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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6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 창세기 3장 9절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세기 3장 9절, 새번역>
오늘 11월 첫 번째 주일부터 앞으로 여섯 번의 주일 동안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6주간의 여정은 오롯이 ‘예배’에 대한 것으로 채워갈 예정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이고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어찌 보면 가장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한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2022년 11월 6일, 오늘 주일 나의 예배는 어떤 모습으로 드려지고 있는지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예배자’ 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예배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예배로, 하나님에 의한 예배로, 하나님의 예배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로 만들 예배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요한복음 4장 23절, 새번역>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는 하나님이 간절히 찾으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상당히 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 어떤 예배자가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 예배자의 예배를 찾지 않으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예배는 받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상당한 경계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무조건 받으실 것이다.’ 라는 이야기는 사실은 완전히 틀린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 예배자나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영과 진리’로, ‘중심으로’, ‘마음 다해’ 예배하는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질문이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좀 더 명확하게 질문 드리자면 ‘지금 당신의 예배는 어떠합니까?’라고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정말 영과 진리로, 참되게 드려지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냥 주일이기에, 그냥 시간이 되었으니, 그냥 습관처럼, 그냥 하던 대로의 일상처럼 드려지는 예배는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방황하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정확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모습이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사실 그대로 들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닌척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고자 팔 벌리는 것이 아니라 숨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처럼 말입니다.
창세기 3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아픈 한 페이지입니다. 겨우 창세기 1, 2장이 지났을 뿐인데,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어야 하는데 너무도 이른 시간에, 너무도 아픈 소식이 들려옵니다.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선악과를 먹은 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느 때와 동일하게 아담을 찾으셨지만 아담은 여느 때처럼 동일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세기 3장 9절, 새번역>
두려움에 빠져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아담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게 아닙니다. 지금 자신에게 나아와 오늘은 어떤 동물의 이름을 지었는지, 오늘은 어떤 하루였는지, 하나님께 마음껏 이야기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예배 드려야 하는데 숨어 있었기에 하나님은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것이라 절대 예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꾸짖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담과 하와를 만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저 매일 하나님 앞에 서서 마음 다해 자신을 반겨준 아담이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나무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아마 자신의 벗은 몸을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 민망하고 수치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벌거벗고 있어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찾아온 변화에 아담은 어떻게 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숨어서 수치를 보이지 않고 그저 대답만 이렇게 하는 아담입니다.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 새번역>
아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모든 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라고 외치며 나와 왔지만, 정작 두려움이 생기면,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지 못하고 나면, 숨으려고 합니다.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이 순간만큼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는 하나님이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싫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오시고 나는 숨어 있기에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배가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숨기고 감추느라 이미 찾아와 곁에 서계신 하나님을 눈치 채지 못하고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와서도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나만 덜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위치를 잃어버린 나의 예배를 찾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외면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괜시리 하나님이 주신 모든 환경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불평 불만합니다. 이것 또한 아담처럼 말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숨어 있는 이유가, 자신이 죄를 지은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만든 환경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하며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합니다. 정말 아담이 우리의 조상이 확실히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담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아담의 모습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 새번역>
하나님이 살라고 하신 이 세상에서 지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가도록 만드신 이 세상이 저를 힘들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땅이 나를 너무 외롭게 만듭니다. 그러니 이렇게 만든 하나님 탓이라고 말하며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께 ‘선악과’를 먹었노라고 실토했으면 어땠을까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면 어땠을까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 그래도 뻔뻔한 모습일지라도 나아갔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중심을 털어놓고 수치스럽고, 벌거벗었더라도 하나님을 마주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예배는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복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제발 그랬었다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예배는 이곳에서 숨겨지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감추는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릴 참됨과 영과 진리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애써 외면하며 나무 뒤에 숨어 있습니까? 불평불만하며 핑계대며 하나님 탓을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하나님이 찾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모른척하고 계시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한 주간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교회에 오는 순간까지도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들에 수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네. 분명히 그런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연약해도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가면 됩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예배’가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있는 그대로의 나’인대, 있는 그대로를 보여 드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핑계대고 싶고, 책임을 전가하고 싶고,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예배를 가장 많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시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배 드릴 마음 없이 예배드리러 왔다면, 예배에 조금의 마음도 두지 못한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예배가 아닌 무언가 숨겨져 있는 예배라면 하나님은 많이, 정말 많이 슬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옛날 아담에게 질문하셨듯이 오늘도 똑같이 질문하실 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지금 현재 드려지고 있는 여러분들의 예배를 솔직하게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셔야 합니다. 만약 예배 가운데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참석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히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한 가지는 그 분 앞에서 숨지 않는 것입니다. 숨지만 않는다면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 주간 살아오셨습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예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무지 예배를 드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자격이 없어도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받아 주실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예배드리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부담감이 너무도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만큼은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지금 내가 드리고 있는 이 예배가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바로 ‘우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제쳐두고 현재의 내 모습을 정확히 인지하고,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고백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정말 이렇게 죽을 각오로도, 살 각오로도, 죽기 살기로 예배드려야 하는 게 바로 오늘 우리 모두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참되게 예배한다는 것은 ‘지금 나의 예배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깨달은 이들이 당연히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아무리 사연이 많아도, ‘지금 현재의 나’를 드리기로 결심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예배’ 앞에서 오늘 창세기를 통해 만난 아담의 모습이 없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숨어 있지도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배드리는 우리가 되길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나의 예배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가짜가 아니라, 형식이 아니라 진짜요, 삶의 고백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짧은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릴 예배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았던 한 사람이 쓴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오늘 혹여나 정확한 위치를 잃어버린 상태로 예배를 드리고 있거나, 오늘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예배자들이 있다면 이 구절처럼 기도하며, 다시금 정확한 위치로의 예배, 영과 진리로, 참되게,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되길 간절히 진짜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시편 51편 9~12절, 새번역>
BGM - 시편프로젝트]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피아노 커버-시편51편 by Harpiano
결단찬양 - 나의 맘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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