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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보증금 (김인희 단편 소설)
작가: 김인희 소설가
(유투브 채널::댕댕이와 책을..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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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yxHBLbXitI?si=ecJKXX4GtIkmbbIR
(part 1)
“문숙아, 너 이번 주 금요일에 별일 없지?
어디 안 가지?”
얼떨결에 받은 휴대폰에서 쩌렁쩌렁한 순덕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창문을 보니 블라인드 밖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새벽잠에서 깨어난 문숙이 대답할 새도 없이 순덕이 다짜고짜 또 물었다.
“나 대신 니가 나갈 수 있지?”
“어딜? 무슨 일인데?”
“아참, 서울은 새벽이지? 미안하다. 잠을 깨워서. 호호호.
명수 앞으로 산 빌라 있잖니?
그게 애를 먹인다.
진즉 팔았어야 했는데 부동산 시장이 이렇게 고꾸라질지 누가 알았겠냐?
팔라고 여기저기서 전화 올 때 팔았더라면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텐데말야.
금요일이 잔금날이거든.”
“잔금이라고? 세입자가 또 바뀌냐?”
“그래.”
“심애란 할머니가 나간대?”
“응.”
“갑자기 왜? 이상도 하네.
더 살게 해달라고 사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나 같으면 미안해서 그런 말 못 할 거 같은데? 얼굴도 못 들지?”
“전혀. 그러니 내가 방방 뛰는 거 아니냐.
너랑 나랑 베지밀 한 박스와 세 겹짜리 두루말이 휴지 사 들고 가서
부탁할 땐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
나이 80에 혼자 사는 노인 누가 집을 내주겠냐며
계속 눌러살게 해달라고 되레 부탁할 땐 언제고.”
“맞아. 근데 왜 잔금 날 내가 나가야 한다는 거야?
계약서는 이미 썼을 테고
명수가 잔금 받아서 할머니한테 바로 쏘면 되는 거잖니?
신입사원이라 해도 일하면서 충분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오죽 좋겠니?”
“왜 무슨 문제라도 생겼니?”
“그래.
명수한테 상황을 설명했더니 절대 그렇게 못 해주겠다는 거야.
지애비 승질 안 닮았다고 할까봐 걸핏하면 꽥 소리부터 지른다.
하마터면 귀청 떨어질 뻔했다니까.
후배가 옆에 있는데 창피해서 혼났다야.
지애비한테 배운 게 꼴랑 소리 지르는 하나밖에 더 있냐?
아니꼬와서 참. 어디 부탁할 덴 없고, 만만한 게 문숙이, 너다.”
“명수가 순한데 왜 그러지?”
“말도 마라. 남들한테 상냥하면 뭐하냐?
가을바람에 시들시들
무시래기마냥 말라가는 지어매 불쌍하지도 않는가 봐.”
“뭐? 니가 무시레기마냥 시들시들 마른다고?
날아가던 비둘기가 다 웃겠다.”
“시끄러워, 이것아. 마음이 버석거린다는 얘기지. 새겨들어라.
글구 나 이 일로 신경 써서 장염까지 와서 지금 5킬로는 거뜬히 빠졌어.
명수가 그 타임에 애를 먹일 줄 몰랐다.
올곧기로 말하면 명수 따라갈 사람 없지.
대충 넘어가자 해도 편법 같아서 싫다는 거야.
죽어도 안 된다는 것을 간신히 설득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뜨는 거 있지?”
“편법? 그게 뭐야? 한술 더 뜨는 건 뭐고?”
잠이 다 달아나고 말았다.
불친절한 건 내 아들,
네 아들 할 것 없이 도긴개긴이었다.
남한테 피해주는 것도 피해받는 것도 요즘 젊은이들은 싫어했다.
“아들 키워봤자 말짱 도루묵이다.
지돈 단돈 1원도 안 보태고
순전히 내 목돈 쏟아서 집 사줬는데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고래고래 소리부터 지르더라.
취직했다고 새 차 뽑아 주면 뭐하냐?
약효가 1주일이나 갔나?
아들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말,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닌가 봐.
완전 날강도가 따로 없다.
결혼이라도 하면 완전 남남 되겠어.
딸 없는 니나 나나 서러워서 어찌 산다니?”
걸핏하면 순덕은 별생각 없는 문숙을 끌고 들어갔다.
딸 없는 게 섭섭한 건 사실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들에 대한 집착도,
없는 딸에 대한 미련도 갖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문숙이였다.
없는 딸 타령하는, 울음 섞인 순덕의 말에는 과장이 한껏 배어 있었다.
지금 순덕은 지친 것이다.
