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내가 이 수기를 쓸 수 있게 밑거름을 마련해 주신 부모님과, 우리 진주 모닥불 지역대 대장님들, 미국 파견 과정에서 우리를 지도해 주셨던 서은배 단장님, 전성환 대장님, 최주성 대장님, 뒤에서 많은 준비를 해주신 이해문 선생님, 그리고 같이 미국에 파견되어 15박 16일 동안 같이 지내왔던 친구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정의 시작
우리의 긴 여정(?)은, 7월 20일, 여의도 스카우트 회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동안 이 미국 잼버리 참가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고, 그 준비의 결실이 이날부터 시작되기에, 매우 흥분되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 간다는 그 뭔가 모를 '뿌듯함'과 즐거운 마음이 그런 불안감을 싹 물리쳤다.
회관 강당에 우리 파견단이 모두 모이고, 총재님과 대장님들이 오신 가운데, 우리는 파견식(?)을 하고, 인천 유스 호스텔로 향했다. 유스 호스텔에 도착해서, 우리는 방을 배정 받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모여서 덩더꿍 체조를 했다.
집에서 연습은 했지만, 순서도 헷갈리고, 동작도 틀렸다. 하지만, 우리 조(3조)가 제일 잘해서 우승 상품(?)으로 시계도 받았다.
다음날, 우리는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드디어 미국 행 비행기(United Airline, UA808)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워싱턴 도착)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의 생활(?)은 너무나 지루했다. 무려 11시간동안 비행기 안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갑갑하고, 또 심심했다. 또, 내 좌석은 날개 쪽이라 엔진소리 때문에 무지하게 시끄러웠다. 중간 중간 영화를 틀어 주었는데, 한국어로 더빙된 영화가 1편이었다. 골프와 관련된 영화인 것 같은데, 영화가 재미없었는지, 아님 내가 피곤해서 그런지 계속 잠이 왔다.
기내식은 두 번 나왔는데, 먹을 만 했지만, 계속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다.
장장 11시간을 날아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부쳤던 짐을 찾아, 다시 워싱턴 행 비행기에 짐을 부치고, 우리도 비행기를 갈아탔다. 또다시 긴 시간을 날아가야만 했다.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그곳 시간은 7월 21일, 새벽 1시였다. 그 날 밤은 공항에서 하얗게 밤을 지샜다. 그 동안 덩더꿍 체조도 연습하고, 내어준 패치를 단복에 달았다.
워싱턴 관광
다음날(7월 22일)아침 8시에, 관광버스가 왔다. 오늘 하루는 워싱턴 관광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버스에는 신기하게도 화장실이 있었다. 들어가 보지 않아서 어떤 구조로 이루어 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신기했다.
먼저 맥도날드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먹은 것을 셀프 버거 인데, 우둘투둘한 빵 사이에 에그 스크램블을 넣고, 고기를 넣고, 케첩이나 잼 같은 소스를 뿌린 후, 그대로 먹는 거였다. 다시 먹고싶은 맛은 아니었다. 메뉴 외에 다른 점들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했으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분리 수거하는 곳이 전혀 없는 것이다. 눈치를 봐서 사람들이 어디다 잔반(?)을 버리는지 보았더니, 그냥 그대로 쓰레기 통(모양은 우리나라 페스트푸드점의 그것과 같다.)에 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미쳤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했다.
