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인 정맥 2기 종주대는 2014년 7월 27일 장안산에 들어 2015. 06. 28. 외망포구까지 1년 여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60여 명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며 가지고 있는 역량을 모은 결과다. 만날 때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을 호소하던 한문희 총대장님과 약속도 지켰다. 진정한 산악인의 자세를 봤다.
노산 이은상 선생의 산악인의 선서다. 몇 번을 반복해도 구구절절 와 닿는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다.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정맥 2기 종주대는 다시 낙남정맥 완주에 뜻을 모았다. 일정표 상으로는 2015년 7월 12일부터 12월 27일까지 12번이다. 다시 6개월여 대장정의 출발선에 섰다. 낙남정맥에 대해서는 확보한 자료를 종합해서 나름 정리했다.
「낙남정맥은 이 땅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에서 마지막으로 분기되는 산줄기로 총 도상거리는 241km다. 지리산 주능선 상에서 가장 신령스럽다는 영신봉에서 분기한다. 여기서부터 300~800미터의 높고 낮은 등성이로 이어가는 낙남정맥은 북으로 임천강, 경호강, 남강이 흘러드는 낙동강을 받든다. 다시 말하면 낙동강의 남쪽 울타리다. 영신봉에서 옥산에 이르는 짧은 남쪽 능선을 걷는 동안은 서쪽으로 섬진강물을 보내지만 방향을 동쪽으로 정한 이후로는 남쪽 바닷가 개울들만 적신다. 계속해서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익산을 지난 후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에서 끝난다.」
분산은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이래서 신산경표에서는 남쪽 불모산, 화산을 지나 낙동강의 하구로 뻗는 줄기를 낙남정맥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인 지 2기 종주대는 해를 바꿔서는 정초에 신 낙남정맥길 34km를 2회에 걸쳐 완주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낙동정맥의 가장 큰 의미는 그것이 남부해안지방의 분계라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생활문화와 식생, 그리고 특이한 기후구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산줄기다. 이 산줄기의 남쪽 해안지방은 연평균기온이 제주도 다음으로 따뜻한 14℃이며, 난온대산림대를 형성한다.
지리산군을 제외하고는 함안 여항산(770m)이 최고봉이 될 정도로 대부분 낮은 산으로 이어지지만 남해바다와 인접한 산줄기인 탓에 시야가 확 트이는 조망이 일품이며 남녘 산 특유의 멋을 즐길 수 있는 정맥이다. 인접한 주요 도시로는 하동군, 진주시, 함안군, 마산시, 창원시, 김해시 등이다.
주요 산은 옥산(玉山 614m), 무선산(無仙山 278m), 봉대산(鳳臺山 409m), 천황산(天黃山), 대곡산(大谷山 543m), 무량산(無量山 579m), 성지산(聖智山 393m), 깃대봉(521m), 영봉산(靈鳳山 395m), 여항산(餘航山 744m), 서북산(西北山 439m), 광로산(匡盧山 720m), 대산(大山 727m), 대곡산(大谷山 816m), 무학산(舞鶴山 763m), 천주산(天柱山 656m), 구룡산(九龍山 434m), 정병산(精兵山 567m), 대암산(大岩山 655m), 황새봉(393m), 분산(盆山) 등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靈神峰 1,651.9m)이 시발점이다. 한국 산악문학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였던 김장호 선생은 경남 하동군 묵계리 일대 즉 낙남의 시작점이자 그 아래 청학동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세석평전 서쪽 봉우리인 영신봉에서 정남으로 발달한 지맥이 그 기세를 꺾지 않고 1,270m, 1,214m봉으로 불끈거리다가 마침내 삼신봉(1,284m)에 이르러 두 날개를 펴고 감싸안되, 동쪽으로는 산청군 시천면과 경계를 이루며, 1,168m봉, 묵계재, 902m봉으로 병풍을 쳐 나가고, 또 한편 서쪽으로는 화개면과 악양면과의 사이에 1,354 m봉, 1,264m봉, 시루봉으로 높다랗게 칸막이를 둘러쳐서는, 그 사이로 안고샅에 참 별천지같은 아늑한 마을을 이룩해 놓고 있다.
흡사 그것은 몽유도와도 같이 들어서는 어구가 협착하게 굽어돌아 사람들이 쉬이 알아차리가 어려우나, 일단 그 속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꿈같은 도원경을 만난다는 별세계를 표방한 것이다.」
진정한 요산자자면 지리산의 장엄함 속에서도 부드럽고 편안한 어머니 품속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김장호 선생은 지리산 품의 크기에 대하여 첫째는 후미져서 깊고, 둘째는 아늑하고, 셋째는 풍요함이라고 말한다.
「첫째 후미져서 깊은 것을 보면 이 산의 동쪽 기슭, 천왕봉의 동봉 써리봉 품 안에서 벌어져 대원사 계곡, 장단골을 몰아 덕천강으로 마무리되는 산청군 삼장면은 골짜기 골짜기가 얼마나 깊고 후미졌던지, 서부 경남 일대에서는 ‘그 사람 삼장갔다’면 못 찾는 것으로 알라는 뜻으로 통하는 말이다.
이 삼장면의 반대편, 즉 천왕봉의 북쪽으로 임천강까지 이 산의 주능선 길이의 꼭 절반인 24km에 걸치는, 이 산에서는 가장 유현한 골짜기로 이름난 칠선계곡에는 지금도 두지터니 목공장터니 하는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것은 모두 옛날부터 목수들이 몰래 숨어들어 도벌한 나무로 목기를 만들어 내다 팡던 곳이다. 말하자면 지리산은 그런 엄청난 짓거리도 저지를 수 있을 만큼 골이 깊다는 것이다.
둘째 아늑함은 위에서 말한 청학동 일원으로 알 수 있고, 셋째 풍요함은 이 산 서남편으로 우선 자연의 혜택이 더할 수 없이 풍부한 고장이 많다. 그 대표적인 곳이 구례 땅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선조 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볍씨 한 말을 뿌려 예순 말을 넘게 거둬들일 수 있는 땅을 가리켜 기름지다 하는데, 남원과 정주, 진주와 더불어 구례 땅은 볍씨 한 말로 자그마치 일백마흔 말을 거둬들인다.’
