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똘레도.
프라도 미술관
세계 3대 미술관으로 벨라스케스-시녀들, 고야-옷을 입은 마야, 벗은 마야와 블랙 페인팅,
루벤스-파리스의 심판, 삼미신 , 엘그레꼬, 보티첼리의 여자사냥, 등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에서
고야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LAS MENINAS (시녀들)-벨라스케스)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수많은 수수께끼 속에 쌓여 있는 이 그림은 필립페 4세때 그려진 그림으로
벨라스케스의 최고의 작품이다.
그림에 있는 필립페 4세의 딸 마가렛다 공주, 그 옆에 시녀들은 왜 공주의 행동을 제지 하는 것일까?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거대한 켐버스는? 뒤에 걸려진 거울의 인물, 어떻게 화가 작가가 그림 안에 들어 갈 수 있을까?
벽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는 두 개 액자의 그림은 무엇 일까?
많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 이 그림의 해답은????
고야의 그림으로 프라도의 또 하나의 유명한 작품이다.
마야, 그녀는 누구일까? 그리고 왜 동일인이 하나는 옷을 입고 또 하나는
누드로 있는 것일까?
이 그림에 위 아래 그림 중 3가지가 틀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 그림의 비밀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세가지가 무얼까?
고야가 왕실 화가로 있을 때 고도이 백작의 요청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 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고야의 그림에 변화가 일어나며 블랙 페인팅으로 고야의
또 다른 그림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그리스신화의 내용인 파리스의 심판 세명의 여신의 아름다움을 심판하기 위해
제우스는 파리스에게 심판을 맞긴다.
투구가 놓여진 아테나, 아프로디테의 상징인 큐피드, 헤라의 상징인 공작이 그려져 있다
(보쉬-쾌락의 정원)
플랑드르 화가인 보쉬의 레따블로 최초의 슈얼레알리즘 이라고 부르며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상징물과 괴이한 동물의 모습 뾰족한 건축물들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난해한 그림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고 한다
7죄를 상징하는 나태.성욕.물욕.탐욕.시기.식탐.교만을 알지 못하는 여러 형태의동물들로 묘사해 놓았다.
현재의 모습과 죄로 인해 죽음의 세게에서 맞게 될 형벌의 세계를 그려 놓은 쾌락의 정원.
그림 안에 그려진 동물 등 그내용은 무슨 의미일까???
왕궁(PALACIO REAL)
PALACIO REAL (마드리드 왕궁) 이탈리아 최고의 건축가 사바티니에 의해1764년에 완공된 신고전 주의 양식,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유럽 최대의 왕궁.
1085년까지 무어인들의 궁전이었으나 기독교인들의 스페인 통일로 인해 합스브르크에 이어 부르봉 왕가에서 사용하던 왕궁이며 약 2800개의 방은 금실, 은실로 수 놓은 벽, 로꼬꼬의 화려함을 자아낸 가스피리나의 방,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만든 거울의 방, 왕의 침실, 왕실에서 사용하던 황금식기, 250명이 동시에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연회장, 등 당시 스페인 왕실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왕궁이다.
왕실에서 보이는 넓은 공원은 지금은 일반 시만 공원 이지만 왕실 사냥터로 사용 되었던
CASA DE CAMPO(까사 데 깜포) 이다.
현재는 일부 관람이 허용 되지만 왕실의 영빈관으로도 사용된다.
알무대나 대성당 (BASILICA DE ALMUDENA)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바실리카, 현재 마드리드 대주교 3분이 상주하시는 대성당이다.
무어인들 시대 소 성당을 허물고 다시 회교사원을 만들 때 성상이 파기 될 것을 걱정한 스페인 사람들이 숨겨 놓은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상이 발견되었으며 그 성상은 현재 바실리카 내부 제대 위에 모셔져 있으며 사람들의 기도 장소로 사용된다.
