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코스를 걷기 위해 해남군 땅끝마을에 왔습니다. 세울 양재역(서초구청)에서 5월 5일 24시에
출발하여 424km의 어두움속을 뚫고 해남 땅끝마을에 오전 5시 05분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은 어둠침침한 시간 입니다
오늘은 땅끝탑에서 시작하여
강화도 평화전망대까지 109코스 구간으로 나눠 1,800km를 걸으며 서해바다 곳곳을 누비게 되지요.
지난 2022년 5월 6일 남파랑길 마지막 코스인 90코스 노선에서 300m 벗어나 있는 도솔암을 다녀와서
삼거리 이곳에서 배낭 깊숙이 넣어둔 막걸리를 꺼집어 내여 종이컵으로 가득 채워
연거푸 3잔을 마시고선 남파랑길 90코스 이어가기를 계속 합니다
얼마쯤 걸을 때까지는 막걸리 석잔에 그런대로 기분이 아딸딸하게 좋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취기가 올라 걸음걸이가 휘청거리며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하던군요
걷다가 걷다가 홧김에 노선에 주저앉아 또 한꼽뿌를 마시고 걸었답니다.
오늘 남파랑길 90코스 노선을 마무리 짓고
땅끝마을 주차장에 오후 2시까지 도착하여야 하는데~
해남땅끝호텔 앞 육교를 지나 팔각정자 쉼터에서 마지막 남은 막걸리를 홀딱 마시고 갈두산 사자봉에 위치한
땅끝전망대에 이르니 오늘 마무리 해야할 시간인 오후 2시 정각이였습니다.
막걸리 석잔에 비틀거리는데다, 체력이 고갈되고, 땅끝전망데에서 층층계단을 허겁지겁 내려가 땅끝탑에
들렀다가 해안산책로를 따라 땅끝마을 주차장에 오후 2시 32분에 도착하느라
땅끝마을의 여러 조형물들을 둘러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오늘은 서해랑길 1코스와 2코스를 시작하는날, 언제 또 땅끝마을 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2022년 5월 06일 그 때 놓처버린 땅끝마을의 여러 조형물들을 둘러 볼려고 합니다
<남파랑길 90코스 중 마지막 코스인 미황사에서 - 땅끝탑까지 걷는 90코스에서 도솔암으로 갈 수 있는 갈림길 삼거리>
서해랑길 첫 구간 땅끝탑에서 송지면사무소까지 14.9km를 걷기
위해 <땅끝희망공원>에 왔습니다
땅끝희망공원
쿨링포그
쿨링포그란~
쿨링포그 조형물
땅끝항
땅끝항 여객 대합실
땅끝희망공원
명예 해양경찰관으로 활동하시며 해양경찰 홍보대사인, 명기환 시인은 <바다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
정유재란 때인 1597년 2월 26일 한산도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던 이순신은 네 가지 죄목으로 구금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물은 죄목은
첫 번째 죄목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였다.
1596년 12월 12일 이순신 휘하의 거제 현령 안위(安衛, 1563년 ~ 1644년) 등이
부산의 왜군 진영을 불태워 가옥, 군량, 화포 등을 분멸한 사실을 보고한 것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둘째 적을 쫓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는, 조정에서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의 말을 듣고 출동을 명령했으나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을 명령했다.
1597년 1월 15일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장으로 하는
1만 4,500명의 군사가 다시 대한해협을 넘어 서생포(울산)로 침범했다
대부분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장수들은 3월 중순부터 총병력 14만 1,500명을 이끌고 침범해왔다.
이중간첩 요시라의 간계에 넘어간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병을 강요했다.
1597년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은 직접 한산도로 가서 이순신에게 요시라의 정보를 전하면서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중간첩 요시라의 첩자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있던 이순신은 <적의 말만 믿고 충동한다면 적의 간계에 속을
위험이 있고, 풍랑이 심한 겨울바다에 판옥선 함대를 끌고 나가면 복병을 만나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추가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후 출동하겠다>라며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셋 째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는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옥포해전에서
적진포해전까지 원균과 함께 싸워 승리했음에도 이순신이 원균의 전공을 탈취했다는 논란이 제기된 것을 말한다
넷째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방자한 죄는 전주에 분조를 설치하고 체류 중이던 광해군이 이순신에게
협의차 전주로 올라올 것을 명했으나, 이순신이 급박한 전황으로 세자의 명을 따르지 않았음을 말한다.
