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3 나주학회 4월 현장답사
나주동학농민운동 전적지 답사 전
나주동학 농민운동 관련 문헌 기록 사전 연찬
나주학회
나주동학농민운동 전적지 답사 전
나주동학 농민운동 관련 문헌 기록 사전 연찬
글/나천수
머리말
지난 역사에서 삼정(三政, 田政·軍政·還政)의 문란으로 일부 탐관오리가 저지른 횡포에 저항하는 농민의 집단행동을 정부는 난(亂)으로 기록하고 있다.
1811년 홍경래 난, 1862년 임술민란, 1894년 동학란이 바로 그것이다.
지방수령의 과도한 농민수탈에 대한 이른바 ‘집단데모’의 형식으로 시위를 하는데, 이를 농민 반란(反亂, 叛亂)이니, 농민혁명이니 하는 단어로 분식(粉飾)하면 틀린 말이다.
단순히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의 ‘집단 데모’이니 나라를 전복할 뜻도 없고, 왕을 갈아치울 뜻도 없고, 더더욱 농민이 정권을 잡을 뜻도 없는데 반란이니, 혁명이니 하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과도한 표현 같다.
다만 1894년 동학농민 ‘집단 데모’는 여타 농민봉기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동학(東學)이란 민족종교의 철학인 제세구민(濟世救民)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제세구민(濟世救民)은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임금이 해야 할 덕목(德目)이다. 임금이 하지 않으니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직접 수행하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지방 수령의 농민수탈의 원인(遠因)은 매관매직(賣官賣職)이라고 본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사서 지방 수령이 된 자는 그 본전을 농민 수탈로 충당하려했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자는 누구인가? 모두 왕실의 인물들이다. 아마 임금도 뒷돈 받고 벼슬을 팔았을 것이다.
임금이 폐정개혁을 못한 배경에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의 주범이 사실상 왕실이란 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방수령의 농민수탈을 알고 있지만 농민들이 폐정개혁을 해달라는 ‘집단데모’를 왕실이 받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농민 즉 백성들이 임금도 하지 못한 폐정개혁을 스스로 해보는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비록 한시적이지만 백성 스스로 백성이 주인 되어 패정개혁을 해보면서 민주(民主) 경험을 해본 것이다. 다만 잠시이지만 왕주(王主) 치하에서 민주(民主)의 경험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빠르게 정착 시키는 단초가 되었다고 본다. 더더욱 동학 농민운동의 특이점은 1894년 8월 농민 2차 봉기부터 반일운동(反日運動)을 함께 전개했다는 점이다. 우리역사에 기록이 없지만 1894년 6월경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 한 것에 대한 농민군이 이에 저항의 몸짓을 보인점이다. 1895년 8월20일 명성황후 시해 1년 전의 일이다.
농민 집단 데모가 승전하여 53개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어찌 죽창 든 농민의 ‘집단 데모’가 총, 칼, 활, 대포를 가진 정부군을 이길 수 있었겠는가? 참여 농민군의 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정부군이 손을 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다」 할 정도로 농민군 숫자가 많았다. 이 말은 그만큼 수탈당한 농민이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했던 백성이 많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반일운동(反日運動)하는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은 농민군을 다만 ‘집단데모’로 보지 않고 적군(敵軍)으로 인식하고 최신무기인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일본제 무라타 소총,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를 동원하여 진압이란 이름하에 학살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가 진압군 측에서 보면 전투라고 하지만 동학군 측에서 보면 일방적 학살되는 장소였다. 기록이 정확치 않겠지만 농민군 1만 명 참전에 거의 9,500명을 학살했다고 하니, 기관총의 위력을 조선백성이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그리고 1894년 12월 마지막으로 진압된 곳이 장흥 석대들 전투이다. 여기서도 관군과 일본군이 신무기로 일방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여 실명 확인전사자 357명, 무명전사자 1,165명이라고 한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의 ‘집단데모’ 막은 내렸다.
동학 우두머리 전봉준은 1894년 1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어 나주 감옥에 갇혔다가 서울로 압송하여 재판을 받고 1895년 3월30일 사형을 당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진압되었으면 일본군은 조선에서 물러가야 하는데, 그대로 남아 조선의 정부를 장악해 버리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의 여세를 몰아,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칠조약, 1907년 군대 해산으로 마침내 1910년 한일병탄(韓日竝呑)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관(史觀)을 바탕으로 나주 동학 농민군 접전을 살펴보자.
2. 나주지역 동학 농민군 관련 옛 기록 현황
동학농민군 관련 옛 기록으로 관찬(官撰)과 사찬(私撰)의 기록이 매우 많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관측의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을 서술하였지만 천도교 교인이었던 김낙철과 김낙봉 형제는 동학농민군으로서 자신이 관군과 일본군 그리고 관아로부터 당했던 일을 사실 그대로 서술하였다.
관찬의 기록으로는 ①갑오군공록, ②전봉준 공초록, ③전라도 각 읍에서 잡은 동학도 수효와 빼앗은 물건을 기록하여 만든 책자〔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이 있으며,
사찬의 기록으로는 ①이병수의 겸산유고의 「금성정의록」, ②나동륜의 하촌유고의 「금성산 의거일기」, ③정석진의 난파유고의 「갑오토평일기」, ④박기현의 일사, ⑤황현의 오하기문, ⑥기우만의 나주토평비, ⑦김훈의 동해집에 실린 동학관련 시 24수, ⑧변만기의 봉남일기, ⑨양상형의 백하유고의 「금성평적비문〔錦城平賊碑文〕」 ⑩부안 김낙철의 김낙철역사 ⑪부안 김낙봉의 김낙봉이력 ⑫일본군 쿠스노 비요카치의 진중일지 등이 있다.
그러나 모두 나주와 관련되는 기록이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나주목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살피려면 먼저 「금정정의록」의 기록을 살피고, 이어서 다른 사찬의 문집을 보면 부족 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
가. 관찬(官撰) 기록
1)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
189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전국 중앙 및 지방에서 포상 추천된 명단 총406명을 열거한 목록이다.
(1) 갑오군공록 인원 : 총406명
○경군 153명 ○호남 92명 ○충청 93명 ○경상 34명 ○황해 19명
○강원 7명 ○경기 8명
※특기할 점은 경군 중 일본어 통역관 5명〔부산3, 동래1, 초량1〕이
포상 추천된 점으로 보아 아마 일본군이 진압하는 전투에 동원된 듯함.
(2) 전투지명 : 총 81개 지역
○전남(14) 지역) : 羅州 玉果 順天 同福 靈巖 長興 潭陽 綾州 求禮 咸平
寶城 務安 海南 靈光
○전북(12) 지역 : 扶安 淳昌 高敞 茂長 泰仁 古阜 泰仁 院坪 南原 長水
古群山 松山
○충남(23개 지역) : 天安 洪州 韓山(韓城) 禮山 大芚 瑞山 論山 公山
舒川 木川 鴻山 藍浦 海瑞 泰安 庇仁 牛金 公州 孝浦 納橋
公州 恩津 利仁 錦江南北
○충북(7개 지역) : 淸州 沃川 堤川 報恩 永同 文義 鵲城
○경남(7개 지역) : 河東 晉州 昆陽 蔚山 居昌 錦山 咸陽
○경북(3개 지역) : 醴泉 聞慶 義城
○강원도(4개 지역) ; 原州 平昌 江陵 伊川
○황해도(8개 지역) : 長淵 海州 信川 鳳山 九月山 谷山 遂安 00
○경기도(3개 지역) : 仁川 砥平 竹山
(3) 군공록을 통한 동학 농민군 인원수 추정
1개 지역 당 인원수 추산 3천명일 경우 ; 전국 24만3천명이 동학 운동에 참여
→군공록으로 기록할 정도의 전투지역이 전국 81개소이다.
