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태어남의 이유
제1부: 선도산(仙桃山)
仙桃山ㆍ1
서쪽으로 길게 여인이 누워 있다.
그 여인의 가랑이에서 내리는
산의 한 모퉁이가 움직인다.
팽팽한 하늘이
다리에 걸려 찢어질 듯 움직이고
아침 햇살 한 자락이
서천 물줄기에 잠기고 있다.
바다를 건너 온 솔개 한 마리가
그 때처럼 편지를 물고
당신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仙桃山ㆍ2
동쪽에서 떠오르는 여명이
산머리에 노을처럼 걸린다
터널을 빠져 나오는
새벽차의 불빛이 유령처럼 흔들리며
먼 바다 쪽으로 떠나가고 있다.
과수원에서 막 익어 가는 능금 한 알이
뉴우턴처럼 땅에 떨어지고
바삐 걸어가는 여인의
펄럭이는 옷고름이
먼 나라의 꿈처럼 멀어져 가고 있다.
仙桃山ㆍ3
서쪽으로 날아가는 산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사라져 가고 있다.
바다 건너 산을 넘어 온
낯선 새 한 마리,
천년토록 전설의 씨앗을 쪼아 먹으며
풀이되고 나무가 되어 산을 지킨다
산의 한가운데 움푹 들어간 음부(陰部)에서는
지금 막 어둠이 풀려 나오고,
죽음처럼 멈춰 선 석상(石像) 하나가
먼 길을 걸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었다.
仙桃山ㆍ4
해가 지는 쪽으로
산의 한 쪽 어깨가 기울고 있다.
별이 먼저 뜨는 선도산 자락에
굵고 또렷한 선이 움직이고,
그대 오지랖에 안기는 밤의 숨소리에
진통처럼 산이 꿈틀거리고
먼 불빛 한 가닥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떠나가서 사라지는 산의 정체가
여인의 성욕처럼 긴 밤을 앓고 있다.
仙桃山ㆍ5
산을 지키는 하늘의 계시(啓示)가
안개처럼 풀어져 가고 있다.
밤의 숨소리가 들리는 하늘 밖의
은하수 한 굽이가 떨어지고 있다.
갑자기 들리는 물소리에 묻혀
산의 한 쪽 계곡이 무너지는 소리,
어느 여인이 꼭대기에 앉아
시원스레 오줌을 누는 꿈을 꾸고 있다.
꿈을 파고 사는 여인네들의
순진무구한 거래가 시작되고
산의 운명은 밤과 함께 숨을 죽인다.
仙桃山ㆍ6
떨어지는 잎새에 적힌
사소(娑蘇)의 편지를 읽고 있다.
날아 앉은 솔개의 발자국이
고이고이 나뭇잎에 찍힌다.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말씀들이
오늘 아침 꽃바람으로 내려오고,
신비스런 말씀으로 온 산천을 덮어
떡갈나무 잎들이 햇빛에 반짝인다
사랑하는 사소야
사랑하는 사소야,
바람에 휘날리는 옷고름 따라
흰 구름 한 점에도 산색(山色)이 어려오고
영롱한 사랑으로 움트는 천년 바람이
그대 사랑 고운 옷깃으로
온 종일 산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仙桃山ㆍ7
비가 내리고 있다.
산 전체가 가랑잎 소리를 내면서
어둠 속으로 짙게 푸르러 가고,
먼 곳에서부터 산의 숨소리가
비 소리처럼 깔려오고 있다.
절간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는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울다가
나뭇잎에 빗물로 떨어지고 있다.
저 쪽 세상을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종소리에 흔들거리고,
와르르 무너지는 어둠에 묻혀
산 전체가 흐느끼며 비가 내린다.
仙桃山ㆍ8
길게 산도(山桃)빛 치맛자락이 내리고 있다.
치마에 잡힌 주름 사이로
계곡의 빛과 그늘이 명암처럼 섞여
발목으로 훑어 내리고 있다.
신선이 먹다 버린 복숭아에 싹이 터서
山桃빛 고운 햇살이 내린다.
봄에 피는 복사꽃 핑크빛 꽃말이
바람에 날려 눈처럼 쌓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온 산천이 메아리로 돌아와
벌겋게 쏟아지는 연서가
솔가지에 걸려 번쩍거리고 있다.
仙桃山ㆍ9
산 오리목 숲 속에 멧새 한 마리가
둥우리를 틀고 알을 품고 있다.
서연산(西鳶山) 신모의 비호를 받아
알에서 깨어 나오는 작은 생명이
솔바람소리로 가득 축복을 받는다
거대한 산의 숨소리에 묻혀
노오란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소리, 산의 소리,
산의 숨소리를 닮아 가고 있다.
늙고 주름진 산신(山神)의 손바닥에
하나의 사랑으로 올라앉아
신비를 꼭 꼭 쪼고 있다.
仙桃山ㆍ10
산기슭으로 강물이 흐른다.
강물의 깊고 푸르름의 사유(思惟)가
산 꽃 되어 산천을 뒤 덥고 있다.
꽃이 지는 산등성이 따라
흩어져 뒹구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
산을 향하여 일제히 기어오르고,
기어오르면서
산의 음성으로 울고 있는 것은
무덤뿐만 아니다. 하늘뿐만 아니다.
무덤은 다시 세월 기슭을 돌아
전설 같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가
역사를 이루고 바람을 만들어
오늘, 이 산이 되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산자락 같은 그리움으로 남아서
먼 날의 기억을 감추고 앉아
사랑처럼 푸르름처럼 먼 날을 노래하고 있다.
기 도ㆍ1
무슨 색깔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의 영원한 꽃말이 되고 싶습니다.
히말라야시다의 장신(長身)의 꼭대기에
당신의 영혼이 내리고 있습니다.
까치 한 마리가 하루를 울고 있는
그 높이만큼이나 계실 영혼의 그림자를 위해
지금은 기도를 생각할 때.
멀리 보이는 산언저리에
조용히 다가서는 구름 한 점이
내 영혼의 깊숙한 뿌리를 흔들며
하늘을 향해 날아갑니다.
저 구름의 깨끗함, 순결한 말씀으로
살아가는 하루의 가지 끝에
노을이 내리면
산울림처럼 와 닿는
사랑이고픈 나의 기도가 있습니다.