또한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이시도르 성인의 유해가 안치 되었던 가죽과 나무로 만들어진 관이 모셔져 있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마드리드 최초의 광장으로 필립페 3세에 의해 1619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합스브루크 왕가의 청사로서 사용되었으며 각종 행사 및 론다의 투우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투우장, 종교재판장으로 사용이 되었다.
정 중앙에는 필립페 3세의 기마상이 있다
투우장 (PLAZA DE TORO)
스페인을 대표하는 투우장. 무대하르 양식의 스페인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슬람 풍의 투우장 부활절 주간이 끝나는 4월 중순부터 가을까지 투우가 진행이 되며 스페인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투우장 광장에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투우사, 1985년 투우에서 목숨을 잃은 JOSE CUBERO의 동상이
있다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광장 시벨레스 광장-스페인의 정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광장중앙에는 대지의 여신 키벨레가 타고 있는 거대한 조각과 하늘 높이 치 솟아오르는 분수가 조화를 이루며 광장 한편에는 우체국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멋진 외관의 중앙우체국 건물이 있다. 파란 잔디 위에 펼쳐진 부에나비스타궁전, 스페인은행 등 마드리드에서 가장 멋진 광장 중에 한 곳이며 이 광장을 중심으로 마드리드 시내 중심인 그랑비아, 솔 광장으로 들어오는 입구 역할을 한다.
알깔라 문(PUERTA DE ALCALA)
레티로 공원 앞에 만들어진 카를로스 3세(1778년)가 마드리드 동문을 만들기 위해
건립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알깔라문은 마드리드 중심부를 시작하는 문이 되었으며 부르봉 왕가의 부엔레띠로에 위치해 있다.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손상되어 문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태양의 관문 (PUERTA DEL SOL)-마드리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광장.
이 곳에서부터 총 6개의 스페인의 고속도로가 출발되는 Km0 지점이다.
마드리드 주정부 시청 앞에 위치해 있으며 이 광장을 중심으로 마드리드 최대의 상점거리 및 마요르 광장, 프라도, 및 그랑비아로 연결되는 마드리드 핵심지역이다.
주변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많은 레스토랑 및 클럽 등이 위치해 있다.
스페인 광장 (PLAZA DE ESPANA)
세르반테스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1930년에 만들어진 스페인 광장.
정면 돈키호테와 산쵸 판사의 동상이 있으며 위로는 레판토 전투에서 팔을 잃은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으며 광장 주변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올리브 나무가 심어져 있다
똘레도- TOLEDO
AD 4세기 비시고토족부터 1641년 까지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의 수도인 똘레도, 처음 로마인들이 3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강물이 똘레도를 감싸며 흐르는 모습을 보고 요새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 TOLETVM(똘레툼)에서 유래가 된 말이다.
로마, 비시고토, 이슬람, 기독교 4대 종교와 문화가 한 도시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으며 특히 716년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문화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중세 도시다.
똘레도 대성당은 1227년 페르난도 3세부터 착공을 시작해 약 264년간에 걸쳐 이사벨라 여왕의 아버지인 산쵸 국왕 때 완공된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을 대표하는 성당이다.
성당의 내부에는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레따블로(제단화 병풍)이 있으며 맞은 편에는 아빌라의 호도 나무로 약 6년간에 걸려 만들어진 성가대석이 있다.
성가대 위에 마련된 2개의 파이프 오르간은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성당 내 조그마한 내실에는
필립페 2세의 궁중화가였던 엘 그레꼬의 그림이 있다.
보물 실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남미에서 가져온 성체 현시대가 전시되어 있으며 천정은 마치 이슬람 궁전인 알함브라를 모방한 기형학적인 모양의 천정이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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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꼬의 대표적인 그림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지금의 산또 또메 성당에 그려져 있는 엘 그레꼬의 유명한 작품이다.
