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집중식 공조 장치는 소음하나 없이 부드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도 부드럽고 원활하게, 최상급의 컨디션으로 일들을 보고 있었다. 유리문 하나를 경계로 밖의 거리가 그렇게 매섭고 차다는 사실을 명자는 실감하지 못한다. 은행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얼굴, 푸르게 언 콧잔등에서 수년만에 찾아왔다는 소한(小寒) 추위를 떠올릴 뿐이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로 거리는 꽁꽁 얼어붙은, 하나의 풍경일 뿐이었다. ‘맹추위’라거나 ‘혹한’이라는 말은, 가끔씩 찾아오는 이런 매서운 추위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리 적절하지 못했다. ‘언어가 관념이기 때문’이라는 문재의 말은 이런 때에도 딱 들어맞았다.
‘아무리 추워도 뭐.’ 명자는 건너편 벽에 붙은 벙어리 괘종시계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다 부질없지.’ 세월은 저 혼자 가는 것이다. 혼자 기세등등한 저 북풍이나, 거리 한쪽의 잔설이든지, 조금만 기다리면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세월의 허망함이라고 한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월드컵 축구의 수상한 열기가 채 한 달이 못되어 몽땅 사그라지고 만 사실을 명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짧은 기간에 사람들은 손바닥을 탈탈 털고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시청 앞, 광화문, 대도시 운동장에서 폭풍처럼 출렁거렸던 붉은 티셔츠는 다 어디로 갔는지, 명자는 그런 일 조차 궁금했다. 그 후 가끔, 은행 창구나 거리에서 한두 명 보이기는 했지만 이미 정열도, 뜨거움도, 함성이나 폭풍, 하다못해 유행도 아니었다는 기억, 그 붉은 티셔츠는 그저 덤핑 처리한, 싸구려 재고품일 뿐이었다.
몇 번에 걸쳐 그런 일들이 거짓말처럼 일어나고 사라졌다. 아무런 잘못 없이 장갑차에 깔려 죽은 여중생을 추모하는 수만 개의 촛불이 그랬고,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랬다. 그 때마다의 흥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끝내 몇몇은 있었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그 일들은 이제 사라져 버렸고 사람들은 다시 지루해졌다. 명자는 처음부터 그랬지만, 그런 수상쩍은 열기를 믿지 않았다.
시계는 3시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대기번호표는 131번에서 벌써 십 여분이나 멈추어져 있다. 창구 앞 의자에 여자 한 명이 앉아 여성지에 눈을 바짝 들이댄 채 들여다보고 있었고, 두어 명의 손님이 창구에 붙어서 밀린 공과금을 내거나, 확실치 않은 인출 내역에 대해 묻고 있었다. 누구도 바쁘지 않았기 때문에 묻고 있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여자 행원들도 눈에 뜨이게 한가한 표정이었다. 매달 15일 안팎의 이즈음이 은행으로선 가장 한가한 날짜고 오후는 오전 보다 더 한가하기 마련이었다.
“이제 아셨어요?”
명자의 옆 창구에 앉은 숙현이, 문의하던 삼십대 후반의 아줌마에게 생글거리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긋해져서 정말 한가하게 말하며 웃는 모습이었다. 숙현이나 명자는 창구를 찾아온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항상 웃는 낯이었지만 실은 얼굴근육만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도 오랫동안 그렇게 웃었기 때문에 비순구(鼻脣溝)와 이순구(燎脣溝) 부근의 표정근(表情筋)이 아예 굳어버렸다. 피나는 연습의 결과였다. 얼굴에 머드팩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낯가죽은 항상 묵직했다. 말을 하거나 무엇을 바라보거나 음식을 먹다가도, 심지어 짜증을 내다가도, 누군가의 시선이 그 얼굴에 닿기만 하면, 얼굴피부에 내장된 형상기억장치가 자연스럽게 작동되었다.
“그러니까 이게, 할부 금융회사에서 빠진 거란 말이죠?”
삼십대 후반의 아줌마는 여전히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숙현을 향해 물었다.
“매달 빠지는 것으로 보아 할부 구매를 했든가, 아니면 대출금 정기이자 같은데요?”
숙현이 여전히 생글거렸고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편이나 아니면 다 자란 딸아이 짓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심이 그 얼굴에 잠시 깃들어 있었다.
“그럼 이건 뭐죠?”
통장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여자가 다시 물었다.
“이건 손님이 자동지급기에서 인출하신 내용인데요? 12일에 삼성동지점에서 인출하셨네요. 보자…, 일요일이네요.”
여자는 눈동자를 굴려가며 이것저것 생각하더니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창구에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늦은 공과금을 내던 두 명의 아가씨들도 돌아가고 없었다.
입구에 서서 ‘어서 오십시요!’를 연발하던 경비아저씨도 지금은 멀쑥한 얼굴이 되어 공연히 실내를 더듬더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묵직한 물통을 머리에 이고 있는 냉온정수기 꼭지를 매만지다가, 저축상품에 대한 안내 카탈로그를 들척거리다가, 잡지대의 잡지를 정리하다가, 현금 자동지급기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그가 경비할 대상이라곤 없었다. 벌써 오십 대 중반에 이른 경비의 얼굴은 마르고 까무잡잡한데다가 잔주름이 밭고랑처럼 자글자글하여, 말 그대로 산골 돌밭에나 어울리는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 갸름하게 벌어진 눈은 블랙올리브 열매처럼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그 눈은 항상 겁먹은 애완견처럼 주눅이 들어있었고 그 눈 위에 잡힌 깊은 주름은 한층 그의 얼굴을 애처롭고 가엾어 보이게 하여 약간의 동정심까지 유발시켰다. 얼굴 기관, 예컨대 눈과 코, 입이, 얼굴 중간에 오종종하게 몰려있어 아무리 봐도 힘을 쓸만한 경비의 얼굴은 아니었다. 아마 그의 평생이 그러했을 것이다. 특히 짤막하면서도 쪼빗한 턱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람을 다스릴 복이 없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은행강도라도 들이닥친다면, 이 겁 많게 생긴 경비는 당장에 책상 아래로 고개를 처박고 기어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입구에 서서 드나드는 고객들에게 ‘어서옵쇼!’ ‘안녕히 갑쇼!’ 입심 좋게 외치는 것이었다.