→그러나 나주만 보아도 서성문 전투, 남산촌 전투, 고막포 전투, 남평 전투 등 4개소의 전투지가 있지만 나주라는 행정명칭 하나로 묶었으니 군공록에 언급된 지역도 이와 같이 2∼4개소의 적은 전투지가 있을 것을 감안하면 전국적으로 162∼324개소의 지역단위 전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갑오군공록중 호남출신자
NO | 1894년 당시 벼슬 출신지역 | 성명 | 공훈 결과 처분 공록 내역 | |
공훈내용 | 陞級 /補職 | |||
1 | 호남 초토사 | 민종렬(閔種烈) | 웅대한 뜻을 품는 작전계획으로 마침내 무원고립의 성을 지킴〔矢志運籌竟守孤城〕 | 종2품 |
2 | 전라 감사 | 이도재(李道宰) | 호남 한 도가 감사에게 힘입어 다시 되살아남〔湖南一省賴以復甦〕 | 종2품 |
3 | 전 나주영장 | 이원우(李源祐) | 나주목사와 협심하여 시종일관 성을 지킴〔協心州牧終始守城〕 | 3품 |
4 | 호남 소모관 전 주사 | 백낙중(白樂中) | 운봉을 굳게 지키면서 임기응변으로 비적을 격파함〔固守雲峰應機破賊〕 | 9품 |
5 | 전 운봉현감 | 이의경(李義絅) | 고립된 군사로 성을 지키며 승부를 결정하는 계획을 셈함〔孤軍守城劃筭決勝〕 | 6품 |
6 | 전 전라좌수사 | 김철규金徹圭) | 세력이 강한 비적을 막아 성과 관아를 보호함〔捍遏强寇保護城垣〕 | 3품 |
7 | 옥과 의려 전 현감 | 유정효(劉正孝) | 의병 모집을 설계하고 비적 무리를 많이 체포함〔募旅設計多捕匪類〕 | 6품 |
8 | 호남 소모관 전 현감 | 임두학(林斗鶴) | 창의 모병한 의병으로 우두머리 괴수를 많이 잡음〔倡募義旅多獲巨魁〕 | 3품 |
9 | 호남 소모관 진사 | 이장규(李章珪) | 창의하고 모병하여 비적무리를 잡아 바침〔倡義募兵捉納匪魁〕 | |
10 | 부안 유학 | 이장하(李璋夏) | 창의하고 모병하여 비적 무리를 죽이고 체포함〔倡義募兵勦捕群匪〕 | |
11 | 부안 진사 | 이병로(李秉老) | 창의하여 비적을 죽이고 많은 돈으로 군량을 넉넉히 함〔倡義勦匪巨款贍餉〕 | |
12 | 남원 참봉 | 황 영(黃 瑛) | 창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비적무리를 죽이고 체포함〔倡義募軍勦捕匪徒〕 | |
13 | 순천 의려 | 윤성섭(尹成涉) | 창의하여 비적을 베는데 관여하고 순천부 성을 회복케 함〔倡義斬關克復府城〕 | |
14 | 순천 의려 | 이종갑(李宗甲) | 창의하여 비적을 베는데 관여하고 순천부 성을 회복케 함〔倡義斬關克復府城〕 | |
15 | 순천 의려 | 천사성(千士成) | 창의하여 비적을 베는데 관여하고 순천부 성을 회복케 함〔倡義斬關克復府城〕 | |
16 | 순천 의려 | 김성록(金聖祿) | 창의하여 비적을 베는데 관여하고 순천부 성을 회복케 함〔倡義斬關克復府城〕 | |
17 | 순천 의려 | 이영주(李榮柱) | 창의하여 비적을 베는데 관여하고 순천부 성을 회복케 함〔倡義斬關克復府城〕 | |
18 | 순천 의려 | 성용희(成庸熙) | 창의하여 비적을 베는데 관여하고 순천부 성을 회복케 함〔倡義斬關克復府城〕 | |
19 | 나주호장 | 정태완(鄭台完) | 8개월 동안 싸워서 지키며 여러 번 특별한 공을 세움〔八朔戰守屢立奇功〕 | 해남 군수 |
20 | 전주 퇴교 | 한신현(韓信賢) | 몰래 민간장정을 거느리고 전봉준을 생포함 〔潛率民丁生擒全奉準〕 | 김천 (金川)군수 |
21 | 순창 유학 | 김영철金永轍) | 몰래 민간장정을 거느리고 전봉준을 생포함〔潛率民丁生擒全奉準〕 | |
22 | 순창 군민 | 정창욱(丁昌昱) | 몰래 민간장정을 거느리고 전봉준을 생포함〔潛率民丁生擒全奉準〕 | |
23 | 동복 전 오위장 | 오윤술(吳潤述) | 창의하여 정정을 모집하고 온 경계를 지키고 보호함〔倡義募丁保禦全境〕 | 3품 |
24 | 순천 영장 | 이풍희(李豊熙) | 한척의 배로 구원병을 청하여 수영(水營)을 회복함〔單舸乞援克復水營〕 | 3품 |
25 | 영암군수 | 남기원(南起元) | 비적 방어에 뜻을 가다듬고 온 고을이 성을 농성하여 굳게 지킴〔勵志捍寇嬰城全邑〕 | 4품 |
26 | 호남 소모진 군관 | 이봉규(李鳳奎) | 모의에 참여하고 의병을 불러 모아 비적을 죽이고 체포하는데 공이 있음〔參謀召募勦捕有功〕 | |
27 | 담양 의병통령 | 구상순(具相淳) | 의병을 모으고 힘을 합쳐 비적무리를 뒤쫓아 체포함〔募義合力逐捕匪類〕 | |
28 | 고창 전 현감 | 은덕중(殷德中) | 비적 괴수 손여옥(孫汝玉) 등 3명을 체포함〔捉匪魁孫汝玉等三名〕 | 6품 |
29 | 고창 유학 | 서동식(徐東植) | 비적 무리 홍낙관(洪洛寬)등을 염탐하여 체포함〔詗捉匪魁洪洛寬等〕 | |
30 | 능주 유학 | 양주묵(梁周默) | 창의 규약을 세워 비적 3백명을 체포함 〔倡義立規捕匪三百〕 | |
31 | 능주 유학 | 윤자경(尹滋慶) | 창의 규약을 세워 비적 3백명을 체포함 〔倡義立規捕匪三百〕 | |
32 | 구례 유학 | 이 기(李 沂) | 의병을 모아 성을 지키고 비적무리를 염탐하고 체포함〔募旅守城詗捉匪魁〕 | |
33 | 무장 유학 | 박선채(朴旋采) | 백성들의 규합 창의하여 비적 1백명을 체포함 〔倡義糾衆捕匪百名〕 | |
34 | 고창 유학 | 이봉우(李鳳宇) | 민병을 통솔하여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統率民兵捉孫化中〕 | 증산 (甑山)현령 |
35 | 고창 유학 | 강수중(姜守重) | 의를 떨쳐 의병을 모으고 비적괴수 3명을 체포함〔奮義募旅捉魁三名〕 | |
36 | 태인 유학 | 송치홍(宋致弘) | 충을 떨쳐 계략을 내어 비적 김제 괴수〔金魁〕 찾아내어 체포함 〔奮忠出計搜捕金魁〕 | |
37 | 고창 퇴직관리 | 윤행권(尹行權) | 의병대에 달려 나가 거물급 괴수를 체포함〔赴從義旅捉得巨魁〕 | |
38 | 나주 좌수 | 박상수(朴祥壽) | 한차례 출전하여 공로가 많이 있음 〔一次出戰多有效勞〕 | |
39 | 나주 별장 | 전학권(錢鶴權) | 다섯 차례 출전하여 공로가 많이 있음 〔五次出戰多有效勞〕 | |
40 | 영암 군관 | 손창식(孫昌植) | 비적과 싸워 수성하는데 공로가 시종일관함〔守城戰匪始終效勞〕 | |
41 | 나주 이속 | 이돈기(李敦祺) | 전후 전투에서 성을 지키는데 공로가 많음〔前後戰守多有效勞〕 | |
42 | 함평 수성장 | 이재순(李載淳) | 4개월 동안 수성하는데 경계를 돌며 조용하고 잠잠해지도록 단속함 〔四朔守城環境戢淸〕 | |
43 | 나주 퇴직관리 | 김창균(金蒼均) | 수성전 할 즈음에 임무를 행하는 공로가 많음〔戰守之際多有勤勞〕 | |
44 | 전라좌수영 초관 | 곽경환(郭景煥) | 일본진중에서 주선하는데 자못 공로가 있음〔周旋日陣頗有功勞〕 | |
45 | 능주 전 만호 | 조한묵(曺憲默) | 창의 규약을 세우고 비적 3백 명을 체포함〔倡義立規捉匪三百〕 | |
46 | 나주 이방 | 손상문(孫商文) | 전후 수성전에서 큰 공로가 많이 있음 〔前後戰守多有效勞〕 | |