문숙은 금요일 가족 모임이 생각났지만 찍소리 못하고,
너는 그날 서울에 없냐고, 지금은 어디냐고 물었다.
“내가 서울에 있으면 이렇게 안절부절하겠냐?
나 지금 여행 중이야. 헝가리.”
“헝가리? 누구랑 갔니?”
“후배랑 왔어.
후배 딸이 스튜어디스라서 비행기 티켓을 끊어줬어.
영어가 안 된다고 굳이 날 끌고 물어져서 못 이기는 체하고 왔지.
난 콩글리쉬는 좀 되잖니?
수틀리면 바디랭기지도 하면 되고.
유럽이 좋긴 좋다.
후배는 면세점에서 샤넬 크로스백도 딸 카드로 긁더라.
딸이 신용카드까지 줬대.
마음대로 쇼핑하라고.
기분이 꾸리꾸리해서 나도 하나 장만했다.
비록 내 카드로 긁었지만 말야.”
물욕이라면 순덕이 따라갈 자 없었다.
순덕은 자식 욕심도 세상 욕심도 하늘을 찔렀다.
“명수가 한술 더 뜨다니 무슨 말이야?”
“아니야.”
“말해.”
“명수 말도 틀린 건 아니잖니?”
“무슨 말인데 너답지 않게 뜸을 들이니?”
“그냥 속이 상했나 봐.”
“뭐가?”
“그만큼 청년들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얘기겠지.”
“말하기 불편하구나. 말하지 않아도 돼.”
“부모 세대가 편법을 쓰면 청년들이 그 뒷감당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국민연금도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즈이들 세대는 희망이 없대나 뭐래나.
결혼 안 하고 사는 걸 우리 책임으로 돌리는 눈치야.”
문숙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들 민준이한테서도 비슷한 말을 수없이 들었다.
가끔 문숙 아들 민준도 얘기 중에 노인 세대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어조에는 적대감까지 느껴져 마음이 불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가 들어가는 것에,
정확히 말하면 속수무책으로 누워서 오래 살게 될까봐 문숙은 두려웠다.
순덕의 딸 타령은 지난 연말에 동창회를 다녀온 후부터 심해졌다.
취직 턱으로 명수에게 사준 렉서스 하이브리드 신차를 타고
서해안 해변에 있는 펜션에 다다를 때까지는 좋았다.
조수석에 올라탄 순덕은 문숙이 운전하는 내내
다시마 젤리나 석류즙,
귤 등을 까서 문숙의 입에 넣어주며 자신도 먹었다.
“그냥 내 차 타고 가자니까. 명수 차 운전하는 거 조심스럽다.”
“문숙아,
너는 동창들 앞에 후질대로 후진 니차를 꼭 그렇게 끌고 가고 싶냐?
몸도 늙어 가는데 차까지 그래야 하냐고?
왕년에 부반장인 니가 꼭 그래야 하겠니?
우리가 니차를 타고 나타나면 동창들을 고문하는 거야.
넌 우리들의 찬란한 꿈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적어도 니가 세단쯤은 몰고 나타나 줘야 하지 않겠니?
이 맹꽁아. 지발 이참에 너도 좋은 차 뽑아라.
그래야 운전 못 하는 내가 필요할 때 얻어 타지.
차가 그 모양이니 내가 그 차를 타겠냐고.”
곧 죽어도 운전 면허를 따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문숙은 몸에 맞지도 않은 명수차를 몰았다.
면허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을 봐준 것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순덕이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part 2)
출발 직전에 순덕은 에르메스 가방에서
스마트 자동차 키를 꺼내 문숙에게 던지며 말했다.
“김 기사, 운전해.”
미리 보험을 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했지만
세단에 기스라도 날까 몹시 긴장했다.
문숙의 속도 모르고 순덕은 천하태평이었다.
김 기사를 둔 회장 사모님이라도 된 양 조수석에 앉아
비껴가는 바깥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폼나게 머플러를 날리며 빨대로 커피를 흡입하면서
입은 한시도 닫지 않았다.
갑자기 순덕은 가방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문숙이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먼길 님이 오시는가
갈숲에 이는 바람 그대 발자췰까
흐르는 물소리 님의 노래인가
내 마음 외로워 한 없이 떠돌고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만 차오네
백합화 꿈꾸는 들녘을 지나
달빛 먼길 내님이 오시는가
풀물에 베인 치마 끌고 오는 소리
꽃향기 헤치며 님이 오시는가
“재천이는 회장이니 벌써 도착했겠지?”
“아녀, 못 온대?”
“엥? 못 온다고? 왜?
회장이 빠지면 순덕이 너 무슨 재미로 간다니?”