중세 때 현재의 수도원이 제정적인 위기에 놓이자 오르가스라는 백작이 자기의 전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하고 세상을 뜨게 된다. 훗날 이러한 오르가스의 감사와 그를 기억하기 위해 엘 그레꼬에 의해 그려진 그림으로 하단부는 스테파노 성인과
어거스틴 주교가 오르가스를 매장하고 있으며, 중반부는 천사가 오르가스의 영을 안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모습과, 상단부는 천상의 모습으로 예수님, 성모마리아, 세레자 요한이 삼각형 구도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86년에 그려진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연결되는 메너리즘 화가라 불리는 엘 그레꼬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유태인 마을의 시나고가(SINAGOGA)
금지된 장난의 로망스의 발상지 유태인 마을 SINAGOGA는 유태인 남자들만이 들어 갈수 있는 유대교의 교회로써 여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의미로 불러졌던 음악 선율이다.
로마시대부터 지중해를 따라 들어온 유태인들은 716년 이슬람이 스페인을 지배할 때 지금의 지역을 유태인 거주지역으로서
살도록 내어준 지역이다.
TAJO(따호) 강을 중심으로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엘 그레꼬가 왕실에서 나온 후 거주한 곳도 이 곳 유태인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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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알카사르 성
백설공주성의 무대가 된 알카사르 성. 이슬람으로 부터 통일한 스페인을 대표하는 여와 이사벨라.
여왕이 되기까기 약 12년 동안 감금되어 살았으며 무적함대를 이끈 스페인 대제국의 국왕 필립페 2세가
사용했던 왕긍이다.
로마 수도교
200년 전 로마인들이 세고비아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수도교
세고비아 근교의 과달라하라 산맥 16km에서 부터 수로를 이용해 물을 끌어들여 왔으며 근교의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수도교로 약 20.00개의 화강암와 940m의 수도교 길이.높이 약 27m에
만들어 졌다.
최근까지 사용된 로마 유일의 수도교다.
까데드랄/ 마요르 광장
세고비아의 조교자 성당이며 고딕양식의 화려한 외관과 금박을 입힌 화려한 제단화 그림들로
장식이 되어 있다.마요르 광장은 넓다란 뜻으로 각 종 행사 및 투우. 공연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도시의가장 핵심이되는 중앙 광장이다.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5개의 도로가 상가지역. 세고비아 성. 도시외각 등 세고비아 도시
곳곳으로 연결되는 핵심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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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셀로나-BARCEL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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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족 성당[1882 ~현재 진행 중][완성연도 2026년 가우디사후 100주기]
성가족 성당은 ''예수님.마리아. 요셉 ''성 가족을 뜻하고 있습니다
.1882년 착공 하여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으며 이 성당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를 해서 가우디 성당이라 불리고 있는 성당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상징하는 탑 12개와 성당 중앙에 세워질 예수님을 상징하는 170미터의 탑,
4복음사가의 탑 등 총 18개의 탑을 세울 계획이다.
동쪽은 탄생 서쪽은 수난 남쪽은 영광 북쪽은 성단 이렇게 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가족 성당은 처음1882년 바르셀로나 유명한 건축가 프란시스코 빌랴르가 진행을 했다.
하지만 내부 잦은 마찰로 인하여 더 이상 그 에게 성당 건축을 중단하게 되고 구엘의 요청으로
가우디가 지금의 성 가족 성당을 계획하게 된다.
이후 몇 장의 설계도와 수많은 모형으로 계속해서 진행을 하던 가우디는 43년 동안 진행하던 1926년
불후의 교통 사고에 의해 사망을 한다.[1926년 6월9일 ]
구엘 공원 [구엘 소유에 땅 전원주택지 [1900 ~ 1914 ][유네스코지정]
바르셀로나 동쪽 끝 언덕에 쓸모 없고 사람이 살수 없는 땅, 이곳은 많은 사람이 이미 포기를 한
땅으로 알려져 있는 곳.
바르셀로나 계획구간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물도 부족했지만 구엘은 이곳을 15헥타를 구입한다.