이 비옥한 땅의 내력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3년에 이미 당나라에서 김대렴이 차의 종자를 가져 와 왕명에 따라 지리산 일대에 심었다고 전하고, 또 고려 공민왕 13년 경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뿌려 재배한 터가, 지금도 이 산 동쪽 기슭 산청면에 목면시배지로 기념되고 있다. 한편 민속적인 풍년행사로 구례 쪽 산자락에서 곡우절 전후 자작나무의 사투리인 거자나무 줄기를 칼로 비스듬히 도려내어, 뿌여스름하고 달짝지근한 수액을 받아먹는 약수제가 전해 내려온다.」
1976년 12월 27일 둘레 440.5㎢에 걸쳐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의 무진장한 지상, 지하자원에 대해서는 글로 감당할 바 아니다. 지리산은 천연기념물이 얼마요, 그 넓이가 얼마요 따위의 나열식 숫자놀이만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예부터 지리산에 관하여는 말이 많았다. 이름부터 그렇다. 시대를 달리하여 부르는 명칭도 다양했다. 이번 남정맥 종주를 계기로 경상대학교 최석기 교수의 글을 통해 그 뜻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먼저 지리산(智異山,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地理山)이다. 지리산이란 명칭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지리산의 동네는 굽이굽이 깊고 크며, 토질은 흙이 두텁고 기름지다.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적당한데, 안에는 백 리의 긴 골짜기가 많으며(=지리하다), 밖은 좁고 안은 넓어 널찍하다”란 말이 있듯 아마도 이 산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백 리의 긴 골짜기를 드나들면서 지루하게 여겨 붙였을 것이다. 지리(支離)하다는 한자어로 우리말 ‘지루하다’와 유사하다.
둘째 두류산(頭流山, 頭留山)이다. 최 교수는 이인로의 파한집 등 7책의 고전을 통해 백두산 산맥이 이곳까지 뻗어 내렸기 때문에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부터 뻗어왔다는 백두대간을 의식하고 붙여진 이름이다.
세 번째는 방장산(方丈山)이다. 방장산은 신선이 사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장산은 중국 전설 속의 삼신산의 하나이다. 삼신산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자 제나라 사람 서불이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그 이름을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라고 하며 신선이 그곳에 산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한 말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의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넷째 불복산(不伏山)이다. 불복산은 ‘반역산’이라고도 한다. 이는 이성계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명칭은 한자로 쓰여진 고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복산이라는 말은 전설 속의 명칭이며, 실제로 지리산을 부르는 명칭으로는 거의 쓰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을 검색해 보면, 지리산(智異山)이라는 표제어는 총 209건이 나오고, 두류산(頭流山)이라는 표제어는 총 173건이 나온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지리산이라는 명칭이 가장 오래 전부터 쓰였고, 또 가장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64편을 분석하면 두류산이라 제목을 쓴 것이 47편으로 이를 보면 적어도 조선시대 사인(士人)들은 지리산이나 방장산이라는 이름보다는 두류산이라는 이름을 선호한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대부분 두류산으로 불렀다. 그것은 우리 강토 남단에 우뚝하게 솟은 지리산을 백두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선인들은 두류산을 천하에서 가장 숭고하고 빼어난 산으로 인식했다. 몇 가지 예를 본다.
김종직(1431~1492)은 중국의 숭산이나 태산보다 두류산이 더 낫다는 인식을 하였고, 유몽인(1559~1623)은 지리산을 동아시아 문학의 최고봉인 두보와 사마천에 비유하였다. 또한 송광연(1638~1695)은 이 세상에서 두류산과 비견할 산이 없다고 하였다. 실로 대단한 자긍심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와 국토에 대한 종합적 성찰의 기회를 갖는 여행이었다.」
# 마침내 2015년 7월 12일 토요일 밤 신도림역 22시, 사당 22시 30분, 양재 23시, 죽전, 신갈을 거쳐 낙남정맥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약간의 아쉬움은 13일 새벽 1시 30분 쯤 북한 옹진반도 해안으로 상륙하여 소멸된 제9호 태풍 찬홈의 영향으로 예정된 45명 만석과 달리 여기저기 빈자리가 보인 점이다.
한문희 총대장님의 참석으로 자리가 격을 더했다. 이형도 팀장이 마이크를 넘기니 정상교 회장님에게 발언권을 양보한다. 정 회장의 멘트는 이랬다.
“호남정맥을 단 한 사람의 큰 사고와 낙오 없이 무사히 마치게 됨에 감사를 드린다. 화합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봤다. 낙남도 화합과 사랑이다. 백두대간과 5개 정맥에서 회장이라는 직을 맡아왔기에 오늘도 이 자리에 섰지만 이제 회원으로 돌아가 힘을 보태고 싶다.”
마이크를 다시 받은 한 대장님의 멘트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다” 며 한 마디 변화도 주지 않았다. 안전이란 단어가 무척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넓게 보면 인생의 금언이다. 더하여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이 팀장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할 때는 회장이 아닌 큰 형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형도 팀장, 선두 김대군 대장, 후미 최귀철 대장의 일성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로 한결 같았다. 모두 촌철살인의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큰 박수로 이들을 격려했다. 내공이 쌓인 이들의 출범은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힘이 있다.
나도 성스러운 출발을 준비하면서 일주일간 금주를 했다. 사회에 나와서 이리 긴 시간 목운동을 하지 않은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말짱한 정신으로 차창을 내다보면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인드를 콘트롤했다.
충청도를 지나면서 조금씩 보이던 빗방울이 목적지가 다가오면서는 제법 굵어졌다. 시천면(矢川)이라는 안내판을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시천 지역은 자전적 실화 소설 ‘이태’ 남부군에 등장할 정도로 당시 빨치산 활동이 왕성했던 곳이다. 이곳에 근무했던 지인의 말을 들어보니 시천은 물이 화살처럼 빨리 흐르는 냇가라는 뜻이란다. 이번에 일부지만 그 장관을 직접 보는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활 시(矢)자가 들어가는 지명에는 이성계가 연관되어 있었으나 여기는 달랐다.
조용히 잠들어 있는, 인적이 비교적 한산에 보이는 시천면을 들어서면서 장기기억 속에 있던 아주 오래전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에 내려 도심으로 가는 길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다. 그때도 늦은 밤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비행장 활주로에만 불이 들어와 있을 정도로 전기 사정이 좋지 못했었다. 가로등은 물론 다 꺼져있었고 어둠과 적막 속에서 밝음이란 오직 버스 불 빛 하나였다. 그때 손을 꽉 쥘 정도의 긴장감 속에서 이 길을 뭉기며 지났을 나치 독일군 전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가슴을 때렸었다.
이렇듯 시천면에 대한 내 기억은 지리산 등이 자리 잡을 틈 없이 남부군이 점령해 있다. 이런 곳을 비 내리는 새벽에 지났다. 남부군, 빨치산, 폴란드 침공 등등 단어가 떠오르며 잠이 깨끗이 날아갔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드문드문 형성된 동네가 마음을 더 우울하게 하던 차에 찬란한 네온 불빛이 켜진 모텔을 지나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이만큼 변해있었던 것이다.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소설 지리산을 보면 거림골에 대해 아래 표현이 있다. 유려한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의 소설 지리산과 이태 소설 남부군은 상당부분 내용이 겹친다. 이태 씨는 남부군 출판이 미뤄지는 사이 이병주 선생이 도용했다는 주장을 했다. 소설가 신경숙 씨의 표절이 논란되고 있는 작금이다. 이 두 작품을 모두 읽어본 이라면 그 수없이 중복되는 부분을 보고 놀라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분 모두 하늘나라에 계시니 시시비비가 가려졌을 까.
“빨치산 활동을 기록한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세석평전 아래 거림골에서 1952년에 체포가 된다. 그는 심문, 재판, 징역 등 형극의 길을 거치나 결국은 살아남아 자유의 몸이 되어 그 기록을 세상에 알린다.”