까치가 울고 있는 장신의 히말라야시다의
그 높이만큼이나 낮아지는
겸허한 그리움이게 하십시오
내 영원한 사랑이게 하십시오.
기 도ㆍ2
장미 한 송이가 피고 지고
피어서 다시 지고 다시 피듯이
우리들의 사랑도 피고 지고
져서는 다시 피어납니다.
붉은 장미 한 송이가 사랑이고 싶습니다.
단풍 이파리 하나가 사랑이고 싶습니다.
무심하게 놓여 진 돌멩이 하나가
정말 나의 사랑이고 싶습니다.
잔디 위에 놓인 조그만 꽃
그 위에 맺힌 이슬방울이,
무슨 말로도 당신의 꽃말이 될 수 없는
그런 사랑이고 싶습니다.
색깔로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의 영원한 꽃말이 되고 싶습니다.
기 도ㆍ3
3층 유리창 앞에서
성교회의 첨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위로 떠도는 당신의 영혼이
나의 귀와 눈, 눈과 입
콧구멍을 통하여 나의 머리에 쌓입니다.
낙엽이 떨어져 땅에 쌓이듯이
당신의 말씀이 쌓여서 노래가 됩니다.
노래는 또다시 빛나는 약속이 되고
빗방울이 되고 종소리가 되어
높다란 종루(鐘樓)에서부터 내려옵니다.
그것은 종소리가 되어 바람에 날아와서
나의 귀, 나의 눈,
나의 입으로 나의 콧구멍을 통하여 되돌아갑니다.
이것은 나의 사랑의 기도요
이것은 나의 참회의 노래요
이것은 나의 영원한 메시지로
언젠가는 당신께 찾아가는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남을 겁니다.
기 도ㆍ4
소나기가 거쳐 간 뜨락에
맑은 물방울을 바라봅니다.
너무나 깨끗하여
세상에 먼지라곤 없습니다
당신의 얼굴.
내 마음 비추어 이렇게 그려보고
참된 삶이 그렇게 오는 것을
깨닫게 하십시오.
어차피 삶이란 당신의 것
한평생 그렇게
비 온 뒤의 맑은 바람만을
바라보게 하여 주십시오.
잎새에 나부끼는 바람이
나의 고뇌를 씻어 가는
당신의 감미로운 말씀이라면
이렇게 머물게 하십시오.
다시 태어나기(1)
내가 없는 그 해 가을은 황량(荒凉)했다
부모도 형제도, 더구나 가장 친한 친구도
나를 찾는 이 없었다.
그렇게 친한 친구도 이웃도
자꾸 자꾸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의 아들 딸. 사랑하는 아내도
마음에서 퇴색되고 있었다.
잊어버리고 사는 것일까?
다시 태어나는 아침나절의
그 태양은 신비롭고 희망차다.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소리,
너와 나의 긴 대화는 다시 시작되고
나의 시 나의 노래도
새로운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기(2)
풀잎에 머무는 한 점 바람이
추억처럼 가까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태어난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다.
당신은 나를 태어나게 하고
나를 떠나가게 한다.
그것은 고통의 울타리 너머에 걸리는
하늘이, 태양이, 바람이 강물이 있고,
그리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다시
생명을 낳아 이어 가게 된다.
새로운 모습, 새로운 숨결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살아가는 것.
싱그러운 바람이 지나는 들녘으로
풀잎처럼 감격처럼 내가 다가서고 있다.
다시 태어나기(3)
그 해 가을, 시든 잔디에 앉아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병원 깊숙한 현관으로 자꾸 빠져들어
어디론지 어디엔지 가고 있었다.
굴러가는 휠체어 바퀴가
깊은 낭떠러지로 굴러 가다가
어두운 시간 앞에서 꼬리를 감춘다.
가을비에 나타난 무지개 한 쪽 끝이
도시의 빌딩 너머 사라져 가던
그 날 저녁 때,
돌아가는 회랑과 영안실과
휠체어 바퀴가 굴러 떨어지는 어둠 속을
섧게고 눈물겨운 나의 몇 마디 기도는
사연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없단다.
서러운 기억 속으로
나를 이끌고 지나가던 기억의 창문을 닫고
이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다시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기(4)
내가 죽어 찾아갈 곳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문 앞에 서서 서성거릴 때,
누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그 벌판에서 나는 외치고 울먹이고 있었다.
아는 이는 없고 손을 잡아 줄 사람도 없었다.
황막한 들판에 그리스도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이렇게 혼자 외치고 있을 뿐이다.
일어나라, 태어나라,
다시 외치고 일어서는 주위에는
이미 내가 없다. 외로움뿐이다.
외로울지라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어둠의 암실에서 다시 살아나듯이
일어나라, 태어나라, 다시 외치고 일어나라.
제2부: 당신의 계절
서라벌의 노래
붉게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동쪽 토함(吐含)의 누리에 밝아 오면
우리의 역사를 이어 온 이웃들과
사랑으로 넘치는 계림(鷄林)의 닭울음소리,
한줄기 빛이 비롯되는 동방의 기슭에
슬기로운 후예들이 모여 사는 하늘과 땅
상서롭게 깃을 펴는 한 마리 새는
영광의 가지 위에 드높이 날고 있다.
평화와 자유와 사랑으로 날아올라
남산이나 선도산 언저리로 떠오고
다시 찾아오는 한 마리 철새는
여명으로 다가와서 미래의 강을 건너고 있다.
역사의 능선을 밟고 지나온
우리들의 고난의 시대는 멀리
새벽안개 위에 서서히 걷혀 나가고
형산강은 굽이굽이 바다를 찾아 떠난다.
흘러서 떠나가는 이 땅의 하구(河口)는
우리가 만나는 역사의 먼 언저리,
이 아침 종소리처럼 뻗어 나가는
아침 햇살 너머로 솟아오르는 것은
꿈이다, 사랑이다, 영원한 나의 노래다.
당신의 계절에
-병석에 누워
주님, 12월의 거리에는
캐럴이 그 때처럼 들려옵니다.
주님, 참으로 외롭습니다.
어찌하여 홀로 누워있게 하십니까.
이 밤에 밤을 덮는 눈이 내린다 해도
나는 더욱 외로울 겁니다.
