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인 내가 9살때 청춘과도 같은 나이 40에 홀몸이 되시어
오직 자식들을 위한 사랑과 희생 하나로 자식 6남매를 홀로 다 키워내신
내게는 자랑스럽고 훌륭하신 장한 나의 어머니!
이제 연세 70을 훌쩍 뛰어 넘으시면서 장남인 내가 나이 40에 다시 시작한 공부를
그렇게도 자랑스러워서 눈물 흘리시던 나의 어머니!
누가 학문에는 끝도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 죽어서도 학생부군이라고 했단 말인가?
학생의 신분만큼 좋은것도 없어보인다.
내게도 이런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님 손 꼭 맞잡고 회한의 한평생을 짧지만 긴 여행길이 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가고프다.
가길 희망합니다.
안녕하세요 학우여러분!!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컴퓨터상이지만...쉽지가않네요 집안이야길한다는게....
특히 저의 가슴에 슬픔을준 이야길한다는게....
전 예전엔 그리 눈물이많은편이 아니었어요
남들이 말하는 가난하다는 집에서 태어났지만....가난이라는게 제가 이제것 살아오는데 그리큰 걸림돌이되지않았구요 또 제 옆에는 가족이라는 소중한 사람들이 같이 있었기때문에...
헌데...그 소중한 사람들중 한명을 작년 12월에 잃었습니다.
울아빠.......
그래서 전 요즘 눈물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참아볼려구 참아볼려구 무지 노력하는데..쉽지가 않네요!
누군가를 가슴에 묻는다는게 이런건가 봅니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는 거...학우들은 몰랐으면 합니다.
울엄마는 아직도 아빠의 그늘속에서 살아갑니다.
저역시 그러하죠
식사할땐 버릇처럼 아빠를 부릅니다.
엄마는 아직두 울아빠가 좋아하시던 음식들은 만드시곤 혼자 드세요.
어찌 이러한 모든걸 표현할수가 있겠어요.
저희 가족에겐 힘든 나날들입니다.
작년 12월 이후론 저희 집에 많은변화가 일어났어요
호주가 엄마로 바뀌고...아빠의 베게가 사라지고 그자리엔 언니의 베게가 놓였어요.
시골에 혼자 계실 엄마걱정에 울언니가 서울짐을 정리하고 내려왔거든요
무지 고맙고 또 고마운 우리 언니입니다.
그리고 저역시 독립하기위해 노력하고있는 중입니다.
저희 엄마의 어께가 너무 무거워보이거든요.
요즘 제겐 걱정거리 하나가 늘었습니다.
바로 제 엄마일루요
요즘은 저희 엄마가 왠만해선 웃지않으세요.
시골에만 사셔셔 소박한분이셨는데...
요즘은 주위의 어떤일에건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변해가는 엄마를 보고있으면 가슴이 무너지죠!
무너진다는 단어가 너무 오버하는거 같나요?
전혀 그렇치 않아요!
정말 가슴이 무너진다구요
그래서 전 어떤 기회로던 저희 엄마에게 평안을 되찾을수 있는 방법을 찾고싶습니다.
금강산 관광!!저희 엄마에겐 좋은 기회가 될것같습니다.
저희 아빠랑 변변찮은 관광한번 못가셔서 못내 서운해하셨는데....
하지만 저희 식구 가슴엔 언제나 아빠가 살아계시니..엄마 혼자 가시는게 아니라 아빠와 같이 가는거라고 생각해요
전 솔직히 이글을 쓰면서 고민을 많이했어요.
엄마를 금강산에 보내드리기 위해 울아빠를 판건아닌지 하구요...
후회반, 기대반으로 글을띄움니다.
저보다 더 급한 사연이 분명코 있겠지만 저역시 저희 엄마를 금강산에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제글이 참고가 되길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횔 마련한 주체측에 감사드립니다
제겐부모님과 같은 분입니다.
.. 전 사실 통일에 대해 커다란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의 외할아버지말씀대로 통일에 대해 맘속으로 응원을 하고 기원하는것 밖에는....
전...저의 부모님과 다름없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금강산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전 어려서 일하시는 어머니때문에 외가에 맡겨져서 쭉 자랐습니다.
어린 동생들과 저를 맡아 키우시면서 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몸과 마음고생으로 찌든 당신의 딸을 보시면서 늘 눈물을 보이곤 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늘상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좁은 시민 아파트에 거의 들어오지 않은 불빛에 이리저리 밝은 곳을 찾아 실을 꿰어 힘들게 바느질을 하셨습니다.평생을 옷을 지어 5남매를 길러내셨고, 그중 첫째딸이 죽어 저의 엄마가 큰딸이 되셨죠.