47 | 고부 군민 | 조인상(趙仁尙)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48 | 순창 군민 | 이경우(李京佑)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49 | 순창 군민 | 오의선(吳義善)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50 | 순창 군민 | 신기오(申基五)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51 | 순창 군민 | 홍명근(洪命根)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 |
52 | 순창 군민 | 배동환(裵東煥)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53 | 순창 군민 | 노성칠(盧性七)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54 | 순창 군민 | 황일권(黃一權)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55 | 순창 군민 | 박성대(朴成大)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56 | 순창 군민 | 임화경(林化京) |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앞장서 손화중(孫化中)을 체포함 〔挺身冒險捉孫化中〕 | |
57 | 무안 유학 | 오한수(吳漢洙) | 우두머리 괴수 배상옥(裵尙玉)등을 체포함〔捉得巨魁裵尙玉等〕 | |
58 | 태인 전 감역 | 김종하(金鍾廈) | 힘을 떨쳐 일어나 우두머리 괴수를 먼저 잡아 바침〔奮力當先捉納巨魁〕 | |
59 | 보성 유학 | 안종목(安宗穆) | 힘을 떨쳐 간사한 것을 물리치고 우두머리 괴수를 잡아 바침〔奮力斥邪捉納巨魁〕 | |
60 | 나주 유학 | 김경환(金景煥) | 의곡(義穀)을 내어 민중을 이끌고 비적을 방어하는데 공이 있음〔出義領衆禦寇有功〕 | |
61 | 나주 유학 | 염유진(廉有鎭) | 민중을 이끌고 나주 서쪽에 출전하여 공이 있음〔領衆州西出戰有勞〕 | |
62 | 나주 유학 | 홍우현(洪佑鉉) | 의곡(義穀)을 내어 민중을 이끌고 고을 북쪽에서 비적을 방어함〔出義領衆禦寇州北〕 | |
63 | 나주 유학 | 유기연(柳紀淵) | 백성 5백 명을 모아 비적 수십 명을 체포함〔募民五百捉魁數十〕 | |
64 | 순천 군교 | 김경운(金景雲) | 순천과 보성에서 자못 드러난 공이 있음 〔順天寶城頗有著功〕 | |
65 | 운봉 유학 | 박양준(朴良俊) | 협력하여 성을 방어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성을 이루었다. 〔協力防堵衆心成城〕 | |
66 | 나주 이속 | 김근환(金根煥) | 두 차례 출전하여 자못 현저한 공로가 있음〔二次出戰頗有效勞〕 | |
67 | 나주 대장 | 김기옥(金基玉) | 두 차례 출전하여 자못 현저한 공로가 있음〔二次出戰頗有效勞〕 | |
68 | 운봉 운량사 | 박진홍(朴震洪) | 성을 지킬 즈음에 군사들에게 군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공로가 있음〔城守之際籌餉效勞〕 | |
69 | 나주 이속 | 장길한(張吉翰) | 두 차례 종군하여 자못 전투공로가 있음 〔二次從軍頗有戰勞〕 | |
70 | 나주 이속 | 최윤룡(崔允龍) | 두 차례 종군하여 자못 전투공로가 있음 〔二次從軍頗有戰勞〕 | |
71 | 나주 이속 | 최문섭(崔文燮) | 세 차례 종군하여 자못 전투공로가 있음 〔三次從軍頗有戰勞〕 | |
72 | 나주 이속 | 최일봉(崔一鳳) | 세 차례 종군하여 자못 전투공로가 있음 〔三次從軍頗有戰勞〕 | |
73 | 함평 이속 | 이영관(李永琯) | 위험을 무릅쓰고 비적 무리를 많이 체포함〔冒危涉險多捉匪類〕 | |
74 | 나주 천총 | 최성순(崔聖純) | 싸워 지킬 즈음에 공로가 드러난 것이 있음〔戰守之際多有效勞〕 | |
75 | 나주 집사 | 고덕봉(高德鳳) | 두 차례 출전한 노고가 많이 있음 〔二次出戰勞苦多有〕 | |
76 | 나주 집사 | 손치홍(孫致洪) | 두 차례 출전한 노고가 많이 있음 〔二次出戰勞苦多有〕 | |
77 | 나주 군관 | 전공서(錢公瑞) | 두 차례 출전한 노고가 많이 있음 〔二次出戰勞苦多有〕 | |
78 | 고창 군교 | 전응진(全應振) | 용감하게 종군하여 나아가 비적 무리를 많이 체포함 〔勇進從軍多捉匪類〕 | |
79 | 나주 이속 | 양인환(梁仁煥) | 세 차례 종군하여 전투 공로가 많이 있음 〔三次從軍多有戰勞〕 | |
80 | 나주 이속 | 구유술(具有述) | 세 차례 종군하여 전투 공로가 많이 있음 〔三次從軍多有戰勞〕 | |
81 | 나주 군교 | 문관후(文寬厚) | 두 차례 종군하여 전투 공로가 많이 있음 〔二次從軍多有戰勞〕 | |
82 | 나주 이속 | 기학연(奇鶴衍) | 세 차례 종군한 공로가 가상함 〔二次從軍效勞可尙〕 | |
83 | 영암 수성장 | 하태명(河泰命) | 성을 지키고 비적을 섬멸하는데 시종일관 공로가 있음〔守城勦匪始終效勞〕 | |
84 | 나주 수성 부통장 | 김재환(金在煥) | 8개월 동안 성을 지키며 비적들의 예봉을 여러 차례 꺾음〔八朔守城屢挫敵鋒〕 | |
85 | 완주 병영 집사 | 정창권(鄭昌權) | 자신의 몸을 버려두고 용맹을 떨쳐 끝내 패하지 않았음〔舍身奮勇終不敗衄〕 | |
86 | 해남 군민 | 박휘헌(朴徽憲) | 우두머리 괴수 김춘두(金春斗)등을 체포함〔捉得巨魁金春斗等〕 | |
87 | 해남 군민 | 윤규룡(尹奎龍) | 우두머리 괴수 배규린(裵奎磷)등을 잡아 바침〔捉納巨魁裵奎磷等〕 | |
88 | 해남 군민 | 김만국(金萬國) | 우두머리 괴수 김춘두(金春斗)등을 잡아 바침〔捉得巨魁金春斗等〕 | |
89 | 운봉 한량 | 이봉권(李奉權) | 협력하여 성을 지키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성을 이룸〔協力防堵衆心成城〕 | |
90 | 영광 군민 | 이현숙(李賢淑) | 의곡(義穀)을 내고 지키는데 힘써 우두머리 괴수를 잡아 바침 〔出義戶勞捉納巨魁〕 | |
91 | 부안 유학 | 이현기(李鉉璣) | 의병을 모아 비적을 섬멸하고 군량을 넉넉히 도와줌〔募義勦匪優助軍餉〕 |
2) 전봉준 공초록
○ 1차 공초 : 1895년 2월9일
○ 2차 공초 : 1895년 2월11일
○ 3차 공초 : 1895년 2월19일
○ 4차 공초 : 1895년 3월 7일
○ 5차 공초 : 1895년 3월10일
⇒ 판결 : 1895년 3월29일
⇒사형 집행 : 1895년 3월30일
3) 전라도 각 읍에서 잡은 동학도 수효와 빼앗은 물건을 기록하여 만든 책자
(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 초토사(招討使) 민(閔) [招討使閔]
나. 사찬(私撰) 기록
1) 이병수의 겸산유고에 실린 「금성정의록」