못 다한 일들이 아직 남아 있고
당신을 위해 올려야할
나의 기도가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바쁜 계절에 주님,
어찌하여 이토록 외롭게 하십니까
주님, 눈물겹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 모르는 당신의 계절 앞에
이렇게 외롭고 슬픈 눈물일 줄은
그때는 차마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등성이에 올라(1)
나는 산 위에 올라
토함산에 어리우는 햇살을 바라보며
가슴에 넘쳐나는 밝음과 어둠을 갈라
천지 아득한 잠을 깨우고 있었다.
아침마다 이 산정에서 나는
비바람 엮어온 천년의 노래를 생각한다.
백률사(栢栗寺)가 보이는 등성이에서는
아침부터 연기가 하늘에 오르고
금오산(金鰲山)의 희끗희끗한 바윗돌이
세월을 엮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름하여 서라벌, 밝은 들판에
봄이 찾아와서 들끓는 햇살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나는 금잔디가
아지랑이 덮은 언덕으로 내려오고,
마른 억새풀이나 산죽(山竹)이 있는 숲 속으로
새까만 굴뚝새들이
우르르 바람 부는 쪽으로 사라져 가면,
바람 타고 날아오는 날개 죽지마다
보드라운 햇살이 폴폴 날린다.
이 새벽 봄바람 타고
끝없이 날아가고 싶은 저 하늘.
등성이에 올라(2)
형산강 언덕에 밤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 푸른 풀잎 비단처럼 돋았다.
파릇파릇 풀잎 위로 봄바람 일면
산 전체가 물 위에 가로누워 떠간다.
여기는 금장낙안(金丈落雁)
모래 위에 기러기 날고
물고기 강물을 따라 강으로 흐르네.
금수로 반짝이는 물살 위로
주름잡아 흐르는 강물을 건너면
봄바람 타고 어디엔가 낮달이 뜬다.
봄 과수원 언저리 시커먼 열차가
대구행 200 리를 바람 따라 지나가면
낚시 드리운 늙은 할아버지의 주름살에도
세월 따라 그리움이 흐르고 있네.
송화산(松花山) 낮은 등성이로 바람꽃 일면
이 땅을 뒤덮는 황사(黃砂)바람으로 눈을 못 뜨지만
때로는 산불이 일어 온 산천을 뒤덮고
연기와 뜨거운 열기로 들끓어 올랐다.
산불이 거쳐 간 잔디에는 새움이 돋고
할미꽃 꼬부라진 전설이 구름으로 흐른다.
등성이에 올라(3)
산등성이 위에는 빛나는 무덤들
열심히 살아 온 사람들이
죽어서도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세월을 등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빛나는 무덤의 십자가, 혹은 비석들
묘지는 일제히 마을을 향해 소리 치고
산 사람들을 위해 저주(咀呪)하며
히죽 히죽 웃고 있는 무덤들-.
숲 속으로 보이는 하늘이 그리워
펄럭이는 햇살이 그리워 바람처럼 울고 있다.
푸른 소나무 밑에 누워 있는 묘석(墓石)은
비바람에 흘려 글씨조차 망가지고
세월 속에 늙어 가는 인간의 불가사의를 찾아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서 거리를 배회한다.
닭이 울면 산 위에 올라 와서는
오늘도 하루를 맞아 낮잠을 자고 있다.
발렌타인데이
젊은 사랑아
숨겨둔 한 개의 사과를
나누어 먹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
하늘의 구름이
너의 눈에 고인다
발렌타인데이
오늘의 기쁨을 축하하자
머리를 숙이고
달콤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자
젊은 사랑아
부등켜안고
우리들의 사랑을
이야기하자.
수술실에서
수술용 회전침대에 누워
천장의 등불을 바라보고 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의사와 간호사
그들의 손과 발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나의 등에 마취주사를 놓는다.
에테르 냄새로 뒤범벅이 된 수술실,
창밖에는 봄비가 유리창을 더듬는다.
서서히 마취가 퍼지는 나의 다리
하반신이 허물어지고 있는 때를 기다려
메스가 번쩍이며 나의 환부를 도려낸다.
절반은 죽어서 시체가 되고
절반은 살아서 맥이 뛰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나는 누워 있다.
옆에는 전신 마취 당한 여인이
수술을 끝내고 나서
반나체로 침대에 누워
죽음처럼 사랑처럼 조용히 잠을 잔다.
들 꽃
작은 등불을 켜들고
한 낮을 밝히는
사랑의 작은 미소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이,
여기 강산 하구(河口)에
봄비로 찾아 와서
어디선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부르고 있다.
강물 출렁이는 언덕에
이렇게 한 줌 꽃잎으로
떠나가는 사람
오, 사랑하는 나의 소녀여
달과 별과 바람의 세월을 지나
그대 속눈썹에 어리는 이슬이
밤새도록 깜박이는 눈짓으로
나의 詩가 된다.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에 씻기는 물이 된다
사랑이 된다.
저녁 기차를 타고
-가연이에게
그대 맑은 미소 차창으로 날리며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구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듯
그대 먼 창가에 불빛으로 떠올리는
한 가닥 추억과 나의 사랑을,
산울림처럼 다가서는 저녁놀이
깊이깊이 저며 오는 나의 실루엣
동해남부선 기적의 목소리가
마을을 지나 꿈속으로 빠져나가면
빛 고운 나의 사랑이 햇과일로 익고 있다.
나의 가슴 속 뜨거운 사람아
굽이도는 두 줄기 선로 위로
멀어져 가는 약속의 시간을 묻어두고
우리는 영영 떠나야만 하는가.
나의 하느님 아십니까
오, 고우신 하느님
죽을 사람만을 죽게 하시고
살 사람은 꼭 살게 하십시오
혹, 살 사람을 죽게 하시든지
죽어야할 사람을 살게 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세상에는 꽃 지는 바람이
계절풍으로 불어와서 어수선합니다.
오, 하느님 기억하시는지요
겨우 열두 살에 죽은
당신의 아들 베드로를-.
오! 하느님 기억 하시는지요
토요일마다 비가 내리고 꽃이 지고
일요일 오후에는 날이 개는
요즈음의 일기예보가 너무 잘 맞는다는 것도.
책상 위에는
읽다 둔 안델센 동화집이
쓸쓸하게 꽂혀 있고,
오늘도 그때처럼 비가 내립니다
오, 고우신 나의 하느님 아십니까.