엄마는 몸이 너무 약하셔서 너무나 자주 누워계셨기 때문에 저와 저의 동생은 외가집에서 북적이면서 살았습니다.
어린나이에도..난 왜 할아버지는 회사에 나가질 않는걸까..왜 돈을 못벌어와서 할머니가 힘들게 힘들게 바느질해서 먹고 살아야할까?
왜 우리엄마는 맨날 아플까.....가 궁금했고 서글펐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형편이 나아지고 다시 부모님과 살기 시작하면서 어린시절은 잊어갔습니다. 하지만, 저의 외삼촌들께선...정말이지 다른 사람들이 흉보던 그런 사람들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런 얘기 까지 하고싶진 않지만......큰외삼촌은 종교를 바꾸고는 제사를 거부하며 외할아버지와 인연을 끊었고, 둘째와 세째 외삼촌은 해준게 뭐가있냐며 외할아버지와 싸움을 하고는 아예 연락을 끊고 산다고 합니다.
언젠가 할아버지께선 저를 보고 사람이 그립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멀리 떨어져 학교에 다니느라 일년에 몇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저를 길러주셨는데 말이죠...
그리고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전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께서는 일본의 유명대학출신의 엘리트셨고,한국에서 기자로서 활동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일본에서 거짓 보도를 쓰라고 강요하고 협박하고 결국엔 할아버지께선 직장을 그만 두셨고, 해방이 되어 다시 기자가 되셨지만, 일제 청산문제에서 많은 일이 있으셔서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외할아버지를 존경합니다. 한달에 저의 어머니가 드리는 약간의 돈으로 두분께서 살아가시지만...,비록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버림받으셨지만..국가 보조금마저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힘들다고 하더군요. 하긴요...3명의 아들이 있으시니깐요..우리의 나라 조국이 있기위해 애국지사님들의 눈물겨운 항쟁과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외할아버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애국지사라는 커다란 칭호를 달지는 못했지만......도시락 폭탄을 들고 뛰어드시진 못하셨지만..뜻을 굽히지 않으신 외할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로 인해 많은 고생하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꼭 한번 여행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병상에 계시는 어머니도 빨리 일어나셔서 함께 가셨으면 좋겠구요..
내일이면 어버이날이고.. 아마 외가집의 TV는 하루종일 켜지지 않을껍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집안이야기.. 이런 어두운 이야기 하기가 아무리 익명이지만...꺼려지고 그렇습니다만..
전 저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으로 이글을 씁니다. 제가 그분들께 좀더 빨리 웃음을 드릴수 있게 도와 주세요.
7번의 장례식
어느덧 인생의 마지막 골인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앞만보며 달려오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물 한모금 제대로 마쉬지 못한 채 어느덧 그들의 인생은 골인점에 점점 더 가까워져만 가고 있다. 희생과 봉사라는 단어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것 처럼 무엇때문에 자기들의 인생을 우리들에게 의탁하는 것일까?
5월달이어서 그런지 무척 부모님의 생각을 많이 해본다. 선물은 사줘야 하는데 돈은 얼마없고 또 부모님의 선물보다는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에 더 신경을 쓰는 우리들...
모두들 반성이라는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러한 잘못 조차도 우리에게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부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전 아버지께서 아침에 가슴을 움켜쥐시고 식은땀을 흘리고 계셨다.
쌀쌀한 새벽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모두들 긴장과 공포감속에서 잠시 길을 잃은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진단한결과 협심증이라고 하였다
"협심증"...정말 귀에 익숙한 단어였다. 왜냐면 작년에 작은아버지께서 협심증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2개월간의 투병생활을 끝내는 이기지 못하시고 쉴수 있는 공간을 찾아 가셨다.
지금 우리는 이런 악몽이 다시 나타날까봐 두려워하면서 하루하루 긴장된 삶의 연속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생활에서 가장 힘든분이 바로 어머니가 아닌가 싶다. 20살의 나이에 종가집 며느리로 시집와서 7번의 장례식을 치르셨던 분이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단 한번의 장례식도 안치르고 가는데 무슨죄를 졌길래 7번이나 장례식을 치르셨을까?
더구나 기쁜일도 아니고 남을 보내야하는 슬픈일을 ..........