“무슨 대상을 받으러 간다네.”
“대상? 지가 상 받을 일이 뭐가 있지?”
“야, 너 재천이 무시하지 마라.
울 재천이는 대상도 부족해.
내맴같아선 노벨 평화상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재천이만큼 인격이 좋은 애가 어딨냐?
잘 풀리지 않아서 수렁에 빠졌지만.”
“맞다, 재천이는 왜 그리 안 풀린다니?
초등학교 땐 걔네집이 제일 잘 나갔는데.
재천이는 피아노도 잘 쳤잖니.
걔네 마루에 놓여있던 피아노가 난 그렇게 부럽더라.”
“마음 같아서는 내가 수렁에서 건져주고 싶다.
하지만 지 마누라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답답허기만 허다.”
“순덕아, 첫사랑 동창 도와준다고 누가 손가락질 허겄냐?
둘이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통 크게 한 번 도와줘라.”
“니가 맹꽁이라 몰라서 그런다.
내가 재천이 도와주면 공짜로 도와주겄냐?
아예 데꼬와서 살겠다는 거지.”
“뭐? 멀쩡하게 살고 있는 재천이를 니가 뺏어온다고?
그런 말 농담으로도 하는 거 아니다.
나한테 말했으니 망정이지 앞으로 절대
그런 말은 다른 데 가서 입 밖에 내지 말어.”
“걱정마러. 내가 니 같은 줄 아냐?
난 계산적인 여자야. 절대 손해는 안 본다.
내 신조가 뭔 줄 아냐?”
“뭔데?”
“1 더하기 1은 10”
“왜 10이냐? 1 더하기 1은 2지.”
“그러니 문숙이 니가 그렇게 사는 거여.
내가 재천이 데려오면,
첫사랑 시너지효과라는 게 더해져서
10 이상의 아웃풋이 나오게 되어있어.”
“다 늙은 남자 데려와서 어쩔건데?
넌 그러고 싶냐?”
“재천이니까 그렇지.”
“머리 훌러덩 빠지고 배는 남산 만한 재천이가
아직도 니 눈엔 왕자로 보이냐?”
“아니, 황제로 보인다.”
“헐.”
“무슨 상을 받으러 갔을까? 봉사 활동 한다는 얘기 들은 것 같은데.”
“그러게. 니가 재천이한테 전화해 봐.”
“싫어.”
“왜?”
“여자는 자고로 품위가 있어야 해.
재천이 여친으로 남으려면 신비로 가야 해.”
“훗, 그럼 내가 전화해서 물어볼게.
대상 받는다면 우리가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꽃다발이라도 들고 가서 축하해 줘야지.”
“그러네. 내가 옆에 있는 거 눈치채지 못하게 전화해 봐.”
낭랑 18세가 된 순덕은 얼굴이 발그레졌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문숙이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멈췄다.
“여자 동창이 전화하면 마누라가 의심하지 않을까?”
“아냐, 재천이는 암 때나 전화 잘 받는대.”
“그래? 마누라 관리는 잘했다는 거야?”
“그렇지. 재천이가 마누라 옆에서 전화도 못받는 등신이면
내가 재천이를 좋아하겠냐? 재천이는 대인배자너.”
“인정. 재천이는 다르지.”
신호가 두 번 갔을 때 재천이 전화를 받았다.
어째 목소리는 힘이 없어 다 죽어가는 할배소리 같았다.
“나야, 김 문숙.”
“동창회는 잘 가고 있나?”
“지금 거의 다 와 가고 있지? 대상 받으러 간다며?
무슨 상이야. 알아야 우리가 축하를 해주지.”
“대상 받는다고? 내가? 누가 그런 말을 하지?”
“순덕이랑 통화했다며.
대상 받으러 가야 해서 동창회 못 나온다고.”
“아녀, 대상포진 걸려서 못 나간다고 했어.”
“대상포진? 면역력이 낮아졌나 보네.
잘 먹어야 한 대. 많이 아프다던데,
몸조심하고 빨리 낫기를 빌게.”
덜렁대는 순덕은 재천이 말을 잘못 들은 것이다.
“넌, 왜 그러냐? 재천이 말을 끝까지 잘 들어야지.”
“떨려서 그랬지.
난 재천이 앞에선 작아진다. 자꾸 쫄게 되.”
“누구에게나 천적은 있나 보네.
천하무적 안순덕도 재천이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거 보면.
넌 역시 부자야. 이 나이에 동심도 잃지 않았으니까.”
“동심? 동심 아녀, 이것아.”
“그럼, 뭐야?”
“사랑.”
“아이고, 그러니 동심이지.”