강가에 나오너라
삶이 시들하다는 친구여
당신이 하는 일을 던지고
강가에 나오너라
그리고 흘러가는 물을 한번 보라
거침없이 흘러가는 물이며 사랑이며
인정까지도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덧없는 세상이라 생각하지 말라
어찌 시들한 것이 인생뿐이랴
비가 거쳐 간 강둑에 푸른 풀이
어느덧 다붓 쑥으로 우거진 저 들풀,
밟히는 것이 어찌 들풀뿐이랴
우리 또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니
친구여,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시들은 나무에도 꽃은 피리라
너무도 메말라 가는 이 삶을
시들하다고 말하지 말라, 친구여
당신이 하는 일을 던지고
여기 강가에 나오너라.
새벽 강가에서
달은 새벽 강가에서 지고 있었다.
밤새도록 지새우는 귀뚜라미도
일단은 멎고 미명의 아침을 기다린다.
건너편 낚시꾼들의 가스등이
수면 위에 번들거리고,
깊숙이 들어가는 강 어구(於口)에서
밤을 끝낸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깊은 잠에서 깨어 나오고 있었다.
밤안개가 자욱한 장막 속으로
강은 유유히 흘러 바다로 이르고
물고기들이 잠을 깨어
물 위로 첨벙 첨벙 솟아오른다.
동쪽 하늘에 무수히 박혀드는 밤 별들이
꿈 초롱 깨어 바람 부는 쪽으로 드러눕고,
개울가에는 늘어 선 달맞이꽃이
일제히 달을 향해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반월성 우물
아침 햇살이 놀고 있는 우물에는
천 년 맑은 정기가 고여 있었다.
잎이 돋아나는 나무 가지 끝
이슬이 꽃처럼 열리고,
똑, 똑 지고 있는 이슬 꽃이
어느새 옥구슬로 굴러가고,
우물 속에 엎드려 천 년을 지켜 온
잉어 한 마리가 죽은 듯 멈춰 있고,
이무기가 독을 풀고 있는 우물 속에
똑딱, 똑딱, 떨어지는 청명한 물방울 소리.
제3부 : 비 내리는 연서(戀書)
누에ㆍ1
-누에씨
까맣게 말라붙은 생명들이
신비의 숨결을 보듬고 꿈을 꾸고 있다.
죽음처럼 깊은 골짜기에서
너는 긴 밤을
고이고이 잠을 잔다.
잠 속에서 느껴보는
푸른 하늘과 바람과 태양을 꿈꾸며
두껍고 질긴 껍질 속에 피가 돌아 흐르고
진드기처럼 질긴 생명이 오히려 따뜻하다
이름 하여 이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흥건한 작은 씨방 안에서
끈질기게 기다려 온 인내의 시간이
너는 비로소 그리움이 된다
사랑이 된다.
버려진 것의 소중한 아픔을 위해
지금은 무엇인가 해야 할 때,
봄바람 노래 부르는 어둡고 긴 세월을 지나
한 줌 숨결을 틔우는 간곡한 기다림이
말라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파란 많은 세상 끝, 이 땅에 와서
까만 좁쌀로 말라붙은 생명들이
신비의 숨결을 보듬고 꿈을 꾸고 있다.
누에ㆍ2
-부화에 대하여
깊은 잠 두꺼운 껍질을 깨고
한꺼번에 쏟아지는 저 생명의 소리,
이 아침 방안 가득 터져 나오고 있다.
까맣게 흩어지는 개미떼처럼
지남지북(之南之北) 기어 나와 현현(玄玄)히 움직인다.
산이 무너져 내리고 봇물이 넘치는 소리
하늘을 향해 일제히 머리 쳐들어
환호를 올리며 기어 나오고 있다.
떠나가기 위해 일어서는 자의 지혜로운 미소가
언젠가는 넘치는 사랑으로 노래하고
타액으로 몸을 감아 죽어갈 계절의 미물들이
봄날의 아지랑이 속으로 떠나고 있다.
별빛과 구름과 스쳐 가는 바람으로
장미꽃 향기 속에 어리는 이슬 받아
너희, 순수로운 뽕잎으로 먹이리라.
누에ㆍ3
애벌레가 가물가물 기어 다니고 있다
玄玄玄玄玄玄玄玄玄...........................
푸른 이파리에 암갈색 누에가
진드기처럼 붙어서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조그만 이빨로 씹어 넘기는 어둠 속으로
송송 구멍이 뚫려 나오고
구멍 속으로 은은히 속살거리는 소리 들린다
그것은 마치
어지러운 숲 속에서 어린 아이가
무언으로 속삭이며 열린 길을 찾고 있는
꾸준한 의지로 움직이는 끝없는 모색이다
그것으로 하여 너 순수한 욕망의 작업은 시작되고
시간과 계절의 틈바구니 속에서
부쩍부쩍 커 가는 경험의 강물을 돌아 나온다
까만 어둠을 뽕잎처럼 갉아먹고
순수로운 고통의 통로를 빠져 나와서
이 아침의 약속을 걷어내고 있다.
누에ㆍ4
한 잠 자고 일어난 누에가 머리를 쳐들고
몸살을 앓는 듯 온몸 흔들고 있다
아직 똥이 낀 놈은 먹지도 못하고
산자(橵子)에 배를 깔고 엎드려 기지개를 켠다.
막혀서 통하지 않는 고통의 몸부림 같은
그 고통을 찍어내는 것일까
잠을 끝낸 다음의 아픈 껍질을 벗고
변신의 허물로부터 빠져 나와서
맑고 신선한 잎을 잘라 먹는다
보드랍고 연한 잎을 갉아 들어가는 옆에서
이파리의 힘줄이 하얗게 드러난다
까만 똥이 풀씨처럼 굴러 떨어지고
희끄무레한 누에들이 짚불의 박산처럼 터져 나온다
꽃잎이 지는 날, 봄의 소리로 바스락거리는
너의 잠식(蠶食)을 일상 속에 저며 오다가
묻어오는 못물이 출렁거리는
하늘과 땅이 불어 넘쳐 오르듯
그렇게 방안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누에ㆍ5
넉 잠자고 일어난 몸뚱이가
투명한 등허리를 드러내며 허옇게 누워 있다.
마지막 변신을 위한 통고(痛苦)의 아픔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 온다.