시집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내가 초등학교때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대학교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작년에 작은아버지까지...더욱이 우리 어머니는 외가집에 아들이 없어서 아들몫까지 다해야 했기에 그 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삭신이 내려앉을것 같다."그리고 "허리가 끊어질것 같다."며 웃으시면서 나에게 말을 한다. 그 웃음속에 담긴 어머니의 말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차라리 화를 내시면서 "돈좀그만가지고 가라"고 크게 소리라도 지르면
속이라도 시원할텐데. 그런 아쉬운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시는 어머니.
대학생 3명을 가르치시기에 너무 약해져버린 몸으로 추적추적 비가 오는 오늘도 어머니는 페인트를 칠하시러 아침일찍 작업복을 챙기셨다.
페인트 냄새를 1분만 맡아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인상을 쓰는 우리들.
하지만 벌써 10년이 넘게 우리가 인상을 쓰고 외면하는 냄새를 맡으로
나가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정말 죄송하고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
마지막으로 죽어서 술한자 더 따르고 제사상 푸짐하게 차리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고 싶어 이런 작은 마음을 몇자 남겨본다.
..............(제목없음)
글을 쓰기전에 아주 많이 망설였습니다.
나보다 더 절실하고 애절한 사연이 많이 있고 또 그 사람들 보다는 나는 나중에라도 부모님과 함께 갈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에 몇번을 망설이다가 글을 올립니다.
저는 엄마와 함께 삽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제는 아버지의 얼굴조차기억조차 나지않습니다.
저희엄마께서는 어린 저와 제 동생을 혼자몸으로 키워가면서 항상 저희들에게 희생하시면서우리를 위해 자기의 모든걸 내놓으시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는 저는 너무 어렸던것 같습니다.
작년 고3, 항상 마음아프게 키우던 딸이 고3이라고 저녁 늦게 들어오는 저를 현관앞에서 더운 여름이나 추운날이나 기다리시고 수능 보는 그날 까지 정작 수능보는 저보다더 가슴졸이시며 힘들게 뒷바라지 해오셨습니다. 원하지 않았던 학교에 오면서 모두가 다 내 책임이고 내 잘못인데도 오히려 저보다더 힘들어 하시고 학교에 입학해서마저도 항상 걱정으로 지내시는 ,,,,그런 분이 저희 엄마입니다.
엄마는 착하기만 하던 딸이 대학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줄 알지만 저는 지금 그런 엄마를 속이면서 다른일을 하고 있기에 더욱더 엄마께 죄송합니다. 물론 그일이 옳다고 생각하고 제가 할수만 있다면 해야 할 일이기에 불효를하고있지만 이번기회를 통해서 라도 조금이나마 제 마음속의 불효를 씻고 싶습니다.
우리 외할머니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올꺼라고 생각 하진 않지만 오늘 자대 회장님께서
이곳에 사연을 올리라는 말을 듣고 문득 외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미흡한
솜씨로 나마 외할머니의 한 많은 인생사에 관해 글을 올려 봅니다
18살에 외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외할아버지가 일제 징용을 당하시자 함께 일본으로 넘어가 갖은 고생을 하시고 6.25때는 지리산 근처에 사진지라 빨치산의 위험속에 가슴졸이며 그렇게 사셨답니다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 께서는 젊었을적 많이 아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초등학교 4학년때 부터 부뚜막에 불을 지펴 밥을 해먹고 학교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40이 되기전 이가 다 빠지셔서 틀니를 하셨고 남들이 아기를 낳으면 나아 질꺼 라는 말에 40이 넘어 우리 엄마와 18살 차이 나는 막내 아들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픔에 시달렸고 곧 죽을 꺼라는 생각에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 할때 까지만 살았으면 한다고 하셨답니다
자식은 큰 외삼촌 우리엄마 그리고 우리 엄마 아래로 외삼촌 ,이모 그리고 외삼촌 둘을 두셨는데 우리 엄마 바로 위와 아래 내가 모르는 두딸을 두셨는데 어렸을 때 잃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큰 외삼촌은 30이 넘어 딸과 아들 둘을 두고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셨습니다 외숙모는 그후 집을 나가 셨고 남겨진 두 손자를 할머니가 키우셨습니다 큰아들을 잃은 슬픔이 가시기엔 너무 짧은 1년후 엄마 바로 아래 남동생이 갑작스럽게 돌아 가셔서 장성한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엄마를 끝으로 자식들이 결혼을 하지 않아 40을 바라보는 이모와 30이 된 막내 아들.. 그래서 남들 결혼 하는것만 보면 눈물을 흘리시며 속상해 하십니다
몇년전에는 뇌수술을 받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하신 그 달, 외할아버지꺼서 폐암으로 입원 2달만에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할머니의 충격이 크셨답니다
지금은 시골에 혼자 사시는데 할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시려 오는게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사실지 모르는 할머니께 서글펐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웃음지을수 있도록 금강산 여행이라는 선물로 기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어버이날 선물 한번 드리지 못했고 자식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으로 환갑잔치, 칠순잔치 한번 못해보신 불쌍한 우리 할머니의 사연이 부족한 손녀의 글솜씨로 제대로 표현이 되지 못했지만 우리 할머니께 처음으로 큰 선물을 드릴수 있도록 도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니는
아버지는..
