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문학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

이재복

요즘 나오는 동화집이나, 달마다 어린이 잡지에 실리는 작품들을 읽어내기란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고통만을 안겨주는 작품들이 언제까지 아동문학 동네에 되풀이 해 나올 것인지 참 안타깝다. 동화나 동시뿐만이 아니고, 아동문학 평론도 읽어내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요즘 나오는 아동문학 관계 글을 읽을 때마다 우리 아동문학은 질적으로 일제시대보다 더 후퇴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 밥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려는 부모나 선생님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자연 아동문학 작품에 대한 수요는 늘어났지만, 출판사마다 좋은 동화집이나, 동시집, 평론집을 내려고 하는데 원고를 구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마지못해 수요가 있으니 책은 찍어내야 하겠기에 외국의 동화책을 주로 번역하여 싣거나, 아니면 좀 수준이 떨어지는 국내작품이라도 책으로 내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 아동문학은 다른 문화영역이나 마찬가지로 점점 외국문학에 종속되기 시작하고, 한편 우리 작가들이 써내는 감동 없는 책들이 쏟아져 나와 결과적으로 우리 아동문학은 겉포장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속은 보잘 것 없는 문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누구나 지금 우리 아동문학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대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대안 가운데 하나를 찾는다면 역시 우리 근대 아동 문학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로 돌아가 처음부터 우리 아동문학이 흘러온 모습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되짚어 보는 일이다. 다시말해 제대로 우리 아동문학사를 점검하고, 뭐가 잘못된 채 지금까지 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좋은 작업들을 해 보려 했는데 왜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는지, 이런 저런 경우들을 찾아내어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너무 앞으로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허둥대며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되밟아 가면서 여기 저기 흘려 놓은 많은 문학유산들을 제대로 거두어 들이는 작업을 해 봐야 할 때라는 것이다.

방정환은 1899년에 태어났다. 1999년이면 방정환 탄생 100주년이 된다. 아마도 내년에는 방정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여기 저기서 열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또다시 예년에 하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방정환을 영웅화시키는 대형 눈요기 행사만 벌리는 식의 기념식이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만약에 방정환의 영혼이 살아 있다면 그 영혼은 결코 내용은 없고 겉보기식의 행사만 요란한 그런 대형행사에는 즐겨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소박하더라도 방정환의 문학을 오늘 이 자리에 다시 불러내어, 그 방정환 문학 주위에 둘러 앉아, 작품이든 평론이든 같이 읽고 도대체 우리가 무얼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방정환의 영혼은 바로 이런 조금 비좁고 몇 안되는 사람들의 모임이긴 하지만 실제 내용이 있는 모임에 오기를 즐겨할 것이다.

방정환이 남긴 글 가운데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을 들라면 역시 방정환이 소년운동의 한 부문으로 아동문학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벽지에 자신의 동화관을 발표한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을 들고 싶다.

이 글은 방정환이 1923년 《개벽》1월호에 발표한 글이다. 우리 세는 나이로 방정환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이다. 우리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은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방정환이 말하는 동화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 글을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 글을 읽을 때마다 감동을 주는 부분이 있다. 다음 구절이다.

아동의 마음! 참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동 시대의 마음처럼 자유로 날개를 펴는 것도 없고, 또 순결한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연령이 늘어갈수록 그것을 차츰차츰 잃어버리기 시작하고, 그 대신 여러 가지 경험을 갖게 되고, 따라서 여러 가지 복잡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경험과 지식만을 갖는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랴. 경험 그것이 무익한 것이 아니요, 지식이 무익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늘어간다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자랑할 것은 못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경험과 그 지식이 느는 동안에 한편으로 그 순결하고, 그 깨끗한 감정이 소멸되었다 하면 우리는 어쩌랴……. 그 사람은 설사 냉냉한 마르고(枯) 언(凍)지식의 소유자일망정 인생으로서는 역시 타락한 자일 것이다.

이 스물다섯 살의 열정에 찬 청년은 그의 뒤를 이어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확신에 차고 열정에 넘친 충고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혹은 아동문학 운동은 그 본질과는 다르게 방정환이 말하는 대로 아이들의 가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감수성을 빼앗고, 그 자리에 지식만을 자꾸 강요하여, 결국에는 아이들을 냉냉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으로 만드는 데 만족해 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충고에 이어서 방정환은 우리가 새로 개척하는 아동문학 운동은 이렇게 냉냉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을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천진난만하던 영원한 아동성의 세계로 돌아가 마음의 순결은 비는' 아이들을 만드는 아동문학 운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말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아동성의 세계로 돌아가 마음의 순결을 비는, 아이들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작품으로 그 예를 든다면 어떤 작품을 들 수 있을까. 실제 방정환이 제시한 작품들을 놓고, 우리는 그 작품에 대해서 앞으로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방정환이 쓴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소개해 보자. 그 당시 방정환은 아동문학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의 큰 숙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세 가지의 숙제에 대하여 방정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동화집 몇 권이나, 또 동화가 잡지에 게재된대야 대개 외국동화의 역뿐이고, 우리 동화로의 창작이 보이지 않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이나, 그렇다고 낙심할 것은 없는 것이라.'하고 말    하면서 방정환은 '다른 문학과 같이 동화도 한 때의 수입기는 필연으로 있을 것이고, 또 처음으로 괭이를 잡은 우리는 아직 창작에 급급하느니 보다

  1. 우리 고래 동화를 캐어내고(다시 말해 옛이야기를 잘 찾아내고)
  2. 외국 동화를 수입하여 동화의 세상을 넓혀가고 재료를 풍부하게 하기에 노력하고
  3.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창작동화를 개척해 나가자 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숙제는 방정환이 아동문학 운동을 시작하던 그 당시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우리 아동문학 운동이 앞으로 계속되는 한 언제든지 우리 앞에 문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결국 아동문학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이런 세 가지 방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의 한 부분부분마다 좀더 세부적으로 풀어나가다 보면 상당히 많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이 세 가지 문제는 각자 한 가지씩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가 먼저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우리 동화에 대한 바른 생각이 잡혀 있어야, 외국 동화를 보는 눈도 바르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옛이야기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 역사와 겨레의 숨결이 살아있는 우리만의 독특한 삶의 뿌리, 향내가 나는 창작품들도 생겨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에는 방정환뿐만이 아니라 아동문학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동화관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글들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다. 정홍교가 1926년 매일신보 4월 25일 자에 발표한 글에 〈동화의 종류와 의의〉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이재철 씨가 쓴 《한국아동문학연구》(개문사. 1995. 중판. 34쪽)를 보니까 일본인 학자 마쓰무라(松村武雄)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번안 도용하여 발표하였다'는 지적이 있다. 마쓰무라의 원본을 내가 구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글의 어디를 어떻게 그대로 옮겨놓았는지는 확인을 못 하였다. 하여튼 이 글이 정홍교 자신의 생각에 의존한 글인지, 아니면 마쓰무라의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변역글인지는 원문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어느 쪽으로의 글이든지 정홍교는 글을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아동은 활발한 심적 활동자임으로 지나(支那)는 지나적 동화를 선택하여야 할 것이며 미국이나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각각 자국적 동화를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조선인의 처지에 있어서는 조선적 동화를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정홍교는 조선적 동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역시 조선적인 동화란 어떤 동화를 말하는지, 어떤 생각을 담아내고, 어떤 감동을 주는 동화를 말하는지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여전히 궁금하기만 하다. 이 당시 동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선적인 동화에 가까운 한 작품의 예를 들어보였으면 좋겠는데, 실제 글 가운데서는 그런 작품의 예를 들어 놓지는 않았다.

1920년대 초반에 아동문학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동화가 나갈 방향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많은 글이 있지만 다음 두 글만을 참고로 하였다.

  1. 동화는 그 소년 아동의 정신생활의 일부면이고, 최긴(最緊)한 식물(食物)이다.(방정환)
     -식물은 먹을 거리, 즉 밥이란 뜻
  2. 아동 자신이 동화를 구하는 것은 결코 지식을 구하기 위함도 아니고 거의 본능적인 자연의 요구이다. 생아가 모유를 요구하는 것과 같이 아동은 동화를 요구하는 것이라, 모유가 유아의 생명을 기르는 유일한 식물과 같이 동화는 아동에게 가장 귀중한 정신적 식물인 것이다.(방정환)
    -동화는 아이들의 영혼, 정신을 살찌우는 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3. 화는 영원한 아동성을 잃지 아니한 인류 중의 한 사람인 예술가가 다시 아동의 마음에 돌아와 어느 감격 혹은 현실의 생활을 반성하는 데서 생기는 어느 느낌을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며, 그 감격, 그 반성은 세상 모든 사람의 감격, 반성이 아니면 아니될 것이다. 아니 그 작품에 의하여 누구나 감격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요, 또는 이 작품에 의하여 누구나 다 자기 각자의 생활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방정환)
    -좋은 동화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감격의 세례를 주고, 각자의 생활을 반성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래서 아동문학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아동문학은 어른의 감상까지도 견뎌내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책방에 꽂혀 있는 그 많은 아이들 책들 가운데 정작 어른의 감상까지도 견뎌내서 어른에게까지 '감격의 세례와 생활의 반성을 주는' 책들이 얼마나 될까.
  4. 동화는 그저 재미로만 될 것이 아니라 항상 그 형식과 내용이 아동을 본위로 하기는 하면서도 일반 세인에게 대하여서도 아동의 심리로써 하는 작자의 일종 감격을 넣어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동화라는 것은 우리가 아동에게 읽히기 위하여서 지은 것이 되는 동시에 또 일면으로는 일반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동성에게도 읽히어야 할 것이다.(요면자)
    -방정환의 지적과 같은 의미, 즉 동화는 어른의 감상까지도 견뎌내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걸 요면자도 강조하고 있다.
  5. 근일 우리 나라에서 발표되는 동화를 보건데 어떠한 것은 지력만으로 또 어떠한 것은 도덕을 너무 편중히 하는 견지로써 고찰하였으며 어떠한 것은 아동의 심리 또는 동화라는 그것의 발생 발달의 연구를 등한히 하여 가지고 다만 막연히 동화라는 것을 유희시하는 폐가 없지 아니하다.(요면자)
    -지력만으로 된 동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이들에게 높은 정신을 심어준다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생각을 알게 모르게 써 놓은 동화들을 말할 것이다. 철학동화니 해서 아이들에게 읽히는 동화들을 보면 무슨 말인지 엉뚱하기만 한 경우를 가끔 본다. 일반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쓴 동화들에서도 이런 한계를 많이 볼 수 있다. 도덕을 너무 편중히 한 동화는 바로 교훈동화를 말하는 것이다. 감동은 없고 아이들을 훈화하려고만 하는 이런 동화들은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써 내고 있다. 이런 교훈동화 또는 교육동화는 문학작품으로 동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보통 생활동화라고 하여 나오는 동화들이 그 내용을 보면 대개가 다 그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없고 단지 작가가 아이들에게 훈화하는 도덕적인 충고의 말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생활동화들은 엄밀히 말해서 동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동화라는 것을 유희시하는 예는 명랑동화니, 순정동화니 귀신동화니 해서 얼마든지 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다.  
  6. 극히 가난한 사람이 어찌어찌한 기회로써 크고 큰 부자가 되었다든지 우연한 행운으로써 어떠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러한 것이 가장 위대한 사실이나 되는 듯이 찬미한다. 이러한 장난은 말할 것도 없이 아동의 순수한 맘속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종자를 뿌려두는 것이다.(요면자)
    -오늘날에도 아이들의 마음속에 무서운 종자를 뿌려주는 문학은 잘 살펴보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순수한 문학의 얼굴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잘 살펴보면 아이들의 맘을 병들게 하는 작품은 상당히 많이 있다. 예전에는 아동문학이 일부 전문 작가만의 몫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동문학이 전문작가뿐만이 아니고, 아이들, 학부모, 선생님이 참여하는 시민문학 운동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에 비해서 이런 운동을 바른 방향으로 끌고 나갈, 내용을 채우는 연구는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아동문학 운동이 온 시민이 참여하는 대중문예 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과정에서도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나갈 위험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동문학 운동 단체나, 독서운동 단체들이 상업적인 단체들과 결탁하여 아동문학 운동이 건전한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상품의 대상으로만 더 조직화되어 가는 위험성도 나타나고 있다. 점점 확대되고 있는 아동문학 운동에 대하여 새로운 점검이 필요한 시기이다. 오늘의 아동문학 운동이 잘못된 문학을 아이들에게 구조적으로 퍼뜨리며 주입시키는 그런 유통구조를 재생산하는 운동으로 나가서는 참으로 곤란한 것이다.
  7. 조금이라도 동화를 맘두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여 동화의 발생과 유동의 진상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아동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여 아동과 동화와의 생명적 관계를 붙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문예적 고찰에 의하여 예술로서의 동화의 가치를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광의로의 동화의 교육적 효과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화 그것을 교육적 기구로만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이에 말하여 두고자 한다.(요면자)
    -동화는 교육적 기구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아동문학에서 교훈은 당연히 그 내용 속에 들어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교훈이 되는 삶의 알맹이를 어떻게 작품속에 녹여 내느냐가 문제이다. 이원수는 교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혹같은 교훈이다. 교훈이 삶의 이야기로 형상화되지 못하여, 교훈만 덩그러니 이야기의 중심에 드러나 있는 동화를 혹같은 교훈이라 말한 것이다. 또 하나는 피같은 교훈이 있다고 말한다. 교훈이 그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가 감동을 통해 가슴에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교훈을 말한다. 주로 교훈동화는 가슴에 호소하기보다는 어린이들의 머리(이성)에 호소한다. 요즘 나오는 동화들을 보면 밤에 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서 필요한 동화라든지,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든지, 너무 덜렁대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든지 하여서 자꾸만 어떤 기능적인 목적을 위해 쓰이는 일종의 예화 자료를 문학작품으로 동화와 혼동하여 쓰는 경우가 있다. 이런 예화 자료들은 동화는 아닌 것이다. 나는 이런 동화를 '잔소리 동화'라고 부르고 싶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는 필요하듯이, 문학 이전에 도덕시간에 이런 '잔소리 동화'는 하나의 예화 자료로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잔소리 동화'를 문학작품으로 동화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지금까지 방정환과 요면자의 글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이야기를 자꾸만 넓혀가기 보다는 좀 좁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보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보자.