이곳은 바르셀로나 항구가 너무 잘 보이는 장소이고 구엘이 나이를 들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낼
최적에 장소라 믿었기에 이 작은 언덕에 자신과 같은 부유층의 사람들이 지낼 수 있는 마을을 계획한다.
가우디가 이 곳을 설계하며 부족한 물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방법과 버려진 타일을 이용해 만든
공원의 의자, 배수로, 작은 규모의 시장 터, 직선을 사용하지 않는 가우디의 특이한 형태의 조형물 등,
마치 정문에 위치한 헨델과 그레텔에 나오는 그림 같은 집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어디까지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식민지사업에 고초를 겪고 있던 구엘 가문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구엘공원 사업에 모든 것을
집중하게 된다.
이곳에 물이 해결이 된다면''''''하지만 높은 고도 지형이 마르고 물의 끌어들이는 어려운 상황이
생기고 또 다른 건축가는 이곳을 가망 없는 땅이라 했지만 안토니오 가우디는 자신이 구상한
지역으로 만들게 된다.
1914년 1차 분양을 시도하지만 세계 1차 대전과 스페인의 경기침체로 결국 분양을 하지 못하고
지금의 바로셀로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며 그들의 자랑이라 생각하는 구엘 공원으로 남게 된다.
까사밀라 [1906 ~1911][유네스코]
구시가와 신시가를 차이를 두자면 구획 정리된 도시를 신 시가라 한다.[익삼플라지역]
까탈로니아 광장을 뒤로하고 빠세이데 그라시아 한 모퉁이에 특이한 형태의 집이 있다.
곡선으로 만들어진 그 어느 것 하나 직선이 없는 건물 커다란 위용에 모두 놀라움을 느끼는 집.
1906년 집주인 밀라는 [당시 부동산 투자자 ] 당시 좋은 당을 물색 이곳에 4개의 건물을
매입한다.
1906년 밀라는 결혼을 하고 그의 부인 로사리오에게 선물 하기 위해 가우디에게 부탁을 한다. 가우디는 이 건물의 형태를 성과 바다의 이미지를 살려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한다.
건물의 베란다의 철은 마치바다의 해조류를 연상하게 하고 건물의 돌은 하나하나 곡선으로 절단을 했다.
이 건물은 두 길을 끼고 있는 코너 자리이다.[건물 주소가 2개 거리로 나눠 쓰여진다 ]
건물을 보면 전체 6층 건물이지만 옥탑 방까지 7층을 만들고 옥상에 거대한 굴뚝까지 만들어 건물의 환기를 완벽하게 시켰음을 알 수 있다.
바르셀로나는 식민지 문제를 1898년 끝으로 어려움이 있었고 그 어려움을 서민 몫으로 돌리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였다.
종교는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지 않고 잘사는 사람 편 이라는 말들이 흘러나왔고'''''없는 사람은 종교와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1909년 결국 시민들에 일어난 시민 반란과 노동자들과 지속되는 분쟁 및 임금문제로 공사가 완전히 중단이 된다
지금의 까사밀라는 그 이후에 완공이 되지만 가우디가 설계한 데로 만들어지게 된다.
현재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까사밀라는 외관 아름다움과 함께 가우디의 독특한 직선이 없는 곡선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구엘 저택
1886년 구엘 가문이 안토니오 가우디에게 의뢰한 구엘 가문에 연회 피로연장을 만들게 된다.
가우디 나이 34세 구엘나이 40세 구엘가문의 사람으로 인정된 뒤 첫 작품으로 기록 된다.
정문에 철조 입구는 2개에 쌍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선에 처리가 훌륭하게 처리가 되었고
가문휘장은[구][엘] 이라는 명칭과 철조 단조가 집을 쉽게 보지 못할 만큼 위용 있게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로 들어가는 곡선 길이 보이고 이곳은 말의 마구간으로 쓰였다.
1936년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건물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이 되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천정 전체를 목조를 사용한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고 자연채광을 끌어들여 건물의 조명을 밝혔다.