나에게 이런 기억이 남아 있는 시천면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시천면은 골짜기의 밑바닥 부분인 산간곡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천 미터 내외의 산지를 이루고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북부와 서부에는 천왕봉을 비롯한 삼신봉, 제석봉, 촛대봉 등이 솟아 있으며, 동부와 남부로 갈수록 낮아져 오백 미터 내외의 산지를 이룬다.
산간을 흐르는 덕천강이 면내를 곡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며, 하천 양안에 소규모의 충적지가 발달했다. 쌀 보리 콩과 채소류가 생산된다. 원리에 덕천서원, 중산리에 법계사가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 입구와 의령을 연결하는 국도가 하천을 따라 나 있다. 11개 동리에 4천 여 명이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시작 1,2 구간을 도시로 볼 때 경상남도 하동군이 주 무대다. 하동군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하동군은 경상남도의 최서부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로 산청군과 함양군,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 광양시와 구례군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진주시와 사천시, 남쪽으로는 남해바다를 경계로 남해군과 접하고 있어 2개도와 8개 시군과 접하고 있다. 인구는 지난 5월 기준 5만 458명이다.
또한 하동군은 산자수려한 자연과 충무공 장군의 최후 승전장이었던 한려해상국립공원, 청정해역의 노량 앞바다 등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하며 고찰 쌍계사와 칠불사, 불일폭포 등 풍부한 관광자연과 백사청송, 하동포구 팔십리의 절경 등 천혜의 자연을 가지고 있는 고장이기도 한다.
“나훈아가 부른 ‘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래 배경이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다.” 이곳 태생 작사가 정두수의 말이다. 이 노래는 학병으로 끌려간 그의 숙부님 이야기란다. “그것이 산업화시대에서는 망향의 노래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도시로 떠난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는 연가로서 말입니다.“ 이 말은 1971년 이 노래를 연습하는 나훈아가 정두수에게 한 말이란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새 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경남 하동이 고향인 작사가 정두수는 무려 3,500곡 넘게 노래를 작사했다. 그의 저서 ‘노래 따라 삼천리’를 보면 고향 하동을 소재로 67편에 이르는 하동 연가를 시와 노래로 썼다면서 “한 고장을 소재로 이렇게 많은 곡을 작곡하고 유명가수들이 크게 히트까지 시킨 사례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들 것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남진의 ‘목화 아가씨’는 혼사를 받아놓고도 목화밭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한 친누나를 보고 쓴 글이란다.
거림에 도착하니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버스 불빛에 보이는 빗줄기가 마치 폭포수 같았다. 오늘 자료를 정리하며 보니 지난 11일부터 지리산 누적 강수량이 320mm다. 거기에 괄호로 시천면이 있는 걸 보면 이곳을 기준으로 지리산 강수량이 측정되는 모양이다.
“비가 많이 온다. 채비를 버스에서 하라”는 이 팀장의 말에 버스 안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나에게는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사이 한 대장과 정 회장, 이 팀장 등이 들어왔다. 예보된 강수량에 비해 계곡물이 엄청나다는 한 대장의 말에서 밖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면 계곡물은 서서 내려올 정도로 거대한 압력이 생긴다. 이래서 좀 전에 말했듯 시천이란 지명이 탄생했나 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악인 중 하나인 한 대장은 결코 만용을 부리며 이런 악천후로 이끌 사람이 아니다.
“제2구간으로 변경한다. 거기엔 계곡이 없다.”
자유인 낙남정맥 제2기 종주대 첫 구간은 거림에서 출발하여 세석대피소까지 약 6km를 이동하여 영신봉에서 출발하여 4km를 진행하고 1254봉(1254m) → 3.0km → 삼신봉(1,284m) → 1.1km → 외삼신봉(1,288m) → 2.2km → 묵계치(810m) → 1.7km → 고운동치(800m)까지로 이동거리 포함 도상거리 약 18km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 계획이 큰 비로 인해 제2구간으로 변경되었다.
고운동치(800m) → 0.7km → 880봉(880m) → 0.7km → 고기재(7908m) → 2.7km→ 790봉(790m)→ 2.0km → 길마재(490m) → 3.7km → 양이터재(510m) → 5.1km → 돌고지재(310m) → 1.1km → 526.7봉 → 1.3km → 천왕봉(602m) → 3.3km → 배토재(170m) 까지 도상거리 약 20.6km다.
이 팀장이 바로 2구간 지도를 돌린다. 평소 굵직한 행동과 말을 하는 타입의 이 팀장에게는 이런 준비성과 섬세함도 겸비하고 있어 가끔 우리를 즐겁게 한다. 구간을 살피다 제일 먼저 만나는 글씨가 산죽지대다. 이미 쏟아지는 빗줄기에 전의를 상실한 나는 그저 건성으로 구간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때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이 아닌 한 대장의 목소리였다.
“오늘 남을 사람 있나. 나는 몸이 좋지 않아 버스에 있겠다.”
나에겐 이 소리가 가뭄에 단비가 아닌 빗줄기 속의 한줄기 빛이었다. 소위 힐링 팀 중 정 회장을 비롯해서 너와나 님, 판종 님, 불고 님은 떠날 태세고, 석규 님은 출발부터 산사 마루에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을 한 바 있기에 움직임이 없다. 강화 님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게 보여 남는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아주 미안한 마음으로 정 회장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남는 게 날 거 같다.”
“그러냐. 무리하지 마라. 나는 갈 거다.”
나머지 산우들은 백전노장 답게 일각의 망설임 없이 하나 둘 장대비가 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과연 그들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을까. 버스가 떠날 무렵엔 한 대장과 원만 님을 포함 다섯이 남았다. 당연히 보여야 할 너와나 님은 없었다. 이러면 그의 용기도 표현이 좀 그렇지만 가상했다. 아니 나보다는 분명 한 수 위다. 한 대장 표정이 밝지 않아 이유를 물었다.
“요즘 입원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그것도 있고 숲길교육 시간이 변경되어 거길 다녀오면서 몸이 더 무겁다. 독사가 일방적으로 시간을 변경해 할 수 없이 다녀왔다. 그때부터 몸에 이상을 느꼈었다. 교육생들이 잡는 것도 마다하고 왔다.”
여기서 독사는 산악연맹 김주연 국장이다. 내가 교육을 받을 때 웃자며 불렀던 게 이젠 별명이 되었나 보다. 김 국장은 평생 산과 함께 한 사람답게 몸에 군살 하나 없이 단단하다. 성격도 마른 몸과 같이 조금 건조한 게 사실이다. 술은 입에 대지 않고 담배를 즐긴다. 그런 사람이 얼굴이 예쁘고 이해심 많은 부인을 만났다. 그 영향인 지 딸은 아버지와 성격이 정반대다. 딸이 집안의 화목을 자주 말하는 걸 봐서는 교육 때만 그런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숲길 교육을 한남금북정맥 몇 구간을 앞두고 참석했다. 제1기로 마쳤다. 지금은 제7기가 진행된단다. 어제 대연 형이 제6기로 교육을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자유인 산우들이 대간 기수로 서로를 구분하며 산행을 이어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대연 형은 내게는 한참 후배다. 군대 같으면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한다.