섶을 향하여 기어오르는 약속의 시간을 위해
머리를 쳐들고 꿈을 꾸듯 흔들고 있다.
꿈속에 찾아 나선 부드러운 침대 위에
기고 뒹굴며 길게, 길게 하품을 한다
드디어 입에서 튀어나오는 끈질긴 언어가
거미줄처럼 빠져나와 집을 짓는다.
뜨락에 조용히 꽃잎이 지고
부드러운 신록이 흔들고 있을 때,
감미로운 음악과 향기 가득한 계절의 노래는
온 몸을 감싸고 실처럼 풀려 나와 감긴다
제 몸을 둘러치는 영롱한 기교가.
누에ㆍ6
섶[薪]을 향하여 기어오르다가
소나무 가쟁이에 흰 꽃으로 피었다.
입에서 피어 나오는 약속의 언어를 발라서
큰놈은 큰집 작은 놈은 작은 집을 지어
너는 가화(假花)가 아닌 숨 쉬는 미라가 되었다.
바람 부는 날 아침 언덕에서 피어난 구름처럼
부드러운 백색이 눈부시게 빛나는 대낮
너의 참뜻이 누워 있는 어두운 시간에도
변신의 과정을 위해 너의 잠은 순조롭다.
잠을 자라, 잠을 자라, 다가오는 변신을 위해
싫어도 맞이하는 우리들의 약속처럼
슬픈 운명의 가지에 와서 걸리게 되리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말하지 못했다. 숨 쉬지도 못했다.
굼벵이처럼, 그러나 때가 되면
저절로 열리는 저 푸른 하늘의 태양을 위해,
우리들을 축복하는 먼 날의 영광과
찾아오는 기쁨의 시간을 위해
기다리자 한 송이 흰 꽃으로-.
누에ㆍ7
하얗게 둘러친 방, 언어와 생각이 차단된
꿈같은 사랑의 씨올이 올 올이 짜여진 실크하우스
번쩍이는 햇살과 꽃향기와 이슬로 짜여
모든 외계(外界)와는 차단된 순수 고독,
그 고독의 철저한 관계를 알아보리라.
깊은 잠 속에 떠오르는 푸른 하늘 흰 구름
찰랑이는 물소리도 깊은 의식의 늪으로
자꾸 자꾸 빠져드는 의식의 미로(迷路)같은 길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다 깊은 잠 속으로.
누에ㆍ8
어두운 방안에 한 줄기 빛의 기미가 보인다
먼동이 트고 있다.
생명의 미동으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다시 태어나고 있다.
번데기에 핏기가 돌아 날개가 달리는
위대한 신의 입김이 봄바람 되어 불어온다.
끝없는 윤회와 기다림으로
그의 반복은 끝이 났다.
시작과 끝남이 교체되는 시간의 시점에서
끈질긴 생명의 보람을 느낀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옵니까. 이 대낮에,
자유와 해방이 찾아오는 그 날을 위해
어두운 실내에서 빛의 씨앗을 키우고 있다.
누에ㆍ9
뚫고 나온다. 이 광명한 날 빛
아름다운 새벽을 꿈꾸며
뚫린 구멍에서 빛이 비롯된다
나가자 나가서 날아가자 하늘 높이
태양과 바람을 안고 꽃향기 그윽한
감미로운 사랑과 음악이 흐른다
나에게 주어진 이 기쁨, 해방,
사랑의 여신이 나를 공중에 날린다.
날개를 흔들며 파닥이는 목숨이
또 다른 목숨으로 잉태하는 스스로운 바람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랑의 손길,
이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어두운 방에 갇혀 숨어살아 왔다.
아,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
그 죽음을 위하여 살아가자
이 광명한 날 빛.
누에ㆍ10
하얀 종이 위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알을 낳는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신의 사역(使役)이라도
맡은 만큼의 수행으로 생명을 발라내고 있다.
수십만 개의 알이 호흡을 보듬고
또 다른 형태의 삶을 위하여 태어나고 있다.
이 작업을 끝내면 그는 죽는다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없어도 해야만 한다.
누에여, 누에의 일생에 대하여
말해 보아라, 나의 신이여 말해 보아라.
온도와 습도와 공기가 있으면
어디서든지 되살아날 수 있는 생명들
방안 가득하게 불어나고 있다, 태어나고 있다
또 다른 삶과 죽음을 위하여-.
시집을 사서, 맡아보던 잉크 냄새
젊은 날 서점에 들러
구석에 꽂혀있는 시집을 사는 날
오전의 시린 햇살이
그 날의 추억처럼 밝고 신선했다.
감나무 잎이 지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먼 들판
구름 한 점 바람에 실려 오고,
시들은 들판 양지 끝에 앉아
가만히 펼쳐보던 시집 한 권
알싸한 잉크 냄새 내 코끝에 스미더니,
지금은 내 인생의 젊음은 가고
머리끝이 희끗희끗 덮여 오는 때
시를 읽어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나의 젊음 나의 보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 세상에
홀로 깨어서 시를 읽어도
젊은 날의 언덕에 앉아
펴 보던 그 시집의 ‘서정의 구름’ 물결과
자꾸 멀어져 가는 푸른 하늘이
가을하늘처럼 서럽게 보임은 어쩐 일일까.
장미 한 송이
붉은 장미 한 송이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내가 아침저녁 뜨거운 미소로
끝없이 드려다 보고 있노라면
핏속의 깊은 곳에서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하는 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정오에
부드러운 손길을 뻗쳐
한 덩이 해처럼 받들어 오게 하면
당신의 마음속에 가시가 있습니다.
당신의 그 가시가 내 얼굴, 내 손
아니, 온 몸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해도 좋습니다.
햇살이 내리고, 구름이 내려오고
이슬이 내리고 간지러운 미풍이 스치는 뜨락에
나는 당신을 안아다 침대에 뉘이고
그렇게 오래 오래 드려다 봅니다.
붉은 장미꽃 한 송이의 뜨거운 감격으로
나의 온 몸을 흔들리게 하고
아편처럼 온몸을 취하게 합니다.
다시 생각나는 너
-田在洙에게
눈 내리는 날 밤
원효로 4가 ‘영일’다방에서
시 낭송회를 마치고 돌아 나왔다
우리는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눈 위에 몇 번이나 넘어지고 미끄러졌었지.