서울에 사시는 큰아버지를 대신해 나실때부터
할머니를 모시고 여지껏 사셨습니다.
시골에서 자식들의 더 넓은 교육을 위해 부득이하게
도시로 나오게 되자 할머니는 도시는 답답하시다며
홀로 시골에 남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3학년때 홀로 되신 할머니는
그렇게 시골에 남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시골에 남으셨습니다.
직장도 옮기시지 않으시고 그렇게 할머니곁에서
5년동안 츨퇴근 하셨습니다.
당신의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늙으신, 노모의 걱정으로
할머니를 남겨 두고 오실때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아버지의 눈에선 눈물을 볼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번의 위 수술과 한번의 장수술까지 했던 상황에서
제가 어렸을적 크게 아파 생사를 오갈때 수술한 그대로
아픈 배를 움켜 잡고 제곁을 지키신 분이십니다.
병원에서 포기하라고 그렇게 만류하고 사양했지만...
아버지는 어린 핏덩이에 불과한 저를 끝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어릴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가 할머니께
드린 효를 보아왔습니다..
자신의 분신처럼 할머니를 돌보아 드리며
그렇게 할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신것이 아니고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돌보아주셨을지도 모릅니다.
항상 곁에서 의지하며 난관에 부딪힐때마다 도와주시면서....
한창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할때 그 사랑을 잃으신 아버지....
우연치않게 금강산에 갈 기회가 생겼었는데 아버진 그 티켓을 두번 생각도 안으시고 할머니께 드렸습니다...
어버지가 할머니께 하신 효도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아버지께 무언가를 그리고 싶습니다..
배운 사랑...
받은 사랑...
아버지께..
아버지께 드리고 싶습니다...
울 엄마
집으로... 라는 영화를 봤어요..다들 많이들 보셨죠..
북문방앗간에서 싼표 두장을 구해 엄마와 함께 보러갔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속 칠순 할머니의 모습에
어렸을적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더군요..
그리고 그 외할머니의 모습이.. 몇년이 더 흐른후엔 우리 엄마의 모습일거라는 생각때문에 맘이 많이 아렸어요..
엄마 연세의 대부분의 어머님들이 그러했듯이 얼굴도 모르는채 결혼식을 올리고
그것이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모진 시집살이 견뎌내고 하나, 둘 자식을 낳고
삶이 너무 힘들어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으실땐
어린 자식들 보면서 이것들을 두고 어떻게 라는 생각으로 힘든 맘 꼭꼭 접어두신채로
그렇게시골에서 남의집일을 해주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다가는
넷이나 되는 자식들 초등학교도 다 보낼수 없을것 같아
밥그릇.숫가락.그리고 이불한채만 짊어지고 순천으로 나오셔서
외상방을 얻고 쉴새없이 일하시면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시고
이제는 밥걱정 않고 옛이야기 하며 사실만큼은 되셨지요..
아빠.. 아빠도 그런삶이 너무 힘이 드셨는지 조금씩 드셨던 술의 양이 늘어나고 지금은 알콜중독상태에 이르렀어요..
술만 아니면 너무너무 좋은 아빠인데 술이 취하시면 어머니를 너무 괴롭혀요..
연세를 드시면 덜하시겠지 싶었는데 요 몇년들어 부쩍 그 횟수가 늘어가네요..
예전엔 몰랐었는데 대학을 들어와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
아빠의 주벽과 자식들 몰래 엄마를 괴롭히는 것을 조금씩 알게됐지요..
술취하지만 않는다면 늘 좋은 아빠.. 자식들을 위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시는 아빠로만 알았는데 그 이면에 우리들 몰래 수십년간 엄마를 괴롭혀오신(의처증이라고 하죠..) 아빠의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 너무 아프고 속상해서
그런 아빠와 어떻게 견디며 사셨느냐고 왜 엄마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우리들에게 말하지 못했느냐고 도리어 엄마에게 따져물었지요..