여러 차례 얘기 했듯이 우리 애마 주인 이 과장님은 훈남에 활짝 열린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다. 이번처럼 악천후에 길까지 좁아 큰 차를 어렵게 몰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힐링 팀이 생기면서 여러 차례 과외로 부탁해도 무조건 오케이다. 그럴 때마다 냉장고엔 언제나 지역 막걸리 3병이 실려 있었다. 서로 시간이 어긋나 그렇지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식사 대접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새벽 다섯 시 무렵 청학동 삼성궁 주차장에 도착했다.
“비가 그치면 삼성산에 오를 거니 준비들 해라.”
역시 한 대장답게 만만하게 물러서지는 않은 태세다. 나는 속으로 삼성산에 오르면 제1구간도 겸사겸사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는 벌써 낙남정맥 두 구간을 마쳤다는 기분에 빠졌다. 나는 이런 엉터리 정맥꾼이다. 그러면서 한 대장에게 우문을 했다. 답은 없었다.
“종주라는 게 반드시 그 길을 다 걸어야 하나. 그 산에 그 길은 누가 냈고 반드시 그 길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한 대장이 부실한 몸에다 악천후를 무릅쓰고라도 오르려던 삼신봉은 이런 산이었다. 우리가 다음 구간에 만날 산이다. 이 또한 홈페이지를 보고 요약했다.
「삼신봉은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로서 참다운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악양으로 흘러내린 형제봉 능선과 멀리 남해 바다의 일망무제 탁트인 전경을 선사해준다. 특히 인적 드문 비경의 남부능선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동으로는 묵계치를 서로는 생불재 남으로는 청학동을 볼 수 있는 사통팔달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상형을 찾아 헤매면서 유독 이 일대를 중심으로 입산, 은거 했다는 점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청학동 마을에서 삼심봉을 바라보면 왼쪽부터 쇠통바위, 가운데는 내삼신봉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통칭 삼신봉은 외삼신봉을 대표해 부른다. 이중 내삼신봉이 해발 1,354m로 가장 높다. 주로 많이 찾는 삼신봉 불일폭포 구간과 삼신봉 청학동 순환 구간은 장대한 주릉의 경관과 화개동천의 선경 못지않게 능선에 절묘한 형상을 하고 있는 기암절벽에 매료된다.
삼신봉 아래에는 쌍계사, 청학동, 세석산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는데 여기서 쌍계사 방면으로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따라가면 송정굴, 내삼신봉, 쇠통바위를 거쳐 상불재에 이르기까지 5km 남짓한 거리에 기암절벽들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단천골과 선유동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화개동천으로 이어져 비경을 연출하는 가볼만한 등산로로 각광받고 있다.」
이번에 보니 이 과장은 침낭을 가지고 맨 뒷자리에서 잠을 청한다. 과장이 충분히 쉬어야 한다며 한 대장이 남은 일행들은 앞으로 오라더니 냉장고를 연다. 큰 병에 담긴 전주식 모주가 하나 나왔다. 환상의 청학동에서 새벽 시간을 보내면서 술이 빠질 수는 없는 터라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막걸리에 비해 맛이 부드럽고 목 넘김이 좋았다. 술을 피해야 하는 석규 님도 마시고, 회복 중인 한 대장도 마시고, 최근 술을 조금씩 배워가는 강화 님도 한 잔 마셨다, 오랜만에 마신 터라 곡차 기운이 금새 몸에 감돌았다.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린다. 꽉 찼던 병이 빈병이 되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바로 옆 공간에서 비를 피하며 비와 안개 구름과 산세의 무쌍한 변화를 보며 얘기를 나누는 데 갑자가 짚 한 대가 와서 멈췄다. 말씨가 거칠고 외모는 돌쇠가 연상되는 중년 남자가 내렸다. 머리를 길러 묶었는데 아무리 봐도 짝퉁 느낌이 강했다.
“차 빼라.”
“느닷없이 무슨 말이냐.”
“장애인 주차장이 보이지 않나.”
“어둠이고 빗속이라 몰랐다. 기사가 잠을 자야 하니 조금만 양해해 달라.”
“조금 뒤에 군청에서 검열이 나온다. 빼라.”
“청학동에 살면서 좀 젊잖게 말 할 수는 없는가.”
“청학동에는 법이 없냐.”
동문서답 끝에 그가 차로 뛰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성질도 급했다. 단잠에 빠졌을 듯한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김이 빠졌다. 그렇다고 외지인인 우리가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삼성궁 매표소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그새 시간이 흘러 7시가 가까워졌기에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탁자가 여러 개 있어 보니 계곡을 끼고 나무 데크로 만든 커피점이었다.
원만 님이 버너에서 애인이 준비해 주었다는 불고기가 바로 익어갔다. 한남금북 정맥 때 보던 밥그릇 위에 놓은 버너가 아니라 다른 버너였다. 작은 게 성능이 좋았다. 썬연료를 사용하게 되어있어 가격 부담도 없어 보였다. 성능이 좋다고 하니 돌아온 답이 멋졌다.
“중국제가 고장이 안 난다. 크게 실수들 했다.”
그가 맥주와 소주를 꺼내 말았다. 여기저기서 반찬이 하나하나 나오니 금새 탁자 위가 푸짐해졌다. 아침 7시 경에 벌써 2차 째다. 볼거리를 주는 불어나는 계곡물을 보고 환담을 나누며 먹는 식사 겸 술자리가 멋이 있었다. 물론 맛도 있었다. 분위기가 이런 시너지 효과를 준다. 그 무렵 한 대장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탈출했다는 대화가 들렸다.
우리가 있는 곳이 청학동 선국(仙國) 입구다. 선 자를 재미있게 썼다. 사람이 산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 놨다. 석규 님이 묻기에 얼결에 아니 술김에 극(極)자로 보고 태국이라 말하니 신선 선(仙)자라고 정정해 준다. 다시 보니 그랬다. 사람인 변에 뫼산이니 선이다.
이런 신선한 곳과 이번에 만난 두 사람은 격이 맞지 않았다. 삼성궁에 사람이 모이니 식당이 생기고 커피점이 생기다 보니 근무자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들이라 신경이 날카로울 수는 있으나 이들은 타고난 시비꾼들 같았다. 일단 먼저 신경질로 시작하고 자기들 분이 삭을 무렵에야 조금 부드럽게 나왔다. 화장실 앞에서 본 황당함이 채 가지기 전에 2탄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뺄 때였다. 불이 들어왔기에 천 원 권 지폐를 넣고 누르니 동전만 이백 원 나오고 커피는 없기에 매표소 문을 두드렸다. 마흔 무렵의 사내가 나오기에 물었다.
“커피가 나오지 않았다.”
“한글도 모르냐. 고장이라고 쓰여 있지 않나.”