양성이씨 겸산 이병수(李炳壽)가 금성정의록을 쓰게 되는 계기는 겸산 39세 때인 1893년 말경 남원부사 민종열(閔種烈)이 나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나주지역의 미풍양속을 장려하고자 향약의 규약인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환난상휼(患難相恤)로 주민을 순화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나주 향약을 조직하고, 도약소(都約所)를 두었는데, 이때 겸산에게 도약소 직월(直月/간사)을 맡도록 하였다. 이로써 겸산은 정식 관직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공적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즉 선악(善惡)을 가리는 장부를 마을 단위에 비치하여, 선(善)한 자는 선(善)의 장부에 기록하고, 악(惡)한 자는 악(惡)의 장부에 기록하여, 매월 초1일이면, 각리의 당직자[里正]는 면당직[面約正]에게 보고케 하는, 상벌의 규정을 시행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동학농민 봉기(1894년)와 나주 단발령 사건(1895-1896)이 일어났을 때 목사의 측근에서, 직접 역사 현장을 목도한 당시 상황을 문필가로서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당시의 수성(守城) 상황을 민종열 나주목사가 특별히 겸산에게 기록하도록 부탁하였다면, 민(閔)목사는 1895년 12월에 담양부사로 이임해 갔으니, 그 이후 상황은 기록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오히려 1896년 나주 단발령의거를 더욱 세밀히 기록하였다. 그렇다고 보면 처음부터 민(閔) 목사의 부탁으로 상황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겸산 스스로 상황을 기록 했다고 본다.
겸산이 군인신분으로 사건에 참여 하였다면 ‘진중일기’가 되겠지만, 겸산은 민간인 신분이요, 또한 자신이 나주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마저도 숨기고 기록을 하였기에 글의 기록 형식도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나주 사건의 무대 출연자이지만 “내가”란 말을 기록치 않고 “이병수가”, “이병수는” 등의 제삼자적 표현으로 기록 하였다.
겸산유고는 겸산 사후 5년만인 1946년에 9월에, 송산정사에서 20권 10책, 석인본으로 간행되었다. 1945년 우리나라 해방 이후였기에 겸산의 문학 작품도 햇빛을 보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나동륜의 하촌유고에 실린 「금성산 의거 일기 [錦城山義舉日記]」 등
나주나씨 하촌 나동륜은 1873년(고종 1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고종30년 즉 1893년 12월에 민종열(閔種烈) 목사가 새로 나주에 부임해 와, 진사 나동륜을 도약장(都約長)으로 삼았기에 당시의 동학관현 기록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본 문집에 「금성산 의거 일기 [錦城山義舉日記]」, 「동학에게 널리 알려 깨우치는 글 [告諭東學文]」, 〈「나주목사가 체문을 내리다. 민목사를 대신하여 짓다 [下帖, 代閔侯作]」의 글은 역사적 가치가 높다 하겠다.
3) 정석진의 난파유고에 실린 「甲午討平日記」
나주정씨 남파 정석진은 1894년 동학농민군의 나주 침공시 나주목사 민종열을 정석진으로 하여금 동학농민군을 물리쳐 읍성을 지키는 일을 총괄 지휘하는 도통장(都統長)으로 삼았다.
난파유고의 「甲午討平日記」는 1894년 봄부터 동년 12월까지 초토사 민종열 나주목사의 지휘하에 나주목 관할 지역에 출몰하는 동학 농민군을 물리치는 경과를 일기로 쓴 것이다.
호남지역에 농학농민군이 점령하지 못한 곳이 나주와 운봉뿐이다.
그 전공을 인정받아 도통장 정석진은 해남군수로 제수되어 1896년 2월9일 나주에서 해남으로 출발하는 날, 많은 통장(統長)들과 군교(軍校)들이 환송을 나와 영산포 나루에서 마지막 전송을 하고 정석진은 해남으로 내려갔는데, 환송 나온 統長들과 軍校들이 관아로 들어가 일제 앞잡이 안종수(安宗洙)를 죽이는 거사를 하였다. 역사는 이를 나주민란으로 보고 있지만 나주는 단발령 의거라 말하고 있다.
관군 대장 김병욱(金炳旭)은 이 사건의 배후가 정석진이라 여겨 해남에서 정석진을 체포하여 나주로 압송하고 몇 마디 취조를 한 후 사형에 처했다. 이날이 1896년 3월 11일이다.
4) 박기현의 일사(日史)
○일사(日史)는 불분권 1책. 필사본(筆寫本)으로 박기현의 생활일기로서 친필 원고본이다. 수록 연대는 1891년(고종 28) 7월 5일부터 1903년(광무 7)까지이다.
○박기현은 1894년 12월 동학군이 강진·장흥 일대를 점령할 당시 박창현(朴昌鉉/전 都正)·김한섭(金漢燮)과 함께 수성군을 조직해 대항한 경력이 있다.
○나아가 수성군을 포함한 관군(兵營軍)과 동학군과의 치열한 전투상황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강진현·병영 전투의 상황은 물론 강진·장흥 지방의 최대 전투인 ‘석대들 전투’의 전후 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병영(兵營)은 전라병영성을 의미한다. 1895년 전라병영성이 폐영 된 뒤에 1931년 병영면이란 지명이 되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5)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
○오하기문은 제목 그대로 오동나무 아래에서 소문을 듣고 쓴 것인데 문장을 보면 수록(隨錄/梅泉野錄)과 문맥이 유사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수록(隨錄)을 바탕으로 매천이 듣고 거기에 살을 덧붙어 쓴 것 같다.
○1894년 1월부터 썼는데, 또한 글 내용 중에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부분이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전봉준이 함평현에 있으면서 나주목사 민종열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병수의 「금성정의록」에는 전봉준이 보낸 편지 글 내용이 없는데, 오하기문에 있다.
6) 기우만의 나주토평비
<출처>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五 / 碑 「羅州平賊碑」
나주목 관할 지역에 출몰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한 내력을 쓴 것이다.
특히 금석(金石)에 새긴 4언 고체시는 나주목 지역 승전을 축약하여 읊은 시이다.
