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장읍성...
읍내 도로와 함께 달리는 성곽의 곡선이 경쾌하다. -
- 동학농민 혁명군 진격로...
당시 나라 운명의 큰 분수령이 되었던 혁명의 산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
- 남문(진무루) 성곽 위에서 본 성안팎...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의 오른편이 성 밖이다. -
- 고목도 성곽의 일부...
수령 300 년의 느티나무가 성곽의 모퉁이를 떠받치고 있다. -
- 서쪽 성벽...
마치 토성 위로 석축 성곽을 쌓아올린듯 하다. -
- 석축과 토성의 혼축 ? ..
서쪽 성벽을 돌아 북쪽 성벽은 모두 제외하고는 토성이다. -
- 무장객사 송사지관(松沙之館) ...
전국에서 유일하게 객사와 기단이 함께 원형이 남아있는 유적으로 유명하다. -
- 성문 대신에 웬 자동 개폐 차단기?
아직 복원중이라 그런가 , 성곽 관리 차량이 수시로 드나든다. -
- 복원이 끝난 동문...
다행히 복원에 사용된 성돌들이 거의 원형 돌에 가깝다. -
- 밖에서 본 읍취루(挹翠樓)...
고을 사또가 성내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곳이란다. -
- 성안에서 본 읍취루... 가볍게 한장 찰칵 ! -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의 산실,
고창 무장읍성(茂長邑城)
탐방일 : 2023.8.2(수)
지정 : 사적 제 346호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
[무장읍성(茂長邑城)]은
무장읍성(茂長邑城)은
조선시대 무송현과 장사현이 무장현으로 통합되면서 그 중간지점에 치소를 정하고 축조한 읍성이다.
축성과 관련해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무장읍지 (茂長邑誌) 등 여러 지리지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즉, 태종 17년에 (1417년) 병마사 김저래(金著來)때 당시 장정 2만여명과 승려들이 동원되어 읍성을 쌓고 동헌과 관사를 세웠는데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끝마쳤다는 것이 그 기록이다.
또한 무장읍성은 사료적으로도 그 지난 의미가 적지 않은 바, 조선시대 읍성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동헌, 객사, 남문(진무루) 등이 현존하며 그 밖에도 문헌기록과 고지도를 통해 35개의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읍성의 축조 유래와 관련해서는 이곳에서 30 여리 떨어진 서쪽에 어항과 무역이 활발한 법성포가 있었는데 고려말부터 왜구의 노략질과 침입으로 인해 특히 장사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다. 이에 조선초기에 이르러서 서해안 연변의 어획보호와 함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417년에 읍성을 축조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무장읍성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입지하는 평지읍성이다. 행정적인 기능을 우선하는 다른 읍성들과 달리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했던 이 읍성의 특징이다.
성곽의 형태는 상부 구조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협축식의 석성으로 보인다. 그 밖의 축성 당시의 체성 규모에 대한 기록도 각종 문서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먼저 「문종실록」에서 둘레 1470척(약 490m), 높이 7척(약 2.5m), 여장의 높이 1척(0.3m), 문 2개소가 , 옹성이 있고, 해자(垓字)의 둘레는 2,127척(710m)이고 적대가 없으며 여장이 있다고 기록으로서 당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벽 밖으로도 성 주위를 돌아가며 폭 4m, 둘레 700 여m의 해자(垓字)를 파서 성을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을 베풀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해자는 너비 4m, 길이 574m 정도이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읍성으로는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확실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 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중요한 곳으로 알려진 성이다.
읍성에는 2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 진무루와 동문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성 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남아 있다. 그 밖의 각 종 건물터와 사직단, 여단, 성황단 등의 터도 그대로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읍성에서 가장 큰 건물은 동헌이 아니라, 의외로 객사(客舍)인 송사지관(松沙之館)이다. 객사는 이곳을 거쳐가는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중앙에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돌출된 정청을 두고 좌우로 익현을 둔 멋진 모습이다.
객사의 중앙부 정청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를 행하는 공간이다.
보통 동익현(東翼弦)은 목사가 읍성에 왔을 때 집무를 보던 곳이고 서익현은 품계가 당하관 (종3품 이하)인 관리가 묶는 곳이란다. 그리고 이 문 뒤로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동헌이다. 생각보다는 매우 작다. 이 동헌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수비보병대 사무실로, 광복 후는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었다니 그 수난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객사 오른편으로 보기에도 시원한 읍취루(挹翠樓)가 있다. 바로 남쪽 성곽 위에 세웠으니 단어한 그 풍체도 그러하려니와 풍취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에 성밖으로는 해자를 겸한 연못까지 있으니 언뜻 보면 선비들의 시연장 같은 풍광이다.
그러나 읍취루 복원기에 그 뜻을 적어 놓은 내용을 보면, 읍(挹)은 잡아당길 읍으로, 동헌의 당호가 취백당이라 푸를 취(翠) 자를 취하여 읍취루라 하였다. 즉 현감이 수시로 지역의 선비들을 모아 민원을 청취한 처소였음을 건물이름에서 알 수 있다. 지금 읍취루에서 내려다본 작은 연못엔 연꽃이 한창이다.
[ 탐방 후기]
15번 지방도로를 타고 무장면사무소 앞 구릉지에서 내리면 바로 밑으로 바라보이는 동학혁명 역사적 현장의 무장읍성(茂長邑城)...
그러나 100 여년의 세월과 함께 지금은 사적(346호)이 되어버린 무장읍성(茂長邑城)...
무장읍성(茂長邑城)을 탐방하는 마음이 결코 가볍지 만은 않다.
바로 이곳 무장읍성이 조선의 운명을 바꾼 그 격동을 예고하는 현장이자, 동학혁명군이 본격적으로 혁명군을 일으켜 제1차 동학혁명을 알리는 역사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당시 동학의 농민들은 전무후무한 조선 최악의 부패 관리의 상징, 고부 군수 조병갑 그를 몰아냈다. 그러나 정부는 반성은 커녕 오히려 보복이라도 하듯 이곳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렇듯 이어진 관군들의 횡포에 맞선 전봉준(全琫準)이 이곳 무장에 있던 손화중(孫華仲)과 함께 농민 혁명군을 일으켰으니 그곳이 바로 이곳 무장읍성이다.
무장읍성은 정읍, 부안, 고창 일대의 농민군과 동학세력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역사의 현장 그 산실(産室)이 되었다.
최근 이곳 무장읍성이 당시 농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농민군과 토벌대로 갈라져 싸웠던 형제의 파란만장한 휴먼스토리를 그려낸 ‘녹두꽃’ 드라마의 촬영현장이 된 것도 바로 이까닭이다.
그 성난 민중들의 피에 얽힌 근대 역사의 현장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바라보는 무장읍성의 풍광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답다. 복원된 성곽 그 토성 위로 자리매김한 키 큰 소나무들의 멋진 몸매하며, 성 밖 연못에서 피어내는 갖가지 색깔의 연꽃들... 그리고 서로서로 귀를 맞댄채 뭔가 알길없는 속삭임들은 지금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무장읍성(茂長邑城)을 바라보며 언제까지나 이곳이. 이 나라가 평화로움을 지켜내는 수호신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
이제 또 하나의 무장읍성, 고창읍성(高敞邑城)을 향해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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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