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킬리만자로 등정기 >>
기 간: 19996년 1월 4일 - 26일 동행자: 박창서 교장선생님(현 거인산악회 회장) 이재석 교장선생님 윤은병 선생님
1월 4일 목요일
오전 9시 50분에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싣자,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홍콩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후 비행기를 갈아 타고 방콕을 거쳐 인도의 봄베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반갑지 않은 모기들로부터 한 차례 환영인사를 받고 난 후 호텔에 투숙, 일행 모두 한 방에서 묶게 되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나머지 두 사람은 바닥에서 자고 그렇게 인도에서의 첫 날을 보냈다.
1월 5일 금요일
아침 6시 50분. 다시 봄베이공항에 도착하여 10시 10분발 비행기를 기다렸지만 연착에 연착을 하여 오후 7시에 이륙하였다. 더구나 탑승구도 슬그머니 옮겨지고..., 그러나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는데 일행들 용케도 잘 참았다. 한국인의 끈기인가, 아니면 기다려주는 미덕인가.
1월 6일 토요일
6시간의 비행 끝에 나이로비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공항에서 황혈병 예방주사를 맞은 '옐로우카드'가 열흘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자 검사원으로부터 제지를 받았으나 그녀의 너그러운 양해로 해결이 되었다. 비록 흑인이지만 참 예쁜 아가씨였다. 공항에 파견된 여행사 직원과 상담을 한 후 호텔에 투숙했으나 그곳은 우리 나라의 여인숙 정도의 시설이었다.
시끌시끌한 뒷골목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여행사로 가서 여행 일정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 킬리만자로 산장은 만원으로 예약할 수가 없고 텐트를 이용해야 하는데 비용이 증액되므로 일정을 바꿔 사파리를 먼저 하기로 하였다.
오후에는 나이로비를 조망하고 국립박물관에 들렀다. 그곳에서 케냐가 식민지 당시 점령국가로부터 민초들이 잔악하게 학살당한 장면의 사실화를 볼 때에는 지난날 우리의 처지가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또한 스네이크원에서 본 뱀, 뱀, 뱀...... 역시 징그럽고. 나이로비대학 잔디밭에서 휴식하며 두 학생과 담소(그 날은 나이로비 전 대학생이 시내로 나가 봉사하는 날이라며 방명록에 서명하고 헌금을 강요하여 200원 기부)를 나누었고, 거리에서 과일도 사고, 쇼핑도 하였다. 저녁에는 밤거리를 산책했는데 길 잃을까 조마조마.....
1월 7일 일요일
아침 8시 키수모로 출발, 6시간여만에 그곳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식사를 했는데 옥수수 빵이 일품이었다. 저녁에 천둥과 번개가 치며 소나기가 내리자 정전까지 되어 어둠이 찾아왔다. 그러나 어느덧 소나기가 멎고 창가에 새벽달이 맑고 깨끗하게 비추니 고향생각이 절로 났다.
1월 8일 월요일
호텔 식사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빅토리아호수를 관광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호수에는 보라색의 옥잠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는데, 그것이 호수를 오염시키는 데 속수무책이란다.
관광을 마치고 오후에 적도로 출발, 1시간만에 도착하였다. 적도가 무척 더운 줄 알았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이어서 키수모로 돌아와 국민학교를 방문하였다. 학생들은 공동작업이 있는지 모여 있고 안내된 교장실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케냐 2천 개 학교 중 영어학력고사에서 18등을 했다고 하는 선생님들의 자랑에서 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교실환경이야 어쨌든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은 케냐나 아프리카를 이끌 주역들이 아닌가?
밤이 되자 어제 그 시간에 비는 또 내리고, 천둥과 번개, 그리고 정전은 어제와 같은데, 오늘은 뭐 재미나는 프로그램 또 없나......
1월 9일 화요일
오전 8시 5분, 2박3일 동안의 케내 제3의 도시인 키수모를 출발하였다. 도중 도로에서 스콜을 만나니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방울...... 고향은 지금쯤 눈이 펑펑 내리겠지.