방정환은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우리 창작동화가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우선 외국의 동화를 수입해 오는 수입정책에라도 의존해서 우리 동화의 세계를 넓혀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이론적인 이야기는 앞에서 어느 정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방정환이 말하는 것처럼 초기 아동문학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우리 동화 세계를 넓히기 위하여 외국에서 수입해 온 동화들은 과연 얼마나 감동적인 동화들이었는지, 얼마나 조선 아이들의 정서에 맞는 동화들이었는지, 작품을 놓고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좋겠다. 여러 사람들이 외국의 동화를 번안하여 들려주었지만 역시 일제시대 당시 가장 먼저 아동문학밭을 개간하기 위하여 삽을 들었던 방정환이 그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해 놓은 수입동화들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방정환이 소년운동을 벌이면서 번안한 외국동화들은 여러 편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편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방정환이 번안한 서양동화들 가운데, 특히 안데르센의 〈천사〉라는 제목의 동화가 관심을 끈다. 우리는 이 동화를 통해서 방정환의 동화관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방정환은 동아일보 1923년 1월 3일자에 안데르센의 〈천사〉라는 동화를 번안하였다. 1923년 1월이면 방정환이 한창 《어린이》잡지를 창간하려고 이런 저런 일로 분주하게 뛰어다닐 때이다. 그러니 방정환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동문학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방정환은 동아일보에 안데르센의 〈천사〉를 번안하여 실었다.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평론을 개벽지에 실은 것도 1923년 1월이었다. 이때 방정환은 동아일보의 청탁을 받고 아마 여러 편의 동화들 가운데 무슨 동화를 번안하여 실을까 고민했을 것이며 한참 고민 끝에 이왕이면 〈천사〉라는 동화를 싣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방정환의 뒤를 이어 아동문학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방정환이 왜 하필이면 1923년 아동문학운동을 한창 새롭게 시작하는 그 마당에 안데르센의 〈천사〉를 번안하였을까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선 방정환이 동아일보에 번안하여 실은 〈천사〉라는 동화를 소개하겠다.   

[착한 아헤가 죽으면 천사가 날러와서 그 조고마한 죽은 몸을 두팔로 안고 커다랗고 하얀 날개를 펴면서 아헤가 좋아하며 동리의 위를 훌훌 날러 넘어가면서 그러면서 한 아름이나 되도록 꽃을 따서 안고 갑니다. 천사가 그 꽃을 하느님께 가지고 가면 그 꽃은 땅 위에 있을 때보다도 훌륭하게 더고와집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꽃을 받아 안으시고 그 중에 제일 좋은 꽃에 입을 맞추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꽃은 소리를 치며 깃겁게 노래를 부릅니다.
어느새 천사는 죽은 아헤를 하늘로 데리고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헤는 끝까지 어렴풋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듣고 하는 동안에 천사와 아헤는 어느 틈에 아헤가 땅 위에서 늘 놀던 동리의 위를 넘어 지나서 아름다운 꽃이 피여 어우러진 꽃밭에 벌써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천사는
[어느 꽃을 꺽어다가 하늘에 갖다 심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헤는 고개를 들어보니까 그릇 앞에는 여태까지 꽃나무 틈에 한 조고맣고 가느다란 장미꽃이 피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장난을 하였는지 반쯤 핀 봉오리 달린 가지는 모두 꺾어져서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헤는 퍽 측은해 하는 듯이 슬퍼하는 얼굴로
[에그 가엾어라. 이런 꽃도 하늘로 가져가면 잘 피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잠자코 그 장미꽃나무를 뽑아들더니
[아아 착한 아헤!]하고 아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헤는 그래도 꿈꾸는 듯이 사랑스러운 두 눈을 반쯤 가슴프레하게 뜨고 있었습니다.
[자아 인제는 다른 꽃도 어서 땁시다]하고 둘이는 한아름이나 되도록 꽃을 많이 땃는데 그 중에는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금잔초와 할미꽃도 정성스럽게 뽑아내였습니다.
[그만하면 훌륭하니 그만해 가지고 어서 가지요]
하고 아헤가 말하니까 천사도 그 말을 듣고 곧 일어섰습니다.
어느 틈에 벌써 밤이 깊어서 더 할 수 없게 사방이 고요하였으므로 둘이는 그냥 그길로 그 동리의 좁다란 골목으로 날러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그 동리에는 ㅇㅇㅇ이 있었든고로 그 거리에는 지저분한 북데기와 ㅇㅇ여진 그릇이 여기저기 내어진체 ㅇㅇㅇ있었습니다.
천사는 그 중에서 화초분 깨여진 조각과 맑은 흙덩이 몇 ㅇ이 한 무더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라고 손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흙덩이는 화초분에서 굴러나온 것인데 화초나무의 뿌리로 하여 엉기어 있기는 하지만 꽃나무가 마른 까닭으로 길거리에 내어팽겨친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가지고 가십시다. 응? 그 까닭은 내 가지고 가면서 이야기해 볼 것이니……."
하고 천사는 그것을 거두어 모아가지고 다시 날개를 훨훨 펴면서 날러가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그 좁다란 동리의 굴속같이 가난한 집에 한 ㅇ살난 아헤가 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그 아헤는 세상에 다니면서부터 항상 병으로 하여 줄곳 누어 앓고만 있었으므로 병이 저윽이 낫을 때에도 지팽이를 짚고 방속에서 두 서너번 왔다갔다 하기도 간신히 하는 터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굴속같은 오막살이 속에서 거의 해를 ㅇㅇ 이고 지냈습니다. 여름이 되면 잠깐 동안은 이 굴속 집에도 간신히 한 반시간을 볕이 들어비치는데 그럴 때에는 그 불쌍한 아헤는 병석에 누운 채로 오래간만에 햇볕을 쪼이면서 가늘어가는 손을 앙상하게 얼굴 위까지 가저다가 햇볕에 비추어서 그 손의 살속에 겨우 조금 남아있는 피가 붉게 비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쌍한 신세였는고로 바깥 세상의 산이 어떻고 바다가 어떠한 것도 도무지 알 길 없고 오직 한번 이웃집 아헤가 느티나무 가지 하나를 꺽어다 주었으므로 나무잎 하나 수풀빛이 파란 것인 줄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후로는 그 이웃집 아헤에게 받은 느티나무 가지를 머리 맡에 꽃아놓고 자기가 볕도 쪼이고 새도 울고 하는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고 있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후 얼마 지난 후에 이웃집 아헤가 이번에는 여러가지 화초를 갖다 주었습니다. 그 중에 다만 하나가 뿌리가 달려있었든 고로 아헤는 그것을 분에다 심어 달라하여 늘 드러누워 있는 자리 옆에 들창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심겨진 화초는 점점 크게 자라고 새싹이 돋아서 해마다 꽃이 피었습니다. 그 화초가 그 불쌍한 아헤에게는 넓고 놀기 좋은 마당같이 생각되어 이 세상에 다시 없이 귀중한 것으로 알게 되어서 병든 몸에는 다만 하나뿐인 동무인 그 화초를 물도 뿌리고 햇빛도 쪼여주고 하면서 그것을 위하여 적지 아니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화초의 꿈을 꾸기도 하고 좋은 향긋한 냄새를 맡기도 하면서 그 꽃을 보고는 기뻐하면서 스스로 제 신세를 위로해 가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불쌍한 아헤는 기어코 죽어버렸답니다. 벌써 그 아헤가 하늘 나라에 온 지 일년이나 되는데 그 꽃은 그냥 그대로 그 들창 위에 놓인 채로 내버려 있더니 이윽고는 꽃과 나무가 마르니까 그냥 내여 팽겨치게 되야 땅 위로 굴러 나와서 세어졌습니다. 그것이 아까 우리가 끌어모아 가지고 온 이 불쌍한 꽃뿌리랍니다. 이렇게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임금님의 정원에 놓여있는 훌륭한 화초보다는 훨씬 더 아헤를 위로해 주고 있었답니다."
날러가면서 천사의 이 불쌍한 이야기를 듣고 그 품에 안겨 있던 아헤는 천사에게 "어떻게 그 전말을 샅샅이 자세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는 곧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자세 알기만 해요. 그때의 그 병든 불쌍한 아헤는 실상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나랍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이 꽃을 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안겼든 아헤는 눈을 번쩍 뜨고 그 천사의 어여쁘고도 부드러운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습니다.
마침 그 때 두 사람은 벌써 찬란한 하늘나라에 당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겨온 죽은 아헤를 받아안고 다른 천사들과 같이 잔등 위에 희고 부드러운 큰 날개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천사가 가져온 꽃을 받아서 가슴에 안고 꺽어진 장미꽃과 마른 꽃뿌리와 다른 모든 꽃 위에 입을 맞추어 주시니까 꽃은 모두 일시에 기꺼운 소리를 치고 하나님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래소리는 어느 때까지든 유창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천사가 된 아헤의 소리도 말렀던 화초의 소리도 그 속에섞여 있었습니다.(안더-슨 집에서 역)

방정환은 왜 안데르센의 〈천사〉를 그 당시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려 했을까. 〈천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방정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에 등장하는 자연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뭔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바로 일제시대 우리 어린이들, 우리 빼앗긴 자연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방정환은 이런 〈천사〉같은 동화를 통해서 이렇게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뭔가 구원의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끝모를 어둠속에 내던져저서 어찌할 수 없이 해체된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그 고통의 어둠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방정환은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동문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 다시말해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안데르센의 〈천사〉는 어린 아이들에게 한 번쯤 읽어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사〉라는 동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아울러, 역시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고통받던 아이들이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 구원을 받는 이런 구조를 옛이야기에서는 '감천부활구조'라고 한다. 하늘이 감동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준다는 것이다.(《한국설화연구》. 최운식. 집문당.1991. 230쪽)

옛이야기나, 창작동화나 그 문학이 갖고 있는 본질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아이들에게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문학이 되어야 하는 건 아동문학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무인데, 그 부활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옛이야기 형식에서 자주 보이는 감천부활구조가 있을 것이요,또 하나는 창작동화에서 보이는 뭔가 납득할만한 인과관계를 갖고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부활구조가 있을 것이다.

감동을 주는 창작동화는 〈천사〉에서 보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식의 조금은 종교에서 따온 듯한 도식적인 관념에 의존하기 보다는 삶의 현장 안에서 그 목숨이 서로 부대끼며 이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승화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부활의 정신을 아이들에게 감동깊게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라면 이원수의 〈루루와 라일락〉이라든가, 〈쑥〉, 그리고 권정생의 〈강아지똥〉이나, 윤기현의 〈서울로 간 허수아비〉같은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방정환은 1931년에 세상을 떠났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아깝다. 그래서 방정환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될 것이다. 방정환이 소년운동을 시작하면서 이런 〈천사〉를 번안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려 한 것을 보면 우리에게 영원히 청년으로 기억되는 방정환의 그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방정환이야 말로 그 당시 누구보다도 난쟁이로 상징될 수 있는 그 어렵고 힘든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자기 온 몸을 던진 방정환은 결코 자기 스스로 영웅이 되려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정환은 영원히 낮은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존재하려한 그야말로 어린 난쟁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로 존재하려 한 방정환을 뒤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그 영웅의 그늘 안에 안주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방정환은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되며, 그 자신 영원히 어린이로 부활하여 자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 생명을 이어가는 열린 존재인 것이다.

