 있 다간 다움인 이식은 커녕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거예요.
호연 :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애리 : 그렇게 장담하지 말아요. 돈이 사람을 속이지, 사람이 돈을 속이나요. 당신 이 그동안 다움이를 위해서 애쓴거 알아요. 어쨌든 당장은 아이부터 살려 야 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다움일 생각한다면 어떤게 아일 위한 방법인지 잘 생각해 봐요. (나간다.)
호연, 병실로 들어간다.
다움 : 아빠….
호연 : 엄마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셨어. 괜찮지?
다움 : ….
호연 : 다움아… 아빠 말 잘들어. 다움이 병이 재발해서 또 치료를 해야한데. 근데, 옛날보다 훨씬 힘든 치료가 될거야.
다움 : 아빠… 나…
호연 : 그래, 다움아. 다움이 마음 다 알아. 아빠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다움 : 하나님은 왜 날 고쳐주지 않으시는 거죠? 아빠, 다움이도 살고 싶어요. 죽 고 싶지 않아요. 아빠, 나 너무너무 무서워요.
호연 : 무서워 하지말아라, 다움아. 다움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그게 제일 중요 해. 난 참아낼 수 있다, 절대로 지지않을 거다, 꼭 건강해 질거다, 그런 생 각만 하면 되는 거야. 아빤 다움이를 믿어. 다움이가 어른이 되고 결혼도 하고 아빠가 되는 걸 아빤 정말 보고 싶어. 근데 다움이가 이렇게 힘없이 있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어? 아빠한텐 한 가지 소원밖에 없어. 그 소원 이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어. 이 소원을 안 들어주면 하나님을 믿지 않 겠다고 떼를 썼지. 그랬더니 하나님이 꼭 들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 근데 무슨 소원인지 궁금하지 않아?
다움 : …궁금해요.
호연 : 우리 다움이가 빨리 커서 은미한테 장가가게 해달라고 그랬지.
다움 : 아빠, 그런 엉터리 소원이 어딨어요?
호연 : (다움을 안으며) 아빠도 그동안 많이 힘들었어. 그때마다 다움이가 만든 이 조각을 보면서 생각하지. 힘내자, 걱정하지 말자. …이제 다움이 차례야. 힘 들때마다 이 조각을 보면서 생각해. 아빠처럼 말야. 이 조각은 우리한테 행 운을 가져다 줄거야. 알았지? 그나저나 우리 다움이 애써 길렀던 머리가 또 빠져 버리면 어쩌지?
다움 : 괜찮아요. 아빠! 나 머리가 없으면 꼭 유승준같죠?
호연 : 아빠 눈에는 유승준보다 훨씬 더 멋있는데.
다움 : 근데 아빠, 이제 어떻게 치료하는 거예요?
호연 : 응. 핏속에는 적혈구, 혈소판, 그리고 우리 다움이가 잘 아는 백혈구가 있 어. 이런것들을 만들어 내는게 골수라는 거야. 다움이 골수가 뭔지 알지? 그런데 다움이는 골수가 고장나서 이상한 백혈구가 생긴거야. 그치만 다 움이 몸에 깨끗한 골수를 넣어주기만 하면 곧 좋은 백혈구를 만들어 낼 수 있거든. 근데 다움이를 위해서 골수를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거야.
다움 : 그게 누군데요?
호연 : 일본 누난데, 정말 고마운 누나지?
다움 : 네. 근데요, 그 누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데 일본말을 몰라서 어쩌 죠?
호연 : 아빠가 가르쳐 줄까?
다움 : 네.
호연 : 자, 따라해봐. 아리가또….
다움 : 아리가또….
호연 : 고자이마스.
다움 : 고자이마스.
무대 어두워진다.
벤치. 송계장과 호연이 앉아있다.
송계장 : 참 답답도 하시네요. 글쎄,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호연 : 이천만원이 작은 돈도 아니고 당장 내일까지 구한다는 건….
송계장 : 그러니까 시간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장 예치금을 내지 않으면 병원 측에서도 치료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호연 : 계장님!
송계장 : 저한테 이렇게 매달려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그만 가보겠 습니다.
호연 : 계장님, 제발 며칠만이라도,
송계장 : 아, 글쎄 안된다니까요. (시계를 쳐다보며) 저 빨리 가봐야 됩니다. 이거 선생님이 붙잡는 바람에 제가 가지도 못하잖습니까?
호연 : 계장님,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송계장 : 아, 이것 참, 사람 곤란하게 만드시네. 선생님! 저 해병대 동기 모임 때문 에 빨리 가봐야 됩니다. 해병대 무서운 거 모르세요? 저, 늦으면 큰일납 니다.
호연 : …해병대 나오셨습니까?
송계장 : 아니, …선생님도 해병대 출신이십니까?
