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의 길이
벚꽃이 진다고
낮은 언덕 살랑대던 제비꽃
앉지도 못하고 올려다본다.
싱겁다.
봄바람이 끝나는 어느 하루도
무심코 지나치기란 어려운 것이다.
기어이 낮은 꽃들이 몸을 세우고
가지가지 꽃보다 이파리를 많이 붙여 갈 때마다
펄펄-
꽃잎이 날릴 것이며
또, 일년이 금방 지날 것이다
난장
-전주 풍남제-
난장 이다.
아침부터 신작로 따라 저녁 시가행진까지 걸어가면
팡파르에서 폭죽 터지는 날까지 동네 할머니들은
구경꾼의 일당을 소중하게 챙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공공 근로에 갔다 온 듯
일당이 얼마간에 점심 도시락이 그런 대로 괜찮았다며
천막촌 길게 늘어선 찬란한 불빛은 아예 상관도 없다.
오늘은 피곤해 일찍 잠이 들 것 같기에
열시 수목드라마 궁금한 장희빈도 못 보겠다.
손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 화투에 여념이 없고
객지서 사는 아들 부부 전화가 없는 날이면
손자보다 자식이 더 궁금해 심사도 이상하게 꼬이지만.
염병이 돌아 세상 시끄럽다고 이웃집 댁이 그랬다.
내일은 동사무소에 나가 받을 것 미리 챙겨야겠다고
머리맡에 도장까지 챙겨 두고 잠을 청해도
자꾸 전화가 궁금한 것은 괜한 귀동냥 덕분이라며
가는귀 먹은 앞집 할멈이 부러워 시부렁댄다.
손자 놈의 화투 패엔 매주 열 끗이 힐끗 보이지만
영감이 가고 난 후엔 패를 뗄 때마다
메주가 떨어진 적이 한번이나 있었나 기억도 없다.
내일은 영감들이 모여 노는 싸전 다리로
난장을 핑계삼아 자식보다 궁금해 먼저 갈 것이다.
난장보다 잠자리가 더 어수선하지만
아카시아
비에 젖고 싶다고
빗줄기에 기대 보는 것은 아니다.
아마, 따끈하게 덥힌 찻잔으로
너의 얼굴 덜어내며 입술로 마실 때면
윤기 많은 머릿결 사이 배어 있는
아카시아 향.
비는 찻잔으로 내리는지
바람에 지는 너의 머리결 꽃으로 떨어지면서
빗물로 박히는 유리창의 투명한 기억
엷은 얼룩으로 남는다.
이슬비가 올 때마다 오르던 산은
아카시아 꽃이 진하게 만발한 공원길
빗물에 손 비벼가며 그 얼룩마저 지워야 한다는 것은
내 가슴에 삼십 년 스며들어서야
그 빗물로 남는 흔적
장인어른
웬 놈이 샅바를 잡고
놓질 않는다, 밤이 새도록 시커먼 그 놈이
일을 참지 못하고
하나 뿐인 외 뿔 치켜들었을 때
이미 가위는 입을 벌리고
멱살을 움켜 쥔 채
이승에서 마지막 한 모금마저
숨을 막고 있었다.
저승이 얼마나 되는지
봇짐도 없이 와서는
빈손으로 모시고 간
장인어른.
어디쯤 가셨는지
궁금해도 볼 수 없으니
꽤 멀리 가셨나 보다
꿈 많은 마누라가 요즘엔
꿈도 없이
편안하게 잠을 잔다지만
어디가
허전할 것이다.
비가 올 때면
어깨가 아프다.
목이 어깨를 짓눌러 아픈 것은
목젖이 혀를 눌러 끙끙대는 것 말고는
그 원인이 없어 보이지만
어깨뿐이겠느냐.