방정환이 그 당시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얼마나 겸손하게 수용하였는 지는 한정동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소금쟁이〉란 동요가 일본사람의 작품을 번안한 번안동요인지, 아니면 창작동요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그 당시 동아일보 문단시비란(1926.9.23 이후)에 실렸던 소금쟁이 논쟁만 봐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엉뚱하게 소금쟁이 논쟁에서 표절시비에 말려들게 되었는데, 그때 방정환이 보인 태도를 봐서도 충분히 알 수는 것이다.

사제는 먹히는 존재'라는 말이 있는데, 어찌 종교의 길을 걷는 사제들분일까. 방정환이야말로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 완전히 먹힌 존재였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부활한 생명의 존재인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말을 했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쫓기듯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조금 멈추고,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도 방정환의 삶과 문학속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방정환은 그 자신 스스로 어린이의 삶과 문학을 위해 먹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 사람이니, 방정환이 어린이의 삶에 던진 그 열정, 그리고 그 열정을 바탕으로 해서 벌였던 여러 가지 운동의 결과들을 하나 하나 곱씹어 먹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우리들 가슴에도 들어와 하나의 씨앗이 되어 꽃피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요즘 같이 우리 아동문학운동이 겉보기에는 상당히 화려하고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같은데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속이 비어있는 허전한 상황에서 새삼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그립고 소중하게 생각된다.

방정환이 번안하였던 외국동화에 대하여 이 밖에도 여러 작품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라는 작품 하나만을 살펴보았는데 방정환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편집자의 부탁을 받고 한 번을 쓰기로 하였는데, 두서 없이 이야기를 하다 두 달이나 쓰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자리를 내가 빼앗은 것 같아 여간 죄송한게 아니다.

 

// 아동문학평론가 이재복 글

 

 

 

망우리 하면 공동묘지를 떠올린다. 공원묘지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공동묘지는 웬지 오래 머물고 싶다거나 일부러 지나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망우리 공동묘지는 좀 다르다. 특히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1899∼1931)이 묻혀 있는 망우동 산57-1번지일대는 공동묘지 http://cafe.daum.net/niegroup라는 느낌보다는 멀리 굽이쳐 흘러가는 한강과 그 주변에 펼쳐진 강변의 여러 경관이 그림처럼 바라보이는 전망대라는 느낌이 강하다.

해발 281m의 이 망우산 일대에는 소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등 삼림욕에 좋은 다양한 수목이 가득한 데다 초롱꽃, 구절초, 참나물, 곰취, 한라구절초 등 각종 `야생초'들이 이곳저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어 29600여 기의 분묘가 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의문이 갈 정도이다.

5.2㎞의 긴 능선을 따라 이어진 순환로는 온종일 산책객들로 붐빈다. 길가에 세워진 연보비도 읽어 보고 가끔씩 만나는 약수터에서 물도 마시며 천천히 걷다보면 벌써 몇 번째 이 산을 돌고 있는 걷기운동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 산의 정상에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의 묘가 있다. 묘지 입구 길가의 돌에는 `어린이 날의 약속' 중에서 따온 한 구절의 글이 새겨져 있다.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 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살펴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돌에는 방정환 선생을 아동문학가라는 소개와 함께 문화운동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1899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지금의 당주동에서 방경수 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방정환은 1913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업 학교에 진학을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19년 3월 1일 3.1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선언문을 돌리다 일본 경찰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되자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1923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과 뜻을 모아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5월 1일을 첫 어린이 날로 정했다.

귀뚜라미 귀뜨르르/가느단 소리/달님도 추워서/파랗습니다.//울밑에 과꽃이/네 밤만 자면/눈 오는 겨울이/찾아온다고//귀뚜라미 귀뜨르르/가느단 소리/달밤에 오동잎이/떨어집니다.
`귀뚜라미' 전문

귀뚜라미 소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찾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이 쓸쓸하다. 달님도 추워서 파랗고 오동잎도 떨어지는 가을 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한데, 귀뜨르르 귀뜨르르 귀뚜라미 소리만 들리는 밤을 방정환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냈을 것이다.

http://cafe.daum.net/niegroup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 청년구락부, 소년운동협의회 등을 조직하고 어린이 운동에 전념하던 그는 동시, 동요, 동화, 동극을 직접 지어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1923)에 발표하고 〈신청년(新靑年)〉 〈신여성(新女性)〉 〈학생(學生)〉 등의 잡지를 편집, 발간하여 문화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1년 7월 23일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3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30년 40년 뒤진 옛사람이
30년 40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맑은대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약관 3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어린이 문학의 대표 작가로서 소년 운동가로서 어린이 입장에서 어린이를 위해 온 힘을 다한 소파 방정환의 묘는 찾는 이들이 많다.
서예가 정주상의 글씨로 새겨진 묘비 뒷면에는 1983년 어린이날 이재철이 방정환 선생의 업적을 기려 지은 비문이 빼곡이 씌어 있다. 그리고 묘지의 봉분은 흙과 잔디 대신 가족들이 돌로 조각한 기념물이 설치돼 있는데 `동심여선(童心如仙)'이란 글로 소파 선생의
인품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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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세계 스크랩 ......" 어린이날노래 & 방정환의 작품 세계 "
석류 추천 0 조회 17 08.05.24 07: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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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님의 음악선물입니다......" 어린이날노래 & 방정환의 작품 세계 "

△▶。Have a Good Time~~~밝게 자라나는 꿈나무들의 축제,5월5일 어린이날! 아이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되세요..............-- 헤즐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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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든 어린이들의 아버지

    방정환 선생님은 동화 작가로서 뿐 아니라 어린이날을 만들어 내고,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인권 향상을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어린이 문화 운동가, 사회 활동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지를 만들어 세계 어린이 문학을 번역 ·소개하고, 이원수, 윤석중 같은 소년 작가를 길러 내기도 했으며, 이태준이라는 천재 작가를 취직시켜 작품 활동을 돕기도 했다. 또 투고된 원고가 없을 때는 스스로 여러 개의 가명을 쓰며 여러 이야기를 직접 쓰기도 했다. 근대적 의미의 '어린이 문학'이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우리 어린이 문학의 씨앗을 뿌린 매우 귀한 분이라 할 수 있다.

    방정환 선생님이 쓴 <만년 샤쓰> <양초 귀신> 등은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만년 샤쓰>는 제목이 참 특이하다. 내용을 읽어 보지 않고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인 창남이와 창남이 어머니는 자신도 입을 옷이 없지만 불이 난 이웃을 위해 자기 옷을 벗어 준다. 창남이는 그것도 모자라 추위에 떠는 어머니를 위해 자기 셔츠를 벗어 드리고 학교에 온다. 추운 겨울에 저고리만 입고 학교에 온 창남이. 그런데 체육 시간에 선생님은 체력을 키우자며 저고리를 모두 벗게 합니다. 결국 창남이의 맨살이 드러났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뒤늦게 창남이의 사정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 작품에서 '만년 샤쓰'란 맨몸을 의미한다. 우리 몸의 살갗은 평생 동안 우리의 셔츠가 되지 않던가.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현대의 아이들은 창남이의 뜻 깊은 행동을 보고 감동을 하게 된다. 어린이들이 문학 작품을 읽고 감동하는 것은 어른들처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며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아름다운 인물'에 대해 감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방정환 선생님의 동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어린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현재 출판되어 있는 방정환 선생님의 작품집 중 <사랑의 선물 1>은 주로 선생님의 창작 동화나 옛 이야기가 실려 있고, <사랑의 선물 2>는 창작 동화 보다는 외국 동화를 번안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방정환 선생님은 뛰어난 동화 구연가이기도 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처럼 볼 것이 별로 없던 시절, 방정환의 이야기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이렇듯 재주 많고, 할 일 많았던 방정환 선생님은 33살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방정환 선생님의 못 다한 일들은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이어 받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작품에 감동받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또다시 그 일을 이어받을 것이다.

     

    소파 방정환은 3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로,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아동 문학의 선구자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를 떠나서 한국의 아동 문화, 아동 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어른의 소유뮬로만 취급 받아온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 눈물, 용기, 기쁨을 키워 주기 위한 동화, 소설, 시 등 아동 문학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소파는 1899년 서울 야주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9세 때 종조부의 사업 실패로 그의 집이 파산을 맞게 되어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 학생인 10세 때 `소년 입지회`라는 소년회를 조직하여 토론, 연설의 수련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1914년, 선린 상업 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 만에 그만두고 열여섯 나이에 벌써 `청춘` 지에 글을 투고했다.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 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도요 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아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한편 세계 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날` 운동을 범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어린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방정환 번역시의 장르 소개 명칭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각종 대회, 강연회, 강습회를 주관하면서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발표하였다.

    소년 운동이 좌익 세력에 의해 자기의 참뜻과 차츰 달라진 192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잡지와 동화 순례 강연으로 자기 길을 걸었다. 당시 그의 동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 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도 재미있어서 차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눈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서른 세 살의 나이로 그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초지일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방정환의 활동

    ♧ 아동 잡지 < 어린이 >


    --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7월에 통권 122호로 일단 중지된 아동 잡지였다.
    -- 옛날 이야기식 동화나 창가조의 동요에서 탈피하여 창작 동화와 동요를 적극 보급하였다.
    -- 방정환은 < 어린이 >를 통해 짓눌리고 가난하고 웃음을 잃은 어린이에게 슬픔을 달래 주고 슬픔을 함께 하며, 역경을 극복하는 슬기를 가르쳤다.
    -- 이원수, 마해송 같은 아동 문학가들을 배출하였다.

    ♧ 외국 동화의 소개

    -- 1922년〈안데르센 동화〉,〈그림 동화〉,〈아라비안나이트〉중에서 선정한 몇몇 작품들을 초역하여 세계 명작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번안, 출간하였다. 이 동화집이 우리말로 씌어진 첫 동화집이며 창작 동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방정환의 작품 세계

    -- 그의 유명한 수필 〈어린이 찬미〉(1924)에서는 어린이를 "죄 많은 세상에서 죄를 모르고 더러운 세상에 나서 더러움을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소위 '동심천사주의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형제별〉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비운을 별 삼형제로 의인화하여 비극성을 더한 작품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동요이다. 이는 어린이에게 감성해방의 길을 열어 주려한 소파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 대표 동요 〈귀뚜라미〉,〈가을밤〉,〈늙은 잠자리〉 등에서는 뛰어난 시의식의 세계를 보여 주는데, 특히 〈가을밤〉은 현대 동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소설 〈만년 셔츠〉에서는 가난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준 작품이다.

    방정환 문학에 대해 `영웅주의'와 `눈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비판들 하였지만 그는 우리 아동 문학의 어머니임에는 틀림없다. 방정환은 누구보다도 먼저 아동 문학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많은 작가를 길러 내었다. 비록 33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지만,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고 방정환의 뒤를 이어 방정환 문학의 한계를 극복해 낸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방정환과 어린이 운동
            ―천도교 소년회를 중심으로

     

    http://cafe.daum.net/niegroup1. 머리말

    방정환은 우리 근대 아동문학사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비록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너무도 많은 일을 했다. 뛰어난 언론·출판인이며 어린이운동가였고, 동화구연가요 아동문학가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정환을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정도로 떠올릴 뿐, 근대 아동문학 개척기에 그가 펼친 다양한 활동과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이 글에서는 '어린이운동가' 방정환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가 김기전과 함께 조직한 천도교소년회는 우리 어린이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소년회가 어떤 배경에서 조직되었고, 이후의 어린이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방정환이 펼쳤던 어린이운동 전반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심각해진 무산 소년운동단체 오월회와의 대립이나 이후 활동에 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2. 방정환과 천도교

    우리 근대 아동문학은 《어린이》창간(1923년 3월)으로 본격화되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창간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스럽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들이 약한 힘으로 일으킨 것이 소년운동이요 각지에 선전하고 충동하여 소년회를 일으키고 또 소년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한편으로 《어린이》잡지를 시작한 것이 그 운동을 위하는 몇 가지의 일입니다. (방정환, 《어린이》 동무들께,《어린이》(1924년 12월), 강조는 인용자.)