“동심 아니라니까. 난 재천이 마누라 죽으면 보쌈해서 데려올 거야.”
“어이쿠, 못 말려. 그럼 재천이 마누라가 죽기만 기다리겠네?”
“니가 나 대신 슬쩍 물어봐. 마누라 건강하냐고.”
“이젠 하다 하다 별난 부탁도 다한다야. 지금 전화해서 물어볼게.”
순덕은 기겁했다. 문숙이 전화할까 봐 두 손 빌며 사정했다.
“우리보다 재천이 마누라는 4살이나 젊잖아,
당연히 순덕이 너보다 건강하겠지.”
“하룻볕이 얼만데 4년 아래면 젊긴 젊다.”
가방에서 초코렛을 꺼내 문숙 입에 넣어주며 순덕이 말했다.
“그날 너랑 백화점 명품관에서 이 가방을 득템한 날,
내 기분이 어쨌는지 아니?”
“어쨌는데? 기분이 째졌니?”
“그 정도가 아냐. 난 미술관 관장이었던 홍라희가 된 기분이었어.”
“삼성전자 회장 부인?”
“응.”
“왜?”
“그녀가 들었던 가방과 거의 같은 레벨이거든. 넌 갖고 싶지 않니?”
“아니, 난 가벼운 천 가방이 좋아. 나이가 드니 무거운 건 사절해.”
“꿈을 꿔야 복이 떨어지는데 넌 소망도 없니?”
“있어, 나도 꿈이 있지.”
“그게 뭔데?”
“난 에르메스 없어도 돼.
에르메스가 엔비디아처럼 막 치솟는 주식도 아니니까.
내가 추구하는 삶은 진정한 자유야. 자유.”
순덕은 엔비디야가 뭐냐고 자신도 당장 엔비디아를 사겠다고,
얼마면 되냐고 물었다.
“그냥 해본 소리야. 비유법이잖아?”
1주에 900달러가 넘는 엔비디아를 굳이 동창회 가는 날
사겠다고 우기는 순덕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순덕의 물욕은 촉이고 직감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저만큼 걸어오는 순덕은 젊어 보였다.
분명 한두 달 전만 해도 정수리가 헹 했는데 아니었다.
머리숱이 문숙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순덕아, 너 이뻐졌다. 아주 젊어 보여. 이유가 뭐야?”
“사랑의 힘이다. 재천이 만나야 해서 정수리 문신했어.
이젠 헤어 쿠션 두드리지 않아도 된다. 너도 해.”
“아프지 않던?”
“아파서 죽을 뻔했다.”
“난 안 해. 생긴 대로 살다 죽을 거야.”
문숙은 알고 있었다.
순덕은 갓 추출한 아메리카노보다 믹스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순덕의 집에는 커피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캡슐 커피였고
꼭꼭 숨겨 놓은 믹스커피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마시는 커피였다.
대용량 믹스커피는 상부장 맨 위에 있었다.
가끔 순덕은 미운 7살 같았다.
고집부리고 앙탈을 부리는 꼴이 그랬다.
건드려봤자 결코 얻을 게 없는,
서로 관계만 서먹서먹해질 뿐인 일들이 가끔 일어났다.
아들 민준이 일찍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면
순덕이 같은 손녀를 얻었을 것이다.
순덕이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고집을 부릴 때
문숙은 순덕이를 미운 7살 손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50년 우정을 쌓아갔다.
순덕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차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마치 물먹는 하마같았다.
불록하게 튀어나온 똥배를 근육이라고 우기는
순덕이 문숙은 밉지 않았다.
나이 60에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순덕이 부럽기도 했다.
순덕의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었다.
순덕이 옆에 있으면 문숙은 할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순덕이보다 족히 50살은 더 늙어 보였다.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문숙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순덕이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하나, 문숙의 몸매였다.
순덕은 남 부러워할 것이 없었다.
순덕은 뚱뚱한 아기곰 푸우처럼 귀엽고 포근한 여자였다.
순덕은 휴게소마다 들러 배설하는 것도 거르지 않았다.
문숙이 선물한 크랜베리를 먹어도 효험이 없는 듯했다.
안성휴게소에 들러 순덕이 좋아하는 따뜻한 카페라떼와
소떡소떡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충청도는 문숙과 순덕의 고향이었다.
고향이 충청도인 개그우먼 이영자가 수년 전 휴게소 맛집을 소개한 후로
고속도로를 탈 때마다 둘은 소떡소떡을 샀다.
이영자처럼 케첩을 듬뿍 발라먹을 용기는 없었다.