“그 자리에 불이 들어오기에 눌렀다.”
“똑바로 봐라. 고장이라는 글씨가 보이지 않나.”
어이도 없고 더 말할 기분도 아니라 웃으며 돌아서려는데 천 원을 가지고 온다. 괜찮다고 해도 끝내 주고 들어간다. 잠시 후 매표소로 가서 물으니 차를 마시다 한 잔을 따라준다. 조금 전 일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뭐하는 데냐고 물으니 다시 귀찮다는 표정으로 옆 안내문을 읽어 보라는 투로 말한다. 마침 책상 위에 안내문이 있기에 하나 얻으려 하니 “입장권을 끊는 사람에게만 주는 거”란다. 몇 번 얘기 끝에 겨우 얻었다. 그 안내문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선국이란 이런 곳이었다.
「청학동은 신라의 최치원 선생과 고려의 도선국사를 비롯한 역대 선인들이 동방 제일의 명지라 일컬었다. 선가에는 ‘청학동이란 천하제일의 명승지로 두류산 남쪽 기슭에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 폭포가 있으며 폭포를 지나면 외석문이 있고 외석문에서 내석문을 지나 동굴 같은 계곡을 십 리쯤 들어가면 주위 사십 리의 광개 평탄한 초전에 신선들이 살고 있는 별유천지가 나온다. 그곳에는 청학이 살고 있고 청학이 노니는 학연과 석정이 있으며, 뒤에는 삼신봉이 높이 솟고 앞에는 백운산 삼선봉이 둘러 있으며 후록에 석각삼봉이 병풍처럼 나열하고 해바위와 달바위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국이라 신선들이 사는 세상이란 뜻으로 동방선도의 중심지다. ‘세상이 물질만 중시하고 정신을 잃어버릴 때, 작지만 강한 제국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난다’고 조선비기열전에 전하고 있다.
또한 선국은 마고성, 삼신궁, 삼선궁, 신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고성은 인류의 시원을 모신 마고신궁이 있고, 삼성궁은 배달민족의 시조이신 한인, 한웅, 단군 등 삼성을 모신 민속성전이다. 삼신궁은 고대 옛 조선인들의 신앙인 삼신 사상을 바탕으로 한 산신, 용왕, 칠성을 모신 곳이다. 그리고 옛 신선들을 모신 삼성궁을 비롯해서 천제를 올리던 제천단이 있다. 선국은 원시반본과 마고복본의 큰 뜻을 지향하는 세상 사람들의 이상향이다.
안내문 한 자리에 선국은 종교단체가 아니라 민족의 정통도맥 동방선도인 신선도를 가르치며 화랑도 교육과 무예를 연마하는 곳으로, 1997년 1월 24일 내무부로부터 문화시설지구로 고시 받은 배달민족의 종합 민족성전이란다.」
이러면서 8시가 넘고 25분이 지났다. 계곡물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며 마치 나아아가라 폭포의 미니어처를 연상케하는 장관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갈색물이 급작스레 낙차가 지는 벼랑을 만나서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흰 물살로 퍼져 내린다. 엿을 만들 때 수십 번 잡아 다니는 수고 끝에 흰색이 나오는듯한 연상이 될 정도로 진한 갈색과 흰색의 조화 앞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빨려 들어갔다.
물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기세를 올리며 흘러내린다. 폭 5미터 정도에서 위력이 이 정도면 대원계곡이나 칠선계곡의 지금 상황을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몰두해 있는데 뒤에서 한 대장이 의미 있게 한마디 한다. 자유인을 모토로 살아온 자답게 이런 화두에 가까운 말들이 그의 입에서는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나온다.
“저 무게가 공중에 떠있다.”
조금 뒤에 정 회장을 비롯 대여섯 명이 너와나 님의 표현대로 상거지 차림으로 왔다. 물에 젖은 옷은 그렇다 치고 모두 덜덜 떠는 저체온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시간으로나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5km 정도 진행하고 내린 모양이다. 2m가 넘는 산죽 숲을 헤치고 나왔다는 말에서 그들의 고생이 더 읽어졌다. 이런 산죽들이 빨치산들에게는 아늑한 비트 역할을 했었다.
“아침 식사는”
“서서 겨우 해결했다.”
이런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걸 보고는 사서 고생한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훌러덩 벗고 씻는 모습을 지나가며 봤다. 내가 오히려 상쾌함을 맛보며 커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와나 님이 그곳 카운터 앞에서 1차 정리를 하고 등산화 속의 물을 양말에 적셔 짤 때였다. 매표소 직원이 어느샌 가 와 있었다. 이래서 3탄이 나왔다. 경상도 버전으로 읽어보자.
“거거서 양말을 짜면 어떡하요. 거기는 식당입니다.”
“아니 이런 날 이 정도도 안 되면 어떡하나. 뭐 이런 데가 다 있노.”
“가라면 가야지 왜 말이 많은교.”
“내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온다.”
그러던 너와나 님이 처마 밑으로 가더니 양말을 다시 짜면서 한 마디 한다. 열 받아서 하는 목소리가 훨씬 듣기 좋았다. 이래서 싸움은 말리지 말라고 했나 보다.
“이러면 됐나.”
2차로 내린 산우들을 맞으러 청학동을 떠났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는지 모르지만 얼굴의 미소가 여전한 이 과장 님의 움직임이 멀쩡했다. 하동댐을 지나며 한 대장이 잠시 차를 세우더니 가게에 있는 게 이게 다라며 막걸리 4병을 가지고 올라 왔다. 담배도 한 갑 주기에 고맙게 받았다. 비에 젖어 이미 엉망이 된 담배를 겨우 라이터에 말려가며 피던 차였다. 일단 마시고 남긴 막걸리 한 병은 중간에 내린 불고 님을 비롯 몸이 떠는 이들에게 좋은 약이 되었다. 이래서 오전 12시 전에 3차를 마쳤다.
한 대장이 안경을 벗고 지도에 얼굴을 대며 나침반 놓고 씨름하며 말하는 방향으로 차가 움직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GPS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나 보다. 종착점을 5km 정도 남긴 고개에 산우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너와나 님 표현대로 상거지였다. 집착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올바르지 않겠지만 이런 모습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산우들 한 무리는 다시 종착역을 향해가고 일부가 차에 올랐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산타 님이 가는 방향을 묻는다. 비닐 우비가 비를 막는 역할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되어 보인다. 그러고도 그는 망설임 없이 바로 산속으로 들었다.
얼마 뒤 불고 님이 오고 수색대 님이 오고 조금 더 뒤에 다리에 쥐가 났다는 이 팀장이 왔다. 불고 님이 진행하려는 걸 무리하지 말라며 막았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 빗속을 뚫고 걷던 길을 내리고 버스라는 아늑함을 보고 다시 나간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은 일이다. 와중에 나는 다리를 만져보았다. 이런 식의 잔머리를 굴리다가는 머지않아 서울 근교 산이나 다닐 거다. 다시 마음을 잡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음속에만 있는 게 아쉬울 뿐이다.
