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스크롤의 압박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재미가 있으므로 이 부분을 좀 알아 두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철저히 고증해서 말도 안 되는 픽션을 만드는 주의입니다.
< * 전체적인 내용은 픽션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순 거짓말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보시기 편하게 연도는 서력으로 표기했습니다.>
국어사전에 환생과 재생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했다.
환:생(幻生)명사. 형상을 바꾸어서 다시 태어남. 환생(還生). reincarnation.
환생(還生)명사. ① 되살아 남. revival. ② 다시 태어남. 환생(幻生).
재생(再生)명사. ① 죽게 되었다가 되살아남. resuscitation [さいせん]. ② <민> 사후에 흔히 다른 육체 속에서 다시 생활을 시작함. reincarnation. ③ 신앙에 들어가 새 생활을 시작함. rebirth.
기원 전 600년 경에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이 재위하고 있을 때에 일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스모모스메라기(李皇)가문의 당주(堂主)로서 천황(天皇)의 그림자 집안인 신황(神皇, 진노)가문의 초대 당주로 태어났다.
신황의 역할은 겉으로는 천황을 보필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800만의 고대신들을 모시는 신사(神社, 진쟈)들의 수장이지만 실제로는 천황의 후견역할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황은 800만 고대신들을 모심은 물론 일본 신화상의 최초의 신도 모시고 있었다.
즉 신도(神道, 신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소라카미(天神)로서 가문이 몰락하거나 일이 많을 무렵에 재생(再生, 다시 태어남)하곤했다.
그리고 500년 후인 일본의 제 11대 천황인 스이닌 천황 때에는 천황 스스로가 소라카미에게 신황의 자리를 내어 줌으로서 실질적으로 천황의 종교적인 후견인이 되었다.
또 다시 500년 후인 서기 500년에는 소라카미에게 신황으로서 그리고 음양도(陰陽道)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큰 일을 해내게 된다.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 약 500년 단위로 큰 일이 발생하는데, 이 때에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직하형지진으로 지진해일이 생겨 그 영향이 일본을 넘어 중국에까지 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신황 소라카미는 태평양을 향해 자신의 심장을 찔러 흘러 나온 피를 신에게 바치고 또한 그 피로 바다에 결계를 만들어 그 많은 바닷물을 북극과 남극으로 향하게 했다.
그래서 일본은 물론 중국까지 보호 될 수 있었다.
이 때에 제 25대 천황인 부레츠 천황은 신황 소라카미에게 일본신국(日本神國)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삼고 당시의 도읍보다 더 큰 땅을 내주었다.
이 곳이 바로 신경(神京,신쿄)으로서 지금의 동경(東京,도쿄)와 경도(京都, 교토) 사이에 있는 곳이다.
신쿄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주술적인 결계(結界)로서 좁게는 일본에서 넓게는 동북아시아를 지켜내는 역할을 했다.
그런 이 곳을 본따 제 50대 천황인 간무 천황은 평안경(平安京, 헤이안쿄)을 건립하게 된다.
간무 천황때에 외척의 간섭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도읍을 나가오카쿄로 옮기기는 했으나 권력 다툼의 중심에 있었던 사와라 친왕의 무고한 희생이 원한이 되어 황실을 위협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방도를 강구하던 중에 신황 소라카미와 제 40대 천황인 텐무 천황때에 세워진 음양도를 연구하는 음양료(陰陽寮, 온묘료)의 음양사(陰陽師, 온묘지)들이 상의하여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던 것인데, 이 도읍이 바로 지금의 교토인 헤이안쿄인 것이다.
이 헤이안쿄는 동청룡(東靑龍), 서백호(西白虎), 남주작(南朱雀),북현무(北玄武)의 사신상응의 원리에 따라 계획된 도읍으로서 사와라 친왕의 저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후 921년 저주의 도읍인 헤이안쿄를 정리했던 헤이안시대의 대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가 태어났다.
세이메이는 아버지인 대선대부(大膳大夫) 익재(益材)에게서 태어 났으나 어머니는 여우였다고 곤쟈쿠이야기집에 전한다.
그리고 세이메이 집안은 원래 황실과 가까운 집안이었는데 이유는 제 8대 천황인 고겐(孝元, 효원) 천황이 바로 세이메이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 천황이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 천조대신)의 지위를 물려 받았다고 한다면 세이메이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능력을 물려 받았다고 할 정도로 陰陽術(음양술)과 천문도(天文道)에 밝았다.
그런 능력을 스승인 가모노 타다유키(賀茂忠行)는 세이메이가 어릴 때부터 알아 보고 자신의 능력을 병에 있는 물을 옮겨 담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전수했다고 한다.
또 세이메이는 훗날 제 65대 천황인 카잔(花山, 화산) 천황이 제 66대 천황인 이치죠(一条, 일조) 천황에게 양위할 것까지 알았다고 하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에 자신의 자녀들도 아버지를 본 받아 음양사의 길을 가게 되는데 아버지를 잘 둔 덕에 후손들이 음양두(陰陽頭,온묘노카미)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세이메이를 헤이안의 수호자라고까지 칭하였으나 1005년 9월 26일에 서거함으로 신이 되었다.
또한 세이메이는 살아 있을 때에 종오위하(從五位下)였던 음양두보다 높은 종사위하(從四位下)의 서열에 올라 있었다.
또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918년 혹은 922년에 아베노 세이메이를 도운 미나모토노 히로마사(源博雅)가 태어났다.
히로마사 또한 세이메이처럼 황실의 후손이나 세이메이와 다른 점은 히로마사가 제 60대 천황인 다이고(醍醐) 천황의 일황자인 병부경 요시아키라 친왕의 아들로서 당 시대의 천황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거기다 삼위(三位)로서 전상인(殿上人)이었다.