호연 : 예.520기 백령도에 있었습니다
송계장 : 아니, 저도 백령도 수색대 출신인데…
송계장 : 520기! 아이고, 선배님! 이거 선배님이신 줄도 모르고.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호연 : 천만에요. 선배로서 떳떳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할 뿐입니다.
송계장 : 말씀 낮추십시오, 선배님. 그동안 저땜에 맘고생이 심하셨죠? 죄송합니다. 일이 일이다 보니까….
호연 : 아니예요. 내가 왜 송계장 맘을 모르겠어.
잠시 침묵.
호연 : …이거 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말하기가 더 힘들군.
송계장 : 아닙니다, 선배님. 뭐든지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호연 : …내일 당장 치료가 시작될 모양이야. 이번 치료가 아이로선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송계장을 곤란하게 만들진 않겠어. 어떻게 날 좀 도와줘.
송계장 :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서….
호연 : 당장 예치금을 마련할 순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해 볼 게.
송계장 : 며칠 정도야 그럭저럭 넘어가겠죠. 하지만 자꾸 미뤄지다보면 저도 어떻 게 도와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병원도 따지고 보면 장사 아닙니까. 자원봉 사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손해보는 장살 하겠습니까? 치료비를 건질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결국 치료를 중단할 겁니다.
호연 :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절대로!
송계장 : 하지만 선배님, 없는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겠습니까?
호연 : ….
송계장 : (긴 사이) …제가 하는 얘기 오해말고 들으십시오. 사촌형님이 한 분 계 십니다. 형님한테 딸이 하나 있는데 지난해 뇌종양 판정을 받고 우리 병 원에 입원했었죠. 당장 수술은 받아야 되는데 수술비 마련할 길이 막막한 겁니다. 그래서 형님이 큰 결심을 하셨죠. 선배님도 보셨을 겁니다. 병원 화장실에 붙어있는 장기 알선 스티커요. 글쎄 형님이 그걸보고 자기 신장 을 팔기로 작정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거의 다 사기거든요. 그래서 형님한테 그건 다 사기라고 아무리 말려도 도통 제 말을 안 믿는겁니다. 말리다 말리다 안되겠다 싶어서 오히려 제가 나섰죠. 병원 친구 중에 그 쪽 계통으로 잘 아는 친구가 있어서 연락을 했습니다. 장기매매가 음성적 으로 이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친구를 통하면 적어도 사기당할 염려는 없으니까요.
호연 : …신장 기증이라는 게 누구나 가능한 건가?
송계장 : 수요는 많고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니까 건강하기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 죠 .
호연 : 그래…, 얼마를 받을 수 있지?
송계장 : 사촌형님은 삼천 받으셨습니다. …이거 꼭 브로커가 된 것 같군요. 하지 만 오랫동안 선배님을 겪어보니까 딱히 돈나올 데도 없을 것 같고, 그래 서 한 번 고려해보시라는 뜻에서 말씀드린겁니다. 다른 오해는 마십시오.
호연 : 아니야. 그런 얘기까지 해주니까 오히려 고마운데. 내가 달리 망설일 이유 가 뭐 있겠어. 생면부지의 아이한테 골수까지 기증하는 사람이 있는 마당 에 내 아일 위해서 신장 하나가 문제겠어? 지금 당장 달리 방법도 없고 그 방법 알아봐 주겠나?
송계장 :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선배님 사정이 하도 딱하고 하니…. 그 전에 약속 해 주실 게 있습니다. 장기 거래가 불법이란 건 잘 알고 계시죠? 병원 측에서 알면 전 그 날로 모가집니다.
호연 : 알았어.
송계장 : 그럼 몇 가지 검사를 받으셔야 될 겁니다. 혈액검사하고 신장 기능 체크 하고…. 참, 검사를 받으려면 검사비가 필요한데….
호연 : 일단 가지고 있는 노트북을 처분해서 검사비를 마련해 볼게.
민과장의 사무실.
호연 : (들어오며) 저,,, 이것좀 봐 주시겠습니까,,,,
민과장 : (필름을 들고) 누구겁니까?
호연 : 친구겁니다.
민과장 : 친한 친굽니까?
호연 : 예, 아주 절친한 사이입니다.
민과장 : …간암입니다. 그것도 말기군요.
호연 : 저어, 말기라면, 달리 방법이?
민과장 : 간이라는게 조직 중에 이십퍼센트만 남겨놓고 잘라내도 재생이 가능합니 다만, 애석하게도 친구분은 수술이 불가능하겠어요. 암 조직이 간 전체에 퍼져 있고, 필름 상으로 이 정도라면 실제론 더 심해서 개복을 하더라도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만 둬야 할 게 뻔합니다.
호연 : 그러니까, 전혀 희망이 없다는 겁니까?
민과장 : 일단은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받아야죠. 그렇지만….
호연 : 그 친구는 이제까지 정상으로 살아왔습니다. 간암, 그것도 말기라면 그 동 안 무슨 낌새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민과장 : 간암이라는게 흉물스러워서 시치미 뚝 떼고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 도달 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마수를 드러낸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흔히들 간 을 침묵의 장기라고 합니다.