차가 목적지 식당에 도착했다. 이 팀장이 주인에게 한 대장님의 부탁이라며 막걸리 몇 병을 말하고는 완주자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남은 일행들 몇몇이 자리를 잡고 간단히 술을 나누며 산행을 복귀하고 있는 자리에 다가보니 역시 막걸리가 없었다. 넉넉한 인상의 주인에게 다시 부탁하니 그제야 이해가 되었는 지 오토바이를 몰고 나간다.
냇가에 있는 대연 형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물고기가 있어 보였다. 술기운을 빌어 객기로 고기를 잡아온다며 화분으로 쓰는 통을 비우고 내려갔다.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조심조심 걸으며 통을 물에 넣어 봐도 고기가 잡힐 리는 만무다. 깨끗이 접고 올라와서 보니 막걸리가 와 있었다. 정 회장이 빗속에서도 아끼고 왔다는 정상주도 나왔다. 정상주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이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중에 하나인 나는 늘 고마움을 안주로 더해 최대한 천천히 넘긴다.
“빗속에서 마시자는 걸 마가목주로 대체하고 사수했다.”
4차 시작이다. 17년산 위스키와 막걸리 몇 잔을 더한 모양이다. 소주를 마시던 이들도 막걸리를 받았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란 말처럼 그 험한 여정을 이겨내는 이들답게 알콜을 곡차로 승화시키는 내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 기억은 어느 휴게소 화장실이고 그 다음 기억은 죽전 휴게소다. 시계를 보니 예상보다 빨리 서울에 왔다. 정 회장이 양재에서 생맥주 한 번 쏜다는 말이 들렸다.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술과 안주를 적정하게 하는 날이 언제나 올지 모르지만 나는 안주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구청 건너편 생맥주 집에서 여러 명이 모였다. 근래에 아니 내 경우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이긴 처음이다. 변 사또 님, 함박웃음 님, 귀철 대장 님, 불고 님, 너와나 님, 강화 님까지는 기억이 난다. 끝자리 대군 대장과 두어 자리 건너 이 팀장은 보였다 사라지다를 반복했다. 이러면 계산은 이번에도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결단코 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해 본다. 결례나 범하지 않은지 모르겠다. 이래서 5차다. 아침 다섯 시부터 저녁 7시 무렵까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줄곧 마셔댔다. 가랑비에 젖은 옷이다.
“이형도 팀장을 실장으로 격상 시키자.”
“나는 회장을 오래했다. 이젠 고문으로 남았으면 한다.”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필림이 끊겼다. 다음 기억은 집이다. 우장산 역에서 걸어서 5분 걸리는 집을 마침 출입구에 서 있던 택시를 잡아타고 왔다. 135동을 315동이라고 해 지하주차장을 두어 번 돌고 다시 입구로 나와 내렸다. 다시 3분여를 걸어 집에 도착하니 불이 꺼져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 기억까지가 어제 하루다.
문자가 두 개 와 있다.
“자유인 산악회! 200mm 폭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 주신 대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낙남 첫날 많은 분들 참여에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안전한 산행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형도 팀장”
“어제 몸 상태가 불량했던 건 재발이 원인이라 입원을 했어요. 이참에 조용히 달래보렵니다. 송구해요. 한문희 드림”
이 문자들을 보며 솔직히 마음 한편이 찔렸다. 평소에 내 스스로 몸을 혹사한 죄로 호남에서 고생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낙남을 앞두고 일주일간 술을 자제하면서 몸을 달랬어도 첫 구간부터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바람을 앞에서 산에 오르는 쪽 보다는 피하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는 게 슬픈 현실로 자리 잡고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해 보려고 노력 중이나 이런 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호남 구간은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했었다. 반대급부로 그런 식으로 걸었기에 호남에 더 친숙히 다가갔다는 일방적인 평을 해보며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다.
지난 7일이 소서다. 대서가 오는 23일이다. 기대한 장마는 타는 대지를 공평하지 못하게 일부 지방을 충분히 적셔주지 못했고, 우리는 매일 찌는 더위와 전쟁을 하고 있다. 비록 첫 구간은 비바람 속의 추위 속을 걸었다면 나머지 구간은 무더위와 싸우며 비지땀을 흘릴 날이 더 많을 거다. 이것도 현명한 이열치열 한 방편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삼복을 맞아 한국의 세익스피어 이규보 선생의 시 한편을 감상하면서 옛사람들의 지혜를 보고 이번 후기를 맺는다.
은산 드리운 발에 여름해 길어
오사모 반쯤 벗고 서늘한 바람 쐰다.
벽통배에 술 건네도 지긋한 이 더위
쟁반의 얼음을 깨서 술을 맛본다.
여기서 은산(銀蒜, 달래 산)은 은으로 마늘통 모양으로 만들어 주렴 밑에 매다는 것을 말하고, 벽통배(碧筩杯)란 연잎을 맞붙여서 만든 술그릇을 말한다. 연잎 큰 것에 술을 석 되쯤 넣고 줄기 부분에 바늘 같은 것으로 구멍을 내면 줄기 부분이 대롱의 역할을 해서 술을 받아 마시는 것이다. 술은 오행에서 화(火)다. 삼복더위에 불을 넣는 다는 건 마치 폭탄주 원리와 같다. 그러나 이규보 선생님 차원이면 다른 세상이 된다. 그래서 무조건 좋은 것을 먹는 게 장땡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먹고 마시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 그간 정리해 둔 자료가 있어 조금 더 가본다. 남명 조식 선생에 관해서다. 지리산은 남명 조식(1501~1572)의 산이라 일컬어진다. 그만큼 지리산에는 남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남명은 젊어서부터 지리산을 여러 차례 유람하였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노년에는 아예 지리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남명의 기록은 ‘유두류록(遊頭流錄)’ 한 편이 전한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퇴계는 소백산 밑에서 나고 남명은 두류산 동쪽에서 났다”고 했다.
‘유두류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가정(嘉靖, 아름답고 편안하다) 무오년(1558) 초여름, 나는 진주목사 김홍지와 수재 이인숙과 고령현감을 지낸 이우옹과 청주목사를 지낸 이강이와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산속에서는 나이를 귀히 여기고 벼슬을 숭상하지 않는지라, 술잔을 돌리거나 자리에 앉을 때에도 나이순으로 하였다. 그러나 때론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기행문을 통해 여정을 좀 더 살펴본다.
「12일, 큰 비가 내렸다. 김홍지가 편지를 보내 그대로 머물게 하고, 갖가지 맛난 음식을 보내왔다.
13일, 김홍지가 와서 소를 잡고 풍악을 베풀었다. 이우옹, 김홍지, 이준민이 경쟁이라도 하듯 술을 실컷 마신 뒤 파하였다.
14일, 이인숙과 함께 이강이의 집으로 가서 묵었다. 이강이가 우리를 위해 칼국수, 단술, 생선회와 흰색·노란색 경단과 푸른 색·붉은 색 절편 등을 만들어 대접했다.