엄마는...
니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에 그런사실들 다 알면 방황하고 삐뚤어져 나갈까봐 그냥 혼자서 삭였다고.. 그리고 니들 다 짝지워서 결혼시켜 내보낼때까지는 혼자만 안고 살려고 하셨다고.. 그제서야 어렸을적부터 아무 이유없이 몸져누우셔서 일어나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왜 그랬었는지 이해할수 있었죠..
자식들만 아니었다면 어디 도망이라도 가셔서 아버지의 모진 구타를 당하지 않고 사실수 있었을 텐데..
자식들때문에.. 자식들 앞날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막연한 희망을 안고 여지껏 살아오셨다는데..
엄마는 그 흔한 계모임하나 갖지 못하고 계세요.
가족의 동행이 아니면 절대 허락하지 않으시는 아버지때문이죠..
이제서야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한 제가 가끔 구해오는 영화표를 가지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시는게 요즘의 어머니에겐 유일한 바깥나들이며 사치인 셈이죠..
엄마에게 며칠의 여유를 더 드려보고 싶어요..
가끔 다니러 오는 이웃과 친척들의 해외여행 이야기를 마냥 부러워하시며
듣기만 하셨던 어머니에게도 자랑하실수 있는 기회를 안겨드리고 싶어요.
젊은 엄마
울 엄마는 참 젊으시다. 올해 42세!
난 졸업했어야 하는 4학년, 98학번이다. 내 나이 24살!
엄마와 길을 걷다보면 이모냐거나, 언니냐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 말이 듣기 좋지만 가끔은 가슴 시리도록 슬프기도 하다.
참 슬프고 힘들게 사신 42년 인생이다 싶다.
엄만 형제가 아주 많은 가정에서 자라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 부터 공장과 같은 곳에서 일을 하셨다. 그러다가 아빠를 만나셨고 20살도 채 되기 전에 할머니가 계시는 아빠집으로 오셨다.
그렇게 엄마는 제 2의 인생을 사시게 되었다.
홀시어머니와 두 시동생. 농가의 밭일과 논일... 그리고 아기.
엄마의 20대 초반은 그러한 풍경으로 밖엔 표현이 안된다.
지금 내 나이에 울엄만 3남매의 엄마였으며, 며느리였으니.....
그렇게 논으로 밭으로 온 일을 그 작은 몸 하나로 다 해내셨다.
그러다 아빤 회사를 다니셨는데 어느날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그로인해 근 1년을 병원에서 사셨다. 그 몫은 또 고스란히 엄마 꺼!
아빤 오랜 투병 후 퇴원을 하셨지만 남은 것은 허름한 집 한채 일뿐, 논도 밭도 이젠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3남매는 계속 커가고만 있었다.
그래서 시작하신 일이 붕어빵 장사셨다.
겨울이면 길 한모퉁이 작은 포장 안 리어카에 실린 붕어빵...
젊고 이쁜 엄마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그걸론 부족했다.
우연히 알게 된 신문 배달 일을 맡으셨다.
4년을 하루 같이 새벽 2~3시에 일어나 온동네 집마다 넣으셨다.
서울 큰 댁에서 모시는 제사에 한번 가실 수 없다.
신문일이란 게 그렇다. 그러다 어느날 한번 늦으시면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고.. 많이 힘들어하셨다. 다행히 얼마전에 그 일은 그만두셨다.
그래서 잠이라도 좀 편하게 주무시니 너무 좋다.
지금은 신문을 안하시고 다른 일을 하신다.
포장마차.. 동네의 약수터에서 포장마차를 하신다.
햇볕드는 산 허리 한 곳에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천원짜리 먹거리를 팔며 비위 맞추며 서계시는 작은 우리 엄마...
난 주말이면 그런 엄마 곁에 간다.
이 큰딸이 엄마 옆에만 서도 힘이 된다는 것을, 든든하다는 것을 알기에.
이 작은 우리 엄마.... 소녀에서 아줌마가 바로된 우리 엄마.
우리 엄만 아가씨 시절이 없다.
당연히 어디 여행 한번 해보신적이 없다.
이런 우리 엄마가 가장 가보고 싶어하신 곳이 고작 경주란다.
우리 초등학교 때 이미 한번쯤 다 가본 경주....
엄마에게 선물을 해드리고싶다.
단 몇일이라도 자신을 위해 시간을 보내시고, 맘 편히 쉬시게 해드리고 싶다.