    이 글을 보면 1920년을 전후로 전국 각지에 활발히 조직되던 소년회와 우리 근대 아동문학이 어린이 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과 《어린이》에 그 당시 지역마다 소년회가 만들어지는 상황과 활동들이 계속 실렸던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 어린이운동사에서 방정환과 천도교의 만남이 갖는 중요성이다. 방정환은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면서(1917년) 천도교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손병희에게 방정환을 소개한 사람은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측 대표인 권병덕이다. 방정환의 아버지 방경수는 권병덕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했는데, 둘은 모두 천도교의 한 분파인 시천교(侍天敎)를 믿었다. 권병덕이 시천교에서 천도교로 개종하면서 방경수 역시 천도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방정환의 생애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새롭게 고쳐 쓰고 보완되어야 할 부분들이 뜻밖에 많다. 이 부분 역시 좀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어쨌든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토지조사국 사자생(寫字生)의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손병희가 세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가난으로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천도교 청년회의 한 사람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청년운동을 했다. 3·1운동 때에는 보성전문학교 윤익선 교장이 체포되어 발행이 중단된 독립신문을 제동 처가집에서 비밀리에 인쇄·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몰래 돌리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그 후 일본으로 가서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장으로, 《개벽》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다.(1920년) 또한 도쿄의 토오요오(東洋)대학 철학과에 적을 두고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면서(1921년) 본격적으로 어린이운동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http://cafe.daum.net/niegroup이처럼 방정환은 결혼을 한 다음 청년운동과 어린이운동, 민족운동에 깊이 관여한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방정환이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사상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사상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천도교의 정신적·물질적·조직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천도교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대부분 사회단체는 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종교단체는 그나마 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천도교는 그런 조건을 이용해 겉으로는 교단 활동을 내세우면서 사회 활동을 수행했다.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와 불교계 지도자들을 조직하고 민족 대표 가운데 16명이나 참여할 정도로 주도적이었다. 특히 다른 어느 종교단체보다 각 지방에 조직화가 잘 되어 있던 터라, 천도교측은 그것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천도교는 의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1906년)하면서 언론·출판사업과 교육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이 두 사업을 중심으로 한 신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 방편으로 1920년대 사상계를 주도한 종합 월간지 《개벽》을 비롯해 《어린이》《신여성》《별건곤》《학생》《혜성》《조선농민》 따위의 출판물을 발행했다. 이 출판물들은 천도교 청년회(1923년 9월에 천도교청년당 창설)에서 전개한 사회 부문운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 출판물에 방정환은 편집 겸 발행인, 주요 집필자로 관여했다. 특히 어린이운동과 관련해서 《어린이》를 편집발행했다.

    3. 천도교소년회의 조직과 의미

    먼저 천도교에서 부문운동을 제기했던 배경과 그 하나로 '천도교소년회'가 조직된 유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 당의 목적이 역(亦) 창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을 것은 물론이다. 하물며 우리 도의 주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달성할 것을 당헌 제 1조에 명언하였음이리오. 그러나 창생은 수에 있어 억(億)으로 산(算)할 수 없고 이해에 있어 일양(一樣)이 아니니 이를 상대하며 이를 영도하는 묘방이 없을 수 있으랴. 여기에서 스스로 부문운동을 생각하게 된다. 즉 우리의 주위에 사는 창생의 수가 그같이 많고 이해가 그처럼 불일(不一)하다 할지라도 그를 이모저모로 같은 것은 같은 데에 다른 것은 다른 데에 류(類)를 갈라서 생각하여 보면 그렇게 복잡해서 보족(補足)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 당에서는 이를 연령, 성, 직업 등 세 가지의 편으로 유별하여 먼저 연령의 편으로 유소년, 청년을 가르고 성별로 여성을 따로 생각하고 직업별로 상민, 노동자, 농민을 들고 다시 학생이라는 한 편을 생각하여 유소년, 청년, 학생, 여성, 농민, 노동, 상민의 칠부(七部)를 두고 당본부와 지방부에는 각 부에 대한 책임 위원을 두어 일반당원과 한가지로 부문운동에 노력하게 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당을 보직하고 당원을 훈련하는 것은 오직 이 민중의 이익을 호지(護持), 증진키 위한 당무부(黨務部)가 있는 동시에 나아가 창생을 상대로 하는 특별부서가 있는 것이니 이 창생을 상대로 하는 특별부서가 즉 칠부문(七部門)이란 것이다.  (조기간, 《천도교청년당소사》, 천도교청년당본부, 1935. 38∼39쪽)

    천도교는 민중을 제도하고 그들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이해가 다른 각 계층을 연령, 성, 직업별로 나누어 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을 위해 일곱 개 부문을 마련했고, 그 하나로 유소년부를 두었다. 더구나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청년당에서 최초의 부문운동으로 조직되었다.

    우리 당의 부문운동으로서는 대정 10년 4월(인용자: 1921년 4월)에 어린이 정서 함양,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인내천주의에 맞도록 향상시키기 위하여 김기전, 방정환 외 제 씨의 노력으로 '천도교소년회'를 경성에서 조직한 것이 맨 처음이요.  (앞의 책, 40쪽)

    아주 짧은 소개지만,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 정서 함양,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인내천 주의에 맞도록 향상시키기 위하여 김기전, 방정환'에 의해 '부문운동 가운데 맨 처음 조직'(대정 10년 4월(1921년 4월)되었다. 봉건적 윤리의 지배를 받던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식한 것은 물론, 어린이의 감성 해방 역시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천도교소년회의 모체인 '유소년부'의 활동 방향을 제시한 다음 글을 보면, 천도교의 어린이운동이 갖는 지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 총괄 요항 1, 2, 3, 4항(인용자 : 청년당의 전체 강령)을 준수하는 하에서 다음 각 항을 실행할 것
    2. 유소년의 생리적 발육과 심리적 발육을 구속하는 모든 폐해의 교정에 힘쓸 것.
    3. 재래의 봉건적 윤리의 압박과 군자식 교양의 전형을 버리고 유소년으로의 소박한 정서와 쾌활 한 기상의 함양을 힘쓸 것
    4. 문자 교양과 평이한 과학 지식의 보급에 힘쓸 것
    5. 유소년의 조혼 및 과로를 방지할 것
    6. 간단한 사회생활의 훈련을 시(試)하여 유소년으로의 상당 정도에서 자립자율의 정신을 기르게 할 것
    7. 동화, 동요, 수영 등 유소년 생활에 필요한 소년예술 및 체육의 보급에 힘쓸 것  (앞의 책, 45∼46쪽)

    이것은 소춘 김기전이 <개벽 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개벽》1923년 5월호)이라는 논설에서 윤리적·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어린이들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밝힌 것과 같다. 논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당시 어린이운동은 천도교의 개벽 사상에 뿌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후 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열린 제 1회 어린이날 기념회(1923년 5월 1일)의 선언문은 '천도교청년회 유소년부의 활동 방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3.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히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한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4. (소년운동의 선언,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

    이처럼 천도교소년회는 우리 어린이운동의 본격적인 첫출발이었다. 이 말은 천도교소년회가 우리 나라 최초의 소년회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이미 안변소년회, 왜관소년회, 진주소년회들이 있었다. 특히 진주소년회의 소년('어린이'라고 하기에는 연령이 많음)들은 뒷동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어 어린이운동계에 큰 자각을 일으켰고, 천도교 내에도 어린이운동에 대한 자각을 깊이 심어주었다. 당시 사회운동의 주류는 청년운동과 농촌운동이었는데, 천도교 내에서도 역시 그러했다.

    이 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천도교의 지도자인 소춘 김기전 역시 방정환과 뜻이 통하여 천도교소년회는 조직될 수 있었다.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의 탄탄한 조직과 재정, 방정환·김기전 같은 뛰어난 어린이운동가들의 이론적·실천적 활동, 뚜렷한 활동 목표와 그에 걸맞는 부서(유락부(遊樂部), 담론부, 학습부, 위열부(慰悅部))의 설치와 구체적 활동들로 가장 완전한 소년회로 발족하여 전국의 어린이운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방정환, 김기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천도교소년회가 초창기 어린이운동사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가? 이것은 당시의 다른 소년회와 견주어 볼 때 천도교소년회가 천도교의 재정적·조직적 뒷받침 때문에 이후 어린이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천도교소년회가 우리의 근대 민족·민중운동이었던 동학에 뿌리를 둔 조직이기 때문이다. 천도교소년회에서 표방하는 어린이의 인격과 감성 해방, 더 나아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장기적인 민족운동은 천도교(동학)가 지닌 반봉건(인간평등)사상과 반침략(반제국)주의의 표현이다.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인간존중·평등사상으로, 지배계층에게 억눌려왔던 종래의 여성, 어린이, 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대인접물](待人接物)과 [내수도문](內修道文)에서 '어린아이를 때리지 마라.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라고 하여 일찍이 어린이 존중 사상을 드러냈다. 또한 동학은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반봉건, 반제국주의 사상을 드러낸 바 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어린이의 인격해방과 감성해방, 민족해방을 지향한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운동의 든든한 바탕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4.《어린이》발행, 색동회 조직, 동화구연과 강연회

    《어린이》뒷 표지 안쪽에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도와갑시다'라는 천도교소년회의 표어가 호마다 적혀있다. 그리고 '소년회 소식'이라는 난을 마련해 각 지방 소년회의 조직 상황과 활동을 《어린이》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린이》는 천도교소년회의 어린이운동 차원에서 발행되었다. 이것은 《어린이》창간호에 이정호가 쓴 <《어린이》를 발행하는 오늘까지>(1923년 3월)라는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정호는 이 글에서 천도교소년회가 '조선소년운동의 첫고동'이었고, 그 운동에 방정환과 김기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연 각종 동화구연회나 동극대회들은 어린이들에게 건전한 놀이와 문화예술을 보급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어린이》에 각종 놀이와 문예물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그같은 뜻에서다. 《어린이》의 '독자담화실' 난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학교에서는 졸업식 때 《어린이》에 실린 동극대본 <똑같이, 똑같이>(《어린이》1924년 1월)를 갖고 연극으로 꾸몄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한다. (《어린이》1924년 2월) 이처럼 당시 방정환이 주재한 《어린이》는 어린이문화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방정환이 도쿄에서 어린이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해서 아동예술을 연구하고 보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린이문화운동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방정환이 《어린이》를 발행할 수 있었던 것도 색동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방정환이 갖가지 필명을 써가며 《어린이》지면을 채워야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우리의 어린이 문화·예술이 초보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상태에서 색동회의 조직은 근대 아동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방정환은 각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동화를 구연하거나 부형과 교사를 상대로 어린이문제에 대해 자주 강연했다. 방정환의 이러한  활동은 어린이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했으며, 어린이문화를 꽃피우는 데에 이바지했다. 더욱이 이러한 활동은 각 지방에 소년회가 조직되고 활성화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같은 상황은 《어린이》의 '소년회 소식' 난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가 각지 소년회와 야학당의 소중한 읽을거리였던 것도 소년회의 활성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수원 화성소년회의 최영주나 마산 신화소년회의 이원수, 울산 언양조기회의 신고송 등은 소년회를 통해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고 이후 아동문학가나 아동문학잡지의 편집·발행인으로 활동한다.

    이처럼 《어린이》는 우리 아동문학가들이 태어나서 자란 터전이었으며,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때문에 일제는 점점 확산되는 소년회 조직을 탄압했고, 각 학교 교장들은 학생들을 소년회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당시의 그러한 사정은 이원수의 《5월의 노래》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소년회가 민족운동의 기초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5. 맺음말

    방정환은 어린이문화운동의 선구자이다. 그는 천도교소년회와 어린이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문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어린이》를 발행했다. 또한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소년문제강연회'나 '소년지도자 대회'를 열어 사회적으로 어린이문제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까지 아무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애놈들'을 방정환은 비로소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새롭게 등장시킨 것이다. 방정환 이전에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식했던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천도교의 2대 교주인 해월은 어린이 존중 사상을 밝힌 바 있다. 방정환은 이같은 어린이 존중 사상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켰고, 어린이운동이 어린이의 인격 해방운동이자 감성 해방운동, 나아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는 표어가 상징하듯 민족운동임을 일깨웠다.

    방정환이 펴 나간 어린이운동은 천도교의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런 점에서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한 우리 어린이운동은 든든한 바탕 위에 세워졌다. 방정환 탄생 백 주년을 맞은 지금, 늦었지만 그가 보여준 어린이 사랑과 민족 사랑의 정신을 새롭게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염희경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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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정환'과 방정환

     

    1. '방정환'이라는 이미지

    한국 사람 치고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을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흔히 안데르센을 가리켜 동화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방정환은 '어린이'의 아버지다. 뿐만 아니라 방정환은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첫머리에 놓인다. 이는 우리 아동문학이 좀 늦긴 했어도 매우 튼튼한 바탕에서 출발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어린이를 품에 안은' 방정환의 이미지 때문에 우리 아동문학은 그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을 놓쳐왔다. 민족·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소년운동을 일으키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의 선구자적 면모에 가려서 그의 작품 활동이 매우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린이에게 알맞은 이야기와 노래를 지어주기 위해 벌인 활동을 민족·사회 운동에 종속된 것으로 보아 마치 본격 문학으로서는 미달인 것처럼 평가하는 관점이 우세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정작 그 현실주의적 성격을 무시하고 동심주의라는 말로 치부해버리기 일쑤다.