호연 : 본격적으로 마수를 드러낸다면 어떤 증상이 나타납니까?
민과장 : 일반적으로 구토와 참기 힘든 복통이 올 겁니다. 호흡도 곤란해 지고, 복 수도 차고, 결국엔 간 정맥 혈관이 파열되서 피를 토하고 하혈을 하면서 사망하게 되는 거죠.
호연 : 그 친구는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민과장 : 육개월을 넘기기가 힘들겠군요. 하루라도 빨리 친구 분 치료를 받게 하세 요. (필름을 넘겨주며) 다움이 녀석 참 기특해요. 생각이 보통 깊은게 아 닙니다. 오전에 병실에 들렀다가 좋은 소식을 전해줬습니다. 그랬더니 대 뜸 아빠한테 말했냐고 묻더군요.
아니라고 했더니, 아빠한테는 비밀이래요. 자기가 직접 아빠한테 말해서 아빠가 기뻐하는 모습을보고 싶다나요? 빨리 가보세요. 다움이가 기쁜 소 식을 알려 드릴겁니다. 다움이 소원대로 맘껏 기뻐해 주세요.
호연. 사무실에서 나와 벤치로 향한다.
진희가 다가온다.
진희 : 저기서부터 불렀어요.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호연 : 어, 진희씨.
진희 : 검사 결과가 안 좋게 나왔어요?
호연 : 무슨 소리야?
진희 : 그거 다움이 시티 필름 아녜요?
호연 : 아, 이거… 아무것도 아냐. 다움인 괜찮아. 좋아지고 있어.
진희 : 선배도 좀 좋아지면 좋겠네요.
호연 : …
진희 : 나에 대한 선배의 감정말예요. 날 봐도 하나도 안 반가운 얼굴이잖아요.
호연 : (피식 웃으며) 내가 왜. 마감 때문에 한창 바쁠텐데 웬일이야?
진희 : 선배한테 구박 안받으니까 일이 손에 잡히질 않네요. (봉투를 내민다.)
호연 : 이게 뭐야?
진희 : 구박받을 짓 좀 했죠. 원무과에 전화했더니 예치금 얘길하더라구요. 내가 원래 이렇잖아요. 자, 원무과에서 발행한 영수증이에요.
호연 : 진희씨가 돈이 어딨다구….
진희 : 그래도 내가 선배보다 좀 낫잖아요. 결혼자금으로 모아둔게 좀 있었어요. 두고두고 갚으세요.
호연 : 결혼자금을 이런데 쓰면 어떻게 해?
진희 : 선배가 날 책임지면 되잖아요?
호연 : 진희씨, 그 얘긴 이미….
진희 : 알아요, 알아. 선배 머릿 속에 나 여진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거. 그치만 다움이가 완치되고 나면 선배한테도 여유가 생기겠죠. 그 때 생각 해줘요. 이 여진희가 여자로서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
호연 : ….
진희 : 노을이 참 곱네요.
호연 : 진희씨, 우리 어디가서 술이나 한 잔 할까?
진희 : 웬 일이에요? 선배 입에서 술 마시자는 소리가 다 나오고. 무슨 일있어요?
호연 : 일은 무슨. 그냥 한 잔 하고 싶어서 그러지.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잖아.
진희 : 다움이는 어쩌고요?
호연 : 나도 때때로 내 인생을 살고 싶어. 정호연의 인생말야. (시티 필름을 두고 일어난다.)
진희 : 이거 안가져가요?
호연 : 내버려 둬. 이젠 필요없으니까. (나간다.)
진희. 호연을 쳐다보다가 필름을 챙겨들고 뒤따라 나간다.
병실. 다움이 화가 난 듯 앉아 있다.
수돗물 소리가 들린다.
다움 : 아빠! …아빠?
잠시 후, 호연이 손을 닦으며 나온다.
다움 : 아빠, 울었어요?
호연 : 울긴, 아빠가 왜 울어?
다움 : 수돗물 소리가 계속 들렸으니까 그러죠.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아빤 슬픈 일이 있으면 꼭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울잖아요.
호연 : 이거 다움이가 아빠에 대해서 훤히 알아서 거짓말도 못하겠는데.
다움 : 아빠에 대한거라면 난 뭐든지 알아요.
호연 : 그런데 이거 어떡하지? 아빤 운게 아닌데.
다움 : 그럼 뭐했어요?
호연 : 그냥 손 씻었지.
다움 : 피~. 참, 나 화났어요. 아빠랑 말 안할거예요.
호연 : 우리 다움이가 왜 화가 났을까?
다움 : 하루종일 나만 혼자 두고선….
호연 : 미안해, 다움아. 아빠가 친구랑 한 잔하느라구.
다움 : 아빠 술 마셨어요? 무슨 슬픈 일이 있었어요? 아빤 슬픈 일이 있을 때만 술 마시잖아요.
