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튻집]
고 백천(白泉) 이기태(李起泰) 변호사 발자취
1934년 1월 20일 부산 출생[본적이 부산이었으나 훗날 경남 진주시 망경동으로 옮김]
1952년 6월 30일 진주사범학교 졸업
1952년 7월 10일, 진주천전초등학교, 도동초등학교 교사
1961년 9월 30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1962년 8월 27일,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964년 2월 22일, 서울대학교사법대학원 수료
1964년 5월 7일,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임관 이래 장흥, 김천, 청주, 영등포, 대구 등 각 지방검찰청 및 검찰지청, 대구고등검찰청, 부산고등검찰청 검사, 부산지방검찰청 형사 제2부장 검사. 거창, 상주, 경주, 부산동부 검찰지청장,
1983년 9월 1일,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學) 법학부 6개월 연수
1987년 12월 11일, 홍조근정훈장 받음
1994년 1월 19일,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로 장년퇴임
1994년 1월 20일, 변호사 이기태 법률사무소
·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영남수필문학회, 형산수필문학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수필부산문학회 회원
· 수필집:<떠나는 사람 남는 사람>, <네거리에 비려진 공>,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백천 이기태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姜 中 九
이기태 동인님이 별세하시다니요?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2008년 우리 수필부산문학회에 복귀하신 후 한 번도 빠짐없이 원고를 보내주시다가 한두 번 빠지시기에 ‘요즘은 사회가 어지러우니 변호사 업무가 바쁘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인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별세를 하셨다니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습니까?
이기태 변호사님은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장으로 재직하면서 1989년 봄 《수필》제 39호에 <나나 일대기>를 기고하여 우리 수필부산문학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인활동을 활발히 해오다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로 전보되는 바람에 과중한 업무로 인해 우리 문학회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로 정년퇴임을 한 후 사무소를 내고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2008년 《수필》제69호에 <부산에서 사는 복>을 발표, 우리 문학회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방약무인(徬若無人)’, ‘호두알’, ‘승강기에서 겪은 일들’, 빚더미 인생‘,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테니스장에 얽힌 사연들‘, ’생일상‘, ’어중이 인생‘ 등을 발표하다가 2012년 겨울에 발행한 수필 제78호에 <가왕 남인수와의 해후>를 마지막으로 와병생활에 들어가 동의의료원과 해운대에 있는 부산 제3노인전문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4년 5월 17일에 영면하였습니다.
이기태 변호사님은 부산에서 출생을 하였으나 철이 들기 전에 부친의 직장 전근으로 경남 고성으로 이사를 가서 유소년시절을 고성에서 보냈습니다. 8,15 광복 후에는 경남 사천에서 생활을 하다가 중고등학교 시절은 진주에서 살면서 본적지도 진주시 망경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진주사범학교 2학년 때에는 불행히 폐결핵에 걸려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 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결핵을 진단받고 치료하면서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을 제시하여 간신히 징집을 면했으니 새옹지마가 아닙니까. 그때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낙동강 전선에서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 다음해 내가 진주사범병설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사범학교 3학년인 선배님과 함께 대나무 총을 메고 날마다 군사훈련을 하면서 ‘백두산까지 앞으로, 앞으로 무찔러 찔러, 대한남아의 기상이 번쩍거린다.…’를 외쳐 불렀습니다.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이기태 변호사님은 진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하다가 사표를 낸 후 웅지를 품고 서울로 올라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진학하여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2년에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사법대학원을 수료한 후 군복무 미필로 군법무관에 지원하게 되었고 병영생활을 하던 중 결핵이 재발하여 수도육군병원에서 귀휴조치를 받았습니다.
귀가 후 사법연수원 성적이 우수하여 판사를 지원하고 싶었으나 병역미필자는 지원이 불가능하여 부득이 검사를 지원하게 되었고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되었습니다.
그 후 광주지방검찰청 장흥지청을 비롯하여 김천, 청주, 영등포, 대구 등 각 지방검찰청과 검찰지청, 대구고등검찰청, 부산고등검찰청 검사, 부산지방검찰청 형사 제2부장 검사로 근무하다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學) 법학부에 6개월간 연수파견을 마쳤으며 거창, 상주, 경주, 부산동부 검철지청장을 거쳐서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로 근무하다가 1994년에 정년퇴임하였습니다.