자연채광을 이용 실내까지 끌어들이려는 가우디에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옥상에는 18개의 굴뚝을 이용해 건물의 환기를 시켰다.
이 굴뚝은 타일로 섬세한 처리를 해서 가우디 제자인 '쥬셉 쥬졸에 이해 만들어 졌으며
굴뚝의 장식 부분을 많은 타일로 표현이 이색적인 굴뚝이다.
레알 광장 가로등[가우디작품]
레알광장은 14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수녀원 자리였다.
후대에 관리 소홀로 인하여 파괴된 것을 재건하기 힘든 부분을 새로이 만든 광장이다.
1879년 가우디 20대에 만든 가로등이 있다.
레우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르셀로나에 올라온다.
그리고 아버지 지인의 소개로 푼티 공방에서 일을 배우면서 수습견습생으로 활동을 하던 때
파리에서 가구전시를 준비하고 있던 가우디가 가구를 만들면서 가로등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으로
만든 가로등이다. 날개 있는 투구, 조각된 뱀6개 등 산 조르디 창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까사 바트요[1904 ~1906] 가우디작 [유네스코]
파세이데 그라시아 거리에 유난히 아름다운 집이 있다.
지붕은 비늘 모양, 칼라 있는 곡선지붕, 발코니는 해골 모양 바깥은 빨강 .노랑.초록.파랑 등 다양한 색감으로 장식하고 기둥은 인간의 골격모양, 외관의 흐르는 곡선은 우리에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가사 바트요 좌측은 당시 건축계 2번째 건축가 프지카다 팔치 [까사 아마테르] 그리고 까사 무에라스 그리고 우측은 바로셀로나 건축의 핵심 인물 바로 도미네이크 문타네르 작품 [까사 모레나 ]이다.
당시 문타네르는 카탈로니아 건축 협회 장을 겸직 하고 있었으며 바르셀로나 건축과
학장 이기도 했다.
당시 유행에 미치지 못하는 가우디 까사 바트요는 항상 눈에 가시였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현대에 건물의 표현감각을 일깨워준, 우리에게 건축에 아름다움과 미래 지향적이 표현을 느끼게 한 가우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라나다-GRANADA
알함브라 궁전 (ALHAMBRA)
이슬람 최고의 궁전인 알함브라 9세기 이슬람에 이해 세워지기 시작한 성벽이 그라나다의 시작이 되었으며 나사리아 왕조에 이르러 이슬람의 최대 전성기를 맞이 하면서 1236년부터 약 60년 동안에 만들어진 PALACIO DE NAZARIE의 화려함은 이슬람 최고의 궁전으로 일컬어진다. 알함브라 성벽의 규모는 길이 2km, 너비 900m에 이르며 약 4000 가구가 생활을 했으며 도시 내 시장과 목욕탕 등이 있었으며 성벽에 만들어진 망루의 규모는 당시 기독교 인들이 넘볼 수 없을 정도의 군사력을 배치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궁전 내 화려한 장식과 잔잔히 흐르는 분수대의 물소리는 타레가의 기타음악 중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상케 해준다.. 알함브라 궁전은 알까사르, 카를로세 5세 궁전, 나사리아 궁, 여름정원 4가지로 구성돼 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최초의 그라나다 알까사르에서 바라다 보는 아랍인들의 마을 알바이신, 그리고 집시마을 사크라몬테는 지금도 이슬람이 퇴출당하는 1492년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곳곳에 회교사원을 개조하여 만든 성당들의 종탑들이 카톨릭 정복자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스페인 최초의 궁전으로 이사벨라 여왕의 손자인 카를로스 5세를 위하여 지어진 궁전이며 궁전의 회랑은 스페인 최초의 투우장의 원형이다.