나쿠라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마사이마라로 출발, 가는 길은 비포장이며 황톳길인데다 울퉁불퉁하여 차를 타기도 힘들었다. 마사이족의 민박촌 텐트에서 짐을 풀고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짐승 울음소리 멀리서 들리고, 밤 하늘에 별이 총총하여 머리 위에서 유난스레 반짝반짝거리니, 손을 내밀어 별 한 두 개 따고 싶어진다.
1월 10일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상쾌하고 산뜻한 공기는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준다.
오전 8시부터 사파리를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사파리. 봉고차 덮개를 열고 초원을 누비며 동물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것이다. 덩치 큰 검은 소를 잡아먹고 늘어지게 자고 있는 사자 가족들, 약육강식에 적자생존 원칙은 인간세계나 동물세계나 같음을 느꼈다. 코끼리도 야성이 강하다는데, 아기 코끼리는 아장아장 귀엽기도 하고, 기린은 느릿느릿 모가지는 꺼떡꺼떡 여유로워 역시 멋져 보였다. 케냐는 축복받은 나라, 특히 동물의 왕국이다. 아프리카에서 케냐는 자연환경이 좋고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오후에는 비가 내려 무지개가 산뜻하니, 무지개 타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집사람은 무엇을 할까? 문득 생각나는데 서울은 지금 한밤중! 쿨쿨 잠을 자고 있겠지.
김치찌개에 저녁식사를 마치고 텐트 안에 누우니 빗소리 요란하다.
1월 11일 목요일
마사이마라에서 마을 사람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나이로비로 돌아와 탄자니아 비자를 발급받기로 했다. 오후 1시 대사관에 도착했으나 비자 업무는 오전에만 한다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곳 관계자의 배려로 갖춰진 서류를 제출했더니, 규정이 바뀌어 한국대사관의 추천서가 필요하단다.
부랴부랴 한국대사관을 찾아갔건만, 문은 잠겨 있었따. 헌데 창구멍으로 내다보며 행색을 살피던 케냐 아가씨가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잠시 후 한국 사람이 나오더니 "어떻게 오셨습니까?"하는 것이다.
며칠만에 들어보는 우리말인가! 반갑고 반갑고.
잠시 후 추천서를 갖고 탄자니아대사관에 갔더니 즉석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숙소를 정한 후 모스하이행 셔틀버스를 예약하고 등산 장비점에 들러 버너를 다시 구입했다. 가스주입구가 우리 나라 버너와 다르기 때문에 그동안 버너 가스를 구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월 1일 금요일
정오에 국경 나만가에 도착하여 케냐를 출국했다. 탄자니아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치자 기념품을 팔러 몰려드는 장사꾼들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풍경은 어느 나라나 똑같다.
아루사에서 모스하이까지는 국립공원입구라서 그런지 도로 양편이 야자수나무 숲이 우거져서 장관을 이루었다.
자라여행사에서 킬리만자로 입산 계약을 하고 마랑구게이트로 이동했다. 드디어 내일부터 등산 시작이다. 나와 일행은 등산 전야제로 맥주잔을 부딪치며 파이팅!
1월 13일 토요일
오전 10시까지 오기로 했던 여행사 직원은 11시 30분이 되어서야 왔다. 산행은 12시부터 시작한단다. 11시 55분 드디어 산행을 시작, 만다라산장으로 출발했다. 등산로는 차량이 다닐 수 있을 만큼 넓고 하산하는 사람도 많았다. '잠보' '잠보'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서로 한다. 첫번째 쉼터까지 1.5시라는 표시판이 있는 곳을 만났는데, 우리는 1시간만에 올랐다. 이제부터 '폴레' '폴레'('천천히'라는 뜻)합시다!
마랑구게이트에서 만다라산장까지는 3시간 거리. 도착하니 소나기가 내렸다. 산길 양 옆은 정글이고, 고사리는 사람 키만큼 자라 숲을 이루었다.
닭 삶고, 닭죽 쑤고, 양배추 고추장에 찍어 먹는 토종닭 맛이 꿀맛이다. 설거지하는데 손이 시렵고 별은 총총! 2,727m의 만다라산장의 밤은 깊어간다.