툭 삐져 나온 뼈마디의 말랑한 디스크
거기를 지나는 뾰죽한 신경들이
손바닥을 따끈따끈하게 지져대고 있다는 것을
얼얼하게 얼음 덩어리 손에 쥐고
멍멍한 신경 줄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가서
내 몸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어디가 어찌 그런지 몰라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것은
목젖이 혀를 믿을 수 없다고
의학용어 잘 몰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비가 온다는 기상대 예보보다
마디마디 칼등으로 무디게 잘라가듯
지근지근 쑤셔대는 신경 끝으로 가서
양어깨 어딘가 비가 온다고
시꺼먼 구름이 무거워서 가지도 못하고
잔뜩 부풀어 있다, 세상보다 넓은 어깨에 달려
나를 보고 있다
싫증이 날 때도 되었다.
머리카락에 핀 비듬들이
벚꽃처럼 날리며 번성할 때까지
머리 속 가느다란 실핏줄들은
적당히 양분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며
무뎌터진 손끝으로
머릿속 허연 쓰레기들만 벗겨내고 있었다.
밥은 지금껏 먹었어도
아직도 부지런히 먹고 있는데
가끔 미안하다, 버리고 싶어 게을러지는
큰어머니
큰어머니 장례 길 따라
금강 하구 둑 건너가는 고향 길은
찔레꽃이다.
입관 식에서 보니
하얀 꽃으로 가시는
영락없는 큰어머니다.
보릿고개 부엌데기 시집살이에도
하얀 꽃잎으로만 피워내던
세상에선 가장 낮은 여인이셨다.
하관을 하다 하늘 보며
저승길 가시는데 가시 하나 달아 드리려 물으니
고운 옷 입었으니 그냥 갈라 하신다.
찔레꽃 나지막 피어나던 큰집 뒷산에
그 깊은 빛깔만 가슴에 꽁꽁 여미어 담고
하얀 꽃잎으로 훌훌 가시는
토끼풀꽃
꽃이 잎보다 늦게 나와
쌀눈 같은 꽃망울로 모여 터지며
더 높이 올라와 하늘을 보는 것은
햇살에게 수많은 눈길을 주며
모든 아이들의 꿈이 하늘에 닿게 하는
둥그런 막대 사탕의 과학입니다.
오월의 풀꽃반지
아이들과의 약속입니다.
03-5-28
비 갠 후
뭉게구름이
질끈 또아리를 틀고
하늘은 가벼워진 기분에
맘껏, 햇살을 쏟아 붇는다.
버찌가 새까맣게 익으면서
터질 듯 햇살은 다 담았다지만
울타리 장미보다는 너무 작아
눈에 띄지 않아서 차라리 좋다.
나도 햇살에 익어
신맛을 버리는 달콤한 버찌가 되고 싶다.
혀 밑으로 줄줄 나오는 시큼한 청춘보다는
시커멓게 물들어도
오십 년 햇살에 잘 익어 단내 나는 가슴.
비 갠 후
하늘처럼 가벼워지고 싶다.
03-6-2
어떤 거울
험악한 얼굴로 들어갔는지
입학식이 끝나고 첫 시간 수학시간
아이들은 기가 죽어있다.
험악한 내 얼굴 몰랐는데
어떤 녀석이 "아, 무서버라" 한다.
아, 거울.
깨끗한 거울 하나 여기 있구나.
백로
하얀 백로 한 마리가
모내기 막 끝낸 논바닥,
찰방찰방한 물위를 부드럽게 몇 번 돌더니
모보다 더 키가 큰 다리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먼 하늘 날다가
재수도 좋게 우렁이 눈에 띄어서
맛좋은 저녁거리 잔뜩 눈독이 들어서
긴 주둥이 발끝에 맞춰가며 뒤적거리고 있다.
백로도 먹어야 산다고
고상高尙함 보다 먹어야 산다고
발목 위로 퉁겨 올라오는 흙탕물에
저를 더럽히고 있다, 하얀 깃털에 얼룩 남기며.
03-6-5
목련
이른봄이었다는 것은 핑계였다.
꽃샘추위보다 먼저 꽃봉오리 맺어 터트리는 하얀 목련,
어린 쪽니로 솟아난 하늘
그늘 없이 맑은 꽃이었다.
다소곳이 꽃잎을 하나씩 내어 보일 때마다
마냥 천진하게 웃어 가는 열 아홉 가시나
처음 맞는 사랑, 마술 같은 봄날의 열병은
길어야 이렛길이었다.