나사리아 궁전(PALACIO DE NAZARIES)
알함브라를 대표하는 궁전으로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이슬람 최대의 궁전인 나사리아 궁을 보기 위해 오고있다. 나사리아 궁은 대사의 방, 사자의 정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궁전내의 장식과 거푸집을 이용하여 종류 석 동굴을 연상해 만든 천정은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돌 가루와, 석고를 혼합하여 만든 벽면의 장식,하렘의 후궁들을 위해 심어진 향수대용으로 사용된 미르또, 그리고 수많은 분수대, 그 당시의 왕의 화려했던 생활과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이사벨라 여왕. 이슬람의 건축과, 미술의 극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궁전이다. 여름정원
그라나다의 더운 여름 왕의 연회장소로 사용 된 여름정원. 물이 부족했던 이슬람 사람들은 궁전 뒤에 위치하고 있는 3200m의 높은 네바다 산맥에서 흐르는 물을 궁전으로 끌어들여 곳곳에 분수대를 만들고 정원을 가꾸는데 사용 하였다. 특히 높게 자란 측백나무는 여름의 태양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기에 지금도 여름정원 주변에는 높게 자란 측백나무들이 궁전과 함께 자라고 있다.
알바이신 (ALBAIZIN)
BAIZA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쫓겨와 살았던 지역이라 해서 알바이신. 이슬람의 전형적인 마을로 좁은 골목과, 골목 내 자리잡은 상점들은 지금도 이슬람권 사람들이 자리잡고 사는 지역이다. 특히 찻집, 자그마한 식당, 선물상점 등에서 당시 사람들의 문화를 엿 볼 수있다. 알함브라 궁전 아래 있는 알바이신의 밤은 지금도 그라나다 사람들에게 값싸고 풍부하며 친구들과 함께 TAPAS를 즐길 수 있는 많은 BAR 등이 자리잡고 있는 그라나다의 밤문화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네르하
푸른 지중해 바다의 해안도시 네르하 지중해의 발코니라 불리는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는 바다의 모습은 스페인을 태양의 나라 라고 부를 만큼 뜨거운 태양과 옥색물빛의 바다가 조화를 이룬다. 스페인 사람들의 최고 여름 휴양지로 알려진 말라가의 작은 해안마을. 도시 주변은 광광객들을 위한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많이 있다.
프리힐리아
지중해 해안도시의 대표적인 백색마을 프리힐리아. 오래 된 집에 태양의 자외선을 반사시켜 집안의 더위를 막고자 페인팅을 한 것이 지금은 지중해 집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작은 골목과 그 사이로 들어서 있는 아기자기한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 흰 벽위에 걸려있는 화분의 아름다운 꽃들은 흰색마을의 묘미를 더해준다.
론다 (RONDA)
SIERRA DE RONDA(론다 산맥) 약 800m에 위치한 이슬람의 작은 도시 론다. 론다는 스페인 최초의 투우장이 만들어진 도시이며 투우장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도시와 기독교인들의 도시로 나누어져 있다. 높은 협곡 사이에 만들어진 도시 론다, 협곡사이의 위험스럽게 만들어진 마을, 높이 99m의 신교(PUENTE NUEVA), 그리고 1808년 나폴레옹의 침략을 피해 이주해온 귀족들의 마을이 이색적이다.
론다는 1491년 이사벨라 여왕에 의해 도시를 탈환하지만, 이슬람의 칼리프가 살았던 도시이며, 지중해 말라가를 통해 안달루시아로 통하는 무역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도시다. 절벽과 협곡사이에서 바라보는 론다의 모습은 절경이다. 세빌리아(SEVILLA) 문명의 도시 세빌리아,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카르멘,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벨라스케스의 와 안드레 세고비아의 고향이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기 위해 출발한 곳, 그리고 세계 3대 성당인 세빌리아의 대성당과 콜럼버스의 유해가 안치된 도시이다. 세빌리아 대성당 (CATEDRAL)
105년의 공사기간으로 1506에 완공된 세빌리아 대성당 그 규모는 총 길이 240M 너비 80M 높이 38M의 규모다. 고딕 양식의 최대규모 성당으로 바티칸이 만들어지기 전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중앙제대에는 금 1톤으로 만들어진 제단 병풍인 레따블로, 그리고 95석의 성가대석이 자리하고 있다. 성가대석 내부에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파이프 오르간이 있으며 지금도 성탄절, 부활절 등 교회행사때 연주하고 있으며 동절기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신부님들의 라틴어 성무일도와 그레고리언 성가로 진행되는 라틴어 미사를 참례 할 수 있다.
