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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남금북정맥을 시작하며 자유인 산악회와 인연을 맺었다. 어떤 연유로 참석을 했는지는 모르나 그날 속리산 천왕봉 정상 칼바람이 무척이나 매서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은 당시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마치고 왔었다. 소위 1대간 2정맥의 출발 일이었다.
그 뒤로도 숱한 날 달콤한 주말을 뒤로하고 이들은 풍상우로를 맞으며 굵은 땀을 흘렸다. 1대간 9정맥 완주의 결실인 한남정맥이 바로 눈앞에 왔다. 아마도 출발일 2017년 4월 9일은 이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하루가 될 것이다. 나는 낙동정맥을 함께하지 못했다. 호남, 낙남, 금남, 금북에서도 농땡이로 일관했다.
그러나 한남정맥에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 고향은 수원이다. 평생 경기도를 누볐다. 그땐 그 자체가 삶이었기에 앞만 보였었다. 이번 기회에 한강 남쪽지방을 열심히 걸어보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내 나이 올해 환갑이니 보이는 느낌은 분명 다를 거다. 기대가 된다. 기록도 남겨 추억할 것이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고 첫 구간부터 사정이 생겼다. 같은 날 수원 친구들과 전남 장흥 천관산을 오른다. 십 수 년 이어오는 죽마고우들 e325 산악회의 매년 봄맞이 행사는 절대 빠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초대 총무고 지금까지도 서류상의 총무다.
자유인 산악회와 정맥 산행일이 겹친다. 친구들의 양해 하에 정맥을 마칠 때까지는 산악회 불참을 봐주는 대신에 남도 봄맞이 행사는 참석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지켜왔다. 이날마저 참석을 하지 못하면 나는 수원에서 명함을 내밀기가 어려워지기도 하고, 친구들 간의 도리 또한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4월 1일 혼자 배낭을 지고 제1구간을 다녀왔다. 만우절 같은 일이 만우절에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라도 몇 구간 하지 못한 한북정맥도 겸하면서 경기도 산줄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통영에 다녀오느라 참석 못한 금북 마지막 구간 땜방 계획은 없다. 며칠 전 황대연 형과 만난 신도림 역 순두부집에서 들을 얘기로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졸업선물인 보령 진흙비누 세트를 받았다. 형은 정맥을 마치면 꼭 고향 보령의 비누를 선물한다. 한참을 잘 쓰는 비누가 마침 떨어져 고마웠지만 미안도 했다. 이형도 팀장에게 사전 양해를 구하고 정상교 회장님한테는 문자를 넣었다.
“잘 다녀오셨지요. 한남 첫 구간에 장흥 천관산을 갑니다. 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하겠습니다. 미리 다녀와서 후기 남기겠습니다.”
한남정맥의 개관은 ‘박성태’ 선생이 만든 『신산경표』와 『월간 산』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산경표』에 의하면 백두대간이 남진하다 속리산 천왕봉에 이르러 서쪽으로 가지 하나를 친다. 그 줄기가 안성 땅 칠장산에 이르러 다시 두 줄기로 갈라진다. 그 줄기 중 하나는 북서쪽으로 진행해 광교산, 계양산 등을 지나 한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데, 한강의 남쪽 울타리가 된다 하여 한남정맥이라 했다.
한남정맥의 시작은 안성 소재 칠장산 분기점(칠장산 492km에서 0.3km)이고 끝은 김포 소재 문수산(376m)이다. 산줄기의 끝이 한강 하구를 향하고 있다. 도상거리는 177.4km다. 한남정맥은 낙동정맥과 더불어 『산경표』와 『신산경표』의 차이가 없다.
『신산경표』는 오늘날 진화된 『산경표』다. 선인들의 당시 지리관을 지적하기보다는 현대의 시각에서 새로운 해석을 한 후학들의 산물이라고 보면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거다. 아무튼 양 자 모두 시대의 선구자들은 틀림없다.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족보 방식의 도표로 만든 책이다. 정맥正脈의 경우는 10대 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들을 ‘주요한 산줄기’로 삼아 정맥이라는 격을 주고, 각각에 고유명사를 부여하여 산줄기 분류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한남정맥은 대간에서 분기한 산줄기가 서쪽으로 달리다가 2개의 정맥(한남, 한남금북)으로 나뉘면서 2개의 정맥사이에 10대강이 포함되지 않는 경우다.