명자는 경비를 따라 멍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전표를 정리하여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컴퓨터로 처리되기는 했지만 수표의 입출금은 따로 적어놓아야 했다. 명자는 전표를 밀어놓고 매우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근무 중 휴대폰 사용이 금지된 것은 벌써 일 년이나 된 일이었다. ‘근무 중 사용을 억제하라’는 합병은행 본점의 근무지침 한 장은 지점 현장에 내려오는 사이, 십계명의 첫 번째 조항 같은 힘을 발휘하여 은행 안을 순식간에 통신두절 지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 침묵의 지대를 오가는 것은 간단한 메시지 몇 마디와 호출 신호뿐이었고 그나마도 화장실에서나 확인하는 정도였다.
예금된 돈을 처리하듯이, 오전에 온 메시지는 모두 모았다가 점심시간에 한꺼번에 보고, 답을 보내거나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하자니 자연 식사를 주문할 때나, 먹을 때나, 돈을 지불할 때나, 다 먹고 은행으로 돌아올 때나 핸드폰에 열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팽팽 돌아가는 또 다른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물론 오후에 오는 메시지는 고래심줄같이 질기고 지루한 오후 근무가 모두 끝난 저녁에 처리할 수밖에 없다.
명자는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면서 등 뒤의 대리와 또 그 뒤의 차장을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았다. 여자 행원으로서 각고의 노력 끝에 대리직에 오른 노처녀는 오전 입금 상황에 대한 출력지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고 늙은 차장은 볼펜 한 쪽을 입에 문 채 무슨 생각엔가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연이어 닥칠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을 궁리가 틀림없다.’
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은행간 합병에서 그가 살아남은 것은, 한국 축구가 이탈리아를 이긴 것처럼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편파적인 판정이었지만 그 판정으로 장래가 유망했던 유과장은 중간에 무대 뒤로 퇴장했다.
늙은 차장은 그 마술 같은 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명주실 같이 가느다란 연고(緣故)의 끈은, 가끔 그렇게 믿어지지 않는 기적적인 일을 일으키곤 했다.
손바닥으로 수화기를 꽉 막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기 때문에,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화면에 여러 가지 기호가 주르륵 뜨고, 지구의(地球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지구의는 올림픽 오륜마크로 바뀌었는데, 원샷 어쩌고 하는 통신회사의 로고와 이름이 그 오륜마크를 순식간에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했다. 위 칸의 여러 가지 기호가 사라지고 기둥이 네 개나 서있는 안테나가 나타나기까지 거의 삼, 사십 초의 시간이 걸렸다.
명자는 미간에 신경을 모으고 한 때 안성기가 광고하던, 지금은 ‘20세기형 골동품’ 취급을 받는, 휴대폰의 모노화면을 노려보았다. 잠깐 동안 벙어리처럼 무심하게 떠있던 화면에 편지봉투 그림이 나타나며 ‘뚜뚜’하고 경고음이 울렸다. 꽉 막은 손바닥 때문에 소리가 밖으로 새나오지는 않았지만 명자에게는 그 소리가 무슨 경보음처럼 와릉와릉 들렸다. 이어 화면에 물음표 두 개가 나란히 떠올랐다. 명자는 잠깐 긴장하며 다시 노처녀와 차장을 돌아보았다. 22살에 은행에 입사하여 13년 만에 대리직에 오른 살아있는 신화, 노처녀 대리는 여전히 출력지에 작고 신경질적인 얼굴을 묻고 있다가 전자계산기를 끌어내어 뭔가를 톡톡 쳐 넣고 있었다. 얄팍하고 매끄러운 안경 너머로 워낙에 작은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조그맣게 보였다. 차장은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비탄과 희망, 두려움과 걱정거리가 교차된, 뭔가 아주 골치 아픈 문제에 골몰한 표정이었다. ‘저간 폭락하는 주식 걱정이다.’ 명자는 그렇게 단정했다.
“어서 오십시오!”
명자가 긴장된 마음으로 메모를 열어보려는 순간, 입구에서 경비 아저씨의 요란한 인사말이 들렸다. 소리가 너무 컸던지 이십대 후반의 여자 손님은 계면쩍은 얼굴로 경비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수그렸다.
번호표가 132번으로 바뀌었다. 명자는 휴대폰을 책상 서랍에 집어넣고 탁자 위의 버튼을 얼른 눌렀다. 한 눈에 그녀가 입금고객임을 척 알아차렸다. 그걸 알아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머뭇거림 없이 곧장 창구로 오는 손님은 대부분 입금고객이었다. 입출금 외에도 명자는 고객들의 용건을 족집게처럼 맞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출, 카드 연체, 공과금, 지로 송금, 입금, 출금, 저 이는 뭔가 따지러 왔군….
내기를 한 적도 있었다.
“저건 입금 손님.”
