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남문 (鎭南門)...
읍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 진남루(鎭南樓)다.-
-적대敵臺...
적의 남문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한 치성(雉城)이다. -
-해자 발굴 작업...
지금 남문 앞의 해자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 푸른 하늘과 미석(眉石)
성돌과 그 사이에 핀 들꽃이 자연적 아름다움과 어울려 돋보인다. -
- 하대상소(下大上小)...
하단의 큰 성돌과 기단석은 대부분이 다듬음 없는 원형의 돌들이다.-
- 쐐기돌...
해미읍성의 축성은 쐐기돌을 많이 끼운 것으로 유명하다.-
-'어서 와 !, 반기는 해미읍성...
관광지 답게 성안의 풍경이 너무나 예쁘고 평화롭다. -
- 아는지 모르는지 ...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참혹한 순교의 현장, 바로 옥사 앞의 회화나무다. -
- 동헌(東軒)...
충청도 병권의 지휘는 물론, 내치 현감의 임무를 겸한 곳이다. -
- 청허정(淸虛亭)...
동헌 옆에서 108계단을 오르면 병사들이 무예를 익히고 문객들은 시나 글을 지었던 곳이다. -
- 가볍게 동쪽 성벽에서 한 컷...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채취가 서린,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답사 : 2024.6.12.
지 정 : 사적 제116 호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32-2 )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이름만큼이나 예쁜 해미읍성(海美邑城)...
해미읍성(海美邑城)]은
태종 18년(1418)부터 세종 2년(1420)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의 인력을 차출하여 쌓은 충청병마절도사영성(忠淸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일반적으로 읍성은 주로 지방 행정 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는 것으로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이다. 때문에 해미읍성 역시 태종 초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축성과 더불어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 소재지가 되면서 자연스레 이 지역의 군사 중심, 행정중심의 고을이 되었다.
당시 이 성안의 근무 인원은 850 여명이나 되는 대부대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충청도 병권의 지휘소로써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포호(捕虎) 등의 내치의 임무도 맡는 등 이 지역 최고의 거점 고을로 230 여년간 그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후 왜구의 서해안 침입이 현격하게 줄어들면서 효종 2년(1651)에는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갔으며 그 바람에 절도사영의 역할은 끝나고 현감이 영(營)을 겸하는 겸영장(兼營將)의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성(城) 가운데 하나로 총 둘레 1,800m, 높이 5m 그리고 약 6만 여평의 면적을 가진 석성(石城)이다.
읍성의 문은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 진남루(鎭南樓)와 동문 잠양루(岑陽樓), 그리고 서문 지성루(枳城樓)가 있으며 북문은 암문 형식으로 문루가 없다. 수구(水口)는 서문의 남측에 인접허여 성벽 아래로 암거 형식으로 마련되었다.
해자는 본 성벽에서 대략 8m 쯤 간격을 두고 윗너비가 10-11m, 아랫너비 5m, 깊이 1.4-2.4m 의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북벽 쪽에 일부 남아있다. 또한 남문의 서측으로는 2개의 적대를 가진 치성이 길이 7.9m 너비 7.5-7.6m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또한 성 안에는
동헌을 비롯한 아사(衙舍) 19칸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이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거의 다 훼절 되었고, 그러나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발굴 복원 중이다.
먼저 1974년에는 동문, 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에는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 되었다.
성(城)은 해발 130m의 청허정(淸虛亭)이 있는 구릉지를 포함한 평지에 축성되었다. 성벽은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축조방법인 하대상석(下大上石)의 성돌 사용과 특히 성돌 사이에 쐐기돌을 많이 끼운 수법을 볼 수 있다. 안쪽은 모두 흙으로 내탁되었다.
한편 해미읍성은
축성 초기부터 방어용 탱자나무를 성(城) 둘레에 둘려 심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지성(枳城)’ 즉 ‘탱자성’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탱자성의 가시와 같은 아픔이라고나 할까. 이 읍성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1,000여명이나 처형시켰던 곳으로서,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성지로서도 유명하다.
이때 천주교인을 처형키 위한 옥사 앞 회화나무에는 당시 고문한 철사줄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해미읍성을 찾아가기는 아주 편하다.
우선 접근성 면에서 아주 편리하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해미IC를 나오면 바로 지척이다.
더불어 입장료, 주차장도 무료다. 읍성내부는 모두 잔디밭이다. 거기에다 ‘어서와 해미읍성은 처음이지?’ 라며 푸른 잔디밭 위의 대형 홍보판이 반기니 보는 순간 마음부터가 평온해진다. 긴다. 어딜 가든 쉬면서 답사하며 관람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가히 서산 최고의 여행지라 할만하다.
또한 특기할 만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장군이 한성훈련원봉사로 재직시, 서익(徐益)의 부당 인사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일종의 미운털 좌천으로 충청병마절도사 군관으로 발령 받았다. 바로 그 근무처가 충청병마절도사영성(忠淸兵馬節度使營城)인 지금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이다. 이곳에서 장군은 발포만호로 가기전까지 약 10개월간 (1579년 10월- 1580년 7월) 근무를 했다.
어디쯤에서 장군의 채취를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동헌이며, 객사 등을 한참이나 돌아보며 살폈으나 장군에 대한 사모의 내공이 약해서 그럴까. 그저 마음뿐이다.
첫댓글 많이 복원이 되어 보기가 좋습니다~
덕분에 공짜 구경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