호연 : 땡! 다움이가 오늘은 많이 틀리네. 슬픈 일이 있다니? 그 반대야. 아빠한테 아주 좋은 일이 있었거든.
다움 : 무슨 일이요?
호연 : 다움이가 치료를 너무 잘 받아서 이번 치료만 끝나면 다시는 재발하지 않 는다는 말을 들었지. 아빠한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딨겠어?
다움 : 과장 선생님한테요?
호연 : 응.
다움 : 다른 말은요?
호연 : 못 들었는데.
다움 : 휴~ 다행이다. 난 또 과장 선생님이 나랑 한 약속을 어긴 줄 알았네.
호연 : 무슨 약속?
다움 : 아주 좋은 소식이라서 내가 직접 얘기할려고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그 랬거든요. 근데 아빤 이렇게 늦게 오시고. 하루종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호연 : 미안해, 다움아. 근데 무슨 소식인데?
다움 : 일본 누나가요, 한 달 전부터 고기는 입에도 안 대고 과일이랑 채소만 먹는 데요.
호연 : 왜?
다움 : 나한테 깨끗하고 좋은 골수를 줄려고요.
호연 : 야아, 정말?
다움 : 예. 과장 선생님이 일본 누나한테 전화해 봤대요. 아빠, 골수가 깨끗해야지 내 몸 안에서 쑥쑥 자라날 수 있대요.
호연 : 굉장이 좋은 소식이구나. 이거 아빠가 나가서 한 잔 더 해야 겠는걸.
다움 : 에, 에. 싫어요. 아빠 나랑 있어요.
호연 : 농담이야. 아빠가 다움이 두고 어딜 가겠어. …다움이가 치료도 잘 받고, 일 본 누나도 다움일 위해서 애써주니까 아빤 앞으로 아무 걱정이 없구나.
다움 : 아빠가 좋아하니까 저도 많이 기뻐요.
호연 : (사이) …다움아!
다움 : 예?
호연 : 아빠… 사랑하지?
다움 : 당연하죠.
호연 : 이 아빠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줄래?
다움 : 아빠, 사랑해요. (호연을 껴안는다.)
호연. 다움을 껴안고 작게 흐느낀다.
무대 어두워진다.
송계장과 호연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다.
송계장 :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한건지….
호연 : 세상 탓이 아니야. 그보단 저… 아이 이식수술비를 마련해야 할텐데….
송계장 : 선배님! 선배님은 지금 이 상황에서마저도 수술비 걱정이십니까? 친구분 이 예치금을 내셨더군요. 예치금은 해결됐으니까 다른 걱정은 마시고 선 배님 치료부터 받으세요. 간암입니다. 간암 말기라구요. 길어야 육개월입 니다.
호연 : 이미 끝난 일이야. 송계장도 알겠지만 난 가망이 없어. 어차피 가망없는 삶. 끝까지 다움일 위해 살기로 작정했어.
송계장 : ….
호연 : 같은 해병대 출신이란 이유로 송계장한테 괜한 민폐나 끼치고…. 간암인걸 뻔히 알면서도 민과장님한테 재차 확인을 했어. 혹시 오진이 아닌가 싶어 서. …이런 게 운명인가 보지? 그나마 다행이야.
아무것도 모른채 어처구니없이 죽을 뻔했는 데…. 정말 고마워. …신장매매 땜에 받은 검사로 간암 판정을 받을 줄이야….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려 고 해서 하나님께서 노하신걸까?
송계장 :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러시진 않을 겁니다. 일단은 저한테 모든걸 맡 기십시오. 선배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데 제가 가만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병원에서 극빈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선 치료가 있습니다. 혜택 을 받는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다움이 진단서랑 선배님 진단서를 발급받아서 첨부하면 가망이 있을 겁니다.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호연 :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송계장 :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 말대로 하세요.
호연 :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정말이야. 아이의 치료비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내 손으로 마련하고 싶어. …송계장. 내가 듣기로는 각막도 기증할 수 있다고 하던데…. 간암에 걸린 사람도 각막은 기증할 수 있잖아?
송계장 :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각막은 신장하고 다릅니다.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 다.
호연 : 다르지 않아. 각막이든 신장이든, 적어도 나한텐 똑같아. 나한테 남은 시간 은 길어야 육개월이야. 생각해봐. 그깟 육개월, 한 눈으로 살든 두 눈으로 살든 그게 뭐 대수겠어? 별 일 아니야. …이제와서 아이한테 뭘 해줄수 있 을까. 내가 아이하고 함께 나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면 굳이 서두를 필 요도 없겠지. 각막을 파는 짓 따윈 더더욱 안할거구. 그치만 나한테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아. 간암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분노할 시간조차 없어. 중요 한 건… 그러니까 다움인 살 수 있고 난 죽는다는 사실이지. 게다가 나한 텐 남겨줄 유산도 없어. 그러니까 애비로서 마지막으로 무언갈 하고 죽어 야, 그래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이제까지 송계장한테 신세 많이 졌어. 달리 갚을 길이 없어서 나도 속상해. 하지만 어쩌겠어, 날 한 번만 더 도와 줘.