15일, 사천군수 노극수가 고을의 수령 자격으로 찾아와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모든 큰 배에 오르자 사천군수 노군은 술과 안주 및 음식을 실어 준 뒤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 기생 10명이 피리, 생황, 북, 나발 등의 악기를 모두 벌여 놓았으나, 이 날은 회간국비 한씨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고 채식을 하였다.
‘서로 뒤엉켜 잠이 들었는데 세로로 누운 사람도 있고, 가로로 누운 사람도 있었다. 김홍지가 편 담요와 겹이불은 폭이 매우 넓었다. 나는 처음에 그의 이불 한 쪽에 끼여 잠을 청했는데, 점점 밀치고 들어가 김홍지를 자리 밖으로 밀어내버렸다.’
‘선걸음에 몇 잔 술을 돌렸다’ ‘한 차례 술을 돌리고 풍악을 을렸다’ ‘창자가 뒤틀리고 위가 뒤집히는 듯한 통증으로 매우 괴로워하더니 설사가 점점 급해졌다’ ‘허리에 찬 북을 치고,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그 뒤를 따르면서 선두 대열을 이루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배가 몹시 고파서 가방에서 과일과 말린 꿩고기를 꺼내 먹고 추로주 한 잔을 마셨다’, ‘말에서 내려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우리는 갈증이 심하여 차가운 샘물을 두어 바가지씩 들이켰다’」
이런 표현은 유두류록 곳곳에 많이 나온다. 유람하기 딱 좋은 5월~6월의 14박 15일 동안 비가 3번 왔다. 일행은 사천만에서 배를 타고 화개에서 하선하여 쌍계사, 불일암, 신응사, 악양, 칠송정 등을 거친 기록을 보면 요즘 산행과도 별 차이 없는 행보다. 이들이 힐링 산행의 원조였던 것이다.
남명 선생에 대해 좀 더 들어가 본다. 경상대 허권수, 최석기, 강정화 교수의 ‘남명 조식’, ‘조선왕조 실록에 보이는 남명 조식 1권, 2권‘, ‘남명과 지리산’, ‘남명과 지리산 유람’ 등에서 발취하여 요약해 본다. 남명이 태어나고 영면하고 있는 인근의 경상대학교에는 남명학 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소에서 현재까지 남명학 교양총서를 22권째 발간 중이다.
명종, 선조 등의 수차례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던 남명은 사후에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배향되지 않는다. 조선에서 문묘에 모셔졌다는 건 유학자로서 큰 영광이다. 대유학자 남명 조식이 문묘에 없는 건 역사란 승자의 기록으로 당쟁에서 졌다는 데서 이유를 찾고 있다. 이러기에 사림 5현에도 들지 못했다고 한다. 사림 5현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통칭하는 말로 사림 사회의 정신적이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명 이름 앞에는 퇴계가 그렇게 불리길 원했던 처사라는 훈장이 빛나고 있다.
조선 시대 역대 왕가의 사당을 종묘라 한다면 유교의 성인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문묘라 한다. 문묘에는 공자 외에도 우리나라와 중국의 선현들을 함께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 조선의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조헌, 김집, 김인후 등이다.
조선왕조 선조실록 ‘남명 졸기(卒記)’는 이렇게 시작된다.
“처사(處士) 조식이 졸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말을 빌면 “지금 우리가 남명 선생을 기리는 것은 그가 말의 진실된 의미에서 처사였다는 사실에 있다. 옛말에 이르기를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도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했다. 그런 처사였다.”
최 규수가 말을 잇는다. “남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처사다. 어디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랴. 전 세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최고의 처사다. 자신을 갈고 닦아 도덕과 기강을 부지한 인간의 표준이다. 남명이 우리 역사에 살아 있는 한 이 땅에서는 진정한 처사가 늘 있을 것이고, 우리는 도덕을 숭상하는 수준 높은 문명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명 선생의 출생 비화다. 남명의 외가 집터는 풍수적으로 보아서 상당히 명당이었다고 한다. 어떤 예언가가 지나가면서 점치기를 “신유년(1501)에 이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커서 반드시 성현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태몽은 누런 용 한마가가 처가에 와서 잠을 자는 남명의 부모 방으로 들어온 거다.
예언가가 말했던 것과 같이 신유년 음력 6월 26일 진시(辰時: 지금의 오전 7시에서 9시까지)에 남명을 낳았다. 집 앞 우물에는 무지개가 솟아오르고 방안에는 찬란한 보랏빛 광채가 가득했다고 한다. 아쉬운 이는 남명의 외조부였다. 직접 밥솥에 불을 때어 미역국을 끓이면서도 예언가의 말을 되새기면서 “훌륭한 인물이 우리 친손자 가운데서 나지 않고 조씨 집안에 나고 말았구나”며 탄식했다고 한다. 인천 이씨 집안의 명당 정기는 남명의 어머니가 와서 해산하는 바람에 결국 남명이 받아 태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 해 동짓날 25일 경상좌도 예안현(지금의 안동시) 온계리에서는 우리 역사상 위대한 학자인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 같은 해 같은 경상도의 남북에서 두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것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뛰어난 학문을 이루어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한국학술사에서 우뚝이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양대 학파는 그 특성이 있었는데, 퇴계학파가 이론탐구와 저술이 그 강점이라면, 남명학파는 도덕수양과 실천궁행이 그 강점이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경상좌도는 인(仁)을 주로 하고, 경상우도는 의(義)를 주로 한다.”고 썼다. 남명과 퇴계의 학문과 기질이 지역 사람들의 체질 의식구조 및 자연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힌 말이다.
옛날에는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우도(右道)와 좌도(左道)로 나누었다. 같은 경상도 문화권이면서도 우도와 좌도 사이에는 뚜렷한 문화적 특성이 존재하였다. 좌도 문화권의 중심지는 안동이었고, 우도 문화권의 중심지는 진주였다. 진주는 고려 성종조 이후로 동해 연안을 제외한 오늘날의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상주, 고령 지역까지도 다 포괄하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남명은 학문에 힘쓰는 동안 자신의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경(敬)과 의(義)를 내걸게 되었다. 경과 의는 본래 ‘주역’에 나오는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경은 마음의 주재자이고, 의는 모든 행동의 올바른 기준이 된다.
“우리 집에 이 ‘경·의’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두 글자의 의미는 만고의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이다. 성현들이 남긴 많은 말씀들의 귀결은 결국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남명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경과 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문장을 스스로 퇴계의 문장에 견주어 이렇게 평했다.
“퇴계의 문장은 지금 세상에서 쓰이는 문장으로서 성취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비단을 짜려다가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니 세상에 쓰이기에 곤란하고, 퇴계는 명주를 짜서 한 필을 이루었으니 세상에 쓰일 만하다.
앞에서 말했듯 남명과 지리산은 하나다. 여러 차례 지리산을 유람하였고 만년에는 지리산 속에 들어가 살았다. 회갑을 맞아 강학 장소를 지리산 덕산으로 옮겼다. 열한 차례 직접 지리산 골짜기를 살피고 나서였다. 덕산은 중산리 계곡에서 흘러오는 살천과 대원사 계곡의 삼장천 물이 합쳐져 양당촌 앞에서 덕천을 이루는 곳이다. 뒤로는 구곡산이 버티고 있고, 멀리 장중한 지리산 천왕봉이 뚜렷이 보이는 곳이다.