사실, 한 여름 장사인 포장마차를 아빠에게만 맡겨두고 가시려 하실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여행이 엄마에게 아주 의미있고,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것이며 그래서 아빤 엄마를 흔쾌히 보내주시리라 믿는다.
엄마 인생의 유일한 재산인 당신의 자식이, 당신 딸이 보내드리는 여행.
비록 경주가 아니지만 그것보다 훨씬 좋아하시리라 생각한다.
내 기억속 20대 엄마는 어디로 가셨을까?
엄마의 인생은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와 가고 싶어요
아직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6년전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부모님은 언제나 곁에 있어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때 내 나이 16살..엄마는 40도 채 되지 않은 나이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모든 것은 바뀌었다. 이제는 엄마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가야 하셨다. 2녀 1남 중 내가 장녀이긴 했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해 드릴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경제 사정도 넉넉치 못하였고 살아가면서 아빠가 있었을땐 몰랐던 어려움들도 많이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는 지금까지도 우리 3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생하고 계신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시다 보니 얼굴엔 어느새 웃음보다는 지치고 피곤한 기색만이 보이신다.
아빠는 여행을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꼭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왔었고, 방학 때는 전국일주도 하곤 했었다. 너무 자주 가서 어릴 땐 그렇게 가기 싫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때가 그립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가족여행이란걸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럴만큼 여유도 있지 못했고 엄마도 밖으로 나가시는걸 꺼려하신다. 엄마가 잘 못한 일도 아닌데 항상 죄인같은 마음이신가보다. 이런 엄마와 금강산을 꼭 가보고 싶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여행을 엄마와 둘이서 이런 저런 얘기도 하면서 며칠만이라도 즐겁게 해 드리고 싶다. 아직도 학생 신분인 내가 엄마께 해 드릴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기에 여행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은 것이다. 어버이날이였던 그제도 그냥 지나갔는데 너무 죄송한 마음뿐이다. 계속 망설이다가 늦게서야 이렇게 쓰게 됐는데 못난 큰 딸이 엄마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꼭 주었으면 좋겠다!^^
부모님께 자그마한 휴식을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백내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제가 태어난 게 우리 집에 불행한 일 일지도 모르지요. 넉넉하지 못했던 저희 집은 제 수술비 때문에 하나둘씩 줄어가기 시작했고,, 저희 집 생활은 더더욱 어려워져 갔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있던 것들도 아버지가 너무 착하신 덕에 보증으로 대부분 없어졌구요.....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지금은 생활 보호 대상자입니다. 한 달에 30만원씩 나오지요.
제 학비... 한 학기에 130만원 정도 합니다. 저희 아버지 1년 내내 죽도록 고생하시고 농사 지어서 300만원 정도 버십니다. 그래도 제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정상인이 아닌 제가 그들과 나란히 설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저는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집에 내려가기가 정말 싫습니다. 부모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용돈을 받으러 가는 제 자신이 싫어서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르바이트하면 되지 않느냐고"고 말입니다. 저도 제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처지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전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도 강의실 칠판에 써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조건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못하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희 부모님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도 버거워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여행이란, 그저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도 늘 웃으시면서, 힘들다는 내색 하나도 없이 늘 저를 기다려 주시고 맞아주시는 부모님........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 내가 뭔데......, 내가 왜? 태어나서 부모님을 이렇게 고생시키는지....... 정말 이럴 땐 삶의 의욕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저 하나만을 바라보시는 부모님이 있기에 오늘도 꾹 참고 용기를 내어 봅니다.
저의 부모님은 늘 그렇게 살아 오셨습니다. 손, 발이 다 갈라져도, 돈이 없어서 드시고 싶은걸 못 드셔도, 늘어가는 주름살만큼이나 세월의 흔적 속에서도, 늘.... 싫으시단 한마디 불평 없이, 항상 저를 위해 살아 요셨습니다.
그런 부모님을 위해 작지만 이번 기회에 삶의 휴식을 드리고자 이 글을 띄어 봅니다.
인간으로써 권리를 찾아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벌교읍 추동리라는 아주 시골에서 자랐다...초등학교 6년을 4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다녔고, tv채널을 아직도 2개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시골에서 우리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28년째 모시고 살아오셨다...
유교적 도덕 관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 고집 때문에 엄마는 많이도 고생하셨다. 밥그릇 한번 상에 올려놓고 드시지 못했고, 항상 아궁이 옆에서 밥그릇 하나 들고, 쪼그려 앉으셔서, 김한장 구워서 김치에 먹는것이 전부였다.
그런 어머니는 지금도 자신이 먹는 밥은 상에 올려 놓지 않는다.