순덕이 단백질 소시지를 빼먹으면 문숙은
다음에 나오는 탄수화물 가래떡을 빼먹었다.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며 소떡소떡을 번갈아 빼먹는 재미가 컸다.
식성이 다른 둘은 성격도 달랐지만 궁합은 찰떡같았다.
마치 소시지와 가래떡처럼.
묵직한 세단이라 그런지 흔들림 없는 안락한 승차감에 문숙은 반하고 말았다.
차가 달려도 컵홀더 속 커피는 잔잔했다. 풍경만 빠르게 지나갔다.
동창들은 척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놓으라는
명품브랜드 백을 들고 펜션에 나타났다. 하나같이 딸들이 사줬다고 했다.
순덕은 악어가죽으로 만든 히말라야 버킨 백을 탁자 옆에 슬그머니 놓았다.
자물쇠에 8캐럿 다아아몬드가 장식된 백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명품매장 앞에 두 시간 이상이나 줄 서서
겨우 득템한 한정판 핸드백이었다.
동행한 문숙은 눈팅만 하는 것도 지쳐서 눈이 십리나 쏙 들어갔다.
하지만 구경 한번 잘하고 왔다.
순덕은 아들 명수가 회갑 선물로 사줬다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맥주를 마시던 문숙은 순덕의 거짓말에 맥주를 바닥에 쏟았다.
동창들의 시선이 문숙에게로 쏠렸다.
문숙이 메고 온 남녀 공용 루이뷔똥 백백은 아들 것이었다.
수납공간이 좋고 로고가 마음에 들어
여행 갈 때마다 아들 민준이 몰래 문숙이 메고 다녔다.
스무 개를 훔쳐 중고 시장에 팔아도 표나지 않을 테니 마음만 먹으면 되었다.
아들 가방이야, 라고 문숙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동창회에서 돌아온 날부터였다.
순덕이 아들 명수 흉을 보고 딸 타령을 자꾸 하는 것은.
(part 3)
솔직히 말하면 문숙이나 순덕이나 자식 자랑할 일은 없었다.
갓 서른인 명수는 결혼 생각 1도 없는 백수였다.
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백수였다.
법륜스님 즉문즉설을 쫓아다닌 후부터
명수는 순덕이 외출한 사이 빨래도 하고
57평 아파트 청소도 하고 밥도 지어 놓았다.
완벽한 가정주부로 등극한 것이다.
“이것아, 누가 너 보고 이런 것 하래?
이럴 거면 뭐하러 힘들게 대학 공부했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대학 나왔어 봐라.
난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라며 등짝을 때려도 실실 웃기만 했다.
그런 명수가 최근에 백수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분가했다.
순덕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순덕의 인생에 벚꽃이 만발한 것이다.
문숙 아들은 명품 귀신이 붙었다.
검소한 문숙과 닮지 않았다.
월급을 탈 때마다 아들 민준은 해외 직구로 명품을 사들였다.
가방과 운동화, 명품 옷들로 가득 찬 방은 백화점 명품매장을 방불케 했다.
자기가 벌어 자가가 사는 데 할 말은 없었다.
결혼 생각 0도 없는 민준은 나가 살라고 해도
예, 라고 대답할 뿐 분가하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동창들 아들들은 결혼하지 않고
캥거루처럼 부모와 붙어 살았다.
여성의 가임기간을 15~49세로 볼 때
가임 여성 1명당 출산율은 0.778명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민준에게 명품 귀신은 떨어져나갈 것이다,
라고 문숙은 믿었다. 명품 귀신이 떨어지고 나면
그 자리에 한 여자가 붙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재작년에 순덕을 따라 법륜스님 즉문즉설에 갔다가
운 좋게 질문이 채택된 적이 있었다.
법륜스님은 말했다.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문숙은 탁 깨우쳤다. 아들 걱정이 싹 사라졌다.
시끄러웠던 속은 어느새 고요한 천국이 되었다.
문숙은 크리스천이었지만 감동해서 바구니에 시주를 넣었다.
법륜스님 책을 몇 권사서 들고 와 밤새 읽고 밑줄 그으며 또 읽었다.
“순덕아, 이상하네. 심애란 할머니가 2년 만기 됐는데도
더 살게 해달라고 사정한 거 아니었어?
근데 몇 달이 지났다고 다시 나간다는 거야?
명수가 새 직장 근처 제집으로 분가하겠대서
너랑 나랑 찾아간 게 몇 달 됐다고?
이사비용 넉넉히 드릴 테니
한 달 먼저 다른 집 구해서 나가 주십사고 부탁했을 때
할머니 딸이 와서 통사정했잖니.
너랑 나랑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돌아왔잖아.”
“그랬지. 그것 때문에 명수가 빡쳤잖니.
