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제주학회(회장 좌승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6일 제주한라대학 부설유치원 대강당에서 제주도와 제주일보사 후원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추진과 탐라국 독립성 상실 900년 회고’를 주제로 제25차 추계전국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0~12세기 탐라와 고려국가’, ‘13~14세기 대원국-고려 관계와 제주도’ 등 중심으로 한 4편의 주제발표와 2편의 개인발표 및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0~12세기의 탐라와 고려국가’란 주제발표를 통해 “삼국시대 이래로 탐라는 ‘국(國)’으로 계속 지칭되리만큼 높은 자지권을 갖는 실체였다”며 “여러 역사적 배경에 따라 탐라는 고려국가로부터 비교적 높은 자치권을 갖는 속에서도 삼한통일의 법위에 준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고 밝혔다.
노 교수는 “고려 현종 즉위 이후 곤경에 처한 고려정부에 탐라가 오히려 지원을 늘렸고 그만큼 탐라와 고려정부의 관계는 잦은 접촉을 가지며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라며 “이것은 탐라가 고려정부와의 관계에서 문서행정상 내지군현에 준하는 위치를 필요로 하게 된 배경적 요인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탐라의 경우 현종 이전 시기에도 정치적으로는 화내(化內)에 해당하면서도 고려정부로부터 일부 대우는 삼한일통의식이 적용되는 내지인(內地人)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고 현종 2년(1011년) 이후 탐라인에 대한 삼한일통에 준하는 의식은 더욱 진전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노 교수는 또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地)에는 ‘숙종 10년(1105년) 탁라(?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하였다’는 기사가 기록, 탁라를 탐라로 했다는 것은 공식적 읍호를 탐라로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이로서 정치적으로 기미주(羈?州)의 위치에 있었던 탐라는 정치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고려의 내지 군현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내지로 편입된 탐라에 외관이 파견된 것에 대해 고려사 지리지에는 ‘의종시에 현령관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외관 파견 후 탐라가 자치권을 상실하였다는 이해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내륙 군현의 자치권과 그 관련 제도를 볼 때, 같은 내지의 군현이 된 탐라의 자치권은 성주와 왕자의 존재와 함께 외관파견 후에도 상당부분 존속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 ‘13~14세기 대원국-고려 관계와 제주도’에 대해 주제발표한 이개석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원국의 고려 지배와 관계사를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최근 우리사회의 새로운 이슈가 된 민족문제와 영토문제에 접근하고 해석하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며 이 점은 특히 몽골 통치집단의 고려변경지역 분할과 지배를 살펴볼 때 의미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원국이 1275년 탐라도에 160필의 말을 방목함으로써 탐라는 원국의 중요한 목마장이 되는 첫 발자욱을 떼게 되며 1320년대에는 원국 변경지역(邊境地域)의 14개 대표적 목마장 중 하나로 헤아려지게 된다”며 “실제로 여말(儷末)에는 명(明)이 매년 1000마리에 이르는 탐라말의 조공을 요구할 만큼 큰 규모의 말 사육지로 목마산업이 발전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중심적인 말사육기지가 됐다”고 밝혔다.
