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문포 왜성 가는 길...
군항포(장문포)마을에서 정상을 향해 30 여분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
- 산 정상부 길 옆으로 남아있는 4-5 층 높이의 왜성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 친절한 안내판...
장문포 왜성 안내판 (경남 문화재자료 제273호) -
- 1592년 8월 한산도 대첩으로 제해권을 빼앗기자
이곳 장목만을 수비하기 위해 건너편 송진포왜성, 뒷편의 영등포왜성과 함께
이곳 장문포왜성을 쌓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
- 전형적인 왜성의 축성 구조, 제2, 제3성(城)...
본 성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여러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축성해 방어했다는 왜성의 흔적이 보인다. -
- 일본의 당시 성곽 축조기술을 알 수 있는 높이 3.5m 너비 3.5m 의 왜성구조...
작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탄탄해 보인다. -
-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서쪽 성벽...
왜성의 전형적인 특징의 하나인 경사각 70-80도의 왜성 ... -
- 산 정상부 (1)...
이곳이 성 지휘부인 천수각이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
- 산 정상부 (2)...
러일전쟁(1904-5) 당시에는 이곳 정상 성벽에 기대어 포대를 설치했다는 데... -
- 정상부에서 한 컷.... ㅋ -
먹을 것 없는 잔치에 후폭풍만 가득했던
수륙양면작전의 장문포 전투, 그리고 장문포 왜성
탐방일 : 2023.11.10(금)
지정 : 경남 문화재자료 제 273호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130-43)
[장문포(長門浦) 전투]
1594년 10월초...
임진왜란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 이름하여 ‘장문포 수륙양면 작전’ 이다.
총지휘인 도체찰사는 당시의 실세인 좌의정 윤두수,
그리고 사령관에는 도원수 권율, 그 밖의 부대지휘자는 도별장 곽재우, 선봉장 의병장 김덕령, 공격지원부대장 충청병사 선거이, 예비대는 의령에 박종남과 감경로, 함안에 경상순변사 이빈, 전라병사 이시언, 견내량에는 순변사 이일 등이다.
물론 수군에는
3도수군 통제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이순신(李純信) 등이 총 망라됐다.
말 그대로 이 정도의 위용이라면 조선의 모든 전력이 이곳 좁디 좁은 이 장문포로 다 모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산도 대첩 이후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한 후이니 만치 그 모여든 유명세만으로도 이미 장문포의 왜군들은 혼비백산하여 산산조각이 났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도원수인 권율은 바다를 넘어 거제도로 상륙을 해야함에도 의병장인 김덕령이 병이 났다는가 하면, 또한 비가 와서 며칠씩 늦어져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하더니 결국은 적병이 바다로 나오지 않아 접전은 해보지도 못했다고 하면서 군사의 위엄만 손상했음에 ‘매우 통분합니다’ 라고 자기 변명식 보고만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수군의 이순신 장군 역시도 별다른 전과를 얻지 못한 모양이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적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가서 빈 함선을 불태웠다. 그리고 투항 왜병 1명... 적들이 험준한 곳에 자리 잡고 항전하러 나오지 않으니 '군대의 위세만 보여주고 돌아왔다‘는 것이 전과의 전부다. 사실상 전공이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즉 적의 저항은 조선 함선 1척에 화공을 시도했다는 것뿐이었다는데... 물론 험준한 산상에다 성(城)을 쌓고 잔뜩 웅크린 상태에서 오직 방어 의식뿐인 적을 끌어내어 쳐부순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게다. 어쨌든 이것이 1594년 9월 29일에 시작하여 10월 8일에 막을 내린 ‘장문포 수륙합동작전’의 다다. 지금 생각해보더라도 참으로 미적지근한 결과다.
하지만 문제는 이상한 데서 벌어진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이도저도 아닌 결과에 비해 조정의 후폭풍은 오히려 만만치 않았으니 말이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고.., 그건 아마도 임금 선조의 기대와는 달리 그 전과가 너무 보잘것 없었던 탓이었을 게다. 그나마 이 미미한 성과를 가지고도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보고가 지휘자 상호간에 서로 맞지 아니했으니 미운털만 잔뜩 박힌 셈이다. 즉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는 죄다.