천 석들이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아선 소리 없다네.
어떻게 하여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천 석들이 큰 종’은 남명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물을 상징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남명 자신이 지향하는 인간상이다. 기상이 장엄하고 포부가 원대하며 온축(蘊蓄:오래도록 연구하여 학문이나 지식을 많이 쌓음, 마음속에 깊이 쌓아 둠)한 것이 많은 선비다. 워낙 큰 그릇인지라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관직 명예 이익 여색 등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옳은 일만 해 나간다. 임금이 벼슬을 내려 불러도 나가지 않고, 때를 기다리면서 국가와 백성에게 줄 학문을 온축해 가고 있는 것이다. 곧 지리산의 만고에 끄떡 않고 서 있는 자세를 배워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고 했고 또 그런 지리산을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던 것이다.」
남명이 왕에게 올린 상소를 읽어보면 무시무시하다.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표현을 그대로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상소문 거의 다가 그런 맥을 같이 한다. ‘남명 조식’의 저자 허권수 교수는 그의 상소 줄거리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조정의 형편은 거의 망할 지경에 접어들었는데 그 원인은 대소 관원들이 모두 파당만 짓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하기 때문이다.
둘째, 왕권은 무력할 대로 무력한 데 이렇게 왕권이 무력해서 어떻게 국가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겠느냐. 지금 왕권이 무력하고 관리들이 부패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국가의 위기상황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셋째,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왕 자신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엽적인 제도나 법령 등을 개정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넷째, 임금 스스로 학문을 닦아 정치의 바른 길을 걸어야지 왕이 대비나 외척 간신들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다섯 째, 이상의 모든 정치적 폐단이 바로잡힌 뒤에 라면 자신도 나아가 정치에 종사할 용의가 있다.」
위에서 요약한 상소문 다섯 가지가 지금 다시 읽어도 낯설지 않음은 무슨 이유일 까. 많은 상소문 중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대비 문정왕후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단지 선왕이 남기신 한 외로운 아드님에 지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 하시겠습니까」
상소문에는 늘 죽음을 각오한다는 말을 적는다. 이에 왕은 “그 상소한 말이 공손하지 못한 데 관계되면 신하된 자는 마땅히 처벌을 주청해야 한다”하면 “유일(遺逸: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지방에 있는 유능한 인재)의 선비로서 성품이 거칠고 촌스러운데다 예모를 알지 못해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변호하는 관료들이 있었다. 당시 사관은 “이때 임금이 대단히 노여워했기 때문에 안색이 온화하지 않았고 음성도 평온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수없이 이러면서도 당시엔 희귀한 72세까지 장수한다.
「남명의 외손녀는 둘이다. 두 분 모두 심성은 올바르고 행실은 반듯했으나 인물이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질이 날카로웠고,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는 더더욱 볼품이 없었다. 큰 딸은 동강 김우옹에게 둘째 딸은 의병장 곽재우에게 시집갔다. 중신은 남명이 했다.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는 말에 혼인이 맺어지게 된다.
곽재우는 호걸다운 사람으로 성질이 급하고 괄괄했으니 결혼 초부터 마찰이 적지 않았다. 이런 정도가 심해지자 평소에 존경하던 스승 남명을 야속하게 생각하다 결국 참다못해 남명에게 항의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도중 뜻하지 않게 동서 김우옹을 만난다. 사정이 자기와 꼭 같았다. 남명에게 인사를 올린 뒤 성미 급한 곽재우가 거칠게 항의했다. 느긋하게 입을 연 남명 앞에서 두 사람은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더니 저의 앞날을 그르치려고 하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성질이 사납고 솜씨 없는 내 외손녀는 군자다운 사람이라야 데리고 살 수 있지 군자답지 못한 사람이야 하루인들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내가 자네 둘을 군자다운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했지, 자네들을 소인배로 보았다면 당연히 혼사를 말렸을 걸세.”
남명은 지리산 속에 살면서도 국가와 백성들에 대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남해안에서 여러 차례 난을 일으킨 왜적을 물리칠 방안을 꼼꼼하게 생각해봤고, 또 제자들에게도 이 문제를 해결할 대응책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국방의식을 미리 고취시키고,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자세를 갖추도록 했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오운, 조종도, 이로, 이정 등은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고, 정탁, 정곤수 등은 조정의 중신으로서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남명이 제자를 양성한 효과가 이렇게 국가 민족을 위해 발휘되었다. 임진왜란 때 거의 대부분의 의병은 남명 문인들이 일으켰다. 선견지명이 있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물에 의해서 국가 민족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흔한 살 되던 해(1571년) 정월에 퇴계의 부고를 들었다. 남명이 사는 덕산은 도산과 오백 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남명은 그 이듬해 연초에야 부고를 듣고서 슬퍼하면서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나도 이 세상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고 하고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장례 절차를 이야기한다.
“죽고 사는 것은 평범한 이치니라”
남명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다.
이번에 나는 ‘유두류록’을 읽으며 금언으로 남길 말 하나를 찾았다. 당장 휘호해서 두고 보려고 메모를 했다. 남명을 너무 뒤늦게 만난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어도 지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게 낙남정맥이 준 선물이 아닌가 한다.
간수간산간인간세(看水看山看人看世) 즉 ‘물을 보고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라’
첫댓글 낙남구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대한 분량의 산행기를 읽는동안 지리산속의 선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간수간산간인간세
날라리(?) 산꾼의 소상한 하소 맘속에 새기니 너그러워 지는 느낌이 듭니다.
ㅎ책을 쓰셨읍니다 거사님^^
반가웠고요 가르침도 감사~
남명조식선생 님의 외가는 지금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부응듬 옆에 잘조성해 놓았습니다.언제시간되시면 한번쯤찼아뵙는것도 좋을듯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중 산죽을 헤치고 산행을 하신분도 5차까지 달리고 또 기다리시느라... 그 고행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고행의 점차 추억으로 숙성 되겠지요.
ㅎㅎㅎ3탄 ~~~지금 생각해도 황당 ,헛웃음이 나오네요
그길 또 함께 걸어 봅시다요 ^^
시원하니~,속세의 잡음이 온전히 사라진 정다운 길임다 ^^ ^^
긴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셧습니다 ~~
완주도 안하시고 앉아서 천리를 봅니다 . ㅋ
책속에 길이있다는말 진짜인가봅니다 ...
산행기 잘읽고 갑니다 .
앉아서 천리를 보는 글 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시작이 힘들었으니
담 구간이 기대됩니다.
"看水看山看人看世"
자연에 모든 답이 있다는말
인정합니다...
영호님 술 안 취하셨네 과거에 태어나면 중국의 이태백 한국의 취화선에서 나오는 화가 지금 갑자기 이륾이 생각 안 나지만 좌우지당간 머리 좋고 술 좋아하는 사람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