멀쩡한 제집 놔두고 오피스텔 얻어 나갔으니
발작 버튼이 발동될 만도 하지.
아무튼 할머니는 딸을 앞세워 자기 원하는 대로
일을 성사시켰으니 우리보다야 백번 낫지.
더 눌러사는 것도, 갑자기 나가는 것도 말야.
웬만하면 집주인이 들어와 살겠다고 하면
이사비용 받고 나가 줄 법도 한데
딸이 80대 엄마 나이 내세우니 우리가 물러섰잖니. ”
“그 딸이 또 연락왔던?”
“그래. 심애란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대.
집을 비워둔 지 보름쯤 되었다나 봐. 딸이 없었어봐라.
아들이 와서 그렇게 매달리겠냐고.
딸 없는 너와 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해.
각자도생만이 답이라구. 요즘 드럽게 오래 살잖어.”
“딸이 뭐 종신보험이라도 되냐? 딸이 있어도 없어도 마찬가지야.”
말끝마다 순덕은 없는 딸을 아쉬워하며 있는 아들 흉을 봤다.
“우리가 갔을 때는 건강해 보였는데?
80이란 나이가 안 믿어질 정도였는데. 딸이 모시고 갔나 보구나?”
“그런가 봐. 가만가만 통보하는데 할 말이 없더라구.
난 조용조용한 사람을 이겨본 적이 없다. 그냥 알았다고 했다.”
“뭔 소리야? 넌 늘 날 이기잖아?”
“너 같은 맹꽁이를 못 이기면 세상 어떻게 산다니. 고마워, 나한테 져 줘서.”
“난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게 이기는 거니까.”
“그나저나 너도 나도 딸이 없어 어쩐다니?”
“또 딸 타령이냐?”
“우린 지지리도 복도 없는 여자들이야.
남들 다 있는 딸이 우리에게는 없으니말야.
엄마가 쓰러졌다고 그 뒤치다꺼리를 다 하는 거 보니 부럽더라.
나 쓰러지면 명수는 날 요양병원에 쳐 박아두고 제 일하기 바쁠걸?”
“그게 뭐 어때서?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야.
제 일하면서 요양병원비 내는 건 어디 쉽니?”
“늙으면 딸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행 내내 절감했어.
후배는 폰이 얼마나 자주 울려대는지 부럽더라.
딸한테서 매일 카톡이 오더라구.
내 폰은 유럽에 온 후 울린 적이 없다.
명수는 잘 도착했냐는 문자 한 통 없다.
심애란 할머니딸만 봐두 그렇고.”
“할머니 딸? 어쨌는데?”
“얘는, 벌써 잊었니?
80 넘은 노인네 혼자 사는 거 전세 줄 수 없다고 했더니 매달렸잖아.
간사할 정도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살던 아파트 팔아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작은 집 얻으러 왔었잖아.”
“그랬지.”
“이번에는 그 딸이 또 이상한 조건을 내거는 거야.
전세보증금을 심애란 할머니한테 보내지 말고 세 자식 앞으로 보내달라는 거야.”
“어머! 그래도 되니?”
“말이 안 되지. 중개인까지 나서서 통사정하더라.
할머니를 기초수급자로 만들려고 한다나 뭐래나.”
“수락했니?”
“고놈의 기초수급자에 또 넘어갔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 해서는 안 될 거 같아서.”
“그랬구나. 근데 계약자가 심애란 할머닌데
보증금을 자식들 앞으로 보내도 되니? 위험하지 않을까?”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중개인도 사정하는 거겠지.
자식 셋도 오고 심애란할머니도 직접 와서 자필 서명을 써 주기로 했어.”
“그런데 나는 왜 나가야 하지?”
“심애란 할머니가 와서 직접 자필을 쓰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달라는 거지.
만약 글씨를 못 쓴다면 할머니 목소리를 녹음이라도 해서
나한테 보내주고.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다.
안심하라고 하지만 뒤탈이 생기면 안 되니까
니가 현장에 있어달라는 거지.”
목소리만 크고 덜렁덜렁한 것 같지만
순덕은 통이 크고 정도 많은 친구였다.
원칙을 벗어난 계약이라 꽤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명수가 부모 세대 운운하며
편법은 싫다고 한 말이 무엇인지 문숙은 이해했다.
올봄, 순덕은 불쑥 문숙을 찾아와 집 구경을 같이 가자고 했다.
명수가 새 직장에 들어간 후,
출퇴근 시간을 아낀다며 제집으로 분가해 나가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겨우 구한 직장,
어떻게 해서라도 잘 버티게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또 백수가 될까봐 순덕은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삼년 전,
순덕은 외아들 명수 명의로 작은 빌라 하나를 전세 끼고 샀다.