그 날
중국집 원형식탁에 둘러앉아
고량주를 마시고 취했거니,
손을 잡으면 따스했던 우리들의 우정을
너는 그냥 남기고 떠나갔다.
재수야,
너를 부르면 새로워지는 이름
구룡포 해변시인학교를 마치고
혼자 중얼거리며 경주에 와서
냉면 집에서 닭갈비를 씹던 그 해 여름
솜뭉치를 귀에 틀어넣고 흔들면서
너는 그때 귀앓이를 하고 있었지.
승우랑 규호랑 영수랑
술 말을 메고 가서 밤을 새우던
그 날 저녁 너의 기고만장(氣高萬丈)을
나는 알고 있다네, 알고 있다네.
한 세상 사이에 두고 돌아누운 오늘,
눈 내리는 날 밤 그 해 겨울의 詩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떠돌고 있단다만
在洙야.
공원 마로니에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앉아
무너져 내리는 서울의 한 모퉁이를 보고 있다
시인 유승우와 신규호를 만나
서울 소식을 들으면서 커피를 나눈다.
밑도 끝도 없는 팝송 공연과 전시회와
청중도 없는 문학 강연을 듣다가
청소년 백일장이 끝난 물결에 휩싸여
우리도 시와 우정을 이야기한다.
먼 세월을 돌아 온 서울 한복판에서
샤르트르와 까뮈를 이야기하던
명동 돌체나 디쉐네 감상실은
세월 속에 묻혀 갔지만,
오늘 동숭동 마로니에 벤치에 앉아
거리의 예술과 거리의 음악과 공연 문화와
스포츠와, 읽히지도 않는 시를 말하면서
우울한 날의 오전에 파르르 떨리는 잎새를 본다.
분수가 쏟아지는 여름날의 열기에도
사랑과 대화는 식어 가다가 죽고
문화의 거리 마로니에 하늘을 날고 있는 구름,
외로운 비둘기 한 마리가 어디론지
먼 날의 기억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낮 달
서울 상공에서 보던 낮달이 천 리 길을 따라오고 있다.
성남이나 과천, 판교부근에 왔을 때도 그냥 따라오던 것이 고속버스가 달리고 있는 차창을 기웃거리면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 달은 다시 내 얼굴을 훔쳐내어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창 밖에서 유혹하며 함께 가자고 소곤거린다.
금강 유원지나 추풍령 고개에 이르렀을 때, 달은 잠시 물속에 빠져 있거나 소나무 가지 사이에 숨어 기다리다가 구름 속에서 나와 또 나를 따라 온다. 다시 도로변 풀 대궁이나 이정표 팻말 뒤에 숨어서 가을꽃 한 송이를 꼬여내고 있을 때, 나는 차창 커튼으로 그를 슬쩍 덮어두고 지나온다.
그러나 어느새 달은 나를 띄울세라 꼬리를 물고 따라 오는데, 마치 서울에서 만난 여인의 비밀을 캐려는 듯, 어젯밤 커피숍 ‘파인힐’에서 여인의 손가락에 끼인 담배며 그의 손가락 마디마다의 반지며 빨간 손톱이며 얼굴에 점 하나까지 숨김없이 말하려는 그런 표정이다.
메밀꽃이 흩어져 쓸어내리는 산자락에 어느덧 뜨물처럼 허옇게 달빛이 누워 있다.
검은 수염 아저씨
내 어릴 적 큰장 날에 보이던
검은 수염 아저씨가 보고 싶다.
싸전이나 어물전 입구에 멍석을 펴고
6전 소설이나 천자문(千字文)을 팔던
검은 수염 무성한 책장사 아저씨는
지금 무얼 하는지 알고 싶다.
할머니나 아이들을 장판에 모아 놓고
장한몽, 유충렬전, 조웅전, 옥루몽을
얼음에 박 밀 듯 읽어 주더니
세상의 지혜를 토정비결에 묻어두고
점잖은 목소리로 점을 쳐주던 아저씨는
세월의 그늘 속에 묻혀 사라져 갔다.
섣달그믐 대목장날에는
초조한 목청이 더욱 높아 가더니
가난하고 마음씨 좋은 책장사 아저씨는
그의 검은 무명베 두루마기 자락에 싸여
불어오는 바람에 수염 펄럭이더니.
고향 옛집
솔밭 바람소리 대숲에 어리면
달이 먼저 뜨는 동뫼산에 별이 푸르다
감나무 숲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오늘은 초저녁부터 풀벌레 울음 울고
아편 꽃이 곱게 피던 장독대 옆 채마밭에
노오란 연기가 온 마당을 뒤덮었다.
내 순수의 가난한 꿈이 열리던
채송화 여린 손가락 사이로
노오란 연기가 묻어 꽃이 피더니,
사시사철 흙바람 부는 뜨락에 비가 내리면
방마다 흙내음이 체취처럼 풍겨왔다.
밤새도록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긴 밤의 강물 소리로 건너오고
고향 옛집 눈물겨운 유년의 나를
구석마다 찾아 나선다.
서까래며 대들보며
삐걱이는 암 돌쩌귀까지 닳아 무너지고
바람 부는 마당에서 지금도 들려오는
먼 하늘 기억의 대숲 바람 소리.
출렁이는 달빛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날 밤
초저녁 달빛이 땅바닥에 출렁이고 있었지.
내가 카츄샤로 있을 때 만난
미스 신이라는 여자가 생각난다.
그의 집이 강원도 어느 산골인데
미군부대 철조망 따라 이곳까지 흘러와서
나와 하루 밤 인연으로 만난
신 영자라는 여인이 오늘 생각난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새엄마 구박이 심하여
무작정 집을 나와서
평택, 부평, 인천 동두천, 파주,
외인부대 근처로 떠돌아다니다가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쇠리
미 건설공병대 철조망 가까운 마을에서
나는 미스 신이라는 여인과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여자가 순정이야 있을까마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날 밤
초저녁 달빛이 땅바닥에 출렁이고 있었다.
비 내리는 연서(戀書)
초겨울 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
노오란 은행잎이 떨어져 쌓이고
은행잎마다 사랑詩 보내고픈
우체국 창구에는 지금
짐 뭉치처럼 쌓인 편지들이 때를 기다리고,
언젠가 그 집 대문을 두드릴
당신의 핑크빛 엽서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다.