꽃길이 너무 깨끗해 잊지 못한다고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가끔 너에게 쓰는 편지가 빗물에 젖는다.
꽃샘이 너무 시려 빨리도 지났을 것이고
봄을 핑계삼아 바람에도 취했을 것이다.
현대의 사랑
잡으면 잡을수록 손잡이에 묻어나는 손때처럼
얼룩으로 남아 가는 흔적이
은은한 옻칠보다
번쩍거리는 니스 칠이 좋다고 발라 가는
일회용 세상이라 미련은 없는 것인가.
시원하게 볼 일 보고 나서
한번씩 쓱-, 닦아갈 때마다 느끼는
호박잎이나 지푸라기 같은
까실까실한 밑씻개의 문화보다
그 보다 더 멀리 가서
단단한 돌 깎아 만든 화살 통 둘러매고
몰려다니며 함께 생존해야 했던
그 오랜 부족의 공동체가 그리워
지금도 백두대간 따라 나누어져 뻗은 갈래 길.
현대는
신기루와 마주 앉은 짝사랑에 미쳐서
점자보다 더 깊은 자판 두드려도
보이지 않아 읽어만 가는 사랑에
눈이 너무 아프다고
부드러운 휴지보다 시원한 비데는
저, 혼자만의 사랑입니다.
(6-16)
자장면
시커먼 자장을 듬뿍 올려놓고
면발이 불어터지지 않게
가만 가만 비벼서 자장면을 먹는다.
시커먼 자장이
오십 년의 내 가슴이랑
칠십 년 내 어머니의 젖가슴이랑
감자랑 양파랑 잘게 썰어 섞어가며
알맞게 익혀 먹어야 맛이 있다지만
먹고 쌀 때마다
시커먼 내 속이 그대로 나와서
잘 익혀 먹어도 지독하게 그대로만 나와서
맛있는 자장면 먹지 못하고
아이들 앞에서는 싸지도 못합니다.
그런 내가 마누라는 걱정입니다만
나도 어머니의 똥을 본 적은 없습니다.
(6-21)
자유
새벽, 잠깐이었나.
얼굴 없는 여자 부둥켜안고
진땀 흘려가며 씩씩대기를 얼마나
산꼭대기에 다 올라가선 느긋했었나
꿈으로 꾸던 일 기분 좋게 치뤄 내는
혼미한 새벽이었다.
절정의 이유
꿈보다 해몽이 궁금해 열어본 컴퓨터
지금껏 별러온 일 마무리한다는 해몽에
능청을 떤다.
바람보다 먼저 비가 내리고
북상중이라며 내리는 태풍주의보는
그래, 나는 바람이었나보다.
넙죽한 프라타나스 잎을
옹골차게 흔들어 가는 바람이었나 보다.
일흔 아홉 편의 넋두리 묶어놓고
바람 맞으며
(6-19)
꽃
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내가 꽃을 아는 것보다
꽃이 나를 아는 것이 많으니
염치가 없다.
산을 오르면
인사보다 먼저 향기를 주어도
안부밖에 줄 것이 없어
무심히 지나쳐 가지만
꽃은 어깨 두드리며
"자주 만나야 오래 만나지"
산이 내미는 손
청진기 같은 악수들
꽃이 알아보는 것은
산에 있다는 것이 이유라면
산에다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내가
잘 알 수 없어서
왜-,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면서
산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지
안다고 할 수 없어서
(7-1)
발바닥
한 뼘이나 되나 보다
누워서 엄마 젖 먹기 시작하면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고
동네 골목길 술래가 되어
세상 얼마나 넓은지 몰라 뛰기만 했던
일곱 살 발바닥은
가끔 밭 두렁 달려가다 고꾸라져
하늘을 한번씩 본 것 말고는
세상 본 일이 없었지만
이때껏 썼어도 아직은 쓸만해서
밤이면 저리게 피곤하다가
아침이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
신발에 하나씩 쑥쑥 집어넣고
내 육신의 균형 알맞게 지탱하는
오십 년, 짱짱한 발바닥이
감사하다며
오늘은 양말을 벗고 깨끗이 닦은 다음
피곤한 저녁 밥상 물려 놓고
누워버린 머리보다 더 높은 벽에 걸어 놓으면
창문으로 떠 있는 밤하늘의 별,
하루가 무사하다며 실눈 뜨고 웃는다.