1월 14일 일요일
오전 6시 일출이 장관이다. 지리산 노고단의 것을 '노고운해'라 표현하는데 이곳의 것은 뭐라 표현해야 할까? 아프리카 하늘의 구름 모습은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데 만다라산장 2,727m 아래 깔린 구름 바다라니... 오죽할까?
오전 8시 산장을 출발하여 마원즈봉이 보일 무렵, 주변은 열대 야생화가 가지가지로 곱게 피어 아름답다. 산행길은 어제처럼 완만한 오름세로 이어지는 한라산 성판에서 시작되는 산길 같은데, 좀 다른 것은 비교적 직선의 오름길로 훤히 오르는 길이 올려다 보인다는 것이다.
킬리만자로와 마원즈.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모였다 흩어져 정상이 보이는가 하니 구름 속에 묻히고, 구름 속에 있는가 하면 속살을 보이고, 산자락에 흩어지는 구름과 산 아래 저 밑으로부터 몰려오는 구름떼 금방 스쳐 지나가고.... 힘겨운 듯, 지친 듯 오후 2시 40분에 호롬보산장(3,780m)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 키보산장으로부터 하산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도 내일 이때쯤이면 키보산장에 있으려니 생각하고 용기를 냈다.
서울을 출발하여 지금까지 억누르는 생각, '나 홀로 탈락하는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는 잘 견뎠지만 호롬보에서도 힘들고, 고소증상이 나타난다는데, 아직은 건재하지만 언제 고소증상이 나를 괴롭힐까 염려된다.
1월 15일 월요일
늑장을 부려 오전 8시 30분 산장을 출발하니 야생화도 보이지 않고 바위덩어리만 있다. 래스트워터에서 물을 충분히 뜬 후 산행을 계속하려니 힘이 든다. 빤히 보이는 등산로는 평지 같지만 가까이 가 보면 오름길, 사람을 은근히 지치게 만든다.
호롬보산장에서 보이던 마원즈봉을 180도 돌아 뒤쪽으로 나올 때 MBC 촬영 팀과 삼성주관 연수생 젊은이들 일행과 만났는데 29명이 왔다고 한다. 그들은 키보드산장으로부터 하산하고 있는 중인데 정상에 오른 사람은 4명뿐이란다. 그 4명도 부추김을 받으며...
어이구, 나도 정상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키보산장이 보이는 지점에서 철썩 주저앉았다. 다시 걷자니 참으로 힘들다. 오후 4시. 키보산장에 도착하니 어제보다 더 힘들었음이 느껴진다.
2층 침대가 있는 방에 짐을 풀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나의 침대에서는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니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조심스러운데, 웬 소변은 자꾸 보고 싶은 건지...
새벽 1시부터 산행을 다시 시작한단다. 잠을 푹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펜잘을 먹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불도 못 켜고 조심스럽게 어둠 속에서 쌕 안의 약을 찾아 한 알 입에 놓고 침으로 삼켰는데, 삼키고 보니 훼스탈이다. 다시 펜잘을 더듬어 찾아 한 알 침으로 삼켰다. 펜잘을 먹었으니 잠이 잘 오겠지 안심했으나 웬걸, 머리만 뻐근히 아파 잠을 설쳤다.
어느덧 가이드의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으나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 가는데 비틀비틀 휘청휘청!
내심 걱정하며 하는 말 '어 이거 오늘 산행 못하겠네. 젠장 다 된 밥에 코 푼 게 아닌가. 어찌어찌 키보까지 왔는데 산행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컨디션이구나.'
1월 16일 화요일
끓인 물 한 모금과 박 교장이 주신 차 한 모금 겨우 하고 산행에 나섰다. 가이드 뒤에 아일랜드 여성, 이 교장, 윤 선생, 박 교장, 나 그리고 포터 순으로 일렬로 서서 '폴레폴레'하면서 가지만 그것도 힘에 부쳐 '스톱 스톱' 쉬어가자! 쉬아가자! 했지만 결국 일행은 두 파트로 나뉘고 나는 처진 파트에서 한 발짝 두 발짝... 열발 자국에서 쉬고, 하나 둘 셋... 또 열 발자국 가고 쉬고 하며 겨우 겨우 간신히 간신히 오전 8시 40분에 정상에 올랐다.