이 경우 2개로 나뉜 산줄기들 사이에 10대 강이 없으므로 백두대간을 연장하는 개념을 사용해 10대 강의 발원을 확인할 이유가 없게 된다. 관련된 한강이 이미 백두대간에 발원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 말을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천천히 몇 번을 읽어보고 나서야 아하 했다.
한남정맥은 다른 정맥과 달리 지나는 전체가 시市 지역이다. 안성시 → 용인시 → 수원시 → 의왕시 → 군포시 → 안양시 → 안산시 → 시흥시 → 광명시 → 부천시 → 인천광역시 → 김포시 등 모두 12개 도시다. 이 지역들을 살펴보면 인천이나 수원 같은 대도시가 2개, 신도시 원조 중 군포 산본, 안양 평촌, 부천 중동 등 3개, 최근 신도시인 용인, 김포 등 2개, 기존 도시를 확장한 안산 등 수도권의 인구 밀접지역이다.
이렇게 볼 때 한남정맥은 난개발로 인해 가장 훼손이 심한 산줄기다. 아파트 단지가 가로 막아 서 있는가 하면 군부대가 접수했고, 도로가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가 하면 운하가 동강내 버리기도 했다. 현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자유인 산악회 이형도 팀장과 김대군 대장이면 실력이면 진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반면 막연히 진행하다 보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 십상이다.
시작점부터 끝까지 전체 구간이다. 『신산경표』 자료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옮겼다. 눈이 아플 지경이다.
「칠장산 분기점 ~0.3km~ 칠장산(492m) ~0.9~ 관해봉(458) ~2.4~ 도덕산(366) ~1.4~ 녹배고개 ~1.6~ 매봉(173.5) ~1.6~ 뒷산(269.4) ~1.6~ 국사봉(434) ~0.5~ 감투봉(223.3) ~1.3~ 상봉(354) ~0.5~ 가현치(加峴峙) ~0.5~ 달기봉(419) ~3.2~ 구봉산(461) ~1.3~ 진등고개 ~8.6~ 문수봉(403.2) ~3.2~ 굴암산(347) ~3.6~ 무네미고개 ~8.1~ 함박산(349) ~1.9~ 하고개 ~2.4~ 부아산(403) ~1.2~ 메주고개 ~4.5~ 석성산(471.3) ~2.7~ 작고개 ~1.4~ 선장산(350) ~0.5~ 소실봉(186.3) ~12.5~ 매봉(235) ~3.0~ 버들치고개 ~1.1~ 형제봉(448) ~2.9~ 광교산(582) ~2.1~ 백운산 ~1.6~ 지지대고개 ~4.6~ 오봉산(210) ~2.9~ 수리산(489.2) ~7.1~ 수암봉(398) ~2.1~ 운흥산(204.1) ~6.5~ 도이산(104) ~1.2~ 양지산(151) ~4.8~ 할미산(152) ~5.3~ 여우고개 ~0.9~ 하우고개 ~1.0~ 성주산(216) ~0.7~ 와우고개 ~0.8~ 거마산(211) ~0.5~ 비루고개 ~1.2~ 철마산(202) ~2.5~ 만월산(186.9) ~2.1~ 함봉산(62) ~2.5~ 장고개 ~1.6~ 원적산(164.9) ~0.9~ 철마산(226) ~4.6~ 북망산(101) ~0.0~ 장명이고개 ~3.3~ 계양산(395) ~0.9~ 방아재고개 ~9.9~ 가현산(215) ~3.1~ 운유산(102) ~0.4~ 필봉산(131) ~1.2~ 수안산(146.8) ~5.1~ 오봉산(104.9) ~6.1~ 해란산(80) ~0.7~ 것고개 ~2.2~ 문수산(376.1) ~8.1~ 한강 (~4.4, 계 177.4)」
# 2017년 4월 9일 막을 여는 대망의 첫 구간은 칠장산 분기점 ~0.3km~ 칠장산(492m) ~0.9~ 관해봉(458) ~2.4~ 도덕산(366) ~1.4~ 녹배고개 ~1.6~ 매봉(173.5) ~1.6~ 뒷산(269.4) ~1.6~ 국사봉(434) ~0.5~ 감투봉(223.3) ~1.3~ 상봉(354) ~0.5~ 가현치(加峴峙)까지 12.4km다. 이 수치는 도상거리로 접근로 등을 감안하면 보통 15km 거리다.