1597년 1월 23일 열린 어전회의에서 윤듀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을 탄핵하게 된다
1597년 2월 6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런 이유로 1597년 2월 26일(양력 4월 12일) 한산도에서 체포된 이순신은 1597년 3월 4일
서울에 도착하여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된 이순신은 1597년 3월 12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이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문(신구차)가 선조의 마음을 움직여 겨우 목숨을
구 할 수 있었다. 1597년 4월 1일 의금부 전옥서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남대문 밖에 있는
새원 윤간의 종집에 도착한 후 조카와 아들 울을 만났다
4월 2일에는 영의정 유성룡을 만나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 후, 다음 날인 4월 3일 두 번째로 백의종군의
명을 받은 이순신은 한양을 떠나 도원수 권율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백의종군에 오른 이순신은 과천, 인덕원, 수원, 평택을 거처 4월 5일 아산에 도착했다
4월 12일까지 고향인 아산에 머물고 있을 때 청천벽련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자신의 석방 소식을 듣고 여수에서 배를 타고 서해로 올라오던 어머니가 도중에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아산 곡교천변의 게바위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맞으며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배에서 부고가 왔다
달려 나가 가슴치고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구나
게바위로 달려가니 배는 닿았는데
가슴 찢어지는 이 슬픔
어찌하리오
삼년상은 고사하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체 길을 재촉하는 의금부 서리를 따라
도원수 권율이 있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채촉할 수밖에 없었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하게 되고
1597년 3월 4일 서울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된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풀려나게 된다
1597년 4월 1일 의금부 전옥서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두 번째로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한양을 떠나 도원수 권율이 있는 남쪽으로 향한다
1597년 8월 3일 선전관 양호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국왕의
교서와 유서를 전달받는다
조선수군 재건로란~?
조선수군 재건로
남도 이순신 길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 5월 23일, 음력 4월 13일)이 발생했을 때 조선, 일본, 명 3국 사이에 강화회담을
맡아 진행하면서 농간을 부림으로써 결국 정유재란을 초래하였던
중국 명나라의 신하 심유경(沈惟敬)이 있습니다.
일본진영에 파견된 심유경은 일본간의 강화회담을 5년간이나 지루하게 진행하다가 1597년 8월
나고야[名護屋]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났는데,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해
㉠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 명이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게 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 심유경은 이러한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본의 요구조건을 거짓으로 보고했다. 즉
㉠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책봉해 줄 것.
㉡ 명에 대한 조공(朝貢)을 허락해 줄 것을 일본이 요구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명나라는 이를 허락한다는 칙서를 보냈으나 두나라의 요구조건이 상반되자 강화회담은 결렬되었고, 결국
일본의 재침입으로 1597년(선조 30, 1월 15일) 정유재란이 발생했다.
후에 심유경은 비리가 폭로되어 엄형에 처형될 뻔 했으나, 석성에 의해 겨우 구제되었다. 그뒤 조선에
다시 들어왔으나 경남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 잡혀서 죽임을 당했다 한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응 명령했고
1597년 1월 15일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장으로 하는
1만 4,500명의 군사가 다시 대한해협을 넘어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발대로 상륙시키면서, 조선말에 능한 요시라를 간첩으로 파견했다
그의 임무는 일본군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고니시유키나가의 부하였던 요시라는 1597년 1월 11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접근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포(울산)로 올라오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며 이순신을 시켜 가토 기요마사
함대를 공격하라고 제안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이 아닌 화의를 원하는 사람이며, 강화협상이 결렬된 것은
전적으로 전쟁을 원하는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니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해준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요시라의 말이었다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진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이정보를 도원수 권율애개 알렸고 권율도 이를
그대로 조정에 전했다. 이중간첩 요시라의 간계에 넘어간 조정은 그에게
도사(都事)라는 벼슬까지 내리면서 이순신에게 무리한 출병을 강요했다
도사(都事) : 조선 시대, 충훈부(忠勳府), 의금부(義禁府), 중추부(中樞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등에
소속되어 관리의 감찰, 규탄 등을 맡아보던 종오품(從五品)의 벼슬. 1882(고종 19)년에 폐지되었다.
1597년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은 직접 한산도로 가서 이순신에게 요시라의 정보를 전하면서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첩자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있던 이순신은
<적의 말만 믿고 출동한다면 적의 간계에 속을 위험이 있고, 풍랑이 심한 겨울바다에 판옥선 함대를
끌고 나가면 북병을 만나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추가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후출동하겠다>라고 했다
며칠 후 다시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은 요시라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서생포(울산)로 들어왔는데,
왜 자신이 알려준 시간에 나가서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지 않았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사실은 다시 조정에 보고되었고, 윤두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1597년 1월 23일 열린 어전회의에서 평소 이순신을 의심하던 선조의 내심을 잘 알고 있던 대신들은
이순신을 강하게 비난했다. 결국 2월 6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2월 26일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3월 4일 서울의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요시라가 알려준 정보가 거짓이었음은 곧 밝혀졌다.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역정보를 흘렸을 때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울산)에 도착해 있었다.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순신 제거 작전
성공으로 3월 중순부터 대부분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장수들로 총병력은 14만 1,500여 명이었다.