"어휴, 이거 왜 하나?" 킬리만자로 산 분화구 속으로 한숨소리 메아리친다. "5,685m 정상 정복을 나도 해냈어."라고 외치고 사진도 찍었다.
하산길에 고소증세가 일어나 심한 토악질을 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가속하여 갈지 자로 올라갔떤 길을 쏜살같이 직선으로 내려오는 즐거움이란... 그러나 걱정이 생겼다. 아침에 화장실에서 잃어버린 돋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메모를 해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고소증으로 인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라 점심으로는 물을 끓여 맹물 한 컵 마시고 말았다. 일행 4명이 모두 정상에 올랐으니 행운이며 축복이로다. 한 사람이라도 탈락자가 있었다면 팀 분위기가 어찌 되었을까? 축복 중의 축복이니, '하느님, 감사합니다'가 절로 절로 나온다.
오후 1시 키보산장을 아쉬움 속에 떠났는데 고소증 때문에 앞서가는 일행을 따를 수가 없어 원망스러워 하면서 웩, 웩 노랑 물 토하고 토하고.
헌데 태극기 앞세우고 느릿느릿하게 키보산장을 향하는 20명 가량의 일행. 알고 보니 대전교원산악회원들이었다. 아이구 어찌나 반가운지 이러쿵 저러쿵, 흥, 흥, 담소 끝에 "수고하세요"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가벼운 마음은 정상에 올랐다는 마음 때문이겠지.
컨디션은 회복되지 않았는데 일행들 날 팽개치고 앞으로 앞으로 쭉쭉 잘도 걷는다. 그러나 윤선생님이 뒤쳐져 동행을 해 준다. 비는 쏟아지기 시작하고 별 수 없이 그 비를 맞아 속살까지 젖게 되니 그 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은데도 호롬보산장은 보이지 않는다.
저녁은 굶고 미역국 한모금 마시고 만사 제치고 일찍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초저녁부터 잠들었다가 깨니 밤하늘에 새롭게 별이 총총하다. 컨디션이 회복되었고 머리는 상큼하다. 호롬보산장의 모든 것이 잠들었는데, 나 홀로 깨어 밤하늘 보며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들을 떠올린다.
1월 17일 수요일
오전 8시 40분. 호롬보산장을 출발, 느긋하고 여유있게 하산하여 12시 40분에 만다라산장에 도착했다. 이어 오후 3시 마랑구에 도착하니 하산 완료. 만세! 만세!
등정 인정서를 받고 기념촬용하고 히라스 안내로 오후 5시에 마랑구를 떠나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또다시 올 수 있을까? 또 왔으면...
하이모타운의 여관에 짐을 풀고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자리에 누우니 피곤하지만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다. 바람소리 요란하고 창밖의 별들 반짝반짝거리며 한 밤을 지새우는데 닭 울음소리 멀리서 들리며 새벽이 온다.
1월 18일 목요일
오랜만에 거울을 보니 얼굴이 일그러지고 콧잔등은 새까맣고 면도까지 못했으니 수염을 까실까실하다. 히라스의 안내로 지폐호수에 갔는데 호수는 온통 고루워라(갈대)로 덮여 있다. 원주민들은 줄나무 배로 갈대숲을 헤치며 호수 가운데로 가서 붕어와 메기 낚시를 한단다.
우리 일행은 한 조가 되어 통나무 배를 타고 갈대 숲을 헤치며 2시간 동안 호수를 맴도는데 갈대 숲들이 바람 부는 대로 둥실둥실 호수를 떠다닌다.
붕어를 잡아 굽고 준비해 간 라면 끓여 점심으로 먹는데 우리가 별난 모습인지 마을사람들 모두 모여 구경을 한다. 사진도 찍고 촬영도 하고 대단히 고마워들 한다.
