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꼭대기에
최 화 웅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어요“ 이 정겨운 노래는 박목월 시인이 노랫말을 쓴 동요 <흰구름>이다. 우리는 이 동요를 듣고 노래하며 자랐다. 뒷동산에 올라 푸른 하늘에 연(鳶)을 띄우고 꿈을 날렸다. 학생 때나 나이 들어 객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 미루나무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와 손을 내밀었다. 미루나무가 서 있는 언덕이나 강나루 정경을 멀리서 바라보며 다가서는 가슴은 언제나 뛰었다. 하늘을 향한 희망, 기다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백조는 물 위에 떠 있어야 우아하듯 홀로 선 언덕 위의 미루나무는 고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의 미루나무는 풍요로운 치마폭 같다.
어린 날 봄이 오면 버들피리 꺾어 불었다. 그러나 아직껏 버드나무와 포플러, 양버들과 미루나무, 그리고 미루나무와 양버들의 잡종인 이태리포플라를 구분하지 못한다. 미류(美柳)나무의 표준말이 미루나무라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미루나무는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활엽수다. 미국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아름다울 미(美)자에 버들 류(柳)자를 써서 미류나무라고 쓰고 불렀다. 북아메리카대륙이 원산지인 미루나무의 학명은 Populus deltoides MARSH이다. 높이 30m에 지름이 1m까지 자라서 지난 5, 60년대에는 속성식목을 위해 권장한 수종이다. 민둥산의 식목이나 가로수로 많이 심었으나 수명이 짧고 태풍에 약하며 꽃가루가 날려 땔감으로 베어져나갔다. 국도 따라 근교로 달리는 날 길섶에서 만나는 늙은 미루나무는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여름 한철 미루나무의 잎춤이 일품이고 삭풍 부는 겨울이면 하늘의 아기별들이 미루나무로 내려와 까치가족들을 보살피는 정경이 천국의 동화다. 추울 때는 갈 곳 없는 비둘기까지 단칸방에서 함께 살며 체온을 나눈다. 미루나무는 생김새가 헌칠한 키에 치마폭을 두른 후덕한 풍체다. 내가 미루나무를 다른 나무와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잎이다. 가만히 지켜보라. 다른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흔들린다. 그러나 미루나무 잎은 바람이 전혀 없는 날에도 쉼 없이 팔랑거리며 흔든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6년 8월 18일. 내가 방송기자로 입사한지 만 일 년이 되는 올챙이기자 때의 일이었다. 경기도 파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에서 시야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감독하던 미군장교 2명이 북괴군의 도끼에 맞아 숨진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가 된 나무는 25년생 15m의 미루나무로 앞을 가려 가지치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는 곧 전쟁이 날 것처럼 나라안팎이 야단들이었다. 한국전 참전 장교 출신으로 미국 워싱턴 포스트 기자를 지낸 돈 오버도퍼씨는 회고록에서 “그때처럼 한반도에 전면전의 위험이 고조됐던 적은 없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나는 미루나무의 잎춤을 보고서야 비로소 미루나무임을 구분한다. 하늘을 향한 미루나무의 잎춤은 대단하다. 미루나무의 가지는 원줄기를 따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세워놓은 붓대 같다. 미루나무 잎은 겉으로는 광택이 나고 속은 무광의 회백색이다. 멀리서 미루나무의 잎이 속을 보여주며 팔랑거리듯 흔드는 모습은 가히 현란하고 눈부시다. 양버들과 비슷하지만 잎의 길이가 너비보다 긴 것이 다르고 가지는 사방으로 퍼진다. ‘날 좀 보소’하며 춤추는 미루나무의 잎춤이 벌이는 군무는 캉캉이나 파리의 리도쇼 못지 않다.
미희들이 치마를 들어올리고 속옷을 허리춤까지 걷어 올려 눈처럼 하얀 허벅지와 엉덩이를 들어냈다. 여름이면 하늘을 향한 가지들이 미희들처럼 춤춘다. 낙엽이 져야 앙상한 가지에 군데군데 까치집이 나타난다. 늦가을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집은 삭막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는다. 어느 새보다 까치는 사람과 가깝다. 설날을 앞둔 인사와 반가운 손님의 방문을 미리 알린다. 어느 외로운 시인이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집을 위한 서시(序詩)를 쓰다말고 그리운 첫사랑에게 한 장의 엽서부터 그리게 한다. 어스름 저녁때나 비가 내리려고 날이 어두워지면 까치부부는 길목으로 나서서 마실 나간 식구를 열심히 불러들인다. 집으로 돌아오는 까치가족들의 대화가 정겹다. 미루나무는 말없이 길을 안내한다. 집안의 가족들에게 자식의 귀향을 전하는 들뜬 목소리가 솔바람을 타고 울러 퍼지면 마을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사랑이 울린다. 한 그루 미루나무의 기억이 사랑을 그리워하는 삶의 이야기가 된다.
미루나무 한 그루
김 시 천
하늘 푸른 날
미루나무 한 그루
강변에 서 있다
저도 그렇게 서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보다
아름다운 꿈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