    여기엔 오해가 적지 않다. 아동문학이 성립하려면 어른에 종속되지 아니한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아동' 혹은 '아동성'(동심)이 새로 발견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동의 순진무구함을 낭만적으로 강조하는 태도가 바로 동심주의인데, 방정환의 그것은 아동문학이 성립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소년 운동과 함께 일제의 엄혹한 탄압 속에서 아동문학을 전개한 방정환의 경우는 식민지 현실과 정직하게 마주하려는 현실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일본의 아동문학 성립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런 관념적인 동심주의와는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이 글은 분단시대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남북한 공히 일그러진 초상을 만드는 데 그친 방정환의 이미지를 그의 사상과 대표 작품을 통해 바로 잡아보려 한다.

    2.방정환 문학의 뿌리

    방정환에 대해서는 찬양이든 비판이든 협소한 일면만이 주로 강조되어 왔다. 방정환은 3·1운동 직후부터 소설을 발표하였고 《백조》 후기동인으로 참여하는 등 초창기 문학운동의 한 구성원이었다. 《백조》파의 주요 문인들이 신경향파 문학 운동을 주도하다가 염군사(焰群社)와 함께 프로문학 단체 카프(KAPF)로 합류해간 사실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방정환이 소속한 개벽사에서 발행한 잡지 《개벽》은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 운동의 주요 기반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방정환의 사상과 활동을 사회주의와 대립하는 좁은 범위의 민족주의에만 가두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방정환, 사랑의 선물, 머리말, 개벽사, 1922)

    이와 같은 방정환의 아동관은 동학과 천도교의 개혁사상에서 싹터 나온 것이다. 동학은 창시자 최제우와 2세 교주 최시형을 잇는 3세 교주 손병희에 와서 천도교로 개칭(1905)된다. '인시천(人是天:최제우), '사인여천'(事人如天:최시형), '인내천'(人乃天:손병희)으로 요약되는 동학과 천도교의 평등사상은 2세 교주 최시형에서부터 '어린이도 한울님'이라는 아동애호사상의 구체적인 표현을 얻고 있다.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전환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농민봉기노선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근대적인 조처들을 수반하면서 이루어진다. 천도교는 아래로부터의 신생활운동과 위로부터의 교육·출판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식민지시대 최대의 항일투쟁인 3·1운동을 주도하고, 이후 1920년대 민족·사회운동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이 과정에서 신구파의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천도교청년회가 신파의 전위대로 되면서 각 부문운동의 핵심을 담당한다. 손병희의 셋째 사위인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일본 유학(1920-23) 당시에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의 동경지회장이자 개벽사의 동경특파원으로 활약했다. 이 때, 식민지 백성의 한 사람이고 개혁운동에 동참한 방정환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천도교가 표방한 평등사상과 지상천국의 이념은 사회주의와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 공산주의자들도 천도교를 중요한 연합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방정환은 국내 문필가로서는 거의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작품을 발표한다. 비밀결사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을 등장시킨 〈유범(流帆)〉(《개벽》 창간호, 1920.6), 종살이를 하면서도 좋은 세상이나 만난 줄 알고 감지덕지하는 길들여진 개를 비판하는 내용의 〈낭견(狼犬)으로부터 가견(家犬)에게―삽사리전〉(《개벽》, 1920.7), 입심 좋은 '불령 파리'가 당대 세태를 강하게 풍자하는 내용의 〈풍자기〉(《개벽》, 1920.12-1921.4) 같은 것들은 이 시기 방정환의 의식을 살펴보기 좋은 작품들이다. 이중에서 〈풍자기〉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 쓴 작품으로, 사회주의 의식을 적극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계급문학의 발전과정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 방정환은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가 유물사관에 입각해서 쓴 글을 〈깨어 가는 길〉(《개벽》, 192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김기진이 국내에 계급문학의 씨를 뿌린 시기보다 많이 앞서는 것이다.

    계급문학의 발흥단계에서 방정환이 차지하는 몫을 짐작할 수 있는 글로, 민중 지향의 문학관을 뚜렷이 드러낸 〈작가로서의 포부〉(《동아일보》, 1922.1.6)라는 글도 주목된다.

    그리하여 일시의 개조나 한때만의 창조가 아니고, 늘 시시각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생(生)―그걸로 하여 우리는 자꾸 참된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 그리고, 나 자신이 민중의 일인인 이상 거짓 없는 진실한 나의 요구는 그것이 많은 민중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아니할 것이며,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 비참히 학대받는 민중의 속에서 소수 사람에게나마 피어 일어나는 절실한 필요의 요구의 발로, 그것에 의하여 창조되는 새 생은, 이윽고 오랜 지상의 속박에서 해방될 날개를 민중에게 주고, 민중은 그 날개를 펴서 참된 생활을 향하여 날게 되는 것이니, 거기에 비로소 인간 생활의 신국면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항상 쉬지 않고 새로 창조되는 신생은 민중과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방정환, 작가로서의 포부, 동아일보, 1922.1.6)

    천도교 사회운동과 개혁사상은 방정환의 모든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본 바탕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문학관과 아동관을 살피고자 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던 《어린이》도 이와 연속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안에서 발전되어 나온 천도교소년회의 창립(1921.5)에 관여하고, 이후로는 전국 각지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소년 단체들의 연합회를 이끌며 소년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다. 이 과정에서 아동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1923.5)가 조직되고, 이를 통해서 아동문예잡지 《어린이》(1923-34)를 편집하는 한편, '어린이날' 행사를 비롯한 동화구연, 동시낭송, 동극공연, 토론회, 연설회, 강연회, 전시회 등 각종 어린이문화운동을 벌여나간다. 한국 아동문학은 바로 이곳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3. 방정환 문학의 성격

    방정환은 단순한 동심주의자인가? 우선 그가 아동문학을 하기로 결심한 직후의 작품들을 가지고 작가 의식의 지향점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외국동화를 번역한 것들과 우리 옛이야기를 재화(再話)한 것들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방정환의 첫 번째 번역 작품은 〈불 켜는 이〉(작가미상,《개벽》 창간호, 1920.8)이고, 두 번째 번역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의〈왕자와 제비〉(《천도교회월보》, 1921.2)이다. 이 두 작품 모두 작가의 민중 지향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들이다.

    《어린이》 창간호(1923.3.20)에는 동학농민전쟁 때 나온 전래 동요 〈파랑새〉를 제일 앞에 싣고 있으니 이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창간호의 산문 작품은 안데르센 동화를 번안한 〈성냥팔이 소녀〉와 우리 옛이야기를 동극(童劇)으로 각색한 〈노래 주머니〉(2호까지 연재)가 차지하고 있다. 2호(1923.4.1)에 이르면 손수 창작을 시험해본 〈순희의 설움〉이 나오고, 3호(1923.4.23)에는 〈영길이의 슬픔〉이 나온다. 이로써 아동문학의 하위장르들이 그의 손으로 하나씩 자리잡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다가서려는 그의 의식이 아울러 드러나고 있다.

    방정환은 동요 운동의 개척기에 명편의 노래를 남긴다.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 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밤에 오동잎이 떨어집니다.

                              (〈귀뚜라미 소리〉 전문, 《어린이》, 1924.10)

    1920년대는 '동요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질 만큼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 작품이 씌어진 훨씬 뒤에까지도 창작동요들은 고작 혀짤배기 유아어를 흉내내면서 단순히 글자 맞추기 놀음을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방정환은 달랐다. 〈귀뚜라미 소리〉는 계절의 바뀜을 알리는 자연현상을 차분한 어조로 붙들어내었다. 추위를 동반하는 겨울이 자연의 생명에게 하나의 시련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정조를 띠고 있다. 이는 동양인의 추이(推移)의 감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값싼 감상주의에서는 벗어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늙은 잠자리〉(《어린이》, 1924.12)에서도 추위나 겨울은 혹독한 시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들 시련 속에 놓인 생명한테 다가서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은 불행한 시대의 공기를 숨쉬고 살아가는 어린 민중한테로 향한 작가의 마음일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방정환의 초기 창작동화 가운데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4월 그믐날 밤〉(《어린이》, 1924.5)이다. 이 작품은 4월 그믐날 밤 풀밭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들이 오월 초하루 새 세상을 여는 소리임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지금과 달리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삼았던 당시 사정을 떠올릴 때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점은 어린이날 행사를 두 번째로 맞이하는 해이다. 이 해의 어린이날 행사가 전국 동시다발로 사나흘간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기록에 비추어, 행사를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가의 포부와 자세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방정환은 이 작품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인칭 서술자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풀밭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환상의 세계 곧 판타지로 처리되었다. 진달래, 개나리, 복사꽃, 할미꽃, 개구리, 참새, 제비, 종달새, 꾀꼬리 따위 토종 동식물들이 힘을 모아 음악회를 준비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나즈막히 전하는 '나'는 어린이와 마음을 나누는 작가 방정환의 모습이고, 천지만물이 약동하는 봄의 이미지는 겨레의 앞날을 밝혀갈 어린이의 이미지다. 이로 보아서 〈4월 그믐날 밤〉은 어린이날과 더불어 새 세상이 열리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가득 스며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방정환은 소년운동의 실천으로서 아동문학을 개척했고, 다른 무엇보다도 어린이들 앞에서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가 전래동화의 형식을 빌어 창작한 작품 가운데 옛이야기의 짜임과 묘미를 잘 살려낸 작품은 〈양초 귀신〉(《어린이》, 1925.8)이다. 이 작품은 근대의 충격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를 해학과 풍자의 맛을 곁들여 재미있게 형상화한 것이다. '양초' 말고 '거울'을 소재로 하는 비슷한 이야기가 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작품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겪는 곤란을 해학과 풍자의 웃음으로 깨우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전래 동화를 살피면, 백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에도 '슬기로운 면'을 다룬 것과 '어리석은 면'을 다룬 것이 나란히 공존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백성에 대한 '애정'의 동일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어리석은 면은 어떻게든 깨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초 귀신〉은 바로 근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어리석음'에 초점을 둔 이야기이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풍자보다 해학의 정서가 더 지배적이다. 그런데 '양초'를 '귀신'이라고 이름 붙인 제목부터가 '근대 비판'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양초는 잘 알고 쓰면 약이요, 모르면 귀신이 되는 것일 테다.

    방정환의 창작동화 가운데 아이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은 〈만년 샤쓰〉(《어린이》, 1927.3)이다. 이 작품은 생기발랄하면서도 속이 깊은 창남이란 아이의 캐릭터가 주목된다. 속옷이 없어 체육시간에 맨살을 드러내고는 '만년샤쓰'를 입었다면서 재치 있게 위기를 모면하려 드는 말썽꾸러기 주인공. 이는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흔해빠진, 동화의 이름으로 수신교양담을 들려주고자 만들어낸 수많은 천사표 주인공들 속에서 단연 빼어나다. 작가는 시대의 중압 때문에 주눅들기 쉬운 식민지 아이들에게 가난하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씩씩한 어린이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 아동문학사상 '최초의 정신적 동시대인'을 창조해냈다. 물론 창남이가 자기 속옷을 이재민에게 벗어주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결말에 이르러 다소 통속적인 교훈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 샤쓰〉는 방정환의 활달한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살아 있는 인물은 줄거리나 주제에서 설사 그 시대의 한계가 나타날지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오랜 생명력을 지닌다. 독자는 선생님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위기를 잘 넘기는 이 '유쾌한 말썽쟁이'에게도 예상을 뒤엎는 뜻밖의 헌신성이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속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속 깊은 긍정의 주인공으로 실감나게 형상화된 창남이의 성격은, 뜻밖의 선행을 자연스러운 결과로 수긍하게끔 이끌어주는 정서의 바탕이 된다. 성격 창조가 지니는 힘은 바로 이런 데에 있다.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의도가 지나쳐 통속적인 결말을 보이는 작품으로 〈금시계〉(《어린이》, 1929.1-2)를 하나 더 살펴볼 수 있다. 농장에서 일하면서 야학교에 다니는 고학생 효남이는 주인집 금시계를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다가 그로부터 벗어나면서 오히려 목장 주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내용이 이러하니 마지막 해피엔딩을 위해서 이야기를 짜 맞춘 혐의가 짙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도둑 누명과 관련한 사건을 탄탄하게 엮어 가는 방정환의 솜씨라든가, "가난이 죄"가 되는 부당한 현실에 작가의 관심이 놓여 있는 점을 놓칠 수 없다. 효남이가 눈물겨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입지전적'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불행한 나라에서 꿋꿋한 의지를 갖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뜻을 가질까? 효남이와 같은 고학생의 성공담에는, '제도와의 화해'라든지 단순히 '근대주의'로 몰고갈 수 없는 곤핍한 시대의 꿈과 희망이 서려 있다. 더욱이 방정환은 누구보다도 제도교육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고 줄기차게 비판한 드문 선각자였다. 이 작품에서 효남이는 자기만큼이나 어렵고 급박한 사정 때문에 금시계를 훔친 수득이를 생각해서 고민 끝에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채 한 가닥 희망이었던 야학조차 포기하려 하지만, 이를 보고 마음이 아파진 수득이가 역시 고민 끝에 주인에게 자백을 하면서 마지막 구원이 이루어진다. 주인의 도움도 야학 급우들이 먼저 나서서 효남이를 도우려 했기에 가능해진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작가의 '브 나로드' 지향과 맥락을 같이 하는 '어린 민중에 대한 격려'의 뜻으로 읽는 것이 옳으리란 점이다. 물론 결말의 구원을 외부 조력자에 의존해서 해결한 것까지 무작정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부당한 계급 현실 때문에 가난한 아이들이 뜻을 펼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단한 노동과 비인간적인 대우였다. 이 비슷한 사례는 소년소설의 일인자로 평가되는 1930년대 현덕(玄德)의 작품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으니, 한국 근대아동문학은 즐거운 해방감을 만끽하게 하는 '피노키오'식 유열담(愉悅談)보다는 고난 극복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꾸오레'식 격려담에서 그 전형을 얻고 있다는 파악이 가능하다.