송계장 :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하시는 군요.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나간다)
병실. 애리와 다움이 있다.
다움 : 아빤 바보야. 난 내일 수술 받아야 되는데….
애리 : 다움이, 아빠가 없어서 불안한가 보구나?
다움 : 난 아빠가 없으면 바보 멍청이가 된단 말예요. 아빠가 옆에 없으면 난 백혈병을 이길 수 없을 지도 몰라요.
애리 : 다움아,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옆에 있는데도 자꾸 아빠만 찾을거야? 자꾸 엄마 속상하게 이럴거니?
다움 : …이제 우리랑 같이 있을 거예요?
애리 : 그건… 다움아, 엄마랑 아빤 같이 있을 수가 없어.
다움 : 왜요?
애리 : …엄마랑 아빤 아주 오래 전에 헤어졌거든.
다움 : 아빤…엄말 미워하지 않아요.
애리 : 엄마도 아빨 미워하지 않아. 엄마랑 아빤 서로 생각이 맞지 않았을 뿐야. 그래서 혜어진거고.
다움 : 엄마… 프랑스 안가요? 이렇게 계속 여기있으면 그림은 어떡해요?
애리 : 우리 다움이는 그런거 걱정하지 말고 건강해지기만 하면 돼. 그래서 수술 끝나고 퇴원하면 엄마랑 같이 프랑스에 가자.
다움 : 예?
애리 : 이제 엄마가 다움일 돌볼거야.
다움 : 그럼 아빠는요?
애리 : 아빤… 한국에 계실거야.
다움 : 그럼 난 프랑스엔 안갈거예요. 나한텐 아빠가 중요하단 말예요.
애리 : 다움아. 엄만? 엄만 중요하지 않니?
다움 : 그건 아니지만….
애리 : 다움아, 다움이가 어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빤 진희 고모랑 결혼하실거야.
다움 : 아빠랑 진희 고모랑요?
애리 : 그래, 다움아.
다움 : 내가 아빠랑 있으면 방해가 되는 건가요?
애리 : 아빠랑 진희 고모는 둘만 살길 바래.
다움 : 그럼 난 프랑스로 가야 되는 거예요?
애리 : 그래. 엄마랑 프랑스에 가는게 다움이한테도 아빠한테도 더 좋은 길이야.
무대 어두워진다.
벤치, 진희와 호연.
호연 : 진희씨, 뭐해? 얘기할게 있다고 그래 놓고선.
진희 : 선배! 선배한테 나란 존잰 뭐죠?
호연 : 진희씨. 무슨 소리야?
진희 : 어쩜 나한텐 한마디도 안하고….
호연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진희 : (시티 필름을 내보이며) 이거 몰라요? 이래도 시치미 뗄 건가요?
호연 : …그거 내거 아냐. 그냥 내 절친한 친구….
진희 : 병원에서 다 확인해 봤어요. 정호연이란 이름 석 자도 분명히 확인했구요. 끝까지 비밀로 할 셈이었나요?
호연 : ….
진희 : 선배! 선밴 도대체…. (운다.)
호연 : 울지마, 제발.
진희, 한참을 흐느끼는 가운데 호연이 웃는다.
진희 : 웃음이 나와요? 정말 웃고 싶어요?
호연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그 때 진희씨가 말했지. 어떻게 하면 선배랑 친해질 수 있어요? 그러구선 진희씨가 활짝 웃어보이는 거야. 참 천진한 웃음이었지. 그 웃음을 봤을때, 이미 난 진희씨하구 친해진 느낌이 었거든.
진희 : 기적이란 것도 있어요. 다움이한테 일어났던 그런 기적말예요. 이렇게 포기 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호연 : 지금이 다움이한테 가장 중요한 시기야. 기적적으로 찾아온 마지막 기회. 반드시 내가 곁에 있어야 돼. 내가 없으면 다움인 불안해 하거든.
진희 : 선배는요? 마지막인 건 선배도 마찬가지예요. 다움이한테 아빠로서 할 만큼 했어요. 이제 다움인 엄마한테 맡겨요. 선배, 제발. 다움이한테 쏟은 정성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선배 자신한테 쏟아봐요, 제발.
