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순 유래 및 연혁
영순면은 신라때에는 영순부곡(영순부곡) 또는 임하촌(임하촌)이라 호칭되다가
고려 원종(원종 : 1260년경)때에 태금취(태금취)라는 장군(장군)이 임하촌 태생으로 몽고병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부곡을 높여 영순현(영순현)이라 하고 상주에 예속되었다가
조선초기에 상주목(상주목) 영순면으로 호칭되었으며, 고종(고종) 32년 (1895)에 한때 용궁현(용궁현)의 서면 (서면)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궁현 서면 일부와 함창현(함창현)의 동면(동면)의 일부가 합병되어 오늘날 영순면이 됨.
- 영순면사무소 홈페이지에서
영순면 <자그네∙장안내 ,뒷못안, 정자무림(停子茂林), 버구리∙법동(法洞) ... >
[지명유래]
<금림리(錦林里)>
- 자그네∙장안내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장안사(長安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마을 명칭을 장안내라고 부르던 것이 변음되어 자그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천마산(天馬山) 기슭에 자리잡은 이 마을의 모습이 말안장과 흡사하다고 하여 자그네라고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 뒷못안
이곳에는 큰못이 있고 못 옆에 세 갈래 길이 나 있는데 옛날부터 이곳을 지나는 행인이 쉬어 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주막도 있고 주막을 중심으로 10여가구의 인가로 구성된 취락이다. 현재 금림2리(錦林2里) 마을회관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
- 정자무림(停子茂林)
사근리와 금림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서 사근과 금림을 구별하기 위하여 행정구역 변경시 정자무림이라 호칭하게 되었으며 현재 정자동 맞은 편에 있는 20여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이나 자그네 뒷못 앞에 양수시설이 되어 있어 한해 없는 마을이 되었다.
- 정자동(停子洞)
자그네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 이곳에 큰 정자가 있어 동네 이름이 정자 혹은 정자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옛 정자의 자취는 찾아 볼 수 없고 천마산(天馬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동네로서 정자동이란 이름만 남아 있다.
- 버구리∙법동(法洞)
천마산 밑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지형이 말죽통과 같이 생겼다 하여 버금치로 불려지다가 이것이 변음되어 버구리 또는 법동으로 명명되었고 현재는 장흥임씨가 중심이 된 10여가구가 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탑골(搭谷)
현재 금림 1리(錦林1里)로 과거에 장안사라는 사찰과 탑이 이 골짜기에 있었다고 하여 탑골이라 칭했다 한다.
- 미급(美及)
마을의 형태가 아름답게 펼쳐 있다 하여 미급이라 불려졌다 한다.
<김룡리(金龍里)>
- 댓골(竹谷)
고려말(1390년경)의 대유인 역동 우탁(易東寓倬)선생의 7대손인 영파 우이무(泳波禹以茂) 중추부사(中樞附事)가 도연(道淵)에서 이주해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당시마을 뒷산에 대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죽곡 또는 죽동으로 불리어 오다가 댓골로 칭하게 되었다. 김용리를 대표하는 마을로 현재는 김룡(金龍)으로 통한다.
- 앳가매
김룡에서 동남쪽으로 1㎞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옛날에는 이곳에 아이의 무덤(애창)이 많은 공동묘지였으므로 이곳을 앳가매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위생처리장과 도축장이 있는 곳이다.
- 새동네
해방이후에 김룡에서 양재봉(梁在鳳)이란 분이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본동에서 떨어져 나가 새로 생겼다 하여 새동네라 부르게 되었다. 김룡에서 남동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달지리(達池里)>
- 새미∙삼인(三仁)
1592년경 진주강씨가 구여동(龜餘洞;뒷날 폐동됨)에서 이곳에 입주하였을 때 마을 뒷산 숲속에 새들이 많이 모여 와서 잠잔다고 하여 새미라 호칭하였다. 그 후 선조때 강씨 3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맏이는 진사, 둘째는 양산군수, 셋째는 정선군수를 역임하였다. 경상감사가 용궁현에 순시차 들렀을 때 이 3형제가 배알하여 새미에 사는 누구라고 한즉 감사께서 새미라는 이름보다 셋 어진 선비가 난 곳이니 마을 이름을 삼인(三仁)이라고 함이 어떠냐 해서 그 뒤부터 삼인(三仁)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선성김씨통찬공파가 많이 살고 있다.