    방정환은 현실을 자각케 할 방편으로 탐정소설을 개척한 공로도 크다. 방정환은 통속물로 떨어지기 쉬운 탐정소설의 형식을 두고서도 다른 누구보다 옳은 의식으로 작품을 써나갔다.

    탐정소설은 퍽 재미있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과 달라서 어린 사람들에게는 자칫하면 해롭기 쉬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쁜 활동 사진을 보고 나쁜 버릇이 생겨져서 위험하다는 것과 똑같이 자칫하면 탐정소설이 잘못되어 그것을 읽은 어린 사람의 머리가 거칠고 나빠지기 쉬운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 《어린이》에 탐정소설을 내어서 대단히 호평을 받기 시작한 후부터 다른 잡지에도 여러 가지의 탐정소설이 생기게 된 것은 퍽 기쁜 일이나, 가만히 보면 억지로 탐정소설을 만드느라고 나쁜 활동 사진보다도 더 나쁜 탐정소설을 내이는 고로, 그런 것을 읽혀서는 큰일이 나겠다고 염려하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방정환, 신탐정소설-소년사천왕, 어린이, 1929.9)

    방정환의 탐정소설은 장편 《동생을 찾으러》(《어린이》, 1925.1-10) 《칠칠단의 비밀》(《어린이》, 1926.4-12) 《소년 삼태성》(《어린이》, 1929.1) 《소년 사천왕》(《어린이》, 1929.12-1930.12) 등 모두 네 편인데, 이중에서 뒤의 두 편은 사정 때문에 중단되었다. 《동생을 찾으러》와 《칠칠단의 비밀》은 탐정소설이 대개 그러하듯이 아슬아슬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줄거리다. 독자는 계략과 반전이 거듭되는 선과 악의 대결 속에서 손에 땀을 쥐는 팽팽한 긴장감을 맛본다. 그런데 작가는 그저 흥미성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 인신매매 사건과 관련하여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있다. 《동생을 찾으러》에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소년회의 활약상이 나타나고, 《칠칠단의 비밀》에는 중국내 한인협회와의 연계가 나타난다. 물론 탐정소설의 한계상 이들 작품은 우연성의 문제점을 많이 끌어안고 있다. 그러나 방정환의 탐정소설은 그 파급 효과를 경계한 일제당국의 탄압으로 계속해서 발전해갈 수가 없었다.

    '탐정소설의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그것을 이용하여 어린 사람들에게 주는 유익을 더 힘있게 주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주의하여 쓴 것이라야 된다고 나는 언제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전번에 쓰기 시작한 《소년 삼태성》은 그러한 생각으로 전에 썼던 것보다 더 재미 있고 더 유익한 것을 쓰려고 한 것인데 불행히 그 2회의 것이 전부 삭제를 당하여 책에 내지 못하게 된고로 이내 더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고쳐서 써 가지고는 그 본래 목적하던 것을 묘하게 써나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같은 글)

    이처럼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속에 방정환 문학의 본질을 이루는 현실주의가 숨쉬고 있다. 나름대로 한계가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 성격만큼은 아주 뚜렷했다는 사실이다. 방정환 문학은 '잔물(소파:小波)'이라는 그의 호 때문에 일부 오해되기도 하는 일본의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 문학 또는 대정기(大正期) 일본 동심주의 문학의 복제가 아니라, 민족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올바른 응답이었다.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주류는 바로 이곳에서 명예로운 전통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던 것이다.

    4. 방정환과 한국아동문학

    방정환에서 비롯된 20세기의 한국 아동문학은 한마디로 현실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한국은 불구의 근대를 살아야 했고, 바로 그 때문에 한국 아동문학은 출발부터가 다른 나라와 달랐다. 한국 아동문학은 미완의 근대혁명 곧 동학을 잇는 천도교의 개혁사상에 뿌리가 닿아 있으며, 민족·사회운동의 일환이었던 소년운동과 함께 줄기를 뻗었다. 경향과 색채를 불문하고 일제시대의 아동문학은 전국 각지의 소년운동과 굳게 맺어졌다. 한국 아동문학의 출발점이 어른의 도피관념으로서의 퇴행심리와 거의 무관했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아동문학이라고 하면 우선 '무지개 빛 환상'부터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런 동심천사주의의 통념은 교과서나 신춘문예를 주도한 분단시대의 제도권 아동문학이 낳은 것인데도 우리는 이 통념이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기 쉽다. 방정환 시대에 어느 정도 불가피했던 '역사적 동심주의'가 한층 천박하고 타락한 형태를 띠게 된 데에는 바로 방정환의 현실주의 문학정신을 옳게 계승하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다.

    지금까지 나온 유일한 아동문학 통사인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일지사, 1978)는 시대구분에서 해방 이전을 '문화운동시기'로, 해방 이후를 '문학운동시기'로 크게 나누고 있다. 이 구분은 본격 문학으로서의 아동문학은 해방 이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일제시대의 아동문학은 민족·사회운동과 결부되었기 때문에 본격 문학으로서는 미달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순수파에 의한 사회파 배제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재철은 좁게 측량한 '순수' 문학의 이름으로 일제시대 아동문학의 현실주의적 성격을 지우고 해방 후를 한국 아동문학의 새로운 기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한때 북한에서 방정환을 일제의 주구인양 매도했던 것과는 뒤집어진 자리라 할 수 있지만, 이재철의 논리 역시 진실을 은폐하고 통념을 재생산하는 노릇을 할 뿐이다. 분단시대의 냉전논리가 이를 뒷받침하였다. 21세기 통일시대를 바라보며 20세기 한국아동문학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

    아동문학평론가 원종찬 글

    방정환 문학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

    이재복

    요즘 나오는 동화집이나, 달마다 어린이 잡지에 실리는 작품들을 읽어내기란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고통만을 안겨주는 작품들이 언제까지 아동문학 동네에 되풀이 해 나올 것인지 참 안타깝다. 동화나 동시뿐만이 아니고, 아동문학 평론도 읽어내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요즘 나오는 아동문학 관계 글을 읽을 때마다 우리 아동문학은 질적으로 일제시대보다 더 후퇴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 밥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려는 부모나 선생님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자연 아동문학 작품에 대한 수요는 늘어났지만, 출판사마다 좋은 동화집이나, 동시집, 평론집을 내려고 하는데 원고를 구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마지못해 수요가 있으니 책은 찍어내야 하겠기에 외국의 동화책을 주로 번역하여 싣거나, 아니면 좀 수준이 떨어지는 국내작품이라도 책으로 내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 아동문학은 다른 문화영역이나 마찬가지로 점점 외국문학에 종속되기 시작하고, 한편 우리 작가들이 써내는 감동 없는 책들이 쏟아져 나와 결과적으로 우리 아동문학은 겉포장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속은 보잘 것 없는 문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누구나 지금 우리 아동문학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대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대안 가운데 하나를 찾는다면 역시 우리 근대 아동 문학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로 돌아가 처음부터 우리 아동문학이 흘러온 모습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되짚어 보는 일이다. 다시말해 제대로 우리 아동문학사를 점검하고, 뭐가 잘못된 채 지금까지 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좋은 작업들을 해 보려 했는데 왜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는지, 이런 저런 경우들을 찾아내어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너무 앞으로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허둥대며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되밟아 가면서 여기 저기 흘려 놓은 많은 문학유산들을 제대로 거두어 들이는 작업을 해 봐야 할 때라는 것이다.

    방정환은 1899년에 태어났다. 1999년이면 방정환 탄생 100주년이 된다. 아마도 내년에는 방정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여기 저기서 열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또다시 예년에 하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방정환을 영웅화시키는 대형 눈요기 행사만 벌리는 식의 기념식이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만약에 방정환의 영혼이 살아 있다면 그 영혼은 결코 내용은 없고 겉보기식의 행사만 요란한 그런 대형행사에는 즐겨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소박하더라도 방정환의 문학을 오늘 이 자리에 다시 불러내어, 그 방정환 문학 주위에 둘러 앉아, 작품이든 평론이든 같이 읽고 도대체 우리가 무얼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방정환의 영혼은 바로 이런 조금 비좁고 몇 안되는 사람들의 모임이긴 하지만 실제 내용이 있는 모임에 오기를 즐겨할 것이다.

    방정환이 남긴 글 가운데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을 들라면 역시 방정환이 소년운동의 한 부문으로 아동문학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벽지에 자신의 동화관을 발표한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을 들고 싶다.

    이 글은 방정환이 1923년 《개벽》1월호에 발표한 글이다. 우리 세는 나이로 방정환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이다. 우리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은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방정환이 말하는 동화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 글을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 글을 읽을 때마다 감동을 주는 부분이 있다. 다음 구절이다.

    아동의 마음! 참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동 시대의 마음처럼 자유로 날개를 펴는 것도 없고, 또 순결한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연령이 늘어갈수록 그것을 차츰차츰 잃어버리기 시작하고, 그 대신 여러 가지 경험을 갖게 되고, 따라서 여러 가지 복잡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경험과 지식만을 갖는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랴. 경험 그것이 무익한 것이 아니요, 지식이 무익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늘어간다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자랑할 것은 못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경험과 그 지식이 느는 동안에 한편으로 그 순결하고, 그 깨끗한 감정이 소멸되었다 하면 우리는 어쩌랴……. 그 사람은 설사 냉냉한 마르고(枯) 언(凍)지식의 소유자일망정 인생으로서는 역시 타락한 자일 것이다.