○금석(金石)에 새겨 이르노라. 銘曰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國朝五百
문화교육이 이미 융성하였네. 文敎旣隆
융성함이 오래되니 혹 바뀌기도 하여 隆久或替
이단(異端)의 말이 뒤숭숭하네. 異言以訌
주(周)나라의 노자(老子)라 하여도 若老于周
한(漢)나라의 석가모니라 하여도 若釋于漢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기술하라고 하면 索隱有述
나중에 혹 근심거리가 되기도 하네. 後或爲患
만약 지금 사악하다고 하면 若今爲邪
예전에도 또한 의지할 것이 못되네. 古亦靡憑
어리석은 자를 속여 무리를 이뤄 誑愚締黨
악한 난리를 일으켰네. 式亂以興
명철한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는 사람 없듯 靡哲不愚
그 무리의 수가 늘어나 寔繁有徒
재앙의 싹과 재앙을 받을 빌미는 孼芽厲階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이 그 소굴이었네. 巢穴兩湖
소문만 듣고도 맞서지 못하고 급히 달아났으니 望風奔走
군(郡)과 현(縣)에서는 다가서지도 못하였네. 郡縣莫攖
왕이 보낸 군대의 명령을 거역하여 逆命王師
전주성을 함락하여 웅거하였네. 陷據完城
우뚝 솟았도다. 나주 금성산이여! 屹屹錦嶽
우리 남쪽의 기강(紀綱)을 지켰도다. 鎭我南紀
오직 나주목사 민공(閔公/민종열)은 維牧閔公
누우나 서나 칼을 잡고 按劒臥起
오로지 진정시키는 장수가 있었으니 維鎭有將
기개(氣槪)와 의리가 둘이 같았네. 氣義則同
오로지 벼슬아치와 아전이 維丞與吏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함으로 盡瘁鞠躬
적들이 글로써 정탐하고자 賊覘以書
말을 보낸 것이 거만스러웠는데 遣辭悖慢
뒷면에 적은 16자의 글자는 背字十六
적의 등골이 식은땀으로 적셨네. 賊背沾汗
다른 날 깨끗이 소탕할 異時掃淸
조짐이 여기에 있었네. 兆眹在是
전체 호남이 밥을 먹고 숨을 쉬었으니 全湖食息
그가 없었다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微伊焉恃
전주성을 포위하고 남쪽이 무너질 때 完圍南潰
아끼는 마음이 위엄을 이기면 진실로 공이 없거늘 愛克罔功
마치 불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처럼 如火益熱
근심과 두려움으로 따르지 못하는 것을 蹙蹙靡從
공(公)은 ‘괜찮다’라 하고 公曰可矣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으면 ‘불쌍하다’고 하였네. 焚溺哀哉
일찍이 면주(綿州)에서 적을 만나 嘗賊于綿
그 수괴를 섬멸하였으며 已殲厥魁
나주 서문(西門)의 승리와 西門之捷
사창(社倉)의 싸움에서 社倉之役
이미 적의 예봉을 꺾고 旣摧之鋒
그 소굴을 추구(推究)하여 究其巢穴
용진산(聳珍山)까지 추격하고 聳珍迫逐
고막포(古幕浦)에서 모두 소탕하여 없앴네 古幕掃殪
적은 남산촌(南山村)에서 밤에 달아나고 南山夜遁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에도 적들이 놀랐네. 風聲鶴唳
공(公)은 추구하지 말라 하고 公曰勿究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불쌍하다고 하였네. 脅從可哀
용기가 저상(沮喪)되고 간담이 떨어져 氣沮膽落
땅에 떨어진 사기는 꺾이고 소멸되었네. 落振朽摧
임금의 군대가 남쪽지방을 내려치며 王師南征
그 다스림을 법으로 궁구하니 式究其治
공(公)에게 호소하고 따르면서 從公于訴
울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네. 泣涕漣洏
스스로 새롭게 되기를 허락함으로써 以許自新
기뻐하며 슬퍼하지는 않네. 勿喜而悲
적이 평정되고 사특한 것이 그치는 것도 賊平邪息
빠르고 더디지 않았네. 速而不遲
나라에 있어서는 기둥이고 國而楨幹
선비로서는 지주(砥柱)와 같았네. 儒而柱砥
공(公)은 임금의 위령(威靈)을 말하고 公曰王靈
태수(太守)의 공(功)이라고 하지 않아 太守不有
인화(人和)에 마침내 복종 하였네 人和卒服
아전 누구누구에게 吏有某某
덕(德)을 돌리고 아름다움을 양보하여 歸德讓美
이 때문에 칭찬이 있었기에 是以有譽
돌에 새겨 노래하니 勒石歌詠
하늘과 땅이 함께 같이 하리라. 穹壤與俱
7) 변만기(邊萬基)의 봉남일기(鳳南日記)
봉남일기는 장성출신 변만기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그해부터 10년간의 기록한 일기이다.
한편 변만기 가승을 보면 조부 변상철과 동생 변승기의 일기도 있어 후세에 많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봉서일기 (鳳棲日記) | 변상철 (邊相轍) | 1873-1877 | 1818-1886. 初名은 相熺, 字는 道寬, 號는 鳳棲 |
봉남일기 (鳳南日記) | 변만기 (邊萬基) | 1894-1903 | 1858-1924. 字는 處一, 號는 鳳南, 鳳棲의 孫 |
회산일기 (晦山日記) | 변승기 ( 邊昇基) | 1907 | 1866- 1937. 字는 處明, 號는 晦山 |
3. 1894년 나주목 지역 동학농민군 동향 및 전적지 현황
나주목 지역은 비록 나주읍성을 거점으로 동학농민군의 나주공격을 막아내었지만 나주목 지역 동학농민군 전투 기록을 보면 조금씩 다르다. 난와 오계수(難窩 吳繼洙)는 묘갈명(墓碣銘)에서 6전6승이라 하였고,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은 「정장군전(鄭將軍傳)」에서 7전무패라 하였고, 겸산 이병수(謙山 李炳壽)의 금성정의록에서는 8전8승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나주를 비록 읍성 때문에 침공하여 읍성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으나 6∼8전의 전투를 한 것은 사실이다.
1) 동학농민군 동향에 따른 나주목사의 대비 사항
○ 1894년 4월부터 수성을 준비하다
처음에 민공(閔公)도 4월부터 수성(守城)할 사무소를 설치하고 출근하여 사무를 보면서 정수루 위에 숙정패(肅靜牌)를 세우고 정수루 마당 앞에서 벼슬아치와 백성을 거느리고 독려 하였다.
○정석진(鄭錫珍)을 도통장으로 삼고 김재환을 부통장으로 삼았으며 분대장은 순서에 따라 선정하였으니, 손문상을 도위장으로 삼고, 김성진은 중군으로, 김창균은 통찰로,
박근욱은 별장으로 서문을 관장케 하고, 문낙삼은 별장으로 북문을 관장케 하고, 박윤칠은 별장으로 동문을 관장케 하고, 문관후, 박경욱은 별장으로 남문을 관장케 하였다.
나머지 별장과 별초는 참모, 서기, 정탐, 도훈도, 천총, 파총 등 각각 재능에 따라 유능한 사람을 임명한 것이 68인이다.
○나주는 또 본래 12개 읍의 진(鎭)을 관리하고 있어 깃발(旗) 북(鼓), 솥(鎗), 칼(劍), 활(弓), 쇠뇌(弩), 약품(藥), 탄환(丸)과 대완포(大碗砲), 장대포(將臺砲), 천보총(千步銃), 편전(片箭), 장전(長箭)을 오랫동안 군고(軍庫)에 쌓아놓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달하면서 새롭게 수리, 정비를 더하니 용기가 날로 더하였다.