명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터벅터벅 다가온 여자 손님은 돈다발을 꺼내 창구에 올려놓았다.
“저건 공과금.”
이번엔 잡다한 공과금 청구서를 턱, 내놓았다.
“세상에….”
“이번엔 통장정리, 다시 입금. 저 여잔, 출금이구나.”
입사 일 년 차 남짓의 근선은 그런 그녀를 보고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대단해요. 언니.”
“직업병이야. 일 년이면 그렇게 돼. 저 사람 직업은 뭔지 아니?”
“직업?”
“사장이야. 사장님, 그렇게 불러봐. 매우 좋아할걸? 저쪽은 회사 경리.”
입금 손님을 보며 명자가 재빠르게 버튼을 눌렀지만 그녀가 그렇게 잽싸게 누르지 않았더라도 숙현이나 그 곁의 근선이는 버튼을 누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딩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창구의 번호가 132번으로 찰칵 넘어갔다. 창구를 휘휘 둘러보던 여자 손님이 명자의 번호를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금발 브릿지를 넣은 머릿결에 엷은 화장기가 세련되게 보이는 여자였다. ‘결혼은 했을까?’ 두툼한 파커를 걸치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몸매는 시원스러워 보였다. 명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생긋 웃음이 나왔다. 입금 때마다 그녀는 퍽이나 친절하게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럴 때 얼굴 근육은 정말 편리하게도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어서 오세요.”
여자가 창구 위에 통장을 올려놓더니 백을 뒤적거려 한 묶음의 수표와 현금을 올려놓았다.
“입금인가요?”
현금과 수표 다발을 눈대중으로 헤어보며 명자가 물었다. 여자 손님이 뽑아온 번호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저건 천칠백만 원쯤 된다’고 명자는 생각했다. 수표다발에서 삼백만 원 짜리 파란 수표 한 장을 날쌔게 알아본 것이다.
“네.”
그녀는 간단하게 말하곤 다시 현금 다발을 꺼내놓았다.
“얼마지요? 손님.”
“천칠백만 원인가 될 거예요.”
여자가 미색의 여린 색깔이 들어가 있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명자를 보고 웃었다.
‘족집게라니까….’
명자는 수표는 수표끼리, 현금은 현금으로 분리하여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는 현금 계수기에 수표를 집어넣었다. ‘타라라락’ 소리를 내며 수표가 회전하더니 ‘100’이란 숫자에서 멈추었다. 5초도 안되는, 순식간의 일이었다. 명자는 남은 수표를 끄집어내고 계수가 된 100장의 수표를 다시 계수기에 넣었다. 역시 5초도 안되어 ‘타라라락’ 소리에 이어 숫자 100이 찍혀 나왔다. 100장의 십만 원 권 수표를 따로 쌓아놓고 명자는 남은 수표를 계수기에 집어넣었다.
“이건 20 장이군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게 천이백만 원이구요, 이건 삼백만 원 권 수표.”
명자는 나머지 현금을 꺼내 계수기에 넣었다. 계수기는 더욱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100 장짜리 만 원 권 현금 다발 두 개를 만들어냈다.
“천칠백만 원이요.”
명자는 여자를 보며 웃었다.
“맞지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라 웃었다.
“돈이 많으시네요?”
눈웃음을 치며 명자가 농담처럼 물었다. 여자는 슬쩍 웃더니 흥미 없다는 듯이 명자의 뒷좌석 노처녀 대리를 바라보았다. 노처녀는 안경 너머로, 여자 손님과 명자를 무심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전표더미에 다시 머리를 집어넣었다.
차장과 노처녀는 뻐꾸기시계처럼 주기적으로 얼굴을 내밀고 명자를 살펴보고는 했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우리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메세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숙현이나 근선이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그녀들보다 항상 명자를 조금 더 아슬아슬하게 생각하였다.
명자는 그녀의 통장을 기록기에 집어넣었다. ‘짜르르륵’ 경쾌한 소리가 나며 그녀의 통장에 천칠백만 원이라는 숫자가 찍혀 나왔다. ‘고객의 생신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도 따라 찍혔다.
“다 됐습니다. 생신이시군요.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명자는 몇 가지 말을 한꺼번에 이어서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통장을 받아들더니 확인하는 것도 없이 횡 하니 입구로 걸어갔다.
“안녕히 가십시오!”
경비의 인사소리가 여자의 뒤통수에 대고 터졌다. 대기번호표는 아직 132에서 멈추어 있었다.
명자는 그런 것이 아직도 신기하기만 했다. 손님의 통장에는 숫자가 찍혀있고, 은행의 전산단말기에도 같은 숫자가 찍혀있다. 돈은 그녀에게도 있고 은행에도 있는 것이다. 은행 지점에도 있고 본점에도 있다. 그러면 진짜 돈은? 이건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영원한 금지구역인 대형금고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돈도 적당한 때마다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그래도 여전히 손님의 통장과 은행의 전산단말기에는 그 돈이 남아있다.
명자는 수표에 ‘지급필’이 쓰여진 ‘횡선’을 찍지도 않고 수표를 창구 밑 수납함에 현금과 함께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아직 돈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명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서랍 속에서 다시 ‘뚜뚜’ 하는 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 명자는 대리와 차장을 힐끗 바라보았다. 명자의 업무처리 과정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그들은 다시 본래의 자기 자세로 돌아가 노처녀 대리는 길다란 차트에, 차장은 볼펜을 자근자근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명주실 같은 가는 끈이지만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는, 어떤 기발한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매 시간 마다 경비가 복권을 들고 다니며 손님들에게 구매를 권유케 한 것도 그의 기발한 발상 중 하나였다.