오후 4시, 한국시간으로는 밤 10시. 우체국에 들러 서울에 전화를 신청하여 한참을 기다려 집사람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모기소리만한 집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허 반갑다. 잘 안ㄷ르린다고 악을 쓰며 "여기는 탄자니아인데, 산행 모두 안전하게 마쳤으니 모두 연락해. 시차도 있고, 여행 일정에 쫓겨 마음대로 전화할 수 없으니 아버지 제삿날에도 전화 못할거야. 26일 국제선 제1청사로 밤 8시 45분에 도착할거야. 알았지?" 통화를 끝내니 우체국에 볼 일 보러 왔던 사람들 모두 웃는다.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1월 19일 금요일
다시 케냐로 돌아간다. 몸바사는 항구도시로 케냐의 제2의 도시이다. 오전 8시 하이모타운을 출발, 20분 후 국경에 도착하여 탄자니아 출국, 케냐 입국 수속을 했다.
4시간 남짓 걸려 몸바사에 도착, 호텔에 짐을 풀고 밤중에 게를 잡았다. 게에게 랜턴을 비추면 쏜살같이 도망가는데, 내 손이 더 빨라 손바닥으로 덮쳐 코펠 속에 집어넣는데 어떤 놈은 손바닥을 무는데 엄청나게 아프다. 잡는 재미는 기가 막히게 좋고, 그득 잡아다 욕실에 쏟아놓고 깨끗하게 씻어 삶아 국물을 마시니 이상하고 찝찝한 맛이다. 국물을 먹는 게 아니라 아삭아삭 게를 씹어먹는 것인데 맛나고 맛나고 하다.
야자수 잎 흔들리는 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구분이 안되고 시원한 베란다에서 몸바사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바에서 노랫소리 경쾌하게 들린다. 율동 좀 하고 싶었지만 잤다. 오랜만에 푹 잤다.
몸바사의 해변은 와이키키 해변보다 훨씬 좋다고 하면서 누군가가 애인이 생각난다고 하니 "마누라하고 다시 와야지"라며 웃는다.
1월 20일 토요일
오전 6시 일어나 아침바다를 산책, 이 교장은 특기(?)로 조깅을 하시는데 나는 뛰기는 왜 뛰어, 천천히 걷는 게지. 한없이 걷다가 숙소로 돌아오니 한 시간이 걸렸다.
하루종일 자유시간이 되어 몸바사 시내에서 거리를 구경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숙소로 돌아와 실내수영장에서 놀고 야자를 따는 사람도 보았다. 꼭 원숭이 같았다.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한가로운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해변에 부는 바람 싱그럽고 모래알은 깨끗하고 멋진 해변이야. 한 번 더 오고 싶다는 말을 한다.
아쉽다, 이 밤이. 마지막 밤 아닌가. 한번즘 더 왔으면 좋으련만, 쉽지는 않겠지.
1월 21일 일요일
버스를 타려고 크로스 라인에 가는 도중 쌍용그룹 간판을 보고 좋아하며 웃었다. 오전 9시에 출발한다는 버스는 1시간 연착, 10시에 출발하고 끝없는 지평선을 또 달린다.
오후 4시 낮익은 나이로비에 도착, YMCM으로 가서 숙소로 정했다.
오늘은 아버지 제삿날, 종일 시무룩하니 서울 생각을 했따.
1월 22일 월요일
여행을 끝마무리 할 단계쯤 왔다. 심신이 조금 피곤하다. 보마사(민속촌)행 방문을 계획하고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민속촌에서 각 부족의 집을 둘러봤는데 사람들은 살지 않았다. 16채의 살림집 중 마사이족만 흙으로 네모지게 만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원형이면서도 특색이 있었다. 예를 들면 손가락 굵기보다 좀 굵은 나뭇가지로 얽어 침대를 만들었는가 하면 식구들 방을 칸막이하거나 동물들도 함께 살도록 한 점이다.
또한 민속춤 공연을 관람하는데 관람객은 우리 일행 넷과 그외 서너명뿐이었다. 아프리카 춤은 신난다. 흔들어대고 소리가 있고, 하여 디스코의 원조뿐만 아니라 춤 문화의 원류라고 생각된다.
돌아오는 길에 수퍼에 들러 가스와 맥주를 사고 소갈비, 살코기를 쌈직하게 사서 코펠어 넣고 삶아 지져 먹었는데 맛있다는 소리들은 안하고 "어, 찔겨. 찔겨!"