    이 스물다섯 살의 열정에 찬 청년은 그의 뒤를 이어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확신에 차고 열정에 넘친 충고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혹은 아동문학 운동은 그 본질과는 다르게 방정환이 말하는 대로 아이들의 가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감수성을 빼앗고, 그 자리에 지식만을 자꾸 강요하여, 결국에는 아이들을 냉냉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으로 만드는 데 만족해 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충고에 이어서 방정환은 우리가 새로 개척하는 아동문학 운동은 이렇게 냉냉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을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천진난만하던 영원한 아동성의 세계로 돌아가 마음의 순결은 비는' 아이들을 만드는 아동문학 운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말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아동성의 세계로 돌아가 마음의 순결을 비는, 아이들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작품으로 그 예를 든다면 어떤 작품을 들 수 있을까. 실제 방정환이 제시한 작품들을 놓고, 우리는 그 작품에 대해서 앞으로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방정환이 쓴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소개해 보자. 그 당시 방정환은 아동문학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의 큰 숙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세 가지의 숙제에 대하여 방정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동화집 몇 권이나, 또 동화가 잡지에 게재된대야 대개 외국동화의 역뿐이고, 우리 동화로의 창작이 보이지 않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이나, 그렇다고 낙심할 것은 없는 것이라.'하고 말    하면서 방정환은 '다른 문학과 같이 동화도 한 때의 수입기는 필연으로 있을 것이고, 또 처음으로 괭이를 잡은 우리는 아직 창작에 급급하느니 보다

    1. 우리 고래 동화를 캐어내고(다시 말해 옛이야기를 잘 찾아내고)
    2. 외국 동화를 수입하여 동화의 세상을 넓혀가고 재료를 풍부하게 하기에 노력하고
    3.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창작동화를 개척해 나가자 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숙제는 방정환이 아동문학 운동을 시작하던 그 당시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우리 아동문학 운동이 앞으로 계속되는 한 언제든지 우리 앞에 문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결국 아동문학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이런 세 가지 방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의 한 부분부분마다 좀더 세부적으로 풀어나가다 보면 상당히 많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이 세 가지 문제는 각자 한 가지씩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가 먼저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우리 동화에 대한 바른 생각이 잡혀 있어야, 외국 동화를 보는 눈도 바르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옛이야기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 역사와 겨레의 숨결이 살아있는 우리만의 독특한 삶의 뿌리, 향내가 나는 창작품들도 생겨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에는 방정환뿐만이 아니라 아동문학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동화관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글들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다. 정홍교가 1926년 매일신보 4월 25일 자에 발표한 글에 〈동화의 종류와 의의〉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이재철 씨가 쓴 《한국아동문학연구》(개문사. 1995. 중판. 34쪽)를 보니까 일본인 학자 마쓰무라(松村武雄)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번안 도용하여 발표하였다'는 지적이 있다. 마쓰무라의 원본을 내가 구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글의 어디를 어떻게 그대로 옮겨놓았는지는 확인을 못 하였다. 하여튼 이 글이 정홍교 자신의 생각에 의존한 글인지, 아니면 마쓰무라의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변역글인지는 원문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어느 쪽으로의 글이든지 정홍교는 글을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아동은 활발한 심적 활동자임으로 지나(支那)는 지나적 동화를 선택하여야 할 것이며 미국이나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각각 자국적 동화를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조선인의 처지에 있어서는 조선적 동화를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정홍교는 조선적 동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역시 조선적인 동화란 어떤 동화를 말하는지, 어떤 생각을 담아내고, 어떤 감동을 주는 동화를 말하는지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여전히 궁금하기만 하다. 이 당시 동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선적인 동화에 가까운 한 작품의 예를 들어보였으면 좋겠는데, 실제 글 가운데서는 그런 작품의 예를 들어 놓지는 않았다.

    1920년대 초반에 아동문학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동화가 나갈 방향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많은 글이 있지만 다음 두 글만을 참고로 하였다.

    1. 동화는 그 소년 아동의 정신생활의 일부면이고, 최긴(最緊)한 식물(食物)이다.(방정환)
       -식물은 먹을 거리, 즉 밥이란 뜻
    2. 아동 자신이 동화를 구하는 것은 결코 지식을 구하기 위함도 아니고 거의 본능적인 자연의 요구이다. 생아가 모유를 요구하는 것과 같이 아동은 동화를 요구하는 것이라, 모유가 유아의 생명을 기르는 유일한 식물과 같이 동화는 아동에게 가장 귀중한 정신적 식물인 것이다.(방정환)
      -동화는 아이들의 영혼, 정신을 살찌우는 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3. 화는 영원한 아동성을 잃지 아니한 인류 중의 한 사람인 예술가가 다시 아동의 마음에 돌아와 어느 감격 혹은 현실의 생활을 반성하는 데서 생기는 어느 느낌을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며, 그 감격, 그 반성은 세상 모든 사람의 감격, 반성이 아니면 아니될 것이다. 아니 그 작품에 의하여 누구나 감격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요, 또는 이 작품에 의하여 누구나 다 자기 각자의 생활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방정환)
      -좋은 동화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감격의 세례를 주고, 각자의 생활을 반성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래서 아동문학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아동문학은 어른의 감상까지도 견뎌내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책방에 꽂혀 있는 그 많은 아이들 책들 가운데 정작 어른의 감상까지도 견뎌내서 어른에게까지 '감격의 세례와 생활의 반성을 주는' 책들이 얼마나 될까.
    4. 동화는 그저 재미로만 될 것이 아니라 항상 그 형식과 내용이 아동을 본위로 하기는 하면서도 일반 세인에게 대하여서도 아동의 심리로써 하는 작자의 일종 감격을 넣어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동화라는 것은 우리가 아동에게 읽히기 위하여서 지은 것이 되는 동시에 또 일면으로는 일반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동성에게도 읽히어야 할 것이다.(요면자)
      -방정환의 지적과 같은 의미, 즉 동화는 어른의 감상까지도 견뎌내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걸 요면자도 강조하고 있다.
    5. 근일 우리 나라에서 발표되는 동화를 보건데 어떠한 것은 지력만으로 또 어떠한 것은 도덕을 너무 편중히 하는 견지로써 고찰하였으며 어떠한 것은 아동의 심리 또는 동화라는 그것의 발생 발달의 연구를 등한히 하여 가지고 다만 막연히 동화라는 것을 유희시하는 폐가 없지 아니하다.(요면자)
      -지력만으로 된 동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이들에게 높은 정신을 심어준다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생각을 알게 모르게 써 놓은 동화들을 말할 것이다. 철학동화니 해서 아이들에게 읽히는 동화들을 보면 무슨 말인지 엉뚱하기만 한 경우를 가끔 본다. 일반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쓴 동화들에서도 이런 한계를 많이 볼 수 있다. 도덕을 너무 편중히 한 동화는 바로 교훈동화를 말하는 것이다. 감동은 없고 아이들을 훈화하려고만 하는 이런 동화들은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써 내고 있다. 이런 교훈동화 또는 교육동화는 문학작품으로 동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보통 생활동화라고 하여 나오는 동화들이 그 내용을 보면 대개가 다 그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없고 단지 작가가 아이들에게 훈화하는 도덕적인 충고의 말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생활동화들은 엄밀히 말해서 동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동화라는 것을 유희시하는 예는 명랑동화니, 순정동화니 귀신동화니 해서 얼마든지 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다.  
    6. 극히 가난한 사람이 어찌어찌한 기회로써 크고 큰 부자가 되었다든지 우연한 행운으로써 어떠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러한 것이 가장 위대한 사실이나 되는 듯이 찬미한다. 이러한 장난은 말할 것도 없이 아동의 순수한 맘속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종자를 뿌려두는 것이다.(요면자)
      -오늘날에도 아이들의 마음속에 무서운 종자를 뿌려주는 문학은 잘 살펴보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순수한 문학의 얼굴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잘 살펴보면 아이들의 맘을 병들게 하는 작품은 상당히 많이 있다. 예전에는 아동문학이 일부 전문 작가만의 몫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동문학이 전문작가뿐만이 아니고, 아이들, 학부모, 선생님이 참여하는 시민문학 운동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에 비해서 이런 운동을 바른 방향으로 끌고 나갈, 내용을 채우는 연구는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아동문학 운동이 온 시민이 참여하는 대중문예 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과정에서도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나갈 위험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동문학 운동 단체나, 독서운동 단체들이 상업적인 단체들과 결탁하여 아동문학 운동이 건전한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상품의 대상으로만 더 조직화되어 가는 위험성도 나타나고 있다. 점점 확대되고 있는 아동문학 운동에 대하여 새로운 점검이 필요한 시기이다. 오늘의 아동문학 운동이 잘못된 문학을 아이들에게 구조적으로 퍼뜨리며 주입시키는 그런 유통구조를 재생산하는 운동으로 나가서는 참으로 곤란한 것이다.
    7. 조금이라도 동화를 맘두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여 동화의 발생과 유동의 진상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아동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여 아동과 동화와의 생명적 관계를 붙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문예적 고찰에 의하여 예술로서의 동화의 가치를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광의로의 동화의 교육적 효과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화 그것을 교육적 기구로만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이에 말하여 두고자 한다.(요면자)
      -동화는 교육적 기구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아동문학에서 교훈은 당연히 그 내용 속에 들어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교훈이 되는 삶의 알맹이를 어떻게 작품속에 녹여 내느냐가 문제이다. 이원수는 교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혹같은 교훈이다. 교훈이 삶의 이야기로 형상화되지 못하여, 교훈만 덩그러니 이야기의 중심에 드러나 있는 동화를 혹같은 교훈이라 말한 것이다. 또 하나는 피같은 교훈이 있다고 말한다. 교훈이 그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가 감동을 통해 가슴에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교훈을 말한다. 주로 교훈동화는 가슴에 호소하기보다는 어린이들의 머리(이성)에 호소한다. 요즘 나오는 동화들을 보면 밤에 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서 필요한 동화라든지,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든지, 너무 덜렁대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든지 하여서 자꾸만 어떤 기능적인 목적을 위해 쓰이는 일종의 예화 자료를 문학작품으로 동화와 혼동하여 쓰는 경우가 있다. 이런 예화 자료들은 동화는 아닌 것이다. 나는 이런 동화를 '잔소리 동화'라고 부르고 싶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는 필요하듯이, 문학 이전에 도덕시간에 이런 '잔소리 동화'는 하나의 예화 자료로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잔소리 동화'를 문학작품으로 동화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지금까지 방정환과 요면자의 글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이야기를 자꾸만 넓혀가기 보다는 좀 좁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보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보자.

    방정환은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우리 창작동화가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우선 외국의 동화를 수입해 오는 수입정책에라도 의존해서 우리 동화의 세계를 넓혀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이론적인 이야기는 앞에서 어느 정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방정환이 말하는 것처럼 초기 아동문학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우리 동화 세계를 넓히기 위하여 외국에서 수입해 온 동화들은 과연 얼마나 감동적인 동화들이었는지, 얼마나 조선 아이들의 정서에 맞는 동화들이었는지, 작품을 놓고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좋겠다. 여러 사람들이 외국의 동화를 번안하여 들려주었지만 역시 일제시대 당시 가장 먼저 아동문학밭을 개간하기 위하여 삽을 들었던 방정환이 그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해 놓은 수입동화들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방정환이 소년운동을 벌이면서 번안한 외국동화들은 여러 편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편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방정환이 번안한 서양동화들 가운데, 특히 안데르센의 〈천사〉라는 제목의 동화가 관심을 끈다. 우리는 이 동화를 통해서 방정환의 동화관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방정환은 동아일보 1923년 1월 3일자에 안데르센의 〈천사〉라는 동화를 번안하였다. 1923년 1월이면 방정환이 한창 《어린이》잡지를 창간하려고 이런 저런 일로 분주하게 뛰어다닐 때이다. 그러니 방정환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동문학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방정환은 동아일보에 안데르센의 〈천사〉를 번안하여 실었다.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평론을 개벽지에 실은 것도 1923년 1월이었다. 이때 방정환은 동아일보의 청탁을 받고 아마 여러 편의 동화들 가운데 무슨 동화를 번안하여 실을까 고민했을 것이며 한참 고민 끝에 이왕이면 〈천사〉라는 동화를 싣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방정환의 뒤를 이어 아동문학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방정환이 왜 하필이면 1923년 아동문학운동을 한창 새롭게 시작하는 그 마당에 안데르센의 〈천사〉를 번안하였을까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선 방정환이 동아일보에 번안하여 실은 〈천사〉라는 동화를 소개하겠다.   