아침을 먹은 후, 차를 타고 본격적인 워싱턴 관광을 시작했다. 먼저 본 것은, 조지 워싱턴 기념탑이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도중 보았다. 끝이 뾰족한 오벨리스크 양식의 탑인데, 가이드 아저씨의 말로는 세계에서 최고가는 대리석 탑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한국 전쟁 참전 용사 추모 동상이 있는 곳. 우리 역사 중 가장 참혹했던 때의 일부를 보는 것이라, 마음이 달랐다. 그곳에는 17구의 동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 전쟁에 참여한 UN 17개 국가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동상의 발 밑에는 미국에서 가장 거칠다는 향나무로 깔려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거친 지형을 표현한다고 한다. 동상 옆에는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에는 당시 전사자들의 얼굴을 그대로 비석에 조각하여 놓았다. "<FREEDOM IS NOT FREE>" 이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차를 조금 더 타고 가서, 우리는 링컨 기념관에 도착했다. 그 앞에는 '그림자 연못'이 있었는데, 하루 중 조지 워싱턴 기념탑과 링컨 동상의 그림자가 번갈아 비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링컨의 동상에는, 링컨의 의지가 잘 새겨져 있다. 또, 국회 의사당을 바라보고 있어, 감시자의 역할을 한다고도 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미국 보이스카웃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달고있는 대한민국 대표단 패치를 바꾸자고 아우성이었다.
'한정옥'이라는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고, 알링턴 국립묘지로 향했다. 이 곳은 터 자체가 풍수 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고 한다. 또, 이곳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 위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 곳에는 거의 다가 장군 묘이지만, 나라에 공헌한 일반인도 이 곳에 뭍일 수 있다고 한다. 매우 어마어마한 규모인데다,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워싱턴 시내가 한눈에 다 보인다.
이 다음 일정은 내가 메모를 제때 해 놓지 않아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 기억으로는 국회 의사당, 백악관, 스미소니언박물관, 제퍼슨 기념관 등을 다녀왔다.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로는, 워싱턴 내에서 국회 의사당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들었다.
스미소니언박물관은 대규모의 자연사 박물관으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여러 전시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대형 오징어이다. 우리가 본 것은 가장 작은 새끼라고 하는데, 진짜 큰 것은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고, 발견된다 하더라도 워낙에 커서 잡을 수도 없다고 한다. 우리가 본 것은 잡은 것이 아니라, 미리 죽어서 떠내려 온 것을 건진 것뿐이라고 한다.
후에 우리는, 다시 '한정옥'에 들려 갈비로 저녁을 해결하고, 호텔에 투숙함으로써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JAMBOREE의 시작
다음날(7월 23일), 우리는 다시 워싱턴 덜레스 공항으로 갔다. 그 곳에서 다른 보이스카웃과 만나, 잼버리장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일찍 와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오는 비행기가 늦어져, 일정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었다. 덕분에 또 반나절 이상을 공항에서 있게 되었고, 그동안 많은 놀이들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잼버리장에 도착했을 때, 벌써 밤은 깊어 있었다. 그 곳에서 각자의 Sub Camp를 배정 받고, 흩어졌다. 대장님과 나는 같은 Troop에 배정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우리가 우리의 Troop으로 찾아갔을 때, 그 곳 미국 대장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가 가기 전 미국 대원들이 벌써 텐트를 다 꾸며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짐만 풀고,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와서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간이 침대를 쳐 놓았기 때문에, 자는데 너무나 편했고, 또 기분이 좋았다(무엇보다 비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어서 좋았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고(7월 24일), 본격적인 잼버리가 시작되었다. 아침을 미국 대원들과 함께 먹었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영 어색했다. 말도 한마디 제대로 못 나누고, 자기 소개하는 것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차차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잼버리 첫날을 열었다.
JAMBOREE 과정활동
처음 한 3일은, '잼버리'라는 것에 적응을 못했기 때문에(변명…^^;;) 조금은 허비했다. 내가 처음 참가하는 잼버리이기 때문에, 과정활동이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랐다. 일단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는 했는데,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4,5일째 되는 날부터, 벌써 과정활동을 많이 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 많은 것을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Air Rifle Shooting, 양궁, Bikathlon(자전거 타고 가다가 중간에 사격), Trapshooting등이었다.
특히 Trapshooting은 우리나라에서는 해보고 싶어도 못해보는 거라 매우 신경을 써서 했다. 총이 굉장히 무거웠는데,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어깨에 전해지는 충격이란 장난이 아니었다. 사격하는 방법은, 우선 옆에서 조수가 총알을 끼워주면, 장전시키고 자세를 잡는다. 준비가 되면, 원반을 쏘는 사람에게 "Pull!!"이라고 외친다. 그럼 원반이 쏘아지고, 그 원반을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말은 쉽지만, 상당히 어렵고 요령이 필요한 활동(?)이다.