(7-3)
뿌리
꽃으로 피었으면 너는 다시 뿌리가 되어라.
뿌리보다 더 깊은 믿음으로 줄기에게 사랑을 주는
그래, 너는 가지였다고 힘이 들 때마다
꽃으로 피어나기를 고대하지 않았느냐
맨 처음 빨아올리는
신선한 양분의 공급처로 시작하는
꽃으로 가기 위해 다시 깊은 땅속,
쑥쑥 뻗어가며 찾아가는 목숨들이
맑은 샘물로 깨끗하게 녹여 빨아들이는
꽃의 단단한 뿌리.
뿌리가 되어 맑게 씻어라
(7-5)
백련
하얀 연꽃이 좋다하여 찾아간 절에는
거의 다 베어진 감나무
서 너 개 가지로 뻗은 감 이파리는
연잎보다 더 싱싱하였다.
때깔 좋은 감잎은
장마가 지나다가 잠시 쉬어 가는 틈으로
잠깐씩 탱탱하게 여무는 초록에 도통(道通)한 듯
막 피기 시작하는 연꽃을 내려다보며 있었다.
논에서 걷어낸 평야(平野)의 이삭보다
백련(白蓮)의 잎으로 더 크게 피어나며
논두렁 행렬로 이어지는 문화(文化)는
옴마니반메홈......
하얀 연꽃이 더 무성해지면
감나무쯤 베어지는 것은 예삿일이라고
기왓장에 이름하나 적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등 떠미는 마누라, 그 손가락질에 쥐어주는 보시
아직도 내겐 뻥 과자만 천 원이었다.
(7-9)
꽈리
안에 있는 것 다 버리고
껍데기만 부드럽게 가져야 소리를 낸다고
혀끝으로 열고 닫으며
꽈리를 분다.
꽉 찬 비구름 비워내며
시원하게 소낙비로 터지고 나면
다 비워낸 하늘처럼 너무 맑아
잘 찾아보면
동화 속 같은 전설이 있다며
(7-11)
청춘
어둠에서 바다가 일어나고 있었다.
바람이 바다를 뒤에서 훑어 가고 있었다.
물살이 비상을 몇 번이나 시도하면서
백사장을 타고 상륙하는 작전은
언제나 발끝에서 미수로 끝나고 있었다.
모래밭은 언제 바닷물을 다 마셔버렸는지
입맛만 다시며 매번 입가에 거품만 문다.
어둠의 바다는 어둠보다 바다가 무섭다.
이노마, 이놈아, 이눔아-
몇 구비 파고를 타고 밀려오는 외침.
크기는 다르지만 모양이 점점 증폭되는 닮은꼴로
일렁거리며 거칠게 달려오는 태풍일지라도
서있는 발목까지만 채워야 부지할 수 있는
육신, 우리의 세속적인 열정.
어둠에서 시커멓게 물귀신처럼 달려와
급하게 소멸해 버리는 바다는
그래도 아직 청춘이었다.
(7-20)
방화동 계곡에서
(전북작가회의 여름시인학교)
어둠 벗겨내려고 폭포 같은 장마 끝
끝없이 깎아 내려오는 물줄기는
시원하였다.
별들이 산중에서 제 빛을 건져내
빛보다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면서
소리의 높이는 맑았다.
인간, 그 체구에서 나오는 소리가 참 맑았다.
몇 개
목 힘줄이 꼿꼿이 서서 내는 소리는
시보다 인간이라서 더 좋았다.
사랑을 하다가 들켜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별들이 새벽까지 빛을 던지며 있었고
육신보다는 좀 더 크게 부르고 싶은 노래는
계곡 물살에 섞여 급하게 길을 꺾고 있었다.
갑자기 사랑 하나 그리워 질 때
이 골짜기 찾아와 물소리에 마음 씻으며
내가 사는 세상 같이 씻어보면서
무성한 이끼, 부질없는 생각에
꽤나 그럴 듯 하다는 여유로 취하고 있었다.