숙현이 손톱을 다듬으며 혼자 말처럼 “그 여자 돈일까? 무슨 돈이 그리 많대니?” 한 마디 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마치 손톱을 향해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 “회사 돈인지도 모르지.” 근선이가 역시 혼자말로 맞장구를 쳤지만 명자는 대수롭지 않게, “그 정도가 무어 많다구?” 하고는 서랍을 열었다.
앞의 소파에서 여성지를 읽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물을 한 잔 마시고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한 때, 꿈을 이루어낸 월드컵 스타들의 연봉과 그들을 사겠다는 수많은 구단의 각축, 축구스타에 얽힌, 행복한 연인들의 로맨틱한 스토리로 뒤덮여있던 여성잡지는 이제 새롭게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한 입지적적인 남자의 일생과 가정사가 도배되어 있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안녕히 가십쇼!"
경비가 다시 큰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은행 안은 텅텅 비어버렸다. 명자가 다시 더듬더듬 서랍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깜박깜박하는 휴대폰의 메세지 버튼을 눌렀다.
‘가겠다. 결심했다.’
간단한 문장과 함께 발신자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018-358-2757’ 숫자를 읽지는 않았지만 명자는 문재가 보낸 메시지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명자는 갑자기 머리카락 끝이 쭈뼛 솟아 올랐다.
‘온다구?’
맨숭맨숭한 신명조체의 활자를 보며 갑자기 명자는 긴장했다. ‘온단 말이지?’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갑자기 은행 안이 적막해지면서 도수 높은 안경이라도 걸친 것처럼 사물들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경비는 무슨 닥종이 인형처럼 작고 뻣뻣해 보였으며 차장과 노처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 두꺼운 장막 너머로 밀려난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 카드계와 대부계 쪽은 원래부터 먼 거리였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심했다 이 말이지?’
명자는 갑자기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전율이 등줄기를 파도처럼 훑으며 지나갔다. 혈관 속에서 적혈구 입자들이 모두 긴장상태로 돌입하였다. 명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장실 가려구?”
숙현이 명자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노처녀 대리가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명자를 바라보았다.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그런 얘기는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명자는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숙현과 근선은 명자를 보며 둘만이 아는 눈빛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명자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긴장 때문인지, 서둘렀기 때문인지 두 번이나 번호를 틀리게 누른 끝에 그에게 연결이 되었다. 전화 벨소리가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문재가 전화를 받았다.
“결심했어?”
명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문재에게 물었다. 흥분상태였지만 명자는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삼켜가며 소곤소곤 말했다. 작은 한숨까지 말끝에 묻어났다.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문재는 무뚝뚝하게 간단히 말했다. 잡음이 두 사람 사이를 잠깐 갈라놓았다가 다시 이어주었다.
“어딘데?”
“신도림.”
“으흠.”
명자는 잠시 신음을 흘렸다.
“다른 준비는?”
“모두 다 완벽해. 잠깐 기다려. 공중전화로 할테니까.”
그가 전화기를 껐다. 명자는 그의 치밀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 년이나 넘게 실업자인데다, 뭐 내세울만한 배경이나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미더웠다. 명자의 처지도 ‘은행원’이라는 것만 빼면 뭐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사실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곡예와 다를 바 없었다. 말이 좋아 ‘은행원’이고 ‘사무직’이지 단순노무직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았다. 돈을 계수기에 넣고 빼는 일이나, 마네킹처럼 웃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급인력이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도 삼 년 정도의 세월동안 탁 탁 잘려나가는 동료들과 선배들을 보면서 가슴만 조이며 지냈다. 가시방석도 그런 가시방석이 없었다.
결정적인 시기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있긴 했지만 문재는 치밀할 뿐만 아니라,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내는 명쾌한 재능이 있었다. 그는 결코 피상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논리의 전개는 명확하고 깔끔한데다가, 간단하기조차 하여 반론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있는 것처럼 제각각 명료한 뜻을 나타냈으며 그의 거창하고 치밀한 계획은, 그의 말속에서 씨줄과 날줄로 짜여져 서로 본질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는 또 다가올 미래를 미리 바라보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예견한 일들은 대개 그의 말대로 결말이 지어졌다. 하다 못해 월드컵 승패나 대통령 선거까지 귀신처럼 척척 알아 맞추곤 했으므로, 명자로서는 그의 특별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재 주변의 친구들이나 옆집 목사까지도, ‘문재는 천재적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기껏해야 재능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를 치켜세웠지만 정작 문재 자신은 ‘단순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여권을 미리 만들어둔 것도 말하자면, 그의 범상치 않은 판단력과 미래를 보는 혜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자가 생각하기에, 그의 그러한 능력은 우습게도 그가 실업자가 된 후에 생긴 것이었다. 컴퓨터 하드웨어를 설치해주고 유지, 보수해주는 일은 처음부터 그의 자질이나 취향과 맞지 않았고, 컴퓨터 공학이라는 미래 지향의 첨단 학문이 고작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나 명자에게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실업 생활의 처음 한 동안을 멍하게 지내긴 했어도, 그는 날마다 몇 개의 신문이나 잡지, 글자가 쓰여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뒤적거리더니 오래지 않아 신통력이 생기고 말았다. 수염까지 덥수룩해서 한 눈에 보기에도 비범해 보이는 데가 있었다. 하긴 수염을 깎고 말쑥해져 있어도, 포도 알처럼 새까만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면 그의 남다른 비범함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도 약점이 있긴 했다. 자신만은 항상 예외였던 것이다. 세상은 그가 짐작하고 분석한 대로 되어갔지만 자기 일만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자고로 특별한 인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점치거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세상을 벌거벗기고 확실히 뒤집을 방법을 찾아낸 마르크스는 거리의 부랑자처럼 참담한 빈곤 속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예수를 하룻밤에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도 있었다. 하다못해 영험한 ‘아차산 점쟁이’는 반 시각 뒤에 죽을 자신의 운명조차 맞추지 못한 사실이 있다.