- 한밤(大栗)
1565년경 이덕래(李德來)라는 선비가 개척한 마을로서 당시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 한밤(大栗)이라고 불렀으며 이 마을 뒤쪽에 왕제산(王帝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 산꼭대기에서 큰 장수가 나올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왜군이 이 사실을 알고 산혈을 잘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지명은 달지 2리(達池 2里)이다.
- 달늪∙도방(都房)
산북방면과 안동방면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만나서 넓다란 늪지대를 형성하였는데 달봉산 아래의 늪이라 하여 달늪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옛날 낙동강 소금 배가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와서 문경 예천 지방에 소금을 공급하였으며 또 이곳 갯벌에서 생산되는 무우, 배추 등이 유명하여 널리 각 지방으로 반출되는 등 농산물 집산지로 촌락을 이룬 곳이다.
<말응리(末應里)>
- 먼갓∙원지(遠枝)
고려말 이곳에 원호지(遠糊池)가 있어 원호(遠湖)라 하던 것을 1450년경 좌참찬(左參贊) 홍귀달(洪貴達)선생이 시묘차 이곳에 와 정착하면서 먼 훗날까지 자손이 번창하 길 바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원지(遠枝)라고 고쳤는데 오늘날은 먼 갓으로 불려지고 있다.
- 괴파골∙괴동(槐洞)
조선말기 미양공(微陽公) 홍우주(洪禹疇)선생이 개척한 마을로서 당시 마을 주변에 괴목(槐木)이 울창하였다 하여 괴동이라 명명한 것이 후에 괴파골로 부르게 되었다.
-싱글∙생글∙성계(聖溪)
옛날 마을 앞에 (약 200여년전) 큰 성당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하던 성직자가 이곳의 맑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수도하였다 해서 성계라 하던 곳이 현재는 싱글로 부르고 있다.
- 물탕거리
마을 앞산 중턱에 약수가 나오는 물탕이 있어서 물탕거리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 약수탕에는 천년 묵은 지네가 있어 닭고기를 먹고 가면 사람이 금방 죽는다고 하고 또 약수를 먹어서 효험을 보자면 1주일쯤 전에 목욕재계한 연후라야 한다는 등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1945년경에는 약수를 찾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벙어리는 말을 하게 하고 나환자는 깨끗이 병을 고쳤다고도 한다.
- 솔안마∙송내(松內)
이 마을 둘레에 소나무가 무성하였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솔안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안동권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상부상조하고 예속상교하는 전통을 중히 여기는 마을이다.
- 말바윗골
말과 같은 바위가 있어 그렇게 지명을 붙였던 곳으로 이 바위 밑을 영강이 흘러 깊은소(沼)를 이루어 예로부터 낚시터로 이름이 났으나 1970년 대구 점촌간 풍양선 도로확장 공사 때 이 바위를 없애 버렸다.
<사근리(沙斤里)>
- 추촌(株村)
1392년경 추실(秋實)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추촌이라 칭하였다. 현재 10여가구의 대부분이 추씨(秋氏) 일족이다.
-진촌(陳村)
추촌과 산등성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사근절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추실이라는 사람이 추촌에 정착한 이 후 여양(驪陽) 진씨(陳氏)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진촌이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 진씨들이 10여가구 거주하고 있다.
- 사근절∙사근(似斤)
이 마을 뒷산에 사근절이 있었기 때문에 사근절이라 불리어지게 된 것이며, 절이 없어진 오늘날도 그대로 불리고 있으며 안동권씨 100여가구가 대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엄촌(嚴村)
사근절의 남동쪽 건너 마을로 100여년 전 영월인 엄사현(嚴師鉉)이라는 사람이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엄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영월 엄씨 10여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무림(茂林)
무림은 신라와 고려 및 조선중기까지 무림부곡이 있던 곳이다. 조선 세종 때의 지리지에도 무림부곡에는 손씨가 살고 있다고 했다. 1655년경 용궁현감의 손자인 아주(鴉州) 신씨(申氏 휘 각(諱恪)이라는 분이 이곳을 개척할 당시 주변이 무성한 숲으로 둘러 싸여 있어 지명을 무림이라 하였으며 아주신씨와 개성고씨 일족이 살고 있다. 이곳 무림정사(茂林停寺)는 북헌 신섬(北軒申暹)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재사이다.