2) 1894년 4월 전봉준이 함평현에 진출하여 나주목사 민종열에게 서신을 보내다.
○「금성정의록」에는 전봉준이 보낸 서신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서신 뒷면에 쓴 16字 답장만 기록되어 있다. 민종열 목사의 답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분 없이 군사를 출동 시키는 것은 법에 마땅히 죽이도록 되어 있고, 도리에 맞지 않은 말은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황현의 오하기문 4월 19일 : 비적들이 함평현에서 초토사〔나주목사 민종렬〕에게 글을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호남 유생 등이 피맺힌 원한을 품고 삼가 백번 절하면서 위엄하시어 밝게 들어주신 분 아래에 글을 올립니다.
삼가 저희들은 천지간에 교화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어찌 감히 망령되게 불의한 일을 저질러 스스로 죽을죄에 빠지겠습니까?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해진다고 옛 성현이 남긴 가르침은 시무(時務)의 큰 강령(綱領)입니다. 관찰사와 수령은 백성을 기르는 벼슬아치입니다. 선왕의 법도로 선왕의 백성을 다스리면 비록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 나라는 오래도록 편안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수령은 왕의 법령을 돌아보지 않고 왕의 백성을 마음에 두지 않고 탐욕이 많고 포악하기를 늘 변함없이 하니 군전(軍錢)은 무시로 지나치게 배정하고, 환전(還錢)은 뿌리를 뽑듯 재촉하여 거두고, 세미(稅米)는 명분도 없이 더 거두었습니다. 각 민가 매호마다에 부과하는 잡역의 항목은 날마다 겹쳐 징수되고, 인척에게도 나누어 배치하고 응징하여 거두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영에서 더 거두려고 독촉하여 거두어들였습니다. 균전관(均田官)이 결(結)마다 징세하는 것을 농간하고 각 사사(司事), 교리(校吏), 장예원(掌隷院) 무리들도 토색(討索)질하는 것이 가혹하고 포학하여 조목마다 차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보금자리를 잃는 자가 열에 여덟아홉을 차지하고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이 길거리에 질펀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 (굶주려 죽어) 골짜기를 메우려 하는데 헤아려 사는 길도 만에 한 가닥도 없습니다. 애달픈 이 민생이여, 죽기를 구하여도 이루지 못하고 서로 모인 자들이 황급하게 호소하려고 하니 본 관아는 난류(亂類/문란하게 하는 무리)라고 하였으며, 감영의 문에 호소하려고 하니 비적의 무리로 지목되었습니다.
막중한 친군영에 소속된 군대가 어려움 없이 포고를 발령하여 여러 고을에서 모병을 하여 칼날로 죽였는데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이 아무 꺼리 낌이 없었습니다.
덕으로 교화함을 널리 펴고 백성을 기른다는 사람이 진실로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저희들의 오늘의 일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손에 병기를 든 처지에 애오라지 자신만을 보호할 계책으로 일이 이지경이 되었으니 억조창생이 같은 마음으로 팔도에서 묻고 의논하여 위로는 국태공을 받들면서 아버지와 자식 간의 윤리와 임금과 신간간의 의리를 온전히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안정시키고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전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장차 죽어도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하오니 엎드려 보아 살펴주시기를 빕니다.“라 하였다
2) 서성문 전투
○「금성정의록」 : 7월 초하루 적의 괴수 최경선(崔京先)이 이끈 무리 수천 명이 유린하면서 거침없이 본주를 쳐들어 왔는데 오권선(吳權善)은 못된 귀신같이 무리들을 이끌고 와 금안동에서 진영을 합하여서 2-3일 동안 침범하여 약탈하다가 금성산에 개미떼처럼 올라붙었다.
초5일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자 산봉우리로 부터 일제히 모두 물 흐르듯 내려와 곧바로 서성문 공격하였다.
적의 세력은 한편으로 성문을 두드려 깨트리려 하고 한편으로 고기비늘처럼 잇달아 城에 오르려 하였는데 그 모인 수가 마치 수풀처럼 많았다.
관군은 명령을 듣고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곧 대완포, 장대포를 연달아 발사하니 화염은 온통 붉었으며 소리는 산악을 흔들었다.
성(城) 위의 각 초소에서는 일제히 큰 소리로 꾸짖기를 “경선(京先)과 권선(權善) 두 적의 괴수들은 도망가지 말고 목을 바치라.” 하였다.
○오하기문 1894. 6월24-25,
비적들이 나주를 포위하자 전라우영장 이원우가 비적을 맞받아 쳐서 대패시켰다.
원우가 하루는 기습병으로 가까운 지경의 수효가 많지 않은 비적을 습격하여 사로잡아 베어 죽인 것아 수백 명이었다.
고부 접주 최경선(崔敬善)이 거느린 곳에서 많이 죽었다. 경선은 분해하면서 만여 명을 이끌고 성에서 10리가 못되는 곳에 진을 쳤다.
3) 전봉준 비무장 나주읍성 집입과 민종열과 담판
○ 「금성정의록」 8월13일 거괴(巨魁) 전봉준(全琫準)이 도당 수십 인을 이끌고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본주 서쪽 성문 밖에 와서 수문별장(守門別將)을 우러러보며 청하기를 “나는 순영문(巡營門)의 문첩(文牒)과 막비(幕裨)▣ 통첩(通帖)을 가지고 왔으니 원컨대 문을 열어 민태수(閔太守)를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하고는 인사를 하고 갔다.
별장(別將)이 들어와서 민공(閔公)에게 아뢰기를 “이 적(賊)을 쏘아 죽이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민공((閔公)이 말하기를 “그 자가 이미 꾸밈없이 홀로 온 것은 정말로 상부 감영(監營)의 지휘가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혹시 귀화(歸化)를 청원하는 뜻이 있는 것인가? 전투에 임해서 적(賊)을 죽이는 것은 진실로 용감하다. 그런데 애걸하려고 와서 청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무인(武人)의 도리가 아니다. 너는 의심하지 말고 불러오라”고 하였다.
○전봉준이 들어와 뵙고 예를 마치고 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소생 등은 불행하게도 근세에 탐관오리의 학정을 몹시 받아 감히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가난에 어찌할 수 없이 떠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러 머리를 맞대고 가까이 모이고 발걸음을 을 나란히 하여 깊이 원통함을 부르짖어 병폐를 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안핵사(按覈使)가 공정치 못하여 초토사(招討使)가 군대를 보내었으니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로 하여금 병기(兵器)를 우롱하게 하지만, 참으로 이것은 죽기가 싫어서 도망 다니며 구차한 삶을 아침저녁으로 실낱같이 연명할 뿐이며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명공(明公)께서 특별히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였다.