1일 새벽 5시 30분에 모닝콜로 일어났다. 배낭은 전날 꾸려놓았다. 버너, 코펠, 연료, 라면, 북어, 물과 일기예보에 따라 1회용 우비도 넣었다. 아침식사 대신 날 김에 멸치와 쭈꾸미 볶음을 넣고 김밥을 두 줄 말았다. 시내버스로 염창역에 내려 종합운동장까지 9호선 급행 전철을 탔다. 강변역으로 가기 위해 2호선으로 갈아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영완’ 님을 보게 된다. 7시가 조금 넘었을 때다. 내 눈이 정확했을 거다. ‘영완’ 님의 집이 잠실이니 더 확실하다.
그는 콤비 상의를 입은 양복 차림이었다. 그동안은 등산복을 입은 모습만 봤었다. 하필이면 결정적일 때 그가 하품을 했기에 눈이 마주치지는 못했다.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퇴 후 재취업을 한 곳에서 토요 출근을 원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나마 조정을 해서 정맥 산행에는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이번에 보니 생강나무 꽃이 피고 있었다. ‘영완’ 님이 집에서 꽃차를 만든다며 따던 모습이 선하다.
7시 30분 경 강변역에 내렸다. 일어나서 벌써 2시간이 지났다. 동서울 버스터미널로 가서 죽산 행 8시 버스표를 끊었다. 버스는 30분 간격이고 최종 도착지는 진천이다. 요금은 5,700원이고 한 시간 걸린다. 모처럼 개인 산행이어선지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토요 정체 끝에 9시 20분에 죽산에 도착했다. 빠진 건 막걸리였다. 한 병을 사 넣고 택시를 탔다. 칠장사까지는 12,000원이었다. 죽산토박이 택시기사다.
“외갓집이 죽산이다. 많이 변한 거 같다.”
“1죽, 2죽, 3죽 중에 2죽을 죽산이라 불렀었지만 지금은 죽산으로 되었다.”
“어머니가 아주 어릴 적 칠장사로 소풍을 갔다고 한다.”
“지금도 소풍은 칠장사나 죽주산성이다,”
칠장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칠장사가 들머리다. 칠장사의 관문은 죽산竹山이다. 죽산은 내 외갓집이다. 그곳으로 피난가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났단다. 오래전 모두 떠나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나는 1960년 대 말에 외할머니 댁을 갔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그 당시 어머니는 형, 누나, 나, 동생을 데리고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안성을 거쳐 죽산에 갔었다. 버스에 내려서는 한참을 걸었다. 그땐 이런 모습이 당연했었다.
며칠 전 어머니를 뵙고 잔을 나눴다. 지금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금도 혼자서는 소주 반 병, 분위기가 좋으면 한 병이 기본이다. 칠장산 얘기를 하니 소싯적 칠장사로 소풍을 갔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술안주로도 괜찮고 어머니 정신 건강에도 좋아 보였다.
나도 외가에 갔던 기억을 말했다. 넓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먹던 우물물로 씻어낸 칼국수가 유난히 차가웠던 느낌, 외사촌들이 큰 물방개를 먹던 모습, 맨드라미 꽃대가 들어간 된장찌개, 외숙모가 장날 팔 없는 티셔츠를 사준 기억 등이 또한 좋은 안주였다.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를 타령조로 부른다. 어려서 배운 동요란다. 가끔 기타 반주에 맞춰 함께 부른다.
9시 35분 경에 들머리인 칠장사 입구에 도착했다. 관광버스 2대가 이미 와 있었으나 정맥 길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칠장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역사 소설 『임꺽정』의 일부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며 ‘어사 박문수’와도 관계가 있단다. 박문수의 장원 시로 알려진 7언 율시 ‘낙조落照’다. 칠장사 계곡 다리에 자식들의 장원을 바라는 부모들의 리본이 오늘도 빼곡이 매달려있었다.
「지는 해 푸른 산 붉은 해를 토하고
찬 하늘 까마귀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나루 묻는 길손 갈 길 바쁘고
돌아오는 스님 지팡이 한가하지 않더라.
뒷동산 소 그림자 길기만 하고
망부대위 아낙네 쪽 그림자 나지막하다.
예스런 고목들이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머리 짧은 초동 피리 불며 돌아온다.」
1.6km를 30분 정도 걸려 진행하면 삼정맥분기점이라는 이정표를 지나 칠장산에 오른다. 산에 오르기 전에 사찰을 돌며 마음을 씻었다. 배낭을 메고 절 안을 이리저리 다니는 걸 봤는지 커다란 사진기를 든 중년 여자 분이 입구를 가르쳐준다. 입구를 몰라 헤매는지 알고 베풀어 준 친절이다. 이정표 근처 바닥 전체가 달래다. 한 주먹만 캐서 달래간장을 만들어 밥 비벼먹으면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장사는 ‘신경림’ 시인이 “우리 문학사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는 ‘벽초 홍명희’ 선생님의 표현을 옮긴다. 대하 역사소설 『임꺽정』 제4권 ‘박유복이’ 편에 실려 있다. 임꺽정과 칠장사의 인연도 이 소설 여러 곳에 등장한다.