양궁은 보기에는 상당히 쉬워 보였지만, 실제로 활을 당겨보니, 매우 힘들었다.
ARMY ADVENTURE라는 곳도 가 보았는데, 이 곳은 말 그대로 미군들이 운영(?)하는 활동들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암벽 타기를 해 보았는데, 나는 아쉽게도 거의 다 올라가서 떨어지고 말았다. 벌칙으로 팔 굽혀 펴기 10회를 하고…(ㅠ.ㅠ). 그래도 재미있었다.
일요일-종교 행사
7월 29일 일요일에는 종교 행사가 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어서 우리 대원 모두가 가는 곳으로 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것도 영어 설교라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여하튼 행사가 끝나고, 우리는 단상(?)위로 올라가서 스카우트 가이드에 사인을 받고 내려 왔다. 종교 행사가 있는데도 아이러닉하게, 신께서 노하셨는지 비가 억수로 왔다. 처음엔 '이렇게 내리다 좀 있으면 그치겠지' 싶었는데, 어떻게 된 놈의 비가 하루 종일 퍼붓는 것이다. 날씨도 꿉꿉하고 과정활동도 못해서 짜증이 났지만, 할 일도 없고 해서 별수 없이 '체력 안배'를 위해 텐트에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잼버리의 일요일을 보냈다.
덩더꿍 체조
가장 자랑스러웠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덩더꿍 체조를 출 때,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좋았고, 춤이 모두 끝난 후에 사람들이 보내는 우렁찬 박수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처음 모여서 춤 연습을 할 때 느꼈던 뭔가 찝찝했던 기분이, 한번, 두번 공연을 할수록 점점 즐겁고, 자랑스러워 졌다. 우리가 공연 복장을 입고 지나갈 때마다, 처음에는 'Are you Japanese?' 라고 하던 사람들도 우리를 알아보고 'Oh, Korean!!'이라고 외쳤고, 그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정말 뿌듯했다.
그러나 한가지 자존심 상하는 점은, 일본의 전통 행사는 매일 아침에 나오는 '잼버리 신문'에 실렸으면서, 정작 우리 전통 체조는, 공연 장소와 시간, '태권 댄스' 라는 잘못된 이름만 실렸을 뿐, 사진 등은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9박 10일 동안 잼버리장에 있으면서, 그것이 가장 자존심 상하고, 불쾌했다.
ARENA SHOW
총 2번의 ARENA SHOW가 있었다. 7월 25일 첫 번째 SHOW가 있었는데, 잼버리 축하 공연(?)으로 '3 of HEARTS'라는 미국 여성 그룹이 노래를 불렀고, 어떤 남성 그룹도 왔고, '사라'라는 여자가 나와서 레이저 쇼를 했다는데, 아쉽게도 난 레이저 쇼는 보지 못했다……. 3 of HEARTS가 나와서 노래를 부른 후 남성그룹이 나오자 바로 자버렸는데, 내가 잘 동안 레이저 쇼를 하고 막을 내린 것이다……. 조금 씁쓸했다.
한가지 웃긴 점은, 3 of HEARS가 나올 때는 전 세계 보이스카웃의 반응이 매우 폭발적이었다. 특히 엉덩이를 흔드는(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적절한 표현이 없는 것 같다)춤을 출 때, 장내는 핵폭탄이 터지는 듯 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쉬가 연달아 터지고, 모두들 환호성을 했다. 그러나…… 그 이름 모를 남성그룹이 나오자마자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인간들이 분위기를 다시 밑바닥으로 가라앉힌 것이다. 그때 나 역시 지루함을 못 이겨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잠을 자는 도중 그 재미있다는 레이저 쇼가 진행된 것이다.