- 남산마
무림의 남쪽 산밑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남산마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부터 150여년전 무림에 거주하던 아주 신씨들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으며 현재 1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방고개∙밤고개∙율현(栗縣)
1655년경 용궁 현감의 손자인 아주신씨 휘각(諱恪)이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방(榜)을 붙였던 곳이라고 하여 방고개라 하였다는 설(說)과 이곳에 밤나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하여 밤고개 라고 하였다두 설이 전하고 있다.
- 서낭댕이
옛날 이곳에 성황당을 짓고 무림동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던 곳이라고 하여 서낭댕이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경주김씨 1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 새터(新基)
이곳에 한 길이 생기고 난 뒤 이 길을 중심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샛터라 불려지고 있으며 현재는 벽진(碧珍)이씨 10여가구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 재궁마(齎宮村)
1850년경에 개성고씨 가문에서 재사(齋舍)를 두 동 건립한 후 재사 관리인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재궁마라는 마을 이름이 붙게 된 곳이다.
<오룡리>
- 오룡골(五龍谷)
중국 송나라 사람 여선촌(余善寸)의 후손 여현경(余玄景)이 고려국으로 귀화하며 의태군(宜泰君)을 수봉(受封)하고 의춘(宜春), 의령(宜寧)을 식읍으로 하사 받아 본관을 의령으로 하였다. 그후 조선 태종때(1400~1418) 여덕윤(余德潤)이란 자가 용궁현 관내로 이거(移居)하여 그의 아들 6형제 가운데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니 이를 다섯 마리의 용에 비유하여 마을 이름을 오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분통골∙분태골(分台谷)∙분토골(紛土谷)
마을 뒷산에 나는 흙이 분 같이 하얗게 보여서 분토골이라 하던 것이 어느새 분통골로 변음되었다. 현재 김해김씨 5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 새마∙새동네
1930년대 농촌 자력 갱생촌으로 지정되어 영농능력이 있는 자에게 주택을 지어 주고 농토도 제공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하여 이름을 새마 또는 새마을로 부르게 된 곳이다.
<왕태리(王泰里)>
- 왕태골(王泰谷)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파천할 때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다고 하여 왕태(王泰)라 하였으나 그 당시 지명에 임금 왕자(王子)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어 왕자(王子)를 써서 왕태골이라 칭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길가왕태
1545년경 고사원(高士原)이라는 선비가 이곳을 개척할 당시에 길가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길가왕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보밑∙저현(底峴)
1550년경에 고사원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뒤쪽에 큰 보가 있어 보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며 현재 개성고씨가 50여가구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이산마∙구음(九音)
1889년경 고은(高銀)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영주하게 되었을 때 밤마다 이상한 아홉가지 소리가 들렸다 하여 이 마을을 이산마 또는 구음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 개성고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율곡리(栗谷里)>
- 밤실∙율곡(栗谷)
1470년경 성종때 대제학(大提學)이었던 허백정 홍귀달선생이 시묘(侍墓)차 낙향하여 학문을 즐기며 자연을 벗삼아 지낼 무렵에 이곳에 밤나무가 많다 하여 밤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 동무지∙동산(東山)
본동의 동산 밑에 위치했다고 해서 동산(東山)이라고 불렀던 것이 변음되어 동무지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도덕과 윤리를 숭상하며 전통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앞장섰던 홍씨들의 집성촌이다.
- 새갓(新技)
고려시대 때 큰 홍수가 나서 주위가 온통 물에 잠겨 나무들이 죽었는데 이곳 나무에서 만 새 가지가 돋아났다고 해서 지명을 새갓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응골∙어헌곡(漁軒谷)
옛날 이곳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영강에 물이 많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어부들이 이곳에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하여 어헌곡이라 하였고 지금은 응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딩골∙전촌(錢村)
옛날 전씨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 하여 전촌(錢村) 또는 돈골로 불리던 것이 딩골로 변음되었다. 현재 전씨는 한 가구도 없고 타성(他姓)인 경주손씨, 월성이씨, 해주오씨 등 20여가구가 살고 있다.