「글자가 완하여져서 군데군데 읽을 수 없이 된 비석 앞에 와서 지도하는 중은 서울 손님을 보고
“이것은 고려 ‘혜조국사’의 비올시다. 혜조 스님께서 도둑놈 일곱을 모두 감화시키셔서 정도로 끌어들이셨는데 그 도둑놈 일곱이 모두 신장이 되어서 이 절을 수호합니다. 세상에서는 ‘혜조스님’이 이 절을 개창하신 줄로 말하옵지만 삼한고찰을 중창하신 것이외다.”
하고 설명하고 많은 세월에 늙을 대로 늙은 반송 앞에 와서
“이것이 나옹스님이 심으신 반송이올시다. 이 반송의 나이가 지금 육백 살이 넘었을 것이외다.”
(중략)
“이 절이 본래는 대찰로 유명하던 절이온데 고려 말년 큰 난리에 충화를 당하온 후 이때껏 일신하게 중창하지 못하온 까닭으로 이같이 보잘것이 없소이다. 백여 년간 거의 빈 절이 되다시피 하와 이십 년 전까지도 중 한둘이 동냥으로 간신히 향화를 받드옵다가 도덕이 갸륵한 노장 한 분이 이 절에 오신 뒤로 근처에서 불공두 많이 드옵고 또 각처에서 공부하는 중도 모여드옵는 까닭에 지금은 겨우 절 모양을 차리고 지내옵니다.”」
들머리에 몽우리가 흰 야생화 무리가 있다. 다음 주 본 팀이 오면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죽 사이 오솔길을 따라 히말라야에서 배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올랐다. 일기예보에 맞게 날이 흐렸으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헬기장에 칠장산이라는 정상석이 있다. 경험자의 말로는 이곳이 가짜 칠장산이란다. 바로 앞에 3등급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진짜 칠장산이다. 사람소리가 들려 보니 산을 허옇게 뒤집어 놓았다. 골프장 공사 같았다.
푹신한 참나무 낙엽을 밟으며 20여분 더 가니 관해봉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해바다까지 보인다는 관해봉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거기까지 바라기는 욕심이다. 정맥 길에서 힐링을 하고 있는 나는 관해봉부터 일찌감치 힐링 길로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혼자 온 주제에 1구간에 대해 인도어 클라이밍 없이 먼저 다녀온 사람이 올린 후기를 몇 번 읽고 온 객기 때문이었다.
참나무에 달려있는 비닐 정상표시를 보고 선명하게 길이 나있는 우측으로 자연스레 내려갔다. 관해봉 지나고 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기억에서다. 이러면서 나는 속으로 흐뭇했다. 선두에 서는 ‘대군 대장’ 생각도 했다. 내가 미리 깔아놓으면 이번만큼은 그의 수고를 대신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이렇게 엉뚱한 데가 많다.
그러나 대군 마마는 지금 발목이 다친 상태다. 정 회장으로부터 기브스 했다는 문자를 받기도 했고, ‘대연 형’과 만났을 때 금북 마지막 날 목발을 짚고 신도림역에 와서 음료수를 주고 같다는 말도 들었다. 이런 걸 알면서도 나는 아직 전화 한 통화 넣지 못했다. 먼저는 오토바이, 이번엔 자동차다. 경미해 보여 다행이지만 사고 소식은 여기서 끝내기를 바란다.
자다가 놀란 고라니가 한번 힐끔 보더니 내뺀다. 빠르기도 하다. 길옆으로 나무뿌리를 캔 흔적은 이 길에서도 자주 있었다. 소나무와 참나무 잎이 섞인 길이 향기도 좋았다. 와중에 리본이 없어 이상하기는 했어도 길이 너무나 선명했고, 저 아래 마을도 면사무소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 그냥 내려갔다.