호연 : 그 동안 제일 견디기 힘든 일이 뭐였냐면, 우습게도 아이 손톱을 깎는 일이 었어. 손톱이 자라난 만큼 아이에게 허락된 날들이 줄어들고 있구나. 이렇 게 손톱은 자꾸자꾸 자라는데 넌 자꾸자꾸 죽어가고 있구나. 그래서 난 될 수 있는대로 아이의 손톱을 바짝 깎곤 했어. 그렇게 하면 아이의 생명 이 더 늘어날까해서 말야. 하지만 이젠 아이의 손톱을 넉넉히 남겨놓고 깎 아. 왜냐하면 더 이상 손톱에 연연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야. 아니, 오히려 더 자주자주 깎으면서 아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자주 확인하고 싶 은 건지도 모르지.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무도 모를거야. 그러니까 나 는 말이지, 아주 행복한 아버지인 셈이지. (웃음) …진희씨, 이런 말 알아? 사람은 말야… 사랑하는 아이를 세상에 남겨놓은 이상은, 죽어도 아주 죽 는게 아니래.
병실. 호연이 한 쪽 눈에 붕대를 붙이고 들어온다.
호연 : 다움이, 자니?
다움 : 아, 아빠. 어디갔다가 이제 오셨어요? 어? 아빠, 눈이 왜그래요?
호연 : 으응, 별거 아냐. 아빠가 미안하구나. 급한 일 때문에 다움이 옆에 있을 수 가 없었어. 별 일 없었지?
다움 : 다쳤어요?
호연 : 다치긴.
다움 : 눈병 났어요?
호연 : 눈병은 나쁜 병균때문에 생기는 건데 그렇다면 다움이한테 올 수 없지. 그 냥 눈이 좀 피곤해서 가려놓은 거야.
다움 : 금방 괜찮아지는 거예요?
호연 : 그럼. …왜? 아빠 얼굴이 이상하니?
다움 : 애꾸눈 선장같아요.
호연 : 그래? 나쁜 편, 좋은 편?
다움 : 당연히 나쁜 편이죠. 애꾸눈 선장은 해적이란 말예요. 근데 아빠. 일본 누나 온거 알아요?
호연 : 그럼, 알고 말고. 다움이 사진 보고 아주 잘 생겼다고 그랬는 걸.
다움 : 누나는 어떻게 생겼어요?
호연 : 아주 예쁘게 생겼어. 그치만 마음은 더 예쁜 것 같던데.
다움 :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오네상.
호연 : 다움이, 아주 잘하는데?
다움 : 수술 끝나면 누나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나 누나 보고싶은데요, 민선생님이 그랬어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듯이, 진짜로 착한 일을 할 때는 그 사람이 모르게 하는 거래요.
호연 : 그래. 그 대신 그 누나를 위해서 기도하렴.
다움 : 근데 아빠. 눈 말예요, 정말 괜찮아요?
호연 : 조금 거북하지만 참을만 하단다.
다움 : 아빠, 저기요….
호연 : 왜 다움아?
다움 : 아빠 나 사랑하죠?
호연 : 그럼. 물론이지.
다움 : 사랑하는 사람끼린 평생 같이 살아야 되는 거죠?
호연 : …경우에 따라선 사랑해도 같이 못 살 수도 있어.
다움 : …엄마 말이 진짠가 보죠?
호연 : 무슨 말인데?
다움 : 그치만요, 아빠. 나 진희 고모랑 잘 지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점은 아빠 가 잘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호연 : 무슨 일 있었어?
다움 :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도 아플 때 복잡한 얘길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아빠 눈이 다 나으면 얘기할게요. 졸려요. 나 잘래요.
호연 : …다움아, …내일 수술 자신있지?
다움 : …예.
호연 : 큰 소리로 말해야지. …애꾸눈 선장의 명령이다!
다움 : 예, 자신있습니다!
호연 : 고맙다… 고맙다, 다움아.
무대 서서히 어두워 진다.
호연과 애리가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애리 : 민과장님이 다움이 수술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대요. 이제 이식받은 골수 가 제 기능을 발휘하면 곧 퇴원할 수 있다고 했어요.
호연 : 당신이… 다움일 좀 맡아줬으면 좋겠어.
애리 : 무슨 소리죠?
호연 : 생각해 보니까 당신이 다움일 돌보는 게 낫겠어.
애리 : 마음이 변한건가요?
호연 : 당신도 알다시피 이제 난 내 몸 하나 추스리지 못하는 빈털터리야. 이런 내 곁에 있어봤자 장차 아이 꼴이 뭐가 되겠어. 그러니까 당신이 아이의 장래 를 맡아줘.
애리 :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뭐죠?
호연 : 당신 말대로 애가 내 전유물은 아니잖아. 내 욕심만 내세울 순 없지.
애리 : 혹시 여진희씨랑 결혼할 건가요?
호연 : ….
애리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그런가 보네요. 결국 이렇게 될거면서 그동안 왜 숨겼 어요?
호연 : 좋을대로 생각해.
애리 : 어쨌든 좋아요.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호연 : …다움일, 더 많이사랑하고, 더 많이 아끼고, 더 많이 이해하는 엄마가 돼주 길 바래. 그것밖에 부탁할 게 없군.
애리 : 걱정말아요. 다움인 내가 잘 돌볼테니까. …당신도 여진희씨랑 행복하길 바 랄게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호연 : …?