그걸 볼때마다 열불터지는 아들 마음은 모르실거다.
그 30년동안 우리 부모님은 제주도도 한번 못다녀오셨다.......아니 여행이라는 단어를 아에 모르실것같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철마다 계속되는 고된일에 항상 지치고 지치신 모습밖에, 뵌적이없는.....새것이라는 것에는 도데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시다.
우리집은 비닐 하우스를 한다. 비닐 하우스 3중으로 덮어진 비닐때문에 여름에는 항상40도가 넘는다. 그안은 산소도 부족할 뿐더러, 보통 사람들은 들어가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그런 하우스를 20년째 하고계신 우리 아버지 폐에 문제가 발생한적이있다. 하우스 내에 산소가 없는 관계로 담배도 피우시지 않은 우리 아버지가 폐렴이 걸리신 것이었다.
폐렴이라는 병은 아주 길게 사람을 괴롭힌다. 아버지는 3달정도 병원에 입원하셨고, 독한 약을 1년을 넘게 드셔야만 했다. 이런 아버지가 완쾌되고 나서, 이번엔 어머니가 갑상선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하셨다. 지금우리 어머니 목에는 20cm가 넘는 칼자국이 나있다. 그 자국을 눈뜨고 보아야만 하는 심정은 모두들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25년 동안 힘든일에 더이상 고장 날곳이 없는 우리 부모님은 누나, 나, 동생만 바라보고 계신다.
인생에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우리 부모님을 꼭한번 금강산에 다녀오게 하고싶다.....더이상 늙으시기 이전에 꼭 보내드리고 싶다...
해마다 모를 심고, 나락 베고, 또 그땅을 갈아서 보리씨 뿌리고, 다시 보리 베고, 모심고.............
모심는것은 마치 갯벌을 걷는것 처럼 힘들고, 뜬모는 다시 심어야 하기때문에 6월초 그 땡볕에서 하루 종일 허리 한번 펴시지 못한다.
나락 베는 것은 콤바인 뒤에서 가마니 잡는게 보통일이 아니다, 왠만한 우리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락가마니를 잡으면 손톱이 다 닿아지고, 손가락 첫 마디는 물집이 잡혀서 터진다. 그런 아픔을 일을 계속 함으로써 잊어버리시는 부모님............세상에 어느 부모가 고생을 안하고 자식을 키웠겠냐 만은, 말그대로 땡전 한푼없이 인생을 시작해서 자식 셋 대학 교육 다 시키신 분들이시다..
하우스는 400평이 넘는 오이 하우스를 두분이서 관리하신다. 그래도 요즘은 그나마 온풍기가 있어서 겨울에도 큰 고생은 하지 않으신다. 예전에 온풍기가 없었을때는 하우스 중간에 일렬로 배치된 난로에 연탄을 넣어서 온기를 유지시킨다.
난로에는, 일반 주택에 쓰는 연탄보다 두배가 큰 연탄이 들어가고, 난로 한개에는 연탄이 10장씩 들어간다. 400평에 난로가 약 10개 넘으니까 연탄은 하루에 100장씩 들어가는것이다. 100장 넘는 큰 연탄을 두분이서 50번은 왕복하셔야 되는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하우스 위에는 소위 "선피" 라를 벼짚으로 만든 것을 덮는데, 겨울철에 눈이나 비가 오면 무거워 지기 때문에, 새벽에 겨울비라도 내리면 걷으러 가야 된다......
이보다 힘든일은 이루 말할수 없지만 시골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되어 이만 적겠다
이제 부모님께 여유를 드리고 싶다. 효도의 명분이 아니라, 금강산 아닌 어디라도 다녀오셨으면 좋겠다.....이제 우리 부모님도 인생을 즐길때가 되신것 아닌가 싶다.
1974년에 결혼해서 29년만에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다...
우리 부모님도 사람으로써,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다.
사실 작년에 금강산을 다녀 오실수 있었지만, 동생등록금과 내 등록금 때문에 접으셔야만 했던, 금강산 여행을 올해 꼭 보내드리고 싶다...
흙에 찌든 그손을 털어드리고 싶다.
내가 글써서, 금강산 여행 보내드리고 효도 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권리를 우리 부모님도 갖게 해드리고 싶다. 두서 없이 쓴글 읽어줘서 매우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공정한 심사와 정당한 결과를 보여 주실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올 한해 학생회 사업이 잘되길 기원한다.