(7-28)
갯벌
두 팔로 가만히 보듬어 볼래
바다가 품으로 들어온다.
내 품은 들의 온기가 있지, 살아 숨쉬는 갯물이
골패인 핏줄 타고 들어 왔다 나갔다
수평선 가려지는 거대한 두 팔뚝
달이 목숨을 끊으려 한다.
달은 힘이 있어도 소용없다며
보름달이 반달이 되면 어떻겠냐고
다시 그믐이면 또 어떻겠냐고
팔뚝이 달을 멀리 껴안을수록
바다와 높낮이 같아야 살 수 있는 갯벌.
막으면 죽는다는데 막아야 하다니
죽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변산반도, 코딱지 만한 땅도 숨쉬며
살아가야 한다고
철새 지나다 배 채우며 쉬어 가는
살다가 뱉어낸 시커먼 가래 삭혀 가는
살아 있어서, 그 말랑한 갯지렁이의 터전
지켜가야 한다고
(7-29)
박꽃
어둠이 올 때쯤이면 달보다 먼저 나온다.
화장기 지독해 하얀 박꽃의 얼굴로
발정이 난 수컷들 길목에 서서
차단기 번쩍 들어올리며
생존에 깃발 던지면
이것은 시가 아니다.
행인들 돌부리가 되어
술 취해 비틀거리는 발부리 걸어
제 발로는 어렵다며 밀어 넣는다.
벽마다 유리창 거울로 세워
거울 뒤편에 무엇인가 있을 거라는 예측만으로
빨려 들어오는 불나방 반기기 위해
밤이 오기 전 끈끈하게 거미줄 치는
땡볕에 잠행하는 한산한 거리가
죽음보다 더 깊은 줄 모르고 지나치는 행인들
밤이면 더 하얀 박꽃이 된다.
푸줏간 5촉 붉은 전구로는 너무 축축해
혀끝에 찍어주는 꿀의 단 맛
꽃 분으로 번식시키는 생존의 습성 따라
뿌리고 가는 것은 엉뚱하게도 밥이었다.
밥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을 거라며
꽃이 박이 되는 일도 없을 거라며
(7-31)
줄넘기
사랑하는 일은
위험하지.
벼랑 끝에 서서 눈을 감는다.
떨어질 때까지 열정을 다하다가
순간, 떨어지는 무게를 느끼기도 전에
손 내밀어 착지를 찾는 곡예사처럼
사랑하는 일은 많은 훈련을 해야지
떨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단련을 해야지.
피멍이 가슴에 확실히 남아도
별 게 있겠냐고
줄넘기 열심히 하다보면 다시 튀어 오르는
사랑도 그럴 것이라고
(8-2)
영정
웃었다.
세상이 누군가에게 손짓도 못하고
몸을 던지면서 그 웃음 시작했는지
아니면, 소 떼 몰고 가던 그림자 따라
총총 걸음 내 딛으며 개나리 봇짐 풀지도 못한
한 맺힌 통일의 징검다리 다 건너지도 못한
빈소에 걸린 영정
할 말이 많아도 말할 수 없어
누가 걸었는지
정치보다 더 높이 걸려 있다.
(8-5)
매미
빙빙 도는 고추잠자리의 선형을 보고
들꽃 잎 끝에 앉은 나비를 보며
너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매미들이 왼 종일 모양 나게 울며
목청 터지지 않게 붙어 있는 것도
이파리 하나가 만드는 그늘에서
니가 편안하게 목줄을 다듬어 가듯
끈적끈적한 곳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소리는
깊은 산, 딱딱한 애벌레 껍질을 까고
맑은 기운으로 터져 나오는 매미의 울음이 되어
적당히 오염된 6차선 가로수 등걸에 붙어있는 스피커
매월 보름이면 울렸던 훈련경계경보 사이렌처럼
매미가 대신 경보를 한다고
널 하나 더 만들지 못해
안타까운 과학의 이데올로기 선택도 못하고
어찌 생각이나 해보겠냐고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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