덜렁대는 순덕은 전세 만기가 다가올 때까지 집을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보지도 않고 부동산 중개인 말만 믿고 덜컥 집을 사 버린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순덕은 중개인보다는 문숙을 더 믿었다.
중개인은 문숙과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마주 보고 사는 사이였고
중개인은 좋은 물건이 나왔다며 다른 사람한테 주지 않고 문숙에게 귀띔했다.
덕분에 문숙 아들도 순덕 아들도 이십 대 후반에 대출 끼고 집을 장만했다.
빨간색이 돈을 불러온다면서 순덕은 명수 집을 사게 해 줘서 고맙다며
문숙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둘은 똑같은 브랜드의 빨간 트렌치코트를 사서 입었다.
그때는 좋았다. 부동산 시장이 활활 불타고 있었으니까.
지금 순덕이 까칠한 이유는 단 하나,
부동산 시장이 폭락한 때문이었다.
집을 팔고 싶은 사람은 줄을 섰고 사려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종부세를 낼 때마다 순덕은 앓는 소리를 냈다. 문숙은 덩달아 미안해졌다.
“심애란 할머니가 왜 쓰러지셨대? 어디로 이사 간대?”
“뇌졸중이래. 딸이 전화 왔더라.
이래서 내가 80 넘은 혼자 사는 노인네한테 전세 주기 싫었던 거야.
내 팔에 매달리며 사정했던 기억은 싹 잊었나 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면 혼자 살 형편이 못 될 텐데. 딸 집으로 갔대?”
“당연히 그랬겠지. 아들이 모셔갔을거 같니?”
“글쎄.”
심애란 할머니의 불행을 얘기하면서
문숙과 순덕은 그런 불행한 일이 그녀들에게 오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를 위로하며 통화를 마쳤다.
잔금 치르는 날,
문숙은 빨간 바바리 트렌치코트를 입고
약속 시간보다 일찍 부동산 사무실에 나갔다.
취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명수는 예민해 질대로 예민해 있었다.
11시로 약속했으나 명수는 11시 40분을 고집했다.
아마 점심시간을 택한 것 같았다.
치열한 직장생활에 한창 담금질 하고 있을 친구 아들이 짠했다.
소파에는 어디서 본 듯한 50대 여자가 핑크빛 자켓을 입고 앉아있었다.
짙은 화장 탓인지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자는 누군가와 자꾸 통화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다.
무언가 바쁜 일이 있는 듯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가만히 살펴보니 심애란 할머니 딸이었다.
“심애란 할머니와 아드님은 11시 40분에 맞춰서 오신다고 해요.”
중개인이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주며 문숙에게 말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을 때,
소파에 앉은 딸이 중개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장님. 보증금 중 2장은 제 통장에 넣어주시고요,
나머지는 엄마 통장에 넣어주세요.”
컴퓨터 앞에 앉아 서류를 출력하던 중개인이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큰 아드님도 여기에 오셔야 해요.
큰 아드님은 연락이 안 된다면서요?”
딸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헝가리에서 순덕이 전화한 일,
명수가 편법이라고 소리소리 지른 일등.
왜 이 자리에 자신이 나와야 했는지를 이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딸이 다시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문숙이 중개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약자인 심애란 할머니를 놔두고 자식들에게 따로따로 보내는 게 맞을까요?”
“저쪽 부동산에서도 오실 거예요.
할머니가 직접 자필 서명을 하기로 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반백 년을 살아오면서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 찍힌 일은
문숙에게도 순덕에게도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아쉬운 사람들이 쓰는 말이었다.
아쉬움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그냥 원칙대로 할 뿐이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믿었던 죄, 로 문숙과 순덕은 어두운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중개인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은 원칙에서도 한참 벗어난 반칙이었다.
문숙은 순덕이 말대로 따로 할머니 자필도 받고
녹음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문숙이 할 일이었다.
11시 40분이 되자 유리문을 밀고 심애란 할머니가 40대 막내아들과 함께 나타났다.
할머니는 두 달 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는 아무렇게나 짧게 깎아
쭈삣쭈삣 흰 머리가 여기저기 뻣쳐 있었다.
얼핏 남자 중학생처럼 보였다.
핏기 없는 얼굴과 초점 없는 눈동자는
할머니를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게 했다.
할머니는 잘 걷지 못했다. 아들이 부축해서 겨우 문숙 앞에 앉았다.
고운 얼굴은 간데없고 병색이 완연했다.
이 몰골로 일산에서 연신내까지 오다니 마음이 아팠다.