조금 더 내리니 길에 잔 가시나무가 많았다. 잡목이려니 하고 헤치는데 무척이나 따가웠다. 길도 계곡으로 연결이 되기 시작했다. 가시나무는 몇 미터 간격으로 계속 나왔다. 아차 싶었다. 시야가 트인 곳으로 다시 올라와 보니 왼쪽으로 흐르는 산줄기가 있었다. 칠장산을 기준으로 보니 완전 Y자다. 그쪽 능선에는 철탑이 있었다. 그제야 철탑을 지난다는 생각이 났다. 이제 내 기억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혼자서 그 길을 다시 오른다는 건 쉽지 않았다. 혼자라 좋은 건 쪽이 팔리지 않는 거다. 거기다 원래 힐링을 이유로 자주 샌 경험이 있어 판단은 빨랐다. 삼죽면 사무소를 기억하고 일단 마을로 내려가 사무소를 찾기로 했다. 가시덤불을 헤치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10여 분을 헤쳐야했다. 후기를 쓰며 보니 3.8km를 반대로 내렸다.
가시덤불을 나오니 초지다. 잔디 파는 곳도 아닌데 엄청 넓었다. 나를 보고 놀라서 인지 그 밭 위를 고라니들이 뛰고 있었다. 아니다 뛰는 게 아니라 날아다녔다. 서너 마리 뛰노는 무대가 알바생에게 기운을 북돋아 줬다.
시멘트 길을 따라 내려왔다. 왼쪽으로 큰 건물은 골프장이었고 오른쪽으로는 작은 공장이었다. 조금 지나니 소똥 냄새가 진동했다. 산 위에서 보던 마을 전체가 소를 키우고 있었다. 사람 하나 보지 못하고 30여 분을 이쪽저쪽으로 걸었다. 차 한 대를 세우니 그냥 지나쳤다. 다행히 두 번째 차가 섰다.
“삼죽면 사무소가 어디쯤인가”
“삼죽면 사무소”
이상했다. 작은 트럭에 농기구를 싫은 차를 봐서는 이 근처 사람인데 사무소하면서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더니 “아마 저쪽일 거”라며 내가 내리던 Y자 반대편 산줄기 끝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그냥 가버린다. 다시 시멘트 길을 걸었다. 이정표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감각에 의존할 뿐이다. 이번 정맥길 힐링은 소똥냄새 진동하는 토요일 정오에 빈 목장을 걸었다고 기록할 것이다.
승용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세워봤자 그냥 지나갈 거 같아 조금 비켜주는데 차가 멈칫한다. 손을 들고 가니 창문을 연다. 30대 초중반 여자 분이었다. 사정을 말하니 안성 쪽으로 간다며 태워준다. 그냥 앉아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차안에 빨간색 아기 의자가 있었다.
“아기가 여자앤가”
“그렇다. 딸만 셋이다.”
“혹시 삼죽면사무소를 아나.”
“여기는 시댁이다. 잘 모른다.”
“어디까지 가나.”
“안성에 간다.”
“미안하지만 죽산까지만 부탁한다.”
이래서 일단 벙커에서는 탈출했다. 조금 나가니 교통 표지판이 나왔다. 말이 조금이지 걸었으면 족히 한 시간 거리다. 안성은 좌회전이다. 그러면 산줄기와 맞는다. 얼마를 더 가니 죽산면 사무소 간판이 나왔다. 내릴까 망설이다 죽산이면 2죽이라는 생각이 났다. 일단 버티고 안성방향에 기대를 걸었다. 다행히 몇 분 더 간 끝에 삼죽면 입구가 나왔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마움을 말로만 전했다.
삼죽면 사무소는 바로 찾았다. 엄청나게 큰 돌에 새긴 안내판을 봤기 때문이다. 살다가 면사무소를 이런 식으로 안내하는 건 처음 봤다. 사무소에는 토요일임에도 남녀 두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먼저 여직원에게 정맥 길을 물으니 남자에게 물어보란다. 남자는 친절하게도 밖으로 나왔다. 나온 거까지는 좋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한남정맥을 하다가 길을 잃었다. 관해봉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저 산줄기가 맞는가”
“발령난지 6개월이라 잘 모른다.”
“철탑 근처가 도덕산 같은데.”
“그것도 모른다.”
“혹시 안성 지도가 있는가.”
“찾는 사람이 없어서 없을 거다.”
“그러면 녹박고개는 아는 가”
“이 자리다. 면사무소가 들어선 거다. 임꺽정이 세금 받던 곳이다.”
“그러면 임꺽정에 대해 더 물어도 되나.”
“그건 칠장사에 가야 있다.”
“혹시 뜨락식당은 아는가.”
“저기 보이는 간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정관장 공장 산으로 들어가나 보다.”