○전봉준은 간담이 서늘하여 입을 열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고 안고 쥐새끼처럼 나가 여관에서 묵었다. 다음 날 장차 전봉준이 떠나려고 하자 수성(守城)하는 장령(將領)들이 상의하기를 “이 무리들이 만약 성 밖으로 나가면 등 뒤에서 일제히 포를 쏘아 훗날의 걱정을 없애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전봉준이 홀연히 장령에게 청하여 그 복장(服裝) 10여 벌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를 따라 다닌 사람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몇 달간 더위와 장마에 산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다녔기에 땀과 때가 이처럼 심하니 바라건대 공들이 품팔이를 사서 깨끗이 빨아서 기다려주십시오. 내가 마땅히 영암(靈巖)에 가서 3-4일 날짜를 허비하고 반드시 다시 올 것입니다. 그 때 바꾸어 입어 더러운 냄새를 면하게 해주신다면 공(公)들의 은혜입니다. 번거롭게 고생스럽다고 사양하지 않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4) 고막포 전투
○「금성정의록」 1894년 11월17일 서면의 정탐이 급히 고하기를 “적의 무리가 무안(務安)의 경계에 있는 고막포(古幕浦) 등지에 진을 치고 웅거(雄據)하는데 그 수가 5, 6만이라고 군호(軍號)하였다”라고 하였다. 서쪽 5면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장등참(長嶝站)까지 침박하기에 이르렀다.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나주로 들어가 성호(城濠/邑城)를 공격하여 뺏을 것이다”라고 하니 형세가 매우 예측하기 어려웠다. 도통장·부통장·중군장이 포군 300명을 거느리고 20리나 떨어진 자지현(紫芝峴)으로 나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초동(草洞)저자 3면에 머물러 진을 치고 의거통령(義擧統領) 박훈양(朴薰陽)·나사집(羅史集)·임노규(林魯圭)가 민병 수천을 이끌고 관군의 뒤에 진을 벌렸다.
○다음 날 아침에 포군(砲軍) 300명 및 대포군(大砲軍)이 늘어서서 먼저 대완포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산을 내려와 사방에 불을 지르니 연기가 하늘에 자욱하고 포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후응장(後應將) 최성순(崔成純)·박근욱(朴根郁)·구유술(具有述)이 계속 이어서 나아가고, 관군과 민병 3천여 명은 장등(長嶝)에서 진을 마주하고 대포를 먼저 쏘고 천보총을 연발하였다. 도통장〔정석진〕·부통장〔김재환〕이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움을 독려하였다. 중군이 적진의 왼쪽을 갑자기 습격하니 포환이 이르는 곳에 비적(匪賊)의 무리들이 죽어 넘어졌다. 관군이 용감하게 활약하여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10여 리나 추격하여 살육하였다. 급박하게 고막교(古幕橋)에 도착하니 사람은 많고 다리는 좁아 물에 떨어지는 자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호장산(虎壯山) 위에 포진하여 적의 기계를 수습하고 바야흐로 없앨 방책을 의논하는데 북쪽에서 시급한 일을 알려왔다. 민공(閔公)은 즉시 회군(回軍)하도록 하였으나 적이 뒤를 밟을까봐 밤새도록 진을 유지하였다. 부통장 및 천보대가 길 왼쪽에 매복하고, 돌격장이 포를 쏘아 수십 명의 적을 죽이고 서서히 군대를 철수했다.
◎기우만의 羅州 平賊碑에서
무안(務安)에서 적(敵)을 만나 여춘(汝春)이 죽음을 당했고,
두 번째는 서문에서 승리하여 경선(敬善)이 밤에 도망을 갔으며,
세 번째는 사창(社倉)에서 이겨 그 소굴을 태워 없앴고,
네 번째는 용진산(聳珍山)에서 이겨 오권선(吳權善)이 겨우 죽음을 모면하였다.
다섯 번째는 고막(古幕)에서 승리하였는데, 패배하여 죽은 시체가 들판을 메웠다.
여섯 번째는 남산(南山)에서 이겨 적이 멀리서 보고 저절로 무너졌다.
5) 금안동 남산촌 전투
○금성정의록 : 1894년 11월3일, 적의 무리 수 만 명이 금안면(金安面)의 남산촌(南山村)과 태평정(太平亭)등지에 나아가 진을 치고, 읍과 10리 떨어진 거리에 가까이 와서 성(城)을 도륙하겠다고 큰소리로 말하였다. 이날 밤 북문 밖 함박산(咸朴山)에 바싹 접근했다. 민공(閔公)은 영장(營將) 이원우(李源佑)와 함께 북문 옹성막(瓮城幕)에 올라 이졸(吏卒)을 위로하며 돌아다녔다. 이날 밤은 추위가 심했다. 금성산 의막(義幕)에서는 불을 붙여 점군(點軍)하였는데 홀연히 바람이 일어 불길이 막소(幕所)로 번져나가 폭죽(爆竹)소리가 나니 마치 대포를 연달아 쏘는 듯했다. 또 동문 밖에는 귀화(鬼火/도깨비 불)가 별처럼 늘어서서 마치 화승(火繩) 모양으로 번쩍거렸다. 적(賊)은 관군이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들고 포를 발사한다고 의심하였다. 동문 밖에 복병이 또 이르니 적이 드디어 놀라 달아나 남산촌 부근 땅에 물러나 주둔했으니 흡사 또한 신령의 도움이 있어 그런 것 같았다.
○김기옥(金奇玉)이 천보대를 거느리고 일제히 포를 쏘고, 여러 장령들이 맹렬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어지럽게 포를 쏘며 곧바로 나아가니, 적(賊)도 포를 쏘며 대응하고 크게 함성을 질렀다. 양 진영에서 쏘는 포의 소리에 산악이 찢어지는 듯하고 연기가 공중에 자욱했다. 적이 드디어 크게 무너져 도망가니 가로누운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 오권선(吳權先)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와 한 마리 노새를 타고 멀리 피하였다. 천보대가 남산을 넘어 추격하여 하촌(下村)에 이른 후 오권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막연하여 형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계를 수습하고 평민을 효유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돌아와 대첩의 상황을 갖추어 아뢰었다. 민공(閔公)이 걱정하는 모습으로 말하기를, “적(賊)을 깨뜨린 것은 기쁘지만 사람의 목숨이 상한 것이 많아 불쌍하고 가엾구나.”라고 하였다.
▶봉남일기 1894년 11월24일
나주(羅州)의 오중문(吳重文)도 패진하여 남산촌(南山村/금안리)에서 거의 몰살되었다고 한다.
▶ 변만기의 봉남일기 ; 1894년 11월 25일자
도인(道人)들이 나주(羅州)에서 패전하여 인근 읍으로 흩어져 도망친 자들이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는데, 마치 내가 터진 듯하였다.
▶봉남일기 : 11월 13일. 비가 가늘게 내렸다.
듣자니, 나주(羅州)의 수성군(守城軍)이 어제부터 북창(北倉)마을을 진압하였는데, 근처의 접주(接主) 집에 불을 지르고, 새벽에 오중문(吳重文)을 용진산(聳珍山) 아래에서 쫓아 포성(砲聲)이 우레처럼 크게 울려 그치질 않았고, 오중문은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하여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민종열 초토사 보고서 : 11월24일 남산촌에서 동학농민군 360명 포살
6) 남평 전투
○금성정의록 : 1894년 12월 초3일, 남평(南平)의 이방(吏房) 우두머리 정남홍(丁南洪)이 급히 고하기를 “적(賊)의 괴수 최경선(崔京先)이 곧바로 본 남평군을 함락하여 관가(官家/官衙)의 부금(符金/符節과 金章)을 적(賊)에게 빼앗기고 현감은 견갑골(肩胛骨)에 탄환을 맞아, 죽느냐 사느냐 위태로운 고비에 달려 있으니 특별히 군대를 출동시켜 적(賊)을 토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이에 도통장 정석진(鄭錫珍), 도위장 손상문(孫商文), 부통장 김재환(金在煥), 중군장 김성진(金聲振), 참모 박재구(朴在九)에게 명하여 정예 포군 3백 명을 거느리고, 의거통령(義擧統領) 박훈양(朴薰陽)은 민병을 거느려 합세하라고 하였다.
○초4일, 남평의 경계에 도착하니 본 남평군의 아전과 장교들이 분주히 영접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앞장 세워 평민을 위로하여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남평 수령 이희하(李熙夏)가 공장(公狀)을 내어 왔기에 곧바로 돌려주고 읍의 뒤에 있는 월연대(月延臺)에 머물러 진을 치게 하였다. 적(賊)이 이미 멀리서 위세를 바라보고 달아나 흩어지더니 갑자기 능주(綾州) 땅을 향해 멀리 피하니 그대로 산 위에서 숙박하였다.