딸은 엉거주춤 일어서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새 세입자를 데리고 저쪽 부동산 중개인이 나타났다.
갓 서른을 넘긴 새 세입자 아가씨 옆에는 품위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집에서 입던 옷을 걸치고 나온 듯한 청년이 서 있었다.
긴 생머리를 한 아가씨는 치아교정 중인지 입에 교정기를 끼고 있었다.
청년의 옷에서는 담배 냄새가 짙게 풍겨 나왔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는 중에도 청년은
아가씨 옆에 찰싹 붙어서 긴 머리카락을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분명 결혼 안 한 아가씨 혼자 세 든다고 순덕이한테 들었다.
아가씨와 청년은 동거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문숙은 명수에게 잔금을 보냈으니 확인해 보라고 문자를 했다.
바로 받았다는 답이 왔다. 이제 명수는 할머니의 세 자녀,
연락되지 않는 큰아들,
할머니를 모시고 온 막내아들,
그리고 연분홍빛 자켓을 입고 소파에 앉아있는
딸 통장에 7천만 원씩,
심애란 할머니에게는 5천만 원을 나눠서 보내는 일만 남았다.
문숙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와
심애란 할머니 딸의 향수 냄새가 뒤섞여 속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긴 생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청년의 시커먼 손가락 움직임과
소파에 앉아있는 딸의 핑크빛 자켓이 겹친 이미지로 교차했다.
중개인이 프린터기에서 출력한 A4용지를 심애란 할머니 앞에 놓았다.
펜을 오른손에 그러쥔 할머니는 천천히 글자를 읽은 후
맨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 심애,
까지 썼을 때 갑자기 딸이 소파에서 팔딱 일어섰다.
할머니 옆으로 와서 앉더니 낮은 목소리로 문숙에게 말했다.
“일단 제 통장으로 보증금 전액을 보내달라고 집주인한테 전해주세요.”
문숙은 잘 못 알아들었다.
여자의 향수 냄새와 청년의 담배 냄새가 뒤섞여
퇴폐적인 어떤 분위기를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문숙 옆에 앉아있던 막내아들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나쁜 년아,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뭐? 니 통장으로 보내달라고? 엄마 쓰러지셔서
똥오줌 받아낼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돈을 니 통장으로 다 보내라고?
여기 있는 사람이 니 눈엔 다 허깨비로 보이지?”
막내아들의 고함에 사무실에 있던 일곱 사람은 일시에 얼어붙었다.
아니다. 얼어붙은 사람은 문숙뿐인지도 몰랐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할머니의 딸이 말했다.
“내가 나 좋을라고 이러는 거야?
엄마 기초수급자 만들고 이런저런 혜택 받으면 좋잖아.”
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기가 빠진 힘없는 목소리였다.
“시끄러워. 이년아, 엄마 아플 땐 모르는 척하더니 이제 와서 뭐?
어쩌고 저째? 돈을 니 통장에 다 보내라구?
이럴거면 이딴 짓 다 그만두고 엄마 통장으로 다 보내는 게 낫겠어.
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엄마 통장으로 보증금 다 보내주십시오.”
사무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거친 말과 숨소리가 오갔지만
두 사람을 뺀 나머지 여섯 사람은 침묵했다.
싸움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딸이 모기만 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만 내가 모시면 되잖아.”
옆에 있던 막내아들이 테이블을 오른 손바닥으로 탁, 쳤다.
두께 8센티가 넘는 테이블 유리가 금이 가더니
여기저기 파편이 튀었다.
막내아들의 오른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막내아들은 피 묻은 손으로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 한쪽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마치 인주를 묻힌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지장을 찍어 사인해 놓은 것 같았다.
문숙은 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수야, 심애란 할머니 통장으로 잔금 다 보내라. ”
바로 보냈다는 문자가 왔다.
뿌예진 눈으로 문숙은 명수의 문자를 간신히 읽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찾아올지 모르는 한편의 비극을 미리 본 듯했다.
정작 맞은편에 앉아있던 심애란 할머니는 눈만 꿈벅거릴 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계약은 끝났다. 막내아들은 할머니를 부축해 유리문을 밀었다.
할머니 다리가 흔들거렸다. 문숙은 보았다.
할머니의 헐렁한 바짓가랑이 한쪽이 점점 젖어 들어가는 것을.
곧이어 누런 액체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딸은 테이블에 그냥 앉아있었다. 중개인이 말했다.
“자식들이 싸우면 할머니는 더 나빠지셔요.”
부동산을 나오면서 문숙은 순덕에게 카톡을 했다.
‘일은 정상적으로 잘 되었어. 이제 딸 딸, 하지 말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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