1월 23일 화요일
호텔에서 우갈리죽으로 아침을 먹고 홍콩항공사에 가서 항공편을 확인하고 쇼핑을 했다.
택시로 카니보레로 가는 도중 현대자동차를 방문했으나 한국인은 출장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케냐인 말하기를 푸우조 다음으로 현대차가 잘 팔린다니, 웬지 어깨가 으쓱으쓱한데 도로를 꽉 메운 차량은 거의 일본 것들이었다.
다시 택시로 아프리카에서 제일 좋다는 사파리파크호텔로 이동했다. 이곳은 정덕진 형제가 경영하는데 경리책임자도 한국인이었다. 그는 우리 일행을 마사이족의 안내로 호텔 구석구석을 둘러보게 했는데, 과연 잘 짓기는 잘 지었다. 조경은 뛰어나고 시설들은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졌으며 장엄미까지 있었다.
1월 24일 수요일
오늘 아침식사는 이변이라고 할까 반란이라고 할까, 박 교장과 윤 선생은 호텔 사를 한다고 하고, 이 교장께서 밥을 해 드신다고 하여 난 선택이 어려웠다. 호텔 식사를 하자니 그간 룸메이트가 홀로 밥을 짓겠다니 도덕상 정서상으로 할 수 없어 밥을 짓고 어제 남은 찌개에다 물을 더 붓고 끓였는데 하필이면 오늘 처음으로 밥이 설어 거의 생쌀이다. "미안해요." "뭐 잘 됐어요 꼭꼭 씹어 먹으니." 고추장 찐하게 푼 찌개국물, 배 속에 들어가니 기운이 솟는 것 같다.
케냐 특산물 홍차와 커피를 사고 여유를 부려보다가 택시 예약시간이 되어 짐을 싣고 공항으로 았는데 소낙비가 내린다. 21박 22일의 아프리카여 안녕! 공항 로비에서 맥주를 이별주로 하고, 밤 8시 30분 케냐 국제공항을 이륙한다.
1월 25일 목요일
잠들었다 깨고 잠들었다 깨고 하니 새벽 5시에 봄베이에 도착했따. 짐을 보관시키고 센추리스테이션까지 가서 거리를 걷는데 사람들이 참 많다. 걷다가 인도 차 맛보고, 과일 사 먹고, 사탕수수즙 사 먹고, 버스도 타고, 인도문까지 걸으니 다리도 아프고.
이른 시간인데도 인도문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관광상품 사라고 졸라대는 사람도 많다. 인도에서 가장 크고 훌륭하다는 타지마할호텔에 가서 티와 빵을 먹는데 호텔 입구에서 현대자동차 회장님 일행을 만났는데 수행원과 인사말을 나누기도 했다.
아잔타섬에 가기로 하고 지금부터 돌아가며 가이드하기로 했다. 아잔타는 박 교장이, 그리고 점심은 이 교장이, 시내 돌아오는 것은 나로 정해졌는데, 박 교장님 잘도 하신다. 아잔타에 도착해 맥주 마시고 사진 찍는데 할머니들이 항아리 같은 것을 이고 사진모델 할테니 모델료를 달란다. 곳곳에서 졸라대나 그래도 다홍치마라 젊은 영계 양쪽에 거느리고 사진 한 방 찍고 20루피 주었따.
입장료 내는 곳에 도착하니 원숭이들이 들락거리고. 허, 신기하다. 이곳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거대한 바위를 입구에서부터 파들어가며 떠받칠 기둥들을 조각하고 벽면에 거대한 인간상을 조각하고 조명을 고려치 않고 바위를 파들어가며 석굴암과 비슷하게 조각했다고 표현해 보자. 그런데 규모가 여기저기로 대단한데 전체가 한 덩어리의 바위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벽면에 조각한 인간상들의 하부가 잘려 나갔기에 추측과 들려지는 말로는 전쟁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인도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염분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조각품들이 파손되어 하체가 잘려 나간단다. 다행히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그런 현상이 없이 반들반들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로 관광을 하면서 벽면의 조각들을 감상한다.