문재는 그의 말대로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물론, 실업 초기에 재취업을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을 명자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비좁아서 바늘 하나 세울 정도의 빈자리도 없음을, 그는 반 년 만에 깨닫고 말았다. ‘4년제 대학’ 이라든지, 그의 알량한 경력 따위를 최대한 과대 포장하여 내세워 봤지만, 그건 그가 다시 세상에 끼어드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 명자도 동조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주나라 재상 강태공처럼 대단한 사람도 긴긴 세월을 강가에서 헛낚시질로 보내야만 한다는 것. 명자는 강태공의 성명(姓名)이 강상(姜尙)이라는 것과, 주나라 문왕의 스승이며 뒤에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한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문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강태공이라 하면 명자는 그저 할 일없이 낚시질이나 일삼는 한심한 백수들의 총칭인 줄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병서를 집필한 백전백승의 병법가일 뿐만 아니라, 실사구시의 경제적 수완가였다는 말을 듣고, 명자는 강태공을 존경하기에 앞서 그런 사실을 소상히 알고 있는 문재를 먼저 존경하게 되었다.
문재는 자주 강태공을 들먹거리며 은연중 자신을 그에 비견하고 있었지만, 그의 얘기에 강태공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TV사극을 보다말고 갑자기 조선말의 대원군을 장황하게 설명하는가 하면, 한고조 유방을 설명하면서 한 때 유행한 영화 ‘패왕별희’의 애절한 곡조를코맹맹이 소리로 곁들이곤 했다.
그가 드는 예(例)는 모두 알기 쉬운 경우였으며 하나같이 말년에 운세를 뒤집은,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단 한 방에 모두 털어 버릴 날이 반드시 온다.’ 그는 그 때마다 주먹을 부르르 쥐고 흔들었으며 명자는 그럴 때마다 승천의 때를 기다리는 용(龍)이나 최소한 환골탈태의 순간을 기다리는 이무기의 비원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곧 올 것이라거나, 가끔이지만, 온 듯한 기분이 되어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런 날 문재와 명자는 영등포 바닥을 돌며 붕어처럼 뻐끔뻐끔 술을 들이키고 가뭇없이 취하곤 했다.
돈이 문제였지만 그런 것은 처음부터 그나 명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명자는, 틀에 박힌 듯한 이런 인생과 돈벌이가 너무 끔찍하다고 느끼면서도, ‘문재의 위대한 천재성이 그들 미래의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했으며 문재는 문재대로, 주로 자신 때문에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려와 능력을 그런 판에 박힌 일에 소모하고 있는 것을 미안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유흥비로 돈을 지불할 때마다 ‘그물이 커야 돼. 큰 그물에는 큰 고기가 잡히는 법이고 작은 그물엔 잔챙이만 잡히기 마련이다’며 큰소리를 쳤다. 푼돈 같지 않은 돈을 쓰면서도 명자는 그를 믿었다.
사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푼돈을 아끼고 싶은 생각은 애시당초 그녀에게 없었다. 월급의 반이 넘는 액수를 적금이랍시고 모아봤지만 그건 끝까지 목돈이 되지 않았다. ‘20세기형 골동품’ 휴대폰조차 바꾸지 못하고, 돈 한 푼에도 부들부들 떨며 돈을 모은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아버지가 실직을 하고 동생들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그녀의 피 같은 돈을 강탈해갔다. 둑이 무너졌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른다. 몇 개의 적금을 순서대로 깨버리면서 그녀는 수상쩍은 편안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둑을 넘은 물은 그녀의 신용카드를 하나씩 침몰시키고 있었다. 개인 신용불량자 270만 명의 대열에 합류될 시점도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가끔 그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고는 했지만, 더 나빠질 게 없었으므로, 그녀는 문제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좌변기 뚜껑 위에 앉아서 명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라도 혹시 들어올까, 하고 문쪽에 귀를 기울였지만 문 쪽은 조용했다.
“뚜뜨르르, 뚜뜨르르, 뚜뜨르뜨, 뚜뜨.”
프란츠 폰 주페의 희가극 ‘경기병 서곡’을 흉내 낸 씩씩한 전자음이 마침내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뚜껑을 열자 문재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렸다.
“옆에 아무도 없지?”
“없어. 혼자야.”
그의 전화기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요란한 벨소리, 안내방송의 기계음이 혼합되어 매우 복잡한 소음이 들려왔다.
“지금 3시 20분. 4시까지는 갈 수 있어.”
소란한 중에도 그는 주변의 사람을 신경 쓰는 듯,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잊었어? 4시는 곤란해. 4시 20분이라야 해. 그래야 돼.”
명자의 머리도 이런 순간에는 날쌔게 회전했다. 정문이 닫히는 4시 30분까지 10분. 모아놓은 현금과 수표를 이중으로 만든 쇼핑백에 담는 데는 2분 정도 걸린다. 신속하게 이를 마치기 위해 명자는 일부러 현금과 수표를 수납함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수납함은 책상 아래에 있어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었다.