애리 : 다움인 이제부터 나하고 같이 살 아이에요. 그런데 아인 당신밖에 몰라요.
호연 :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거지?
애리 : 정을 끊어 주세요. 힘든 일인 줄은 알아요. 하지만 생각해 봐요. 아이가 당 신한테 정을 품고 있어 봤자 무슨 득이 있겠어요?
호연 : …맞는 말이야. 그래, 그렇게 하지.
애리 : 그럼 지금 다움이한테 가세요.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나을테니까.
일어나 병실로 향한다.
호연 : (병실에 들어서며) 다움아, 일본 누나 골수가 이제 다움이 몸에서 잘 자랄 거야. 이제 다움인 아무 걱정없어. 이제 퇴원도 할 수 있대.
다움 : 아빠, 눈… 아직도 아파요?
호연 : 괜찮아, 다움아. 아빤 괜찮아. 정다움! 장한 내 아들. 아빠가 한 번 안아볼 까? (다움을 껴안고는 긴 침묵) …다움아, 다움인 똑똑하니까 아빠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거야. 지금부터 아빠 말 잘 들어. 이제 다움인 엄마랑 사 는거야.
다움 : 아빠!
호연 : 아빤 다움이가 살 수 없다고 포기했었어. 하지만 엄만 다움이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어. 다움인 엄마 덕분에 살아난 거야.
다움 : 아녜요. 엄만 나빠요. 엄만 날 버렸어요. 아빠한테도 그랬구요.
호연 : 엄만 누구도 버리지 않았어. 엄말 버린 건 아빠야. 엄만 첨부터 너하고 같 이 살고 싶다고 했지만 아빠가 반대한거야.
다움 : …아빠.
호연 : 엄말 실망시키면 안돼. 엄마가 널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엄마를 사랑해야 지. 알았지?
다움 : …아빠, 진희 고모랑 결혼하는 것 땜에 그래요?
호연 : ….
다움 : 나 진희 고모 말 잘 들을게요. 내가 그랬잖아요. 진희 고모랑 잘 지낼 수 있다고. 거짓말 아니에요.
호연 : 그것 때문에 그런거 아냐. 다움아, 아빠 말대로 해. 엄만 부자니까 다움이 가 해달라는거 다 해 줄거야. 아빠랑 사 년동안 살았으니까 엄마하고도 그 만큼 살아야지. 그게 공평한 거 아니겠어?
다움 : 싫어요, 싫어!
호연 : 싫어도 해야 돼!
다움 : 그냥 죽어버릴 걸 그랬어요. 왜 일본 누나가 나한테 골수를 줬는지 모르겠어요 …아빠, 사랑해요. 아주 많이요. 나한텐 아빠만 있으면 돼요.
호연 : …아빤 많이 지쳤어. 그래서 널 돌보는게 너무 힘들어. 너 때문에 아빤 아 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 아빠도 이제 아빠의 일을 하고 싶어.
다움 : 아빠. 앞으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빨 귀찮게 하지도 않고요. 이 제 다움인 아프지도 않을 거잖아요. 진희 고모 말도 잘 들을 게요. 아빠, 나 버리지 말아요. 아빠 나랑 평생 같이 살기로 약속 했잖아요!
호연 : 아빠가 하라면 해야지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아! 아빤 이젠 너랑 살 수가 없다고 했잖아! 엄마랑 프랑스에 안 갈거면 고아원으로 갈래? 아님 아빠한 테 매나 맞고 구박이나 받을래?
다움 : 아빠,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요. 아빠. 제발요. 난 아빠 밖에 없어요. 아빠도 나 사랑하잖아요.
호연 : 아빤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널 사랑하는 엄마랑 살아.
호연, 황급히 뛰어 나간다.
다움 : 아빠!
무대 서서히 어두워 진다.
병실. 다움이가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
다움 : 하나님, 우리 아빠가 가짜 아빠가 되기로 결심했나 봐요. 나한테 말을 걸지도 않고,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아요. 내가 지겹대요. 날 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진대요. 하나님, 어서 빨리 아빠가 정신을 차리게 해주세요. 시간이 없어요. 난 프랑스로 가야 돼요. 그럼 그땐 어쩔 수가 없단 말예요. 내가 이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뿐이고,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뿐이에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어야 한다고 아빠가 그랬는데 아빤 그것도 다 까먹었나봐요. 하나님. 내가 없으면 아빤 슬프고 또 슬퍼서, 진짜로 아빠 가시고기처럼 될지도 모른단 말예요. 하나님. 자꾸 눈물이 나요. 아빠가 우는건 남자답지 못하다고 했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요. 하나님. 다움이가 많이 아픈가봐요. 그러니까 자꾸 눈물이 나죠. 우리 아빠는요, 내가 많이 아픈지도 모르고 있어요.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 아빠한테 말해주세요. 다움이가 많이 아프다고. 무지무지 아프다구요. 아파서 죽게 됐다구요.