미나모토노 히로마사는 음악에 능하였으며 쵸우케이시(長慶子, 장경자)를 작곡할 정도였다.
게다가 당대의 음양사인 세이메이와 친했는데 이런 아악의 명수인 히로마사도 980년에 서거한다.
이로부터 수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윽고 1966년 4월 5일 광언사(狂言師, 쿄겐시) 노무라 만사이(野村萬齋)가 태어났다.
만사이는 아버지 쿄겐시 만사쿠(万作)에게서 쿄겐을 사사 받았으며, 다방면에서 활약하던 중에 타키타 요지로 감독의 권유로 음양사를 촬영하게 되는데 그 것도 아베노 세이메이 역이었다.
실사체 중에서 가장 아베노 세이메이 역을 잘 소화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 실력을 보여 준 그는 알고 보면 아베노 세이메이의 환생체(還生體)였기 때문이다.
아베노 세이메이도 노무라 만사이도 모두 자신의 일에 최고였으며 당대 최고라고 불린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75년 8월 3일에 이토 히데아키(伊藤英明)가 태어났다.
히데아키도 만사이처럼 다방면으로 활약하던 중에 타키타 요지로 감독의 권유로 음양사를 촬영하게 되는데 세이메이의 친우(親友)인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역을 맡았는데 만사이와 흡사한 호평을 받았다.
그런 그도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의 환생체였으니 2001년에 음양사 1을 촬영하고 2년이라는 시간적인 공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2003년 음양사 2에서 순식간에 서로 호흡을 회복한 것을 보면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후 1983년 1월 12일 (작가의 생일, 진담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등장하고 싶어서 발버둥 친 끝에..)에 신황 소라카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
신황 소라카미는 바로 전에 제 121대 천황인 고메이 천황때에 태어났지만 메이지 천황이 서양 문물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음양료를 폐쇄시켜 1899년 1월 12일에 일본신화의 최초의 신인 천지어중주대신(天之御中主大神,아메노미나카누시노오오카미)의 제례(祭禮)를 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기 전에 장차 스모모스메라기가문의 일본의 당주가 될 스모모스메라기노 진텐(神天)과 스모모스메라기노 진류(神龍)에게 다음 생은 바다 건너의 나라, 그리고 천황의 선조의 나라인 조선(朝鮮)에서 육십갑자(六十甲子)가 끝나는 해의 이 날에 태어나겠노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유언대로 1983년 계해년 1월 12일 천황과 깊은 관련이 있는 백제의 땅인 전라도에서 소라카미가 태어나게 되는데, 이상하게 태어났다.
성기가 없고, 머리와 피부는 백옥같이 희며, 눈동자는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부모들은 여자라고 신고하게 되었는데 이미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용모로 태어난 것은 1500년전의 지진해일을 막고나서 크게 앓은 탓으로 색소유전자와 성유전자가 사라지게 되어 이러한 증상이 재생을 해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번에 각성을 하는데 다른 재생 때 보다도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소라카미는 8세가 되면 당주가 되고 15세에 성인식을 치르며 18세에 본격적으로 총당주 겸 신황으로서 활약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번에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 각성이 늦어져 12세 무렵에 겨우 각성을 시작해 22세가 되는 2004년에야 총당주 겸 신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생존해 있던 진텐과 진류는 소라카미를 찾았는데 소라카미가 이미 20세가 넘어 버린 시점에서 찾게 되었다.
그리고 소라카미가 태어나고 살아온 생가는 신궁(神宮)으로 승격되어 한국의 유일한 신사(神社)가 되었다.
그런데 소라카미는 2002, 3년 무렵에 우연히 노무라 만사이가 주연한 영화 음양사를 보게 되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는 제 122대 천황인 메이지 천황이 폐쇄한 음양료를 재건하기로 마음을 먹고 제 25대 천황인 부레츠 천황으로부터 받은 신쿄에서 재건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음양료를 완성하여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 때는 2004년 정월부터 였다.
음양료를 재건하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헤이안 시대의 관직들을 토대로 음양조정을 만들어 음양사의 나라를 만들기로 하였는데, 공경으로서 정일위인 태음양대신(太陰陽大臣)으로부터 지하로서 소초위하인 직정(直丁)에 이르기까지 30개의 서열과 관직을 만들었다.
그 인사를 행하는데 있어서 노무라 만사이를 정사위하(正四位下)인 음양소참의(陰陽小參議) 겸 음양어사(陰陽御士)로 발탁하였고, 이토 히데아키 또한 같은 서열에 두었다.
소라카미가 노무라 만사이의 팬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전생에 아베노 세이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여서 그렇게 인사를 단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라 만사이가 음양술에 필요한 영력(靈力, 영적 능력)이 없었던 탓에 무한대에 가까운 영력을 가지고 있었던 소라카미는 노무라 만사이에게 영화에서처럼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 천조대신)까지 부를 수 있는 영력을 넘겨 주었다.
그리고 20 만 호의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신쿄에 한 정(町, 1정은 180m×180m) 규모에 해당하는 저택을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만사이가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신황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일이 있으면 공무(公務)로는 노시(直衣, 직의)차림으로 사무(私務)로는 가리기누(狩衣, 수의)차림으로 와도 된다는 칙허까지 내렸다.
이토 히데아키에게도 같은 배려가 있었다.
거기다 만사이와 히데아키의 둘 만을 위한 저택을 내렸다.
이에 관한 이야기다.
첫댓글 오프닝이 자세하고, 상상이되어 너무 좋습니다♥
이번이 열번째 정주행...^^ 댓글은 남기지 않았지만..^^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