다시 인도문에 돌아와 오후 관광은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기로 하고 2층버스 맨 앞자리에 넷이 나란히 앉았다. 봄베이 시내를 둘러보고, 전철도 타 보았으나 두 번씩이나 여자 칸에 탔다가 인도사람에게 혼나기도 했다. 빅토리아역에서 내리니 사람이 너무 많아 하마터면 이 교장과 헤어질 뻔했다. 다시 공항에 돌아오니 비행기는 아침 5시란다. 공항 대합실은 무덥고 헌데, 이 교장은 잘도 주무신다. 그저 아무데서나 앉으면 눈감으시니. 공항 바에 가서 맥주 한 잔씩으로 시간을 녹여봐도 너무 지루하다.
1월 26일 금요일
다행히 새벽 2시까지 탑승수속을 하여 지루함을 달랬따. 새벽 4시 45분 인도의 하늘을 날으니 22박 23일의 여정이 가물가물, 먼 추억 속으로...
태국에서 쉬고 홍콩에서 갈아타고 오후 8시 40분 김포공항에 도착. 살아 돌아왔다!
헌데, 내 배낭에 족쇄. 추측커니 미숫가루 봉지에 사파리 끝내고 마사이마라에서 기념품으로 주운 아프리카산 돌멩이 다섯 개. 그것이 밀수냄새가 났던 모양이다. 특별검사 받으라고 하여 땀에 쩔은 등산복 보따리를 하나씩 꺼내 보이니 세관원이 하는 말 "그냥 가슈."
공항에는 아내와 큰 조카 병우, 작은 조카 병환이가 마중나왔다. 흐뭇하고 열대에서 돌아오니 서울은 영하 6도이다. 찬바람이 옷깃에 스며든다.
우리 일행 모두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하고 기나긴 여로, 몸 건강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프리카를 다녀와서 --- 조용원
그 날은 온다 시계가 고장났어도 그 날은 오는데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그 날은 슬며시 온다 그 날은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오지만 오고 있는 그 날을 때로는 잊으며 사는 건데 하지만 그 날은 온다. 그 날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슬퍼하지는 않을텐데. 그러나 그 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는 말자. 그 날은 슬며시 온다.
<< 조트리오의 맏형 조봉원 선생님과 잠깐 인터뷰 >>
"호남정맥 19차 구간(감상굴재 - 내장산 - 추령) 때에는 산에 갈 수가 없어 동생과 함께 미리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그래도 동생과 함게 하니까 의지도 되고, 산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말하는 조용원 선생님(60세). 올해로 거인산악회와 함께 인연을 한 지 4년이 되는 조선생님은 그동안 백두대간 왕복 종주와 낙동정맥을 종주했고 현재는 호남정맥을 밟고 있다. 산과 인연을 맺은 지 10년도 되지 않지만 어느덧 조선생님은 거인산악회의 핵심 멤버(?)로 자리를 굳혔고 또한 산행경력도 화려하다.
조선생님이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현 거인산악회 회장님인 박창서 교장 선생님과 금양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로 둘이 함께 두타산을 오른 것이었단다. 당시만 해도 술과 담배만을 매우 사랑하던 조선생님은 산에 오르며 체력의 한계를 느꼈고, 이후 산에 다니면서부터 이것들은 모두 끊었다고 한다.
"산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조 선생님의 강한 깨달음은 두 동생(조봉원 초춘원씨)에게도 전달되어 지금은 '조트리오'를 형성, 거인산악회의 굵직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일본의 북알프스 등 해외등반 경험도 있는 조 선생님은 늘 바쁘기만 하다. 낮에는 아이들 가르치랴, 주말에는 호남정맥하랴, 토요산행하랴. 그래서 산에 다녀오면 늘 쓰는 산행기며, 산시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보관되어 있단다.
이미 5년째 여름방학을 이용해 지리산 종주를 해 왔다는 조 선생님. 이번 여름방학에는 여섯번째 지리종주를 계획하고 있다며 산행계획을 세운다. 장기적인 산행 계획이라면 남한의 8정맥을 모두 종주하고, 국내산들의 정상을 한 번씩 밟아보는 것이라고 귀띔하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