    [착한 아헤가 죽으면 천사가 날러와서 그 조고마한 죽은 몸을 두팔로 안고 커다랗고 하얀 날개를 펴면서 아헤가 좋아하며 동리의 위를 훌훌 날러 넘어가면서 그러면서 한 아름이나 되도록 꽃을 따서 안고 갑니다. 천사가 그 꽃을 하느님께 가지고 가면 그 꽃은 땅 위에 있을 때보다도 훌륭하게 더고와집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꽃을 받아 안으시고 그 중에 제일 좋은 꽃에 입을 맞추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꽃은 소리를 치며 깃겁게 노래를 부릅니다.
    어느새 천사는 죽은 아헤를 하늘로 데리고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헤는 끝까지 어렴풋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듣고 하는 동안에 천사와 아헤는 어느 틈에 아헤가 땅 위에서 늘 놀던 동리의 위를 넘어 지나서 아름다운 꽃이 피여 어우러진 꽃밭에 벌써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천사는
    [어느 꽃을 꺽어다가 하늘에 갖다 심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헤는 고개를 들어보니까 그릇 앞에는 여태까지 꽃나무 틈에 한 조고맣고 가느다란 장미꽃이 피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장난을 하였는지 반쯤 핀 봉오리 달린 가지는 모두 꺾어져서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헤는 퍽 측은해 하는 듯이 슬퍼하는 얼굴로
    [에그 가엾어라. 이런 꽃도 하늘로 가져가면 잘 피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잠자코 그 장미꽃나무를 뽑아들더니
    [아아 착한 아헤!]하고 아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헤는 그래도 꿈꾸는 듯이 사랑스러운 두 눈을 반쯤 가슴프레하게 뜨고 있었습니다.
    [자아 인제는 다른 꽃도 어서 땁시다]하고 둘이는 한아름이나 되도록 꽃을 많이 땃는데 그 중에는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금잔초와 할미꽃도 정성스럽게 뽑아내였습니다.
    [그만하면 훌륭하니 그만해 가지고 어서 가지요]
    하고 아헤가 말하니까 천사도 그 말을 듣고 곧 일어섰습니다.
    어느 틈에 벌써 밤이 깊어서 더 할 수 없게 사방이 고요하였으므로 둘이는 그냥 그길로 그 동리의 좁다란 골목으로 날러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그 동리에는 ㅇㅇㅇ이 있었든고로 그 거리에는 지저분한 북데기와 ㅇㅇ여진 그릇이 여기저기 내어진체 ㅇㅇㅇ있었습니다.
    천사는 그 중에서 화초분 깨여진 조각과 맑은 흙덩이 몇 ㅇ이 한 무더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라고 손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흙덩이는 화초분에서 굴러나온 것인데 화초나무의 뿌리로 하여 엉기어 있기는 하지만 꽃나무가 마른 까닭으로 길거리에 내어팽겨친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가지고 가십시다. 응? 그 까닭은 내 가지고 가면서 이야기해 볼 것이니……."
    하고 천사는 그것을 거두어 모아가지고 다시 날개를 훨훨 펴면서 날러가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그 좁다란 동리의 굴속같이 가난한 집에 한 ㅇ살난 아헤가 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그 아헤는 세상에 다니면서부터 항상 병으로 하여 줄곳 누어 앓고만 있었으므로 병이 저윽이 낫을 때에도 지팽이를 짚고 방속에서 두 서너번 왔다갔다 하기도 간신히 하는 터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굴속같은 오막살이 속에서 거의 해를 ㅇㅇ 이고 지냈습니다. 여름이 되면 잠깐 동안은 이 굴속 집에도 간신히 한 반시간을 볕이 들어비치는데 그럴 때에는 그 불쌍한 아헤는 병석에 누운 채로 오래간만에 햇볕을 쪼이면서 가늘어가는 손을 앙상하게 얼굴 위까지 가저다가 햇볕에 비추어서 그 손의 살속에 겨우 조금 남아있는 피가 붉게 비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쌍한 신세였는고로 바깥 세상의 산이 어떻고 바다가 어떠한 것도 도무지 알 길 없고 오직 한번 이웃집 아헤가 느티나무 가지 하나를 꺽어다 주었으므로 나무잎 하나 수풀빛이 파란 것인 줄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후로는 그 이웃집 아헤에게 받은 느티나무 가지를 머리 맡에 꽃아놓고 자기가 볕도 쪼이고 새도 울고 하는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고 있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후 얼마 지난 후에 이웃집 아헤가 이번에는 여러가지 화초를 갖다 주었습니다. 그 중에 다만 하나가 뿌리가 달려있었든 고로 아헤는 그것을 분에다 심어 달라하여 늘 드러누워 있는 자리 옆에 들창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심겨진 화초는 점점 크게 자라고 새싹이 돋아서 해마다 꽃이 피었습니다. 그 화초가 그 불쌍한 아헤에게는 넓고 놀기 좋은 마당같이 생각되어 이 세상에 다시 없이 귀중한 것으로 알게 되어서 병든 몸에는 다만 하나뿐인 동무인 그 화초를 물도 뿌리고 햇빛도 쪼여주고 하면서 그것을 위하여 적지 아니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화초의 꿈을 꾸기도 하고 좋은 향긋한 냄새를 맡기도 하면서 그 꽃을 보고는 기뻐하면서 스스로 제 신세를 위로해 가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불쌍한 아헤는 기어코 죽어버렸답니다. 벌써 그 아헤가 하늘 나라에 온 지 일년이나 되는데 그 꽃은 그냥 그대로 그 들창 위에 놓인 채로 내버려 있더니 이윽고는 꽃과 나무가 마르니까 그냥 내여 팽겨치게 되야 땅 위로 굴러 나와서 세어졌습니다. 그것이 아까 우리가 끌어모아 가지고 온 이 불쌍한 꽃뿌리랍니다. 이렇게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임금님의 정원에 놓여있는 훌륭한 화초보다는 훨씬 더 아헤를 위로해 주고 있었답니다."
    날러가면서 천사의 이 불쌍한 이야기를 듣고 그 품에 안겨 있던 아헤는 천사에게 "어떻게 그 전말을 샅샅이 자세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는 곧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자세 알기만 해요. 그때의 그 병든 불쌍한 아헤는 실상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나랍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이 꽃을 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안겼든 아헤는 눈을 번쩍 뜨고 그 천사의 어여쁘고도 부드러운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습니다.
    마침 그 때 두 사람은 벌써 찬란한 하늘나라에 당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겨온 죽은 아헤를 받아안고 다른 천사들과 같이 잔등 위에 희고 부드러운 큰 날개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천사가 가져온 꽃을 받아서 가슴에 안고 꺽어진 장미꽃과 마른 꽃뿌리와 다른 모든 꽃 위에 입을 맞추어 주시니까 꽃은 모두 일시에 기꺼운 소리를 치고 하나님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래소리는 어느 때까지든 유창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천사가 된 아헤의 소리도 말렀던 화초의 소리도 그 속에섞여 있었습니다.(안더-슨 집에서 역)

    방정환은 왜 안데르센의 〈천사〉를 그 당시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려 했을까. 〈천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방정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에 등장하는 자연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뭔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바로 일제시대 우리 어린이들, 우리 빼앗긴 자연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방정환은 이런 〈천사〉같은 동화를 통해서 이렇게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뭔가 구원의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끝모를 어둠속에 내던져저서 어찌할 수 없이 해체된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그 고통의 어둠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방정환은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동문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 다시말해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안데르센의 〈천사〉는 어린 아이들에게 한 번쯤 읽어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사〉라는 동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아울러, 역시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고통받던 아이들이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 구원을 받는 이런 구조를 옛이야기에서는 '감천부활구조'라고 한다. 하늘이 감동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준다는 것이다.(《한국설화연구》. 최운식. 집문당.1991. 230쪽)

    옛이야기나, 창작동화나 그 문학이 갖고 있는 본질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아이들에게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문학이 되어야 하는 건 아동문학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무인데, 그 부활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옛이야기 형식에서 자주 보이는 감천부활구조가 있을 것이요,또 하나는 창작동화에서 보이는 뭔가 납득할만한 인과관계를 갖고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부활구조가 있을 것이다.

    감동을 주는 창작동화는 〈천사〉에서 보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식의 조금은 종교에서 따온 듯한 도식적인 관념에 의존하기 보다는 삶의 현장 안에서 그 목숨이 서로 부대끼며 이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승화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부활의 정신을 아이들에게 감동깊게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라면 이원수의 〈루루와 라일락〉이라든가, 〈쑥〉, 그리고 권정생의 〈강아지똥〉이나, 윤기현의 〈서울로 간 허수아비〉같은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방정환은 1931년에 세상을 떠났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아깝다. 그래서 방정환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될 것이다. 방정환이 소년운동을 시작하면서 이런 〈천사〉를 번안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려 한 것을 보면 우리에게 영원히 청년으로 기억되는 방정환의 그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방정환이야 말로 그 당시 누구보다도 난쟁이로 상징될 수 있는 그 어렵고 힘든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자기 온 몸을 던진 방정환은 결코 자기 스스로 영웅이 되려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정환은 영원히 낮은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존재하려한 그야말로 어린 난쟁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로 존재하려 한 방정환을 뒤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그 영웅의 그늘 안에 안주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방정환은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되며, 그 자신 영원히 어린이로 부활하여 자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 생명을 이어가는 열린 존재인 것이다.

    방정환이 그 당시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얼마나 겸손하게 수용하였는 지는 한정동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소금쟁이〉란 동요가 일본사람의 작품을 번안한 번안동요인지, 아니면 창작동요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그 당시 동아일보 문단시비란(1926.9.23 이후)에 실렸던 소금쟁이 논쟁만 봐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엉뚱하게 소금쟁이 논쟁에서 표절시비에 말려들게 되었는데, 그때 방정환이 보인 태도를 봐서도 충분히 알 수는 것이다.

    사제는 먹히는 존재'라는 말이 있는데, 어찌 종교의 길을 걷는 사제들분일까. 방정환이야말로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 완전히 먹힌 존재였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부활한 생명의 존재인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말을 했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쫓기듯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조금 멈추고,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도 방정환의 삶과 문학속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방정환은 그 자신 스스로 어린이의 삶과 문학을 위해 먹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 사람이니, 방정환이 어린이의 삶에 던진 그 열정, 그리고 그 열정을 바탕으로 해서 벌였던 여러 가지 운동의 결과들을 하나 하나 곱씹어 먹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우리들 가슴에도 들어와 하나의 씨앗이 되어 꽃피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요즘 같이 우리 아동문학운동이 겉보기에는 상당히 화려하고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같은데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속이 비어있는 허전한 상황에서 새삼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그립고 소중하게 생각된다.

    방정환이 번안하였던 외국동화에 대하여 이 밖에도 여러 작품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라는 작품 하나만을 살펴보았는데 방정환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편집자의 부탁을 받고 한 번을 쓰기로 하였는데, 두서 없이 이야기를 하다 두 달이나 쓰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자리를 내가 빼앗은 것 같아 여간 죄송한게 아니다.

     

    // 아동문학평론가 이재복 글

     

     

     

    망우리 하면 공동묘지를 떠올린다. 공원묘지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공동묘지는 웬지 오래 머물고 싶다거나 일부러 지나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망우리 공동묘지는 좀 다르다. 특히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1899∼1931)이 묻혀 있는 망우동 산57-1번지일대는 공동묘지 http://cafe.daum.net/niegroup라는 느낌보다는 멀리 굽이쳐 흘러가는 한강과 그 주변에 펼쳐진 강변의 여러 경관이 그림처럼 바라보이는 전망대라는 느낌이 강하다.

    해발 281m의 이 망우산 일대에는 소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등 삼림욕에 좋은 다양한 수목이 가득한 데다 초롱꽃, 구절초, 참나물, 곰취, 한라구절초 등 각종 `야생초'들이 이곳저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어 29600여 기의 분묘가 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의문이 갈 정도이다.

    5.2㎞의 긴 능선을 따라 이어진 순환로는 온종일 산책객들로 붐빈다. 길가에 세워진 연보비도 읽어 보고 가끔씩 만나는 약수터에서 물도 마시며 천천히 걷다보면 벌써 몇 번째 이 산을 돌고 있는 걷기운동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 산의 정상에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의 묘가 있다. 묘지 입구 길가의 돌에는 `어린이 날의 약속' 중에서 따온 한 구절의 글이 새겨져 있다.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 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살펴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돌에는 방정환 선생을 아동문학가라는 소개와 함께 문화운동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1899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지금의 당주동에서 방경수 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방정환은 1913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업 학교에 진학을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19년 3월 1일 3.1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선언문을 돌리다 일본 경찰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되자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1923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과 뜻을 모아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5월 1일을 첫 어린이 날로 정했다.

    귀뚜라미 귀뜨르르/가느단 소리/달님도 추워서/파랗습니다.//울밑에 과꽃이/네 밤만 자면/눈 오는 겨울이/찾아온다고//귀뚜라미 귀뜨르르/가느단 소리/달밤에 오동잎이/떨어집니다.
    `귀뚜라미' 전문

    귀뚜라미 소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찾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이 쓸쓸하다. 달님도 추워서 파랗고 오동잎도 떨어지는 가을 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한데, 귀뜨르르 귀뜨르르 귀뚜라미 소리만 들리는 밤을 방정환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냈을 것이다.

    http://cafe.daum.net/niegroup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 청년구락부, 소년운동협의회 등을 조직하고 어린이 운동에 전념하던 그는 동시, 동요, 동화, 동극을 직접 지어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1923)에 발표하고 〈신청년(新靑年)〉 〈신여성(新女性)〉 〈학생(學生)〉 등의 잡지를 편집, 발간하여 문화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1년 7월 23일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3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30년 40년 뒤진 옛사람이
    30년 40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맑은대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약관 3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어린이 문학의 대표 작가로서 소년 운동가로서 어린이 입장에서 어린이를 위해 온 힘을 다한 소파 방정환의 묘는 찾는 이들이 많다.
    서예가 정주상의 글씨로 새겨진 묘비 뒷면에는 1983년 어린이날 이재철이 방정환 선생의 업적을 기려 지은 비문이 빼곡이 씌어 있다. 그리고 묘지의 봉분은 흙과 잔디 대신 가족들이 돌로 조각한 기념물이 설치돼 있는데 `동심여선(童心如仙)'이란 글로 소파 선생의
    인품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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