새로운 삶과 사랑을 노래하는
이 11월의 거리 가로수도 비에 젖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고
후줄근히 내리는 비바람 속으로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과
우산 속으로 나란히 걷고 있는
그대 가득한 행복의 시간을
나는 보고 듣고 있다.
성호를 긋고 몇 번이나 대뇌이던 ‘찬미 예수’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
성 첨탑(聖尖塔) 꼭대기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먼 나라로 인도하는 영혼들의 목소리가
천국의 로터리로 돌아가는 저녁 미사에
나는 그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스스로운 불빛 속으로 비쳐 오는
까만 점 하나까지
어쩌면 잊을 번했던 그 날의 차가운 손이
하늘의 약속처럼 떠오른다.
오동 꽃 필 때
바람 불던 날 꽃이 지더니
그대 떠나는 아침
오동 꽃은 핀다. 아, 바람에 흔들리는
그대 뒷모습
몸짓 흔들리는 파란 오동 꽃.
이별하지 말자고
울면서 떠나는 날
꽃잎은 피어 하늘에 번져나고,
우리 사랑 향기 드높아 허공에 날리면
노래 부르리라 그대 돌아오는 날
하늘 향해 입을 모아
노래 부르리라. 사랑하는 그대
약속의 계절을 지나
저절로 높아 가는 저 먼 하늘
오동 꽃 물빛으로 젖어오는
나의 가슴 속 깊은 곳
푸른 멍 하나.
등꽃祭
햇살이 내려와서
한 점 한 점 모두 꽃이 되었다.
푸른 하늘 밑 응어리진 등꽃 넝쿨 속에
알몸을 드러낸 순수사랑,
여름 향기로 가득 물들어 옴을 바람은 안다.
바람에 머문 정오가 나비처럼
고요히 다가와서 나의 머리털을 흔들고
푸르른 꽃가마 타고 느릿느릿 내리는
구름 한 아름 파도소리로 넘쳐난다
아, 그리움을 말하지 않겠다, 나의 그리움을
넘쳐흐르는 그리움으로
소리 없이 열리는 초여름의 향연
사랑 등꽃祭,
젊음으로 가득한 꽃밭으로
푸른 바람이 기억처럼 불고 있다.
귀뚜라미
포항 도립병원 결핵병동에서
시를 뱉어내듯 각혈을 하던
이십 년 전의
여류시인 서정희를 생각한다.
시든 잔디에 앉아 그의 맑은 눈으로
병든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그는 떠났다.
세월 속에 묻혀간 그의 시집 ‘배암’도
지금은 퇴색된 파본으로 꽂혀 있지만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면
그의 생명의 가지에는 꽃이 필 것인가
가을꽃 자리에 내려 온 햇살이
하늘나라 바이올린 줄을 타고
가을밤 창밖에 어리는 달빛으로 와서
귀뚜라미 소리로 홀로 울고 있다.
첫 눈(1)
봉선화 물빛 첫사랑 영그는
이 그리움의 계절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첫눈이 내린다.
우리는 철이 덜든 송아지
뒹굴며 뛰는 환희 속에서
눈이 내리면,
배고파서 마시는
하늘빛 눈동자
이 사랑의 계절에
눈이 시리다 나의 첫사랑.
제4부: 일동 기행시초(日東 紀行詩抄)
오사카성루에서(1)
그의 악령이 지금도 살아남아
어느 돌 틈 사리에 붙어 있다가
지나가는 조선사람 목을 조르지나 않나.
천하를 호령하던 그의 찢긴 목소리가
거대한 유물로 남아있는 오사카성,
오늘도 무심히 지나가는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들
문명이전의 간사스런 지혜가 남긴 돌덩이
나는 오늘도 이것을 보기 위해
성루에 올랐다.
지금 안개 자욱한 여름날 아침
넘치는 봇물처럼 불어오는 매미소리,
오늘 아침은 매미도 일본말로 울고 있다.
오사카성루에서(2)
성루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어디서 들려오는 풍신(豊臣)의 음성이
칼끝이 되어 나를 콕, 콕, 찔러댄다.
사백 년 뒤, 조선인의 후손인 어느 놈이
시인(詩人)이 되어 이 궁전에 들어옴을
그대는 미리 어찌 알았을꼬?
논 고동처럼 돌아 오르는 난간에 기대어
우리는 사진을 찍고
멀리 바라보이는 곽지(郭池)에는 물이 푸르다.
출렁이는 초록과 남북으로 뻗은 오사카시(大阪市) 전경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고,
나는 이 대낮에 신열을 앓는다.
우리 조상을 짓밟던 그의 가냘픈 다리와
짚신과 녹 쓴 칼자루가
어둠 속에서도 징징 울고 있었다.
햇살처럼 뜨겁던 그 날의 열기가
식어서 한 덩이 돌로 굳었거니,
삶과 죽음이 뒤바뀐 왕조가
유령의 집처럼 덩그렇게 날아서
말을 잃은 체 우뚝 솟아 있다.
우에노 공원
말로만 듣던 우에노 공원을
오늘 내가 올라 와 걷고 있다.
숲 속에 뒤덮인 신사(神社)가 잡귀 속에 묻혀 있고
우글거리는 귀신들이 공원 구석에 모여 있다.
외팔이 거지가 벤치에 앉아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고 낮잠을 자고,
바다를 건너 온 왕인(王仁) 박사는
오늘도 숲 속 그늘에서 우리를 맞는다.
매미 한 마리가 찌들은 소리로 울다가
더위에 지쳐 꺼질 듯 이어 간다.
공원 화장실 구석진 곳에 모여진 휴지며
바나나 껍데기들이 우글거리며
쓰레기통에서는 둥, 둥, 바람이 불고 있다.
신깐센(新幹線)을 타고
달리는 열차 안에 앉아
우리는 산토니 캔 맥주를 마신다.
차창에 언뜻 언뜻 보이는
구릉 대밭과 들판들,
언덕이 지나면 마을이 나오고
마을이 지나면 터널이 나온다.
터널을 지나면 바다가 그림 같고
그림 같은 항구에 배가 와 닿는다.
울창한 삼림(森林)과 촌락(村落)들이
그림처럼 정겨웁다.
교토(京都)에서 도쿄(東京)까지
달리는 신깐센 차창에서
이국(異國)의 사보덴 빛깔로 노을이 지고 있다.