벤치. 호연과 애리가 앉아 있다.
애리 : 내일 떠나요.
호연 : 다움인… 어때?
애리 : 상태는 많이 좋아졌어요.
호연 : (노트를 건네며) 다움이에 대해서 쓴 거야. 다움이 성격, 행동, 취미, 버릇, 좋아하는 음식이랑 싫어하는 음식이랑….
애리 : 고마워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다움이가 울고불고 난리예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안간데요. …다움이한테 모질게 대한거 당신한텐 힘든 일이 었다는 거 알아요. 그치만…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힘들겠지만 다시 한번 다움이 생각을 돌려 줬으면 해요. 부탁이에요.
호연 : …내가 다움일 만날게. 이따 일곱시에…. 다움일 여기로 보내줘.
애리 : 정말 고마워요.
가로등만 켜져 있는 벤치.
다움 : (달려 들어오며) 아빠!
호연 : 거기 서.
다움 : 아빠… 보고 싶었어요.
호연 : 아빤 잘 지내고 있어.
다움 : …불빛땜에 아빠가 잘 안 보여요. 아빠 옆으로 가면 안돼요?
호연 : 안돼. 그냥 거기 있어.
다움 : …나는요, 내일이면 프랑스로 떠나야 된대요.
호연 : 알고 있어.
다움 : 비행길 타야 된대요. 아빤 잘 알잖아요. 내가 미끄럼틀도 못타는 겁쟁이란 걸요.
호연 : 아빨 안 만나게 해주면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면서?
다움 : …아빠가 보고 싶었단 말예요.
호연 : 엄마가 많이 속상했을거야. 프랑스에 가서는 그러지 마. 엄마가 시키는 대 로, 엄말 기쁘게 해드려.
다움 : …프랑스가서 아빠한테 연락해도 돼요?
호연 : 안돼.
다움 : 편지는요? 편지는 써도 되죠?
호연 :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다움 : (울먹인다) …그럼 아빠가 날 보러 오실 건가요?
호연 : 기다리지 마라.
다움 : 그럼 엄마랑 사 년만 같이 살면 아빨 만날 수 있나요?
호연 :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빨 볼 생각도 하지마.
다움 : 스무 살이 되려면 십 년이나 남았어요.
호연 : 십 년은 긴 세월이 아냐. …다시는 아프지 마. 넌 평생아파야 할 것을 한꺼 번에 다 아팠던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아파선 안돼. 알았지? 아 빠 할 말은 다 했어. 다움인 할 말이 남았어?
다움 : 저… (꽃핀과 조각을 꺼내며) 진희 고모한테 전해주세요. 꽃핀이에요. 고모 한테 잘 어울렸거든요. 고모가 좋아할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내가 진희 고 모가 준 주목으로 내 얼굴을 조각한 거예요. 혹시, 아빠가 날 보고싶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아니지만, 내일이라도 내가 보고싶으 면… 난 아빠 얼굴을 조각한 게 있지만 아빤 아무 것도 없잖아요.
호연 : …거기 둬.
다움 : 아빠, 부탁이 있어요. …아빠 귀 한 번만, 한 번만 만지게 해주면 안돼요?
호연 : (고개를 저으며) 이젠 됐어. 그만 가.
다움 : …아빠!
호연 : 엄마가 기다리고 있잖아! 돌아가! 어서!
다움, 뒤돌아 선다.
호연 : 주머니에서 손 빼! 턱 들고! 어깨 펴고! …됐어. 앞으론 그렇게 씩씩한 모습 으로 살아. 넌 이제부터 어른이야. 어른답게 행동해. 아이처럼 굴어선 살 수 없는 세상이야. 프랑스는 남의 나라다. 남의 나라에서는 더더욱 어른답 게 살아. …아빤 …널 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빠를 잊어. 아예 아빠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 어서 가! 절대로 뒤돌아 보지 말고. 앞만 보고 씩씩 하게 달려 가.
뛰어가는 다움
다움의 뒤를 쫓는 호연
호연 : (다움이 두고 간 물건들을 집어들고는) 잘 가라, 아들아. 잘 가라, 나의 아 들아. 나의 전부인 아들아. 잘 가라.
무대 어두워진다.
어둠 속, 호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호연 (소리) : 나의 전부인 아들아. 이젠 영영 널 볼 날이 없겠지.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겠지. 다신 널가슴 가득 안아볼 수도 없겠지. 하지만 아들아, 나의 전부인 아들아. 아빤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란다. 세상에 널 남겨놓은 이상은 아빤 네 속에 살아 있는 거란다. 넌 이 아빨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겠지. 하지만 아빤 언제까지나 너하구 같이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거란다. 네가 지칠까봐, 네가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설까봐 마음 졸이면서 너하구 함께 가는 거란다. 영원히, 영원히…. ( 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