도로를 건너 마을로 들어 포장길을 따라 가다보니 세로로 서있는 뜨락식당 간판이 나왔다. 식당이름 아래 아예 한남정맥 입구라고 적어 놨다. 메뉴 간판엔 육개장도 보이고 막걸리도 보인다. 마침 비까지 와 당연히 식당에 들어가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산길로 향하고 있었다. 식당 주인도 들어오라는 말 대신 그 길이 정맥 길이라고 확인시켜 준다. 이걸 봐서 주인은 정말로 친절한 사람이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우비를 꺼내 입기도 그렇고 비를 맞으며 가기도 그래서 길옆의 비닐하우스로 들었다. 농기계에 두텁게 먼저가 앉았다. 사람이 흔적이 없어 보여 라면을 끓여 막걸리 한잔을 할까 생각도 했다. 옆에 또 한 동의 비닐하우스가 있다. 근처 집은 농가라기보다는 전원주택처럼 보였다. 비가 그쳤나하고 밖을 나가보면 큰개가 짖는다. 배낭 덮개를 찾으니 없다. 1회용 비닐우비로 배낭까지 덮기는 적었다.
다행이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나왔다. 다시 산으로 들었다. 우측으로 저수지가 보인다. 돌멩이 하나 없는 부드러운 흙길에 참나무 낙엽까지 덮여 있다. 가끔은 약간 경사도 나오고 나무계단도 나오다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만난다.
아스팔트 오른쪽으로 리본이 날린다. 입구로 착각하기 쉬우나 낮은 축대를 넘기가 쉽지 않다. 두어 번 더 이런 구조에서 리본을 보면서 조금 더 올라가야 노인복지원이란 큰 입석을 만난다. 그 뒤 건물엔 무속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굿당인 듯하다. 그러면서 우측으로 리본이 많이 날리고 있는 곳이 입구다.
입구에 들자마자 또 비가 쏟아졌다. 다시 꺼낸 1회용 비닐 우비가 벌써 너덜거린다. 그렇다고 이미 들어온 산길을 다시 내리기는 그랬다. 약간의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화살표시 없는 네모 나무 기둥에 ‘안성허브마을’은 좌측이라는 화살표가 있는 3거리가 나왔다. 여기서 또 망설이게 된다. 비는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일단 허브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 가다보니 허브마을과 등산로가 반대방향으로 적혀있는 작은 이정표를 만났다. 그러고 보니 정맥은 용인을 거쳐 수원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그러면 또 길을 잘못 택해 걷고 있는 것이다. 되돌아가는 길이 제법 멀었다. 언제 이만큼 왔나 싶었다.
그러면서 웃었다. 산길을 혼자 걷는 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늘 이형도 팀장의 설명과 대군 대장의 바닥지에 의존하고 거기다가 정 회장 등 힐링 팀과 함께하다보니 수동적인 산행으로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2구간부터는 백두대간 때로 돌아가 인도어클라이밍도 하고 지도도 준비하고 나침반도 가지고 와서 등산의 참맛을 즐기고 싶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가 와서 멈추기는 쉽지 않았다. 갑자기 박인수 선생이 목이 찢어져라 부르는 ‘봄비’가 생각났다. 조그맣게 부르다 점점 크게 불렀다. 신중현 선생의 기타 애드리브까지도 들리고 어깨는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지나가다보면 산속에도 미친놈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나는 잠시 미쳤었다.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 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 주네 봄비야아아아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한 잔 생각이 났다. 가지고 있는 건 막걸리 한 병이다. 일단 바람을 피해 땅을 고르고 버너에 불을 붙였다. 라면에 황태를 넣었다. 막걸리를 한 잔 따라 공중에 건배하고 마셨다. 라면이 익기 시작했다. 또 한 잔을 마셨다. 라면 국물이 밴 황태가 끝내준다. 또 한 잔을 마셨다. 이러면서 빈 그릇이 되고 병도 빈병이 되었다. 대신 배가 나왔다.
얼마 가지 않아 국사봉 이정표를 만났다. 이러면 제대로 온 거다. 이정표에는 국사봉 0.1km로 표시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한남정맥 표시가 있었다. 정맥 길 벗어나면 이름난 봉우리도 지나치기 일쑤였지만 100m 옆을 두고 지나치는 건 꼴이 아니다. 거의 평지에서 잠깐 오르는 정도의 경사다. 이름도 국사봉이다. 전망대 나무 데크에 정상 표시를 해 놓았다. 정상에서는 앞으로 갈 산줄기가 잘 조망된다.