옷가지 등으로 이를 위장하고 화장실까지 가는 데 1분, 혹시나 모를 상황까지 감안하여 2분…. 후문으로 문재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여 쇼핑백을 화장실 입구 재떨이 뒤에 놓는다. 그것으로 명자의 할 일은 끝이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고 문재는 이중의 쇼핑백 중 안의 것을 들어내고 바깥의 것에는 옷가지를 다시 던져 넣는다. 2분이면 역시 충분한 시간이다. 문재와 명자는 몇 번이나 은행을 오가며 이를 연습해 왔다. 옷 가방, 쇼핑백, 스포츠 가방, 때로는 노트북 가방으로 연습을 하기도 했다. 경비? 가엾어 보이는 경비는 단 한 번도 고려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옷가지만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 다시 자리에 들어오면 4시 30분. 정문 셧터가 내려가기 시작하면 명자는 ‘약국에 가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온다. ‘생리통’이라고 하면 모든 게 통과될 것이다. 그로부터 1시간 가량은 마감과 정리 등으로 어수선하고 바쁘다. 골목 어귀 ‘바이더웨이’에 대기하고 있던 문재와 택시를 잡아타고 자리를 뜨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니폼 위에 덧입을 자켓까지 문재는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빠듯하지만 택시 타고 가속을 밟으면 역시 충분한 시간이었다. 틈을 주지 않고 재빠르게 떠야하므로 빠듯한 시간이 득이 될 수도 있었다.
빨라도 저녁 6시는 되어야 사고를 눈치챌 것이다. 경찰 당국에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왕좌왕하는 사이, 문재와 명자는 홍콩으로 날아가면 되었다. 그것으로 세상이 단번에 달라지는 것이다.
‘예금 사고 같은 것은 경찰에 알리기도 힘들어. 신용과 관계된 것이거든.’
문재의 이 날카로운 단정도 항상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곤 했다. 돈은 고객들의 통장과 단말기에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숫자로만 남을 것이다. 진짜 돈은? 어디로 갔는지 이번만큼은 틀림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가겠다’고 한 문재의 성격상, 홍콩 행 비행기 표는 오늘, 적어도 내일 새벽 시간으로 벌써 예약이 되어 있을 것이다.
“4시 20분. 오케이.”
문재가 다짐하듯 되뇌었다.
“정확해야 돼.”
“알아. 염려 마. 얼마나 되지?”
“수표까지 5천. 현금만 3천 정도….”
돈 얘기를 할 때, 명자는 한층 주의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죽였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싶어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얼마?”
속삭이듯이 문재가 다시 물었다.
“5천, 현금은 3천!”
낮지만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명자가 외쳤다. 그러자 목소리가 잠긴 것처럼 낮은 금속성으로 나왔다.
“다른 준비는?”
“완벽해. 모든 게 완전해. 오늘 저녁 7시 30분, 인천공항 발 홍콩 행 비행기 예약했어. 공항에 도착해서 발권만 하면 문제없어.”
“좋아.”
물론 잘못될 확률이 없을 거라고 명자는 믿었다. 목적지가 홍콩이라는 것부터가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처음에 그녀가 ‘웬 홍콩?’ 하고 의문을 제기했을 때, 그는 당연한 의문이라는 투로 정말 넉넉한 표정을 지으며 명자에게 설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야, 문제. 네 말대로 미국이나 뭐, 캐나다 같은 데가 안전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야. 왜냐하면 그런 나라는 우선 경찰력이 빈틈이 없는데다가, 우리랑 인종까지 틀려서 드러나기 십상이지.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범죄인 인도 협정 같은 것까지 체결되어 있어서 꼼짝하기 어려운 거라구. 그리 가는 것이야말로 호랑이 아가리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지. 이해했어?”
그는 매우 간단하게 설명했다.
“홍콩은 노비자 입국이니까,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우리랑 비슷한 중국 놈들이 많거든. 중국말 몇 마디만 외우면 돼. ‘니 하오 마?’ ‘하오’ ‘쎄쎄’ 뭐, 이런 거 말야. 그리고 옆집 목사에게 알아본 바로는 거기서 제 삼국의 비자를 만드는 거야 돈만 있으면 손 안대고 코푸는 격으로 쉽다는 거야. 감쪽같이 만든대. 정 안되면 중국으로 들어가는 수도 있구.”
명자는 그를 신뢰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문재는 그런 일을 처리하는 데 역시 빈틈이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 ‘때’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것도 그의 뜻이었다. ‘준비하는 자만이 때를 얻을 수 있다’고 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도 그의 지론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녀를 감복시킨 말은 ‘운명이란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필연은 준비하는 자에게 오고 우연은 필연적 상황에서 온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 말의 뜻을 아직도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았으므로 말뜻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만, 다 아는 단어들도 저렇게 섞어놓으면 도무지 알기 어려운 말이 되는구나, 하는 깨우침은 있었다.
출국 때까지 명자는 휴대폰을 꺼놓지 말아야한다고 다짐했다. 혼선을 유발하기 위한 일종의 연막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대를 빠져나갈 때까지 명자는 횡설수설할 속셈이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아파서 병원으로 왔다던가, 납치를 당했다던가, 아니면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져서 급히 왔다던가, 그런 상황까지 치밀하게 설정해 놓았다. 그런 치밀함은 문재의 파트너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자질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돈이 좀 적군.”
문재가 속삭였다.
“오늘이 그런 날이야. 하지만 그것도 문제없어. 수표로 발권하고, 면세점에서 수표로 물건을 사면 돼. 모두 사는 거야. 신나게 말야…. 이런!”