두 번째 ARENA SHOW는 7월 30일에 있었는데, 나에게는 꽤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내가 이때 우리의 태극기를 들고 무대 앞에 서 있었고, 또 무대 바로 앞에서 부시 대통령의 격려사(비록 비디오 녹화한 것이지만)를 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태극기를 든 것이 가장 자랑스러웠다.
친구들...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 그들과 난 가까스로 친해졌다. 처음 2일간은 서로 말도 잘 못 터고, 매우 어색했다. 우리가 외국인들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어려워하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대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깨고 나온 것은 나였다. 식사 도중, 내가 그들의 이름을 물었고, 내 이름도 소개해 주었다. 애들이 내 이름 부르는 것을 떠듬거리자, 난 내 이름을 'Jin'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 후부터 그들은 나를 'Jin'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때 알게된 친구들의 이름은 Josh, Jon, Scott, Goodwin(성이다...)그리고 미국 대장 Dan.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자신이 자기를 그렇게 부르라고 하였기 때문에 9박 10일 동안 쭉 "Dan!!" 이라 부르면서 지냈다. 영국 출신의 사람인데, 정말 친절하고 사람 좋고 여하튼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나는 사람은 이 넷이고, 정작 친하게 지낸 사람은 Jon 과 Goodwin 이다. Jon은 워낙에 사교성이 좋아 통성명을 하자마자 우리에게 한국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고, goodwin은 나랑 같이 과정활동 하러 나가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난 그 친구에게 내 덩더꿍 체조 옷도 주고, 기념 사진도 찍고, 여하튼 마지막 3일을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의 E-mail주소를 받아 놓았었는데, 그것을 바보 같이 관광 도중 잊어 버려서 그들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정말 아쉽다.
헤어질 때,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8월 1일 아침 5시에 잼버리 장을 떠나야 하는 일정으로 짜여 져 있기 때문에, 그 날 떠날 준비를 하고, 여러 가지 준비(별로 한 건 없지만...)를 하느라고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마지막을 그들과 같이 자자고 했지만, 우리 일행은 다른 곳에서 자야 했기에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너무나 아쉽다. 또, 그들은 나에게 " I love you!"라고 하며 아쉬움과 작별을 고하려 했지만, 바보 같이 나는 "I love you, too"나, "I'll miss you" 같은 말 한마디도 못 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너무나 미안하고, 아쉽다. 지금 와서 그들이 보고 싶어진다.
잼버리 장을 떠나며...
8월 1일, 아침 5시. 우리는 잼버리 장을 떠날 버스에 오르기 위해 차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나는, 9박 10일 동안 같이 지냈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단 한 명이라도 깨어 있어서, 내가 전날 그들에게 못한 작별 인사를 전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안고서….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깨어 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씁쓸한 미소만을 안은 체, 작별을 아쉬워하며 잼버리 장을 떠났다.
"Good-Bye! See you again!"
나이아가라
잼버리 장을 떠나온 우리 일행은, 워싱턴 공항으로 직행했다. 뉴욕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이다. 비행기를 타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버팔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가이드와 만나, 버스를 타고 본격적인 관광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버팔로. 버팔로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관광을 했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버팔로 시는 옛날 인디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버팔로'라는 물소가 많이 살았다. 이들은 인디언의 식량과 옷의 공급처가 되었기 때문에, 인디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후에 이 지방이 알려지면서 이 곳 이름을 '버팔로' 라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버팔로를 가로질러 '나이아가라 시'로 접어들었다. 이 곳에서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는데, 물가라서 그런지 다른 곳보다 훨씬 시원했다. 그러나 폭포 바로 위에 우리가 있었기에, 그다지 멋있는 풍경은 보지 못했다. 더 멋있는 것은 캐나다로 넘어가서 본다고 하였다.
중간에 우리는, 그 날 우리가 묵을 호텔로 가서 쉬었다. 그 곳에는 수영장도 있었는데, 먼저 방에 짐을 풀고, 수영장으로 갔다. 재미는 있었으나, 좀더 신사적인 매너를 키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모여서, 우리는 캐나다로 향했다. 캐나다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기 위해서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멋있었다.