긴자다이에 호텔에서(1)
세계 제2의 도시 토쿄에
밤은 화려하다.
유령들이 검은머리를 푸는 어둠 속
긴자거리 다이에호텔은
밤안개가 가로등을 저시고
후끈한 무더위에 여름밤은 지겨웁다.
그렇지만 포근한 사랑처럼 정다운 밤
아, 저게 뭐냐. 거지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돌아다니는 때,
경제의 나라 세계의 도시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통곡하고 있다.
다가서면 스르르 열리는 자동문과
엘리베이터의 벌어진 입이
유령의 집처럼 음산한 다이에 호텔에서
우리들은 이 밤에 안겨 술을 마신다.
따르는 몇 잔의 양주와
여인의 떨리는 손끝 때문에
긴자거리 밤안개는 어둠을 앓고 있다.
긴자다이에 호텔에서(2)
아침이 일어서고 있는
빌딩 숲 사이로 그늘이 길게 깔린다.
10층 창문에서 내려다 뵈는 동경의 하늘은
새로운 아침을 맞고 있었다.
어둠이 지난 거리, 햇살은 눈부시고
거리에는 시민들의 건강한 다리가,
동경도(東京都) 청사 앞에 활짝 열린 거리에는
넥타이를 맨 깔끔한 공무원들이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도쿄(東京)를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일등국민, 그들의 자부와 긍지를 생각하는
이 아침 거리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과 말씨와
그들의 건강한 다리에 일본은 살아 있었던가?
아침의 나라 일본,
친절한 사람, 깨끗한 거리
다이에 호텔 길거리의 상쾌한 아침.
긴자 거리
밤안개 내리는 긴자 거리는
깜박거리는 네온 불빛 속에 깊어 간다.
화려한 거리, 토쿄의 밤은
서울의 명동, 부산의 광복동 그런 거리다.
긴자 백화점과 거대한 보석상들
지나는 사람들의 눈을 머물게 하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낭만의 거리다.
아, 세계는 너무나 가깝고 친밀하다
세계인이 모두 한 거리에 와서 어울리는
긴자의 밤은 즐겁고 화려하다.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는 고독한 어깨가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거리에
우리도 함께 그들이 되어 가고 싶다.
도돈보리의 밤
오사카 도돈보리의 밤은 세계인의 밤이다
미국이, 영국이, 프랑스가, 독일이
인도와 한국이, 일본과 대만이 함께 하는
작은 국제 인종 전시장 같은 곳,
술이 있고 여자가 있고 주먹이 있는 거리
밤의 도시 한 가운데 어둠처럼 흐르는 강
강가에서 부둥켜안고 사랑을 나누는 남자와 여자
꽃에서 꿀을 따내는 꿀벌처럼
낯선 남녀끼리 머리와 얼굴을 부비며
가로등 밑 거리에서 정사를 시작한다.
오직 돈만이 통하는 밤무대 거리
“단돈 2천 엔이면 눈을 즐겁게”
늙은 신사가 들고 있는 밤거리의 풍속도,
경제대국 일본이 이런 어둠의 늪에서
휘어 나오지 못하고 죽어 있다는 것을
3만 엔에 팔려 가는 일본 여자에서 본다.
윤리와 모럴이 무너지는 소리
쾌락과 환락으로 병들어 가는 거리
도돈보리의 밤.
황거(皇居) 광장에서
팔월의 이른 아침, 우리는 코쿄광장에서
능선처럼 뻗어 날아오르는
궁성의 청기와 날개를 보고 있다.
그대가 박제된 황제의 이름으로 계시는 궁궐,
당신이 채집한 곤충의 날개처럼
아무리 날아도 날아가지 못한다.
우리의 삼촌과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멀리 동쪽을 향해 머리 숙여
황국신민의 서사를 바치던 그 날의 태양이
오늘 아침도 궁성(宮城)의 하늘 위로 떠오른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슬픈 역사를
이 땅에 살고 있는 당신네들의 욕망으로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낸 시대의 아픔으로
슬픈 역사는 지금 잊어버리고
나는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는가.
코쿄광장, 곽지(郭池)의 안경 형 다리 너머에
시위처럼 지나가는 일본의 이미지가
오늘 아침 하늘에 동그란 햇덩이로 떠오른다.
술집 ‘PIG WHISTLE’ 에서
오사카 주점거리 ‘pig whistle'은
왁자지껄하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끼리끼리 마주앉아 위스키를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면서 노래도 한다.
구석에서는 남녀가 껴안고 키스를 하고
술에 녹아내리는 아가씨도 있다.
흑인, 백인, 일본인 , 한국인,
멀리는 영국, 프랑스, 이태리 사람들도.....
세계의 인종을 모아 둔
여기는 세계인의 선술집이다.
어둡고 붉은 색등의 원탁테이블에 앉아
엔과 달러가 판을 치고,
달아오르는 우리들의 양심이
밤새도록 돼지 족발 냄새를 풍기며
고독하게 밤을 지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왕인박사비(王仁博士碑)
우에노 공원 왕인 박사 앞에서
찰칵, 사진을 찍는다.
수천 년 전 왕인의 발걸음 소리가
솔숲에서 들려오고,
그가 가져온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의 책갈피 속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
문명을 깨워준 그의 지혜가
오늘 아침 나뭇잎처럼 햇볕에 반짝이고
영롱하게 열리는 나의 귀와 눈이
비로소 한국사람 임을 자부한다.
왕인, 당신은 죽어서 다시 살아
한국인의 지혜로 여기에 섰다
영원한 그리움으로 여기에 섰다.
청수사(淸水寺) 가는 길
여우비가 무더위 속에서 한나절을 뿌린다.
매미 소리가 이국의 향수처럼 덮여 온다.
꼬불꼬불 길을 따라 올라 오는
일본 귀신들,
일본 사람들은 모두 귀신 속에 살고 있다.
시원한 물줄기를 그리는 천둥소리가
폭포에 어우러져 하늘에 오르고
육중한 돌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
그 위에 까치 둥우리 같은 집들이
근심스레 떠 있다.
기억 속에 아슴한 오솔길 따라
솔잎들이 곱게, 곱게 자라나고 있다.
청수사 가는 길을
온종일 소나기가 울고 햇볕이 나오고
낮달이 떴다가 이슬비가 내리고
물소리 시원하게 젖어
솔 매미 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