시간상으로 볼 때 목적지가 다 와 보였다. 국사봉을 내려와 정맥 이정표대로 별 어려움 없이 크고 작은 봉우리 몇 개를 넘으니 나무 중간에 상봉이란 표시가 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닌 흔적보다는 낙엽이 덮여 있었다. 우측으로는 저수지가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이러다 내린 아스팔트 길 옆 철망 담에 붙어있는 ‘가현고개’라는 안내판을 봤다. 자유인 산악회 제1구간 날머리에 선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길 건너에 ‘보개면’이라는 표시가 있다. 보개면은 안성시의 작은 면 중 하나다. 이곳에서 청록파의 한 분인 ‘박두진’ 선생이 나셨다. 그는 ‘청산도’라는 시를 남겼다. 작가의 의도한 뜻은 작가만이 안다. 그러나 독자는 나름대로 해석하고 노래한다. 나는 고향을 노래한 것으로 읽으며 그간 걸어온 길을 떠올린다.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박두진’ 님의 시를 더 읽어 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박두진 님의 ‘하늘’에 노래하는 음유시인 서유석 선생이 곡을 붙이고 ‘양희은’과 둘이 불렀다. 서유석 님은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에 비유해 한국의 ‘밥 딜런’이라고 불렸다. 끝부분인 ‘랄랄라 흘랄라 랄랄라 흘랄라 라아아 음음음’이 지금 귓전에 들리고 있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가현 고갯마루에서는 차들이 너무 빨리 달려 히치하이크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어서 다닐 수도 없다. 다행히 택시가 연결되었다. 삼죽 소재지까지는 6,000원이고 죽산까지는 13,000원이다. 삼죽에서 버스를 타고 죽산터미널까지 갈 수는 있다. 죽산까지 가면서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보개면에는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구원파 본산이 있다.
“고향이 이곳이냐.”
“그렇다. 삼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유병언 체포 때 어땠나.”
“차 막히고 힘들었다. 유병언은 못 잡은 게 아니라 안 잡았다.”
“그러면 지금도 살아있다고 보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죽산터미널에서 마침 출발하려는 남부터미널 가는 버스에 탔다. 요금이 6,000원으로 동서울보다 300원이 비쌌다. 진천까지 무정차라고 창에 큰 글씨로 안내 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타고 보니 순대 맛이 기막힌 백암을 지나고 양지를 지나서야 고속도로에 올랐다. 깜빡 든 잠을 깨운 사람은 버스기사다. 남부터미널에 내린 시간은 오후 6시 경으로 기억이 된다.
남부터미널에서 3호선을 타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9호선 급행 전철을 타고 당산에서 내렸다. 염창에서 내리는 걸 깜빡했기 때문이다. 강서구청 쪽 시내버스를 타러 오다 설렁탕집이 보였다. 갑자기 소주 한 잔이 땡겼다. 이 집은 맛도 좋았지만 파김치가 끝내줬다. 소주를 두 병 마시고 집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넘었다. 샤워하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피로해서가 아니라 술기운에서다.
정산을 해본다. 택시비 두 번 25,000원, 설렁탕에 소주 13,000원, 버스비 11,700원, 막걸리, 전철 왕복을 어림잡아 6,000원으로 계산하면 55,000원 정도다. 여기에서 최대로 절약하면 20,000원이다.
# 한남정맥이 시작되는 안성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안성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다. 4세기 이전에는 백제 지역이었으나, 5세시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6세기에는 신라가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는 등 삼국의 세력판도에 따른 변화를 겪었다.
안성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에서 용인, 안성, 김포 순으로 인구가 적은 뒤에서 두 번째 도시였다. 이번에 안성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1997년 12월 7일 자로 안성시로 승격되었다. 올 2월 기준 인구는 182,000명이다.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하면서 서쪽으로는 평택시, 북동쪽으로는 이천시, 남쪽으로는 천안·음성·음성, 북쪽으로는 용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안성에서는 보개면의 ‘박두진’ 님 외에, 의자의 ‘조병화’ 님도 나셨다. 금수회의록을 쓰신 개화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소설가 ‘안국선’ 님과 카프의 ‘안막’ 등 이름을 대면 알만한 문인들이 나신 땅이기도 하다. 안막 선생의 부인이 바로 당시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과 서양의 뭇 남성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무용가 ‘최승희’다.