결국 그 칼날은 도체찰사 윤두수, 도원수 권율을 넘어 수군통제사 이순신에 까지 미친다. 하루도 빠짐없이 날만 새면 휘몰아치는 파면과 압송 정국....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대간의 압송 정국, 이순신 압송의 위기는 그해 11월이 다가도록 그칠 줄을 모른다. 이것이 한창 전쟁 중인 상황에서 당시 조정 대간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현 주소다. 어쨋든 선조의 철벽 수비로 이 압송 탄핵을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낸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탄핵 소동'의 처리가 그나마 임금 선조가 잘 한 몇 가지 중에 마지막이었다는 것...
이렇듯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수륙 양면의 현장 ‘장문포 왜성’을 찾아가보자.
[탐방 후기]
생각하기도 싫은 원균의 칠천량 전투의 현장인 '칠천량'을 왼편으로 두고 장목리로 치닫는 5번 도로...
그곳에서 약 10여 분 정도를 더가면 '장문포 왜성'으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산으로의 가파른 오르막인데 길은 오히려 2차선의 넓은 포장도로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그렇게 또 5 분여...
드디어 바다 포구로 내려가는 길과 왜성으로 올라가는 갈림길 안내판이 나온다. '군항포 350m, 장문포왜성 800m' 다. 군항포? 장문포? 긴가민가하며 일단은 350m 거리의 포구로 내려가보기로 한다. 물론 답사 과정에서 애마는 한편 번잡스러울 수도 있어 근처에서 기다리게 하고... 하늘이 참으로 푸르다.
포구까지 10여분의 가파른 내리막...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행여 왜성이나 당시의 흔적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 어느 곳이건 관련 안내문 한장 없다. 은근히 내려온 길의 수고가 아깝게 느껴진다. 그나마 성과가 있다면 예전엔 이곳을 장문포라 불렀다는데 언제부터인가 '군항포'가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도 장문포라 불리이기도 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이다. 어쨋든 이곳 마을에서 성곽으로 직접 오르는 길은 없다는 말과 함께 다시 애마가 있는 갈림길로 오른다. 오르는 품값이 장난이 아니다.
'장문포왜성 800m' 안내판을 뒤로하고 또 한번 가파른 왜성길을 오른다. 오르는 주변의 정경이 너무 아름다워 수고의 품값이 전혀 느껴지지지 않는 길이다. 그렇게 10 여분... 눈 앞에서 왜성의 흔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곧 안내판이다.
'장문포(長門浦) 왜성'
높이 3.5m, 너비 3.5m, 총 둘레 710m ...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안 제해권이 조선으로 넘어가자 이곳 주둔지를 확보하기 위해 영등포왜성, 송진포왜성과 함께 이 성을 축조했다고... 또한 정문포 왜성은 일본 전국시대의 성곽축조기술에 대한 자료로써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 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바로 한 두 시간 전, 이곳 장목만 건너편에 있었던 송진포왜성....
어찌된 셈인지 송진포 왜성은 근처 가는 길목에서조차 안내판 한장이 없는데다가 , 간신히 찾은 왜성도 그 중심부에 양궁장이 들어서 있어 마치 두 봉우리에 성곽이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관리를 포기 한듯 했다.
안내판 뒤로 길이 이어지며 '장문포 왜성'의 실상이 나타난다.
거의 원형의 형태로 남아 있는 북쪽 성벽과 서쪽 성벽... 전형적인 경사각을 가지고 있는 왜성이 모습이다. 한참이나 바라본다. 정상에서 이어지는 700 여m의 성곽의 흔적들이 가파르게 고갯짓을 하며 내려간다. 이 어마어마 한 공력을 어디서 구했을까. 아마도 그들의 대부분은 불쌍한 무리 민초들이었을게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새삼 성벽 하나하나에서 그들의 땀과 눈물과 피가 느껴진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하고,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좋은 날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장문포 전투는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