“왜?”
“누가 왔어. 4시 20분 잊지마!”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고 명자는 재빨리 전화 수화기를 닫았다. 변기의 물을 내리는 치밀함까지 보인 후, 그녀는 문을 나왔다. 은행 고객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화장실로 들어왔고 명자는 그녀와 엇비켜서 화장실을 나왔다. 나오기 전 곁눈질로 그 아가씨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상한 낌새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연이어 화장실 안을 재빨리 둘러보았지만 역시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행 안은 여전히 한가했다. 번호는 140을, 시계는 3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비는 입구 안내책상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고 고객이라 해봐야 3명이었다. 차장은 전화기를 붙들고 새로 산 자동차의 할부금 얘기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노처녀는 서류더미를 뒤적거리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마치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봐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숙현과 근선은 자신들에게 달라붙은 고객들에게 예의 그 사근사근하고 친밀감 있는 가면을 쓴 채, 친절하게 일을 처리해 주고 있었다.
은행 안은 바다 밑처럼 이상스런 침묵으로 눅지근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달 동안에 가장 한가한 하루가 다 가고 있었다. 내일이나 아니면 모레나 오늘과 다름없는 하루가 또 닥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시간은 지루하게 아니면 정신없이 쌩쌩 지나가고 말 것이다. 세월은 쌓여가고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늙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구 저쪽 편, 일 년에 몇 십만 명이 굶어 죽는 가난한 나라에 백만 불짜리 폭탄을 하루에 일조 원씩 소나기처럼 쓸어 붓는 세상이 되었든, 그런 무시무시한 소비가 새로운 생산의 기반이 되는 우스꽝스런 체제의 비밀이야 어찌되었든, 몸에 폭탄을 칭칭 감고 건물로 뛰어드는 젊은이들의 눈부신 죽음이 있든 말든, 세상은 축구공처럼 퉁퉁 튀어 달아나며 미쳐가는 것이다. 미쳐가든 말든, 명자의 인생엔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희망 없는 인생이다. 명자뿐만이 아니라,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혈혈단신 도시로 올라와서 펄럭거리고 있는 문재의 귀환할 곳 없는 인생이나, 13년이나 남의 돈에 코를 박고 살아왔지만 막상 자신의 돈은 한 번도 계수기에 넣어보지 못한 노처녀의 빛나는 대리 자리나 다 한가지였다.
멀쩡해 보이는 숙현이도 전적으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차장에게 있어 그녀는 ‘파괴적 분열환자’였다. 거의 한달 간격으로 열렸던 동료들의 송별회식 자리에서 그녀가 갑자기 담배를 꼬나물고, 차장을 향해 소주잔을 집어던진 후 생긴, 은밀한 별명이었다.
고약한 술버릇은 근선에게도 있었다. 멀쩡하게 술을 마시다가 어느 한 순간 그녀는 갑작스레 울음보를 터트리곤 했다. 이유도 없었다. 부모라도 죽은 것처럼 그저 실컷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또 돌연히 울음을 그치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언제 울었나 싶게, 긴 머리를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어가며 그녀는 ‘싸이’의 ‘완전히 새됐어’ 노래를 불러 제끼곤 했다. 물론 누구도 그 노래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대애한민국!’ ‘오오, 필승 코리아!’를 발악하듯 외쳐대던 때처럼 모두들 신들린 듯이 박수장단을 맞추곤 했다.
‘너나 당신이나 모두들!’
명자는 숙현과 노처녀와 차장과 경비와 대부계, 카드계의 직원들, 요컨대 은행 안의 모든 사람들을 둘러보며, 지점장실과 영원한 통제구역, 대형금고까지 노려보며, 그렇게 속으로 외쳤다. 왜 그런지 야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건, ‘나는 당신들과 근본적으로 틀린 인생을 살고 싶다’는 기대와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내게는 안되지. 그런 인생이라니!’
의기양양하게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4시 5분. 명자는 긴장감으로 인해 졸아드는 심장과 빨라지는 맥박을 즐기고 있었다. 무릎으로 수납함을 툭툭 차보면서 몇 시간 후에 비행기를 타고 있을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아, 그 눈부신 탈출이라니. 몇 사람이라도 그 안에 입금 고객이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인생에 있어 화려한 역전은 이렇게 하여 오는 것이다!’
명자는 내심 자신만만하게 되뇌었다. 노처녀 대리나 늙은 차장의 인생과는 아주 다른, 찬란한 새로운 인생이 자신 앞에 있음을 그녀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남자 두 명과 세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4시 10분. 워낙에 손님이 없어 복권을 팔 이유도 없었던 경비가, ‘어서옵쇼!’ 소리를 지를 때만다 명자는 깜짝깜짝 놀라며 진저리를 쳤다. 그건 약간의 흥분 상태였다. 짜릿한 긴장감이 신경섬유를 타고 매초 120 미터의 속도로 치솟아, 화끈화끈 뇌하수체를 자극했다. 경비가 소리칠 때마다 들어온 사람은 문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희열감이 증폭되었다. 시간은 아직도 10분이 남았고 그녀는 아무 것도 의심치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탈출하는 것이다. 로켓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대기번호 145. 순식간에 숫자가 올라갔다. 명자는 재빨리 버튼을 눌러 144번을 배정 받았다. 삼십대 초반의 남자였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인출 손님이었다.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70만원을 인출하려는 청구서를 보며 명자는 하마터면, ‘손님 저 쪽의 자동지급기를 이용하시죠.’ 그럴 뻔했다. 70만 원이 자기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명자는 속이 상했다. 번호 버튼을 0.3초만 빠르게 눌렀더라면 근선에게로 간 입금손님을 맞았을 것이다.