이기태 변호사님은 평생 동안 검사라는 법조인으로 살아왔지만 사범학교를 졸업한 수재답게 다방면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은 일찍부터 소질을 발휘하여 진주사범학교 재학시절의 문예부 활동부터 문학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한 다음해인 1965년부터 신문 칼럼리스트로 부산의 일간지에 글을 발표해왔습니다만 몇 년 후 다른 지방검찰청으로 전출되면서 일간지 발표는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어 1971년 대구지방검찰청 김천지청 검사로 근무할 때에는 영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85년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포항의 《형산 수필》창간호에 <경주에서 만난 조상>을 기고하여 종신회원이 된 후 20여 년 동안 동인활동을 계속해왔으며 우리 수필부산문학회에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기태 변호사님은 그 바쁜 검사생활을 하면서도 주경야독을 하여 1988년에는 경북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뿐만 아니라 1988년에는 <떠나는 사람 남는 사람>, 1994년에는 <네거리에 비려진 공>, 2011년에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등 3권의 수필집을 상재하였으니 그 열정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테니스는 정년퇴임 후까지 평생 동안을 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은 것은 사범학교 시절 부친이 부산 출장 때 사다주신 일본제 중고라켓이 얼마나 소중히 여겼던지 6·25전쟁 피난길에 가지고 다닌 일과, 광주지방검찰청 장흥지청에 근무하면서 테니스를 수련한 덕분으로 충청북도 체전 청주시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을 한 일인데,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주위에 화가 친구들이 많아서 일요일마다 화구를 둘러메고 일요화가로 활동한 일과, 한 때에는 서예에도 심취하여 모 신문사 주최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을 하였으니 그 다양한 재능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그래서 수필집을 낼 때에는 제자(題字)도 표지화도 직접 쓰고 그려도 될 것을 제3수필집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을 내면서 제자는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화백에게 받아놓았는데 표지화를 받을 만한 화가가 없다고 걱정을 하길래 진주사범학교 후배인 예헌(藝軒) 이동수(李東洙) 화백을 추천했습니다.
그 길로 함께 이동수 화백의 화실로 달려간 변호사님은 화실에 널려있는 수많은 그림 중에서 오곡이 누렇게 영글어가는 농촌 들녘에 황혼 빛이 붉게 물드는 유화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표지화로 결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수필집이 출판되자 제자도 표지화도 흡족하지만 수필이 함량미달이라고 겸손해 하면서 부산일보사 대강당에다 수많은 내빈들을 모셔놓고 세 번째 수필집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그것은 평생을 살아온 법조인 이기태님이 아니라 인간 이기태님의 참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인 2012년 12월에 발행된 수필 제78호에 <가왕 남인수와의 해후>를 발표하여 점잖은 법조인이 중학교 1학년 때 남인수 고향노래발표회에 몰래 극장에 숨어들어가서 노래를 들었던 이야기로 우리 회원들을 웃겼습니다.
그 후에는 79호에도 80호에도 원고를 내지 않아 ‘요즘은 변호사 업무가 바빠서 그러신가 보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지난 5월 말 진주사범학교 동문회 어느 모임에서 이기태 변호사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기태 변호사님, 아니 진주사범학교 선배님,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어쩌면 미련도 없이 이렇게 쉽게 떠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가시는 길이 급하기로서니 무슨 말씀 한 마디는 남겨주셔야지요.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떠나가신 선배님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선배님, 이제는 세상사 다 잊으시고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유고-1, 부산에 사는 복,[수필 69호-2008년 여름호]
이 원고는 편집자나 정회장님께 수필 69호를 구해서 입력해 주십시오.
유고 2, 어중이 인생
이 기 태
미루기만 하던 제3 수필집이 어렵게 상재되었고, 제2집 때 못했던 출판기념회를 그냥 하지 않고 넘길까 많이도 망설였는데, 내일 모레 80이 된 노인이 언제 또 수필집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질 수 있겠느냐고 강권하는 이의 호의에 떠밀려 출판기념회를 갖기로 결심하고 일을 시작했다.
막상 상재하는 일도 혼자 해 보니 그 번거로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1,2집 때는 원고 뭉치만 출판사에 넘겨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출판사의 선정, 편집의 체제, 활자 크기의 결정 등 할 일이 많았다. 표지화의 선정, 제자의 휘호 등을 도와 주신 분들의 은혜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한여름 더위를 피한다고 서둘러 잡은 기념회 전날은 제5호 태풍 메아리가 달고 온 폭우가 하루 종일 쏟아져 당일 일기를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 큰 피해도 없고 행사의 진행에도 지장이 없어, 당일은 비가 안 올 거라고 택일을 해 준 분의 혜안이 놀라웠다.
저자로서의 감사의 말을 미리 준비는 했으나, 막상 “무능 부덕한 소생의 졸작 수필집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의 출판을 기념해 주시기 위하여 공사다망하심을 무릅쓰고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한 다음에, 나는 문득 자신의 인생이 어중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강한 충격에 사로잡혀 한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게을렀으면 한 권의 수필집 출판을 위해 20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이 소요되었겠는가.
명색이 신문 칼럼리스트라는 자격으로 일간지에 단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1965년을 나의 문필 생활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46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부지런한 작가였다면 적어도 10권 이상의 수필집을 상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난날을 회고하면 나의 일생은 한 마디로 어중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0년 간 검사의 외길을 걸어 정년퇴임한 것 외에는 아무 일에도 전력투구한 적이 없었다.
각종 스포츠에 취미와 소질이 있었으나 아마추어 선수급이 될 만큼의 기량을 연마한 것도 없다. 주위에 친한 화가들이 여럿 있어 그들 따라 일요일마다 화구를 메고 산야를 누벼 보기도 하였으나, 이것 괜찮네 하고 칭찬받은 작품 1점 외에는 일요화가도 그만두고 말았다.
서예에 소질이 있으니 해 보라고 권한 친구의 지도로 어떤 3류 신문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한 일도 한 번 있었는데, 골프에 빠지면서 모든 예능수련을 그만두고 말았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신앙적 수행이다. 20대 초에 출가까지 심각히 고민하던 자신이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면 오늘의 내 마음의 밭이 보다 비옥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때마다 한스럽다.
기왕 어중이로 살았으니 남은 세월도 어중이 수필가로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