(콜럼버스의 유해가 안치된 세빌리아 대성당의 청동관) 1755년 유럽의 최대 재앙이었던 리스본 대 지진이 있었지만 성당 외부에 만들어진 히랄다 탑을 제외하고는 아무 이상이 없이 500년을 현 자리에서 그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회교사원을 부수고 만든 성당이며 외부에는 이슬람의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미라네트, 히랄다 탑이 있다. 현재는 지진의 피해로 인해 높이 97.4m이며 탑의 맨 위에는 청동여인상이 있으며 바람이 불면 풍향을 알려준다 하여 이슬람어로 바람개비 즉 히랄다 이다. 산타 크루즈 마을 (SANTA CRUZ) 세빌리아의 대표적인 지역 SANTA CRUZ, 오페라 돈 호세가 실제 마지막 여자인 이네스와 살았던 집이 있으며, 세빌리아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의 무대가 된 지역이다. 특히 골목마다 심어져 있는 오렌지 나무는 세빌리아를 대표하는 나무이며 집집마다 걸어 놓은 작은 화분들은 안달루시라의 전형적인 집들의 외부 모이다. 스페인 광장 (PLAZA DE ESPANA)
스페인 광장을 대표하는 광장, 1929년 남미의 스페인 점령지 나라들을 위한 세계무역 박람회가 열린 장소이며 세빌리아의 스페인 광장은 박람회의 본관으로 사용된 곳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무대하르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특히 반 원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양 사이드 탑의 높이는 가각 80m 이다. 건물 정면에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54개 도시가 타일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둥 사이의 부조물은 스페인을 빛 낸 위인 54명이 만들어져 있다. |
PORTUGAL
리스본-벨렝지구
16세기 포루투갈의 국왕 마누엘 1세가 당시 포루투갈의 대 항해시대를 맞이한 기념으로 만든
자신의 세례명을 지어 제로니모 수도원을 만들게 되었으며 바다의 모양 및 해초 등 유럽에서는 독특한
미술양식인 마누엘 양식이라는 곡선을 이용한 양식을 이용해 수도원을 만들었으며
수도원 내부에는 포루투갈의 대 서사시인 루이스 까몽이스와 인도 항로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다가마의 유해가 안치되어있다.
신트라
영국시인 바이런이 자신의 시집에 유럽의 에덴이라 불린 숲속도시 신트라.
아랍인들로 부터 만들어진 이 도시는 항해시대의 국왕 마누엘 1세가 별장으로 사용되었 던 왕궁이
있으며 귀족들이 숲속에 아름다운 저택을 짓고 살았으며 특히 신트라 산 정상에 만들어진
뻬내성은 대서양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조망을 갖고 있다.
뻬냐성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무대가 된 성이기도 하다.
파티마
세계 3대 성모님 발현지로 1917년 세명의 꼬마 어린아이. 루시아, 히야친따, 프란시스코에게
발현하신 성지로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카톨릭 성지다.
1917년 9월 마지막 발현때는 태양의 춤이라 불리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파티마를 찾은 수
만명의 신도들이 목격 하였으며 아이들에게 앞으로 해야 할 기도에 대해 알려 주셨다.
기도의 내용은 공산주의 붕괴와 앞으로 다가올 2차 대전의 참상에 대한 기도를 요청하신
메세지가 있으며 죄인들의 회개에 대해서도 기도하라 당부하셨다.
프란시스코와 히야친따는 발현 후 각 1년, 2년 후 스페인 독감 등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루시아는 수녀원에 입회하여 2002년도 선종하셨다.
현재 세 아이의 유해는 성당내부에 안치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