“이제 끝이야. ‘땡’ 이라구.”
숙현이 145번째 손님을 처리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오랜 경험과 습관으로 그쯤은 예상할 만했다. 이제 은행 안에 고객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모르지.”
근선이 그럴 리가 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 말속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잔뜩 묻어있었다.
“나도 끝이야!”
짜릿짜릿한 긴장을 느끼며 명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해방이라구!”
경비는 문 밖으로 나가 혹시 더 오려는 고객이 있을까 고개를 빼고 바라보고 있었다.
4시 15분. 시간이 20분에 다가갈수록 명자의 가슴은 무슨 고농축 폭발물처럼 응축되어 갔다. 도화선이 따로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인가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단 번에 ‘펑’ 하고 터지고 말 것만 같았다. 출발선에서 등을 잔뜩 구부리고 앞을 노려보는 단거리 선수처럼 명자는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출발 신호는 총소리처럼 꽝! 하고 터질 것이다. 명자는 고개를 숙여 수납함을 챙겼다.
“벌써 정리하려구?”
숙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명자는 갑자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시간 됐으니까…. 시간이 됐거든.”
16분. 일 분 일 분이 참을 수 없이 더디게 간다고 그녀는 느꼈다. 은행 안은 정지된 화면처럼 조용하고 느릿느릿했다. 명자의 귀에는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째깍째깍 들려왔다. 그 사이로 근선이가 케헴, 된 기침을 했다. 17분. 명자는 쇼핑백을 수납함 옆에 놓고 수표와 현금 다발을 천천히 옮겼다. 책상 아래의 빈 공간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볼 수는 없을테지만 등에선 식은땀이 줄기를 타고 흘렀다. 슬쩍 뒤를 바라보니 노처녀는 일찌감치 서류를 정리할 심산이었는지, 한 쪽에 쌓아놓은 서류를 재빠르게 넘겨대며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었다. 19분. 현금과 수표 뭉치가 쇼핑백으로 모두 옮겨졌다. 예정보다 3 분쯤 빠른 것이다. 발로 툭 쇼핑백을 차서 책상 밑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명자는 건너편에 붙어있는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눈에서 왠지 모르게 핏기가 솟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는 소리가 자기의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명자는 손목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20분!’
순간 명자는 시계에서 20분을 알리는, 어떤 크고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고 느꼈다. 심장이 탁 멈추어버린 것처럼 명자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서옵쇼!”
경비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명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아버렸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쇼핑백을 거머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선그라스를 낀 사내 한 명이 정문입구로 들어와서 거침없이 대기표를 뽑아들었다. 146번. 빨간색 숫자가 찰카닥 바뀌었다. 명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채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숙현이 버튼을 눌렀는지,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숙현의 자리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이럴 줄 알았지.”
숙현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행의 정문 셧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신형이어선지 소음 하나 없이 셔터는 매끄럽게 내려왔다. 경비는 아무런 사고 없이 하루를 마치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표정으로 내려오는 셔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하루가 그에게는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막 창구에서 몸을 돌린 선그라스의 남자가 내려오는 셔터 앞에서 경비를 바라보며 망연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경비는 그를 향해 후문을 가리키며,
“저 쪽 문을 이용하시죠.”
하며 친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구십 도로 방향을 틀어 후문을 통해 사라졌다.
숙현의 창구 위에 있는, 방금 나간 사내가 남긴 146번째의 대기표를 바라보며 명자는 수표더미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수표를 기계처럼 매끄럽게 넘겨가며 자기은행 발행과 타 은행 발행 수표를 날렵하게 분류하여 ‘지급필’과 은행이름이 적힌 검은 도장을 수표에 사정없이 쾅쾅 찍어대기 시작했다. 노처녀와 차장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들의 일로 돌아갔다.
“진작에 좀 찍어 놓지.”
숙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 언니, 저 게 특기잖아.”
근선이 소곤거렸다.
“쟤, 좀 심각해. 중증 파라노이아(paranoia)라니까.”
“파라노이아?”
“망상 말야. 동해안 해수욕장 말구. 과대망상, 피해망상, 그런 거. 망상에 빠진 거야.”
숙현이 근선에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근선은 그 말의 뜻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도 차장이 자신을 ‘파괴적 분열환자’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남자 친구, 오늘도 안 왔어?”
정색을 하고 숙현이 명자에게 물었다. 명자는 그녀를 힐끗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코 실망한 빛은 아니었다. 실망은 안 했지만 어쩐지 눈가에 핏기가 몰렸다.
‘실망해서 안 된다.’
명자는 다시 아래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너희가 나를 비웃더라도, 나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명자는 그녀들을 돌아보며 잔잔하게 웃어주었다. 명자는, 금액이 너무 적었거나 아니면 비행기 표에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항상 발생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다른 문제가 발생했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내일이나 아니면 모레쯤 실행해도 될 일이었다. 하루나 이틀쯤, 적어도 며칠 정도 유예된 자신의 찬란한 미래가 그래서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핸드백에는 언제나 여권이 있고 매일매일 자신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돈을 수천만 원씩 만지고 있다.
그녀는 그가 있는 영등포로 얼른 달려가 봐야겠다고 조바심을 치며 전표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들은 오늘 또 영등포 바닥을 돌며 붕어처럼 뻐끔뻐끔 술을 들이키고 가뭇없이 취할 것이다. * <실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