또 “탐라는 몽골지배의 영향이 한반도에서 마지막까지 잔존한 지역”이라며 “탐라에 남았던 몽고세력의 고려귀속은 원조(元朝)와 고려 관계의 마지막 장이며 따라서 탐라 관계의 검토는 원과 고려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레가 될 수 있음도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또 “원과 탐라의 실질적 관계는 1267년 제주의 성주가 쿠빌라이를 만나며 처음 시작됐으나 원의 탐라지배가 시작된 것은 1273년 삼별초를 평정하기 위해 몽고군이 제주도에 상육하면서 부터”라며 “이후 원조가 탐라에 설치한 안무사(安撫司)나 총관부(總管府) 그리고 목마를 책임지고 감독한 것으로 보이는 단사관(斷事官) 기관의 속관(屬官)이나 이를 담임한 인물, 그리고 실제로 지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전하는 사료가 매우 부족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또 “1273년 원조가 처음 설치안 탐라초토사는 정삼품(正三品) 초용대장군(?勇大將軍) 失里伯을 초토사로 임명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정삼품 아문이었으며 충렬왕 즉위초 고려의 최고 관부 첨의부(僉儀府)의 품급이 4품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원대 내내 몽고정권이 탐라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 김일우 연구사는 ‘고려후기 몽골의 제주 진입과 제주사회의 변화’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역사적으로 제주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및 일본 지역 등과 잦은 교류를 가졌던 한편 이들 지역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주목돼 왔었고 이 때문에 격변을 겪기도 했다”며 “이에 따라 제주문화도 다양한 경로의 외부문화가 수용되어 토착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으며 이들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예의 하나가 13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 동안 교류가 이뤄졌던 제주와 몽골문화의 경우”라고 강조했다.
또 “제주와 몽골의 만남은 몽골의 세계정복사업에 제주사람들이 집단포로와 같이 동원되어 혹사당했던 예 등과 같이 대립과 갈등관계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몽골과의 교류로 우마사육이 제주의 전통적 산업으로 뿌리내려 경제력이 확대되었으며 외부인의 유입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 제주사회의 규모확대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김 연구사는 또 “제주와 몽골이 가졌던 첫 만남에 대해 통상적으로 대립과 갈등관계로 보았고 그것이 제주사회에 미친 영향을 무시하거나 극소화하려는 입장을 취해왔었다”며 “반면 국가와 민족단위가 아니라 제주의 대외관계 및 제주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제주와 몽골의 첫 만남과 교류는 제주 지역의 정체성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이는 오늘날도 찾아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지방자치제가 세계 여러 나라와의 교류에 주체적으로 나서고 세계화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특히 제주는 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함에 있어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외교류에 나설 것을 요구 받고 있다”며 “제주와 몽골은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의 문화를 비교.검토할 수 있는 역량을 효과적으로 갖추기 위해서도 교류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박원길 징기스칸연구센터 소장은 ‘제주 습속 중의 몽골적인 요소’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몽골(원)과 제주의 특수관계는 이전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 온 분야이나 몽골과 제주 사이에 일어났던 100년 이상의 교류사는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삼별초라는 주제에 눌려 교류의 실체가 묻혀버리는 이상한 역사왜곡 현상이 나타났다”며 “그 결과 몽골에서 제주도가 차지했던 위치나 교류의 의미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이는 진정 바람직한 역사연구라 할 수 없으며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역사연구야 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역사상을 복원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몽골과 제주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소장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는 고려사가 아닌 세계사의 축약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보다 쉽게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며 “몽골의 일부 학자들은 제주도를 ‘태평양에 뜬 유라시아대륙의 향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제주 역사의 세계성과 문화의 혼혈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2005년 7월 다리강가의 타반-톨고이라는 지역에서 대몽골제국 초기의 분묘로 간주되는 고분들이 발견됐으며 이 분묘에 쓰였던 목관의 재질이 제주도의 녹나무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출됐다”며 “이는 제주와 몽골이 말을 비롯해 다양한 방면에서 교류가 행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또 “고려 말 고려 중앙정부에 대한 일련의 반란, 명나라가 아얀-테무르를 제주도로 유배시킨 것 등은 제주에 끼친 몽골의 영향이 아주 크고 그 결속관계가 매우 강했다는 것”이라며 “몽골과 제주 사이의 문화교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나 민속, 언어 등 다방면의 종합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 2부 개인발표 및 토론에서는 고승익 제주대 강사와 이종화 전주대 교수의 ‘호텔업 재무관리의 조직학습에 관한 연구’와 제주대 생명자원과학대학 송현호.현동화.손원근.김영후.강민수 교수의 ‘미생물발효 효소제의 급여가 가축의 사육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