우리는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굉장히 가깝게 다가가는 유람선을 탔다. 가까이서 보는 나이아가라 폭포는 정말 멋있었다. 아주 크고 웅장했다. 물안개가 햇살을 받아서 생긴 무지개도 더 없이 아름다웠다. 배를 타고 가면서 기념 촬영을 했는데, 물안개 때문에 폭포의 멋있는 모습이 잘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
폭포를 빠져 나온 후, 꽃시계를 보러 갔다. 꽃시계는 바늘 모양이 목발 모양이었는데, 이것은 장애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꽃시계 바로 밑 부분에는 연못이 있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동전을 던져서 소원을 빈다고 한다. 여기 던져진 동전은, 연못 청소 할때 모두 거두어서 장애인 기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참 훌륭한 생각인 것 같다.
후에 공원 같은데서 조금 쉬다가, 캐나다의 폭포 야경을 보러 갔다. 그 풍경은 매우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지각색의 조명을 비추어서 폭포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또, 그 조명이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색을 계속하여 바꿈으로써, 보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정말 장관이었다.
다시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갈 때, 중간에 밀입국 검사관이 올라 왔다. 그 후 우리를 보더니 "WOW! Boy Scout!"이라 하면서, 한국 여권 하나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친구의 미국 여권만 보더니, 그냥 통과 시켰다. 역시 미국에서는 '보이 스카우트' 라는 것을 굉장히 신뢰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쉬게 했다.
보스턴 관광
아침 일찍 우리는 버팔로 공항으로 향했다. 워싱턴 공항으로 다시 가기 위해서 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보스턴 공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워싱턴 공항으로 가서 보스턴 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 것이다.
워싱턴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했으나, 우리의 실수로 비행기를 놓쳐 1시간이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우리는 1시간 정도 늦게 보스턴에 도착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가이드 아저씨와 만나서, 차를 타고 본격적인 보스턴 관광을 하게 되었다.
보스턴은 아주 오래된 도시로, 미국이 처음 시작되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것에 '최초'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또, 고전미와 현재의 미가 조화된 도시이기도 하다.
처음 간 곳은 물에 떠 있을 수 있는 것 중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군함을 보았다. 시간은 많이 없고 줄은 길어서 내부는 보지 못했으나, 겉모습은 상당히 웅장했다.
그 옆에는 지금 미국에서 쓰는 구축함이 있었는데, 군함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신기한 것도 많았고, 인상깊었던 것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침실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 다음에 간 곳은 보스턴 COMMON. 이 곳은 옛날에 청교도들의 모임장소였고, 한 여자가 여성의 복장의 자유를 외친 곳이기도 하였다. 비록 백조는 없지만, 안에 넓은 백조의 호수가 있다.
'MFA'라는 미술 박물관에도 들렸었는데, 이 곳에서는 동·서양의 미술품을 전시해 놓았고, 고대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소, 다양한 형식의 미술품들이 있었다. 그 규모도 꽤 넓었으나, 우리가 관람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전시관들이 문을 닫아버려서 몇가지만 대충 둘러본 정도였다. 그렇기에 조금 아쉬웠다.
또, MIT 대학과 하버드 대학도 가 보았는데, MIT 보다는 하버드 대학이 더 기억에 남는다. 하버드 대학에는 미국 최초의, 최고의 대학답게 무려 500여 개의 건물이 있는 매우 넓은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있는 부분을 견학했다. 특히 거기서는 하버드 대에 다니고 있는 한국인을 만나게 되어 굉장히 기쁘고 뿌듯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호텔에 투숙하여 밤을 보냈다.