▶오하기문 ○11월 23일 : 경선이 남평을 함락하니 현감 이희하(李僖夏)는 총에 맞고 도주하였다.
7) 전라우영터 사형장
금성정의록으로 본 동학농민군 숫자를 보면, ‘서성문 전투에 농민군 수천 명’, ‘침산전투에 농민군 7백 명’, ‘고막포 전투에 농민군 5∼6만 명’, ‘남산촌 전투에 농민군 수만 명’이라 하였다. 변만기의 봉남일기(鳳南日記) 1894년 11월 24일자에 보면 ‘나주(羅州)의 오중문(吳重文/오권선)도 패전하여 남산촌(南山村)에서 거의 몰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주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적게 잡아도 5천∼1만명 정도로 파악되지만 동학농민군 관련 인물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려 동학농민군과 관군과의 접전이라는 사실만 남고 접전하여 죽은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하기문 ○1894년 5월 13일. 흐림.
도정(都正,빅기현의 형) 형님이 장차 진군하기 위해 우영장(右營將)과 함께 무학당(武學堂)에서 군대를 점검을 했다.
▷日軍 후비보병부대 쿠스노 비요카치 종군일지 : 1894.7.23.-1895.12.9.까지 일기
→1894년 11월 - 1895년2월의 학살현황
→총 1,650명(銃殺900. 燒殺46, 突殺7, 打殺51)
→사형장 인근 산에 버린 시체 : 680명
→장흥전투 중죄인을 압송 처형 : 103명
▷나주 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벌였던 전봉준(全琫準)은 민종렬이 자신들의 요구를 끝내 거부하자 동학군에게 협조적이었던 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을 사주하여 그의 파직을 청하는 요청을 조정에 하게 만들었고, 조정에서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파직시킨 뒤, 박세병(朴世秉)을 대신 나주 목사로 임명하였다.
▷민종렬이 파직을 당했으나 백성의 반대로 떠나가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유임되었던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매천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민종렬이 파면을 당하자, 아전과 백성이 길을 막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김낙봉 이력
○ 을미(1895년) 1월 6일
또한 다음날은 을미년(乙未年) 1월 6일이었다. 오후 4시에 죄인 32명을 순서대로 결박해서 대대장이 있는 대(臺)아래에 늘어앉혔다. 3명은 제명대로 살지 못하는 목숨으로 왔기 때문에 바로 풀어주고, 우리 형제를 불러내어 한쪽으로 옮겨 앉힌 뒤에 나머지 27명은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쏘아 죽였다.
-중략-
지난번에 27명을 쏘아 죽이는 와중에 다행히 죽음을 모면하였다. 마침 그때에 제주사람 수십 명이 해당군의 영산포(永山浦)에 장사를 하러 왔다가 우리 형제가 잡혀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해당 군수 민종렬씨에게 등장(等狀)하기를, “지난해와 같은 세상에 돈을 가지고도 어디 가서 쌀을 살 수가 없고 쌀을 사서 포구를 나올 가망이 없었는데, 부안의 김아무개 형제가 아니었으면 제주뿐만이 아니라 각 섬의 인민이 굶어죽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죽는 경우에는 하늘의 도가 없다고 말하는 까닭입니다”라고 하고, 오게 된 연유를 자세히 아뢰었다. 민종렬씨가 그 등장을 가지고 대대장에게 직접 가서 연유를 말하였더니, 대대장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번에는 죽이는 것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민종렬씨가 이 일을 임금님 앞〔榻前〕에 바로 장계(狀啓)하였더니, 비답(批答)하기를, “바로 풀어주라”고 하였다.
◆김낙철 역사
○ 갑오(1894년) 12월 21일
12월 21일에 나주 수성군(守城軍) 50여명이 오권선을 잡으려고 왔다가 갈촌(葛村)의 우리집에 와서 수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하자 아내〔室人〕를 툇마루 기둥에 묶고 무수히 때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 을미(1895년) 1월 3일
을미년(乙未年,1895) 1월 3일에 나주읍에 도착하였다. 함께 데려간 죄인 32명을 문루(門樓)앞에 줄을 세워 앉혔다. 부안군에 왔던 수성군(守城軍) 50여명과 다른 50여명이 와서 가죽신발과 나무지팡이로 2시간 동안 차고 때릴 때에 유독 우리 형제는 수성군에게 돈 400냥을 주지 않은 혐의 때문에 머리를 뒤로 묶고 진영(鎭營)까지 가는 5리를 나무 지팡이와 철편(鐵鞭, 쇠채찍)으로 때려서 몰고 가 진영의 문 앞에 줄을 세워 앉혔다. 수성군 100여명이 나무지팡이와 철편(鐵片, 쇠조각) 및 주장(周杖)으로 3시간 동안 차고 때렸는데, 그 때의 광경은 입으로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
3. 마무리 말
동학농민군은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못된 지방 수령의 잘못을 임금께 알리는 집단 데모였다. 갑오군공록에서 보면 주로 광활한 농경지가 있는 지방에서 ‘집단데모’가 일어났기에 이를 진압하는 공록 수훈자가 많이 나온 것이다.
나주는 서성문 전투에서 패하여 읍성을 점령치 못했으나 고막포 전투, 남산전 전투. 남평 전투를 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의 농민들이 수탈을 당하였기에 농민군에 가담하여 ‘’집단데모‘를 한 것이다.
정부는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저항운동인 ‘집단데모’가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 되자, 겁을 먹고 청군(靑軍)에게 진압을 의뢰하니, 마침내 일군(日軍)에게도 진압을 의뢰한 것은 조선을 멸망시키는 지름길이 되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최신무기의 무자비한 학살을 지켜본 백성들은 원한과 무서움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학 농민군이 완전 진압되고, 일본군이 조선을 장악케 되니, 반일운동을 했던 동학농민군을 지속적으로 색출 처단하니, 그 때까지 살아남은 동학 농민군은 죽을 때까지 숨어 살면서 자신의 농민군 흔적을 지웠다.
더더욱 1910년 한일 병탄이 되었으니,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동학농민군을 숨기고, 그런 자취를 지우고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해방 후에 또다시 친일파가 권력을 잡게 되니, 동학농민군 후손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살다가, 1975년 전후로 학계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 논문이 발표 되면서 동학 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어느 정부가 동학 농민군 가담자 현황을 조사한 적이 있는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서 발굴한 동학농민군은 겨우 3,670명이고, 구전으로 발굴된 자 겨우 97건뿐이다. 이 수치가 많지 않은 것은 아마 조사과정에서 증거자료, 증빙서류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부러 동학농민군 흔적을 지위지 않으면 죽는 판에 어느 누가 증거자료를 채증하고 간직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주었겠는가?
이것이 문제점이다.
오늘 나주학회 정례 답사코스가 나주 동학농민군 전적지이지만, 현장에 가면 동학농민군 관련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또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넘어 고증해줄 인물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저 바람결에 들려오는 당시 원혼(冤魂)들의 아우성소리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 이것도 마음이 열린 자에게만 들린다.
만시지탄이다. 이제야 반일운동(反日運動)을 했던 동학농민군을 독립운동사 차원에서 독립운동가로 대우할지 뒤늦게 학술대회를 할 것인지 생각을 한다니 만시지탄이다.
혹, 독립운동가로 대우해 줄 것이니 증거자료 내라고 할 것이 뻔하니, 이것도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눈에 비친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