- 오랫골∙애경당(愛敬堂)
조선 성종때 문광공(匡公) 홍귀달선생이 시묘살이 하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부모의 신위(神位)를 모시던 사당의 이름이 애경당(愛敬堂)이어서 한때는 동네 이름도 사당 명칭을 따서 애경당이라고 불렀으나 근래에 와서는 오랫(래)골이라 부르고 있다.
- 지장골(地臟谷)
고려시대 때 이곳에 사찰과 지장보살상이 있었다고 하여 그때부터 지장골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는 사찰과 지장보살상을 찾아 볼 수 없다. 일설에는 못이 있어 지당(池塘)골이라 하던 것이 지장골이 되었다고 한다.
<의곡리(蟻谷里)>
- 갬실∙개미실(蟻谷)
1575년경 남원양씨의 양응해(梁應海)라는 사람이 이곳을 개척하여 정착하게 되었을때 지형이 개미의 혈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갬실이라 명명하게 되었고 현재는 남원양씨와 경주김씨가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영순면의 중심 마을이다.
- 감골(橄谷)
김해김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을 때 가가호호에 감나무를 심었고 심지어 밭둑에도 감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감골이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이곳에서 감나무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 무라이(退安)
지금으로부터 170여년전 전씨(錢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 할 당시에 이 마을이 영강보다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마을 전체가 물에 갇혔다가 비가 멈추면 물이 빠져나갔다 하여 물안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후 안동권씨 초은(樵隱) 권병희(權병희)선생이 이곳에 이주하여 다른 성씨(姓氏)와 대동단결 하여 편안히 잘 살아 보자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퇴안(退安)으로 개칭하고 서당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안동권씨외에 순천박씨, 상산김씨 등 여러성씨가 모여 생활하고 있다.
- 도연(道淵)
옛날에는 마을 앞에 큰 못이 있었는데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이 못이 매몰되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길이 만들어 졌다고 하여 도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부림(缶林) 홍씨(洪氏) 일족으로서 이곳에 세워진 청산재는 조선 연산군때 교리(校理)였던 홍우암(洪寓菴)선생의 외손들이 선생의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 정골(精谷)
현재의 의곡 3리로 골짜기가 너무 조용하고 정적만 울린다고 하여 정골이라 하였다한다.
<이목리(이목리)>
- 금성개∙금포
조선 숙종때 (약 1700년경) 설월당(雪月堂) 강주식(姜周軾)선생이 삼인(三仁:현 달지리)에서 출생하여 부친을 따라 고갯길을 넘어와 이곳에 정착하여 서당을 설립하여 후진육성과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마을 앞 강변에 검은 바위가 보였으므로 이곳 지명을 금포라 하였으나 그후 금성개라고도 불려졌다고 한다.
- 백포(白浦)
조선 명종때(1550년대) 능성(綾城) 구씨(具氏)백담(栢潭)선생의 아랫대인 구선윤(具善胤)이란 사람이 안동에서 이곳 낙동강변으로 정착하였는데 강변에 커다란 흰 바위가 있어서 지명을 백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강제선생(姜濟先生)의 정자(白石停)가 있으며 현재는 능성 구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꽃개(花浦)∙하풍진(河豊津)
금포와 백포사이에 있는 낙동강 나룻터로 봄이면 강변 산에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경관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꽃이 만발한 갯벌, 즉 화포∙꽃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강 건너는 예천군 풍양면이다.
<포내리(浦內里)>
- 갠∙개안∙포내(浦內)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청주(淸州) 한씨(韓氏(日設 에는 平海黃氏)일족이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갯벌 안쪽에 취락을 형성하였다 하여 개안(줄여서 갠)이라부르게 된 것이 현재의 포내 1리이며 갯벌안 골짜기에 형성된 취락이 현재의 포내 2리이다. 해주 최씨(海州崔氏)의 집성촌이다.
- 골마
청주한씨가 마을을 개척한 후 해주최씨가 이 마을에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창하였고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골마라고 불렀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평해황씨, 해주최씨, 연주현씨등 1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문경시청 홈페이지에서