이순신이 파직으로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되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라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전멸한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전사한 후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복귀한 이순신은
1598년 9월 16일 명량해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1597년 8월 3일자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8월 19일 장흥군
회령포에서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대패배로
배설이 전란 중 12척을 이끌고 도망처 남은 배 12척을 회령포에서 인수받고
다음날인 8월 20일 이진성지에 도착하여 4일을 머물렀다가 어란포로 이동했다
1597년 7월 15일 삼도 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전투에서
패배한 해전으로 이때 조선군은 전선 160여 척 중 140여 척을 잃고, 통제사 원균은
춘원포(통영시 광도면 황리)에 상륙했으나 추격해온 왜군에게
대항도 못 해보고 전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
주요 지휘관과 수많은 장병들이 160여 척의 함선과 함께 거의 전멸했다.
이때 후미에서 눈치만 살피다가 겨우 도망쳐 살아남은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수습하여 한산도로 가서
주민을 피난시키고 병영과 무기, 식량을 소각한 다음 전라도 방향으로 도망쳤다.
의금부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상한 이순신은 토사곽란 증세로 심한 몸살을 앓아 병세가 악화되어
1597년 8월 23일에는 배에서 내려 몸조리로 휴식을 취하고, 8월 24일 겨우 병세를 회복하고
도괘(해남군 북평면 남성리 칼쾡이)를 거처 어란포(해남군 송지리 어란리)이동할 수 있었다
이진성지는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있다. 이진은 바닷가에 성을 쌓아 왜구를 방비하던 곳이다.
1597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이순신 장군이 여기에서 머물렀다.
장흥군 회령포에서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대패배로 배설이 전란 중 12척을 이끌고 도망처
남은 배 12척을 회령포에서 인수하고 어란포로 가면서 이곳 이진성지에 들렀다.
정유재란이 있은 1598년(선조 31)에 진을 설치하고, 1648년(인조 26)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으로 승격되어
성을 축조하였다고 전해오는 이진성지는 둘레 약 2.5㎞인데, 지금 남은 성벽의 길이는 약 940m이다
이곳은 제주도로 왕래하는 출입통제소였으며, 제주의 말과 공물(貢物)을 상륙시키는 곳이었다고 한다.
도원수 권율 장군이 있는 남쪽으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1597년 8월 3일자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재임명된 이순신은 8월 19일 장흥군 회령포에서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대패배로
위급할 때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이 전란 중 12척을 이끌고 도망처 남은 배 12척을 장흥 회령포에서
인수받고 다음날인 8월 20일 이진성지에 도착하여 4일을 머물렀다가 도괘를 거처 어란포로 이동 합니다
땅끝희망공원에서~~
땅끝희망공에서 바라본 땅끝전망대
희망의 종
현 위치,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앞에서
땅끝조각공원까지는 8.3km, 송호해수욕장까지는 2.7km, 도솔암까지는 15.9km 입니다
나가 땅끝해남자연사박물관 안으로 입장할 때 어떤 낌새도 없이 상어가 입을 콱~ 다물면
나는 상어의 먹잇감으로 으으아아아아악~
어휴~ 씩은땀이 주루루룩~
땅끝항 여객선터미널
맴섬이라고 합니다
맴섬과 맴섬사이로 솟아 오르는 태양은 환상적인 일출광경을 연출한다지요
사자바위 곁의 망부석 입니다
3톤짜리 통통배타고 고기 잡으러 간 임을 오매불랑 기다리며~
사자바위 한 쌍이 맴섬 사이로 솟아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약간 벌리고 흐흐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맴섬 한 쌍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뽀뽀하고 있네요. ㅋ~^^
현 위치 맴섬에서
땅끝전망대, 송호해수욕장, 대죽리 어촌체험마을까지 거리 이정표
땅끝항 뒤돌아 보며~ 이제부터는
땅끝희망공원에서 서해랑길 1코스 출발점인 땅끝탑으로 가는길을 걷습니다
땅끝항를 뒤돌아 보고~
서해랑길 1코스 출발점인 땅끝탑으로 힘차게 첫 발을 내딛습니다
모노레일 앞 주차장
왼쪽 벽면엔 땅끝해남자연사박물관 그림이~
오른쪽 벽면엔 갈두산 사자봉에 위치한 땅끝전망대 그림이 그려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해랑길 1코스 2부로 갑니다
첫댓글 몇 달전까지는 한직 부서에서 근무할 땐 3264x2448(800만 화소) 픽셀로 촬영한 사진을 1600x1200 ~ 2000x1500픽셀로 줄여서 올리는데, 그런대로 넉넉한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는
숫자를 다루는 핵심 부서에 배치되곤부턴 오전 09시부터 ~ 오후 6시까지 꼼짝달싹을 할 수가 없어 남파랑 사진 올리가가 상당히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우째야될련지~
워메~ 요즘 허벌나게 바쁜 근무 시간땜에~ 이리저리 죄송하옵니다.
증말정말 답답하기이를데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