까페 이름이 생각않나서
까페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헤메이다가(?) 이제서야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나도 울엄마랑 한번 가봐야 할텐데, 생각은 했었는데...
글쎄, 모두들 힘든 일도 많고 열심히들 생활하고 있는것 같네요..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당!! 울엄마의 오른 팔이 되어..
저는 우리집의 큰 딸이예요. 밑에 동생은 셋이 있구. 막내가 10살입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때부터 엄마 혼자 저희 넷을 키우셨어요.. 남들이 들으면 우와~~ 할 거예요. 그집 시끌벅적하겠군.. 생각하시는대로. 그래서 제 목소리도 우렁차요. 집안을 정비(?)하려면 무서운 큰 누나가 되어야 하거든요. 엄만 지금 학교 급식소에서 일하고 계세요. 땀이 무지 많으신 분인데, 여름이면 땀으로 목욕을 하시지요. 우리 학교 식당에서도 일하시는 아주머니들 보면 남보는것 같지가 않아요. 다 울엄마 같구...
일이 원악 힘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요즘엔 좀 힘들어하시는것 같아요. 몇백명씩 되는 애들 국 한그릇씩만 퍼줘도 팔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시죠?
전 옆에서 엄마가 힘들어 하실때마다 너무너무 죄송해요. 그래도 전 제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요. 엄마도 할 수 있는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하라고 하시구요. 엄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금강산 같이 가자고 하면, 무지 좋아하실 거예요. 오랜만에 두손 두발 꽁꽁 묶여있는(?) 울엄마랑 여행한번 하고 싶어요...^^
할아버지 아빠
나 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이런 노래가 넘쳐나는 이날!!
가슴팍에 달린 카네이션에 모든 시름을 묻으시는 부모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그런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저는 우리 부모님께서 나이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입니다. 하마터면 세상의 빛도 못볼뻔 했던 아이죠. 제 위로는 벌써 언니도 있고 오빠도 있었거든요. 그러니 아들을 낳으려 애써 낳으려 했던 아이도 아니었던거죠.
그런데요. 어느날 제가 그랬습니다. 늙은 부모님께서 학교에 찾아오시는게 싫다구!! 다른 아이들 엄마 아빠는 다들 젊고 세련됐는데 우리 엄마,아빠는 왜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인지 그래서 창피하다구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가슴에 상채기로 남았을지 그냥 철없을 때 했던 말인데......하고 넘기기에는 제 자신에 대한 원망이 크게 남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대 운동회, 한껏 들떴던 어느날이었죠. 막내를 위해 어렵게 직장에 휴가를 낸 아빠께 그랬습니다.
제발 오지 말아달라고 차라리 부모님없는 아이처럼 있겠다구요. 애써 괜찮은 척 하셨지만 가슴 한구석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지금까지도 휴가 한 번 내지 않으시는 아빠께서 얼마나 어렵게 낸 휴가였을지 지금에야 후회가 됩니다.
그런 아빠께 한번도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갑자기 아빠께서 피를 토하셨습니다. 병원에서는 폐암일지도 모르니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부모님이 젊고 세련되지 않아도 내 곁에 계셔주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얼마나 큰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인지....
왜 사람은 꼭 늦게야 깨닫는 것일까요? 산소 호흡기를 꽂고 가쁜 숨을 내 쉬는 아빠를 보며 말했습니다.제발 내 곁에만 머물러 주시라고. 그냥 내곁에서 지켜만 봐 달라구요.
이젠 병을 이겨내고 날 지켜봐 주시는 아빠가 계셔서 전 너무 행복합니다.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에 수줍은 웃음으로 답해 주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그리고 저라는 생명을 지키고 세상에 낳아주신 부모님께 비로소 감사하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목없음)
먼저 이런 기회를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섬마을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학업 때문에 이곳에 나와 살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면서 참으로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저희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시고 당신들을 위해서는 동전한닢도 아까워 못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부모님의 노고는 잊은 채 부모님께서 저에게 못해주시는 것에 불평을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이곳으로 왔을 때 제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제 친구들을 위해서 아파트를 마련해 주시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 곳이 없어 남의 집에 엊어 살기도 했습니다. (명절에도 집에 가는 차비가 아까워서 일년에 한번 집에 가고 식구들이 전부모여 본게 언제인지 기억에 없습니다.) 지금은 추억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때는 가진 것 없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없는 와중에도 저희들이 배우고 싶은 데까지는 배워야 한다며 대학교육까지 시켜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한 평생을 저희를 위해서 살아오신 저희 부모님께 이런 선물을 드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정말 이런 기회를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