뉴욕 관광
호텔을 나와서, 우리는 차를 타고 약 4시간에 걸쳐서 뉴욕에 도착했다. '세계의 수도'라 불리는 뉴욕은 1624년 네덜란드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최초의 이름은 뉴 암스테르담 이였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다가 먼저 본 것은 할렘 이였다. 이 곳은 흑인 집단 거주지로, 원래는 백인 거주지였으나, 부동산이 몰락하면서 점차 흑인 거주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때 버려진 곳으로 취급했으나, 점차 좋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범죄율은 아직도 매우 높다.
할렘을 벗어나 뉴욕의 중심인 맨하탄으로 들어섰다. 이 곳에서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자유의 여신상, 유엔본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을 견학했으며, 이동 중 워싱턴 광장과 그리니치 빌리지를 보았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이며, 그 규모도 어마어마해서, 족히 4시간은 잡아야 자세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시 내용은 고대미술에서 현대미술까지 매우 다양했으며, 조금이라도 예술과 관련이 있는 것(예 : 갑옷, 무기 등..)이라면 거의 다 전시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1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아서 다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기부 한 것으로, 독립 100주년 기념이다. 배를 타고 관광을 했었는데,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는 동색이었으나, 산화에 의하여 지금의 초록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매우 웅장하고 멋있었다.
UN본부는 아슬아슬하게 문 닫기 거의 직전 견학을 했는데, 들어 갈 때 짐 검사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스카웃이라 그냥 지나가도 된다는 검사원의 허락으로 인해 바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 곳에는 AIDS의 희생양들을 대형 사진으로 전시 해 놓았고, 한 편에서는 총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정말 높았다. 엘리베이터도 1층 단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10층 단위로 금방금방 뛰어 올라갔다. 그 높은 빌딩 끝까지는 올라가 보지 못하고, 86층(확실히는 모르겠다)의 전망대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본 뉴욕 시내 모습은 장관이었다. 고층건물 숲을 이룬 모습이 꼭 밀림 같았다. 내가 이렇게 높이 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렇게 뉴욕 관광을 마치고, 호텔에 투숙했다. 이제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반가움과 이 곳 미국을 떠나는 아쉬움, 이 두가지 감정을 함께 느끼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귀국
이 날은 아침부터 굉장히 바빴다. 우리가 조금만 늦으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투명해지기 때문이었다. 탑승 20분 전 간신히 공항에 도착하였고, 10분만에 짐을 부쳤다. JFK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붙이고 탑승구까지 계속 뛰었는데, 다행히도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약 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와서, San Francisco공항에서 서울(인천)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남는 시간 동안 미국 현지에서 사는 마지막 기념품을 샀다.
San Francisco에서 인천까지는 11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 동안 영화도 보고, 잠도 자고 했지만 시간은 도무지 흐르지 않았다. 그렇게 지루하게 있다가, 기내 DUTY FREE SHOP에서 마지막 기념품을 산 후, 마지막 일기를 쓰고,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약 40분만 있으면 인천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나는 벗어 놓았던 단복을 입고, 공항에 내릴 준비를 했다. 곧 비행기는 공항에 착륙했고, 우리는 입국 수속을 마친 뒤 짐을 찾고 다시 모였다. 공항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하고, 그간의 추억을 가슴속에 새긴 채 모두 흩어졌다.
나는 다시 김포공항으로 이동하여, 진주행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긴 미국 여정을 마치며...
15박 16일……. 참 길고도 짧은 날들이었다. 한국 대표단으로써 미국에 떨어져서, 수많은 외국인들과 만나고, 잼버리 장에서 고생도 해 보고, 여러 가지 과정 활동도 해 보고, 미국인 친구도 사귀고, 말로만 듣던 유명한 관광지도 가보고……. 정말 많은 일들을 했다. 그 많은 일들과 함께, 많은 것들을 깨우치고, 반성했다. 또, 다시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왔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이며, 어떻게 해야 국가의 이름을 세계에 떨치는 지를 알게 되었고, 내 앞으로의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그런 추억들을 가슴에 안고 왔다.
나는 이 추억과 깨우침들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며, 장차 나아가 이것이 나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앞으로 우수한 보이 스카우트 대원이 되기 위하여, 우수한 나를 만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