먼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조병화’ 님의 ‘의자’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까지 들먹이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영혼을 사로잡던 마법의 춤꾼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을 본다. ‘김병종’ 선생의 『화첩기행』 중 일부에서 발췌했다.
「1931년 그녀의 생애 속으로 한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안막, 와세다 대학 노문과에 재학중이던 스물두 살 청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이론가였다. 그해 5월 6일 매일신보는 ‘어여쁜 용모와 세련된 스타일로 반도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최승희양’의 남편이 된 안막을 ‘조선 제일의 염복자’라고 썼다. 그러나 그녀가 안막을 만난 것은 그녀 생애 후반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예견케 해주는 대목이었다.」
김병종 선생의 『화첩기행』에 따르면 「안성장은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올 만큼 유명했던 곳이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교류하는 경기도의 교차로’로 팔도의 물산과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놋그릇, 꽃신, 갓으로 유명했고 장거리에는 몸재주와 풍물 등 판굿놀이가 늘 풍성했다. 바우덕이패의 남사당 풍물 놀이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달했을 터이다.
「안성 남사당패의 전설적인 명인인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1828~1870)이다. 그녀의 출생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다섯 살에 남사당에 들어가 열다섯에 꼭두쇠가 되었다는 이야기 정도가 전해진다.
바우덕이는 꼭두쇠로서 기량도 뛰어났지만 미모도 빼어나 보는 사람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특히 소고에 능해 경복궁 중건 당시 ‘판놀음’에서 소고와 선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놀이를 높이 산 흥선대원군이 손수 옥관자를 하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한 바우덕이는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 안성시 서운동 청룡리에 묻혔다.
1989년 안성 남사당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자 이를 계기로 안성지방의 예능을 주도했던 바우덕이의 넋을 기려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 현재 해마다 ‘바우덕이 축제’가 펼쳐진다.」
「남사당패는 1990년 초 사라지기 시작해 그 원형을 찾기 어려워 일반적으로 사당패와 남사당패 또는 걸림패 등을 같은 것으로 혼동한다. 남사당놀이를 ‘뜬광대놀이’ ‘사당패놀이’라고도 부르나, 재인청 등에 예속된 광대들을 중심으로 한 ‘뜬광대놀이’나 춤과 소리를 위주로 하는 ‘사당패놀이’와 남사당놀이는 그 성격이 다르다.
남사당놀이는 서민들이 사는 마을 부락을 찾아다니며 놀이판을 벌였으며, 풍물을 위주로 하되 연희적 성격이 강한 놀이다. 중앙 남사당놀이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3호이며 안성 남사당놀이는 1997년 경기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지방 여러 곳에 남사당패가 현존해 있는데, 여섯 놀이마당은 지역마다 다소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비슷하다. 경기도 안성 및 진위, 충청도 당진 및 회덕, 경상도 진양 및 남해, 황해도 송화 및 은율 등지에 남사당패의 겨울나기 은거지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안성은 조선 후기 각종 예인패가 집중된 지역으로 유명했다.」
안성을 대표하는 것은 유기와 포도가 있다. 한때 선물을 위해 안성에서 실어 나르기 바쁜 시절도 있었다. 안성유기는 광택이 곱고 선명하며 크기가 아담하여 한양 사대부가의 사랑을 받았는데 안성에 유기를 주문하면 마음에 흡족하게 든다고 하여 ‘안성맞춤’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안성포도 1901년 프랑스 천주교 신부가 가져온 포도묘목을 교회 앞뜰에 심은 것으로 유래한다. 예로부터 안성은 기온 차와 일교차로 과일의 향과 맛이 풍부했고, 토양과 토질이 우수해 과일 생산에는 최적지로 사랑받아 왔다.
# 호남정맥이후에 모처럼 후기를 작성해 본다. 매번 말하지만 내 마음대로 써나가면서 자료 인용도 마구잡이다. 혼자 보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번 내 고향 수원을 지나고 제2의 고향이랄 수 있는 강화 앞바다에서 끝을 맺는 한남정맥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기록해나갈 계획이다. 첫 구간에 참석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이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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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침을 몰고오는 여명이 보입니다. 강화 앞바다에서 막걸리의 의미를 가르쳐 주셔야죠. 우중산행 수고하셨음다. 잘 주무셔~유 ^^
한북정맥에에 대한 완주의지 박수보냅니다
히말라야 베이스캠프를 회갑기년으로 다녀온뒤 부터
정맥길을 떡 주무르듯 가볍게 넘는 맨탈이 부럽습니다....
두번째 산행부터 또 발을 맞춰봅시다
산행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